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경북북부지역' 퇴계학파의 율곡학 비판에 대해 고찰이다. 퇴계학파(율곡학파)는 상대학파와의 논쟁과 상호 비판을 통해 형성되었다. 그러므로 퇴계학파의 특징은 자체의 이론구조에 대한 탐색만으로는 그 실체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못하며, 율곡학파와의 갈등 양상을 함께 이해함으로써 제대로 설명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의도에서 퇴계학파 중에서도 '학파적' 성격이 가장 강하였던 경북북부지역의 퇴계학파가 율곡학을 어떻게 비판하고 있는가를 살펴봄으로써 퇴계학의 사상적 맥락을 좀 더 분명하게 규명하려는 것이 이 글의 주된 목적이다. 퇴계철학은 유학의 도덕주의의 맥락 위에 서서 리(理)의 자발성, 즉 도덕 객관주의에 입각한 자기완성의 경지를 지향한다. 즉 그들은 세계의 존재형식과 이유를 도덕주의적인 토대 위에서 분명하게 정초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으며, 이러한 의도에서 볼 때 기(氣)보다는 리(理)를 강조하는 것이 훨씬 정당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그리고 퇴계(학파)의 방식으로 유가적 도덕 세계관의 정수(精髓)를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주는 사상이 바로 퇴계의 리발(理發)(동(動))설(說)이며, 이러한 시각에서 율곡학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이 "기(氣)를 리(理)로 오해한다."는 말에 집약된다. 퇴계학파의 학자들은 율곡학의 도덕적 상대주의의 가능성을 강하게 비판했던 것이다.
본 연구는 과거 안의삼동을 유람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던 인물들의 공간인식을 살펴보고자 관련 문헌에서 확인되는 인물들의 학파별 관계와 경관요소들을 분석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결과를 도출하였다. 첫째, 안의삼동 관련 기록을 저작한 인물들은 영남 유학계보와 함께 안의삼동 일대 거주하는 지역사림을 중심으로 관계가 확인되었다. 15세기 정여창을 시원으로 16세기 남명학파 중심의 관계가 나타났으나 당시에는 학맥과 관계없이 안의삼동을 유람했었다. 17세기에는 남명학파와 퇴계학파의 대립으로 퇴계학파의 영향은 확인되지 않으며, 18세기 영남학파로 발전되면서 남명학파, 퇴계학파, 기호학파의 비중이 유사하게 나타났다. 19세기 이후에는 학맥보다는 일제 항거운동에 참여했던 애국지사의 비중이 높게 나타났다. 둘째, 안의삼동 관련 문헌에서 주로 이용되는 장소는 원학동, 화림동, 심진동 순으로 확인되었다. 관련문헌의 대상으로 이용된 주요 요소는 총 21개소로, 이 중 수승대, 모리재, 농월정, 사선대, 척수암이 주를 이루었다. 원학동의 요소들은 수승대를 중심으로 16세기 이후 주요지점으로 각광받았다. 화림동의 요소는 18세기 이후 점차 증가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으나, 심진동의 경우 원학동이나 화림동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비중을 보이고 있었다. 셋째, 안의삼동을 방문했던 인물들의 관계와 문헌 분석 결과 안의삼동에 대한 공간인식 양상은 경관 묘사, 안의삼동에서의 감회, 문헌에 내재된 상징성으로 구분되었다. 안의삼동의 경관인식은 수경관과 지형경관 중심의 묘사가 주로 확인되는데, 당시 인물들이 안의삼동을 계곡경관 중심의 명승지로 인식했을 것으로 보인다. 16·17세기 남명학파와 퇴계학파의 상호영향관계는 각 학파의 주요 인물들이 안의삼동의 유람을 수련문화로 인식하던 양상이, 18세기 유람문화의 성행과 19세기 혼란스런 정세를 거치면서 과거 선조들의 자취를 그리워하는 정서로 이어졌다. 이외에 주로 나타나는 상징적 표현은 신선세계로의 장소성이 확인됨에 따라 탈속의 장소로 인식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본고에서는 영남에서 인지도가 높았던 방산 허훈의 "방산집"을 중심으로 II장에서는 방산 허훈의 삶과 학문적 연원을 살펴보고, III장에서는 본격적으로 허훈의 산문 중에서 잡저(雜著)에 실려있는 작품 몇몇을 선정하여 그 내용을 분석하고 특징이 무엇인지를 알아보았다. II장에서는 방산의 삶과 학문적 연원을 살펴보았는데, 방산은 평생 정치에는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는 처사적 삶을 살았다. 방산의 학문적 성향에 대해서는 근기와 영남학파, 두 진영을 아우르는 학문을 이룩하고자 노력하였다. 방산의 학문적 계보는 근기학파의 개산지조(開山之祖)인 미수(眉?) 허목의 학문이 곧 한강(寒岡) 정구에게서 나왔고 한강의 학문은 퇴계에게서 나온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방산의 학문에 직접 영향을 준 성재(性齋) 허전(許傳)은 순암 안정복계의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방산은 성재를 통하여 순암계 우파를 퇴계학의 정통이라 생각하여 영남학파보다는 근기학파에 더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방산의 저술에는 실용적인 측면이 많다. III장에서는 방산의 한문산문 작품의 내용을 분석하여 근기학파의 학문 전통 고수와 자주국방의 인식으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근기학파의 학문 전통 고수에서는 실증주의, 실용주의에 입각한 서술을 주로 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을 가지고 대의 중심으로 한 글을 쓰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속에 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정당하다고 보지 말고 예부터의 일을 상고하여 바로 잡고자 하였다. 