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영혼불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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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돈』에서의 세련된 원인들 (The Sophisticated Causes in the Phaedo)

  • 전헌상
    • 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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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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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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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파이돈" 102d10-107b10에서 제시되는 영혼 불멸에 대한 마지막 증명은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마지막 증명에서 소크라테스는 더 세련된 원인의 유형을 확립한 다음, 영혼이 몸에 삶을 가져오는 세련된 원인임을 보임으로써 영혼의 불사와 불멸을 증명하려 시도한다. 그런데 세련된 원인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예로서 제시되고 있는 것들, 즉 셋, 불, 눈, 그리고 영혼의 존재론적 지위에 관해 치열한 논쟁이 있어왔다. 이 글에서는 이 논쟁의 주요 측면들을 면밀히 검토하고, 그것이 마지막 증명의 타당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고찰한다. 일군의 학자들은 저 넷이 모두 내재적 형상이라고 해석한다. 반면 일군의 학자들은 저 넷 모두가 내재적 형상이 아니라고 해석한다. 이 글에서는 저 넷 중에는 형상과 형상 아닌 것이 혼재하고 있음을 보인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러한 혼재와 영혼의 존재론적 지위가 모호한 상태로 남겨져 있다는 사실이 마지막 증명의 효력을 약화시키고 있음을 보인다.

육조시기(六朝時期) 사상가들의 육체(肉體)와 영혼(靈魂)의 관념에 대한 개략적 고찰 (Research on the Soul & Body Thought of Chinese Six Dynasties thinker)

  • 조원일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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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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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87-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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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중국의 육조 시기에는 대부분의 사상가들이 인간의 육체와 영혼의 관계에 대하여 언급하였는데, 이러한 시기가 바로 중국 철학사에 있어서 육체와 영혼의 관계를 가장 집중적으로 논의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당시에 회자 되었던 인간의 육체와 영혼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그 시기를 살아가던 사상가들에 있어서 논쟁의 핵심 주제였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사상가들 가운데 일부는 불교에서 주장하는 생사윤회의 영향을 받아서 '영혼은 소멸되지 않는다'고 하는 관념을 형성했으며, 다른 사상가들은 '영혼은 소멸된다'라고 하여 불교의 입장과는 반대되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육체와 영혼의 관계에 대한 논쟁은 결국은 '영혼은 소멸되는가? 소멸되지 않는가?'라고 하는 논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육조 시기는 분열과 동란의 시대로서, 어지러운 세태 속에서 자연히 귀신관념이 일세를 풍미했던 시대이기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귀신관념에 대한 사상이 세상에 유행하게 되자 덩달아 사람들은 육체와 영혼의 관계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다. 또한 당시 사상가들은 육체와 영혼 둘의 관계에 대한 사고를 확대시켜나가서 점진적으로 당시의 시대적 담론으로 자리를 잡게 만든다. 이와 같은 시대적 분위기속에서 당시의 사람들은 육체와 영혼의 관계에 대하여 매우 광범위하게 사고를 진행해 나갔다고 볼 수 있으며, 또한 당시에 벌어졌던 '신멸론'과 '신불멸론'의 논쟁은 육체와 영혼의 관계 문제에 대한 논의로까지 확산되어가는 추세를 보여주고 있다. 본문에서는 이와 같은 육체와 영혼의 관계 문제에 대하여 양진시기의 육체와 영혼의 관계 문제 및 남북조시기의 육체와 영혼의 관계 문제를 중심으로 개략적인 차원에서 검토를 진행해보도록 하겠다.

동진남북조시기(東晉南北朝時期) 형신문제(形神問題)의 초보적(初步的) 탐구(探究) (Research on the Soul & Body Thought of 'Dong-Jin Northern & Southern Dynasty')

