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조선시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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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 카메라와 깊이 맵을 활용하는 자유시점 입체 TIP 생성 (Free-viewpoint Stereoscopic TIP Generation Using Virtual Camera and Depth Map)

  • 이광훈;조철용;최창열;김만배
    • 한국방송∙미디어공학회:학술대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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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방송공학회 2009년도 추계학술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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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19-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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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자유시점 비디오는 단순히 수동적으로 비디오를 보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시점을 자유로이 선택하여 보는 능동형 비디오이다. 일반적으로 다양한 위치 및 다양한 각도에 위치하는 다수의 카메라로부터 촬영된 영상을 이용하여 제작하는데, 이 기술은 박물관 투어, 엔터테인먼트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된다. 본 논문에서는 자유시점 비디오의 새로운 분야로 한 장의 영상을 가상 카메라와 깊이맵을 이용하여 영상 내부를 네비게이션하는 자유시점 입체 Tour-Into-Picture (TIP)을 제안한다. 오래전부터 TIP가 연구되어 왔는데, 이 분야는 한 장의 사진 내부를 탐험하면서 애니메이션으로 볼 수 있게 하는 기술이다. 제안 방법은 전처리과정으로 전경 마스크, 배경영상, 및 깊이맵을 자동 및 수동 방법으로 구한다. 다음에는 영상 내부를 항해하면서 투영 영상들을 획득한다. 배경영상과 전객객체의 3D 모델링 데이터를 기반으로 가상 카메라의 3차원 공간 이동, yaw, pitch, rolling의 회전, look-around effect, 줌인 등의 다양한 카메라 기능을 활용하여 자유시점 비디오를 구현한다. 또한 깊이정보의 특성 및 구조에 따라 놀라운 시청효과를 전달하는 카메라 기능의 설정 방법을 소개한다. 소프트웨어는 OpenGL 및 MFC Visual C++ 기반으로 구축되었으며, 실험영상으로 조선시대의 작품인 신윤복의 단오풍정을 사용하였고, 입체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보다 실감있는 콘텐츠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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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광화문 월대(月臺)의 난간석 복원에 관한 고찰 (A Study on the Restoration of Stone Railings at Gwanghwamun Woldae in Gyeongbokgung Palace)

  • 전나나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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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4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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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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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경복궁 광화문은 고종 연간인 1866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함께 설립되었다. 광화문 남쪽으로 너른 단인 월대를 설치하여 위계를 드러냈다. 광화문 월대는 좌우에 난간석을 설치하였고, 중앙에 어로를 두었으며, 남쪽으로는 계단과 경사면을 설치하였다. 월대 어로와 이어진 남쪽 경사면에는 좌우에 용두석을 설치하여 왕의 길이라는 점을 조형적으로 표현하였다. 광화문 월대 중앙에 있던 어로는 1915년 조선진흥공진회가 경복궁에서 개최됨에 따라 넓혀졌고, 1925년경 월대가 훼철되었다. 이후 광화문 이전에 따라 그 형상을 찾을 수 없었다. 경복궁 광화문처럼 월대를 설치하는 모습은 다른 궁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월대 좌우에 난간석을 설치한 모습은 광화문이 유일하다. 현재 광화문 월대의 난간석과 경사로에 위치한 석수가 남아 있지 않지만, 사진을 토대로 비교한 결과 광화문 월대의 난간석은 19세기 조선 왕실에서 제작한 석물의 양상을 보이며, 용두석 역시 대한제국 시기에 조성한 상징물에서 유사한 모습을 찾을 수 있다. 한편 동구릉에는 능에 배치되지 않는 여러 석물이 남아 있는데, 홍예석, 문소전 구기비뿐 아니라 난간석의 부재인 난간석주, 동자석, 죽석이 전해진다. 조선왕릉봉분 주변에 설치하는 난간석은 민무늬로 된 석물이 없는 반면, 궁궐 주변에 설치된 금천교에서는 문양이 없는 난간석을 설치하는 경우가 다수 남아 있다. 동구릉에 있는 난간석과 용두석은 광화문 월대의 석물로 보이는데, 시대적 양식 분석과 근대 사진과의 비교를 통하여 광화문에 설치했던 석물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경복궁 광화문 월대의 석물은 1915년 공진회 때까지는 본래의 위치에 남아 있었지만 1920년대 조선총독부 청사가 들어서고 전차가 부설됨에 따라 훼철되었다. 조선총독부 청사 위치에 자리한 영제교도 이 시기에 훼철되었으며, 1930년대까지 경복궁 지역에 남아 있다가 동구릉 지역으로 함께 옮겨지게 되었다. 본 연구를 통해 현재 광화문 월대 복원을 추진하는 시점에서 복원의 단초가 되길 기대한다.

