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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쌍룡문경(雙龍紋鏡) 유입(流入)과 독자성(獨自性) (Inflow at Ssangyongmun Gate During the Goryeo Dynasty and Its Identity)

  • 최주연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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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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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2-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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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용(龍)은 동서양 전설 신화에 등장하는 상상 속 동물이다. 서양의 용은 대부분 공격적이고 부정적 의미로 표현되지만, 동양에서는 황제를 상징하거나 상서로운 의미를 갖고 있어 긍정적 의미를 내포한다. 또한 용은 물을 다스리는 신물(神物)로 여겨져 그 종류가 다양해지고 이를 형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고려시대 용과 관련된 기록은 "고려사"에서 다양한 주제로 등장하며, 크게 건국설화 기우제 신이(神異) 등과 관련되어 있다. 건국설화는 용을 통해 고려 왕권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왕(王)=용손(龍孫)'이라는 '용손의식(龍孫意識)' 형성에 영향을 끼친다. 또한 용의 특징인 물을 다스리는 능력은 가뭄에 비를 바라는 기우제와 관련한 토용(土龍)으로 상징화된다. 이와 같은 용의 다양한 성격 중 용이 왕실의 상징이기에 용문(龍紋)의 사용은 민간에서 엄격히 제한되었으며, 용을 소재로 한 용문경(龍紋鏡) 역시 그 제작 사용에 있어 왕실과의 연관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고려시대 쌍룡문경(雙龍紋鏡)은 종류 수량이 많은 편으로 중국에서 유입된 동경(銅鏡)과 함께 국내에서 제작한 쌍룡문경이 혼재하면서 고려시대 쌍룡문경의 제작과 유통은 다른 동경에 비해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본고에서는 10~14세기 중국에 존재한 다양한 쌍룡문경의 특징을 정리했다. 고려의 장인들은 쌍룡문경을 제작할 때 중국 쌍룡문경의 문양 구성에서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는 중국 쌍룡문경과 국적을 판별하기 어려운 예가 많으며, 그 차이 또한 면밀한 분석을 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려는 유입된 쌍룡문경을 그대로 답습했던 것은 아니며, 자체적으로 제작하고자 했음을 국내 현존하는 쌍룡문경의 유형 분류를 통해 살펴보았다.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뉘는 쌍룡문경은 요대(遼代) 동경 계열인 I 유형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며, 그 외 II III 유형에서는 수량은 적으나 문양 구성이 독특한 쌍룡문경이 있어 고려에서 제작한 쌍룡문경으로 분석했다. 고려시대 쌍룡문경은 중국의 영향 하에서 제작된 만큼 고려에서 제작한 동경과의 구분이 어렵다는 점을 앞서 언급했다. 이중 평창 월정사 구층석탑에서 발견된 쌍룡문경은 그 제작지에 대한 의문점이 있으며, 동경의 문양 구성도 중국 쌍룡문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예이기에 이 동경에 대한 제작지를 검토했다. 이 쌍룡문경은 I 유형에 속하는 동경의 문양 구성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세부 문양의 조합이 중국에서 찾기 힘든 예라는 점에서 요대 동경의 문양 구성을 차용하여 고려에서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창산 김정기의 유적조사와 한국고고학 (Excavation of Kim Jeong-gi and Korean Archeology)

