• Title/Summary/Keyword: 협력만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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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the Quality of Life of Elderly People with Dementia and the Environmental Factor of Facilities (치매노인의 삶의 질과 시설 환경 요인에 관한 연구)

  • Park, Sejeong;Kim, Hangon
    • 한국노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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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v.29 no.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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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61-1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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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There have lately been a variety of social issues in our society due to rapid social changes. Specifically, how to approach elderly people who suffer from dementia is never an easy task, and few in-depth studies have ever focused on their quality of life due to that.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examine the quality of life of elderly people with dementia an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ir quality of life and the environments of facilities for them in an attempt to lay the foundation for the development of compatible programs tailored to the environments of the facilities and for relevant policy setting. It's ultimately meant to improve the quality of life of the elderly with dementia and the environments of facilities for them. The subjects in this study were elderly people with dementia who were housed in senior residential and medical welfare facilities in Daegu and Gyeongsangbukdo. The collected data were analyzed with a SPSS 12.0 program, and frequency analysis, cross-tabs and multiple logistic regression analysis were utilized. As a result, facility environments were identified as one of the variables that had a significant impact on the quality of life of the elderly people with dementia. There are some suggestions about how to boost their quality of life: First, good environments should be prepared in consideration of the characteristics of elderly people with dementia in order for themto be satisfied with their own quality of life, and the way of looking at their potentials should be changed. Second, it's found that main caregivers affected the quality of life of the elderly people with dementia, and the kind of programs that focus on the improvement of the relationship between elderly people with dementia and their main caregivers is required. Third, there should be a change in the environments of the facilities. The facilities should be well equipped to successfully respond to the symptoms of elderly people with dementia. To redress their poor accessibility to the facilities, infrastructure involving nursing homes and professional personnels should be built by utilizing the Internet, and the facilities and local community should make concerted efforts to provide quality care to elderly people in want of it.

Problems of Environmental Pollution (환경오염의 세계적인 경향)

  • 송인현
    • Proceedings of the KOR-BRONCHOESO Con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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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2.03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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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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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2