김정은 시대 북한 고급중 1 화학 교과서 시각자료 분석 (Analysis of Inscription in North Korean Higher-Level Middle School 1 Chemistry Textbook in the Kim Jong-Un Era)

  • 민병욱;박현주
    • 대한화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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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6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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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43-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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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이 연구의 목적은 북한 김정은 시대의 고급중 1 '화학' 교과서의 시각자료를 분석하여 북한 화학 교육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기초 자료로 제공하기 위함이다. 북한 고급중 1 '화학' 교과서 단원별 시각자료 유형과 기능을 분석하고, 남한의 2015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화학 I' 교과서의 시각자료와 비교하였다. 선행 연구를 바탕으로 하여 분석틀을 구성하여 시각자료를 분석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북한 교과서에서 사용된 시각자료의 유형은 사진과 삽화가 가장 많고, 그래프가 가장 적게 사용되었다. 둘째, 북한 교과서에서 사용된 시각자료의 기능은 탐구적 기능과 예시적 기능이 많고, 장식적 기능이 가장 적게 사용되었다. 셋째, 북한과 남한의 교과서 시각자료는 유형과 기능이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이 연구 결과는 북한 화학 교육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 궁궐정원의 원형경관 복원을 위한 제안 (A Proposition on Landscape Restoration of Joseon Dynasty's Palace Gardens)

  • 안계복;이원호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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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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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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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본 연구는 궁궐의 원형 복원문제와 관련된 논리적 판단의 준거들을 추출하고, 이를 경복궁과 창덕궁에 적용시켜 봄으로써, 그 효용성을 확인하는데 있다. 또한 궁궐의 원형 복원의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 방향을 제안하는데 의의가 있다. 우선 원형을 판단하기 위한 준거로는 "통시성과 공시성, 시원성과 시대성, 불변성과 변형성"의 6 개념을 추출하였다. 현재 경복궁은 1888년을 시대성 기준으로 복원하고 있지만, 1395년의 시원성을 갖는 원형에 주목할 필요성이 있다. 또한 현재 경복궁의 복원은 건물 위주로 복원하고 있지만, 추후 연구에서는 근대 촬영된 경복궁 사진을 밑바탕으로 경복궁의 원형경관이 복원될 수 있도록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창덕궁 존덕정 일원은 약 240년 동안 통시적 불변성을 지닌 원형이 1884년경에 변형된 것이다. 1884년이라는 시대성보다는 통시적 불변성을 더 중요하므로 동궐도의 원형대로 복원되어야 한다. 창덕궁 연경당 일원 원형에 대한 문제는 효명세자의 시원적 원형과 고종 때의 시대적 원형이 동일한 지역에 중복적으로 나타나는 지역이므로 복원을 위해서는 새로운 해결 방안을 모색하여야 한다. 옥류천 지역은 1636년(인조 14년)에 시작하여 숙종, 정조를 거치면서 적어도 1884년(고종 21년)까지 약 250년간 불변성(不變性)과 통시성이 돋보이는 원형이다. 1884년 이후 옥류천 지역에 이루어진 변형은 의미를 찾을 수가 없다. 따라서 옥류천 지역의 원형 회복을 위해서는 동궐도를 기준으로 변형된 경관을 복원해야만 한다. 그 밖에 옥류천을 건너는 다리, 샘, 담장, 초가들도 동궐도 기준으로 원형을 복원해야만 한다.

