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장현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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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광 성리설의 연원에 대한 고찰 - 나흠순 성리설과의 관련을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sources of Jang Hyeongwang's Theories of Li and Ch'i)

  • 김용헌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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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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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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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나흠순의 이기일물론과 인심도심성정설은 장현광의 성리설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되어 왔다. 장현광의 경위설은 리기불상리의 원칙에 충실하다는 점이 두드러지는데, 이는 나흠순의 이기일물설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장현광의 이기경위설은 나흠순의 이기일물설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첫째, 장현광이 리와 기가 두 가지 존재가 아님을 강조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이론체계에서 리와 기는 내용적 일치의 관계에 있지 않다. 둘째, 장현광의 철학체계에서 최고 범주는 어디까지나 리라는 점이다. 그의 이기론이 지닌 이러한 특징은 나흠순의 이기설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면모이다. 장현광이 도심을 성, 인심을 정으로 본 것은 나흠순의 인심도심성정설의 영향이 분명하다. 다만 그는 체는 용을 겸할 수 있다는 논리로 도심이 미발뿐만 아니라 이발도 겸한다는 논리를 펼쳤기 때문에 그의 인심도심설이 나흠순의 설의 단순한 답습이라고 하기 어렵다. 더욱이 공과 사를 기준으로 도심과 인심을 구분한 인심도심공사설은 인심과 도심을 모두 이발의 정 층위에서 이해했다는 점에서 나흠순의 인심도심성정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그렇다면 장현광 성리설의 형성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한 마디로 장현광의 철학이론은 호발설을 비판하는 맥락에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주된 철학적 관심사는 리(사단 도심)와 기(칠정 인심)를 두 근본으로 여기는 학설을 비판하고 리와 기를 하나로 통합하는 철학 체계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결국 리기경위설로 대표되는 그의 성리설은 당시 조선유학계의 학문적 상황에 대한 고민의 산물이었다는 결론이 가능하다.

웰에이징 : 노년의 삶에 대한 여헌 장현광의 성찰 (Well-Aging: the Yeoheon Jang Hyun Kwang's meditation on the old age)

  • 김경호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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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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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9-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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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조선시대 유학자였던 여헌 장현광은 '노인' 혹은 '노년의 삶'을 학술적 영역으로 끌어들여 '주제화'화고, 그러한 노년시기에 노인은 자신이 수행해야 할 사업이 있다고 본다. 그것이 '노인사업'이다. 노인이 삶에 대한 주체적 자각을 통해 자신의 책무를 수행해 가는 과정은 '삶으로서 자기완성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시기가 바로 노년의 시기이다. 필자는 장현광이 제안하고 있는 것처럼 노인이 자신의 직분을 수행해 가는 노년을 '삶으로서의 자기완성의 시기'로 보며, 이 과정적 시간을 '웰에이징'으로 파악한다. '웰에이징'은 '자기완성을 위한 존엄한 노년'인 것이다. 웰에이징은 단순히 안티웨이징(anti-aging)과 같이 육체적 노화 혹은 늙어감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늙어가는 것 그 자체를 수용하면서 노년의 시기를 긍정적인 자기 변화의 시간으로 받아들이려는 삶의 양식과 태도이다. 장현광의 물음은 한 마디로 압축된다. 곧 "노년의 시기에 인간으로서의 '노인'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이다. 장현광은 노년기는 생물학적으로 '황혼기'에 들어섰지만, 그러나 '의지적인 존재로서 인간의 사명'이 아직은 남아 있다고 본다. 그것을 장현광은 노인사업이라 하고, 그 사업을 통해 '도를 보존할 것(存道)'을 제안한다. 장현광이 제기하는 것처럼 노년기는 담담히 자신을 완성해가는 과정이자, '노인으로서의 개인'이 '자기 존재감'을 유지해야 한다. '활동적인 노년'(active aging)을 통해 '누적된 경험적 지혜'를 활용함으로써 '노인에 의한 사회적 기여'도 가능하게 된다. 이러할 때, '노인'은 '고령화시대의 노년기'를 보내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노년기'를 보낼 수 있게 된다. 자신을 완성해 나아가는 존엄한 인간으로서 노인의 시간을 맞이하게 된다. 장현광이 '노인사업'이라고 하는 철학적 성찰을 통해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은 바로 노년이란 '존엄한 존재'로서의 자신에 대한 재발견이자 자기 실현의 시기라는 점을 재확인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장현광 우주론의 상수학적 성격에 대한 검토 (The Relation of the Cosmology and Xiangshuxue of Jang, Hyeon-Guang)

