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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쟁 메모리얼에 나타난 기념문화 (A Study on Commemoration Culture of Vietnam War Memorials in Vietnam)

  • 이상석
    • 한국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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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9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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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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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 연구는 베트남에 있는 베트남전쟁 메모리얼을 대상으로 메모리얼의 유형적 특성, 설계개념 및 내러티브, 입지 및 공간적 특성, 도입요소의 특성, 조경디테일에 나타난 표현 내용을 분석하고, 이를 토대로 하여 베트남전쟁 메모리얼에 나타난 기념문화를 분석하였다. 이러한 연구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오랜 전쟁으로 인해 베트남전쟁 메모리얼은 군인묘지, 전적지, 전쟁박물관, 비극적 장소, 평화공원 등 10가지 유형으로 다양하게 나타났으며, 이중에서 전통적 양식에 근거한 군인묘지, 장소성을 강조한 전적지와 비극적 장소, 전쟁 승리와 잔혹함을 표현한 전쟁박물관, 평화공원이 특징적인 유형으로 나다났다. 2. 메모리얼에 나타난 주요한 설계개념 및 내러티브는 희생자 추모, 국가에 헌신, 전쟁승리와 저항, 장소적 기념성으로 나타났으며, 국제적인 민간단체의 협력에 의해 만들어진 미라이 평화공원(My Lai Peace Park) 및 한-베 평화공원(Han-Viet Hoa Binh Cong Vien)에서 비극적 사건을 극복하고 평화를 도모하는 개념을 적용하였다. 3. 메모리얼은 비무장지대(Demilitarized Zone: DMZ) 및 전쟁 루트였던 호치민 트레일(Ho Chi Minh Trail), 그리고 베트남을 남북으로 연결하는 주요한 도로인 A1 국도 주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밖에 하노이 및 호치민 등 도시에 전쟁박물관 및 모뉴멘트가 조성되었다. 묘지 및 추모 메모리얼에서는 문과 기념탑(또는 제단)을 연결하는 축을 중심으로, 좌우에 묘역이 배치되는 전통적 공간체계를 따랐으며, 전적지 및 비극적 장소에서는 장소성에 지나치게 의존하여 설계를 통한 특정적인 공간 형태보다는 상징적 요소를 도입하여 기념성을 구현하였다. 4. 기념조각 및 기념탑은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의 대표적 양식으로 전쟁승리 및 저항정선을 표현하기 위해 보편적으로 사용되었고, 포획한 무기를 전시하고 박물관에 사진 및 모형 등 자료를 전시하여 전쟁의 긴장감과 리얼리티를 보여주고 있으며, 유교 및 불교 등 전통문화에 근거한 상징요소를 도입하여 추모감을 높였다. 5. 기념조각이나 기념벽에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이용한 사실적 표현을 강조하였다. 또한 상징적 문구로서 자주 사용되고 있는 'TO-QUOC-GHI-CONG 토국기공(士-國-記-功)'에서 전사자의 업적과 국가적 관심을 나타냈으며, 이와 반대로'Quagmire'는 미군 참전용사들이 베트남에서 겪은 혼란스럽고 어려운 전투 상황과 베트남전쟁에 대한 미국사회의 혼돈을 묘사하는 정치사회적인 메타포(metaphor)로서 사용되었다. 베트남전쟁 메모리얼에는 민족주의, 애국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 등 다양한 이데올로기가 복합되어 있고, 유교 불교 도교 음양오행사상이 잘 나타났다. 한편, 유교적 전통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전쟁에서 영웅적 여성의 모습을 강조하였으며, 일부 메모리얼에서 베트남전쟁에 대한 국내 외적 갈등이 내포되었다. 이러한 연구결과를 토대로 하여 향후 미국에 있는 베트남전쟁 메모리얼의 설계특성을 연구하여 전쟁에 대한 인식 및 기념문화적 특성에 대한 비교연구가 필요하다.