  • 생활수준이 낮은 단계에 있어서는 우선 식량에 대한 수요가 강하다. 인간의 욕구가 만족스럽게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 제일 강하게 발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점차 과학기술과 산업과 경제가 발전하여 성장과정에 오르게 되고 소득수준도 향상하게 되면 시장기구를 통해서 구입 할 수 있는 개인의 물적 소비재에 대해서는 점차 충족하게 되며 식량이외에도 의복, 전기기구 및 일용생활용품, 자동차 등에 이르기까지 더욱 고차원의 소비재가 보급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며는 사람의 욕구는 사적 재물이나 물적 수요에서 점진적으로 공공재나 또는 질적 수요(주택, 생활환경 등)의 방향으로 움직이게 되는 것으로써 여기에 환경오염 또는 공해문제에 대하여 의식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더욱이 문제점이 되는 것은 소득 수준의 향상 과정이란 그 자체가 환경오염의 커다란 요인이라는 점이며 자동차의 급격한 보급과 생활의 편의성을 구하여 집중되는 도시인구의 집적, 높은 소득을 보장하기 위한 생산성 높은 중화학공업의 발전 등등은 그 자체가 환경권이란 사람이 요구하는 고차원의 권리를 침해하는 직접적인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환경오염이나 공해문제에 대한 세계적인 논의는 이미 시작된 지 오래이지만 현재는 우리의 건강보호를 위해서나 생활환경의 보전을 위해서라는 점에서는 그치는 것이 아니고, 더욱 넓혀서 자연의 보호, 자원의 보호라는 견지로 확대되고 있다. 이와 같은 세계적인 확대된 이해와 이에 대한 대책강구의 제안은 1968년 국제연합의 경제사회이사회에서 스웨덴 정부대표에 의하여 제시되었으며 1969년의 우- 탄트 사무총장의 인간환경에 관한 보고서, 1970년 Nixon 미대통령의 연두일반교서 그리고 1972년 5월 6일 스웨덴의 스톡홀롬에서 개최되는 인간환경회의의 주제 등을 통해서 알 수 있고, 종래의 공해나 생활환경의 오염문제라는 좁은 개념에서가 아니고 인간환경전체의 문제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즉 환경개발(도시, 산업, 지역개발에 수반된 문제), 환경오염(인위적 행위에 의하여 환경의 대인간조건이 악화하는 문제) 자연ㆍ자원의 보호관리(지하, 해양자원, 동식물, 풍경경치의 문제)란 3개 측면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다. 환경오염이란 문제를 중 심하여 보면 환경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요소로서 대기, 물, 토지 또는 지각. 그리고 공간의 사대요소로 집약하여 생각할 수 있음으로 이 4요소의 오염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대기의 오염은 환경의 오염중 가장 널리 알려진, 또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오염의 문제로써 이에 속하는 오염인자는 분진, 매연, 유해가스(유황산화물, 불화수소, 염화수소, 질소산화물, 일산 화염소 등) 등 대기의 1차 오염과 1차 존재한 물질이 자외선의 작용으로 변화발생 하는 오존, PAN등 광화학물질이 형성되는 2차적인 오염을 들 수 있다. 기외 카도미움, 연등 유해중금속이나 방사선물질이 대기로부터 토지를 오염시켜서 토지에 서식하는 생물의 오염을 야기케 한다는 점등이 명백하여지고 있으며 대기의 오염은 이런 오염물질이 대기중에서 이동하여 강우에 의한 침강물질의 변화를 일으키게 되며 소위 광역오염문제를 발생케하며 동시에 토지의 토질저하등을 가져오게 한다. 물의 오염은 크게 내육수의 오염과 해양의 오염의 양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천의 오염을 방지하고 하천을 보호하기 위한 움직임 역시 환경오염의 역사상 오래된 문제이며 시초에는 인분뇨와의 연결에서 오는 세균에 의한 오염이나 양수 기타 일반하수와의 연결에서 오는 오염에 대비하는 것부터 시작하였지만 근래에는 산업공장폐수에 의한 각종 화학적유해물질과 염료 그리고 석유화학의 발달에 의한 폐유등으로 인한 수질오탁문제가 점차 크게 대두되고 있다. 이것은 측 오염이란 시초에 우리에게 주는 불쾌감이 크므로 이것을 피하자는 것부터 시작하여 인간의 건강을 지키고 각종 사용수를 보존하자는 용수보존으로 그리고 이제는 건강과 용수보존뿐만 아니라 이것이 농림 수산물에 대한 큰 피해를 주게됨으로써 오는 자연환경의 생태계보전의 문제로 확대전환하고 있는 것이다. ?간 특히 해양오염에 대한 문제는 국지적인 것에만 끝이는 것이 아니고 전세계의 해양에 곧 연결되는 것이므로 세계각국의 공통관심사로 등장케 되었으며 이것은 특히 폐유가 유류수송 도중에 해양에 투기되는 유류에 의한 해양의 유막성형에서 오는 기상의 변화와 물피해등이 막심함으로 심각화 되고 있다. 각국이 자국의 해안과 해양을 보호하기 위하여 조치를 서두르고 있는 현시점에서 볼 때에는 이는 국제문제화하고 있으며 세계적인 국제적 협력과 협조의 필요성이 강조되는 좋은 예라 하겠다. 토양의 오염에 있어서는 대기나 수질의 오염이 구국적으로 토양과 관련되고 토양으로 환원되는 것이지만 근래에 많이 보급사용되는 농약과 화학비료의 문제는 토양자체의 오염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농작물을 식품으로 하여 섭취함으로써 발생되는 인체나 기타생물체의 피해를 고려할 때 더욱 중요한 것이며, 또 토질의 저하를 가져오게 하여 농림생산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을 것이다. 지반강하는 지각 에 주는 인공적 영향의 대표적인 것으로써 지하수나 지하 천연가스를 채취이용하기 위하여 파들어 감으로써 지반이 침하 하는 것이며 건축물에 대한 영향 특히 풍수해시의 재해를 크게 할 우려가 있는 것이다. 공간에 있어서의 환경오염에는 소음, 진동, 광선, 악취 등이 있다. 이들은 특수한 작업환경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건강에 직접적인 큰 피해를 준다고 생각할 수 없으나 소음, 진동, 관선, 악취 등은 일반 일상시민생활에 불쾌나 불안을 줌으로써 안정된 생활을 방해하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공간의 오염물로써 새로운 주목을 끌게된 것은 도시산업폐기물로써 이들은 대기나 물 또는 토지를 오염시킬 뿐만 아니라 공간을 점령함으로써 도시의 미관이나 기능을 손상케 하는 것이다. 즉 노배폐차의 잔해, 냉장고등고형폐기물등의 재생불가능한 것이나 비니루등 합성물질로 된 용기나 포장 등으로 연소분해 되지 않은 내구소비재가 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는 maker의 양식에 호소하여 그 책임 하에 해결되어야 할 문제로 본다. 이렇듯 환경오염은 각양각색으로 그 오염물질의 주요 발생원인 산업장이나 기타 기관에서의 발생요인을 살펴보며는 다음과 같은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A. 제도적 요인 1. 관리체재의 미비 2. 관리법규의 미비 3. 책임소재의 불명확 B. 자재적 요인 1. 사용자재의 선택부적 2. 개량대책급 연구의 미흡 C. 기술적 요인 1. 시설의 설계불량, 공정의 결함 2. 시설의 점검, 보전의 불충분 3. 도출물의 취급에 대한 검사부족 4. 발생방지 시설의 미설치, 결함 D. 교육적 요인 1. 오염물질 방제지식의 결여 2. 법규의 오해, 미숙지 E. 경제적 요인 1. 자금부족 2. 융자상의 문제 3. 경제성의 문제 F. 정신적 요인 1. 사회적 도의심의 결여(이기주의) 2. 태만 3. 무지, 무관심 등이다. 따라서 환경오염의 방지란 상기한 문제의 해결에 기대하지 않을 수 없으나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는 국내적 국제적 상호협조에 의한 사회각층의 총력적 대책이 시급한 것이다. 이와 같은 환경오염이 단속된다 하며는 미구에 인류의 건강은 물론 그 존립마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며, 현재는 점진적으로 급성피해에 대하여는 그 흥미가 집중되어 그 대비책도 많이 논의되고 있지만 미량의 단속접촉에 의한 만성축적에 관한 문제나 이와 같은 환경오염이 앞으로 태어날 신생률에 대한 영향이나 유전정보에 관한 연구는 장차에 대비하는 문제로써 중요한 것이라 생각된다. 