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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암(豹菴)의 「호가유금원기(扈駕遊禁苑記)」에 나타난 궁원 유람행사의 내용과 의미 (Content and Meaning of Royal Garden Sightseeing Event in Pyoam's 「Hogayugeumwongi」)

  • 홍형순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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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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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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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본 연구의 목적은 표암의 "호가유금원기"에 담긴 궁원 유람행사의 내용과 의미를 밝히는 것이다. 본 연구의 방법은 사료에 담긴 내용과 의미를 고찰하고 해석하는 기술(description)적 연구방법이 사용되었다. 본 연구의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왕이 친히 신하들에게 궁원을 안내하고 설명한 일을 기록한 "호가유금원기"는 한국의 조경문화사에 있어 매우 귀한 사료이다. 이러한 일은 중국은 물론 조선시대에도 전무후무한 일이다. 2. 특히 이 일을 기록한 사람이 당대에는 시 서 화 삼절로 이름이 높았고 후대에는 '예원(藝苑)의 총수(總帥)'로 평가받는 표암 강세황이라는 점은 이 사료의 가치를 더한다. 3. 이 유람 행사의 성격은 정조의 집권 초반기에 친정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규장각의 완비, 왕의 위엄을 나타내는 어진 도사 등에 기여한 근신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자리였다. 정조는 자신의 정치 이념을 실현하는데 공이 큰 근신들의 노고에 대한 은전을 베풀기 위해 궁중 내에 금단의 공간인 금원을 활용하였다. 4. 창덕궁 후원에 대한 유람 동선의 하나를 확인할 수 있었다. 후원을 유람하는 동선이 고정적이지는 않았으나 이것은 이날의 가을 정취를 즐기기 위해 정조가 의도적으로 선택한 최선의 유람 동선이었을 것이다. 5. 이 행사의 특징은 격식이 없고 다소 즉흥적인 '유람'이었다. 즉 정조 치세 중반 이후에 신하들에게 베푼 '상화어조연(賞花漁釣宴)'은 꽃구경과 낚시, 시 짓기 등 행사의 개최시기와 형식, 참가자격 등의 틀을 갖춘 궁중 '연회'였음에 비해 이날의 행사는 비교적 사적이고 자유로운 '놀이(遊)'였다고 판단된다. 본 연구는 관련 사료들의 고찰을 통해 "호가유금원기"를 쓴 전후 맥락을 비롯해 이에 담긴 내용과 의미를 고찰하였다는 의미가 있다. "호가유금원기"는 귀중한 문화콘텐츠로서 추후 궁원 관람에 있어 스토리텔링 자원으로서 활용 가능할 것이며 이에 대한 후속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제6회 산란계 경제능력 검정 성적 발표 (1971.4.1~1972.8.15 : 500일간)

  • 사단법인 한국가금협회
    • 월간양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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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권10호통권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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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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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2
  • 1. 육추율 육성율 성계생존율 육추율 99.7$\%$는 1회 98.5$\%$, 2회 99.2$\%$, 3회 99.8$\%$, 4회 98.3$\%$ 5회 98.7$\%$와 근사하다. 육성율 평균 87.1$\%$는 1회 97.5$\%$, 2회 97.2$\%$, 3회 96.6$\%$, 4회 97.9$\%$에 비하여 10$\%$정도 낮으며 5회 89.7$\%$보다도 2.6$\%$ 낮은데 이는 근년 많이 발생하는 마렉병 및 백혈병이 주원인이며,(7회 검정계 부터 마렉병 예방접종)현 김포검정사 신축이 장마로 인하여 지연되므로서 더욱 임시육추사에서의 육성기간에 스트레스를 받았기 때문이며 성계생존율은 평균 75.3$\%$이며, 1회 80.3$\%$, 2회 84.8$\%$, 3회 71.8$\%$, 4회 87.3$\%$, 5회 71.4$\%$ 이었다. 