경복궁 후원 수림의 변화과정 및 주요 노거수군의 역사적 가치규명 (A Study on the Historical Values of the Changes of Forest and the Major Old Big Trees in Gyeongbokgung Palace's Back Garden)

  • 신현실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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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0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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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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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본고는 최근 74년만의 개방으로 수많은 관람객이 방문하고 있는 청와대 경복궁 후원 공간의 변화과정을 통하여 후원 경관의 역사적 가치를 규명하고자 조선일기와 조선왕조실록, 도성대지도, 북궐도형, 경복궁 복원기본계획 등의 사료와 도면 등을 근거로 경복궁 후원의 시원과 발달과정을 고찰하였고 이를 통하여 다음의 결과를 도출하였다. 첫째, 조선시대 경복궁 후원은 고려시대부터 명당으로 이름난 지역이었고 당시 남경으로 명명되며 신궁이 조성된 지역이었고 고려시대 이미 풍수도참사상과 주국의 고공기의 영향을 받아 궁성과 궁궐이 조영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조선시대 전기 경복궁 후원은 궁궐의 후원으로 각광받지 못하였으나 고종 시기부터 현재까지 국가 통치권자의 생활공간으로서의 장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둘째, 후원의 경계는 도성지도, La Coree, 경무대일원, 일본지리풍속대계, 한국사진첩, 조선건축도집, 경성부 도시계획 조사서 등의 문헌을 통해 신무문 밖 현재의 청와대 권역이 경복궁의 경외에 조성된 후원임을 규명하였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황폐화된 지역을 고종시기 중건과정을 거쳐 공사(公私)가 결합된 공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후원의 전각들이 이건되거나 훼철되며 법궁의 후원으로서의 장소성이 훼손되었으나 광복 후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며 다시금 통치자의 장소라는 가치를 회복하게 되었다. 셋째, 경복궁 후원은 왜란과 일제강점기를 통해 공간의 변화가 크게 일어났다. 지형적 변화가 가장 큰 곳은 조선총독부관저가 건립되었던 경농재 일원으로 토지의 용도변화가 빈번하였다. 반면 현 경무대지역과 소정원 옆 수림과 백악의 수림은 전통적 수림의 형태를 계승하며 보존되었다. 이를 명확하게 규명하기 위하여 1:1200의 경무대관저경내부지배치도와 위성사진을 신무문 기준으로 중첩하였고 그 결과 백악에서 발원한 물길이 현재에도 여전히 유존하고 있음을 확인하였고 물길을 따라 오늘날까지도 수림지역이 변화하지 않고 존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넷째, 전통적 수림경관이 계승된 지역들은 지형의 기능적 변화가 미비하였고 더불어 주요 노거수군이 존치되고 있다. 이 지역에서 확인되는 노거수는 역사적 가치를 가지는 지표수종들이었다. 대표적으로 녹지원에 자리한 반송은 융문당 옆 식재된 반송 중 일부가 보존되어 온 것으로 추정되며 국가원수와 중요 귀빈들의 만찬 시 포토존으로 활용되어온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마지막으로 청와대 내 경복궁 후원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보존관리하기 위해서는 일제강점기 사료들에 대한 발굴을 통해 공간의 가치를 명확히 규명하고 시대별 정원고고학적 층위의 위계를 설정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또한 경복궁으로부터 청와대로 이어지는 조선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는 역사경관을 보존하기 위한 근거는 과거부터 영속되어온 청와대 경복군 후원 노거수군의 영역대를 훼손하지 않아야하며 청와대 내 수림을 전수 조사하는 후속연구가 필요하다.

아동용 한복의 특성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Characteristics of the Children's Hanbok for the formal Ceremonies of Korea)

