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성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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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의 의례와 음악의 중개자, 협률랑(協律郞) (Hyupryulrang(協律郞), the Mediator of Royal Ceremonies and Music)

  • 이정희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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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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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29-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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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협률랑(協律郞)은 궁중에서 의례(儀禮)를 행할 때 음악의 연주와 정지시점을 알려주던 직책이다. 유교의 영향을 받아 궁중에 오례(五禮) 체제로 범주화 되고 실행되면서부터 협률랑의 존재가 드러난다. 유가에서는 예(禮)와 악(樂)을 중시했고 이와 같은 흐름이 궁중 오례(五禮)로 연계되어 주요의례에 음악이 수반되었기 때문에, 궁중 의례의 진행 상황에 따라 음악의 삽입 여부를 알려줄 매개자가 요청되는 실정이었다. 궁중의 의례와 음악의 조화로운 구현을 위해 협률랑은 필수불가결한 존재였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협률랑이 고려시대부터 등장하며 조선시대에도 지속적으로 존재하였다. 조선시대의 협률랑은 봉상시(奉常寺)에서 전담되다가 전악(典樂)에게 잠시 일임된 적도 있었지만 최종적으로는 장악원(掌樂院) 관원이 맡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장악원 관원 중에서도 주로 장악원 정(掌樂院 正)이 그 역할을 수행했지만, 장악원 첨정(僉正)과 장악원 주부(主簿)도 현실적인 여건에 따라 수시로 차출되곤 하였다. 장악원 정, 첨정, 주부 등 역대 협률랑 역임자들의 공통 사항은 모두 당하관(堂下官)이었다는 점이었다. 당하관은 정책 결정에 참여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한계를 지닌 관료였으며, 권한이 미약했던 실무자였다. 이는 궁중 행사에 동원되었던 많은 이들이 맡았던 각각의 다양한 직책 중 협률랑이 궁중의례에서 점하던 위상을 드러낸다. 한편 의례 집행 여건이나 의례 자체의 성격에 따라 장악원 관원 대신 계라선전관(啓螺宣傳官), 무신겸선전관(武臣兼宣傳官), 여집사(女執事) 등도 협률랑으로 유연하게 활용되어 의례와 음악 집행에 흠결사항이 없도록 조치되었다. 협률랑의 활동은 악대가 수반된 대부분의 의례에서 휘를 세우거나 눕히는 행동으로 압축된다. 휘는 깃발의 하나로, 성곽 영토 지역 등을 표시하던 시각 장치의 일종인데, 사냥할 때나 군대에서는 진퇴를 알리는 신호 체계로도 사용되다가, 의례와 음악을 조율하는 용도로까지 그 쓰임이 확장되었다. 그런데 밤에는 휘가 보이지 않으므로 조촉(照燭)으로 대신하거나, 때로는 금고기(金鼓旗)를 대용품으로 쓰기도 하였다. 그리고 협률랑의 명칭은 궁중연향의 경우 의물의 명칭을 빌려와 거휘차비, 조촉차비로 기록되기도 하였다. 협률랑의 자리는 서계(西階) 위 서쪽 가까이 동향(東向)한 상태로 배치되었는데, 의례 집행 장면이 잘 보이면서 악대와 가까운 지점이었다. 그 역할의 특성을 고려하여 의례의 공간과 음악의 공간이 함께 파악되는 위치에 배치되었다. 또한 행사를 대비한 예행 연습, 습악(習樂), 악대 배치, 음악 연주 속도 조절, 악곡(樂曲) 누락 방지 등 의례와 연계된 음악적 부분까지 관여하고, 그 직무를 책임지는 역할을 감내했다. 이러한 역할 수행 과정에는 전악(典樂)과의 협업 지점이 드러나기도 하는데, 장악원의 조화로운 운영을 위해 장악원 소속 관료와 악인이 함께 노력했던 상황이 투영된 것이다. 의례 절차에 맞게 음악 연주를 챙겨야 했던 협률랑은 궁중의 의례와 음악을 연결해주는 중개자였다.