전쟁의 기억: 전재에서 자연재해로 - 6.25전쟁기 회화 작품에 나타난 피난 이미지 (The Memory of War : from War Damages to Natural Disaster -The Evacuation Image Portrayed in Korean War Painting)

  • 조은정
    • 미술이론과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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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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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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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The memory of the Korean War is about the time period when people lived toughly during evacuation, due to being exposed to the natural climate such as intense cold or heat without any protection, leaving their comfortable home and living in temporary built shelters which were barely enough to avoid the wind. 'Death is concealed and only the figures of evacuation for survival were expressed, just as how the government ordered. Since the experience of the battlefield is personal and fragmentary, that is broken into pieces, it does not have compatibility. As war is a distorted experience that cannot be placed in a big picture, it is not possible to take a view of the war's big picture. Having this individualized experience as a common collective memory is an issue and it is the will that people tries to pursue. The reason why the evacuees from north to south, and as well as from the south to further south were all able to be adopted as the theme of artworks due to the military action that emptied the occupied territories of the North Korean Army under the forced removal command. In such situations, the natural state of the 'snow' was like a symbol of the 1.4 Recession. The group of people who were thrown into the intense cold displaced the war damage of loosing their base livelihood, and symbolized the obedient citizens who faithfully follow their government's command. The figure of advocating anti-communism is projected as a figure of a refugee during cold winter-time and it contains ones past which he or she obeyed its own country's commands. Evacuation, especially the evacuation during the winter is a visual device that can confirm these kinds of country's command. The consequences were same for the artists as well. Therefore, the situation being communal could be found due to the individual experiences during war are ideological. The image of the refuge shown in the picture played the role of strengthening the consciousness of defecting to South Korea into the meaning of the 'Finding Freedom.' I would like to express that the reason of them leave their home during the harsh winter is in order to avoid the oppression of the Communist Party. The evacuation that people went through was not to 'Finding Freedom', but 'To Survive'. Later, this evacuation has been imprinted as a behavior of choosing free Republic of Korea, which was an ideological issue. Anti-communism was the rule of survival in South Korea society, and people have the tendency to remember what they want to remember. As it is not the people who possesses an incident, but the memory that possesses ones, people cover their memory with disguised plots in order to forget the violence and to live a different prologue. They share the incident of violence as a hurtful memory. The tragedy of the Korean War was the result of Ideology and being in between the powerful nations' rights, but the violence during the war has been depicted as a natural disaster, which was the evacuation in heavy s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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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관덕정(觀德亭) 벽화의 도상과 표상 (Iconography and Symbols of the Gwandeokjeong Pavilion Murals in Jeju)

  • 강영주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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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3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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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58-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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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제주의 관덕정은 군병들의 활터로 '활쏘기'는 물론 '말 타면서 활쏘기', '전쟁의 진법'까지 훈련하여 상무 정신을 고취시키고, 전쟁 대비를 위해 무예를 연마할 목적으로 1448년에 건립되었다. 또한 제주에서 유일하게 대규모 인원이 운집할 수 있는 넓은 공간으로 각종 연회나 관아의 공식적인 업무를 수행하였으며, '관덕풍림'과 같이 계절의 정취와 자연의 운치를 향유하는 장소였다. 이러한 장소성과 건축적 의미가 큰 관덕정이 17세기 건물의 형태를 보존하고 있기에 건물 상인방 4면의 5가지 그림이 조선 후기의 그림으로 잘못 알려져 왔다. 관덕정은 10여 차례 이상의 수리와 중수를 거쳤기에 벽화가 구체적으로 언제 처음 그려졌는지 알 수는 없다. 다만 현재의 벽화원형은(1976년 모사본 기준) 벽화의 도상과 양식으로 추정해보면 1850년(철종1) 재건, 1882년(고종19) 중수, 1924년 도사(島司) 전전선차(前田善次)의 보수, 1969년 10번째 중수 때로 요약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먼저 벽화 도상을 분석하여 제작 시기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즉, 최초 <호렵도>가 18세기 이후 그려지기 시작한 점을 비롯하여 삼국지의 유명 화제인 <적벽대전>이나 한나라 때의 은일자를 그린 <상산사호>, 당나라 시인 두목의 이야기인 <취과양주귤만거>와 같은 고사인물도의 유행과 민화풍의 <십장생도> 등의 주제는 물론 그림의 구성, 인물의 무기와 복식, 산수 표현과 채색, 필법 같은 세부적인 사항도 관덕정의 벽화가 19세기 말경에서 20세기 전반기에 그려진 작품임을 방증한다. 또한 당시 화단에서 유행하던 회화 주제나 양식과 관련이 깊어 1850년이나 1882년에 제작된 벽화가 1924년 보수와 1969년 중수를 거치면서도 벽화의 기존 내용과 형태를 보존·유지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다음으로 관덕정의 벽화 주제나 구성 방식은 군사훈련이라는 건물의 목적과 기능에 적합하게 건물 중앙 좌우에 파노라마 형식으로 <적벽대전>, <호렵도>를 구성하고, 바깥쪽으로는 감계적이고 교훈적인 내용으로 제주의 관리가 지녀야 할 덕목인 은일과 입조 등 유교의 이상적 인간상을 비유적으로 묘사한 <상산사호도>나 <취과양주귤만거>의 고사 인물도를 구성했다는 것이다. 또한 신선 사상과 장수를 상징하며, 궁중 행사나 장식화로 쓰이던 주제가 민간으로 확장되어 길상·벽사 기능이 강화된 <십장생도>를 표현하였는데, 이는 당인들의 지향을 반영하기 위해 전체적인 벽화 주제와 구성을 선택적으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벽화의 산수가 제주의 명산인 '한라산'이라는 점, 높고 낮은 오름, 현무암 자연석 돌담 표현, 수많은 고사 중에 제주의 진상품이자 특산품인 '귤'을 주제로 한 두목의 고사를 채택하여 시각화한 점, 백록담의 흰 사슴 전설의 응용, 제사를 중시하는 유가적 관습이 남병산의 제사 장면으로 표현된 것 등은 모두 제주의 풍속과 자연환경, 생활상의 일부를 반영하는 그림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복식과 무기의 갖춤 상황에서의 무예연구 (A Study on martial arts when Equipped with Weapons, Clothes and Other Accessories)