이를 폐사원인별로 보면 세균성 질환으로 인한 폐사가 전체폐사수의 8.9$\%$ 병독(마렉병 및 백혈병)이 61.5$\%$원충 0.7$\%$ 대사장애 9.2$\%$ 생식기장애 3.4$\%$ 내장파열(간파열 탈항등) 5.7$\%$ 곰팡이 1.1$\%$ 기타(복막염 장염등) 9.5$\%$로 마렉병 및 백혈병이 주인이며 이를 검정각회별로 보면 1.2회 32.3$\%$, 3회 43.3$\%$, 4회 41.3$\%$, 5회 56.2$\%$, 6회 61.5$\%$로 매년 증가하고 있다. 2. 성성숙일령 전체평균 155.9일로 가장 빠른 구는 4구의 144일이고 가장 늦은 구는 23구의 166일이며 1일 189.2일, 2회 181.2일 보다 30일 정도 빨라진 것은 1.2회 검정은 산란율 50$\%$ 연2일 산란한 전일로 계산하였으며 3회 검정부터는 산란율 50$\%$에 달한 일령으로 계산하였기 때문이다. 3. 산란율 산란지수 산란율 평균 64.6$\%$이고 최상위구는 77.1$\%$, 최하위구는 52.8$\%$이며 유색품종 평균산란율은 58.4$\%$ 백색품종은 66.6$\%$이며 성성숙일령이 빨라짐에 따라 전체산란율은 약간 떨어지고 있다. 산란지수-평균은 189.7개로 200개 이상 산란한 상위군이 모두 성계생존율이 높은 구임을 알 수 있다. 4. 사료요구율 전체평균 2.8로 1회 3.54, 2회 3.1., 3회 3.98 4회 2.87, 5회 2.83으로 점차 개선되어 가고 있으며 유색품종의 사료요구율 평균은 3.3이었다. 5. 난평균중량 평균 58.4g로 최상위구는 60.8g, 최하위구는 56.6g 이며 국산계의 평균난중은 57.9g 외국제 평균난중 58.6g이었다. 6. 체중 평균체중은 300일령 2,117.g, 500일령 2,207이며 유색품종은 300일령 2.6160g, 500일령 2.656.7g이었다. 7. 사료 섭취량 사료섭취량 평균은 1일수당 육추기 33.6g, 육성기 68.5g, 산란기 109.9g이었다. 8 경제성 총수입은 2,539,799 으로 전체수입의 85.3$\%$가 계란수입이고, 폐계 수입은 14.7$\%$이다. 지출은 총계 1,854.517원으로 전체 지출의 92.5$\%$가 사료비, 7.5$\%$가 초생추대이었다. 9. 후기 마렉병 백신이 71년 중반기부터 수입되므로써 마렉병 예방접종을 하지 못하므로서 전체 폐사 수의 61.5$\%$를 차지하는 많은 피해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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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보(朝報)에 대한 몇 가지 쟁점: 필사보조의 기원, 명칭, 폐간시기, 기문기사 성격과 민간인쇄조보를 중심으로 (Considering a Few Issues on 'Chobo': Handwritten Chobo's Origin, Name, Discontinuance & Privately Printed Chobo)

  • 김영주
    • 한국언론정보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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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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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47-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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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이 논문의 목적은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조보의 기원 문제를 다시 한번 검토해보고, 조보의 명칭 및 폐간시기 문제를 비롯하여 기문기사 성격, 선조 때 발생한 민간인쇄조보 발행사건 등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는 데 있다. 내부적 통보매체인 필사조보는 조선왕조 초기에 해당하는 15세기 말경(대략 성종대)에 탄생하여 중종조에 체계적인 발전을 이룩하였으며, 정부의 인쇄관보와 한말의 유수한 민간일간지들이 발행되었던 1907년 11월(승정원의 왕명출납기능을 수행하였던 비서감이 폐지됨)까지 지속적으로 발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보의 명칭 가운데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된 용어는 조보(朝報)였고 그 다음이 저보(邸報)였다. 다음으로는 조지(朝紙), 기별(奇別), 난보(爛報), 경보(京報)의 순이었으며, 나머지 용어들 예컨대, 기별지(奇別紙), 저장(邸狀), 저지(邸紙), 보장(報狀), 한경보(漢京報), 영기(營奇) 등은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기별'은 조선조 중반(중종대-인조대)에, '조지'는 조선조 후반(숙종대-고종대)에 집중적으로 사용되었다. 필사조보는 폐쇄성과 난초체라는 속기로 필사되어 주요 독자층인 사대부들이 구독하기가 매우 불편하였으므로 1577년(선조 10년) 8월 서울에 사는 수명의 민간인(양민층인 기인(其人))들이 의정부와 사헌부로부터 발행허가를 얻어 목활자로 인쇄조보를 발행하였다. 