설계과정을 통해 본 정원박람회 작가정원의 전통재현 특성 (The Characteristics of Traditional Representation in the Artist's Garden of the Garden Exposition seen through the Design Process)

  • 이송민;소현수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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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8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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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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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본 연구는 정원박람회에 출품한 작품 중에서 전통을 테마로 설정한 작가정원 14개소의 사례연구로서 문헌 분석과 현장 조사로 진행하였다. 전통재현을 결정하는 설계과정에 주목하고 작품마다 설계목표 수립, 전통재현의 대상 선정, 재현의 방법 결정, 경관구성요소 디자인 단계를 분석하여 다음과 같은 전통재현 특성과 시사점을 도출하였다. 첫째, 다수의 작가정원에서 전통구조물을 재현 대상으로 선정한 양상은 좁은 부지에 적합하고 주제 전달성이 좋다는 장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은 작품명에 마당, 울, 부뚜막, 장독대, 취병과 석가산 등 전통구조물의 명칭을 넣어 설계의도를 직접 전달하였는데, Wall, 한국정원, 수원, 서울 장인처럼 간접적으로 표현한 작품들은 주제 전달성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선비, 여백, 풍류와 같이 재현 대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작품도 있었다. 둘째, 한옥마당을 재현하면서 잔디와 석재로 포장한 정원, 수원화성 성곽과 망루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을 분리하고 연계성 없는 용연(龍淵)을 미니어처 형태로 배치한 정원과 낙안읍성을 모티브로 하여 휴게공간에 낮은 장식담장으로 재현한 정원은 전통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필요함을 보여준다. 반면 전통정원의 입지 선택, 주변 환경과 유기적 배치가 중요함을 보여준 한국정원, 한옥 중정이 가진 여백의 미와 선비가 누렸던 느림의 미학, 달밤 뱃놀이라는 풍류 문화를 재현한 작품들은 전통구조물 모사를 넘어 전통에 대한 이해가 정원문화와 정서로 확산된 양상이다. 셋째, 디자인과 관련하여 실제 크기의 전통구조물을 직설적 방법으로 재구성한 작품이 많았다. 취병으로 정원을 구획하고, 담장안에 부뚜막, 굴뚝, 텃밭 등으로 생활공간을 꾸미고, 경복궁, 소쇄원, 서석지를 대표하는 시설들을 유기적으로 배치하였다. 하지만 규모가 큰 수원화성과 낙안읍성을 추상적 방법으로 재현한 작품들로부터 핵심이 되는 디자인 요소의 취사선택, 구조물의 입면 구성, 공간의 스케일감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였다. 해체적 방법을 선택한 정원 중에는 원형 이미지와 멀어진 한옥 마당과 바자울의 사례가 있는 반면에 정육면체를 구성한 프레임만으로 표현한 여백의 정원과 많은 전통구조물로 달빛 스며든 선비의 사랑방을 재구성한 정원은 긍정적 사례이다. 현대적으로 디자인한 경관구성요소들을 전시한 서울 장인 정원, 직지심체정원, 풍류정원은 작가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이 필요하다.

백제 한성기 토성의 축조기술 (Construction Techniques of Earthen Fortifications in the Hanseong Period of Baekje Kingdom)

  • 이혁희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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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5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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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8-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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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이 글은 삼국시대 토성 가운데 가장 많은 조사가 이루어진 백제 한성기 토성을 대상으로 축조기술을 살펴보기 위해 작성되었다. 이를 위해 토성의 축조공정을 '입지선정과 기저부 조성', '체성 축조', '공정의 마무리와 증축 및 보수'로 나누어 검토하였다. 백제 한성기 토성의 축조에는 다양한 기술이 동원되었음이 분명하게 확인된다. 지형조건에 따라 알맞은 기초보강기술이 적용되었으며, 본격적인 체성의 축조에도 여러 가지 기술을 활용하였다. 특히 체성축조 기술의 경우 성토기법과 판축기법으로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다. 성토기법(A식)은 200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인식된 기술로, 판축에 비해 고식적인 기술로 추정된다. 판축구조물을 사용하지 않은 기술로, 복잡한 토층선, 교호성토 방식, 토제 및 토괴 활용, 타원형 성토단위의 연접 등을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성토기법은 삼국시대 성토구조물 사이의 적극적인 기술 공유와 응용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기술이기도 하다. 판축기법(B식)은 판축구조물을 이용하여 성벽을 구축하는 기술로, 판축구조물의 높이와 규모, 확장방식을 기준으로 B1식과 B2식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B1식이 선행하며, 한성기 말기에 B2식이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 판축기법은 서울 풍납토성을 시작으로 하여 남한지역 각지로 확산된 것으로 판단된다. 성토기법과 판축기법은 등장시점부터 공존하였으며, 점차 판축토성 위주로 변화하였다. 성토기법과 판축기법은 토층 양상이 판이하며 축조 순서 또한 정반대이다. 따라서 양자는 기술 계통이 서로 달랐던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 한성기부터 시작된 토성의 축조기술은 웅진·사비기에도 계승 및 발전하였으며, 그 과정에서는 다른 국가와의 활발한 상호작용이 있었을 것이다. 최근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토성 조사사례가 증가하는 추세이므로, 백제를 포함한 주변 국가와의 비교·분석이 입체적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한다.

