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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한성기 토성의 축조기술 (Construction Techniques of Earthen Fortifications in the Hanseong Period of Baekje Kingdom)

  • 이혁희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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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5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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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8-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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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이 글은 삼국시대 토성 가운데 가장 많은 조사가 이루어진 백제 한성기 토성을 대상으로 축조기술을 살펴보기 위해 작성되었다. 이를 위해 토성의 축조공정을 '입지선정과 기저부 조성', '체성 축조', '공정의 마무리와 증축 및 보수'로 나누어 검토하였다. 백제 한성기 토성의 축조에는 다양한 기술이 동원되었음이 분명하게 확인된다. 지형조건에 따라 알맞은 기초보강기술이 적용되었으며, 본격적인 체성의 축조에도 여러 가지 기술을 활용하였다. 특히 체성축조 기술의 경우 성토기법과 판축기법으로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다. 성토기법(A식)은 200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인식된 기술로, 판축에 비해 고식적인 기술로 추정된다. 판축구조물을 사용하지 않은 기술로, 복잡한 토층선, 교호성토 방식, 토제 및 토괴 활용, 타원형 성토단위의 연접 등을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성토기법은 삼국시대 성토구조물 사이의 적극적인 기술 공유와 응용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기술이기도 하다. 판축기법(B식)은 판축구조물을 이용하여 성벽을 구축하는 기술로, 판축구조물의 높이와 규모, 확장방식을 기준으로 B1식과 B2식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B1식이 선행하며, 한성기 말기에 B2식이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 판축기법은 서울 풍납토성을 시작으로 하여 남한지역 각지로 확산된 것으로 판단된다. 성토기법과 판축기법은 등장시점부터 공존하였으며, 점차 판축토성 위주로 변화하였다. 성토기법과 판축기법은 토층 양상이 판이하며 축조 순서 또한 정반대이다. 따라서 양자는 기술 계통이 서로 달랐던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 한성기부터 시작된 토성의 축조기술은 웅진·사비기에도 계승 및 발전하였으며, 그 과정에서는 다른 국가와의 활발한 상호작용이 있었을 것이다. 최근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토성 조사사례가 증가하는 추세이므로, 백제를 포함한 주변 국가와의 비교·분석이 입체적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한다.

묘제(墓制)와 목관(木棺)을 통해 본 익산 쌍릉(益山 雙陵)의 의미 (The Burial Type and Wooden Coffin of Iksan(益山) Ssangneung(雙陵))

  • 김낙중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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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7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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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2-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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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이 글에서는 익산 쌍릉의 묘제 및 목관의 특징과 그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았다. 쌍릉은 묘제와 장제 뿐만 아니라 옥장신구와 같은 부장유물 그리고 익산과 무왕의 관계를 통해서도 무왕과 그 비의 능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익산에 백제 왕릉, 즉 무왕릉이 조영된 이유는 여러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사비가 아니라 익산을 기반으로 왕이 된 무왕이 익산을 중요시한 것은 당연하다. 또한 신라와의 관계에서 익산의 지정학적 중요성도 익산 경영의 요인이 되었다. 익산에 도성의 경관을 이루는 주요시설을 세운 것은 천도 혹은 그에 준하는 행위의 준비와 일부 실행을 보여준다. 다만 귀족과 사서인(士庶人)의 거주구역 등 도시로 완성된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은 그것이 완전하지 못하였음을 시사한다. 그렇지만 무왕 사후에도 익산의 중요성은 의자왕에 의해 유지되었다. 그것은 무왕 재위 후반기에 창건된 제석사 및 미륵사와 같은 대사찰이 백제 멸망 때까지 계속 운영된 점이나 사찰로 전용되었지만 왕궁 일원이 여전히 존속된 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러한 계승의식이 무왕과 그 비의 능을 익산지역에 조성하는 행위로 구체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나(羅)·당(唐) 군의 이동과 백제군 배비 - 서기 660년 - (Movement of the Silla-the Tang army and Baekje military deployment)

