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추사김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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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금석학(金石學)의 성취에 대한 재평가 - 박선수(朴瑄壽)의 금석학을 중심으로 - (A Revaluation of the Korean Epigraphy's Achievement-Focused on Park Seon-su's Epigraphy)

  • 문준혜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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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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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61-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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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본고는 금석학의 관점에서 박선수의 "설문해자익징(說文解字翼徵)"을 소개하고, 그것을 한국 금석학의 연구 성과에 포함시키려는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한국의 금석학은 19세기 초 추사 김정희(金正喜)에 의해 하나의 학문 분야로 발전되었다. 이 때문에 한국의 금석학은 대체로 김정희를 기점으로 그 이전과 이후로 시기를 구분한 뒤, 중요한 저작이나 연구자를 소개하는 형식으로 기술되었다. 기존의 연구를 종합해보면, 한국의 금석학은 금석문을 수집하고 한 데 묶어 편찬한 자료집 성격의 서적이 금석문을 해독하고 고증한 연구서 성격의 서적보다 많다는 특징이 있다. 또 저자의 국적에 관계없이 한국의 금석문을 수록한 책은 모두 한국 금석학의 범위에 포함시켰고, 종교적 이유로 편찬된 책도 금석문을 수록하고 있다면 금석학의 범위에서 제외하지 않았다. 이는 한국 금석학의 범위가 매우 넓게 설정되었음을 알려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 후기에 금석학에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던 박선수의 연구 성과가 누락된 것은 "설문해자익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박선수의 "설문해자익징"은 금석문을 이용하여 "설문해자"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려는 목적으로 편찬된 문자학 저작이다. 박선수는 금석문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이를 문자 연구에 활용하는 방법론을 개척했으며, 금석문을 분석하고 해독하는 등의 금석학적 연구를 수행하였다. 따라서 박선수의 "설문해자익징"은 한국 금석학의 연구 성과에 포함되어야 하며, 더 나아가 잘 알려지지 않은 연구자와 연구 성과를 발굴하여 한국 금석학의 성취에 대한 새로운 기술과 평가가 필요하다.

소치(小癡) 허련(許鍊)의 회화(繪畵) 연원(淵源)과 심미경지(審美境地) 고찰 (A Study on the Sochi Heo Ryeon's Painting's foundation and the stage of Aesthetic)

  • 김도영
    • 문화기술의 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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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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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71-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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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조선 말기 진도(珍島) 출신의 소치(小癡) 허련(許鍊)(1808~1893)은 시(詩) 서(書) 화(畵) 삼절작가(三絶作家)로서, 호남 화단의 실질적 종조(宗祖)라 불리운 대표적 화가이다. 초의선사(艸衣禪師)로부터 유(儒) 불(佛) 도(道)와 함께 회화의 기초를 배웠고, 초의(艸衣)의 소개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문하생이 되었다. 이후 추사(秋史)의 문인지향적(文人指向的) 서화정신과 화이재도적(畵以載道的) 회화심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이를 계승하였다. 그의 생애와 예술활동의 특징은 70이 넘은 만년(晩年)까지 지속된 주유(周遊)와 다작(多作) 활동, 그리고 주유(周遊) 기간의 세부사항까지 서술한 "소치실록(小癡實錄)"의 기록이다. 소치(小癡)는 사의적(寫意的) 남종화(南宗畵)를 지향하여 예황풍(倪黃風)의 산수화에서 자유분방한 갈필(渴筆)과 소산간일(蕭散簡逸)한 충담미(沖澹美)를 발현하였다. 또한, '허목란(許牧丹)'이라 불리울 만큼 운필변용(運筆變容)의 생동미(生動美)를 자아내는 모란은 괴석(怪石)을 함께 그려 부귀공명(富貴功名)에 대한 욕망과 문사적(文士的) 취향을 동시에 만족시켰고, 이후 가전(家傳)되어 '운임산방(雲林山房)'의 대표적 화목(畵目)이 되었다. 그의 토착화된 화풍(畵風)과 회화(繪畵) 심미(審美)는 200여년의 5대(代) 직계(直系) 화맥(畵脈)을 형성하여 지금까지 현대 한국화단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朝鲜秋史与清文人学术交流之小考 -以翁方纲與阮元为中心 (A Study of Korean Kim Jeonghui and Qing Dynasty Scholars Academic Exchanges -Focus on Weng Fanggang and Ruan Yuan-)