  • 이주헌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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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0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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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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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창산 김정기(昌山 金正基, 1930.3.3~2015.8.26)는 우리나라 문화재 발굴사에 있어서 큰 획을 그으신 분이다. 1959년 국립박물관 직원으로 문화재와 인연을 맺으신 이후, 1987년 문화재연구소를 퇴직할 때까지 약 3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유적과 유물을 발굴하고 자료를 정리하며 2015년 영면하기 전까지 대학과 발굴 전문기관에서 우리 문화재의 가치와 의미를 밝히려고 노력하였다. 창산은 국내의 기념비적인 고고학 발굴조사를 모두 진두지휘하고 초창기 한국 고고학을 대표하는 학자로 국내외에 알려져 있으며, 한국 고고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남겼다. 그의 활동과 역할은 고고학사적으로 의미가 있으나 나름의 한계 또한 찾아 볼 수 있다. 다양한 성격의 유적이 활발히 조사되어 한국 고고학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시기로 평가되고 있는 국립박물관의 덕수궁시기(1955~1972년)에 창산은 선사시대 패총유적이나 주거지와 같은 고고학 조사에 적극 참가하여 유적측량과 유구 실측을 비롯하여 사진촬영과 유물 제도 등을 맡아서 하였다. 그는 일본에서 익힌 발굴기술을 마음껏 발휘하였고, 전국을 무대로 종횡무진 이루어진 그의 고고학조사는 학사적으로도 높게 평가되고 있다. 특히, 창산의 견해 가운데 고고학적으로 주목되는 것은 고분에 있어 수릉의 가능성을 지적한 것과 청동기시대 문화의 이해에 "해미문화"라는 지역문화론을 처음으로 언급한 것은 탁견이었다. 1969년 문화재연구실이 설치됨에 따라 그 책임을 맡은 창산은 미약한 규모인 연구실의 운영과 총체적인 책임을 맡아 찬란한 우리문화를 지켜내고자 조사와 연구에 고심하였다. 그는 불국사 복원공사와 경주 천마총, 황남대총의 발굴 등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고, 이후 황룡사지, 분황사, 미륵사지 등을 조사하며 삼국시대 불교문화와 가람의 구조를 체계적으로 파악해 보고자 노력하였다. 당시 창산이 기획하여 진행한 대형 발굴조사는 한국 고고학의 기틀을 다짐과 동시에 관련분야의 연구를 활성화시키는데 크게 이바지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한국 고고학의 계기적인 발전과정 상에서 볼 때, 다양한 발굴조사법의 시도와 체계화, 고고학 전문 인력의 양성과 발굴조사의 대중화, 조사기록의 정형화 및 자료공개 활성화 등은 이 시기 창산의 열정으로 이루어진 성과로 손꼽을 수 있다. 한편, 유적조사에 있어서 정확한 기록과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열정적으로 발굴에 심혈을 기울인 발굴왕 창산도 유적의 성격을 밝히고 유구를 해석하는 과정에 있어서는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는데, 황남대총 주인공 논쟁의 불씨를 남겨둔 것은 그의 역할을 재음미해볼 때 매우 아쉬운 한부분이다.

논산 노성산(魯城山)의 입석(立石) 분포와 총석사(叢石寺) 수석(樹石)의 정원적 면모 (Dispersion of Standing Stones at Noseongsan(Mt.Noseong) and Aspect of the Stone Decorated Garden(Soo-suk Jeongwon) at Chongsuk-Sa(Chongsuk Buddhist Temple) in Nonsan City)

  • 노재현;허준;장일영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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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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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0-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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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본 연구는 아직까지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논산 노성산성 일대 입석과 총석의 현황과 그 형태 및 의미를 파악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도되었다. 이에 따라 노성산과 노성산성의 장소정체성과 노성산성 내외부에 산재한 입석의 분포를 파악하는 한편 입석의 밀도가 가장 높고 문화재적 보존가치가 높다고 판단되는 '총석사'를 중심으로 수석(樹石)의 배치형태 및 구성 특성을 조사 분석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불우조(佛宇條)에서의 '탑사(塔寺)' 존재의 언급, 탐문조사 결과 사찰의 존재설 그리고 '관음사(觀音寺)' 명의 와편 발굴 기록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오래전부터 산성 내부에 불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총석사'라는 각자와 관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관찰조사 결과, 산성내부에 존재하는 다수의 입석지 중 제6입석지는 수석(樹石)의 규모, 수석 구성의 복합적 경향, 주변 우물(샘) 및 방지 그리고 석문 등에 이르는 계단의 조성 흔적 등을 볼 때 총석사를 중심으로 인위적으로 조성된 공간의 성격이 강하다. 총석사를 비롯하여 삼신암, 칠성암, 대장암 등으로 각자된 5개의 수석과 관세음보살로 추정되는 선각 마애불은 동일 공간 바위 위에서 발견된 북두칠성의 성혈(星穴)과 함께 이 공간이 불교 또는 도교와 민간신앙이 결합하여 발생한 칠성신앙 및 산신신앙적 공간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는 단서로 파악되었다. 총석사 입석의 실측조사 결과, 수석의 수는 총 24개로 수석고는 29~402cm, 수석폭은 48~290cm로 규모에 있어 큰 편차를 보였으며 수석간 평균거리는 23.56cm로 나타났다. 또한 입석, 평석, 산형석 그리고 영상석 등 다양한 돌을 특치(特置), 군치(群置)하여 수석하였으나 돌의 좌향은 서향(W)으로의 일관된 지향성을 보이고 있었다. 또한 국내에 알려진 정토정원의 유구와 비교할 때 수석의 배치 기법상 입석과 형상석 이외의 3개의 평석은 선원의 대표적 구성요소가 되는 좌선암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중 보살암을 마주하는 평석은 삼산석(三山石)을 상징화하여 조성된 것이지만 높이 및 주변 수석 배치 여건으로 보아 참선의 목적보다는 제수를 위한 공양석으로 추정된다. 총석사 수석의 구성은 입면이나 평면구성상 천지인 삼재(三才)를 형상화한 삼존석형(三尊石形)을 바탕으로 심경미(深景美)를 추구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부등변삼각형의 3:5:7 복합수석법으로 일정한 지향성을 보이며 배치되고 있음을 볼 때 총석사 입석군은 사원수석의 형태로 참선을 목적으로 돌짜임된 축경적(縮景的) 정원 유구로 보인다.