  • Ji, Yoon-Young;Lee, Hye-Young
    • 한국의류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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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6권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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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27-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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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2
  • 세계화, 국제화, 개방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통과의례나 전통 명절과 같은 특별한 행사에 의례복으로 한복을 애용하는 것은 한복이 한국의 문화적 이미지를 강하게 간직하고 있는 한국적 조형물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더우기 의례복은 특별한 행사 자체를 위해 착용되었던 만큼 당시대의 내 적 가치를 가장 현저하게 표출하고 있는 복식으로 인정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 연구의 목적은 시대 적으로 현대 전통 한복의 기본 형 식을 제공한 조선시대와 그 이후의 복식 중에서 특히 분명한 착용동기와 목적, 복식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는 상징성 등을 함축하고 있는 아동용 의례복을 대상으로 복식의 형태, 색채, 문양, 소재 등의 조형 요소를 고찰하는 것이다. 또한 양식적 특성을 살펴보고, 그러한 조형적 특성을 형성시킨 당시대의 사상적 가치를 추론해 보는 것이다. 구체 적인 연구 방법은 먼저 관련된 문헌 고찰을 통한 이론적 배경을 토대로 하여 아동용 의례복의 범주를 설정하고 현재 보전중인 실물과 또는 사진, 풍속화에 나타난 복식 자료들을 수집하였다. 그리고 당시대의 사상적 배경에 대한 고찰을 병행하여 이들에 내재된 문화적 가치를 추출해 보았다. 연구 결과 양식적 특징으로는 남아의 두루마기나 전복 그리고 쓰개류 등에서 기능성을 고려한 변형적 양식이 나타나고 있었다. 색채 역시 음양 보색이나, 오행색을 바탕으로 한 기본색의 구성 이외 에도 소매나 섶에 응용된 색의 배열이나 맞깃 전복의 깃에 나타난 색의 조화는 다양한 색의 조형미를 표현하고 있었다. 특히 색동 등에 나타난 오행색의 배열, 안감과 겉감, 상의와 하의, 외의와 내의에 사용된 색의 조화는 미의식에 관한 문화적 가치를 추론해 볼 수 있다. 더우기 장식 표현에 주로 쓰인 자연물 문양이나 글자 문양은 당시의 지배 사상이 지향하는 덕목 이외에도 전통적으로 내재된 수명과 복록, 부귀와 영화에 대한 내적 가치들을 반영하는 조형적 상징들이라 할 수 있다. 소재는 비교적 계절을 고려하여 사용되고 있었지만 의례적 성격을 지닌 외의나 쓰개류의 경우 계절적 구분을 고려하지 않은 경우도 많이 나타나고 있었다. 장신구의 경우는 많이 사용되는 것은 아니나 역시 상징적 인 가치를 표현하는 실물들을 미적으로 재구성한 사례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상의 연구를 통해 아동용 전통 의례복은 형태, 색채, 문양, 소재, 장신구 등에서 양식의 다양성과 변형들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적극적인 내적 가치의 상징들을 복식을 통해 표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현대 복식의 디자인에 있어 아동용 의례복에 나타난 창조적인 양식의 변형과 다양성 그리고 복식을 통한 내적 가치의 반영 등이 현대 사회와 조화를 이룬 실질적인 복식 디자인 제시 및 창작에 작은 영감으로 작용하길 바란다.

뉴미디어를 활용한 전통 문화 원형의 문화콘텐츠화에 관한 연구 - 문화원형을 소재로 한 미디어아트 작품 사례를 중심으로 (Practical Use of New Media in Making Cultural Content of The Cultural Archetype)

  • 임경호;김민경;최문선;윤준성
    • 한국HCI학회:학술대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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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HCI학회 2008년도 학술대회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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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40-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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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문화원형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지 채 10년도 되지 않았다. 정부 주도의 문화콘텐츠 산업 육성 정책하에 문화 원형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했으며, 특히 2002년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KOCCA)의 '우리 문화원형의 디지털콘텐츠화 사업'에서 전통문화를 소재로 하여 문화콘텐츠를 기획, 생산, 유통하여 문화가 이 나라의 장래를 이끌어갈 핵심 산업으로 자리매김할 것임을 점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문화원형의 디지털콘텐츠화 사업'을 시작한 지 6년이 지난 지금, 사업성괴를 살펴보았을 때 그 평가는 긍정과 부정으로 엇갈리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엇갈린 평가와는 별도로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의 사업방식이 아니더라도 우리 문화원형이 문화콘텐츠로써 탈바꿈되어 대중들 앞에 자연스럽게 등장시 킬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본 논문에서는 먼저 문화원형과 문화콘텐츠에 대하여 개념적으로 살펴보고, 문화원형이 문화콘텐츠가 될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문화원형의 문화콘텐츠화 방법론으로써 조선시대의 회화와 전통무용, 개화기 및 근대의 사진, 그리고 민속놀이 등의 문화원형을 소재로 한 미디어아트 작품 사례를 분석하여 뉴미디어를 활용한 전통 문화원형의 문화콘텐츠에 대한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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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가네코 후미코 사건과 퍼포먼스 (Park Yeol·Kaneko Humiko Case and Performance)