  • 조원일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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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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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75-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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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형신사상(形神思想)의 핵심은 인간의 육체와 영혼에 관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형(形)과 신(神)은 인간의 생명을 구성하고 있는 두개의 요소로 만일 그 가운데 하나라도 없다면 그것은 살아있는 인간으로 볼 수가 없다. 동진남북조(東晉南北朝) 시기의 사상가들은 '우리들을 구성하고 있는 육체와 영혼이 과연 어떻게 나온 것일까?'라는 의문으로부터 시작하여 '복잡하고 미묘한 정신작용의 본질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육체와 영혼은 도대체 어떠한 관계에 있는 것일까?' 또한 '인간이 죽은 뒤에도 그 영혼은 존재하는 것인가 혹은 소멸되는 것인가?' 등의 문제들에 대하여 활발하게 토론과 연구를 진행했었다. 본 논문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을 중심으로 분석했다. 먼저, 동진(東晉) 시기의 형신사상(形神思想)에 대하여 종병(宗炳)의 영혼은 음양(陰陽)과 같은 것으로도 헤아려지지 않는 만물 속에 있는 현묘(玄妙)한 것으로서 무시(無始) 이래 정추(精?)의 식(識)으로 나뉘어 계속 존속하는 것이라고 하는 주장. 그리고 하승천(何承天)의 무엇이든 태어나면 죽는 것이며 육체가 없어지면 영혼이 흩어지는 것은 사계절이 계속 바뀌는 것과 같다고 하면서 영혼의 존속을 부정하는 주장들을 '명불론(明佛論)'과 '달성론(達性論)'을 중심으로 당시의 담론으로 형성되었던 '신멸(神滅)'과 '신불멸(神不滅)'의 문제를 집중 분석했다. 다음으로는 남북조(南北朝) 시기의 형신사상(形神思想)에 대하여 소침(蕭琛)의 육체와 영혼은 합하기는 하지만 일체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태어나면 육체와 영혼이 합하여 기능이 생겨나지만 죽으면 육체는 남고 영혼은 떠나버리나 영혼은 항존(恒存)하는 것이라는 주장. 그리고 범진(范縝)의 육체가 영혼의 질(質)이라면 영혼은 육체의 용(用)이라고 하면서 육체가 없다면 영혼 또한 없는 것이니 육체 즉 영혼이라는 주장들을 '난신멸론(難神滅論)'과 '신멸론(神滅論)'을 중심으로 하여 당시 학술계의 화두였던 '신멸(神滅)'과 '신불멸(神不滅)'의 논쟁을 집중 분석했다. 끝으로는 동진남북조(東晉南北朝) 시기에 유행하였던 형신사상(形神思想)의 의의와 그것이 중국철학사 속에서 차지하는 지위와 영향에 대하여 분석하고 조명했다.

고대 이집트 관식에 관한 고찰 (A study of Crown ornament of Ancient Egypt)

  • 박옥련;여상미
    • 한국생활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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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0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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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9-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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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
  •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research the symbolic of Ancient Egyptian Crown ornament. The results of this study were summarized as follows. Ancient Egyptians expressed the authority of king and nature worship to the crown ornament. The volume and scale of shape symbolized the authority of king and the nature worship. The brillant and plentiful of colors symbolized the strong1y authority of king. The numbers of patterns symbolized the authority of king and the nature worsh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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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위(康有爲)의 『대동서(大同書)』에 보이는 종교적 성향 (The religious perspective of Kang, You Wei in Da-tong-shu)

  • 오재환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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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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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97-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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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강유위(康有爲)의 신관(神觀)은 유학과 불학의 만물동근(萬物同根)이라는 개념에서의 천(天) 및 상제(上帝)와 기독교의 신관을 아우르고 있다. 그는 신령들의 경중고하(輕重高下)를 인정하고 부인지심(不忍之心)의 근원은 바로 하늘과 땅을 낳은 지상신(至上神)으로서의 상제(上帝)이고, 극단적인 사회개혁을 추진해야만 한다는 당위성의 윤리적인 근거도 상제의 실존에서 찾았다. 그는 영혼불멸을 신봉하였고 사람의 인권은 하늘이 부여한 것이라는 관점에서 개개인이 평등하므로 남녀의 평등은 가장 기본적으로 준수해야 될 대동세의 윤리가 되도록 했다. 천부인권(天賦人權)과 남녀평등은 그의 사회개혁을 이끄는 중심으로서, 그것을 실현하는 것이 바로 하늘을 닮아 난 사람이 지향해야 될 가장 기본적인 도리라고 강조하였다. 하늘을 대신하여 '천민(天民)'을 돌보는 '공정부(公政府)'가 최선의 방책을 다하여 보장하도록 하는 사회개혁안도 이러한 종교적인 성향의 신념으로부터 출발된 것으로, 대동서에 나타난 그의 전체 사상 체계 중에서 종교적 성향은 일관되게 견지하는 바탕이 되었다.

