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신라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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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新羅) 눌지왕대(訥祗王代) 박제상(朴堤上)의 정치적(政治的) 위상(位相) (Park je sang' political position in the Shila nulgi king period)

  • 조이옥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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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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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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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신라 눌지왕대 박제상(朴堤上)(?-418)은 삼국의 복잡한 국제관계 속에서 영웅적인 충성을 다한 인물로 전해지고 있다. 두 사서에 전하는 내용의 연대나 사건 전개 등 다소 차이가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줄거리는 대동소이하다. 본 논문은 박제상에 대한 기왕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신라 눌지왕대 활약한 박제상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방안으로 그의 정치적 위상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 검토해 보았다. 즉 박제상의 정체성 확립과 관련해 삽량주간(?良州干)에서 개인적인 역량으로 중앙정치무대에 등장하는 과정과 삼국의 복잡한 국제무대에서 외교적 역량을 발휘한 외교가로서의 탁월한 면모에 대해 주목하였다. 신라 눌지왕대에 활약한 박제상에 관한 문제들을 검토한 결과, 삽량주간이라는 그의 직책에서 보는 것처럼 박제상은 오늘날 양산 지방에 세력근거를 가지고 있던 인물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재지세력가였던 박제상은 왕제귀환이라는 임무를 맡게 되면서 왕경인 경주로 올라가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경위인 나마(奈麻)를 받는 등 중앙귀족으로 편입될 수 있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박제상이 왕제를 구출하고 왜에서 장렬히 죽음을 맞이한 것과 관련하여 눌지왕은 박제상의 죽음을 통치 이념이라는 측면에서 활용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신라 눌지왕대 활약했던 박제상에 대한 몇가지 검토를 통하여 신라사에 있어 삽량지방이 차지하는 전략적인 위치와 함께 삽량지역의 지방세력가가 왕경의 진골신분으로까지 그 위상이 격상되는 과정을 살펴 볼 수 있었다고 하겠다. 또한 신라가 중앙집권적 국가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에서 한 지역사회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었다는 데에 나름대로의 의미를 찾아 볼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삼척 흥전리사지 출토 불교공예품의 제작시기와 영향 관계 (The Manufacturing Time and Influence of the Buddhist Metal Artifacts Excavated from Heungjeon-ri Temple Site)

  • 이용진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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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6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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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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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삼척 흥전리사지는 2014년부터 2020년까지 시·발굴조사를 통해 서원인 예불영역과 동원인 생활영역으로 나누어진 다원식 가람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흥전리사지의 시·발굴에서 금동투조장식과 청동정병, 금동사자진병향로의 사자 등 비교적 다양한 불교공예품이 출토되었다. 흥전리사지의 서원 금당지 출토 금동투조장식은 불전 장엄에 사용했던 금동번으로 추정되고 현재까지 발견된 통일신라의 금동투조장식 중 가장 수준 높은 예로 왕경에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동원 출토 금동사자진병향로의 사자와 청동정병은 생활영역에서 출토된 공양구로 행향 등의 의례에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사자진병향로는 왕경보다는 지방에서 출토된 것들이 제작시기가 앞서고 있어 지방에서 왕경으로 전파된 것으로 보이고, 청동정병은 석굴암 범천의 지물로도 표현되고 있어 8세기 후반 이전 왕경에 군지형 정병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출토품이 없어 영향관계는 추후에 밝혀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청동대접과 청동합은 왕경의 월지와 황룡사지, 인왕동사지 출토품과 유사하여 왕경의 청동기명이 지방으로 확산된 것으로 생각된다. 청동인장은 흥전리사지 이외의 지방에서도 출토되었지만, 황룡사지 출토품과 형식과 인장의 서체 등이 동일하여 『삼국사기』 문무왕조의 기록처럼 왕경에서 제작하여 보낸 것으로 보았다. 더불어 인장의 '범웅관아지인(梵雄官衙之印)'은 흥전리사지가 당시 승단조직과 관련된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삼척 흥전리사지 출토 불교공예품은 '국통(國統)'명 비편 등의 내용으로 보아 비의 주인공이었던 선종 승려가 선종 사찰에서 9세기 전반에서 중반 경에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금동투조장식과 금동사자진병향로의 사자, '범웅관아지인'의 청동인장 등의 제작수준으로 보아 흥전리사지의 사격은 상당히 높았던 것으로 보이며, 9세기 전반에서 중반경 통일신라의 왕경과 지방의 공예품이 일방적인 영향이 아니라 양방향의 영향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고대 경주 지역의 홍수 가능성과 인간 활동 (The Possibility of Flooding and Human Activities of Gyeongju Area in Ancint Times)