장승의 기원과 옹중석 (The Origin of Changseung and Ongjung Stone)

  • 정승모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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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6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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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0-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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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우리가 '장승'이라고 부르는 조형물들은 그 기원이나 역사, 또는 기능이 서로 달라 엄밀한 구별이 필요하다. 이 글은 장승의 기원과 함께 역사적인 변화과정을 더듬어 이 구조물이 갖는 두 가지 다른 측면을 구분하고 이에 기초하여 소위 '석장승'의 다양한 기원과 기능을 살펴보는 데 목적이 있다. 고려시기에 사찰에서는 장생, 또는 관련 석물을 세웠는데, 이 중 '통도사국장생석표'는 석표(石標)라기보다는 석비(石碑)의 기능을 갖는다. 석비에 음각된 명문을 보면 이전의 판아(判兒)처럼 다시 세우라고 하였는데, 판아란 역귀(疫鬼)를 쫓는다는 종규(鍾郡)를 말한다. 명문 내용은 통도사의 영역을 장생으로 표시하였다는 것이다. 허목의 "월악기(月嶽記)"에 실려 있는 한준겸(韓浚謙)의 기사를 보면 도갑사 국장생의 규모가 매우 커서 이러한 추정을 가능케 하며 '국장생'이나 '황장생'이라고 새긴 입석은 장생이 아니라 표석, 즉 장생표(長生標)임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이정(里程) 기능을 하는 후를 장생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이는 사찰 장생과는 달리 나무로 만들어 사찰 장생의 생(生) 자에 나무 목(木) 변을 붙인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요즈음과는 달리 조선시기에는 비보 성격을 갖는 사찰 석상이나 읍성풍수물을 장승이라고 부른 경우는 찾을 수 없다. 예를 들면 제주도 '돌하르방'을 두고 장승이라고도 불렀다는 역사적 근거는 없다. "탐라기년(耽羅紀年)"에 의하면 제주목사 김몽규(金夢奎)가 성문 밖에 옹중석(翁仲石)을 세웠다고 했는데, 옹중석은 대개 고대 제왕(帝王)이나 대신(大臣)의 능묘 앞에 세운 석인상(石人像)을 지칭하는 말이다. 옹중석은 엽승[壓勝]을 위한 풍수물로도 나온다. "광주읍지(光州邑誌)"(1899년간)에는 수구(水口)를 만들고 석옹중 2기를 마주 세워 그 기를 진압하였다는 기사가 나온다. 전라북도 부안읍치의 동쪽과 서쪽에 각각 2기씩 세워진 석물에는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과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라는 명문이 있는데, 읍성풍수물인 이것 역시 석장생이나 장승, 또는 당산으로 불릴 이유는 없다. 도교적인 개념인 상원(上元)과 하원(下元)이 붙은 주장군이나 당장군은 이후 사찰 석상의 명문으로 자주 등장하고, 이후에는 이표 장승에도 붙는다. 사모를 쓴 북한산성 옹중석을 지금은 볼 수 없는 것처럼 많던 옹중석들은 어딘가에 묻혔을 것이다. 그 와중에도 제주의 옹중석과 부안 읍성의 석상은 위치 이동이 적어 옹중석의 기능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설립된 석상들은 고려시기에 조성된 장생(長生)과 기능상 가장 관련이 깊은 듯하다. 즉, 과거의 장생처럼 18세기 초중반의 석상들은 읍성, 또는 사찰의 비보물이면서 동시에 경계를 표시하는 기능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사찰 석상의 설립시기는 양전사업이 전국적으로 실시된 때이기도 하지만 속세에서는 산송(山訟)이 활발해지는 때라 사찰에서는 비보와 함께 영역 표시를 위해 석상들을 세웠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장승으로 통칭되는 목인과 석상들은 각자가 서로 다른 시대에 서로 다른 이유로 세워진 것들이다. 그 출발은 고려시기 사찰의 장생(長生)으로 비보물이면서 동시에 사찰의 영역을 표시하는 석물, 또는 석상이었다.