  • 백현미
    • 대중서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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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5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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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7-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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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박열·가네코 후미코 사건이란 일본에서 1923년부터 1926년까지 약 3년 동안 식민지 조선인 박열과 제국 일본의 '무적자' 가네코 후미코가 대역 사건 피고인으로 받은 재판과 '괴사진' 사건 등 그 전후에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을 말한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관련 사건은 종종 보도가 금지되었지만, 식민지조선에서 그들에 대한 기사는 간헐적이지만 끊임없이 드라마틱하게 이어졌다. 본고는 식민지조선에서 발행된 신문에서 이 사건이 기사화된 방식을 퍼포먼스의 관점에서 살펴 사건이 전달·수용된 양상과 의미를 밝혔다. 퍼포먼스의 주인공답게,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1923년 구속된 이후 형무소 독방에 갇혀 있었음에도 형무소 바깥 세상을 향해 '행동하는 자'였다. 그들의 '행동'은 기민하고 파격적이었다. 1926년 박열은 세 가지 요구 조건을 걸고 재판 방식을 조율했고, 그래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조선예복을 입고 일본 재판정에 등장해 조선말로 자신들의 이름을 알렸다. 대역 사건은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재판 자체를 하나의 사건으로 만든 것은 그들이었다. 또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1925년 5월 예심 조사실에서 앞뒤로 밀착해 앉은 자세로 괴사진을 찍었고, 1926년 7월 이 사진이 괴문서와 함께 신문에 실리면서 사법부와 내각을 뒤흔들었다. 그들은 불온한 사진을 남겨, 자신들을 가두고 재판한 일본 사회에 문제를 일으켰던 것이다. 식민지조선의 신문이라는 '무대'의 특성에 따라 이들의 행동은 특별하게 전달되고 수용되었다. 우선 보도 금지 때문에 관련 보도가 간헐적으로 그러나 지속적으로 이어지면서, 사건이 플롯화된 채 알려져 긴장감이 증가했고, 조선인 또는 무산계층이 연루된 사건이 '만들어지고' 있음을 느끼게 했다. 둘째, 재판 전후의 진행 과정을 공연 관람기처럼 기사화하며 재판극을 경험하도록 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의상과 움직임, 그들이 사용한 언어를 밝히고, 그들과 재판관이 주고받는 문답을 대본처럼 기술하였다. 셋째, 재판부 판사의 '담화'를 되받아 쓴 '사설'과 괴사진의 이야기성을 확대 재생산하는 기사를 통해, 박열·가네코 후미코 사건이 일본 사회에 일으킨 논란과 분란을 문제적으로 드러냈다. 박열·가네코 후미코 사건은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의 조화가 깨진 사태를 보여주는 사회적 드라마였다. 본 연구는 이 사회적 드라마에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한 역할과 이 사회적 드라마가 식민지조선에서 갖는 의미를 밝혔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행위자로서 이 드라마를 직간접적으로 기획·추진했으며, 일제에 대한 피압박 민족의 당당한 저항을 드라마틱하게 수행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포천 출토 철조여래좌상에 대한 소고 (An Inquiry into the Iron Seated Buddha Excavated from Pocheon in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 강건우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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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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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9-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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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철조여래좌상은 한동안 미등록 상태로 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었다가 최근 본관9976으로 유물번호가 새롭게 변경되었다. 이 철조여래좌상은 '포천 철불'로 불리는 철조여래좌상(본관9975)과 함께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백운리 흥룡사 일대에서 발견된 불상이다. 필자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 공문서와 유리건판 사진 등을 비교·검토하여 두 구의 철조여래좌상이 동일한 절차를 거쳐 1925년 12월 17일에 조선총독부박물관으로 이관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철조여래좌상은 높이가 105cm, 어깨폭은 57cm, 무릎폭은 77cm에 이르고, 편단우견(偏袒右肩)의 착의법에 옷주름은 물결무늬식으로 새겨서 유려하다. 철조여래좌상의 얼굴은 타원형으로 이목구비의 묘사가 잘 남아있다. 양감 있는 볼에 넓게 타원형을 그린 안와, 수직으로 길게 뻗은 눈, 짧은 코와 도툼한 입술은 9세기에 제작된 전라북도 남원 실상사(實相寺) 철조여래좌상, 경북 예천 한천사(寒天寺) 철조여래좌상, 강원도 동해시 삼화사(三和寺) 철조여래좌상 등과 유사하다. 또한 결가부좌한 다리와 편단우견의 착의법, 물결무늬식 옷주름은 8세기 석굴암 본존불을 연상시킬 만큼 조각수법이 우수하다고 생각된다. 철조여래좌상의 존명은 유리건판 사진(원판번호 M442-2, M442-7)을 통해 알 수 있다. 유리건판 사진을 보면 오른쪽 손바닥은 위를 향하고, 왼쪽 손바닥으로 약기(藥器)를 받치고 있다. 지금까지 원주 출토 철조약사좌상(본관1970)만이 철로 만든 유일한 약사불상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이번에 약기를 든 철조약사여래좌상을 새롭게 확인할 수 있었다. 철조여래좌상은 혜철의 제자 도선(道詵)(827~898)이 밀교신앙의 영향을 받아 사찰을 보호하고 국토를 비보(裨補)하기 위해 9세기경에 조성했을 가능성이 있다. 흥룡사의 전신인 내원사에는 도선이 백운산 등 중요한 세 곳을 택하여 비보사원을 세우고 다시 약사여래삼존상을 조성한 후 사원에 봉안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또한 「선암사중수비」에는 도선이 비보를 위해 도량을 세우고 철불 등을 조성했다고 전한다. 흥룡사가 소재한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도평리에 고려시대에 약사(藥寺)라는 사찰이 창건되었다는 점에서, 이 일대는 약사도량과 관련된 지역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의 회화심미(繪畵審美) 고찰 (A Study on the Painting's Aesthetic of Gongjae Yoon Duseo)