민간인쇄조보가 약 3개월 동안 발행된 시점에, 선조는 "사국(史局)을 사설화(私設化)하고 국가기밀을 누설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폐간조치하고 신문발행 관련자 30여 명을 유배시키고 언론 양사(사헌부와 사간원)의 책임자를 경질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조선시대 일부 기인(其人)들이 중국 인쇄조보를 본 떠 만든 민간인쇄조보(목활자본)는 그당시 중국의 인쇄신문 형태(길이 $20{\sim}25cm$, 폭 $10{\sim}15cm$, 면수 $5{\sim}10$쪽)와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민간인쇄조보는 선조의 탄압정책으로 약 3개월 만에 폐간되는 비운을 맛보았지만 영리를 목적으로 민간인이 발행하고 활판인쇄술을 세계 최초로 채용하여 발행하였다는 점에서 세계 최초의 '활판인쇄 상업일간신문'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신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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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통옹기의 통기성에 관한연구 (Study about porous of Korean traditional pottery)

  • 김석호
    • 조형예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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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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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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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서 수렵과 채취를 하는 동안 저장을 위해 자연스럽게 생겨 난 그릇은 위대한 발명이었다. 현대에 와서 사회의 변화와 과학의 발달로 자연의 순수한 재료로 만들어지던 그릇과 각종 저장용기들이 플라스틱과 철이라는 새로운 재료들로 만들어져 생활의 편리함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심각하게 늘어나는 환경문제로 인해 인류는 자연으로의 회귀를 추구하려는 경향들이 생겨났다. 그 대표적인 트렌드가 웰빙(well-being)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결국 과학문명이 발달하기 전 우리선조들이 추구해왔던 삶으로 돌아가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선조들은 자연과 더불어 삶을 살았고 자연에 순응하면서 살았다. 집을 지을때도 자연의 일부로서 집을 짓고 자연과 닮은 집을 지었다. 사계절을 지내기 위해 음식을 저장하는 방법을 연구하여 집안 곳곳에 저장창고와 저장용기를 배치하였다. 현재를 살아가는 한국 사람들은 집집마다 냉장고에 김치를 보관한다. 하지만 조상들은 자연을 이용한 저장방법을 연구해 시와 때에 맞춰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했다. 웰빙 열풍과 함께 한국의 음식이 세계화 되고 있고, 그에 따라 선조들의 지혜에 대한 관심도 점점 증가하고 있다. 김치의 세계화로 김치를 저장했던 용기에 대한 관심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본 연구는 예부터 발전해온 도기의 일종인 옹기의 발전사를 문헌을 통해 알아보고 과학적인 실험을 통해 선조들의 지혜가 담긴 옹기의 특성을 연구함으로서 옹기 장점과 필요성을 알리고 더 나아가 옹기의 특성을 활용한 친환경적인 기물의 개발에 힘쓰도록 유도함에 그 목적이 있다.론으로 재해석할 수 있는 민족적 표현임을 알 수 있다.다. 이러한 배경 아래 키키스미스의 작품 세계를 고찰하기 위해, 신체를 통해 의미의 지평이 열리는 객관적 방법을 모색한 결과, 기호학과 신체론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즉 신체를 객관화하여 가장 기초적인 수준에서 표현적인 부분과 내용적인 부분을 구조적으로 나누어 그 관계에 의해 의미가 발생하게 되는 과정을 기호와 텍스트의 개념에서 시작하였다. 나아가 이 표현면과 내용면의 구조적인 결합방식을 그레마스(A. J. Greimas)의 구조의미론에서 다룸으로써 의미의 확장을 위한 토대론적 작업을 구축하였다. 한편, 신체론에서는 세계와의 관계항으로서 신체를 조망하게 해준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현상학(Phenomenology)과 애브젝션(abjection)의 개념을 통해 해체와 파편의 신체를 전달하게 해준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의 논의가 구조의미론적 분석을 해석으로 확장시키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키키 스미스는 1980년대 중반 죽음에 대한 서사에서 시작된 이중화와 파편화의 신체로부터 상처받을 수 있는 신체의 비천함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1990년대 그리고 상처의 치유에 이르는 종교와 신화로 이어지는 2000년대 이후의 과정을 보여주었다.