  • 윤일영
    • 안보군사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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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권1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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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7-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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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1. Movement of the leaders of the Silla army The leaders of the Silla army traveled from Gyeongju(경주) to Icheon (이천), Deokjeokdo(덕적도) Island, and Hwangsanwon(황산원) during the period of the Against Baekje(백제) War that began in 660. Movement route between Gyeongju and Icheon : Gyeongju(경주)-Daegu(대구)-Gumi(구미)-Gimcheon(김천)-Chupungryeong(추풍령)-Geumdol Fortress(금돌성)-Boeun(보은)-Jincheon(진천)-Juksan(죽산)-Bubal-eup(부발읍) Movement route between Bubal-eup and Deokjeokdo Island : Bubal-eup(부발읍)-Ipo(이포) Ferry-Haengju(행주) Ferry-Palmido (팔미도) Island-Seonjaedo(선재도) Island-Yeongheungdo(영흥도) Island-Pido(피도) Island-Soyado(소야도) Island-Deokjeokdo(덕적도) Island Movement route between Deokjeokdo Island and Hwangsan: Deokjeokdo(덕적도) Island-Danghangpo(당항포)-Jincheon(진천)-Boeun (보은)-Okcheon(옥천)-Geumsan(금산)-Tanhyeon(탄현)-Hwangsan (황산)-Ganggyeong(강경)-Buyeo(부여) 2. Movement of the combat units of the Silla army Jincheon area : 4,325 persons of the Geupdang unit(急幢) and 611 persons of the Kaegeumdang unit(罽衿幢) were deployed. These units moved from Jincheon to Cheongju, Yeongi, and Gongju, and contained Ungjin Fortress(熊津城) (6,650 Baekje troops). Boeun area : 4,763 persons of the Daedang(大唐) unit, 3,548 persons of the Hajujeong unit(下州停), 3,017 persons of the Namcheonjeong unit(南川停), and 4,500 persons of the Saseoldang unit(四設幢) were deployed. These units moved from Boeun(보은) to Okcheon(옥천), Geumsan(금산), Tanhyeon,(탄현) and Hwangsan(황산). Geumdol Fortress area : 3,753 persons of the Sangjujeong unit(上州停), 5,762 persons of the Seodang unit(誓幢), 3,753 persons of the Guidang unit(貴幢), and 5,562 persons of the Nangdang uni(郎幢)t were deployed. These units moved from Geumdol Fortress to Hwanggan(황간), Yeongdong(영동), Geumsan(금산), Tanhyeon(탄현), and Hwangsan(황산). Jirye area: 3,017 persons of the Eumrihwajeong unit(音里火停) and 3,017 persons of the Ehwahyejeong unit(伊火兮停) were deployed. These units moved from Jirye(지례) to Juchiryeong(走峙嶺), Mupung (무풍), Muju-eup(무주읍), and Bunam-myeon(부남면) in Muju-gun. Goryeong area: 3,017 persons of the Samryanghwajeong unit(三良火停) and 3,017 persons of the Sosamjeong unit(召參停) were deployed. These units moved from Goryeong(고령) to Geochang(거창), Hamyang(함양), Namwon(남원), Sunchang(순창), and Jeongeup(정읍). 3. Movement of the Tang army Dangjin area(당진 방면) : 1,000 persons were deployed. These units moved from Dangjin(당진) to Myeoncheon(면천), Yesan(예산), and Imjon Fortress(임존성). Garijeo area(가리저 방면) : 1,000 persons were deployed in the Garijeo(加里渚) area. These units moved from Garijeo(가리저) to Myeoncheon(면천), Yesan(예산), and Imjon Fortress(임존성). Geumganggu area(금강구 방면) : 000 persons were deployed. These units moved from Geumganggu(금강구) to Ganggyeong(강경) and Sabi Fortress(사비성). 4. Baekje military deployment Total troops of the Baekje army : There were 60 thousand Baekje troops according to the Old Book of Tang(舊唐書). Troop deployment by the Baekje army: 62,230 persons were deployed in 15 regions: 1,000 in Dangjin(당진), 1,000 in Garijeo(가리저), 6,120 in Imjon Fortress(임존성), 1,120 in Namjam Fortress(남잠성), 1,350 in Dooryangyun Fortress(두량윤성), 870 in Wangheungsajam Fortress(왕흥사잠성), 6,650 in Ungjin Fortress(웅진성), 1,120 in Jinhyeon Fortress(진현성), 1,000 in Dooshiwonak(두시원악), 1,000 in Irye Fortress(이례성), 5,000 in Gosaburi Fortress(고사부리성), 5,000 in Gujiha Fortress(구지하성), 3,000 plus 3,000 in Gibeolpo and Yangan(기벌포 양안), 5,000 in Deukan Fortress(득안성), and 20,000 in Sabi Fortress(사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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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왕릉의 조사와 정비 현황 검토 - 백제역사유적지구를 중심으로 - (The Status Review on Excavation and Maintenance of the Baekje Royal Tombs)

