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절대적 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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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의 공공적 자유 이론과 현대적 공공철학의 가능성 (Hegel's theory of public freedom and a possibility of modern public philosophy)

  • 나종석
    • 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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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2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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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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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이 글은 헤겔 정치철학의 근본적 통찰을 '공공적(public) 자유 이론과 공공철학(public philosophy)'이라는 관점에서 해명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 헤겔의 자유이론을 공공적 자유를 지향하는 것으로 이해하면서 이런 자유이론의 현재적 의미를 드러내보고자 한다. 이 글에서 헤겔의 공공철학에 대한 해석을 통해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원자론적 개인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레비나스(Levinas) 및 데리다(Derrida)가 옹호하는 절대적 타자이론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 글에서 필자는 헤겔의 공공적 자율성 이론이 원자론적 개인주의의 한계를 분명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레비나스-데리다적인 접근방식과 구별되는 타자(other)에 관한 이중적-복합적 이론을 포함하는 주체이론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헤겔 『정신현상학』에서의 '이성과 광기'의 문제 - 헤겔의 라캉과의 대화 가능성에서 본 하나의 해석 - (A Study on "Reason and Madness" in Hegel's 『Phenomenology of Spirit』 - An Interpretation searching for the possibility of the dialogue between Hegel and Lacan -)

  • 이종철
    • 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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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1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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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49-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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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헤겔의 『정신현상학』 '이성' 장에 등장하는 '마음의 법칙'은 이성의 자기 확신이 '광기'의 또 다른 모습이 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이성의 의심할 수 없는 확신(Gewissheit)은 데카르트에게는 진리의 징표이고, 칸트에게는 양심(Gewisse)의 도덕률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관적 확신은 의식과 현실의 차이를 무시하고 현실을 의식과 일치시키려는 자만의 광기에 빠질 수 있다. 동키호테식의 이상론자나 낭만주의적 개혁논자들에게서 전형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태도는 근대적 이성과 '정신병'이 동전의 양면이 될 수 있음을 나타낸다. 라캉의 '거울단계'의 이론, 상상 계 이론, 욕망의 공식 등은 자아의 완전성과 통일성의 이미지가 오해의 산물임을 보여준다. 이 단계는 주체의 형성 과정에서 필수적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타자성의 영역인 언어와 법의 영역, 곧 상징계로 이행해야 한다. 자아는 아버지의 이름에 의해 행해지는 상징적 거세를 거치지 못할 경우 상상 계의 감옥에 갇혀 정신병에 빠질 수 있다. 헤겔의 '마음의 법칙'이 겪는 광기나 착란 등도 비슷한 경험의 과정을 보여준다. 헤겔의 경우 '아버지의 이름'은 불가피하게 욕망을 유예시키는 노동의 기율이나 혹은 절대 타자로서의 죽음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이것은 자연적 존재의 개별자가 보편화되는 과정에서 겪는 분리와 지양의 경험, 곧 라캉식의 상징적 거세의 경험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헤겔의 경우 분리의 경험이 정신의 자발성에 기초한다면, 라캉의 경우는 절대 타자에 의해 강요되고 구조화되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유아의 불안감소와 중간대상에 대한 연구 (A Study on Anxiety Reduction and Transitional object in Infants)

  • 윤석민
    • 산업진흥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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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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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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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본 연구는 위니캇의 이론을 중심으로 상담자의 중간대상 역할을 문헌연구를 통하여 제시하였다. 발달과정에서 유아가 어머니와 절대적 의존에서 상대적 의존으로 넘어갈 때 불안을 겪는데 이때 중간대상인 인형, 손 빨기 등이 유아의 불안을 감소시킨다. 이처럼 상담자의 중간 대상 역할은 상실 경험에 대한 분리불안과 우울 불안을 완충시켜주고, 전능 환상에서 현실 세계로 매개하여준다. 중간대상은 새로운 대상으로 현실에서 적응하도록 이바지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중간대상과 중간현상을 통하여 분리 개별화 단계로 이어진다. 전능한 창조와 파괴, 그리고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존재하는 실제적인 타자에 대한 감각을 체득한다고 할 수 있다. 충분히 좋은 어머니는 유아의 전능성을 의미 있게 만들어 준다. 이러할 때 참자기는 유아의 약한 자아를 성장하게 하여 자신의 삶을 살도록 이끌어 준다. 어머니가 유아의 욕구를 채워주지 못할 경우 환상과 자발적 충동이 결핍된다. 즉, 어머니가 유아의 욕구를 반영해 주지 못할 때 유아가 어머니의 기분을 살피게 되어 참자기를 포기하고 거짓 자기를 만들게 된다. 절대적 의존기의 병리는 충분히 좋은 어머니의 공감과 안아주는 환경의 실패로 인해 발생한다. 이때 아이는 전능 환상의 붕괴를 경험하고 멸절 불안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므로 상담현장에서 상담자의 중간대상 역할을 통해서 내담자의 분리불안과 우울 불안을 감소시켜서 편안하고 안정된 환경을 제공할 때 효율적인 상담을 진행할 수 있다.