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향후 부작용은 증가시키지 않으면서 국소제어율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것을 사료된다./Cip1}(-)/p27^{kip1}(-)$인 경우는 미만형인 경우(87.0%)가 장형(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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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성인 여성에서 영양표시 사용과 식행동 요인과의 관계 (Dietary Behavioral Correlates of Nutrition Label Use in Korean Women)

  • 이혜영;김미경
    • Journal of Nutrition and Heal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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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1권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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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39-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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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본 연구에서는 한국 성인 여성에서 영양표시 사용의 특성을 파악하고 식행동과의 관련성을 분석하고자 서울 및 6대광역시 (서울 45.4%, 부산 14.0%, 대구 9.8%, 인천 11.8%, 광주 7.0%, 대전 6.9%, 울산 5.0%)의 20${\sim}$60세 성인 여성 2,073명을 대상으로 조사하였으며, 그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영양표시에 대한 행동변화단계는 고려전단계 5.9%, 고려단계 35.9%, 준비단계 26.6%, 실행단계 19.0%, 유지단계 12.6%로서 영양표시 사용군은 실행 유지단계에 있는 사람들로 31.6% (654명)였고 영양표시 비사용군은 고려전 고려 준비단계에 있는 사람들로 68.4% (1,419명)였다. 2) 소득이 150만원 미만 또는 150${\sim}$300만원 미만, 고졸 이하의 경우 영양표시 비사용군이 사용군보다 유의적으로 높았고, 중반 연령 (30${\sim}$49세), 1주 1회 이상 운동자, 식이보조제 사용자의 경우 영양표시 사용군이 비사용군보다 유의적으로 높았으나 결혼, 임신 수유, 자녀, 흡연 유무에 따라서는 영양표시 사용군과 비사용군간에 유의적인 차이를 나타내지 않았다. 스스로 질병을 자각하는 비율은 영양표시 사용군이 비사용군보다 유의적으로 높았으며 저체중군은 영양표시 비사용군이 사용군보다 유의적으로 높았다. 식품구매시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인은 맛 (42.5%) > 영양 (23.6%) > 가격 (21.1%) > 편이성 (9.6%) > 분위기 (3.2%) 순이었고, 영양은 영양표시 사용군이 비사용군보다 유의적으로 높았다. 3) 영양표시 사용군은 비사용군에 비해 과잉섭취우려 성분 (나트륨, 콜레스테롤, 당, 트랜스지방)과 질병 간 관계에 대한 신념이 더 높았고, 비타민 C, 칼슘 같은 권장섭취 성분과 질병 간 관계에 대한 신념은 차이가 없었다. 건강한 식습관의 중요성에 대한 전체 대상자의 인식도는 평균 4.2 ${\pm}$ 0.8로서 모든 항목에서 높은 편이었고 영양표시 사용군이 비사용군보다 약간 높았다. 4) 식사의 질에 대한 전체 대상자의 평균 점수는 3.2 ${\pm}$ 0.8로서 영양표시 사용군은 비사용군보다 과일류, 채소류, 유류, 고기 육류 콩류, 다양한 식사섭취에 대한 식사의 질 점수와 콜레스테롤, 열량에 대한 식사의 질 점수가 유의적으로 더 높았다. 5) 전체적으로 영양표시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영양표시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에 비해 식사의 질이 2배 높았다 (OR: 2.01, CI: 1.66${\sim}$2.44) (P < 0.001). 고소득이면서 영양표시를 사용하는 사람은 저소득이면서 영양표시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에 비해 식사의 질이 2.5배로 좋았으며 (OR: 0.39, 0.36${\sim}$0.69) (P < 0.001). 