중국(中國) 지방사회(地方社會)와 불교사원(佛敎寺院) 그리고 승인(僧人)의 상호(相互) 영향(影響)에 관한 일고(一考) (On the Influence Each Other Between the Monks in the Buddhist Temples and the Society in Towns or Villages)

  • 옌야오중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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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5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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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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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고대 중국 불교사원이 있는 환경은 향촌(鄕村), 명산(名山), 도시(都市) 세개의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이는 또한 사원이 존재하는 환경의 차이를 만들며 이로써 불교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고 또한 사원과 사회관계의 다른 유형을 만들었다. 본고는 향촌 사회가 사원과 승려뿐 아니라 불교의 존재와 발전에 가져온 각종 이해(利害)에 대해 설명한다. 사원이 사회구조 속에서 다른 환경적 위치, 즉 도시와 향촌에 놓였을 때 그들은 결국 다른 외재적(外在的) 내재적(內在的) 사회적 응성을 발생시킬 수 밖에 없다. 중국 고대 불교사원은 위에 말한바와 같이 향촌, 명산, 도시에 위치하고 있으나 동진십육국 이후 사원이 크게 늘고 명산이 사원과 승려의 집중지가 됨에 따라 명산과 도시의 사원은 비슷한 양상을 띠며 발전한다. 그러나 향촌의 사원은 이와는 좀 다른 영향을 받고, 비쳤으므로 그를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향촌 지역의 사원과 승려들이 서로 미치는 영향은 크게 네가지가 있다. 첫째, 향촌의 승려들은 그 지역, 혹은 그 부근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사회와 비교적 친밀한 관계를 형성한다. 그러므로 향촌 지역의 세력은 사원 승려집단이 구성하는 영향력을 제한한다. 둘째, 향촌 사원은 지방경제에 의탁하며 서로 동고동락 하였다. 향촌의 사원은 그 사회의 공공장소가 되었고 종종 시장 소재지가 되기도 하였다. 사실 사찰의 축조와 존재는 원래 지역 경제에 있어 하나의 추동력이 되었다. 왜냐하면 사찰건물 축조에는 공장(工匠)과 재료가 필요하며 어떤 절은 향객(香客)과 향촉(香燭) 소비 등에서 모두 많게든 적게든 상품 경제를 대동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재 향촌이 어떤 자연재해 혹은 인재를 만나거나 수확이 좋지 않거나 경제가 불황일 때는 승려들이 흩어져 사원 또한 존속할 수 없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셋째, 향촌 사원과 신도들의 관계는 도시와 명산의 사원과 구별된다. 왜냐하면 중국에서 사원은 승려들이 수행하는 장소일뿐 아니라 일반 가신도(家信徒)들이 조배(朝拜)하는 장소이기 때문에 그 주위엔 항상 많은 신도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넷째, 향촌 불교와 지방 민간신앙의 결합은 꽤 큰 정도로 불교의 민간화를 주도하였다. 이것은 하나의 상호작용 과정이다. 불교가 가지고 있는 전국성(全國性) 종교로서의 우세(優勢) 때문에 종종 지방특색을 가지고 있는 숭배는 불교 신앙으로 바뀌거나 불교 적색채에 물들었다. 향촌의 사원은 현지 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지방의 영향을 받음과 동시에 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향촌에서 비교적 문화가 발달된 곳으로서의 각종 문화와 관련된 시설 - 예를들어 학교, 병원 등 - 의 역할을 대신하여 모범 행동을 보이기도 하였다. 사찰이 향촌의 장례(葬禮)에 미친 영향도 매우 컸다. 중국인의 분묘(墳墓)는 주로 향촌에 세워졌는데 도시에 사는 사람이더라도 죽은 후에는 본적(本籍)으로 돌아와 묻히거나 적어도 도시가 아닌 교외(郊外)에 묻혔다. 향촌의 사찰은 일반적으로 장사 치르는 일에 참여하였다. 이상은 대다수의 유명한 불교 사찰은 명산에 있는것이 아니라 도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원의 다수는 오히려 광대한 향촌에 있으며 그들은 향촌 사회와의 상호 융합을 통하여 90%이상의 중국 민중과 연결되어 있으며 불교가 중국에서 가장 중요하게 존재하는 기초가 되었음을 표명한다. 향촌 사원과 현지 사회 민중간의 상호 영향은 전방위(全方位)적인 것이며, 많게 혹은 적게 사회 생활 각 방면에 파급되었다. 향촌 지역에 이렇듯 사묘(寺廟)가 시(時) 공간(空簡)적으로 광범위하게 분포해 있는 것은 불교 사원과 중국 고대 농촌 사회의 긴밀한 결합을 설명하기에 족하다.