5~7세기 신라시대 성곽과 우물에 대한 석축입면조형원리 (Principles of Stone Elevation Formation for Walls and Wells in the Silla Dynasty from 5th to 7th Centuries)

  • 강성빈;서성혁;정태열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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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1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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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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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본 연구에서는 5~7세기 신라시대 석축의 입면조형원리를 규명하고자 돌의 크기, 비례, 형상, 각도, 분포 등에 대하여 분석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하였다. 첫째, 신라시대 석축의 돌의 크기 균등도는 -0.8~4.1로 낮게 나타났다. 이는 작은 돌부터 큰 돌까지 다양한 규격의 돌을 사용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신라시대 석축의 큰 돌의 분포는 높이에 관계없이 균등하게 나타났다. 이는 신라시대의 석축에서 우물, 산성 등 구조적 분류와 관계없이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신라인들은 석축공사에서 실용성, 효율성만을 추구한 것이 아니며, 의장적 요소를 고려했다고 생각된다. 둘째, 신라시대 석축의 돌의 비례편차는 0.861~1.515로 높게 나타났다. 이는 신라시대 석축은 긴 판석형의 돌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길고 짧은 돌을 혼재하여 사용한 것을 의미한다. 셋째, 신라시대 석축의 돌의 형상평균은 0.45로 낮게 나타났으며, 형상편차는 최대 0.15로 높게 나타났다. 이는 전체적으로 돌은 불규칙적인 형상을 하고 있으며, 각 돌은 형상의 차이가 높은 것을 의미한다. 넷째, 신라시대 석축의 돌의 각도편차는 4.3~16.2로 나타났으며, 각도의 평균은 2로 나타났다. 이는 신라시대 석축의 각 돌의 각도는 좌, 우로 기울어져 있음을 의미한다. 다섯째, 신라시대 석축은 돌의 크기, 세장비, 형상, 각도간의 상관성이 나타나지 않았으며, 조선시대 석축은 돌의 크기와 세장비에서 양의 상관관계, 돌의 크기와 형상에서 음의 상관관계가 나타났다. 이는 조선시대 석축은 돌이 비교적 정형화된 반면, 신라시대 석축은 재료의 본성을 지켜 입면이 재료와 하나가 됨으로써 절제의 미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창녕 문암정(聞巖亭)의 조영 및 경관특성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Construction and Landscape Characteristics of Munam Pavilion in Changnyeong(聞巖亭))

  • 이원호;김동현;김재웅;안계복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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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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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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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본 연구는 창녕 문암정(聞巖亭)의 역사문화적 가치 및 원형을 구명하기 위하여 문집, 기문 등의 문헌분석과, Arc-GIS를 바탕으로 조영실제 및 입지와 공간구성, 경관특성을 조사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과를 도출하였다. 첫째, 문암정의 조영자는 문암 신초(辛礎, 1549~1618)로 자연에 귀의하고자하는 조영자의 자연관을 알 수 있었으며, 문암정의 조영시기는 벼슬에서 물러나 문암정을 조성하고 소영하였다는 내용이 나타나는 1608~1618년도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둘째, 문암정은 주변 산지에 위요되어 있고, 급경사지에 형성된 성곽과 같은 고립지형 정상부에 문암정을 조성하였다. 문암정은 별서로서 그 지역의 명승으로 인식되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문암정 주변의 마을진입로의 교량과 계성천의 석축, 보, 주변 농경지의 시설 및 주택 등으로 인하여 과거의 조망경관이 훼손된 상태이다. 셋째, 문암정은 문암정이 위치한 중심공간과 문암정 동 서측에 위치한 진입공간, 영정각을 중심으로 하는 배향공간으로 구분되는데, 이 중 문암정의 원형은 문암정과 문암바위로 구성된 단순한 구조로, 현재의 진입동선과는 달리 조성 당시에는 직접적인 진입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넷째, 문암정의 공간구성요소는 배롱나무 수림, 점경물로서의 각자바위, 그리고 정자 건조물로 구분되어진다. 문암정 일원의 식생은 경내와 경외로 나뉘어, 경내는 매우 제한적인 식재가 이루어졌으며, 경외는 전면의 배롱나무 수림과 후면의 송림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중, 대규모의 배롱나무 군락은 조영자와 결부된 희귀한 역사기록 종 자원으로의 자연유산에 해당한다. 각자바위는 문암정 건조물과 인접하여 공간의 영역성을 표현하고 있으며, 조영자와 관련된 경물로 작용하고 있고, 한 가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기록행위의 하나로 문암정 전면의 각자바위군(群)은 일정한 방향성과 규범을 가지고 시기별로 조성된 보기 드문 사례이다. 다섯째, '문암팔경'은 방위에 따라 방위와 관계없는 경관요소가 4개소, 방위에 따른 경관요소가 4개소로 나타났다. 방위와 관계없는 경관요소로는 창녕 사리 배롱나무 수림, 문암정 후면 송림, 옥천계곡, 관룡사 대흥사이다. 방위와 관계한 요소 중 절대방위에 해당하는 요소로는 대흥사, 화왕산, 계성천, 영취산으로 판단되며, 상대방위로는 관룡사, 영취산, 옥천계곡, 공지기고개로 판단된다. 이 중 현존하는 대상은 창녕 사리 배롱나무 수림과 문암정 후면 송림, 계성천 옥천계곡 등이 있으며, 이외의 경관요소는 명확한 장소와 대상의 추정이 불가능한 일반적 팔경요소로 구성되어 있어 현재 확인이 어려운 상태이다. 문암정은 문암 신초가 말년에 난세를 피하여 자연에 은거하기 위해 조성된 정자로, 정자와 관련된 문암집과 문암충의록 등 조영관련 기록이 남아 있으며, 독특한 형태를 나타내는 정자의 입지와 각자바위를 통한 기록문화, 대규모의 배롱나무 노거수 군락, 팔경의 경영을 통한 문화경관적 요소가 남아있는 곳으로 판단된다.