  • 김도영
    • 문화기술의 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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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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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5-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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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조선 후기 해남(海南) 출신의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1668~1715)는 숙종년간 활동한 선비화가로서 조선 중기에서 후기로 교체되는 전환기에 조선 후기 사실주의 회화의 선구자로서 그 초석을 다진 인물이다. 그는 남인(南人)의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나 당쟁에 휘말려 출세길을 접고 서화와 학문에 몰두하였다. 조선 후기가 시작되는 18C는 실학(實學)이 대두되고 민족주의에 대한 자각으로 진경(眞景)시대가 열린 시기였다. 이러한 때 실학사상을 예술세계에 접목하여 실사구시적(實事求是的)이며 현실개혁적(現實改革的) 심미의식을 발휘하여 서민풍속화 개척, 서양화법의 적용, 사실주의적 기법 추구, 남종문인 화풍 도입 등을 도모하였다. 철저한 학고(學古)를 통해 변통(變通)을 도모했던 그의 회화관은 학(學)·식(識)의 학문과 공(工)·재(才) 기예적 요소를 두루 갖추어야 화도(畵道)를 이룰 수 있다는 형신(形神) 겸용을 강조하였다. 그는 다양한 화목을 두루 섭렵하였는데, 특히 인물화는 이형사신(以形寫神)의 사실주의 표현을 심미 특징으로 한다. 대표작인 「자화상(自畵像)」은 극사실적 묘사력과 구도의 혁신성이 탁월하며, 자신의 울분을 비장감있게 전신사조(傳神寫照)한 파격적 실험정신이 돋보인다. 그의 산수화는 형사적 진경과 신사적 관념을 융합하여 형상으로써 도를 아름답게 구현한 망적지적(忘適之適)한 이형미도(以形媚道)를 이루었다. 한편 개방적 사고로써 다양한 서민 생활을 소재로 삼은 서민풍속화는 이형사진(以形寫眞)의 실득(實得)으로 파격을 도모하였는데, 이는 부패한 권력에 대한 소극적 항거이자 애민정신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후 그의 화풍은 장남 윤덕희(尹德熙), 손자 윤용(尹愹)에게 가전되어 전해져 조선 후기 서화예술의 변화와 부흥을 선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