기외에 우려되는 점은 오염방지책을 적극 추진함으로써 올 수 있는 파생적인 문제이다. 즉 오염을 방지하기 위하여 생산기업체가 투자를 하게 되며는 그만큼 생산원가가 상승할 것이며 소비가격도 오를 것이다. 반면 이런 시책에 뒤떨어진 후진국의 값싼 생산국은 자연 수입이 억제 당할 것이며, 이렇게되면 후진국은 무역경쟁에서 큰 상처를 입게될 것이고 뿐만 아니라 선진국에 필요한 오염물질의 발생이 높은 생산기기를 자연후진국에 양도하게 될 것임으로 후진국의 환경오염은 배가할 우려가 있는 것이다. 또 해양오염을 방지할 목적에서와 같이 자국의 해안보호를 위하여 마련된 법의 규제는 타국의 선박운항에 많은 제약을 가하게 될 것이며 이것 역시 시설이 미약한 약소후진국의 선박에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임으로 교통, 해운, 무역등을 통한 약소후진국의 경제성장에 제동을 거는 것이 될 것이다. 이렇듯 환경오염의 문제는 환경자체에 대해서만 아니라 부산물적으로 특히 후진국에는 의외 문제를 던져주게 되는 것임으로 환경오염에 대해서는 물론, 전술한 바와 같이 인간환경전체의 문제로써 Nixon 대통령이 말한 결의와 창의와 그리고 자금을 가지고 과감하게 대처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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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paration of Students for Future Challenge (미래의 요구에 부응하는 미래를 위한 간호교육)

  • Kim Euisook
    • The Korean Nur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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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v.20 no.4 s.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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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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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1
  • 간호학생들이 당연하고 있는 문제점 미래의 간호학생들이 교육문제를 논하기 위하여는 간호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파악하고 또 이해하는 것이 우선순위가 될 것이다. 간호학생들이 문제점에 대한 연구는 한국에서 뿐아니라 미국에서도 꽤 많이 시행되어져 왔으며 특히 간호학과정에서 중간 탈락되는 중퇴자들에 대한 연구들 중에 이러한 문제점에 대해서 언급한 것이 많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 대학과정에 진학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사 보고될 Munro의 자료에 의하면 전문대학과정에서 27$\%$, 대학과정에서는 41$\%$의 간호학생들이 간호학과정에서 중간 탈락하고 있음이 보고되고 있다. 이들이 중간탈락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으나 그 중 ''간호학에 흥미를 잃어서''가 가장 큰 이유로 보고되고 있다. 이곳 한국사회에서도 역시 비슷한 현상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대학입시경쟁과 대학내에서의 전과가 거의 허용되지 않는 특수여건이기 때문에 학교를 중간 탈락하는 율은 미국이 보고만큼 높지는 않으나 역시 ''간호학에 흥미를 잃는다''는 것이 간호학생들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대두되고 있다. 최근 한국에서 시행된 간호학생들에 관한 연구(표 1 참조)에 의하면 간호학생들의 학문에 대한 만족도는 조사자의 35$\~$50$\%$정도에 불과하였고 더우기 이 비율은 고학년에 올라갈수록 더욱 감소되고 있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한국에서 시행된 어느 연구보고에 의하면 간호학에 실망했다고 생각하는 학생이 전체의 67$\%$였으며, 다른 학교로 전과를 희망한 경험이 있다는 학생이 71$\%$나 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그러나 왜 흥미를 잃게 되는지 그 이유에 대하여 설명해 주는 연구는 많지 않았다. 미국의 한 저자는 간호학생들이 간호학에 흥미를 잃게 되는 원인을 간호원의 역할에 대한 이해가 정확하지 못한 것과 졸업 후 진로기회에 대한 인식부족 때문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간호학에 흥미를 잃게 되는 이유는 크게 다음의 세 가지로 분류 요약될 수 있다. 첫째, 간호학을 전공으로 택한 동기이다. 간호학의 특수성으로 인하여 학생들이 간호학을 전공으로 택한 동기도 다른 전공분야보다는 훨씬 다른 여러 종류를 보이고 있다. 즉, 종교적 이유,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직업이기 때문에, 쉽게 취업을 할 수 있어서, 결혼 후에도 직업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외국으로 쉽게 취업할 수 있어서 등이 간호학을 선택한 이유로 보고되고 있다. 흥미나 적성에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간호학을 택한 학생의 수는 다른 과에 비하여 훨씬 적다. 이러한 흥미나 적성 때문이 아닌 여러 가지 다른 이유들로 인하여 간호학을 택한 경우에 특히 간호학에 쉽게 흥미를 잃어버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간호학에 현실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일수록 추상적이고 현실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보다 더 간호학에 지속적인 흥미를 가지며 중간에 탈락하는 율이 훨씬 적다는 것이 많은 연구에서 보고되었다. 또한 흥미나 적성 때문에 간호학을 택하였다는 학생들이 다른 과로 전과를 희망하는 율이 낮다는 것도 보고되었다. 둘째, 교과내용자체나 실습에 대한 불만족이다. 간호학에 대한 체계적인 교과내용의 결여, 과중한 과제물, 임상실습에서의 욕구불만, 실습으로 인한 부담, 지식과 실습의 차이점에 대한 갈등 등이 주요 이유로 보고되고 있다. 대부분의 연구들이 이 교과목이나 실습에 대한 불만족, 특히 실습경험에서의 갈등을 학생들이 흥미를 잃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는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어느 한 연구에서는 응답자의 90$\%$가 임상실습에 만족하지 못한다고 응답하였으며 그들 중의 88$\%$가 실습감독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보고하였다. 셋째, 교수들에 대한 불만족이다. 대부분의 연구들이 학년이 올라가면 갈수록 교수에 대한 신뢰도가 낮아지며 또한 그에 비례하여 간호학에 대한 만족도가 낮아진다고 보고하고 있다. 교육내용에 대한 전문지식의 결여, 학생들과의 인간적인 관계의 결여, 교수법에 대한 불만족 등이 교수에 대한 불만의 주요내용으로 보고되었다. 