소크라테스적 종교는 가능한가? (Is Socratic Religion Possible?)

  • 황필호
    • 대순사상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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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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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5-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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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 Socrates did not found a religion, and in this sense he is different from Confucius, Buddha and Jesus. So there can be no 'Socrates' religion'. But if we can assume that there are evidently religious aspects in his thought, and if it can become a religion by expanding these aspects, then we may conclude that 'Socratic religion' is possible. In general, there are three arguments to regard Socrates as a religious person. The first is to see him as a precursor of Christianity or a Christian martyr, the second is to regard Socrates' daimonion as identical with Christian revelation, and the third is to argue that Socrates was a religious person because of his firm belief in the immortality of soul. But in this paper, I argue that these three arguments offer some justifications but insufficient to conclude that he was a religious person. Shall we conclude then that not only Socratic religion is impossible but also he was not a religious person? I do not think so. For there are two counter arguments. Religious truths have at least two essential characteristics. First, those who have religious truths are absolutely happy, no matter what. This is why Socrates as a religious person could advise his disciples to improve their souls even at the time of his death bed. Second, those who have religious truths do love others, no matter what. How could it be possible for someone to love invisible ultimate reality if he did not love visible brothers? This is why Socrates as a religious person took his mission to philosophize as a divine command. Socrates did not initiate any official religion, but he was truly a devout religious person, who transcended the boundary of institutionalized religion. It follows that Socratic religion is evidently possi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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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유교식 감실(龕室)의 수용과 변용 (The Acceptance and Transition of Confucian Gamsil in Joseon period)

  • 박종민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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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4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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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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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감실은 고조부모부터 부모까지 사대 신주를 모시는 의례용구로 사당 안에 배치하였다. 구조와 형태는 고려시대에 수용된 주자의 "가례"의 도설에 따르면 네모반듯한 네 칸으로 구성되었다. 감실은 고조부터 아버지 대까지 사대 조상의 신주를 각 칸 마다 한 대씩을 남향으로 세워서 서쪽에서 동쪽의 순서로 안치하며 후손이 없는 조상의 신주도 함께 모셨다. 감실은 신주를 봉안하는 단순한 공간에서 벗어나서 그들의 영혼이 깃든 공간이자, 가족 내 위계질서가 살아있는 공간이다. 사당 건립과 관리는 후손의 사회적 신분과 가정 경제력 등으로 일정부분 제약을 받았다. 조선시대 조정은 관직자의 품계에 따라서 조상의 봉사 대수와 건축을 제한하였기 때문이다. 관직자는 녹을 받음으로써 일정부분 경제적인 안정을 취할 수 있는 집안이어서 사당을 건립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은 집안은 자신의 살림살이 집 한 곳에 감실을 배치하고 신주를 안치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 과정에서 감실은 배치 장소, 크기, 구조와 형태 등이 변하는 특징을 보였다. 구조적으로 건물형상을 띤 감실은 가옥과 사당형으로 영혼불멸사상과 조상관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사당 밖에 배치된 감실은 탁자를 들여놓을 수 있는 정도의 크기에서 신주를 안치할 수 있는 크기로 변하였다. 이런 감실은 이동하기 편리하고 거주공간의 너비와 높이를 고려해서 제작하였다. 감실의 변용으로 사회변화와 제도, 가정 경제력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조선 초기에는 "가례"를 바탕으로 한 가묘 건립과 조상의 봉사 정책을 사대부가에서 결과가 나타났다. 서인들은 사회적, 제도적으로 제약을 받음으로써 실질적으로 정책에 부응할 수 없었다. 사당을 갖지 못하는 집안도 감실의 변용을 통해서 그들에게 4대를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가졌다. 결과적으로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명분과 현실을 절충하여서 사대봉사가 보편화되는 기반이 되었다. 감실의 변용은 혈연의 정통성 찾기와 가문의 위신 노출, 사대봉사의 확산계기 마련, 신성공간화, 가정경제력 증대 등으로 사회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결론을 지을 수 있다.