  • 김문용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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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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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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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장현광(張顯光)은 조선시대 자연학자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 글은 그의 우주론 속에 함축된 상수학적 요소의 의의와 한계를 검토하는 데 목표를 둔다. 역학에서 상과 수는 만물의 분별과 그 상호관계, 그리고 그것들의 시간적 질서를 표현하는 개념 도구이다. 그것들은 음양을 결합함으로써 내부 운동인을 확보하고, 우주 만물에 대한 상수학적 해석과 설명의 틀을 구성하였다. 상수학적 우주론의 핵심적인 주장은 우주가 시 공간적으로 유한하며, 그것과 반대로 리(태극)는 무한하다고 하는 것이다. 리가 시 공간적 무한하다는 것은 도덕원리가 절대적이고 항상적임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장현광은 자신의 우주론이 주자학의 도덕형이상학과 순조롭게 결합될 수 있도록 하였다. 장현광은 역서(易書)를 자연 이해의 준거 또는 범형(範形)으로 강조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는 불완전하나마 소옹에게서 나타났던 법칙 객관주의를 질곡하고, 그의 법칙 개념으로 하여금 경험이나 지식의 확장과 더불어 스스로를 갱신해 가기 어렵게 만들었다. 이러한 이론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의 상수학적 우주론은 당시 성리학의 자연학적 근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졸재 유원지의 심성론과 퇴계학설 옹호 (Yu Won-Ji's Philosophical Theory and His Vindication of Toegye's Learning)

  • 김용헌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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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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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05-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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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유원지는 이황의 사단칠정설이 적확하고 올바른 견해로서 전대의 성인들이 전한 핵심을 얻었으며 주희의 설과 합치된다고 확신하였다. 심지어 이황의 리기호발설이 "이전의 성인에게 질의해도 의심이 없고 백세 동안 성인을 기다려도 의혹이 없다"라고까지 하였다. 동시에 그는 그 시대의 학문 경향에 대해 이이가 이황의 학설을 비판하고 성혼이 이이를 따름으로써 이설이 만연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유가의 도에 누가 됨이 이미 극에 달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가 내린 결론은 수수방관해서는 안 되고 잘못을 바로잡을 방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폭넓게 말하자면 유교의 도를 구하고, 작게는 이황의 학설을 지키는 것이 그의 철학적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유원지는 이이의 학설을 여러 측면에서 비판하였다. 그 비판들의 주된 초점은 이황의 리기호발설에 대한 이이의 비판을 재비판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사단을 칠정의 일부로 보는 견해에 대해서는 "반드시 기를 리로 인식하는 데 이르게 되고, 머지않아 인욕을 천리로 간주하는 폐단에 빠지게 된다"고 경고하였다. 한 마디로 기를 리로 여기는 병폐가 있다는 것이 이이를 바라보는 유원지의 기본적인 시각이었다. 유원지는 장현광에 대해서도 이이에 대한 비판과 같은 맥락에서 비판하였다. 장현광의 학설이 이이와 다른 것 같지만 본질적으로 같다고 파악했기 때문이다. 유원지가 이이와 장현광의 학설을 비판했던 것은 곧 이황의 학문을 옹호하고, 나아가 퇴계학파의 학문적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의식과 맞물려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그의 이론적 활동은 똑같이 17세기 중반에 활동한 이구와 다르지 않다. 유원지는 이구와 더불어 이이의 학설, 나아가 장현광의 학설을 체계적으로 비판하면서 이황의 호발설을 수호하고자 노력한, 그리고 체계적인 비판의 글을 남긴 최초의 학자라고 평가할 수 있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피란록(避亂錄)』에 나타난 서술시각과 글쓰기 방식 (Descriptive Perspective and Writing Method in Yeheon's Piranrok)

  • 정우봉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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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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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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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이 논문은 임진왜란의 체험을 다룬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피란록(避亂錄)"을 주대상으로 하여 작품에 나타난 서술시각과 글쓰기 방식을 분석함으로써 "피란록(避亂錄)"이 조선시대 일기문학사에서 지닌 의의를 밝히고자 하였다. "피란록"의 독특한 특질과 성격을 밝히기 위해 이 논문에서는 서술시각과 글쓰기 방식에 초점을 맞추었다. "피란록"에 나타난 서술시각은 크게 보아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혼란한 시대 현실에 관한 비판적 성찰의 시각이며, 다른 하나는 자기존재 및 상황에 대한 반성적 시각이다. 여헌의 "피란록"은 의론성이 대폭 강화된 점이 글쓰기 방식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피란 생활에서 겪는 개인의 일상을 매개로 하여 여헌은 개인의 출처(出處) 문제, 의병(義兵)의 동향과 전망, 축성(築城)의 이해 득실, 인륜 도덕의 회복, 전란의 원인과 책임 등 다방면에 걸쳐 자신의 의견과 주장을 선명하게 펼쳐내었다. 사회비평적 성격과 철학 담론적 성격을 효과적으로 작품속에서 구현하기 위해 여헌의 "피란록"은 임진왜란을 다룬 여타 일기와 달리 의론성의 비중을 크게 높였으며, 인물간 대화와 자문자답의 기법, 피란 고통의 생생한 묘사 등을 적절하게 활용하였다. 그리고 여헌 장현광의 "피란록(避亂錄)"이 지닌 문학사적 위상을 파악하기 위해 여헌의 문인이었던 유진(柳袗)의 "임진록" 및 도세순(都世純)의 "용사일기"와 비교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유진과 도세순의 일기는 청년의 눈으로 비쳐 본 전쟁의 참상과 혼란을 다루고 있으며, 개인의 생생한 체험을 최대한 충실하게 복원하는 데에 서술의 초점이 놓여 있었다. 따라서 개인 서사의 부분이 큰 비중을 차지하며, 여헌의 "피란록"에서 두드러지는 의론성 부분은 상대적으로 미약하다.