고소득인데 영양표시를 사 용하지 않는 사람의 식사의 질은 고소득이면서 영양표시를 사용하는 사람의 1/2수준으로 낮았고 (OR: 0.56, 95% CI:0.43${\sim}$0.73), 저소득의 영양표시 사용자보다도 식사의 질이 더 낮은 경향을 나타내었다. 본 연구결과 한국 성인 여성에서 영양표시 사용자는 비사용자에 비해 나트륨, 콜레스테롤, 당, 트랜스지방과 같은 과잉섭취우려 성분과 질병 간 관계에 대한 신념이 더 높고, 건강한 식습관에 대한 인식이 더 높으며 식사의 질이 더 좋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상의 결과를 종합해볼 때, 소비자가 영양표시를 이해하고 식사에의 활용성을 증가시킬 수 있도록 보다 체계적인 교육방안이 강구되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또한 향후 식사의 질에 미치는 영양표시 사용의 다양한 특성에 관한 연구를 비롯하여 어떤 영양표시정보가 식생활개선과 관련이 있는가 등에 대한 연구 및 영양표시와 식행동 간 인과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아울러, 본 연구에서 사용된 식생활진단표 등 조사방법의 타당성에 관한 연구가 추가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영양표시 교육 및 정책 수립을 위해 국가단위에서의 소비자 조사.연구가 지속되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Oswald Veblen이 미국수학계에 미친 영향과 한국에서의 의미 (Contribution of Oswald Veblen to AMS and its meaning in Korea)

  • 이상구;함윤미
    • 한국수학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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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2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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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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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미국 수학계는 하버드대학이 근대수학 교과과정을 도입 한 후 280여년(1640년)이 지나고, 미국수학회(AMS; American Mathematical Society) 창립 후 30년(1890년 뉴욕수학회, 1894년 미국수학회)이 지난 1920년대에도 아직 열악한 연구 여건을 가지고 있었다. 본 연구에서는 미국수학계에 국가연구위원회(National Research Council, NRC)를 통하여 수학분야에 최초로 박사후연구원을 지원하는 제도를 만들고, 기금을 조성하여 프린스턴대학에 당시 세계 최고수준의 수학과 건물인 파인 홀(Fine Hall)을 건축했으며, 1932년 새로 생긴 프린스턴 고등연구소(IAS)에 A. 아인스타인(Einstein), 폰 노이만(von Neumann)등을 초빙하고, Math Review 창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며 미국에서도 수학자가 순수수학 연구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미국 초창기 수학자 O. 베블런(Osward Veblen)에 대하여 분석한다. 20세기 초반 대부분의 시간을 식민지 상태에서 보낸 한국은 20세기 후반에 회원들의 적극적인 학술활동에 힘입어 2008년 현재 국제수학연맹(IMU)의 5그룹(투표 수를 뜻함) 중에 4 그룹에 속하게 되었다. 더구나 2014년 국제수학자대회(ICM)를 서울에서 유치하게 되었다. 한국이 21세기를 한국 수학의 빠른 발전기로 만들 가능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한 긍정적인 답을 수학 후진국이었던 미국이 1876년 J. 실베스터를 초빙하여 연구 수준의 수학교육을 최초로 시작한 후 궁극적으로 시카고대학의 E. H. 무어(Moore)가 미국수학회장으로 리더쉽을 발휘한 1900년부터 단 100여년 만에 세계 수학 정상에 자리한 미국수학과 미국수학회의 예를 검증하여 찾아보고자 한다. E. H. 무어가 배출한 인재와 제시한 비전은 E. H. 무어의 제자, L. E. 딕슨(Dickson), O. 베블런, R. L. 무어와 G. D. 버코프(Birkhoff)를 통하여 미국에 구현되었다. 그 중 O. 베블런은 'Princeton algebraic topology' 그룹을 리드하며 미국수학 전반에 세계적인 연구여건을 조성한 탁월한 행정능력가 이었다. G. D. 버코프의 역할은 수학에 대한 학술적 기여의 비중이 컸다. 이들은 20세기 중반 미국이 세계 수학연구의 주류에 진입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9],[10],[21]). 수학자 베블런은 당대 미국 최고수준의 학술적 경지에 도달하였고 1923년 미국수학회장을 역임하였으며 자신이 미국수학계에 제시한 비전과 통찰력을 실제로 구현한 수학자, 리더, 그리고 창조적인 행정가였다. 