  • 황상일
    • 대한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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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2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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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79-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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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현재 경주시 북천, 서천, 남천으로 둘러 싸인 왕경 지역의 대부분은 최종빙기 동안 형성된 선상지 저위면에 해당한다. Holocene 중기 이후 북천은 이미 동적평형상태에 도달하여 하도의 형태와 폭이 현재와 유사하였거나 같았다.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경주 지역에서 홍수가 발생하여 사람이 죽거나 인가가 떠내려간 것은 $30{\sim}60$년 간격으로 발생한 경우도 있으나, 대체로 $150{\sim}200$년 간격으로 나타났다. 북천은 대규모 홍수 발생 주기가 상당히 길었으므로, 고대 동안 사람들은 북천 하상의 많은 부분을 홍수 피해로부터 거의 안전한 곳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학자들 사이에는 고대 동안 북천에 제방이 조성되었다는 주장이 지속되고 있다. 북천의 하천에너지가 최대가 되는 분황사 동쪽 북천 좌안에서는 측방침식을 막기 위하여 축대를 조성하였으나 인공제방을 조성하지 않았다. 지형학적으로도 왕경 지역의 선상지 지형면 위에 고대의 충적층을 확인할 수 없다. 그리고 선상지 퇴적층 위에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초기 철기 시대의 문화층이 신라 시대 문화층과 함께 분포한다. 아울러 범람을 막기 위해 북천을 연하여 숲을 조성한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들은 고대 동안 북천이 범람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북한의 신라 고고학 연구 현황과 특징 (A Review of Archaeological Research on Silla in North Korea)

  • 윤상덕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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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3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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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70-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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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본고는 북한에서 이루어진 신라(통일신라) 고고학 연구 현황을 정리하고 그 특징 검토를 목적으로 하였다. 주요 자료가 남한에 있어 그동안 우리 학계는 북한의 신라 고고학에 대한 관심이 부족했다. 이에 향후 북한 자료를 다루기 위한 기초 연구로써 북한 학계의 연구를 검토하였다. 연구 현황은 우리가 주로 다루는 고고학 주제에 맞춰 무덤, 성곽, 왕경, 토기, 와전, 장신구, 무구, 마구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그 결과 연구 특징을 네 가지로 정리하였다. 첫 번째는 주체사상이 북한 학계의 삼국통일 해석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1955년에 처음 제기된 '주체'는 사대주의의 반대 개념으로 중소 분쟁의 틈바구니에서 주창되었다. 이에 따라 신라의 삼국통일을 외세와 결탁한 사건으로 보고 더 이상 인정하지 않게 되었는데, 이러한 변화는 1962년 자료부터 확인된다. 두 번째, 반사대주의의 영향으로 삼국문화의 '고유성'과 '단일성'을 증명하려 하였다. 한반도의 문화가 중국과는 다른 고유성을 가지며, 삼국의 문화는 상호간에 공통점이 많다는 것이다. 세 번째, '단일성'의 원천은 고구려의 '우수한' 선진 문화이며, 백제와 신라, 가야에 전파되어 '민족 문화의 단일성'이 형성되었음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고구려의 선진 문물이 발해와 '후기신라(통일신라)'에까지 전해지고 다시 고려로 이어져 민족 문화의 진정한 통일이 일어났다고 설명한다. 네 번째는 남한 학계에 비해 신라의 무덤이나 유물의 연대를 상당히 올려 보는 점이다. '조선의 유구한 역사'를 강조하는 입장에서 신라의 건국을 1세기 초·중엽으로 설정했기 때문에 국가 형성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증거의 연대를 올려 볼 수밖에 없다. 또한 고구려 석실분이 신라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설명하기 위해서도 신라 석실분 연대의 상향이 필수적이다. 1960년대에 형성된 연구 특징은 지금까지도 북한 학계가 반드시 준수해야 할 기본 지침이 되었다.