이러한 방산의 사고에는 퇴계를 중심으로 하는 근기남인의 학문 성향이 짙게 베어 있다고 하겠다. 자주국방인식에서는 <포설>과 <거설>을 통해 병가들이 마땅히 알아야 할 일이 무엇인지 강조하고 있다. 방산이 여기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새로운 장비에 대한 정보와 이에 대한 교육과 구축이다. 그러면 조선은 군사력이 강력한 나라가 되었을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본고는 이진상의 특색 있는 이론인 심즉리설의 연원을 지각론의 전개과정을 통해 탐색해 보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황과 이이 이후 양대 학파로 분기된 조선유학계는 상호 비판과 영향 수수를 통해 발전하여 왔고, 조선후기의 논쟁적 주제 중의 하나가 지각론이었다. 주자학의 일반적인 지각론을 심도 있게 논의하기 시작한 것은 호락의 학자들로부터 비롯되었다. 이들은 심합이기와 심시기라는 이이의 심론 중 후자에 비중을 두어 자신들의 학문적 정체성을 가다듬었다. 이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는 가운데 퇴계학파에 속한 대산학맥의 학자들은 이주기자설에 의하여 이기를 새롭게 해석하고, 지각론에도 이를 적용하여 퇴계학적인 지각 이론을 새롭게 만들어 내었다. 이진상의 심즉리설은 호락의 심시기설에 대한 비판정신을 바탕으로, 대산학파의 새로운 이기론과 지각론을 세밀하게 가다듬고 과감한 이론적 비약을 통해 만들어진 이론이었다. 그는 이를 통해 인간의 본심, 즉 리(理)를 지각할 수 있는 근본적 가능성의 기반을 찾고자 하였던 것인데, 성선론의 논리적 발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시한은 72세에 "사칠변증"을 완성하고 이후에 제자 이식과 인물성동 이논변을 벌인다. 정시한의 입장은 인물성이론의 입장이었고 이식은 인물 성동론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인물성동이논변은 잊혀지고 "사칠변증"이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에 퇴계학파와 율곡학파가 대립점에 있었고 서로가 서로의 입장을 비판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사칠변증"을 완성하게 되는 데에는 이현일의 "율곡이씨논사단칠정서변"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이의 사단과 칠정에 대한 생각은 '칠정이 사단을 포함한다.'라는 '혼륜(渾淪)의 입장'이었고, 이황은 사단과 칠정은 서로 다르게 해석할 수밖에 없다는 '분개(分開)의 입장'이었다. 정시한은 분개의 입장에서 혼륜의 입장을 비판하는 입장에 있었다. "사칠변증"을 통해 정시한은 무엇을 추구하려고 하였는가?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정시한이 제자 이식과 벌였던 인물성동이논변을 잊게 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현재 정시한의 "사칠변증"에서 이이를 비판한 사실은 알지만 정시한이 인물성동이논변을 벌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중요한 논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사칠변증"이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일까? 그것은 정시한이 희망했던 희망하지 않았던 것과 상관없이 정시한 이후에 사단칠정논쟁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익과 신후담, 정약용에게까지 "사칠변증"이 영향을 준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본 연구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의 만년 학설인 이도설(理到說)에 대한 우담 정시한(愚潭 丁時翰, 1625~1707)의 견해를 살펴봄으로써 퇴계 이도설에 대한 후대 학자들의 수용과 계승 및 발전의 양상을 이해하는 토대를 마련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퇴계 이후 이도설은 '물리도심(物理到心)'으로 이해되었고, 갈암 이현일(葛庵 李玄逸, 1627~1704)은 이를 무위의 본체인 '리(理)'에 '저기서부터 여기로 이른다'는 방향성과 운동성을 부여하였다고 비판하였다. 반면 우담은 '물리도심'을 긍정하였고, 이를 '리'의 온전한 체(體)를 부여받아 만물의 용(用)을 아울러 갖춘 '심(心)'이 만물을 통섭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기존에 구축한 '리의 용(用)'에 대한 정치한 해석에 기반하여 '이도(理到)'를 '물아위일(物我爲一)'로 확장하였다. 이때의 '물아위일'은 단순한 융회관통의 차원이 아닌 '물리'가 질서정연해져 '심' 속에 누가 되지 않는 경지가 된다. 우담의 견해는 '이도(理到)'의 서술어에 해당하는 '도(到)' 자체에 대한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이를 '진(盡)'으로 대체하여 이도설이 가지고 있는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려 한 갈암과는 그 양상이 사뭇 다르다. 우담은 보다 본체론적인 측면에서 해석을 시도한 것이다. 