미래의 간호에 부응할 학생교육 계속적인 사회적 변동과 더불어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 일반인들의 건강에 대한 요구도와 앞에서 기술한 문제점 등을 감안할 때 학생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간호학에 확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준비시키므로써 간호환경에서 실망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받아들여 변화하는 사회요구에 책임감을 느낄 수 있도록 교육시키는 것이 미래의 간호학생을 준비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교육을 위하여 다음의 두가지 안을 제시한다. 1. 교수와 학생간의 관계-서로의 좋은 동반자 : 교수들이 학생에게 미치는 영향, 특히 학생들의 성취도에 대한 영향에 대하여는 이미 많은 연구가 시행되었다. Tetreault(1976)가 간호학생들의 전문의식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에 대하여 연구한 바에 의하면 다른 어느 것보다도 교수의 전문의식여부가 학생들의 전문의식 조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하였다. 또한 학생들이 교수에게 신뢰감을 가지고 있을때, 교수들이 전문가로서의 행동을 하는 것을 보았을때 비로서 배움이 증가된다고 하였다. Banduras는 엄격하고 무서운 교수보다는 따뜻하고 인간적인 교수에게 학생들이 더 Role Model로서 모방하려는 경향을 나타낸다고 보고 하였다. 그러면 어떻게 학생에게 신뢰받는 교수가 될 수 있겠는가? apos;학생들의 요구에 부응할 때apos;라고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Lussier(1972)가 언급한 것처럼 학생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교육은 Piaget이 언급한 교육의 기본 목표, 즉 개인에게 선배들이 한 것을 그대로 반복하여 시행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시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하는 목표에는 도달할 수 없으며 이러한 목표는 간호학에도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할 기본목표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현재 어떤 요구를 가지고 있으며 또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계속 파악하고 있는 것이 학생요구에 부응하는 교육을 할 수 있는 기본조건이 될 것이다. 의외로 많은 교수들이 학생들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표 2는 현 간호학생들이 생각하고 있는 가치관과 문제점을 파악하고 또 교수가 그 가치관과 문제점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일개 4년제 대학 200여명의 학생과 그 대학에 근무하는 18명의 교수진을 대상으로 질문한 결과를 간략하게 보고한 것이다. 또한 여기에서 학생이 보고하는 가치관, 문제점, 교수에게 바라는 점이 교수가 이해하고 있는 것과 차이가 있다는 것도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학생들의 요구를 파악할 수 있도록 귀를 기울이고 이해하며, 그 요구에 부응하려고 노력할때 진정한 교수와 학생간의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며 이때 비로서 우리는 apos;partnershipapos;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때 간호학에 대한 실망은 줄어들 수 있을 것이며 우리도 학생들에게 전문가적인 태도를 함양시켜줄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될때 앞으로 기다리고 있는 미지의 의무에 효과적으로 또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자질을 형성한 학생들을 준비해 낼 수 있을 것이다. 2. 간호모델에 의한 교과과정의 확립과 임상실습에의 적용 : 교과과정이 학생들의 모양을 만들어주는 하나의 기본틀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미래의 요구에 부응하는 학생들을 준비시키기 위하여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방향의 교과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은 재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미 진취적인 간호대학에서는 guided design systems approach 또는 integrated curriculum 등의 새로운 교과과정을 시도하고 있음은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간호모델에 준한 교과과정을 발전시키는데 대한 장점과 이에 수반되는 여러가지 새로운 문제점에 대하여 많은 논란이 있으나 모든 교과과정이 처음 시도될 때부터 완전한 것이 있을 수 없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숙되는 것임을 감안해 볼 때 이러한 새로운 교과과정에의 시도는 미래의 새로운 간호방향에 필수적인 사업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교과과정을 개발하는데 몇가지 게안점을 첨부하려 한다. (1) 새로운 교과과정의 개발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교수진의 협력과 참여로 이루어져야 한다. (2) 비록 처음에는 어렵고 혼란이 있더라도 교과과정은 의학모델이 아닌 간호모델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3) 간호모델에서 다루어지는 개념들은 모두 직접 간호업무에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 선택되어야 한다. (4) 교과과정의 결과로 배출되는 학생들의 준비정도는 그 지역사회에 적합하여야 한다. (5) 그 지역사회의 고유한 문화적 요소가 포함되어야 한다. 아직 우리는 간호분야 내부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시기에 있다. 우리 내부의 문제점을 잘 해결할 수 있을때 외부와의 갈등에 잘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내부의 갈등을 잘 해결하기 위한 힘을 모으기 위하여는 동반자, 즉 교수와 학생, 간호교육자와 임상간호원 등이 서로 진정한 의미의 동반자 될때 가장 중요한 해결의 실마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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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parative Analysis of Community Health Practitioner's Activities and Primary Health Post Management Before and After Officialization of Community Health practitioner (보건진료원의 정규직화 전과 후의 보건진료원 활동 및 보건진료소 관리운영체계의 비교 분석)

  • Yun, Suk-Ok;Jung, Moon-Sook
