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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습진(習陣)과 군사훈련 (The Study of Military train through Soupjun in Early Joseon Dynasty)

  • 곽낙현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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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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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59-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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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이 연구의 목적은 조선전기 군사훈련인 습진(習陣)이 어떠한 모습으로 변화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이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습진(習陣)'은 진법훈련 또는 진법교련의 뜻으로 정의할 수 있다. 둘째, 오위체제와 "오위진법(五衛陣法)"의 간행은 군제조직의 개편과 진법교범서들의 지속적인 편찬 속에서 하나의 종합적인 결과물로 완성된 것이다. 셋째, 조선전기 태조부터 선조대까지의 진법 내용의 총 기사 수는 268개이며, 이를 왕별로 세분하면, 태조 2개, 태종 2개, 세종 23개, 문종 20개, 단종 11개, 세조 70개, 예종 7개, 성종 25개, 연산군 4개, 중종 50개, 선조 54개이다. 이 내용을 살펴보면 역대강무제도, 진법훈련, 친열, 오진법 편찬 시행, 진법 사목 논의, 진법훈련 절차개선, 진법서적편찬, 신진법 완성 및 반포, 진법훈련조목 개선, 진법강론, 진법능부, 진법열병, 진법훈련정지, 척계광의 절강진법, 기타 등 15개 항목으로 추출할 수 있다. 넷째, 태조, 태종, 문종, 세조, 예종, 중종은 신하들에게 직접 진법훈련을 지시하고 주도한 국왕이었다. 이 중에서 문종과 세조는 신진법인 "오위진법(五衛陣法)"을 편찬, 개정하고 군사조직의 일원화를 꾀한 점이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외에 중종은 역대 국왕들이 편찬한 진법교범서를 강론하고 훈련시킨 것을 알 수 있었다. 반면, 선조는 중국의 척계광이 지은 "기효신서(紀效新書)"를 받아들여 남방의 왜구를 방비하는 진법으로 전환시켰다. 다섯째, 진법훈련을 통해 알 수 있는 변화는 세조대부터 성종, 예종, 중종까지 형명과 진퇴좌작을 강조하였다. 이는 조선 건국 후 북방의 기마병에 대한 방비책으로써 진법훈련이 시행되었다. 반면,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선조부터는 남방의 왜구를 효과적으로 방비하는 척계광의 절강진법이 수용되면서 새로운 진법체제로의 전환이 모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조선의 침략방어대상이 북방에서 남방 왜구로 변화되었다는 점과 기존의 북방기마병을 막는 전술인 오위진법체제로는 수군과 보병위주인 왜구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이 주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강진 무위사 극락전과 후불벽화의 조성배경 (A Study on the Sources of Creativity in Buddhist Mural Paintings of Muwisa and Geungnakjeon in Gangjin)

  • 배종민
    • 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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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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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9-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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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
  • 이 연구의 주제는 무위사 극락전의 건립과 후불벽화의 조성배경을 살펴본 것이다. 무위사 극락전이 건립된 것은 세종 12년(1430)의 일이었으며, 후불벽화는 성종 7년(1476)에 조성되었다. 그런데 이 시기는 억불정책이 강력하게 추진되고 있었다. 따라서 무위사에서 어떻게 극락전의 건립이 가능하였고, 누가 벽화의 조성에 참여하였는지 궁금해진 것이다. 무위사 극락전의 건립은 지유와 대화주, 그리고 시주가 주도하였다. 이들 중 가장 중요시된 것은 지유었다. 특히 지유 효영은 효영대군 이보와 동일인물로 믿어진다. 무위사 극락전의 건립은 자복사와 수륙사로 공인된 데 힘입은 불사였다. 자복사는 왕실의 명복을 기원하는 원찰의 성격을 지닌 사찰이었으며, 수륙사는 수륙재를 베풀 목적으로 특별히 지정된 사찰이었다. 수륙재는 적을 포함한 전망자와 모든 망영을 위로하는 불교의식이었다. 자복사와 수륙사에는 국가로부터 각종 지원이 뒤따랐다. 따라서 효령대군의 무위사 불사참여도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되는 것이다. 무위사 극락전 아미타후불벽화는 강진으로 낙향한 양반과 토착세력이 주도하고 대선사와 양인 부여자, 부곡민과 노비가 동참한 불사였다. 이와 같이 다양한 신분의 인물들이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무위사가 수륙사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수륙사에서 베풀어지는 수륙재는 모든 망영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왕실부터 서민에 이르는 폭넓은 참여계층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세종 2년에 수륙재가 공인된 유일한 상예가 되면서, 왕실의 구병부터 전염병의 방지를 기원하는 재에 이르기까지 그 역할과 참여계층의 확대가 이루어 됐던 것이다. 무위사가 자리잡은 남해 연안지역은 왜구의 약탈이 극심한 지역이었다 이 당시에 아미타신앙과 지장신앙이 성행하였는데, 그 배경에는 왜구로부터 당하는 혹독한 고초로부터 벗어나려는 열망이 깔려있었다. 무위사가 수륙사로 지정되고, 대웅전이 아닌 아미타여래를 본존불로 하는 극락전이 건립된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이후 강진지역의 사람들은 신분의 구별 없이 무위사의 수륙재에 참여하면서 커다란 위로를 받았다고 믿어진다. 그리고 차츰 무위사 극락전을 수륙사라는 사격에 걸맞게 장엄하려는 공감대를 형성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결과 무위사 극락전이 건립된 후 45년 만에 극락전의 내부가 개조되고, 아미타후불벽화가 조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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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뮬레이션을 통한 부산포 해전의 재현에 관한 연구

