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한국 가면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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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전통극에 나타난 메이크업(Make-up)에 관한 비교 연구 - 하회가면극, 경극, 노극을 중심으로 - (A Comparative Study on Make-up in Oriental Traditional Plays -Focused on the Hahoe masque plays, Peking Opera and Noh plays-)

  • 양유미;이미숙
    • 한국가정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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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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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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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This study has been conducted to find out the characteristics of the form and the color of make-up in Oriental traditional plays by comparing the characteristics of Hahoe masque, which is one of Koran traditional plays with those of Chinese Peking Opera and Japanese Noh plays. The object of the study was confined to the make-up of women players. The distinguished characteristics of women make-up of oriental traditional plays are as followings. First, the make-up of woman players in Korean Hahoe masque adopts mask make-up and expresses the mental state of players very realistically. Second, the women players in Chinese Peking Opera wear face make-up and it is beautifully expressed but not exaggerated. Third, most of Japanese Noh players wear face make-up. However, only women players wear mask make-up so that they might express non-realistic mood. Overall, the women players in Korean Ha-hoe masque adopt mask make-up, Chinese Peking Opera face make-up, and Japanese Noh both mask and face make-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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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마임의 전통성과 정체성 - 기원, 역사, 특징 - (Tradition and Identity of Korean Mime)

  • 김익두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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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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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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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마임(mime)/무언극(無言劇)이란 '신체를 움직이는 기술'을 뜻하고, 오늘날에는 사실적이고 상징적인 몸짓으로 이야기를 전달하고 하나의 성격을 창조하고 묘사하는 기술을 뜻한다. 한국 마임의 시원은 멀리 선사시대의 '신성한 몸짓'에서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시대의 마임에 관한 자료는 고고학적 발굴 자료들, 구비전승 자료 및 이후에 기록된 이 시대 관련 문자기록들 등이다. 부족국가시대에는 인간이 수행하는 가장 원초적인 연극 형식인 윈시 제천의식(祭天儀式) 등에 마임의 흔적이 나타난다. 삼국시대의 마임은 악가무희사(樂歌舞戱詞)가 종합된 이른바 '가무백희(歌舞百戱)' 혹은 '산악백희(散樂百戱)' 형태로 존재했다. 이 시기의 마임은 '호선무(胡旋舞)' '광수무(廣袖舞)' '괴뢰희(傀儡戱)' '기악(伎樂)' 검무(劍舞) '무애무(無㝵舞)'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백제 '기악(伎樂)'은 불교적인 내용의 가면 묵극(黙劇) 곧 마임으로 보인다. 남북국시대에는, 신성한 제의극보다는 세속극이 더욱 더 강화되고 정형화되고 다양화되었으며, 이러한 변화에 따라, 마임도 그만큼 다양한 정형화를 이루었다. 구체적으로는, '처용가무(處容歌舞)' '황창무(黃倡舞)' '대면(大面)' '월전(月顚)' '속독(束毒)' '산예(狻猊)' 등에서 시 시대의 마임 전통을 찾아볼 수 있다. 고려시대의 마임은 매우 다양한 내용과 형식의 인형극, 탈놀음, 무용극 형태로 나타난다. 이 시기에는 '처용가무(處容歌舞)'와 같은 기존의 전통 마임이 사회적으로 널리 보편화되고, '헌선도(獻仙桃) 포구락(抛毬樂) 연화대(蓮花臺)'와 같은 마임 형태의 무용극이 수입되었다. 조선시대에의 마임은 광대(廣大) 서인(西人) 주질(注叱) 농령(弄鈴) 근두(斤頭) 등과 같은 '규식(規式)이 있는 유희[규식지희(規式之戲)]'와 수척(水尺) 승광대(僧廣大) 등과 같은 '웃고 희학하는 놀이[소학지희(笑謔之戱)]'로 분화된 연극의 변화와 더불어 발전했다. 이 시기에 들어오면, 연극적 양식들이, 무당굿 풍물굿/농악 인형극/괴뢰희 탈놀이 조희 판소리 궁중 가무악극(歌舞樂劇) 등으로 매우 다양하게 분화 발전됨에 따라, 마임도 이런 다양한 연극적 양식들의 변화 발전 속에서 다양하게 구체화되어 나타났다. 한국의 마임은 역사적으로 매우 유구한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독자적인 양식으로 분화되지 않은 채, 여러 연극 양식들 속에서, 그 연극 양식의 일부분으로 존재해 왔다. 이러한 특징과 전개 양상에 따라, 한국의 마임은 굿놀음식 마임, 인형놀음식 마임, 잡색놀음식 마임, 탈놀음식 마임, 궁중무용식 마임, 판소리식 마임 등등, 다양한 양식적 분화를 이룩해 왔으며, 그 각 양식적 분화에 따라 각 양식별로 매우 특특하고도 다양한 특징들을 확립해 왔다.