  • 황호영;최재근
    • 디지털융복합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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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1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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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13-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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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현재 한반도에 터를 잡고 사는 우리는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과거 선조들은 중앙아시아와 중국의 북방지역까지 넓게 퍼져 살았다. 평상시는 여러 나라들과 서로 교역을 하였지만 사이가 좋지 않을 때에는 전쟁을 치르면서 많은 나라들이 등장하고 사라져갔다. 이러한 역사 속에 다양한 문화가 이루어져 왔고 그 중에 전통무예도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의 무예는 조선 후기 화약무기의 발달과 일본의 식민지, 6.25전쟁을 겪으면서 그 명맥이 거의 단절 되었다. 다행이 사서와, 무예서의 기록과 유물이 뒷받침 되어 우리가 전통무예를 연구 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조선후기 편찬된 무예서인 무예도보통지는 조선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기예를 소홀히 했던 것을 반성하고 조선과 중국, 일본의 기예를 수용하여 엮은 책으로 상세한 설명과 그림, 복식과 무기제원까지 기록 되어 있어 무예연구에 있어 가치가 있다. 그러나 무예도보통지를 근간으로 하는 무예단체나 개인의 기예가 다르며 어느 단체들은 가짓수를 가지고 논쟁 하고 있어 문제이다. 본 연구는 급변하는 유비쿼터스 환경에 발맞추어 스마트의 발달과 시장의 확대로 수많은 교육용 앱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학교 수업 내용에 대한 앱은 전무한 현실에서 교수자가 직접 앱을 개발하여 학교 수업에서 활용하는 방안을 연구하고자 한다. 스마트폰의 최대 장점인 시간과 장소에 구애 받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학교 수업 내용을 학습하고 교수자와 학습자 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히 이루어지는 학습 환경을 만드는데 있다.

1945년 이전 여성잡지 표지화에 나타난 인체미 분석 (Analysis of the Aesthetics of the Human Body Portrayed in Front Cover of Women's Magazines Prior to 1945)

  • 이순재
    • 한국의류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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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권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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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37-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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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본 연구의 목적은 1945년 이전 여성지 표지화에 나타난 실제자료를 발굴 제시하고 이미지를 분석하여 그 시대가 요구하던 미적 이상형을 밝히고자 하는데 있다 이 시기는 근대성 이 성립되기 시작하는 기원의 공간으로 주목받고 있는 동시에 외세의 시선으로 타자화 되고 왜곡된 전통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기도 하다. 미적인 이상형은 의복디자인을 통하여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이기도 하기에 의류학 연구자들의 지속적인 관심분야이며 그림으로 표현된 인체는 사진의 사실성 보다 더 뚜렷하게 인물의 특성을 강조하여 표현할 수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이러한 특성을 확인할 수 있는 국립도서관 귀중본 서고와 잡지정보도서관의 소장 자료 원본86점을 바탕으로 실증적 연구와 문헌연구를 병행하였다.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1920년대 이전에는 외세에 의해 폭력적으로 추진되는 개방에 대한 반감으로 오히려 전통을 고수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1920년대에는 선전 등 전시회에 의하여 그림이 불특정다수에 의하여 감상되는 근대적 문화현상으로 정착되고 일본의 미감에 의한 영향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1930년대에는 서양 영화가 일반 대중들에게 오락으로 자리하게 되고 서구화된 인물을 이상형으로 생각하며 지성미가 미인의 조건으로 요구되기 시작하였다. 1940년대에는 37년부터 심화된 전쟁과 물자부족으로 모성과 건강한 자연미를 의도적으로 권장하였으며 이에 대한 반발로 의고미(疑古美)가 대두되었다.