  • 안웅희
    • 한국항해항만학회:학술대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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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항해항만학회 2021년도 추계학술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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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4-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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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임진왜란에 발생한 전투 중 부산포 해전은 이순신 장군이 일본의 근거지를 직접 공격하여 대규모의 타격을 입힌 의미 있는 해전이다. 이 연구는 임진 4차 출전 시 부산포 일대의 전투에 대하여 지금까지의 역사적 인문학적 크고 작은 성과를 종합하고 적용하여 2차원과 3차원적인 공간속에서 재현하고자 한 것이다. 이를 위하여 부산포 해전장 주변의 고지도, 조선과 왜구의 선박, 선박의 이동과 전투 시 행해졌던 진형, 그리고 사거리 등을 적용하여 입체적으로 가시화 하였다. 특히 부산성 주변 해안에 일본의 선박이 주둔한 곳을 추정하고 가시화하기 위하여 다양한 역사적 자료와 성과를 활용하는데 주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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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남부지역 연해 군현과 수군영진의 선소(船所)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Shipyard of the Costal Counties and the Naval Castle in the Southern Gyeongsang-do)

  • 권순강;이호열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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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8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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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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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The Chosun Dynasty established and implemented measures to prevent Japanese invasion into the southern coast. To this end, the number of naval vessels and the number of ships were increased, and a shipyard(船所) was constructed to protect the safety of the vessels. The shipyard is a port facility where military vessels are anchored and repaired, as well as public facilities that are needed for military training on public and land, as well as facilities for storing supplies and equipment needed for ships on land and defense at the port entrance. Despite being such an important facility for national defense, Shipyard has not been noticed. Studies have shown that the position of shipyard is divided into the riverside type and the riverbank type, which is due to the topographical features of Korea. The repair cycle of naval vessels, the carrying out of Yeonhun(prevent the water from decaying the part of the ship, a raw tree was burned to smoke) and the place of sea training also affected the construction of the Gul River(掘江). The space structure of shipyard is divided into port entry facilities for monitoring and controlling at the entrance to the harbor, border facilities for folding and repairing military vessels, and land facilities for holding land exercises and administrative work of military vessels and military equipment.

제주도 지역 성곽 유산 연구 현황과 보존·정비 방향 (The Status of Studies on Historical Wall Relics in the Jeju Area and the Strategic Direction for Their Preservation and Maintenance)

  • 변성훈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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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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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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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제주도는 지정학적 위치상 동아시아 해로의 중요한 중간 기착지였기 때문에 과거로부터 주변국의 외침을 빈번하게 받아왔다. 특히 쓰시마에 거점을 둔 왜구들이 중국을 오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제주를 정복하기 위한 왜구의 침략이 고려 말 이후 계속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제주도 곳곳에는 외침에 대비한 방어시설들이 설치되었고, 특히 소수의 인원으로도 효율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성곽이 곳곳에 축조되었다. 이는 내륙과 떨어져 있어 유사시 신속한 지원을 받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관계로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성곽은 해당 지역의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중심지였던 만큼 그 지역의 역사와 지리적 특성을 연구하는 데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런 이유로 성곽에 대한 연구는 일찍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제주도의 성곽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늦은 편이다. 다른 지역의 성곽 조사는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되었으나 제주도의 경우는 1970년대 들어서야 조사되기 시작했다. 이는 제주도 성곽의 중요성을 빨리 인식하지 못했고 성곽을 연구하는 전공자가 제주지역에 없었던 것이 원인일 것이다. 제주도에 대한 고고학조사가 본격화되면서 성곽에 대한 연구도 점차 진전되었으나 아직도 그 수준은 초보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그동안 제주도 성곽 유적에 대한 연구 현황과 보존 정비 현황을 시대별로 구분하여 살펴보았다. 그 결과 고려시대 성곽 유적 2개소와 조선시대 성곽 유적 13개소의 성곽 유적 현황과 연구 현황을 분석하여 제시할 수 있었다. 성곽 유적의 보존 정비 현황에서는 잔존하는 성벽과 부속시설 현황을 제시하였고 지금까지 이루어진 정비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그리고 성곽 유적의 정비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언급하여 향후 복원 정비에 참고할 수 있는 개선방안을 간단하게 제시하였다.