우담의 견해는 퇴계가 구축한 '리' 중심의 성리학 체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 하나의 유용한 틀이 될 수 있다. 이는 우담의 리체용론이 퇴계학파의 사상 형성과 그 양상을 확인하는 데 중요한 이론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Through 16-17th century, Neo-Confucianism was accepted and extended to Chosun Dynasty. The architecture of the Taegae school made buildings of Yongnam area rich by adding the regional characteristics based on Taegae's thought of architecture. The following is the architectural characteristics of the academic clique around Sangju. Transformation such as separation and combination of the Jeongsa space by function, lifted floor type reflecting local feature or high platform was appeared, and the architectural characteristics of the Taegae school, that is, a small scale, a moderate figure, a type of side-attached floor, landscape, were still maintained at the same time. The characteristics of the Taegae school and regional figure of Sangju were well joined. The upper class houses, Seodang, Jeongsa and Seowon, built by Confucianist had shared common Confucian characteristics in spite of their different purposes. The world view of the Confucianism such as sacrifice for sages, cultivation, devoting for study, teaching disciples, and education for villagers was revealed through the Confucian architecture including dwelling houses during the 16-17th century. Buildings of Confucianist were focused on the space for men. Seoae and Kyumam built two different Jeongsa's inside and outside of the boundary of the nakdong river. While Seodang and Jeongsa located outside of the boundary of the river were built excluding spaces for living, the function of the Jeongsa located inside of the boundary of the river was assimilated by Sarangcahe. However, both buildings kept the function for cultivation, devoting for study and teaching.
유원지는 이황의 사단칠정설이 적확하고 올바른 견해로서 전대의 성인들이 전한 핵심을 얻었으며 주희의 설과 합치된다고 확신하였다. 심지어 이황의 리기호발설이 "이전의 성인에게 질의해도 의심이 없고 백세 동안 성인을 기다려도 의혹이 없다"라고까지 하였다. 동시에 그는 그 시대의 학문 경향에 대해 이이가 이황의 학설을 비판하고 성혼이 이이를 따름으로써 이설이 만연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유가의 도에 누가 됨이 이미 극에 달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가 내린 결론은 수수방관해서는 안 되고 잘못을 바로잡을 방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폭넓게 말하자면 유교의 도를 구하고, 작게는 이황의 학설을 지키는 것이 그의 철학적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유원지는 이이의 학설을 여러 측면에서 비판하였다. 그 비판들의 주된 초점은 이황의 리기호발설에 대한 이이의 비판을 재비판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사단을 칠정의 일부로 보는 견해에 대해서는 "반드시 기를 리로 인식하는 데 이르게 되고, 머지않아 인욕을 천리로 간주하는 폐단에 빠지게 된다"고 경고하였다. 한 마디로 기를 리로 여기는 병폐가 있다는 것이 이이를 바라보는 유원지의 기본적인 시각이었다. 유원지는 장현광에 대해서도 이이에 대한 비판과 같은 맥락에서 비판하였다. 장현광의 학설이 이이와 다른 것 같지만 본질적으로 같다고 파악했기 때문이다. 유원지가 이이와 장현광의 학설을 비판했던 것은 곧 이황의 학문을 옹호하고, 나아가 퇴계학파의 학문적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의식과 맞물려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그의 이론적 활동은 똑같이 17세기 중반에 활동한 이구와 다르지 않다. 유원지는 이구와 더불어 이이의 학설, 나아가 장현광의 학설을 체계적으로 비판하면서 이황의 호발설을 수호하고자 노력한, 그리고 체계적인 비판의 글을 남긴 최초의 학자라고 평가할 수 있다.