본 논문은 수학자 베블런이 미국수학계에 끼친 전반적인 영향을 연구하고, 이를 통하여 미국 수학에 실질적인 경쟁력을 부여하며 미국을 세계 수학의 주류에 진입시킨 초창기 미국 수학계 리더의 역할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본 연구는 근대수학 교과과정 도입 110여년, 2007년 대한수학회 창립 60년을 맞으며 최근 20년간 커다란 발전을 이루어 양적인 면에서는 2007년 세계 12위로 평가된 한국의 다음 단계로의 발전에 대한 논지를 제공하고, 실제로 한국이 세계 수학의 주류로 진입하는데 필요한 구체적인 할 일(Action plan)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이는 빠른 변화가 진행되고 있는 국내 과학기술계의 흐름에서 수동적인 추종이 아니라 수학계 스스로 연구-교육-봉사에 균형 잡힌 비전을 제시하고 추구하는 긍정적인 모델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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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통합성의 윤리 (The ethics of integrity)

  • 이혜정
    • 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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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4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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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19-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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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오늘날 자아에 대한 높은 관심과 덕 윤리의 부활로 윤리학계에서는 자연스럽게 integrity에 관심이 모아진다. 그런데 integrity는 학자들 사이에서 다양한 층위에서 이해되고 번역되고 있기 때문에 번역 용어 또한 다양하다. 필자는 integrity를 자아 통합성으로 번역한다. 그 이유는 첫째, integrity의 라틴어 어원을 살리기 위해서이다. 그 어원의 의미는 전체가 분리되거나 변질되지 않는 흠 없이 잘 돌아가는 통합된 상태를 말한다. 둘째, 그것이 도덕적으로 좋은 삶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통합성이라는 말은 의식의 흐름으로서의 통합성이 아니며, 더욱이 고대 그리스로부터 전제되어진 실체적 자아 동일성으로서의 통합성도 아니다. 필자는 자아통일성을 매킨타이어의 이야기의 통일성을 통해서 논의를 풀어나간다. 매킨타이어의 핵심적 주장은 자아는 성격에 깃들어 있기 때문에 자아 통합성을 성격의 통일성과 연결되며, 성격의 통일성은 자아 동일성을 전제하는 것으로서, 궁극적으로 이야기의 통합성은 그 성격의 통일성을 요구한다. 그런데 그는 자아의 개념은 이야기의 시작과 중반과 종말과 같이, 탄생과 삶과 죽음을 결합시키는 이야기의 통일성 속에 자신의 통일성의 기반을 두고 있다고 말한다. 자아는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삶 속에 침전된 시간의 지속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그의 역사가 되고 이야기가 되는 삶의 과정 속에 있다. 자아가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주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이 이야기들을 구성하는 경험과 행위에 책임을 진다는 것과 책임을 묻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이야기와 시간성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현재의 자아는 과거의 자아를 이야기하고 또한 미래의 자아로 앞서 달려가 이야기함으로써 책임의 문제를 가져올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시간성 안에서만 삶의 통일성, 설화적 통일성을 확보할 수 있으며, 책임을 질수 있고 물을 수 있는 존재가 된다. 그런데 그러한 자아 통합성의 삶을 사는 사람은 누구인가? 우리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을 통해서 자아 통합성의 삶을 이해할 수 있다. 할머니들은 이야기를 통해서 역사의 주체가 되며, 그럼으로써 자신의 자아 통합성을 실현하는 것이다.

북한산 조계동 송계별업(松溪別業) 정원 복원을 위한 경관해석 (A Study on the Landscape Interpretation of Songge Byeoleop(Korean Villa) Garden at Jogyedong, Mt. Bukhansan near Seoul for the Restoration)