충주 금천창 연구 (The Study of Keumcheonchang in ChungJu)

  • 조길환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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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1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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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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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이 글은 탄금대 서쪽에 위치하는 충주 창동유적 발굴조사 결과와 조선왕조실록의 금천창으로부터 시작한다. 벼루가 연결된 좁고 경사가 급한 지형에 자리잡은 주칸거리 420cm의 여러 동의 건물지 조사는 구전으로 전해온 금천창에 대한 일부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태종 11년(1411)에 낙동강과 한강을 잇는 충주 금천(金遷)에 새로이 200여 칸의 창고를 지어 금천창이라고 이름하고 충주인근의 전세 뿐만 아니라 경상도 전세도 함께 수납하여 경창으로 운송하게끔 하였다. 세조는 강력한 중앙집권을 위해 관선조운체계를 구축하였고, 이것은 조선 중기까지 이어진다. 조선은 적은 인구와 낮은 도시화율에 의해 하삼도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가 절대적이었다. 하삼도 토지에 부과된 세곡은 국가재정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조운은 삼면이 바다인 지리적 잇점에 의해 서구자본이 밀려오기 전까지 가장 효율적인 물류체계였다. 조선은 고려의 조운을 근간으로 하는 물류체계를 구축하였다. 조선의 9조창은 왜구에 의해 파괴된 고려의 13조창을 개편한 결과이며, 특히 내륙 물길인 수운(水運)을 강화하여 왜구의 노략질 및 해난사고 등의 망실을 해결하고자 하는 고민이 담겨 있다. 금천창은 태종 11년(1411)에 건립되어 세조 11년(1465)까지 54년간 사용된 좌수참임을 알 수 있다. 가흥창으로 전세 수납처가 옮겨지면서 그 중심적 지위를 잃게 된다. 금천창은 조선이 고려에서 벗어나 사회안정과 새로운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관선조운에 의해 선택된 내륙수운개발의 결과물이다.

고려 말 왜구 침입과 해양방어의 중요성에 대한 연구 (A Study on The Waegu(倭寇)'s invasion and the importance of the Ocean Defence in the Late Goryeo(高麗) Dynasty.)

  • 이도원
    • Strategy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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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권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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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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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Waegu(倭寇)'s invasion in the Late Goryeo(高麗) Dynasty was huge damage for Goryeo's local society. And It was shock that Goryeo government's basic foundation of rules. Invasion background of waegu for Kyeong-in-yeon(庚寅年, 1350) was Kyushyu(九州)'s political divide because of Nihon(日本) government's confusion. Waegu was huge damage for Goryeo's Jo-wun(漕運, the shipping system of grain paid as a tax) system. So, government started military response, but it was turn out a failure and had great damage. When execution of military operations failed, Goryeo government sent diplomatic delegation to request the prevent of waegu, but the invasion continued. Since waegu invasion, Goryeo was got nowhere with defence of waegu. So, some people demanded for a new understanding of the ocean defence in the government. Lee-Saek(李穡), Woo-Hyeonbo(禹玄寶), Lee-Hee(李禧) and Jung-Ji(鄭地) were representatives of a new understanding of the ocean defence. Their demands were received attention when all operations had been failed. Therefore, Goryeo government began to reorganization of the naval forces and set up a special committee of gunpowder manufacturing named Hwa-tong-do-gam(火筒都監). This administrative reform was achieved substantial results since then. In 1380, the naval battle at Jin-po(鎭浦) was a big event that first gunpowder attack the waegu. Since Jin-po, Goryeo's naval forces gain confidence. In 1389, Dae-ma-do(對馬島) was attacked by Park-Wi(朴葳). It was meant that Goryeo's naval forces had huge offense power. Goryeo's defence system was focused on a northern race before 14th century waegu's invasion. So they were neglected their ocean defence. But after military operation of waegu's invasion was failure, they focused on the ocean defence. A new understanding of the ocean defence was foundation of that. It means to us to a new understanding of the ocean defence. Now, East Asia has maritime disputes. And we have high exposure to potential threats. So, we have a new understanding of importance of the ocean defence. And we fight for 21th century's ocean threats as foundation of sense of national secu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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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암(及庵) 민사평(閔思平)의 현실인식 (A study on Keup-ahm Min Sah-pyeong's Realization of Reality)