증산 강일순의 신명(神明)사상 (The Concept of Divine Beings Coined by Jeungsan Kang Il-Sun)

  • 김탁
    • 대순사상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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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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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9-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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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증산 강일순의 신관은 다양한 신적 존재를 인정하는 신명사상으로 정리할 수 있다. 증산은 만물에 신적 존재가 깃들어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증산은 온갖 현상이 신(神)이라고 주장하며, 모든 사건의 배후에는 신이 작용하고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우주가 천상계(天上界), 지상계(地上界), 지하계(地下界)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기 많은 신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증산은 자신이 살던 시기를 신명시대라고 정의했는데, 이는 신명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시대라는 뜻이며, 신명들이 이 세상의 역사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시간대라는 의미다. 신명은 인간사에 적극 개입하며, 인간에게 보은(報恩)과 앙갚음을 하는 존재이며, 인간의 행동과 인식을 변화시키는 신격(神格)이며, 인간의 행위를 심판하는 존재다. 그런데 증산은 이상향인 후천선경(後天仙境)이 지상에 세워질 때가 되면 신명이 오히려 인간의 심부름을 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나아가 증산은 선천에서는 신명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원한을 지닐 수 있는 존재였는데, 후천이 되면 신명도 궁극적으로 완성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리고 증산은 신명계와 인간계가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신인상관론, 신명과 인간은 상호작용하고 상호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에 있다는 신인감응론, 신명계와 인간계는 상호 순환하는 관계에 있다는 신인순환론, 신명은 인간은 함께 어울려 존재한다는 신인공존론, 신명과 인간은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이 같다는 신인동질론을 주장했다. 증산은 "신(神)은 인간의 사후존재양식이다."라고 주장하여 신관(神觀)을 새롭게 규정한 인물이다. 나아가 증산은 인간의 영혼불멸 혹은 존재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을 강조했으며, 인간과 신명의 공존(共存)을 주장했다. 그리고 증산은 만물에는 신성(神性)이 본질적으로 내재한다고 강조했으며, 신명계는 인간계와 마찬가지로 일정한 위계에 따른 질서가 유지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증산은 신명 중심에서 인간 중심의 신관으로 혁명적 변화와 새로운 인식을 강조하였다. 결국 증산은 새롭고 독창적인 신관을 제시하여 신명과 인간에 대한 사유방식의 대전환을 시도한 종교적 인물이다. 결론적으로 증산은 한국 전통적인 신관을 독창적으로 재해석하여 신명사상으로 체계화시킨 종교적 인물이다.

한국 속화(俗畵)(민화(民畵))에 표현된 식물의 상징성에 관한 연구 (A Study on Plant Symbolism Expressed in Korean Sokwha (Folk Painting))

