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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 만수성절 경축 문화 (The Celebration of the Mansuseongjeol of Emperor Gojong)

  • 이정희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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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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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3-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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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만수성절은 본래 중국 황제의 생일을 일컫는 용어이다. 조선의 경우 만수성절의 칭호를 쓸 수 없었지만, 개항 이후 자주적인 대외관계를 펼치기 위해 미국공사관을 설치한 해인 1888년부터 고종의 생일을 만수성절이라 칭했던 용례가 나타난다. 이어 1895년 무렵에는 만수성절이란 호칭이 더욱 널리 사용되었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이를 기념한 경축 행사가 활성화 되었다. 대한제국 시기 만수성절 축하 행사는 각계각층에서 일어났다. 국내 관원, 외국인, 학생, 종교인, 언론인, 상인, 민간단체, 전국의 개항장 등 다양한 지역과 계층에서 고종황제 탄신을 기념하여, 축하 계층이 두텁고 넓었다. 즉 계층 지역 인종에서 보편성 전국성 국제성을 띠었다는 점에서 차별화 되었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축하 문화 역시 다양하게 전개되었으며, 이들에게 황실후원금도 지급되었다. 당시 만수성절 경축은 황제에 대한 존경심과 애국심으로 확장되었기 때문에, 황제권 강화와 내국인의 민심 결속에 크게 기여하였고, 그런 모습이 국내에 상주하는 각국 외교관과 취재기자를 통해 세계에 보도되어, 국권 신장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러일전쟁 발발 이후 일제가 대한제국의 황실 재정을 장악하고 황권을 위축시키면서 만수성절 행사도 축소된다. 통감부 시기에는 황실지원금의 단절, 일제의 단속, 고종황제 강제 퇴위로 인해 만수성절 기념 행사가 거의 사라졌고, 궁중에서만 친일관료와 일본인을 중심으로 형식적인 경축연만 설행되었다. 고종황제의 권력 실축과 대한제국의 멸망은 한 몸이었고, 만수성절 경축도 동반 추락하였다. 그런 가운데 궁중 전통 연향 문화는 해체되고, 일제에 의한 공연 환경의 변화로 인해 대한제국 최고의 공연자들은 일개 유희물로 전락해 버렸다. 비록 황제를 향한 존경심과 애국심의 표출 창구였던 만수성절은 굴절되었지만 황실 자본력에 힘입어 구축된 행사 과정에서 창출된 문화적 성취들은 한국근현대문화사가 전개되는 내적 동력으로 작동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조선후기 관서지방의 공연 시공간과 향유에 관한 연구 (A Study of the Time-Space and Appreciation for the Performance Culture of Gwanseo Region in Late Joseon Period: Focusing on Analysis of Terminology)

  • 송혜진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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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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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87-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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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고는 조선후기 관서지방 공연문화의 시공간과 향유에 관한 연구이다. 관서(關西) 지방은 중국 대륙과 인접한 접경지대로 군사적 요충지이자 대외무역과 상업의 발달로 재화가 풍부한 문화의 중심지였다. 조선후기에는 중국과 조선을 오가던 수많은 사신과 역관, 상인들이 이 지역을 경유하였고, 1~2년 간격으로 관찰사가 교체되었으며, 지역 인재 선발을 위한 도과(道科)과 빈번하게 시행되면서 환영과 전송 의례, 위로, 향연에 따른 공연활동이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와 같은 양상은 여러 문헌자료와 읍지(邑誌), 그림 자료로 전하며, 문학, 음악, 무용, 민속학 분야의 연구를 통해서도 확인되고 있다. 