  • 노재현;송석호;조장빈;심우경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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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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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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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문헌연구와 현장연구를 바탕으로 17C 중반 북한산 조계동(曹溪洞)에 조영된 송계별업의 장소성과 별업의 정원상 및 경관상을 추적하여 송계별업 원림의 복원을 전제로 한 경관해석을 시도한 본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송계별업은 인조의 3남이자 효종의 아우인 인평대군 이요가 인조 24년에 조성한 왕가별업이다. 본제는 직선거리로 약 7km 떨어진 건덕방 타락산 아래의 궁집 석양루로서, 대군이라는 조영주체의 신분적 특수성 때문에 송계별업 또한 단청 및 건물의 제도가 매우 화려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의 장소정체성이자 핵심경관은 구천은폭으로 중국 여산폭포에 비견되는 다층의 폭포를 갖는 관폭과 청음의 공간이었으며, 별업 멸실 이후에는 왕릉 부석장으로 역할과 부석금표처의 장소이미지가 더해졌다. 조계동천을 중심으로 한 송계별업 내원은 구천은폭을 비롯하여 한담과 창벽 등의 자연경관과 비홍교, 보허각, 영휴당 그리고 계당 등의 인공요소가 절묘하게 조화되었다. 또 현존하는 '송계별업'과 '구천은폭' 바위글씨는 별업원림의 조영자와 영역성을 상징하는 경관언어이자 장소 표식으로, 보허각을 중심으로 비홍교, 창벽, 한담 등의 경물명을 바위에 세기고 의미를 부여하였다. 특히 시각적 종점의 역할을 하는 구천은폭은 캐스캐이드형의 다단폭포로서 그 하부는 말구유 형상의 절리상 포트홀의 지형경관적 특성을 보인다. 한편 외원은 별업 정문과 행랑채 성격을 갖는 공간과 내 외원 양자를 연결시켜주는 계당과 돌다리 그리고 기거를 목적으로 한 영휴당 등으로 구분된다. 영휴당에서는 보허각만 관망되는 반면 보허각에서는 구천은폭을 비롯하여 영휴당 등 사방의 조망이 가능하도록 한 이원적 조망 틀짜임이 읽혀진다. 또한 비홍교에서 구천은폭과 창벽 그리고 한담을 상호 부감 앙시하게 되며, 비홍교를 건너 보허각에 올라 구천은폭과 조계동천을 바라보는 단계적 행위를 체험케함으로써 속세에서 선계로 이행되는 시각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1950년대 중반 이후 농림/농업고등학교에서의 농악(農樂) 교육이 한국농악 현대사에 끼친 영향과 의의 (Impact and significance of Nongak(農樂) education in Agricultural High School since 1950 on the modern Korean Nongak History)

  • 양옥경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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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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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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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해방이후 국가적 초기화 상황과 다를 바 없는 국면에서, '민족주의'는 정부에 의해 혼돈과 분열의 상황을 극복하고 사회적 결속력을 높이기 위한 이념적 도구로 선택되었고, 많은 전통예술 그 중에서도 '민속예술'이 '민족예술의 정수'로 상징화되었다. 이와 함께 농악, 민요, 민속놀이, 무용 등과 같은 기층의 예술양식들이 이전의 지역 공동체사회보다 더 확장된 사회-국가로 불려나오게 되고, 그에 부응한 여러 사회문화적 현상이 잇따르게 되는데, 그 영향이 학교 교육의 범주에서도 발견된다 학교 안에서의 국악-민속예술 교육이 촉발되어 농악을 비롯하여 민속무용, 민속음악 등이 전문예술인들의 지도 하에 교내 학생들을 대상으로 전수되게 된다. 그로 인해 전문 민속예술인 양성을 목적으로 한 마땅한 교육기관이 극소수에 불과했던 당대에 농악인재를 양성하는 역할을 대행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런 현상은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보다 실업목적형 학교인 농림고/농업고에서 두드러진다. 그리고 그 교육성과는 당대를 넘어서 현재의 농악 전승 현장까지 연결되어 있으며, 각별히 한국 근현대농악사에 여러 유의미한 사실들을 낳았다. 본 글은 세 지역 농림고/농업고의 농악부 운영 실례를 통시적으로 살펴보고, 그것이 현재의 한국 농악 전승 국면과 어떤 사실관계에 있으며, 그에 대한 농악사적 의의와 시사점을 규명한다.