  • 최창원
    • 산업진흥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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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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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7-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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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After the Qing Dynasty overthrow of the Ming dynasty, this is far-reaching influenced on the Ming Dynasty's Sovereign state of the Joseon dynasty. Not only did regulations prohibit the entry into various books published by the Qing Dynasty, In addition, the "Northern Expedition" of Song Siyeo put forward the mainstream political proposal of the Northern Expedition and Qing Dynasty.Even in this context, Representatives of scholars such as Hong Daeyong, Bak Jega, Kim Jeonghui on the Joseon dynasty peninsula at the time, put forward the idea of "Learning from Central Plains" through several visits to Shuntian Prefecture (now Beijing), And gradually formed the well-known Silhak (Practical Learning) ideological of "Bukhak, (Northern Learning)" in the Joseon dynasty history. the Joseon dynasty Silhak ideological scholar of Kim Jeonghui also was under the influence of the Weng Fanggang and Ruan yuan other famous Qing Dynasty Textual scholar, Fruitful achievements in Chinese Classical Studies Epigraphy, Calligraphy.He founded the "Chusa-che" style of calligraphy Chusa, the "Chusa-che" styled is although born out of the clerical script, but more composition and See also asymmetrical in harmony, Strong and vigorous brush strokes, Every word vibrant, Make it a master of gold stone calligraphy in the Joseon Dynasty.This study based on some records of Kim Jeonghui's visited to Shuntian Prefecture(now Beijing), this article examines the academic activities of seeking truth to facts in Korea and the Qing Dynasty at the time, and the impact on these activities on calligraphy and painting in the Joseon Dynasty.

시문과 바위글씨로 본 함양 대고대(大孤臺)의 경관 향유자와 장소패권(場所覇權) (A Study on the Persons Enjoying the Landscape of Daegodea in Hamyang and Space Hegemony through Analysis of Poetry and Letters Carved on the Rocks)

  • 노재현;이정한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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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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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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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본 연구는 함양 남계천변에 돌출한 바위 대고대의 경관성과 향유 주체에 주목하였다. 옛 시문과 석벽에 의탁(依託)된 인명 등 바위글씨의 분석과 해석을 통해 이곳의 장소 특성을 밝히고, 대고대에서 벌어졌던 경관 향유와 장소 패권 양상을 조명한 본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고지도에서 나타난 대고대는 지근거리에 5개소의 서원이 집중 포치(布置)되고 있으며, 대(臺) 자체의 입체적 볼륨감과 기괴함이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16C 옥계(玉溪) 노진(1518~1578)에 의해 최초로 명명된, 대고대(大孤臺)의 쓰임새를 고대(孤臺) 정경운(鄭慶雲: 1556~?)의 고대일록(孤臺日錄)에 근거해 분석한 결과, 남계서원 등의 임원과 유생의 조망 놀이 휴양 회의 계회 등 다양한 용도의 정치 사회적 소통의 장으로 활용된 것으로 확인된다. 대고대의 공간구성을 살펴보면 구졸암(九拙菴) 양희(梁喜: 1515~1581)의 신도비를 중심으로 상단 암벽에는 청근정(淸近亭)이, 그 서측에는 산앙재(山仰齋)가 위치한다. 동서로 펼쳐진 높이 11m, 넓이 약 $350m^2$의 대고대 반석 상부는 강론과 음영을 위한 장소로 널리 활용되었다. 반석 북서측에 '석송(石松) 추사(秋史)'라고 음각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서체의 바위글씨와 그 옆의 일명 '석송'이라 불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사목의 잔해는 이곳의 역사성과 진정성을 한층 강화시켜 주는 경관요소이다. '대고대(大高臺) 개은서(介隱書)'와 '묵헌(默軒)' '정근상('鄭近相)' 바위글씨는 각각 개은(介隱) 정재기(鄭在箕: 1811~1879)와 그의 증손(曾孫) 정근상(鄭近相: 1893~1934)에 의해 기록된 배타적 공간 향유와 장소패권의 산물이자 조선 말기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그들이 이곳 대고대의 향유 주체였음을 알리는 낙관(落款)이다. 요컨대 대고대는 조선 중기 이후 '구졸양선생장구소'로서 장소 선점의 묵시적 의미를 지녀왔으며, 조선말기와 일제강점기에는 정재기와 정근상의 연이은 장소패권 과정을 거치면서도 '동북강회소 천령제선현장구소'라는 범함양(凡咸陽)의 다자(多者) 강회 및 추념공간으로 변형 계승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벽에 쓰여진 다수의 인명 바위글씨는 '하동정씨(河東鄭氏)'와 '풍천노씨(豊川盧氏)'가 대고대의 경관 향유 및 장소패권의 주체였음을 묵언한다. 대고대에서 새긴 '바위글씨'는 경관향유 의지의 표상이자 장소 주도권 쟁탈을 보여주는 또 다른 형태의 문화경관이자 정원 경영의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