    • Journal of agricultural medicine and community heal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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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v.19 n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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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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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4
  • To provide better health care services to the rural population, the government has made the Community Health Practitioner(CHP) a regular government official from April 1, 1992. This study was carried out to study the impact of officialization of CHP on the activities and management system of Primary Health Post(PHP). Fifty PHPs were selected by two stage sampling, cluster and simple random, from 595 PHPs in Kyungnam and Kyungpook provinces. Data were collected by a personal interview with CHPs and review of records and reports kept in the PHPs. The study was done for the periods of January 1-March 31, 1992 (before officialization) and January 1-March 31, 1993 (after officialization). Ninety-six percent of the CHPs wanted to become a regular government official in the hope of better job security and higher salary. The proportion of CHPs who were proud of their iob was increased from 24% to 46% after officialization. Those CHPs who felt insecure for their job decreased from 30% to 10%. Monthly salary was increased by 34% from 802,600 Won to 1,076,000 Won and 90% of the CHPs were satisfied with their salary, also more CHPs responded that they have autonomy in their work planning, implementation of plan, management of the post, and evaluation of their activity. There were no appreciable changes in such CHPs' activities as assessment of local health resources, drawing map for the catchment area, utilization of community organization, grasping the current population structure in the catchment area, keeping the family health records, individual and group health education, and school health service. However, the number of home visits was increased from 13.6 times on the average per month per CHP to 27.5 times. More mothers and children were referred to other medical facilities for the immunization and family planning services. Average number of patients of hypertension, cancer, and diabetes in three months period was decreased from 12.7 to 11.6, from 1.5 to 1.2, and 4.3 to 3.4, respectively. Records for the patient care, drug management, and equipment were well kept but not for other records. The level of record keeping was not changed after officialization. The proportion of PHPs which had support from the health center was increased for drug supply from 14.0% to 30.0%, for consumable commodities from 22.0% to 52.0%, for maintenance of PHP from 54.0% to 68.0%, for supply of health education materials from 34.0% to 44.0%, and supply of equipment from 54.0% to 58.0%. Total monthly revenue of a PHP was increased by about 50,000 Won; increased by 22,000 Won in patient care and 34,700 Won in the government subsidy but decreased in the membership due and donation. However, there was no remarkable changes in the expenditure. The proportion of PHPs which had received official notes from the health center for the purpose of guidance and supervision of the CHPs was increased from 20% to 38% during three months period and the average number of telephone call for supervision from the health center per PHP was increased from 1.8 to 2.1 times(p<0.01). However, the proportion of PHPs that had supervisory visit and conference was reduced from 79% to 62%, and from 88% to 74%, respectively. The proportion of CHPs who maintained a cooperative relationship with Myun Health Workers was reduced from 42% to 36%, that with the director of health center from 46% to 24%, that with the chief of public health administration section from 56% to 36%, and that with the chairman of PHP