신중신탈놀이 연구 (Sinjungsin Mask Play Study)

  • 윤동환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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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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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3-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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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땅설법의 하나인 신중신탈놀이는 '성주신 일대기'와 관련이 있다. 신중신탈놀이는 성주신이 귀양을 가면서 만난 민속신들에 관한 이야기를 가면극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성주신일대기를 탈놀이의 형태로 진행하며, 설법을 주도하는 스님은 해설과 주요 배역을 맡는다. 다수의 신도들은 여러 배역과 악사의 역할을 한다. 신중신탈놀이에서는 많은 민속신앙이 소개되고, 흥미유발을 위한 소리, 재담 등이 포함되어있다. 신중신탈놀이는 기존 탈놀이와 마찬가지로 단어의 나열과 반복을 통한 연행 방식을 사용한다. 문장이나 구절의 반복은 관중들에게 문맥의 의미를 예지하거나 줄거리의 전개양상을 선지할 수 있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반복은 장면의 상황을 강조하고 율동감을 조성하기 위한 것이다. 탈놀이는 서민층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에, 탈놀이꾼들이 민요에서 흔히 사용되는 반복방식을 대사에 활용한다. 그로인해 관중에게 친숙감을 주고, 관중의 취향에 부응하는 것이다. 신중신탈놀이는 대중의 포교를 위해 민중의 연희방식을 차용하였다. 단어 또는 문장이나 구절의 반복, 단어나 문장의 대구, 기존 가요의 차용, 공식적 표현단위 등 전통연희의 극적 형식을 계승하고 있다. 또한 반복적 연행단락을 통하여 신자들이 직간접적으로 쉽게 익히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신중신탈놀이는 신앙공동체를 중심으로 전승되었고, 불법을 확산하기 위한 민중교화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불교가 민속신앙을 수용하는 과정을 탈놀이를 통해 외연화하고,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신도의 경우 놀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화엄경의 신앙체계를 체득하게 된다. 땅설법 중 하나인 신중신탈놀이는 대중교화나 포교뿐만 아니라 무형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 또한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고성오광대 문둥북춤 춤사위 연구 - 시대적 변화를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dance movements of Go-sung Five-Clown Leper Drum Dance - Focusing on the variation over time -)

  • 허창열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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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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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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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고성오광대 제1과장 문둥북춤은 양반의 자손으로서 조상들의 죄업으로 문둥병에 걸려 고통으로 괴로워하다 신명을 통해 극복한다는 내용을 대사 없이 춤으로만 표현한다. 고성오광대 문둥북춤의 문화재 지정 이후 현재까지 변화양상을 살펴본 결과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문둥북춤의 춤사위가 더 많아지고 동작이 구체화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65년 문둥북춤 춤사위부터 2000년 문둥북춤까지 춤사위가 5개에서 20개로 확장되고 이전보다 구체화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문둥북춤에서 사용하는 소도구 북의 표현하는 방식이 65년의 경우 북을 치고 어르는 춤사위만 있었다면, 1988년의 경우 현재와 같이 북과 북채를 무대에 두고 등장하고 춤사위도 14개로 늘어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2000년 문둥북춤의 경우 문둥이가 북을 잡고 난 이후부터 신명나게 춤을 추며 자진모리장단으로 발전되는 형태는 이전보다 춤사위가 더 다양해지고 이야기 구조를 좀 더 명확하게 표현하는데 사용된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고성오광대의 대표적인 춤사위 배김새가 1965년엔 보이지 않고 1969년엔 한 방향으로만 배김사위를 하는데 1988년과 2000년 문둥북춤에서 보여지는 배김사위는 좌우로 대칭하여 한 번씩 연행해 현재의 배김사위와 같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무당굿놀이의 연행방식과 특징 (The way and characteristics of Shaman's play)

  • 윤동환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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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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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3-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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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무당굿놀이는 연극적·극문학사적 차원에서 주목을 받았다. 전통사회에서 전문적 공연집단인 광대나 기생을 부를 수 있었던 상층 계층과는 달리 대다수의 일반 서민들은 굿을 통해 공연 욕구를 충족할 수 있었다. 전통사회의 무당들은 굿의 놀이적 요소와 외부의 놀이들을 굿 속에 끌어들여 서민을 위한 공연거리를 마련했다. 무당굿놀이는 종교적 맥락을 떠나 하나의 연극적 공연물로서 기능한 것이다. 무당굿놀이를 통해서 의례에서 놀이로 전개되는 과정을 알 수 있다. 입춘굿놀이·세경놀이·소놀이굿·방아놀이 등의 무당굿놀이는 농경을 기반으로 한 사회에서 풍농을 기원하는 놀이적 의례이고, 거리굿이나 뒷전은 잡귀잡신(雜鬼雜神), 즉 무사귀신과 무주고혼을 위로하고 돌려보내는 굿이다. 잡귀잡신들이 인간들에게 질병이나 재앙을 가져온다고 의식했기 때문에 신격이 낮은 잡신에 대한 굿놀이를 생성한 것이다. 무당굿놀이는 유교식 여제(厲祭)와 불교 수륙재(水陸齋)와도 일맥상통한다. 여제의 대상인 여귀(厲鬼)는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이승을 떠도는 잡귀들로, 미혼 남녀의 귀신이나 자손이 없는 귀신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제사를 받을 수 없는 무사귀신을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와 민간에서 여제를 지냄으로써 마을의 역질(疫疾)이나 재난을 막아내고자 했다. 불교 수륙재도 여제와 동일한 목적에서 거행되었다. 여제와 수륙재에서 잡귀잡신들을 호명하며 제사지내는 것에 비해 무당굿놀이에서 잡귀잡신으로 분장하여 형상화한 것이 더욱 강한 인상을 준다. 가면극을 비롯한 대부분의 전통연희는 무형문화재 지정 이후 전승력이 약화되고 박제화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현장성과 전승력이 살아있는 무당굿놀이는 연행될 때마다 변모되며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무당이 사회적 변화에 대응하고 현장의 상황에 따라 잘 적응하기 때문이다. 무당굿놀이에는 샤머니즘의 요소를 바탕으로 신의 모방과 성적 결합 등 풍요·재액·놀이적 의미가 내포되어있다. 무당굿놀이는 단순히 주술적 모방을 넘어서 사회적 주제를 포함한 놀이로 분화하고 있어서 향후 무당굿놀이의 의미와 지향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한국의 가두행렬(街頭行列)과 전통연희 (Korea's Street Processions and Traditional Performing Arts)