  • 김환희;이나은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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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4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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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60-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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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본고에서는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진행된 백제 왕릉(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부여 왕릉원, 익산 쌍릉)의 조사 현황을 종합·정리하고, 이러한 조사 내용들이 실제로 유적 정비에 반영되었는지 살펴보기 위해 정비 현황을 검토하였다. 먼저 백제 웅진~사비기 왕릉의 조사 내용을 시기별·유구별로 정리하고 조사 성과를 함께 살펴봄으로써 해당 왕릉들의 구조, 규모, 특징 등의 양상을 파악하였다. 특히 최근 몇 년간 진행되고 있는 재발굴 조사를 통해 일제강점기 조사 내용을 검증하고 보완하는 등의 추가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다음으로 정비 현황을 살펴보기에 앞서, 정비 기준을 정립하기 위하여 법령과 규정 등에서 명시한 정비 관련 내용을 발췌하였다. 주요 내용을 발췌한 결과 정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문화재의 진정성이 훼손되지 않는 '원형 유지'임을 확인하였다. 이에 따라 이러한 기준을 기반으로 정비 현황을 검토하였다. 고분이라는 유적의 특성상 매장 주체부가 지하에 위치해서 정비는 주로 상부 구조인 봉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다만 현재 봉분은 대부분 유실 또는 훼손되어서 원형이 어떠했는지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실제로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부여 왕릉원에서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지속적인 봉분의 규모 변화와 위치 이동 등이 확인되어 현재 정비된 모습이 문제를 가지고 있음을 파악하였다. 한편 쌍릉의 경우 봉분이 비교적 잘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기록상으로도 개변이 적은 편이어서 비교적 원형에 가깝게 정비가 이루어졌음을 파악하였다. 정리하면 향후 고분의 정비는 '원형 유지'를 기본으로 하되 조사·연구 결과를 충분히 반영하여 원형이 훼손되지 않는 범위에서 복원 여부 및 복원 정도를 결정한 뒤 '교육·활용'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동북아시아 고대 궁원과 왕도의 위치 관계에 대한 연구 (A Study on the Location Relationship between Ancient Royal Garden and Royal Capital in North-East Asia)

  • 전용호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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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0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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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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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동북아시아 고대 궁원은 왕도와 왕궁에서의 위치 관계에 따라 왕궁 내부의 북쪽, 왕궁 외부의 북쪽, 왕궁 내부나 외부의 남쪽에 위치하는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첫 번째는 전조후침(前朝後寢)의 중국 고대 궁실제도를 따른 전형적인 궁원이다. 두 번째는 왕궁과 독립적으로 위치하거나, 금원(禁苑)으로 확장되는 궁원이다. 세 번째는 왕궁의 남쪽에 위치하면서 유락(遊樂)이나 향연(饗宴)으로 특화한 궁원이다. 동북아시아 고대 궁원의 유형은 정궁(正宮)과 별궁(別宮) 혹은 이궁(離宮), 금원(禁苑)과의 관계에 따라 구분되고 각각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 번째는 익산 왕궁리 유적의 궁원을 비롯하여 한 장안성, 북위 낙양성과 남조 건강성, 당 대명궁 등에 이르기까지 정궁의 궁원으로 자리잡아왔다. 여기에서는 왕궁 안으로는 궁원이 내원(內苑)으로, 왕궁 밖으로 금원이 외원(外苑)으로 분리되어 있다. 반면에 두 번째는 궁원(宮苑)과 금원(禁苑)이 일체화되어 있다. 세 번째는 왕궁의 일부분을 구성하거나 왕도에서 정궁과 독립된 공간으로 별궁이나 이궁의 궁원으로 특화되어 왔다. 중국은 동북아시아 고대 궁원의 전형(典型)을 만들었으며, 이를 기초로 하여 한국의 백제와 신라, 일본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나름대로 독창성을 발휘하여 독특한 궁원을 발전시켜 나갔다. 백제왕도 익산의 궁원은 위진남북조시대의 궁원을, 사비도성의 궁원은 진·한대와 수·당대의 궁원을, 신라왕경의 궁원은 사비도성과 당의 궁원을, 일본 아스카~나라시대의 궁원은 백제와 신라의 궁원을 영향을 각각 받았다. 그렇지만 이들 궁원은 각각 나름대로 자신만의 독특한 궁원의 특징도 지니고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동북아시아 고대 궁원은 지역에 따라 계통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평양 안학궁은 궁원으로 보아서는 삼국시대부터 조영될 가능성이 높다. 다만 안학궁 하부의 유구 중복 관계나 유물로 보아 그 초축 시기는 5~6세기로 올려보기 어렵고 대체로 7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평양 안학궁의 궁원은 평양 장안성의 정궁에 대응하는 별궁 혹은 이궁의 궁원으로서 한국 통일신라시대 동궁과 월지나 일본 나라시대 평성궁 동원정원(東院庭園)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점으로 보아, 평성궁 동원정원(東院庭園)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궁원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본 연구는 동북아시아의 고대 왕도라는 큰 틀에서 궁원의 위치 관계로 그 특징과 변천을 중점적으로 다룬 연구로 적지 않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런 한계들을 조금씩 해결하여 나간다면, 동북아시아 고대 궁원에 대한 이해의 폭이 훨씬 넓어지리라 기대해 본다.