역사도시구조와 연계한 도시수체계의 구성형태와 역할에 관한 연구 - 경주, 개경, 한양, 수원화성을 중심으로 - (A Composition and Role of Urban Water System in Connection with Historic City Structure - Focusing on Gyeongju, Gaegyeong, Hanyang, and Suwon Hwaseong -)

  • 강인애;이경찬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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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9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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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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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본 연구는 신라왕경 경주, 고려 개경, 조선 한양, 조선후기 신도시로 조성된 수원 화성을 중심으로 우리나라의 역사도시에서 나타난 도시수체계의 구성방법이 지니는 특성을 파악해보고자하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특히 도시입지, 도로, 도시시설 배치 등을 중심으로 도시골격구조와 연계하여 물길이 지니는 의미를 살펴보고 수체계의 구성형태에 대한 해석을 통하여 도시 내 수공간 경영에 투입되었던 기술적, 계획적 요소와 함께 도시구조와의 관계를 분석하였다. 연구대상지에서는 자연수계를 기반으로 부분적인 하천 정비와 인공수계를 도입하여 도시수체계가 구축되고 있다. 특히 물과 자연수계는 도시의 입지를 결정하는 핵심요소로 작용하고 있으며 도시구조와 도시발달과정, 도시구조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지리적 관념과 어우러져 물이 지니는 상징적 의미와 더불어 치수, 이수 등의 관점에서 요구되는 현실적 수요가 중요한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다. 물 공간과 관련된 다양한 수요에 대응하기 위하여 도시 형성·발달과정에서 물 공간을 경영하기 위한 다양한 계획적, 기술적 요소가 도입되었다. 연구대상지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도시형성·발달과정에서 도시수체계가 지니는 계획적 요소를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로 연구대상지로 선정된 신라왕경 경주, 고려 개경, 조선 한양, 수원 화성의 도시수체계를 구축하는 과정에는 배수, 재해를 고려한 치수의 관점이 공통적으로 작용하고 있지만 수체계의 구축방법이나 활용성에서는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둘째로 물과 자연수계는 도시입지의 상징적 요소로서, 그리고 지리적 관념과 어우러진 도시 입지를 결정하고 도시의 좌향을 결정하는 핵심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셋째로 도시가 형성되기 이전의 자연수계는 지형여건과 어우러져 도시 형성·발달과정에서 구축되는 도시수체계의 구성형태를 결정하는 기반으로 작용하고 있다. 넷째로 자연수계를 기반으로 구축된 도시수체계는 자연물길과 계획적 인공수로가 결합되어 도시구조의 일부로서 위계별 수계의 활용성이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다섯째로 도시수체계는 배수체계와 재해를 고려한 치수의 관점 이외에 도시용지의 확보, 도시시설 배치와 영역 확보, 기능지역 구성, 토지구획과 연계하여 계획적으로 구축되고 있다.

