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왕실호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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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왕실근위대 분석을 통한 국내 시사점 연구 (Implications from Analysis on the U. K. Household Division)

  • 방환복
    • 시큐리티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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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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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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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이 연구는 1660년부터 지금까지 350여년이란 역사를 가지고 있는 영국 왕실근위대의 변천사와 조직구조, 임무에 관한 조사와 함께 왕실근위대 교대식과 한국 수문장 교대식의 비교 분석을 통해 우리에게 시사(示唆)하는 바가 무엇인지 밝혀보고자 했다. 연구 결과를 요약하자면 입헌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는 영국왕실은 영국을 대표하는 상징으로써 350년 동안 왕을 호위하는 왕실근위대가 존재해왔다. 왕실근위대는 영국 육군 소속의 정규군으로 현재 2개 기병연대와 5개 보병연대를 비롯하여 왕립기마포병대 등이 하나가 되어 왕실근위사단을 이루고 있다. 이들의 임무는 크게 구분하면 왕을 호위하고 궁 경비, 국가 의식행사에 동원되는 임무 외에 최정예 부대로 전투에도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영국의 왕실근위대와 한국 수문장 교대식 비교에 있어서는 왕 호위, 궁 경비 등과 전통계승 차원이라는 점에서 유사점을 찾을 수 있었고, 반면 기본적인 취지와 목적, 광관상품화 과정, 전담조직 등에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왕실근위대는 영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이미지로 잡아온 반면, 한국 수문장 교대식은 사적자료의 고증을 통한 문화재연 행사로 전통계승, 관광산업적 측면을 강조해왔지만, 세계의 유일의 독특한 왕실 호위 및 경비 문화를 전반적으로 담을 수 있는 콘텐츠로는 미흡한 점이 있어 이를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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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의 호위제도 고찰 (A Study on the Guard System in the Last Period of the Joseon Dynasty)

  • 이성진
    • 시큐리티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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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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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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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구한말의 호위제도 고찰은 개항 이후의 고종의 친정, 그리고 대한제국시대의 국내외적으로 위기에 처한 시대의 왕실호위제도에 대한 고찰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호위제도를 이해하기 위하여 1863년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집정하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60년간의 세도정치로 인하여 문란해진 왕권을 강화하고 국방력강화와 비변사를 폐지하며 종전의 삼군부로 부활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왕권 강화에 도움을 주었고 허약했던 중앙군을 강화하여 상비군을 늘리고 군기를 숙정하게 되었으며 신무기를 개발하는 등 군사력 강화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대원군 실각 후 고종이 친정을 했다고 하나 대원군과 민비세력과의 불화로 인한 불안에 대처하여 궁궐 숙위를 전담하는 무위소를 설치한 이래, 2군영 제도 실시의 친군영, 용호영의 부활, 시위대 친위대 등으로 이어진 갑오개혁까지의 호위체제의 변화는 법제적인 것이 아니었고 일본, 청국, 러시아 등 외세의 변화상황에 따라 주체적으로 힘을 다한 것이었다. 일본이 침략경쟁에서 승리한 이후 독무대가 되는 상황의 변화로 인해 대내의 국가수호에 대한 노력의 효과가 약화되었으며, 더욱이 갑오개혁 이후 경무청 내에 왕실 업무를 담당하는 경무서를 둔 것과 대한제국시대의 경무서를 경위원과 황궁경위국으로 개편되었던 제도역시 일본의 영향 아래 들어가게 되어 무력화되었다. 그러나 역경에서 이루어진 그 노력과 분투의 과정은 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따라서 왕실을 호위하는 세력이 일본에 넘어간 대한 제국시대의 호위제도와 모든 상황전개는 제도가 아무리 완벽하게 수립되어 있을지라도 국력이 이를 뒷받침해주지 못할 때 왕실의 호위제도는 무력화될 수밖에 없다는 역사적 교훈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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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호위제도의 고찰 (Study on the Guarding System in the latter "Choson" era)