오수영(吳守盈, 1521~1606)은 자는 겸중(謙仲), 호는 춘당(春塘) 또는 도암(桃巖)이다. 이황(李滉)과 이해(李瀣)의 문인으로 알려져 있다. 글씨를 잘 써서 금보(琴輔) 이숙량(李叔樑) 등과 함께 선성삼필(宣城三筆)의 칭호를 얻었다. 저서로 "춘당문집" 2권이 있다. 그는 퇴계(退溪)의 문도(門徒)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인물이다. 아직까지 그에 대한 연구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본고에서는 그의 생애와 교유 양상에 대해 살폈다. 이를 통해서 문학사에서 사라진 한 명의 인물을 복원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춘당(春塘) 오수영(吳守盈)의 가계와 도학적 생애에서는 그의 가계와 생애에 대해 간략히 정리했다. 그에 대한 연구는 아직까지 한 번도 이루어지 않았기에 이 부분에 대한 정리는 매우 의미가 있다 할 수 있다. 다음으로 퇴계 문도와의 교유를 살펴보았다. 그가 교유한 인물들은 거의 모두가 퇴계의 문도였으니 이러한 사실에서도 그의 지향하는 바가 드러난다 할 수 있다. 오수영과 예안 지역 퇴계 학파와의 교유를 통해서 퇴계 학맥의 실체적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시에는 우도(友道)에 관한 시가 많은데, 여기에는 진솔한 인간미가 표출(表出)된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대부분의 인물들이 퇴계문도였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따스한 감성을 보이는 영물시(詠物詩)에서는 그의 번뜩이는 재치를 느낄 수 있다. 전란(戰亂)의 체험을 담은 시들을 통해 노년에 겪은 전란의 체험을 담담히 그려내고 있다. 거기에는 노년이라 직접 참전(參戰)할 수 없는 무력감이 짙게 깔려 있다. 본격적인 그의 시세계에 대한 탐색은 추후의 연구 과제로 남겨둔다.
조선중기 북인의 모집단을 형성하는데 주축이 되었던 학파는 남명학파와 화담학파였다. 경의(敬義)의 실천을 강조한 남명의 사상은 임진왜란 때 다수의 의병장을 배출하였고, 광해군대 정인홍이 북인의 영수로 활약하면서 그 사상이 이어졌다. 이외에 성리학을 절충적으로 이해하고 개방적 성향을 보인 화담의 사상이 북인 학파에 큰 영향을 미쳤다. 광해군대에 북인이 정국을 운영할 때 실천적인 성향이 강해지고, 성리학에 대해 상대적으로 자유스런 분위기가 조성된 것에는 남명이나 화담의 사상적 영향력이 크다고 판단된다. 대북(大北)의 정인홍과 허균, 소북(小北)의 김신국, 남이공 등은 북인의 사상과 현실인식을 적극적으로 피력한 인물이었다. 1623년의 인조반정이후 사상계가 퇴계학파나 율곡학파가 주축이 된 주자성리학 흐름으로 정착되면서 북인(北人)의 사상은 시대의 주류적 흐름에서 밀려나게 된다. 정치사상에도 자파(自派)만이 군자당(君子黨)이라 확신하고 타 정파에 배타적인 입장을 취한 점 또한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 17세기 중반 인조반정과 호란을 거치면서 조선사상계가 주자성리학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북인(北人)의 사상은 역사의 전면에서 밀려나 저류적인 흐름으로서 그 역사적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북인(北人)의 사상은 17세기 중, 후반 근기남인 학자들이나 18세기의 실학자 이익(李瀷)에게 일정한 영향을 미치면서 그 흐름이 일부 이어졌다. 북인은 조선중기 서인, 남인과 함께 정치, 사상을 이끌어간 대표적인 정파이자 학파였다. 최근 북인의 뿌리가 되는 조식과 서경덕에 대한 연구를 비롯하여, 북인 정치사상의 계승에 대한 연구가 체계적으로 수행되고 있다. 이러한 연구는 조선중기 이후 정치사와 사상사 연구의 폭을 보다 확대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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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일 2004년 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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