이순신의 『충민공계초(忠愍公啓草)』에 대한 서지적 고찰 (Bibliographic Study on 『ChungMinKongKeicho (忠愍公啓草)』 by YI Sun-sin)

  • 노승석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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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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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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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이순신(李舜臣)이 임진왜란 중 조정에 보고한 장계(狀啓)가 그 당시와 후대의 등록(謄錄) 형식에 따라 3자에 의해 등서되어 현재 장초(狀草), 계초(啓草), 계본(啓本) 등으로 전한다. 특히 전라좌수영의 수군절도사로 재직할 때 작성된 "임진장초(壬辰狀草)"는 대표적인 장계로 많이 알려졌다. 최근에 분실되었다가 소재가 확인된 "충민공계초"는 "임진장초"와 함께 후대의 이순신 장계류에 전범이 될 만큼 사료적인 가치가 매우 높은 국보급 유물이다. 그러나 이 책이 이순신 관련한 새로운 책인지 아니면 기존에 분실되었던 장계별책인지 불분명한 상태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이에 대한 서지적인 고찰을 통해 관련 내용을 고증하였다. "충민(忠愍)"은 이순신이 사후에 사용했던 명칭이었고, 1662년에 장계가 등서되어 "충민공계초"가 완성되었다. 여기에는 "임진장초"에 없는 12편이 더 들어있는데, 그간 분실된 것으로 알려진 장계별책에도 "임진장초"에 없는 12편이 더 들어 있었다는 점이 서로 일치하는 점이다. 특히 1928년 일본인들이 촬영한 사진 11장의 형태와 내용이 "충민공계초"에 들어있는 12편과 완전 일치한다. 조선사편수회에서 이 책을 "별도로 초사(抄寫)한 계초(啓草) 1책"이라고 한 점, 이 책의 12편으로 장계를 보충한 점, 홍기문과 이은상이 장계초본에 기존 "임진장초"에 없는 12편이 더 들어있다고 한 점, 조성도가 12편을 따로 별책본으로 분류한 점 등은 12편이 들어있는 장계별책을 "충민공계초"라고 할 수 있는 근거가 되어준다. "충무공계초"는 편수가 총 62편이므로 12편이 더 들어있는 분실된 장계별책으로 보긴 어려울 것이다. "충무공유사"의 "충무공계본"은 모두 16편이다. 본문에는 이두문이 그대로 실려 있고, 뒤의 3편은 "충민공계초"원문과 동일하다. 지금까지 이두문이 그대로 실린 것은 1935년에 간행된 조선사편수회의 "임진장초"가 유일했는데, "충무공계본"의 간행된 시기가 오히려 이를 앞서는 것으로 추정된다. "충민공계초"가 장계별책이라는 것에 대한 반론은 이은상이 "장계등본 별책의 일기 1장"이라고 한 말에 근거한다. 1953년 설의식이 "이순신수록 난중일기초"에 "무술일기" 초고 사진 1장을 도판으로 처음 소개하였다. 이은상도 "무술일기"에 장계초본 별책 속의 친필 일기초 2면을 첨가했고, 다시 "장계 등본 별책 끝에 최후 10일 동안의 일기 한 장"과 "별책부록"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이 의견은 설의식이 정확한 출처를 모르고 소개한 "무술일기" 초고 사진 1장"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은상은 "충무공유사"를 장계관련 책으로 잘못 파악하고 "장계등본 별책의 일기 1장"이란 말을 하였다. 이는 실제 원본상황과 다른 잘못된 견해이므로, 굳이 이를 정정한다면 "충무공유사의 일기 1장"이라고 해야 한다. 따라서 일기 1장이 딸린 장계별책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므로 반박의 근거가 잘못된 것이다. 요컨대 "임진장초" 이외의 모든 장계들을 장계별책이라 할 수 있겠지만, 지금까지 통상 지칭되었던 장계별책에 유독 12편이 더 실려 있다고 한다. 이 점이 다른 장계류와 차별화된 점이다. 그러므로 여러 장계이본 중에서 유일하게 12편이 더 수록된 "충민공계초"가 기존에 알려진 장계별책이라는 견해에 더 무게가 실릴 것이다.