  • 이성진
    • 시큐리티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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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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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9-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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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조선시대의 경호제도는 경국대전 세조, 예종 때에 완비되고 성종 때에 보충됨으로 써 이 법전을 근거로 하여 우수한 군사를 선발하여 근접경호를 담당하는 금군과 수도 방위와 시위임무를 담당하는 중앙군에 편성함으로써 왕실호위체계가 확립되었다. 임진왜란을 기준하여 볼 때, 전기에는 내금위, 겸사복, 우림위, 정로위로 구성되었던 금군이 후기에 들어 상황에 따라 변화를 거듭하였다. 조선전기에 국왕의 신변보호와 수도권 방위에 주력하던 금군의 임무가 임 병 양란의 영향으로 변란과 외적침입을 막아내는 전쟁을 아울러 수행 하는 상황에서 전에 임시방편적으로 설치되었던 비변사의 역할이 확대되는 등의 군사제도의 변화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5군영제의 실시로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의 3 군영이 국왕 호위와 수도방위를 담당하였고, 총융청, 수어청은 북한산성과 남한산성을 거점으로 수도권외곽의 방어를 담당케 하였다. 따라서 왜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금군의 기능이 확대됨에 따라, 인원이 대폭 증가되고 현실인식과 자아각성으로 인한 서민의 지위가 높아짐에 따라 왕실과 국가의 호위체제에도 상황에 따라 변화가 잦게 되었다. 그러나 종전에 있던 제도가 그대로 남아 있어 실제로 호위를 맡은 군사보다 명분상의 숫자가 늘어난 결과가 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약해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호위청, 금군청, 숙위소, 장용영 등의 금군의 재편성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에 뒤따르는 재정적 뒷받침에도 문제가 되는 가운데 기존의 기본조직들의 위상에 대한 변화도 심해졌다. 정조의 등극은 호위제도의 변화에 획기적인 시대였다. 정조는 친족들의 세력을 물리치기 위하여 숙위소를 신설하고 장용영을 강화하여 새로운 정치를 실현하고 당대에 한했지만 왕권을 강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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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전기(高麗前期)의 왕실호위 제도의 조직과 기능에 관한 연구: 2군육위(二軍六衛)를 중심으로 (A Study on the Organization and Function of Security for the Royal Household in the Early Koryo: focused on 2Gun6Wi)

  • 김형중
    • 시큐리티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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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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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9-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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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고려시대는 우리나라의 경호사적 측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고려전기는 절대왕권이 성립되는 시기로서 국왕과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공적 경호중심의 호위제도였다면, 고려후기 무신집권기에는 공식적 호위제도인 2군6위는 형식적인 기구에 불과하였고, 무신집권자의 신변호위와 집권체제의 강화를 위한 사적 경호가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 고려전기의 호위제도에 한정하여 논의를 전개하는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이다. 고려전기의 관제상의 호위관련 기관으로서는 내군부(內軍部), 병부(兵部), 중추원(中樞院)을 들 수 있으며, 특히 중추원에 대하여는 심도 있게 접근하여 살펴보았다. 한편 고려전기의 병제상의 호위관련 기관으로서는 2군6위와 공학군, 견룡군 등을 들 수 있다. 2군은 응양군과 용호군을 말하며, 국왕의 친위대였다. 특히 2군과 관련하여 논의되고 있는 공학군과 견룡군에 대하여 기존의 학설과는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여 이들의 실체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그리고 공적호위와 관련하여, 6위 중 금오위는 궁궐 수도 개성의 수비, 순찰 및 포도금란(捕盜禁亂)의 임무외에도 국왕이나 중국사신 등에 대한 호위업무 중 도로에서의 비상사태와 관련하여 도로를 정리하고 선도 호위하는 임무도 수행하였고, 천우위는 궁전에서 대례(大禮), 대조회(大朝會)시에 왕을 시종 시위하는 친위부대였음을 문헌 등을 통하여 고증(考證)하였다. 결론적으로 본 연구는 곳곳에 산재(散在)해 있는 호위제도와 관련된 문헌과 연구자료들을 발굴하고 분석 평가하여 전방위적으로 하나의 골격이 형성된 호위제도로서의 기구와 기능을 새롭게 조명해 보았다는 점에 의미를 두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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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무신집권기 호위제도의 경호학적 고찰 (History of Guard System during the Period of Military Rule in the Goryeo Dynasty)