management council from 62% to 38%. Most of the CHPs (92% before and 82% after officialization) stated that the PHP management council is not helpful for the PHP. CHPs who considered the PHP management council unnecessary increased from 4% to 16%(p<0.05). Suggestions made by the CHPs for the improvement of CHP program included emphasis on health education, assurance of autonomy for PHP management, increase of the kind of drugs that can be dispensed by CHPs, and appointment of an experienced CHP in the health center as the supervisor of CHPs. The results of this study revealed that the role and function of CHPs as reflected in their activities have not been changed after officialization. However, satisfaction in job security and salary was improved as well as the autonomy. Support of health center to the PHP was improved but more official notes were sent to the PHPs which required the CHPs more paper works. Number of telephone calls for supervision was increased but there was little administrative and technical guidance for the CHP activ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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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wing Filial Piety: Ancestral Burial Ground on the Inwangsan Mountain at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과시된 효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인왕선영도(仁旺先塋圖)> 연구)

  • Lee, Jaeho
    • MISULJARYO - National Museum of Korea Art 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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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v.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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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3-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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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Ancestral Burial Ground on the Inwangsan Mountain is a ten-panel folding screen with images and postscripts. Commissioned by Bak Gyeong-bin (dates unknown), this screen was painted by Jo Jung-muk (1820-after 1894) in 1868. The postscripts were written by Hong Seon-ju (dates unknown).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restored this painting, which had been housed in the museum on separate sheets, to its original folding screen format. The museum also opened the screen to the public for the first time at the special exhibition Through the Eyes of Joseon Painters: Real Scenery Landscapes of Korea held from July 23 to September 22, 2019. Ancestral Burial Ground on the Inwangsan Mountain depicts real scenery on the western slopes of Inwangsan Mountain spanning present-day Hongje-dong and Hongeun-dong in Seodaemun-gu, Seoul. In the distance, the Bukhansan Mountain ridges are illustrated. The painting also bears place names, including Inwangsan Mountain, Chumohyeon Hill, Hongjewon Inn, Samgaksan Mountain, Daenammun Gate, and Mireukdang Hall. The names and depictions of these places show similarities to those found on late Joseon maps. Jo Jung-muk is thought to have studied the geographical information marked on maps so as to illustrate a broad landscape in this painting. Field trips to the real scenery depicted in the painting have revealed that Jo exaggerated or omitted natural features and blended and arranged them into a row for the purposes of the horizontal picture plane. Jo Jung-muk was a painter proficient at drawing conventional landscapes in the style of the Southern School of Chinese painting. Details in Ancestral Burial Ground on the Inwangsan Mountain reflect the painting style of the School of Four Wangs. Jo also applied a more decorative style to some areas. The nineteenth-century court painters of the Dohwaseo(Royal Bureau of Painting), including Jo, employed such decorative painting styles by drawing houses based on painting manuals, applying dots formed like sprinkled black pepper to depict mounds