대학 총학생회 자치활동의 설명책임성을 위한 기록관리 방안 연구 - 명지대학교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 (A Study on Management of Records for Accountability of University student body's autonomy activity - Focused on Myongji University's student body -)

  • 이유빈;이승휘
    • 기록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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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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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5-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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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대학은 공공성을 띤 기관으로서 그 운영 과정상 사회에 대한 설명책임성(accountability)을 가진다. 이러한 대학을 이루는 구성원 중 다수를 차지하는 것이 바로 학생이다. 대학에서는 매년 수많은 연구 창작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대학생은 이와 같은 기록물의 주요 생산자이다. 그러나 대학의 주체로서 매년 방대한 기록물을 생산해내고 있으면서도 대학생의 역할과 기능, 생산 기록물에 대한 집중적인 조명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처럼 기록학적 관점에서 대학생이 주체가 되어 생산된 기록물에 대한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되어 왔던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본 연구는 대학생이 주체가 되어 생산한 기록에 대한 기록학적 관점에서의 접근을 시도하였다. 대학생이 생산하는 기록에는 연구 및 수업 과정에서 생산되는 기록뿐만 아니라 동아리, 학생회 등 각종 자치활동 과정에서 생산되는 기록 등 다양한 유형의 기록이 존재한다. 본 연구에서는 특히 대학생 자치활동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대학생의 자치활동 과정에 대한 설명책임성 확보 방안에 중점을 두었다. 활동의 설명책임성 확보를 위해서는 기록관리가 기초되어야 한다. 따라서 대학생 자치활동의 설명책임성 확보를 위한 방안으로서 기록관리체계화 및 기록 활용 방안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대학생 자치 조직인 대학 총학생회를 대상으로 분석하였으며, 구체적인 대상으로는 명지대학교 인문캠퍼스 총학생회를 선정하였다. 우선 총학생회의 활동과 조직 및 기능, 기록관리 현황 실태를 파악하기 위하여 총학생회장과의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이를 통해 대학 총학생회의 활동을 분석하고 그에 따른 설명책임성의 필요성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또한 명지대학교 총학생회의 조직과 기능을 분석하여 각 단계에서 생산되어야 하는 기록의 종류와 특성을 도출하였다. 이처럼 총학생회의 활동과 설명책임성의 필요성, 조직 및 기능에 따른 생산 기록물의 유형을 도출한 후, 현재 총학생회의 기록관리 현황을 분석하였다. 먼저 총학생회 활동의 일반 프로세스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명지대학교 총학생회의 단계별 활동 프로세스를 분석하였다. 그리고 총학생회 기록관리 방법과 책임 주체를 분석하고 실태 분석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대학 총학생회의 설명책임성 확보를 위한 방안을 기록관리 과정 체계화, 기록관리 인프라 확립, 기록 활용을 통한 설명책임성 확보 방안의 세 가지 범주에서 제안하였다. 본 연구는 대학생 자치 조직인 총학생회를 대상으로, 총학생회의 활동과 기능을 분석하여 사회에 대한 설명책임성을 논하였다. 그리고 총학생회의 설명책임성 확보를 위한 방안으로서 기록관리 환경 정착에 대한 모형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총학생회는 1년 단위로 운영되는 조직이라는 점에서 기록관리 환경이 정착되기 힘든 한계점이 존재한다.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한계점을 지적하고, 총학생회 기록관리 모형 제시를 통해 차후 학생기록관리 분야에서 보다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질 때 단초를 제공하고자 하였다. 또한 학교사(史) 정리와 보전 차원에서 본 연구에서 도출된 분석 결과가 의의를 가질 것으로 기대된다.

유교사상을 통한 청소년의 시민윤리의식 실증조사연구 (A Research on Investigation Results of Teenagers' Civic and Ethic Awareness - Confucian values and a Treatise of Human Nature)