  • 이성진;조성진
    • 시큐리티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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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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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3-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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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고려전기의 궁중호위는 2군6위의 중앙 정규군으로 편성되어 궁궐안의 호위는 내순검군이 담당하였으나, 무신집권기에 이르러 군제는 문란해지고 왕실 호위는 무신들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무신들은 왕의 지척에 있는 중방을 중심으로 문신들을 억압하고 왕권을 무력화 시킨 후 국정을 좌지우지하였다. 무신의 3거두였던 정중부, 이의민, 이고 등의 집권이 단명으로 끝나고 경대승이 집권자의 지위에 올랐을 때, 그는 자신의 신변안전을 위하여 백 수십인의 결사대를 문하에 두었는데, 이 조직이 도방(都房)이었다. 경대승이 병사함에 따라 도방이 폐지되고, 최충헌 집권시대에 신변보호와 집권체제 강화를 위해 경대승의 도방을 부활시켜 보완한 6번(番)도방은 규모가 방대하고 더욱더 체계를 잘 갖추었다. 최충헌의 아들 최우의 집권기에 6번 도방은 내외도방(內外都房)으로 확장, 강화되었으며, 손자 최항의 집권기에는 한층 더 발전하여 도방 36번제도가 확립되었다. 초기의 도방은 무신 중심으로 도방 주인의 신변안전을 목표로 하였지만 후기에는 문신이 참여함으로써 정보 수집과 선발 경호의 활동을 하였고, 내도방에 해당되는 가병은 사후 위험 방지 역할까지 함으로써 개인의 호위에 만전을 기함은 물론 가문을 지키고 나아가 사회질서와 왕실과 조정을 장악하고 외적의 침략에 대비하는 포괄적인 임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최 씨 정권은 사적 친위조직으로서 도방 이외에 마별초(馬別抄)를 창설하였는데, 이는 도방과 함께 기병과 보병(步兵)의 양쪽 날개를 이루었다. 삼별초는 고종 때 최우가 조직한 야별초가 좌별초, 우별초로 나누어지고, 여기에 신의군이 합해져 만들어진 것이다. 삼별초가 조직된 이후에는 별초군이 군사와 경찰, 형옥에 이르기까지 그 기능을 발휘하였다. 무신집권기의 호위 조직이었던 도방과 별초군은 엄밀한 의미에서 사설경호기구로 출발하였으나 차츰 왕실 호위 기구를 무력화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하여 왕실이 도방의 보호를 받는 경지에 이르렀다. 사설경호경비에 해당되는 현대의 민간경호경비는 영리성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특성이지만 공적경호경비와 마찬가지로 범죄예방활동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신 집권시기의 가병이나 도방 구성원들의 역할과 공통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무신집권기의 경호조직은 처음에 개인의 신변 호위를 담당한 도방으로 출발하여 무신들의 참여와 확장으로 공공성을 띠어가게 되었고, 삼별초(三別抄)의 활약에 이르러서는 왕실 호위기구가 담당했던 역할에 근접하는 국가 사회 치안구조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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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正朝代) 장용영(壯勇營)의 경호학적 가치 (King Jeongjo's Jangyongyoung and its Value in Terms of Security)