해방 후의 일본번역극에 대한 고찰: 1980년대까지를 중심으로

  • 이홍이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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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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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3-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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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이 조사는 해방 이후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에서 공연된 일본번역극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지금까지 서구연극의 번역에 대한 연구는 많았지만, 일본연극은 2000년대 이후에서야 거론되기 시작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일제강점기 이후 정책적으로 일본문화를 차단시켜 일본연극을 접할 기회가 적었기 때문이다. 해방 후 최초로 원작명과 원작자의 이름이 밝혀진 상태로 번역 공연된 일본작품은 <고독한 영웅>(1969)이다. 이후 1982년에 이노우에 히사시 작의 <어미-화장->이 오태석의 연출로 무대에 올랐고, 85년에는 아베 고보의 <친구들>, 쓰카 고헤이의 <뜨거운 바다> 등이 소개되었다. 이 세 작품은 모두 재연이 되었는데, 특히 쓰카 고헤이의 작품은 본인의 연출에 의한 재연뿐 아니라, 한국연출가들에 의해 재해석되어 최근까지 재연이 이루어진 사례로, 가장 큰 영향력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일본문화개방 이전에 번안 각색된 일본연극이 많이 소개되었다고 하더라도, 일본연극의 '번역'으로, 그들의 다른 문화와 다른 연극 만들기 방식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의의있는 체험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곧, 해방 전 절대적인 영향관계에 놓여있었던 한일 연극이 동등한 타자로서의 관계를 성립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서양 작품이 대부분인 번역극 중에서, 이들 작품은 한국의 제작 측과 관객으로부터 어떠한 기대를 받았을까? 번역된 작품들에서 공통점을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만, 같은 시기 일본극단의 내한공연을 함께 살펴보면 재일교포의 이야기를 하거나 재일교포 작가의 작품이 다수 발견된다. 그러나 그 공연들이 곧 재일교포 문제에 대한 담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일본극단의 공연이 자막조차 제공하지 않은 채 진행된 경우가 많아 텍스트에 대한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았다는 점도 그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번역극의 경우에서조차 텍스트 분석과 고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 했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가 일본연극을 통해 보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해방 후부터 1980년대까지, 어떤 일본작품이 우리에게 소개되었는지, 그리고 어떠한 방식으로 소개되었는지 검토하는 일은, 서구번역극과 차별되는 일본번역극을 통해 궁극적으로 당시 한국연극이 추구하던 방향을 되돌아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퇴계(退溪)의 천관(天觀) 연구(硏究) (A Study of Perspective on Cheon Gwan(天觀) of Toegye)