시조의 변이 양상 (The Aspects of Change of Sijo)

  • 강명혜
    • 한국시조학회지:시조학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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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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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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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시조는 발생초기부터 당대의 역사 시대적 배경에 따라 그 틀과 내용이 조금씩 변하면서 융통성 있고 유연하게 적응해 왔다. 이런 점이 당대의 시대적 배경이나 사상, 실태 등을 반영해서 당시의 독자들의 공감대를 이끌어낼 수 있었으며, 그러면서도 시조를 시조답게 하는 시조성만은 그대로 고수해 왔기에 '시조'라는 장르가 현재까지도 생존할 수 있었다. 어느 시대나 어떤 배경에서나 어떤 상황에서도 3장이라는 정형성은 지켜졌으며, 3, 3조나 3, 4조를 유지했고, 또 종장의 첫 구 3자도 고수했다. 이러한 시조성은 시대적인 간극에도 불구하고 '시조'라는 공분모 안에 모두 수렴시킬 수 있는 동인을 마련했다. 한국시가에 있어서 시조는, 공적 기능에서 사적 기능으로 변모가 이루어진 최초의 양식으로서. 그 변이과정을 살펴본 결과. 고려말${\sim}$조선조의 평시조는 그 당시 조류에 부합해서 시조 텍스트를 재도지기(載道之器)로 보아 이중적인 의미의 채색, 상징성 부여, 다채로운 문장 수식 등은 나타나지 않지만, 명천도(明天道) 정인륜(正人倫) 지향하는 성현의 가르침을 온유돈후(溫柔敦厚)하게 나타내고자 노력했다. 주제는 주로 그 당시 상황과 부합되는, 송축, 절의, 정쟁, 훈민, 한정, 강호도가, 안빈낙도, 애정 등이었다. 조선조 후기에 오면서는 사설시조(辭說時調)가 활성화하기 시작한다. 사림파의 득세와 양란(兩亂), 실학의 도입 등으로 조선조 후기에는 인식의 변화를 겪게 되었고, 이러한 변화가 시가 양식에도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사설시조는 당대의 봉건주의 파괴, 유교적 모랄에 대한 반발, 근대적 특성 보유 남녀평등등 사상, 지배층에 대한 고발 및 저항정신 둥이 주축을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저항적 리얼리즘적 현실지향적인 성향을 띠며 특히 고발문학 저항문학의 지반을 형성하는 장르적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무엇보다도 잡다한 일상사에 대한 상세한 묘사와 현실 생활에 대한 깊은 관심, 그에 대한 사실적, 구체적 표현은 사실주의 정신의 매개항이 된다는 점에서 근대성이 반영되어 있다고 보았다. 1905년 이후 신문에, 형식이나 내용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기존의 평시조나 사설시조에서 변이된 형태를 취하는 일군의 시조가 등장했다. 변이된 형태는 시조 텍스트의 형식과 내용뿐만이 아니라, 수용적 측면에서도 일어났다. 이때부터 시조는 '읊고 부르는 형태'에서 주로 '읽는 기록물'로 인식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변이 된 시조 형태란, 당대의 시대를 풍자하는 '흥, 내지 흐응'이 삽입된 것, 종장의 어미가 생략된 것 등을 말한다 이러한 형식은 긴박한 상태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특성을 지니기는 하지만, 고시조의 틀, 즉 율격이나 자수에서 많이 이탈되어서인지, 그 생명은 길지 못했다. 그러다가 192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해서 시조부흥운동이 일어나면서부터 시조 창작은 다시 활기를 띠게 되는데, 시조부흥운동은 최남선에 의해 주도되었다. 시작(詩作) 초기에는 서구지향의 시와 시조들 병행해서 쓰던 육당 최남선이, '조선국민문학(朝鮮國民文學)으로서의시조(時調)'라는 글을 통해 시조의 중요성과, 소중함을 언급하면서 시조부흥 운동을 선도한다. 그는 시조집, '백팔번뇌'도 출간하는데. 그의 전 시조집을 관통하는 것은 '조국 사랑'이라는 일 주제였다. 결국 육당은 고시조를 민족정신의 일환으로 보고, 시조양식을 채택하여 그 당시의 역사 사회적인 상황에 부합되는 주제를 표출한다. 결국 육당도 시조 텍스트를 재도지기(載道之器)로 여겼음을 알 수 있었다. 현대의 시조는 현대성(現代性)과 시조성(時調性)을 모두 만족시켜야 한다는 어려움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전자에만 치중한다면 자유시와의 변별성이 문제가 되며, 후자를 고수하려니 고루하고. 시적 묘미가 없다는 비난을 감수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많은 작가들에 의해 평시조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은 시조가 지니는 원형성에 대한 매력을 감지해서일 것이라고 보았다. 그들 중 특히 선정주의 작품에 주목했는데,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이지만 특히 근대의식, 사회비판정신, 고발의식, 사실주의 정신 구현, 서민의식, 산문체 ·일상어 지향 등, 사설시조의 특징 및 성향을 잘 구현, 반영하면서 그 맥을 잇고 있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렇듯이 현대의 시조 작가들은 우리의 고시가 형식을 다양하게 선택해서 다양한 주제를 표출하고 있었다. 여기서 추정할 수 있는 사실은 이러한 시조의 유연성은 앞으로 시조의 생명을 항구적으로 할 것이라는 것, 그리고 역사 시대적 변화와 상황 하에서 다시 새로운 양상을 취할 가능성을 보인다는 것, 그리고 이 '시조'는 한국인의 '영원한 정형시 장르'로 남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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