한국 정치지리학과 인문지리학 일반 50년의 회고 (Retrospect and prospect of political geography and general-synoptic part of human geography in Korea)

  • 임덕순
    • 대한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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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1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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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95-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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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6
  • 1945년 8월 광복을 맞았을 당시 국내 정치지리학은 사실상 그 존재를 말할 형편이 못 되었다. 미군정 기간중인 1947년 초에야 비지리학자 표문화가$\ulcorner$조선 지정학 개관 : 조선 의 과거 현재와 장래$\lrcorner$를 출간했을 정도였다. 국내 지리학자로서 최초의 정치지리학 체계서 를 써낸 사람은 최복현이었다. 그의 정치지리학(1959)은 당시 미국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 다. 형기주는 국내서 지리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는 최초의 정치지리학 논문(국토 통일 가 능성)을 쓴 사람이다. 1960년대 종반에 들어서서 국내 정치지리학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김대경, 차윤, 임덕순 등에 의해서였다. 1970년대에 들어서서도 연구 활기는 지속되었는데 특히 동년대 초반에 해방후 국내 지리학 수업자에 의한 최초의 정치지리학 체계서(임덕순) 가 나온 점은 특기할 만하다. 1980년대 중반에는 양적으로 보아 정치지리학이 크게 발전한 시기이다. 박사학위 논문도 최초로 나왔고 석사학위 논문도 이후 다수 나왔다. 전기간에 걸 쳐 볼 때 정치지리 연구는 \circled1 수도, \circled2 행정구역, \circled3 지정적 구조 (특히 한반도), \circled4 분단- 통일, \circled5 각급 행정수도, \circled6 성곽, \circled7 선거, \circled8 도시정치 순의 8대 범주에 걸쳐서 크게 이루 어졌다. 한국의 정치지리학은 국내 문제와 관련, \circled1 국토통일, \circled2 3면 임해의 활동, \circled2 영호 남 불통합의 3대 과제에 연구를 더 기울여야 한다. 학문 자체와 관련해서는 \circled1 신 지정학적 연구, \circled2 전략-군사지리 연구 등에 크게 힘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인문지리학 일반 연구는 $\ulcorner$인문지리학$\lrcorner$을 써낸 김경성으로부터 논의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후 약 20년이 지나고나 서 오홍석의 비포괄적이나마 $\ulcorner$인문지리학 원리$\lrcorner$가 나왔다. 1970년대 중반이후 인문지리의 실증-계량적 분석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그런 중에 1980년대 초반에 인문지리 학 방법론상 중요한 2개의 대립적 논문 (김인의 공간지리학 옹호와 최기엽의 장소이해 옹 호)이 나왔다. 그후 방법론상의 논의가 5-6편 나와 오늘에 이르렀다. $\ulcorner$인문지리조사법$\lrcorner$ 교 재가 역시 비포괄적이나마 국내 최초로 출간된 것은 1988년 (조동규)의 일이다. 포괄성이 훌 륭한 인문지리학 체계서의 출간이 절실히 요망된다. 방법론에 있어서는 공간-계량적 입장과 지역-종합-해석적 입장간의 조화와 상호보완이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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