  • 황상희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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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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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7-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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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천(天)의 개념을 살펴보자면 송대(宋代)이전은 종교적(상제(上帝)) 천(天)이라면 송대(宋代)이후는 합리적(천(天)理) 천(天)이다. 주자는 종교성을 잃어버렸고 퇴계는 회복했다. 이 논문은 퇴계와 주자가 말하는 천(天)의 속성이 다르다는 것을 기반으로 리(理)의 종교성까지 밝히는 것이 목적이다. "서명"은 '이일분수(理一分殊)'의 논리로 설명되어진다. 주자와 퇴계는 이일(理一)이란 측면에서는 사천(事天)이란 해야한다고 말하지만 분수(分殊)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주자는 천리(天理)의 이법을 따라야 한다고 하고 퇴계는 사친(事親)의 효(孝)를 행해야 한다고 한다. 이와 같이 퇴계와 주자는 천(天)의 속성 다르기 때문에 방법에 있어서도 차이가 생긴다. 이러한 차이는 리(理)의 속성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주자(朱子)는 소이연(所以然)은 리(理), 소당연(所當然)은 사(事)라고 구분해서 말한다. 퇴계(退溪)는 소당연(所當然)이야 말로 리(理)라고 말한다. 본질과 실존의 논의로 보자면 퇴계에게는 실존이 본질보다 먼저인 것이다. 리(理)라는 형이상학적 논의 속으로 실존의 문제를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다. 퇴계(退溪)에게서 주자(朱子)와 다르게 주목되는 이론은 '이자도(理自到)'설 이다. '이자도(理自到)'는 나라는 주체가 타자에게 지극히 하면 타자가 나에게로 와서 나를 통해 발현된다는 것이다. 이 논의는 '물격(物格)'에 토를 넣는 문제에서 시작한다. 퇴계는 '물리(物理)'가 이르는 것이 아니라 '중리(衆理)'가 이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상대적 리(理)'와 '절대적 리(理)'를 명확하게 구분하기 위한 논의이다. 존재는 비존재를 존재로 한 존재이기 때문에 상대적 리(理)이지만 존재와 비존재를 뛰어 넘으면 절대적 리(理)이다. 이는 분수(分殊)의 리(理)와 이일(理一)의 리(理)에 대한 차이이다. 즉 절대적 리(理)가 나에게로 이르러 내 삶에서 드러나는 공효가 물격(物格)이다. 퇴계는 천(天)=리(理)=상제(上帝)를 동일시하는 종교적인 태도를 강하게 보이고 있다.

메를로-퐁티의 근대적 역사관 비판 (Merleau-Ponty's Critical Examination on the Modern View of History)

  • 류의근
    • 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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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4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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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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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이 연구는 메를로-퐁티의 실존적 역사 이론에 의거해서 헤겔과 마르크스의 역사관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결론적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헤겔에서 역사적 경험은 절대 정신의 자기 전개 과정으로서 이해되고 이것은 변증법적으로 서술된다. 그리고 헤겔의 역사는 절대 정신의 실현을 향해 달려가는 보편적 목적론의 역사이다. 이러한 헤겔의 목적론적 역사관은 인간이 역사에 의미를 줄 수 있고 이성에 목적을 줄 수 있었던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문제, 바꾸어 말해서 의미가 어디서 나오는가 하는 문제 즉 의미 가능성의 문제를 전제한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헤겔은 역사의 의미와 목적의 지각적 토대 즉 육화된 자기 의식에서 해명하지 못했다. 마르크스에서 역사의 주체는 프롤레타리아 또는 계급 의식이다. 그리고 계급은 생산 관계에 의해서 산출된 사회적 실재이다. 그러나 계급은 체험된 실재로 존재하지 않으면 현실화할 수 없다. 계급 없는 사회를 가져오는 계급 투쟁 역시 우리 자신이 우리에게 프롤레타리아 의식으로 가치 부여하는 의식이 없으면 촉발될 수 없다. 계급 의식의 탄생과 투쟁의 시작은 노동자가 타자의 주체성 및 물질적 대상 세계와 만나고 협력하고 대결하면서 자신의 생활 세계의 구조와 의미를 지각하기 시작하고 이해하며 혁신하게 되는 시간적 경과를 거치면서이다. 결론적으로 그것은 우리의 육화된 실존이 세계와 교섭하는 데서 구성되는 의미 없이는 불가능하다.

포스트휴먼 시대의 '주적(主敵)'들의 재현: 스페인 영화와 괴물들 ("Main Enemies" in the Posthuman Era: Monsters in Three Spanish Films)

  • 서은희
    • 비교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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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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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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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한 사회가 주적을 괴물에 비유하는 수사는 사회 구성원들을 단결시키는 효율적인 수단으로 세계 보편적으로 사용되어 왔으나, 이는 적으로 정의된 집단의 다양한 구성원들을 단순화하고 대상화하며 나아가 비인간화하는 폭력적인 인식을 만든다. 본 연구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포스트휴먼 주체의 특징인 의식의 유연성과 복수성(複數性), 차이를 긍정하고 포용하는 태도가 필요하며, 주적-괴물을 다루는 세 편의 영화 <벌집의 영>, <야수의 날>, <판의 미로>에서 그런 포스트휴먼 주체의 특징을 구체적으로 볼 수 있음을 논한다. <벌집의 영>은 내전 직후 스페인 사회가 절대적으로 타자화하고 배척한 공화파에 속했던 사람들의 죽음을 애도함으로써 주적-괴물을 인간의 위치로 귀환시키고, <야수의 날>은 괴물에게 투영된 스스로의 믿음을 의심하고 서로 대립하는 현실의 해석들을 동시에 유지하는 경험을 제공하며, <판의 미로>는 의식 안에 존재하는 낯선 관점들의 대립을 통해 성장하고 부조리에 맞서는 주체를 재현한다. 세 작품의 주인공들은 모두 괴물에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괴물에게 접근해서 새로운 앎과 가치를 성취한다. 이들은 선과 악 또는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경계의 한쪽을 택하는 대신 경계 위에 머물며 이분법의 한계를 넘어서는 의식의 능력을 보여준다.