  • 이성진
    • 시큐리티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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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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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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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상정조대 장용영(壯勇營)은 정조 즉위 후에 신변안전(身邊安全)과 왕권강화(王權强化)를 이룩할 수 있도록 뒷받침한 친위부대(親衛部隊)였다. 이는 경호학적 관점에서 볼 때 경호제도 발전과 호위(扈衛) 성과, 경호환경(警護環境)조성의 문화적 가치가 있다. 장용영은 조선 후기의 호위제도의 변화 속에서 정조의 정치적 개혁을 실천해 나가는 데 있어서 합당한 제도로 거듭났다. 인조반정 이후에 역 쿠데타를 방지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호위청(扈衛廳)과 어영청(御營廳) 발족, 그리고 효종 때의 군사력 증강을 목표로 금군을 발전 시켰던 제도들은 임시변통적인 것이다. 그러나 장용영은 숙위소${\blacktriangleright}$장용위${\blacktriangleright}$장용영의 과정을 거치면서 보다 지속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제도로 거듭나 자신의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지키면서 왕권강화와 민생안정에 대한 정치적 포부를 실현하는 데 실질적으로 뒷받침 할 수 있는 친위부대로 발전하였다. 장용영의 제도에는 효율적인 조직과 운영이 내포되어 있다. 장용영 조직의 특성은 통합성, 전문성, 대규모성을 지닌 것으로서 현대경호의 특성을 드러냈다. 장용영의 군사훈련(軍事訓鍊)과 호위(扈衛)는 분리된 것이 아니었다. 호위 작용에서도 정적인 신변보호(身邊保護)와 숙소경비(宿所警備)의 임무에 충실했으며, 이에 머무르지 않고 보다 폭넓은 활동의 범위에서 일어날 수 있는 돌발 사태에도 충분히 대비하였다. 그리하여 잦은 능행과 대규모의 화성행차 및 병사들의 훈련 참관 등의 폭넓고 자유로운 활동을 뒷받침할 수 있었다. 장용영은 단순히 군사적 기능만을 발휘한 부대가 아니고 문화적 기능을 발휘하여 왕실과 백성들이 위기를 극복하고 하나가 되어 왕의 행차(行次)에 참여하고 왕과 직접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왕과 병사가 하나가 된 장용영은 정조의 개혁정책을 뒷받침하는 핵심부대로서의 위용(偉容)을 보여줌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국왕과 신하와 백성들이 하나가 되는 경호문화행사(警護文化行事)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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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왕실호위제도의 사적 고찰 (Historical Review on the Security Service for the Royal Household in the "Goryeo" Era)

  • 이성진;김의영;이종환
    • 시큐리티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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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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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13-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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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고려시대의 왕실 호위라 함은 오늘날로 보면 국가원수에 대한 경호에 해당한다. 고려시대의 독특한 정치제도가 완성되기까지는 신라시대나 태봉국의 제도를 답습하여 왕의 신변을 중심으로 경호가 실행되었다. 고려의 중앙군은 2군과 6위라는 8개의 부대로 편성되었다. 2군은 6위보다 위였으며 이는 응양군(鷹揚軍)과 용호군(龍虎軍)으로서 이를 근장(近仗)이라고 불렀다. 이를 오늘날의 공경호와 관련을 지어보면 근접경호에 해당된다. 고려 귀족 사회의 안정기에 귀족문화의 전성기를 누렸으나 그 뒤로 귀족분열과 상극대립으로 중앙통제력이 약화되는 가운데 무신란이 일어나고 무신들이 집권함으로서 왕의 신변은 안정되지 못하였다. 최씨 무인집권시대에 이르러 무인집권의 안전을 위하여 도방을 설치했고 최우 시대에는 그의 문객들을 모아 사병들뿐만 아니라 정방, 서방, 등의 문신을 거느려 인사행정을 담당케 했다. 몽고에 항쟁하던 시대에는 무신통치의 군사적 기반이었던 삼별초를 중심으로 항쟁했다. 최씨 정권시대의 그들 나름의 국가관과 국가 호위의 정신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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