  • 전경욱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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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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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13-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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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나는 행렬도는 묘 주인의 등급에 따라 인원수와 각종 대열 및 인원 배치가 규정될 정도로 상당한 수준의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가두행렬에 동반되는 연희들은 대부분 산악 백희의 종목들이었다. 특히 안악 3호분의 악대는 고취와 횡취를 갖추고 있어서, 이 행렬의 국제적 교류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호위병, 의장대, 악대, 연희자를 갖춘 고구려의 행렬은 고려와 조선시대의 어가행렬과 일치하므로 그 영향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고려시대의 대표적 가두행렬은 왕의 어가행렬이다. 연등회에서 왕이 봉은사나 흥왕사를 다녀올 때, 왕이 지나는 차도의 좌우에는 등산과 화수를 설치했으며, 그 가두행렬의 규모가 매우 컸고 다채로운 음악과 공연을 연행했다. 나례는 중국에서 생겨난 의식으로 고려시대의 궁중의례에 수용되었다. 고려의 나례에서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가두행렬과 연희를 행했다. 그리고 정초에 풍물패가 행하는 지신밟기도 나례의 유풍이다. 조선전기의 궁중나례에는 방상시 12지신 이외에 판관 조왕신 소매 등 새로운 배역이 등장한다. 그래서 나례가 시대의 변천에 따라 변모하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환궁행사에서 왕이 탄 가마는 전후의 고취악대가 행진음악을 연주하고, 산붕이 인도하는 가운데 대궐을 향해 가두행렬을 진행했는데, 이때 각종 연희도 공연되었다. 이 환궁행사는 고려 의종 때의 환궁행사와 매우 유사하다. 조선시대의 삼일유가와 문희연은 양반층의 축제였다. 급제자는 악사와 연희자들을 대동하고 서울 시가를 3일간이나 돌아다니며 가두행렬을 벌이면서, 자기 가문의 경사를 축하하고 가문의 위세를 과시했다. 조선시대의 동제와 읍치제의에서는 사당의 신상이나 신대를 앞세우고 가두행렬을 진행했다. 중국의 마을제사인 영신새회가 후대에는 나례의 연문축역과 융합되었듯이, 한국의 마을제사도 지신밟기와 결합되어 마을의 수호신을 상징하는 신대를 앞세우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는 가두행렬이 형성되었다. 수영야류의 가두행렬은 가면극 공연의 홍보 효과가 있었고, 참가자들의 일체감을 조성하면서 축제적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북청군 토성리 관원놀이의 중심은 관원의 행차를 모방한 가두행렬이었다. 토성 관원놀이는 인명의 안과와 마을의 오곡 풍성을 기원하는 민속신앙의 기능, 가두행렬과 여러 연희들을 통해 흥과 신명으로 즐기는 오락적 기능, 주민들의 단결과 화합을 조성하는 사회적 기능을 갖고 있었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가두행렬은 자생적 가두행렬과 외래 기원의 가두행렬이 있었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행렬도의 고취와 횡취, 고려시대에 상원이라는 연등회의 시기와 왕이 참석한 가운데 행해지는 교방가무희 및 백희 공연, 동제의 지신밟기 등을 통해서 국제적 교류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상원연등회는 중국에서 유입되었지만, 왕이 선대 임금들의 초상화를 모신 봉은사에 다녀올 때의 가두행렬과 그 노변에 설치되는 등산과 화수 및 수많은 등은 고려 연등회의 특징이다. 이상의 모든 행사에서 가두행렬은 축제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큰 몫을 담당했고, 행렬의 중간이나 행렬이 끝난 후 펼쳐지는 전통연희의 공연에서 참가자들이 일체감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가두행렬의 참가자들은 각 행사를 통해 문화적인 긍지와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고, 자기들의 역량을 과시하고 자랑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