동아시아 근대만화의 특징 (Feature of East Asian Modern Comics)

  • 윤기헌;권기덕
    •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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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0권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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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2-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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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근대만화의 출발점은 만화의 기본적인 형태 즉, 글과 그림의 완전한 결합 형태로 풍자화의 전통에서 출발했으며, 동아시아 3개국은 근대미술과 서양의 새로운 서구의 만화형식인 카툰과의 결합을 통해 '만화'라는 매체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각 나라에 사정에 맞게 진화된 근대만화는 초기 체제와 외세, 그리고 내부 부패에 관한 풍자로부터 점차 일반 민중의 계몽의 수단으로 발전해 왔다. 그러나 체제비판은 탄압으로 이어졌고 근대 동아시아를 둘러싼 제국주의의 발호로 이들 나라의 근대만화는 모두 체제선전, 전쟁참여, 식민찬양 등의 과정을 겪어야만 했다. 세계만화의 큰 부분을 근대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상당부분을 과점하고 있는 동아시아의 만화의 토대가 바로 근대만화에서부터 출발하고 있으며, 따라서 근대 동아시아 만화가 가지는 특징들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의미가 크다 하겠다.

경복궁(景福宮) 향원정(香遠亭)의 조성시기(造成時期)와 취향교(醉香橋)의 원형(原形) (A Study on the Original Form of the Chwihyanggyo Bridge and the Creation of the Hyangwonjeong in Gyeongbokgung Palace)

  • 남호현;김태민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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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1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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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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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경복궁의 후원에 위치한 향원정과 취향교는 고종 연간의 관련 사료와 조선 후기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몇몇 도면에 의지하여 연구되고 있었다. 현재의 취향교는 한국전쟁을 거치며 전소된 것을 종전 후 임시적으로 재건한 것이기 때문에 형태를 비롯하여 재건 위치도 정확한 고증을 거친 것이 아니다. 구한말~일제강점기에 촬영된 사진과 이를 묘사한 그림엽서 따위가 일부 남아있지만 촬영 주체나 시기에 대한 정보가 부재하여 어떤 사진이 취향교의 원모습을 담은 것인지 판정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2017년 취향교 복원에 필요한 기초자료 확보를 위해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는데 조사를 통해 취향교의 원위치와 교각 주춧돌의 형태가 확인되었으며 이를 통해 취향교의 변화과정을 유추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최초의 취향교는 상판이 약한 아치를 그리는 3렬의 교각열을 가진 형태였으며 시간의 경과에 따라 교각열이 늘어난 평교형태로 변화한 것이 밝혀졌다. 또한 향원지 내 가도(假島)의 성토층에 대한 AMS연대측정을 통해 향원정이 임란 이후에 조성되었음이 판정되어 기존에 제기되던 '조선 전기 취로정 전신설'은 근거가 없음이 확인되었다. 발굴조사 및 사료검토 결과를 토대로 종합적으로 판단한다면 취향교와 향원정의 조성 시기는 조선 후기 건청궁의 건립연대와 평행할 가능성이 높다.