of earth and illustrating flowers by dotted thick pigment. Moreover, Ancestral Burial Ground on the Inwangsan Mountain shows the individualistic style of Jeong Seon(1676~1759) in the rocks drawn with sweeping brushstrokes in dark ink, the massiveness of the mountain terrain, and the pine trees simply depicted using horizontal brushstrokes. Jo Jung-muk is presumed to have borrowed the authority and styles of Jeong Seon, who was well-known for his real scenery landscapes of Inwangsan Mountain. Nonetheless, the painting lacks an spontaneous sense of space and fails in conveying an impression of actual sites. Additionally, the excessively grand screen does not allow Jo Jung-muk to fully express his own style. In Ancestral Burial Ground on the Inwangsan Mountain, the texts of the postscripts nicely correspond to the images depicted. Their contents can be divided into six parts: (1) the occupant of the tomb and the reason for its relocation; (2) the location and geomancy of the tomb; (3) memorial services held at the tomb and mysterious responses received during the memorial services; (4) cooperation among villagers to manage the tomb; (5) the filial piety of Bak Gyeong-bin, who commissioned the painting and guarded the tomb; and (6) significance of the postscripts. The second part in particular is faithfully depicted in the painting since it can easily be visualized. According to the fifth part revealing the motive for the production of the painting, the commissioner Bak Gyeongbin was satisfied with the painting, stating that "it appears impeccable and is just as if the tomb were newly built." The composition of the natural features in a row as if explaining each one lacks painterly beauty, but it does succeed in providing information on the geomantic topography of the gravesite. A fair number of the existing depictions of gravesites are woodblock prints of family gravesites produced after the eighteenth century. Most of these are included in genealogical records and anthologies. According to sixteenth- and seventeenth-century historical records, hanging scrolls of family gravesites served as objects of worship. Bowing in front of these paintings was considered a substitute ritual when descendants could not physically be present to maintain their parents' or other ancestors' tombs. Han Hyo-won (1468-1534) and Jo Sil-gul (1591-1658) commissioned the production of family burial ground paintings and asked distinguished figures of the time to write a preface for the paintings, thus showing off their filial piety. Such examples are considered precedents for Ancestral Burial Ground on the Inwangsan Mountain. Hermitage of the Recluse Seokjeong in a private collection and Old Villa in Hwagae County at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are not paintings of family gravesites. However, they serve as references for seventeenth-century paintings depicting family gravesites in that they are hanging scrolls in the style of the paintings of literary gatherings and they illustrate geomancy. As an object of worship, Ancestral Burial Ground on the Inwangsan Mountain recalls a portrait. As indicated in the postscripts, the painting made Bak Gyeong-bin "feel like hearing his father's cough and seeing his attitudes and behaviors with my eyes." The fable of Xu Xiaosu, who gazed at the portrait of his father day and night, is reflected in this gravesite painting evoking a deceased parent. It is still unclear why Bak Gyeong-bin commissioned Ancestral Burial Ground on the Inwangsan Mountain to be produced as a real scenery landscape in the folding screen format rather than a hanging scroll or woodblock print, the conventional formats for a family gravesite paintings. In the nineteenth century, commoners came to produce numerous folding screens for use during the four rites of coming of age, marriage, burial, and ancestral rituals. However, they did not always use the screens in accordance with the nature of these rites. In the Ancestral Burial Ground on