  • 길금선;김재식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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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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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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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속화(俗畵 또는 민화(民畵)) 속의 도입요소를 대상으로 식물의 상징성을 추적한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1. 우리 민족의 토속성 짙은 그림이자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는 '속화(俗畵)'라는 용어는 고려시대 이규보(1268~1241)의 '동국이상국집'에서 발견할 수 있고, 그리고 조선시대 초기 '속 동문선'과 강희맹(1424~1483)의 '사숙재집', 조선시대 후기의 '일성록(1786)', 유한준(1732~1811)의 '자저(自著)', 이규경(1788~?)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등에서 다양하게 추적할 수 있다. 특히,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인사편 서화(書畵)의 제병족속화변증설에 의하면 "민간에서 속화라고 불렀다"라는 기록이 발견된다. 2. 시대사적으로 한국의 속화는 농경문화의 자연관을 원초적으로 반영한 선사시대를 거쳐, 우주관을 반영하고 영혼불멸의 사상을 채색화 형태로 표현한 삼국시대, 추상적인 도형과 초자연적인 무늬를 공간 속에 상징화시켜 종교적으로 표현한 고려시대, 그리고 자연관, 심미적 가치, 상징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되어 대중화되고 한국 고유의 정체성으로 자리매김한 조선시대 등 시계열적 변화과정을 추적할 수 있다. 3. 한국의 속화 1,009점을 대상으로 분석한 소재는 식물요소 35종, 동물요소 37종, 자연요소 6종, 기타요소 5종등 총 83종이 출현하고 있다. 4. 속화에 표현된 식물 요소의 미학적 분석에 따른 형태미의 경우 모란도는 음양오행의 원초적 세계관을, 매화도는 역동적인 운치와 생태적인 조화원리를, 구도미의 경우 책가도는 복합 다시점 구도이면서도 강한 주목성을, 병화도는 역원근법에 의한 색의 강한 대비를, 독서여가도는 직선과 사선을 이용하여 자연과 인공요소의 질서정연한 균제미를 담백하게 표현하고 있다. 한편 색채미의 경우 오방색(동(東), 서(西), 남(南), 북(北), 중앙(中央)) 또는 오채색(적(赤), 청(靑), 황(黃), 백(白), 흑색(黑色))의 경우 주술적 또는 종교적으로 활용하거나 자연법칙과의 상관관계를 상징적으로 대입시키고 있다. 5. 한국 속화에 등장하는 각 요소들의 도입방식은 단순한 자연계 형태 모방을 뛰어 넘어 우주 내에 존재하는 본질의 의경을 통해 회화적 예술성을 바탕으로 자연관과 접목된 '상징성'으로 승화시켰다. 즉, 한국의 속화에서 추적할 수 있는 동 식물의 '상징성'은 종교적, 사상적, 생태적, 철학적 측면이 복합적으로 작용되어 자유 분망하면서도 독특한 표현으로 과학적 인식체계가 아닌 상징적 인식체계로, 현재 속에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우리 민족의 집단적 문화 정체성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한국의 속화(또는 민화)는 우리 민족의 문화적 정체성이라 할 수 있으며, 우리 민족의 생활문화 속에 자연스럽게 배어든 자연관이자 토속성 짙은 의미경관요소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생활문화 속에 뿌리 깊게 배어 있었던 속화는 시대적 변천과정을 거쳐 그 의미와 감정이 현격히 퇴색되었다. 오늘날 주거생활이 아파트문화로 전이되고 가치관의 혼돈이 심화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속화가 갖는 미학적, 상징적 가치는 정신적 풍요를 건전하게 지켜주는 상징 자산으로 전승되어 우리의 정체성으로 자리매김해야 하는 당위성을 갖는다고 하겠다.

인공지능시대에도 종교는 가능한가? - 칸트와 블로흐의 종교철학적 관점에서 - (Is Religion Possible in the Age of Artificial Intelligence? - From the View of Kantian and Blochian Philosophy of Religion -)

  • 김진
    • 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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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4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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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7-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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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이 논문은 인공지능시대에도 종교는 가능한가, 오직 인간만이 종교신앙의 주체일 수 있는가, 인간의 마음을 탑재한 초지능기계들도 신앙의 주체일 수 있는가를 다룬다. 초지능기계들이 인간과 동일한 조건에서 신앙의 주체가 되려면, 인간의 고유한 특성인 감정, 의지, 자의식 등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특이점' 이후의 초지능기계들은 종교신앙의 주체를 넘어서서, 신과 같은 존재로서 인간과 자연과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이는 모라벡, 커즈와일, 하라리의 공통된 견해이다. 칸트가 구상한 '순수이성의 이념'과 '실천이성의 요청'으로서 신 개념은 제시 베링이 앞서 말한 것처럼 '간극의 신'처럼 보일 수 있다. 종교적 신앙 주체는 항상 도덕적인 선을 행하려고 부단하게 노력해야 하지만, 그런 노력 자체만으로는 완전선(完全善)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영혼불멸성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특이점을 넘어서 출현한 초지능기계가 지능폭발로 신적 지위를 가질 수 있다면, 인공지능로봇은 칸트적인 의미에서 종교적 수행을 불필요하게 여길 것이다. 에른스트 블로흐의 경우에는 초지능기계가 신적 존재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악신인가 선신인가를 비판적으로 물어야 한다. 칸트의 매트릭스에서는 선신일 수 있는 초지능기계가 블로흐의 매트릭스에서는 악신으로 추락할 수도 있다. 따라서 초지능기계-신이 우리를 유일한 종교신앙의 완성으로 이끌어 가는지, 인류와 지구촌의 몰락으로 내몰아갈 것인지를 부단하게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