중국 만화 <삼모 유랑기> 의 특성 연구 (The Study on Chinese Comics Characteristics)

  • 김리나;김미림
    • 만화애니메이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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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권4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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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33-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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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중국은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특수한 상황이므로 만화캐릭터의 실질적인 연구가 부족한 실정이다. 연구자는 이에 대하여 흥미를 갖고 중국에서 현실성이 있으며 중국인들이 선호하는 캐릭터를 발견하였다. II장에서 연구대상인 "삼모 시리즈(삼모계열(三毛系列))" 16개 중에서 가장 인기를 끌었던 <삼모 유랑기(三毛流浪記)> 의 탄생배경과 발전과정을 살펴보고 삼모 캐릭터의 삶의 과정을 통하여 폐쇄된 구 중국의 현실을 반영하였으며 III장에서 외국 <옐로 키드> 캐릭터와 삼모 캐릭터 및 한국, 일본, 중국의 신문만화를 비교분석과 삼모 캐릭터의 이미지 구성요소를 분석하여 <삼모 유랑기>는 상대적으로 사실적인 그림체, 느린 스토리 전개, 섬세한 감정묘사, 말풍선과 지시문이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의 근대 만화는 외세에 의한 정세 불안과 전쟁 등으로 풍자만화가 유행하였는데, 그중 대표적인 만화는 삼모 시리즈이다. <삼모유랑기>는 삼모의 탄생과 삶의 과정을 통하여 폐쇄된 구 중국의 현실과 그 시대 사람들의 슬픔과 혐오의 감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작가는 상해의 잔혹한 사회현실 속에 내버려진 고아들의 삶을 만화 <삼모유랑기>를 통하여 폭로와 비판을 하였다. 그 시대 빈번한 전쟁으로 90%의 문맹률 속에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말풍선과 지시문이 없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다. 머리카락이 세 가닥인 아이, 삼모 캐릭터는 중국인들의 가슴 속에 단순한 만화 속의 주인공이 아닌 하나의 민족적 형상으로 자리하고 있다. 연구자가 작가 "장락평(張樂平, 1910.11.10.~1992.9.27)"의 삼모 시리즈작품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하나의 좋은 만화, 좋은 애니메이션 심지어 좋은 영화는 우리 주변에 대한 느낌에서 오는 감정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창조된 삼모 캐릭터는 개성 있고 특이한 반면, 생활에서는 우리에게 친근감을 느끼게 하며 캐릭터이미지와 장면에서 익살스럽게 웃음거리를 만들며 중국의 근대 만화의 대표적인 상징물로 다가온다.

조선후기 강원감영의 후원조영(造營)과 신선세계 (The Back Garden Structure and the Symbolism of Immortal World of Gangwon Provincial Office in Late Joseon Dynasty)

  • 이상균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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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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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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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사적 제439호인 강원감영은 1395년 원주에 처음 설치된 이래 1895년 23부제의 실시로 폐지되기까지 500년 동안 존속하였다. 강원감영은 관찰사의 겸목제(兼牧制) 시행으로 17세기 이후 본격적 영건이 시작되어 폐지 직전까지 약 50동 670칸 규모로 존속되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전각이 훼철되어 2005년 시설 일부를 수리 복원하였고, 현재는 (구)원주우체국 철거 후 감영 후원(後園)에 해당되는 시설을 복원 중에 있다. 강원감영 후원은 일제강점기 일본군 원주수비대 운동장이 조성되면서 전부 없어졌다. 후원 조성을 위한 발굴조사 결과 연못 일부와 건물지가 확인되긴 했으나, 그 전모를 밝히기에는 유구의 교란과 훼손이 심하였다. 그러나 문헌과 그림 등을 통해 후원 전각들을 고찰해본 결과 연못 안에는 봉래각(蓬萊閣) 영주사(瀛洲?:관풍각) 채약오(採藥塢) 조오정(釣鰲亭) 홍교가 건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연못 밖에는 환선정(喚仙亭)과 방장대(方丈臺)가 건립되어 있었다. 후원 전각의 조성경위와 명칭을 살펴보면 모두 신선과 관련되어 있다. 연못 안에는 전설의 신선세계인 삼신산(三神山)을 의미하는 삼도(三島)를 만들고, 그 위에 전각을 지었다. 봉래각을 시작으로 후원에 건립되는 전각들에 영주 방장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나머지 전각들에도 선가(仙家)의 이름을 부여했다. 후원뿐 아니라 그 주변의 전각들에도 신선과 관련된 이름을 붙였다. '봉래산'인 금강산을 관할했던 강원감영 후원에 이와 걸맞는 신선세계를 조영하였던 것이다. 강원도관찰사들은 여가에 수시로 후원에 나가 신선이 되어 탈속하는 풍류를 즐겼고, '봉래주인', 즉 신선세계의 주인이라 자처하였다. 강원감영은 금강산이 소재해 있던 강원도의 특징이 잘 반영된 신선세계가 구현되어 있었다는 매우 독특한 역사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