  • 문기영;이인영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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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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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93-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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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본 연구는 한국 청소년의 유교적 가치관과 시민윤리의식의 관계를 분석하고, 인성론에 입각한 시민윤리의식을 전망함으로서 교육적 방안을 제시하고자, 실증연구방법을 진행하였다. 실증연구에서는 청소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자료에 의하여 통계분석 및 논의를 거쳐 연구목적을 달성하였다. 실증연구 부분에서는 한국 청소년의 유교적 가치관에 대한 인식과, 그에 따른 시민윤리의식과의 관계를 분석하였다. 유교사상의 가치관이 시민윤리의식에 미치는 영향과 관계를 분석함으로서, 청소년들의 유교사상에 대한 수용성과 시민윤리적 유용성을 평가하였다. 본 연구의 대상은 서울, 경기에 소재한 중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남녀 학생 311부의 자료가 실제분석에 사용되었다. 첫째, 본 연구에서 분석하고자 하는 청소년의 유교적가치관 및 시민윤리의식의 수준과 응답경향을 알아보기 위해 기술통계분석을 실시하였으며, 그 결과, 조사대상자들의 유교적가치관에서 세계관 M=3.54, 인간관계관 M=3.66, 도덕함양 M=3.76, 사회질서 M=3.45로 모두 3.0점 이상의 긍정적인 수준을 보였으며, 특히 도덕함양에서 가장 우수한 점수를 나타내었고, 유교적 가치를 사회질서의 기준으로 생각하는 사회질서 요인은 다소 낮게 나타났다. 둘째, 연구대상 청소년의 개인적인 특성에 따른 유교적가치관 하위변인 및 전체 지각 차이를 검증한 결과, 성별에 따라 도덕함양에서 여학생(M=3.85)이 남학생(M=3.64)보다 높게 나타났으며, 가정의 주관적 경제수준에 따라 세계관에서 상위층(M=3.98)이 중하위층(M=3.25), 하위층(M=3.22)보다 높게, 인간관계관에서 중상위층(M=3.79)이 하위층(M=3.46)보다 높게 나타났다. 그리고 가족구성형태에 따라 도덕함양에서 확대가족(M=3.83)이 핵가족(M=3.62)보다 높게, 사회질서에서 확대가족(M=3.54)이 핵가족(M=3.36)보다 높게 나타났다. 셋째, 청소년의 유교적가치관이 시민윤리의식에 미치는 영향을 밝히기 위한 연구문제 검증을 위해, 다중회귀분석의 다층모형을 이용한 위계적 회귀분석을 사용하였다. 그 결과, 유교적 가치관은 인간관계관(${\beta}=.499$), 세계관(${\beta}=.412$), 사회질서(${\beta}=.341$), 도덕함양(${\beta}=.241$) 순으로 시민윤리의식 전체와 유의한 정(+)의 관계를 갖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유교적 가치관은 도덕함양(${\beta}=.458$), 인간관계관(${\beta}=.454$), 사회질서(${\beta}=.362$), 세계관(${\beta}=.158$) 순으로 자율성과 유의한 정(+)의 관계를 갖는 것으로 나타났고, 유교적 가치관은 인간관계관(${\beta}=.295$), 사회질서(${\beta}=.281$), 도덕함양(${\beta}=.232$) 순으로 공동체의식과 유의한 정(+)의 관계를 갖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상의 결과에서 청소년의 유교적 가치관은 시민윤리의식에 유의한 정(+)의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나, 유교적 가치관이 높을수록 시민윤리의식도 긍정적임을 알 수 있어, 결국 유교적 가치관이 현대사회 시민윤리의식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분석결과를 토대로 한 구체적인 방안으로서, 본 연구에서는 인성론에 입각한 시민윤리의식 교육의 필요성 및 가능성을 언급하였으며, 이를 위해 인(仁)의 인간존중 사상, 이상적 인간상으로서 군자, 바람직한 사회이상 대동사회를 통한 유교윤리와 현대사회 시민윤리의식의 접점을 찾아야 함을 제안하였다.

대의와 신뢰 중시의 한국형 리더십 연구 (The Study of Korean-style Leadership (The Great Cause?Oriented and Confidence-Oriented Leadership))