시니피앙과 라캉 정신분석 반복과 반영의 나르시시즘 (Signifiant and Lacan Psychoanalysis Narcissism of Repetition and Reflection)

  • 이동석
    • 문화기술의 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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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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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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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본 연구는 라캉 정신분석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시니피앙(기표)의 의미를 분석해보고, 시니피앙이 주체를 통해 발화됨과 동시에 그 사후성으로 동반하는 의미와 의미작용의 미끄러짐을 증명할 것이다. 라캉이 그의 세미나와 '에크리'에서 시니피앙을 설명한 부분을 직접 인용하여 시니피앙이 일상대화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 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우리의 담화에서 일어나는 대화는 시니피앙이 가지는 목적성과 근거 없는 무목적성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나르시시적이고 강박적인 자기 반복과 끓임 없는 자기반영을 통한 가장 안정된 장소로의 회귀를 목적으로 하는 자기폐하로서의 위치를 유지하려고 한다. 이러한 목적을 파악하는 것이 라캉 정신분석이 지향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부분이며, 시니피앙(기표)과 다음에 연결되는 시니피앙과의 관계 속에서 숨겨진 의미의 균열을 발견하고, 주체의 끓임없는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시니피앙이 신체와 정신의 실제적인 지배자인 것을 제시할 것이다. 본 연구는 위의 논점을 제시하는 것에 연구의 목적이 있으며, 담화 속의 지배자인 시니피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타자에 대한 끓임 없는 저항을 통해 라캉 정신분석이 지향하는 "그곳이 있던 곳에 그곳에 도래해야 하는 이유"를 저항하는 주체로서의 자율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예(禮)의 본질(本質)과 일상성(日常性) - 율곡(栗谷) 예교(禮敎)의 실학적(實學的) 성격(性格)과 일상성(日常性)을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essence of Ye and its usualness - With focus on Shirak's feature of Yulkok's Yegyo)

  • 이행훈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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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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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1-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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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유학 특히 주자 성리학의 예(禮)는 절대적 보편적 이치로서 천이(天理)와 상대적 관계적 규범 형식으로서 절문(節文)과 의칙(儀則)으로 개념 규정된다. 예의 본질은 이렇게 두 가지 의미로 구분되는데, 절대성과 상대성이 중층적으로 혼합되어 있지만 단순한 양가성(兩價性)으로 해석되어서는 곤란하다. 예가 발현되는 과정에는 천리(天理)와 인성(人性)이라는 본질 외에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이라는 일상성(日常性)이 매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자가 서로 조화를 이루었을 때 예(禮)의 현실적 효용이 극대화될 수 있다. 물론 예(禮)는 구분의 원리이고, 악(樂)은 조화의 기능을 수행하여 상호보완적 역할을 하는 측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예의 본질은 신분, 계급, 귀천 등 현실적 차이 속에서도 쌍무호혜적(雙務互惠的) 성격을 특징으로 한다. 유학은 일반인은 물론 최고 통치자에게도 엄격한 도덕성과 윤리를 요구하며 이를 상실한 인군(人君)은 일개 필부(匹夫)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한다. 예를 제정하는 주체가 통치자가 아니라 성인(聖人)인 것도 동일한 맥락에서이다. 예의 현실적 효용은 '예교(禮敎)'를 실현하는 것이다. 예교는 예의 본질과 일상성이 발현되는 개인적 사회적 정치적 기제이다. 구득된 인간 본성의 발현, 주체와 타자의 소통을 매개하는 문화의 형성, 윤리 도덕적 규범에 기초한 정치행위 등이 활발한 사회가 예교가 지향하는 유교적 공동체의 본모습이다. 유교적 공동체의 원리로서 예교의 특징을 민본성(民本性)과 시의성(時宜性)을 중심으로 고찰한 이유는 예의 본질이 구현되는 일상성(日常性)의 측면에 착안한 것이다. 이는 유교가 지닌 본원적 특질인 동시에 천리(天理)와 인성(人性) 자체에 대한 원리적 탐구에 머물지 않고 인정(人情)과 시속(時俗)이라는 현실을 실천의 장으로 고민하는 실학적(實學的) 성격인 것이다. 16, 7세기를 거치며 조선사회에서는 예의 일상화(日常化)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는데, 세종조 이후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가 지속적으로 보급되어 도덕수신서(道德修身書)로 활용되었고 도덕성과 호혜성에 기반한 향촌자치규약인 향약(鄕約)이 보급 시행되었다. 율곡 이이는 중국의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전범으로 하여 해주향약(海州鄕約)을 완성하였는데, 예교의 본질을 일상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실학적 특성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한나 아렌트의 비선택적 공거와 주디스 버틀러의 프레카리티 정치학: 몸의 정치학과 윤리적 의무 (Unchosen Cohabitation of Hannah Arendt and Precarity Politics of Judith Butler: Based on Body Politic and Ethical Obligation)