경주지역 평기와의 타날형태 변화에 대한 검토 -단판·중판·인장 그리고 장판으로- (A Study on changes in Hitting-pressing forms of flat plate in Gyeongju area -Short beating, Medium beating plate, long beating plate and Stamped-roof tile-)

  • 차순철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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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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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3-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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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신라왕경지역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평기와와 전 중에서 비교적 초기 기와가 출토된 것 으로 인정되고 있는 유적을 중심으로, 출토사례와 평기와 제작방법-단판(短板), 중판(中板), 장판(長板) 그리고 인장와(印章瓦)-에 대한 비교작업을 통해서 개개 유물이 출현한 시기에 대한 초보적인 접근을 시도하였다. 그 결과 경주지역에서 기와가 제작된 시기에 대해서는 앞으로 많은 자료의 출현을 기대해야 할 필요가 있다. 기와의 사용은 무와통(無瓦桶) 혹은 와통으로 제작된 단판 기와가 초기에 제작되다가, 무와통식 기와가 소멸하게 되는데, 이는 결국 와통을 이용한 기와제작법의 효율성에 기인한 것으로 판단된다. 단판 기와 역시 중판 타날판으로 제작된 기와와 비교해 볼 때, 작업능률면에서 뒤떨어지지만 매우 정성을 들여서 제작을 하였다. 이러한 작업공정은 단순히 작업능률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으로, 이들 단판 기와의 제작은 궁성 혹은 관청 등으로 납품되는 기와에 한정 되었을 기능성을 보여 준다. 따라서 단판 기와는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중판 기와는 통쪽(模骨) 혹은 원통 와통(圓筒瓦通)에 의해 제작된 기와로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병합한 이후로는 전국적으로 확산되게 된다.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신라 고유의 제와술이 반영된 기와로 대량생산에 적합한 제작법으로 전국적으로 급속하게 보급되게 되면서, 고구려 백제계 제와 술은 점차 소멸하게 된다. 장판 기와는 경주지 역에서는 거의 확인되지 않지만, "사천왕사"명 평기와와 삼랑사3길 유적에서 출토된 어골문 평기와 등이 알려져 있다. 경주 외곽에서는 장판 기와가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초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고, 타날판에 새겨진 문양을 보면 선조문, 어골문, 사격자문등과 다소 복잡해진 기하학문과 각종 문자(연호, 지명 등)가 확인된다. 현재까지 경주지역에서 확인된 통일신라의 장판 기와의 존재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견이 있으므로,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사천왕사와 같이 창건연대가 분명한 유적에 대한 발굴조시를 통해서 확실한 층위적 공반관계에 기초한 기와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경주지역에서 인장와가 사용되는 시기는 무와통작법(無瓦桶作法)이나 단판 기와보다 늦으며, 백제지역의 경우 오부(五部)나 간지 (干支) 등이 확인되는데 비하여, 신라지역에서는 부호나 기호가 많이 보이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인장와를 제작하던 공인집단의 성격차이로 보이며, 신라에서 인장와가 확인되는 시점은 679년을 기준으로 그 이후로 추정된다. 또한 인장와 및 인장전에 표기된 내용이 문자가 아니라 기호인 점은 백제지역에서 기존에 시용하던 방식이 변화되었음을 알려주며 그러한 계기는 결국 신라의 병합에 의한 제작환경의 변화로 추정된다. 그리고 인장와는 경주지역에서 일시적으로 사용되다가 소멸되는데, 그러한 원인은 결국 원통 와통과 중판 타날로 제작되던 <신라기와>가 전국적으로 보급되면서, 고구려나 백제의 제와기술이 도태되는데서 찾을 수 있다. 결국 신라에 의한 삼국의 병합은 국가별로 각각 특징이 있던 제와기술을 신라의 것으로 통일시키는 과정에서 귀착된 것이다.