  • 정성식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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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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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09-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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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본 논문의 목적은 고려 말에 삶을 영위한 민사평(閔思平, 1295~1359)의 현실인식을 고찰하는 데 있다. 민사평은 당시 여러 학자들과 활발한 교섭을 통해 학문적 교류가 가능했다. 그는 21세 때 과거시험에 합격한 후 여러 관직을 수행해 오면서 행동이 바르고 지조가 변하지 않았다. 민사평은 이제현, 백문보, 이색 등과 자주 만남을 가지며 생각을 주고 받았다. 가끔 백문보는 모여서 술 마실 때 함께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색은 민자평이 현묘한 시법을 깨달은 자라고 높게 평가한 바 있으며, 그의 시는 후세까지 계속 전해질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민사평이 활동했던 시대는 고려 말로서 국내외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던 때였다. 국외적으로 고려 말은 당시 빈번했던 왜구와 흉노의 침입으로 인해 피폐해진 국토와 고통 받는 백성들로 온 나라가 불안정했다. 국내적으로는 당시 위정자들의 부패와 백성들의 고통이 심각했다. 그는 당시 백성들의 궁핍한 생활상을 비판적으로 언급하며 애민적 현실인식을 보였다. 그는 의리가 없는 삶은 정상적인 삶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만약 욕심이 있다면 부귀영화도 언젠간 쇠퇴할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는 당시 백성의 심정을 깊이 동정하고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여 구제될 수 있기를 희망하였다. 여기서 민사평의 애민적 현실인식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살필 수 있었다.

조선(朝鮮) 후기(後期)의 병서(兵書) 편찬(編纂)과 병학(兵學) 사상(思想) (Compilation of Books on Military Arts and Science and Ideology of Military Science in the late Joseon Dynasty)

  • 윤무학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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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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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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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이 글은 조선 후기에 편찬된 대표적 병서와 지식인들의 논의를 중심으로 병학사상을 살펴본 것이다. 조선은 개국 이래 200여년의 태평성대를 구가하다가 양대 전란(戰亂)을 거치면서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조선 병학의 한계를 각성하였다. 유성룡(柳成龍)의 "징비록(懲毖錄)"에 반영된 왜적(倭賊)에 대한 대비책과 전란의 경험은 후기 병학 사상의 토대가 되었다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선초의 병서에는 이에 대한 대비책이 별도로 제시된 일이 없었다. 한편 선초의 진법(陣法) 논쟁과 마찬가지로 후기 병학의 정립과정은 순탄하지 못하였다. 임란 직후 명(明)나라 군대를 통해서 척계광의 "기효신서(紀效新書)"와 "연병실기(練兵實紀)"가 유입되었는데, 처음에는 원본 내지는 초록본의 형태로 군사훈련에 활용되다가 후에 "병학지남(兵學指南")"과 "연병지남(練兵指南)"으로서 출간되었다. 이 책들은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도 왜구와 북방 오랑캐를 대응하는 데 있어서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선초 이래의 오위진법과 상충되기도 하고 중국과 우리나라의 지형이 차이가 있으므로 획일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영조(英朝) 정조(正祖) 때에는 "속병장도설(續兵將圖說)", "병학통(兵學通)", "병학지남연의(兵學指南演義)",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등 조선 후기의 대표적 병서를 출간함으로써 군사훈련의 통일성을 기하고자 하였다. 정조는 당시 논쟁에 대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해명하였으며, 이로써 선조 때부터 200여년 지속된 논쟁은 종료되었다. 조선 전기와 후기의 병학적 특징을 개괄하자면, 선초에는 "무경칠서(武經七書)"를 바탕으로 문신(文臣)의 주도하에 병학의 윤리화(倫理化)가 진행되었다면, 후기에는 "기효신서"가 계기가 되고 상대적으로 다수의 武臣이 논쟁에 참여하면서 병학의 실학화(實學化)가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조선 병학의 정립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세조(世祖)와 정조(正祖)인데, 양자는 모두 왕위계승 과정이 순조롭지 못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클라우제비츠의 "전쟁은 정치 행위의 연속이다"라는 명제가 생각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