그런데 <관서악부>를 비롯하여 평양, 성천의 자연과 풍류를 노래한 가사문학작품, 연행록 등을 문학작품을 세밀하게 읽다보면, 기존의 연구에서 주목해 온 공연의 종목과 악기편성, 음악기구, 음악인 등 뿐 만 아니라 공연활동의 주체와 시공간, 향유방식에 대한 유용한 정보들이 매우 풍부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를 통해 공연이 '어디서',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언제, 얼마나 긴 시간 동안 지속되었고, 공연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는지, 관객과 공연주체가 어떻게 소통하였는지를 알아볼 수 있다. 음악과 춤에 관한 단적인 정보 외에 '공연', '사람', '시간', '공간'의 관계성에 관한 연구는 지금까지 미진했던 '전통공연예술 양식' 연구의 기반이 되리라고 판단된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관서악부> 108편, 한글 가사 작품 8편, 한문연행록 9종에 표현된 공연관련 정보를 '주요어' 에 주목하여 분석한 결과 조선후기 공연문화의 시공간과 향유 양상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었다. 공연의 시기와 시간, 전체 소요시간에 대해서는 별도의 기준이 마련되어 있지는 않았다. 사신연의 경우, 국가나 개인의 상례(喪禮), 기일(忌日) 등의 '금지사유'가 없는 한, 더위나 추위를 무릅쓰고라도 진행되었다. 그 외에 계절을 선택하여 '놀음'을 벌일 경우, 계절적으로는 '삼사월 좋은 때', '춘풍' 불고 '일기 화창'한 날과 '가을 물결' 아름다운 '추강(秋江)'의 계절이 선호되었다. 공연 시간 대는 '아침밥을 먹고 나서', '포시(오후 4시경)', '석반을 물리치고~', '야심(夜深)', 의 예에서 처럼 매우 가변적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밤에 열리는 야연(夜宴)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공연의 지속시간은 '잠깐 보고'부터 '전날 오전부터 다음날 낮까지' 차이가 컸다. 공연시간대와 전체 소요시간은 사신일행의 일정에 영향을 받았다. 공연 공간은 자연, 누정이나 관아의 건축 공간, 선유놀음의 선상 공간, 영송(迎送)의 행차음악이 연주된 연도(沿道)로 구분해볼 수 있었다. 평양의 연광정, 부벽루, 성천의 백상루, 선천의 의검정, 천연정, 의주의 통군정 등의 건축공간과 강상에 배를 띄운 선유놀음의 크고 작은 선상공간은 관서지방 공연문화의 중심이었다. 공연 공간에는 공연주체와 좌상(座上)객의 필요에 따른 주물상, 다담상, 찬을 갖춘 상, 병풍, 의자, 향로 등이 구비되었으며, 야연에서는 청사초롱, 홍촉대, 횃불이 갖춰졌다. 약산동대 등, 자연 공간에서의 공연도 선호되었다. 공연 향유와 관련하여 공연주체와 관객, 공연내용, 향유자의 소감과 비평 등을 살폈다. 공연주체는 기생과 무동, 악공, 전악, 취타군, 무동, 가아(歌兒) 등 수많은 명칭이 사용되었다. 특히 공연에서 춤과 노래, 연주를 담당했던 기생에 대해서는 기생의 수, 연령, 역량, 이미지 등을 알 수 있는 아주 많은 이칭(異稱)이 조사되었다. 공연에서 향유자는 유객(遊客), 좌상(座上)으로 불렸고, 특정 작품에서는 '풍류 태수', '학탄 신선' 등의 표현도 사용되었다. 향유자들이 즐긴 공연은 정재류의 춤과 관서지방의 민속무, 이에 따른 삼현육각 편성의 음악, 12가사, 한문 낭송조, 잡가, 민요, 광대소리 등의 노래, 거문고, 가야금, 양금, 피리, 해금, 퉁소, 옥저 등의 기악 독주, 혹은 병주. 행차에 따른 연주 등이었다. 세부곡목에 주목해보면 조선후기 관서지방에서는 궁중 예술과의 교섭이 매우 활발하였고,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었던 <홍문연>, <항장무>, <선유락> 등의 레퍼토리를 탄생시켰는가 하면 고유의 민속가무도 함께 향유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공연의 규모는 '대연', '크게 벌이다', '수삼 동기', '성천기 7명', '60기생', '기생 2~3명', '삼자비' 등으로 표현되거나 독주, 독창, 독무인 경우 이름으로 표기하였다. 역시 공연 계기와 장소에 따라 공연의 규모가 매우 유동적이었음을 알려준다. 공연자의 연령은 10대 초반부터 늙은 기생까지 다양하게 소개되었는데, 특히 어린 기생들의 가무에 대한 관심도가 높았다. 공연은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되었지만, 반대로 '잡악(雜樂)', '졸렬', '웃음거리'로 분류되어 외면당한 예도 있다. 그런가 하면 여러 지역에서 유사한 공연종목을 관람한 뒤, 이를 '비교(比較)' 평가한 예가 있는데, 이는 관서지방 공연문화 향유양상을 알려주는 중요한 지표라고 생각된다. 공연은 주로 사신맞이. 사신연, 순행에 따른 연회 등 공적인 성격을 띤 것이 많았고, 그밖에 사적인 향유 차원에서 이루어진 예도 적지 않게 조사되었다. 관서지역의 사신맞이는 대동강의 관선을 이용한 도강(渡江)의례가 특징적이다. 이는 관찰사, 부사, 감사 등의 관리의 이임과 부임뿐만 아니라 정례적으로 중국에 오가던 사신일행의 행차가 끊이지 않았으므로 이와 관련된 공연문화의 지속성이 탄탄하게 확보될 수 있었다. 이와같이 '주요어 추출'을 중심으로 조선후기 관서지방의 공연 시·공간과 향유양상에 관해 살핀 본 연구는 향후 관서지방의 재정과 경제, 생활문화의 측면과 관련지어 '관서지방 특유의 공연문화'를 밝히는 연구로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지금까지의 연구가 미진한 전통공연예술의 시공간과 공연양식에 관한 연구의 외연을 넓히는데 풍부한 근거자료로 활용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