역사도시 경주의 경관정체성에 관한 연구 I -고대 신라시대 왕경 경주의 경관요소 특성 연구를 통한 경관정체성 규명을 중심으로- (A Study on identity of scape for Historical city, Gyeongju - With a characteristic of landscape elements of Gyeongju in the Silla period -)

  • 홍사철
    • 한국디지털건축인테리어학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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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1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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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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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Thanks to the historic sites, the identity of historical landscape of Gyeongju is definitely recognized. When explaining, in other words, the identity of urban scape, we have to know the characteristics of landscape with the changes of the times. Therefore this study is tried to understand the urban scape form and meaning of the historic city Gyeongju, futhermore to find out the identity of urban scape, catching hold of the characteristics of landscape by periods. The research was proceeded through the classifying the concept of Urban form by periods and the basic ideology and adopting the representative landscape at that time with the literatures and maps in the Silla period. And then tried to find out the identity of landscape with the link between the concepts of the representative landscape and that of Urban form in chronological order. The results of this study is relativeness between city and natural environment, type of the Grid - Pattern on urban form, basic ideals were inspired by Buddhism.

신라(新羅) 왕경(王京) 경주(慶州)의 토지(土地) 분할(分割) 척도(尺度)에 관한 고찰(考察) (A Study on the Standard Scale of Measuring a Block of Kyongju, the Capital of the Silla Dynasty)

  • 우성훈;이상해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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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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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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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7
  •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standard scale of measuring a block of Kyongju(慶州), the Capital of the Silla Dynasty(B.C.57${\sim}$A.D.935). Through the study, it is clarified that 1). the block of Kyongju city is planned and divided by using the eight-Zhou-foot(周尺) as a standard scale, which is equivalent to the length of one-bo(보(步); 2). the distance between the center of the streets is around 100 bo and the width of the block is around 90 bo; 3). the distance between the streets is very near to the distance 167.054m of Jing-tian-zhi(井田制), which supports the use of Zhou-foot as a standard scale. As a result, it can be maintained that the city planning of Kyongju is related to that the Jing-tian-zhi of the Zhou Dynasty and the standard scale of measuring a block of Kyongju us executed by using the eight-Zhou-foot standard sc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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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황성동 유적지의 식물규소체 분석과 응용 (Phytolith analysis and application in Hwangseong-dong Archaeological Site, Gyeongju)

  • 김효선;윤순옥;황상일
    • 한국제4기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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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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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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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형산강 연안의 경주 황성동 소재 주거지 유적에서 유적지내 목곽묘에 매장된 토기 속의 토양을 대상으로 식물규소체 분석을 행하였다. 연구지역은 신라시대 천년동안 왕경을 중심으로 하는 도읍지에 인접하여 있고 형산강의 충적평야를 이용하여 일찍부터 농경활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토기 내부 토양에서의 분석결과, 하부층준에서는 벼와 함께 갈대속, 기장족, 쇠풀족이 함께 출현하여 인접한 지역에서 농경 활동이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토기의 용도에 대해 확실하게 판단하기 위해서는 유적의 매몰토와 토기내부 토양과의 비교분석 및 토기 내부 토양의 대형식물유체 분석도 병행하는 등 다양한 분석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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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월성의 역사공간 이미지 및 관광객 이용행태 분석 (Tourists' Historical Image and Behavior Characteristics for Heritage Site at Wolseong Palace in Gyeongju)

  • 강태호;박종구;반상;김상구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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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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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8-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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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경주 월성은 신라시대 궁궐이 있었던 역사적 상징성이 있는 궁궐터로 왕경 경주의 대표적인 역사유적이다. 본 연구는 경주 월성을 대상지로 역사공간 이미지와 관광객들의 이용행태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다. 연구방법은 주로 현장조사와 설문조사 두 단계로 실시하여 수집된 데이터를 행태, 시간, 공간별로 분석했다. 연구결과는 경주 월성의 주된 이용행태는 서서 하는 행위, 앉아서 하는 행위, 놀이/유흥 순으로 나타나고, 일반적인 역사문화유적지와 비교해 이용행태는 매우 단조로운 것을 알 수 있다. 경주 월성의 이용활성화를 위하여 주 진입로의 역할기능을 강화하면서 탐방객들을 월성 내 타 공간으로 분산시키기 위하여 각 동선코스를 사전에 안내하는 표지판, 야간조명, 식생정비, 도로정비 등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