  • 조현준
    • 비교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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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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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61-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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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이 논문은 미국의 젠더 이론가이자 퀴어 학자로 알려진 주디스 버틀러의 후기의 정치윤리 사상, 그중에서도 '프레카리티' 정치윤리 사상을 한나 아렌트의 '비선택적 공거'와 연결해서 최신저서 "집회의 수행성 이론 소고"(2015)를 중심으로 고찰하려 한다. 점점 제한된 사회적 정치적 불안정에 놓이게 되는 지구상 모든 인구의 평화로운 공존을 모색하려는 버틀러의 프레카리티 정치 사상은 레비나스의 타자 윤리학과 아렌트의 정치철학의 영향을 받아 윤리와 정치를 결합하고자 한다. 우선 인간은 인간의 조건인 이 지구상에서 자신이 누구와 살지를 결정할 수 없다. 이런 '비선택적 공거'는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주장하는 '행위'의 근본적 조건인 '다원성'과 관련된다. 인간의 모든 측면이 정치에 어느 정도 관련되지만 다원성은 특히 정치적 삶의 필요조건일 뿐 아니라 가능조건이라는 면에서 절대 조건이다. 두 번째로 버틀러에게 유대적 선민사상을 부정하는 비선택적 공거는 내가 모르는 다른 여러 타인들과 함께 사는 삶의 가능성, 모두가 근본적으로 취약하기 때문에 상호의존속에 살아가는 보편적 프레카리티의 정치로 연결될 수 있다. 다원적 인간이 지구상에 공존한다는 사실은 인간의 몸이 가지는 근본적 취약성과 상호 의존성에 근간한 '몸의 정치학'을 가능케한다. 불안정성과 구분되는 '프레카리티'는 지구상에 디아스포라처럼 확산되는 다양한 인간의 불확실한 삶에서 평등과 자유를 확장할 수 있기에 윤리적이다. 프레카리티에 입각한 윤리적 의무 개념은 버틀러가 "불확실한 삶" 이후 "갈림길"뿐 아니라 "전쟁의 틀"에서도 강조한 개념이다. 누구든 사회세계의 프레카리티를 피할 수 없으며 그럼 점에서 프레카리티의 보편적 차원이 우리 모두의 비토대적 연결점이 된다. 버틀러가 주장하는 상호의존성은 평등의 관점에서 지속가능한 상호의존성을 양성하기 위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형식의 투쟁이며, 평등을 향한 윤리적 요구는 근거리와 원거리의 가역성에 달려있다. 다시 말해 상호의존성이 비선택적 공거의 특징이라면 원근의 가역성은 프레카리티 시대의 윤리적 의무다. 윤리적 요구는 비선택적 공거, 비의도적 근접성이라는 조건 때문에 모르는 사람의 삶도 존중해야하고, 이런 의무는 정치적 삶의 사회적 조건속에 있으며, 이는 아렌트의 평등 및 레비나스의 노출과 맞닿는다. '비선택적 공거'와 '비의도적 근접성'에 입각한 버틀러의 프레카리티 정치는 정치와 윤리의 접합이자 보편 주체의 비토대적 연결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