설화에 나타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인물 형상 (The Character Figuration of Yeoheon Jang Hyungwang in the folk tales)

  • 장정수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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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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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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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본고에서는 여헌을 주인공으로 한 설화를 대상으로 하여 설화 전승의 주체인 민중들이 여헌을 어떻게 형상화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현전하는 여헌 관련 설화는 무례한 관찰사 아들을 너그럽게 용서한<장현광의 소탈한 성품>, 의성 현령(縣令) 시 오월비상(五月飛霜)을 예견해 냉해를 막아낸 <여헌 선생의 예언>, 충북 보은의 '치마바위'와 청송 '여헌대'의 지명 유래 설화인 <치마바위>와 <여헌대> 4종밖에 되지 않는다. <장현광의 소탈한 성품>은 초라한 행색을 한 자신을 몰라보고 무례하게 군 젊은이를 너그럽게 용서하고 '검소함'과 '겸손'을 깨우쳐 주는 대학자의 소탈하고 너그러운 인품을 보여 준다. <여헌 선생의 예언>에는 백성들을 유교적 도덕으로 교화시키며, 백성들의 생업을 진작하기 위해서 힘쓰는 애민의식이 투철한 목민관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치마바위>는 아내가 백성들로부터 전별 선물로 받은 비단 속곳마저 돌려주도록 한 청렴결백한 관리의 모습을 형상화하였으며, <여헌 선생의 예언>과 <여헌대>에는 앞날을 예견하는 비범한 도학자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이들 설화는 대체로 그의 성품이나 행적, 실제 사건 등을 토대로 하여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설화 속의 여헌의 형상은 '검소하고, 겸손하며, 도량이 넓고, 주역에 통달하였으며, 도덕적 경세관(經世觀)을 실천한' 그의 실제 모습에 근접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학교교육론(學校敎育論)과 그 도덕교육적(道德敎育的) 함의 (Yeoheon Jang Hyeongwang's perspective on schooling and the implication of moral education)

  • 박학래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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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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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45-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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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본고는 퇴계(退溪)와 율곡(栗谷) 이후 조선 성리학을 주도했던 대표적인 성리학자인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1554~1637)의 학교 교육, 특히 향교(鄕校) 교육(敎育)에 대한 입장과 구체적인 활동을 검토하고, 그것의 도덕교육적 의미를 정리한 것이다. 16세기를 전후한 시기부터 구체화된 향교 교육의 폐단에 대해 퇴계와 율곡은 모두 그 문제점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이에 대한 처방에서는 구별되는 입장을 드러냈다. 퇴계가 향교 교육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유학교육의 면모를 일신하기 위해 서원(書院)의 건립과 위상 강화에 주목하였다면, 율곡은 관학 교육기관으로서 향교의 교육 개혁에 보다 관심을 기울였고, 이를 통해 학교 교육의 면모를 일신하고 인재 양성과 윤리기강의 확립을 추구하였다. 본고에서는 퇴계와 율곡의 구별되는 학교 교육 개혁에 대한 입장에 유의하면서 여헌의 학교 교육에 입장을 고찰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피폐해진 향촌 사회의 도덕 질서 회복에 주목한 그의 문제의식이 어떻게 향교 교육과 연결되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분석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그의 향교 교육에 대한 구체적인 입장을 그가 제시한 인동 향교의 교육 조목을 통해 체계적으로 정리 분석하였으며, 이를 통해 그가 의도한 향교 교육의 내용과 실체가 무엇이었는지도 함께 검토하였다. 나아가 여헌의 향교 교육에 대한 관심과 활동이 도덕교육적으로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를 살피고, 현재 교육 현실과 연관하여 어떤 시사점을 주는지 시론적(試論的)인 입장을 제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