the Inwangsan Mountain, the real scenery landscape appears to have been emphasized more than the image of the gravesite in order to allow the screen to be applied during different rituals or for use to decorate space. The burial mound, which should be the essence of Ancestral Burial Ground on the Inwangsan Mountain, might have been obscured in order to hide its violation of the prohibition on the construction of tombs on the four mountains around the capital. At the western foot of Inwangsan Mountain, which was illustrated in this painting, the construction of tombs was forbidden. In 1832, a tomb discovered illegally built on the forbidden area was immediately dug up and the related people were severely punished. This indicates that the prohibition was effective until the mid-nineteenth century. The postscripts on the Ancestral Burial Ground on the Inwangsan Mountain document in detail Bak Gyeong-bin's efforts to obtain the land as a burial site. The help and connivance of villagers were necessary to use the burial site, probably because constructing tombs within the prohibited area was a burden on the family and villagers. Seokpajeong Pavilion by Yi Han-cheol (1808~1880), currently housed at the 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 is another real scenery landscape in the format of a folding screen that is contemporaneous and comparable with Ancestral Burial Ground on the Inwangsan Mountain. In 1861 when Seokpajeong Pavilion was created, both Yi Han-cheol and Jo Jung-muk participated in the production of a portrait of King Cheoljong. Thus, it is highly probable that Jo Jung-muk may have observed the painting process of Yi's Seokpajeong Pavilion. A few years later, when Jo Jungmuk was commissioned to produce Ancestral Burial Ground on the Inwangsan Mountain, his experience with the impressive real scenery landscape of the Seokpajeong Pavilion screen could have been reflected in his work. The difference in the painting style between these two paintings is presumed to be a result of the tastes and purposes of the commissioners. Since Ancestral Burial Ground on the Inwangsan Mountain contains the multilayered structure of a real scenery landscape and family gravesite, it seems to have been perceived in myriad different ways depending on the viewer's level of knowledge, closeness to the commissioner, or viewing time. In the postscripts to the painting, the name and nickname of the tomb occupant as well as the place of his surname are not recorded. He is simply referred to as "Mister Bak." Biographical information about the commissioner Bak Gyeong-bin is also unavailable. However, given that his family did not enter government service, he is thought to have been a person of low standing who could not become a member of the ruling elite despite financial wherewithal. Moreover, it is hard to perceive Hong Seon-ju, who wrote the postscripts, as a member of the nobility. He might have been a low-level administrative official who belonged to the Gyeongajeon, as documented in the Seungjeongwon ilgi (Daily Records of Royal Secretariat of the Joseon Dynasty). Bak Gyeong-bin is presumed to have moved the tomb of his father to a propitious site and commissioned Ancestral Burial Ground on the Inwangsan Mountain to stress his filial piety, a conservative value, out of his desire to enter the upper class. However, Ancestral Burial Ground on the Inwangsan Mountain failed to live up to its original purpose and ended up as a contradictory image due to its multiple applications and the concern over the exposure of the violation of the prohibition on the construction of tombs on the prohibited area. Forty-seven years after its production, this screen became a part of the collection at the Royal Yi Household Museum with each panel being separated. This suggests that Bak Gyeong-bin's dream of bringing fortune and raising his family's social status by selecting a propitious gravesite did not come tr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