  • 박상리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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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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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9-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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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본 연구는 한국에 적합한 리더십 이론을 구성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역사적 인물의 사례를 분석하여 그들의 리더십 핵심가치를 제시하였다. 이는 우리가 그리고 바라는 리더의 모습을 발견하고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 역사속의 인물은 일정한 범주로 구분한 결과 유형별로 그들을 묶어낼 수 있었으며 그들의 대표적 특성을 찾아낼 수 있었다. 실사(實事), 결사(決死), 풍류(風流), 창안(創案), 개신(開新)이 그것인데 그 중에서 본 연구는 결사의 선배들을 통해 리더의 모습과 가치를 구성하였다. 결사(決死),란 '옳은 일을 위하여 목숨을 다하여 싸운' 특성을 말하며, 12명의 인물을 선정하였는데 계백 강감찬 을지문덕 최영 정몽주 성삼문 이순신 곽재우 최익현 안중근 윤봉길 이준이 그들이다. 그리고 이들의 핵심가치와 역량, 그리고 그들의 구체적 사례를 개인영역, 관계영역, 조직영역, 사회영역으로 나누어 분석한 결과 공통된 요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결사의 선배들은 이상과 목표를 제시하고 앞장서서 몸으로 행동하는 유형이다. 그들의 목표는 명확했고 의지는 확고했다. 2장의 개인영역의 핵심가치는 지청청(志靑靑)이다. 즉 뜻을 세우고 당당하고 꿋꿋하게 이를 지켜낸다는 의미이다. 옳은 일이라면 꿋꿋하게 혼자서라도 푸른 빛을 드러낼 수 있는 의지를 보여준다. 분명한 자기확신과 신념이 바로 개인영역의 핵심가치이다. 3장의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맺음에서 보여준 핵심가치는 수신결의(守信結義), 즉 의리를 지킴으로 해서 신뢰를 형성하고 이를 지켜내는 것이다. 믿음은 인간이 타인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애정이다. 따라서 상호간의 신뢰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참된 마음과 인간애가 바탕이 되어야 하며[촌성함정(寸誠含情)], 인정(人情)에 치우치지 않는 엄격함과 분명한 자세로 원칙과 기준을 명확히 해야 한다[정우직행(淨友直行)]. 원칙을 중시한다는 것은 이중규범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며, 스스로에게 더욱 엄격하면서 타인에게는 포용을 베풀 수 있는 것이다[박기후인(薄己厚人)]. 4장의 조직영역의 핵심가치는 단심합력(丹心合力)이다. 이를 위해서는 공동체의식과 조직에 대한 헌신과 책임의식, 그리고 솔선수범의 자세가 요구된다. 결국 조직을 이끌어가는 가장 큰 힘은 팀웍이며 이순신이 갑옷을 벗어던지고 앞장서는 행동으로 부하들을 독려했듯이 리더의 태도가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다. 5장에서 결사의 사회영역에 대한 가치지향은 명확하다. 그들은 대의를 위하여 죽음을 선택하는 召命을 완수하였다. 이들은 모두 부정에서 긍정을 찾는 신념속에서 소임을 다하며, 의리에 바탕을 둔 주체적 모습을 보여주었다. 리더는 단지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올바른 일을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목표달성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올바른 가치관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어야 한다. 인격과 도덕적 행위가 바탕이 되지 않는다면 그 리더십은 효과적으로 수행될 수 없다. 따라서 도덕적 책임성과 주체적이며 개방적인 자세로 시대적 소명을 실천해가는 자가 진정한 리더이며 자기확신과 신뢰를 기초로 한 리더십이 그 해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퇴계(退溪)의 천관(天觀) 연구(硏究) (A Study of Perspective on Cheon Gwan(天觀) of Toegye)

  • 황상희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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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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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7-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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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천(天)의 개념을 살펴보자면 송대(宋代)이전은 종교적(상제(上帝)) 천(天)이라면 송대(宋代)이후는 합리적(천(天)理) 천(天)이다. 주자는 종교성을 잃어버렸고 퇴계는 회복했다. 이 논문은 퇴계와 주자가 말하는 천(天)의 속성이 다르다는 것을 기반으로 리(理)의 종교성까지 밝히는 것이 목적이다. "서명"은 '이일분수(理一分殊)'의 논리로 설명되어진다. 주자와 퇴계는 이일(理一)이란 측면에서는 사천(事天)이란 해야한다고 말하지만 분수(分殊)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주자는 천리(天理)의 이법을 따라야 한다고 하고 퇴계는 사친(事親)의 효(孝)를 행해야 한다고 한다. 이와 같이 퇴계와 주자는 천(天)의 속성 다르기 때문에 방법에 있어서도 차이가 생긴다. 이러한 차이는 리(理)의 속성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주자(朱子)는 소이연(所以然)은 리(理), 소당연(所當然)은 사(事)라고 구분해서 말한다. 퇴계(退溪)는 소당연(所當然)이야 말로 리(理)라고 말한다. 본질과 실존의 논의로 보자면 퇴계에게는 실존이 본질보다 먼저인 것이다. 리(理)라는 형이상학적 논의 속으로 실존의 문제를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다. 퇴계(退溪)에게서 주자(朱子)와 다르게 주목되는 이론은 '이자도(理自到)'설 이다. '이자도(理自到)'는 나라는 주체가 타자에게 지극히 하면 타자가 나에게로 와서 나를 통해 발현된다는 것이다. 이 논의는 '물격(物格)'에 토를 넣는 문제에서 시작한다. 퇴계는 '물리(物理)'가 이르는 것이 아니라 '중리(衆理)'가 이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상대적 리(理)'와 '절대적 리(理)'를 명확하게 구분하기 위한 논의이다. 존재는 비존재를 존재로 한 존재이기 때문에 상대적 리(理)이지만 존재와 비존재를 뛰어 넘으면 절대적 리(理)이다. 이는 분수(分殊)의 리(理)와 이일(理一)의 리(理)에 대한 차이이다. 즉 절대적 리(理)가 나에게로 이르러 내 삶에서 드러나는 공효가 물격(物格)이다. 퇴계는 천(天)=리(理)=상제(上帝)를 동일시하는 종교적인 태도를 강하게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