백제 사비기 목제유물의 수종 식별과 분석 (Species Identification of Ancient Wood Excavated from Capital Area in Sabi Era, Baekje)

  • 한상효;박원규
    • 보존과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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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권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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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7-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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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 This study was made to identify species of archaeological wood products excavated from three sites(Kwunbuk-ni, Gungnamgi, Wanggung-ni) of Sabi Era, Baekje. These sitesare presumably considered as capital areas of Sabi Era, Baekje. Total of 220 specimens were identified into five softwoods and eighteen hardwoods. Pinus densiflora(or Pinusthunbergii) and Quercus spp. are the most common and occupied 32%, 28% of totalspecimen, respectively. The others are follows : Torreya nucifera(1%), Abiesholophylla(3%), Cryptomeria japonica(4%), Thuja spp.(2%), Chamaecyparisobutusa(2%), Salix spp.(1%), Platycarya strobilacea (3%), Alnus spp.(1%), Carpinusspp.(0.5%), Castanea crenata(9%), Zelkova serrata (6%), Celtis spp.(0.5%), Prunusspp.(2%), Rhus verniciflua(1%), Rhus trichocarpa(0.5%), Meliosma oldhamii(1%),Hovenia dulcis(1%), Kalopanax pictus(0.5%), Cornus walteri(0.5%), Styrax japonica(1%),Fraxinus rhynchophylla (0.5%), F. sieboldiana(1%).Most of the identified species have been growing in this area until nowadays. However,a few species(Cryptomeria japonica, Thuja spp. Chamaecyparis obutusa, Torreyanucifera) didn’t grow natively around this area at that time. Two species(Cryptomeriajaponica, Chamaecyparis obutusa) are endemic species of Japan, indicating international trade or exchange of woods between Baekje Kingdom and Japan in 6-7th century. Torreyanucifera grows in limited areas in Korea (south of $35^{\circ}$10′N), however, is widely distributed in the southern Japan. Quercus spp. was identified the most in implements of Baekje and Pinus densiflora(orPinus thunbergii) was in the second place. Zelkova serrata was mainly used for raw materials of turnery products, e.g., wooden container. This species produces one of the hardest woods as 0.7 in specific gravity. It indicates that iron technologies have reached some high level in Sabi Era, Beak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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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百濟) 혼축기단(混築基壇)의 연구(硏究) (A Study on Mixed Construction of Platform of Baikje)

  • 조원창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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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5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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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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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Mixed construction of platform" means the platform which was constructed by mixing heterogeneous materials such as roof tiles or bricks with divided stone of trimmed stone. This kind of construction technique was not known or found from the building sites of Goguryo or Silla so far and therefore it used to be understood as a unique platform construction technique or the product of technology and creativeness of Baikje's craftsman. The mixed construction of platform of Baikje came to position itself as one of the patterns of platform mainly used over Sabi period and we found the pattern from the sites including Imryugak site in Gongju, temple for royal tomb in Gwanbuk-ri, Wangheungsa Temple site, building site in Keumseong Mountain, Ohapsa Temple site in Byryeong. From the fact that they used a variety of materials which they could easily get around them such as roof tiles or bricks in addition to stones for the construction of platforms, we can see the feasibility and decoration characteristics of their material supply at that time. On the other hand, this mixed construction of platform was not popular in Goguryo and Silla, the major reason for which is judged to be non-existence of platforms to construct using bricks or roof tiles which could be constructed together with platform using divided stones. This is supported by the results of excavation of Hwangryongsa Temple site, Bunhwangsa Temple site, Heungryunsa Temple site of Silla which gave us comparatively abundant excavation data, and Jeongreungsa Temple site, Cheongamsa Temple site, Toseongrisa Temple site and building site in Daeseong Mountain castle and Anhak Palace site of Goguryo. For further progressive study on the mixed construction of platform of Baikje in the future, we will have to review more on the social background and technical background with the linkage with archeology and architecture at that time which led to the creation of such platfo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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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응평리 출토 백제 사비기 인골 보존처리 및 과학적 분석 (Conservation and Scientific Analysis of Human Bone Excavated in Sabi Period of Baekje from Eungpyeong-ri, Buyeo)

  • 김미정;이윤섭;조은민;박수진;문민성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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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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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05-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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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부여 응평리 석실묘는 두 개체를 합장한 형태로 피장자 간의 상관관계 및 석실묘의 성격에 대해 조사하였다. 부여 응평리 석실묘는 지리적 입지·공반유물·출토인골을 통해 백제 사비기에 위계가 있는 도성민 혹은 지방관료로 추정할수 있었다. 본 연구는 인골 특성에 적합한 수습 및 보존처리와 함께 과학적 분석을 수행한 결과이다. 현장에서 출토되는 인골 수습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은 과학적 분석용 시료를 제외한 잔존 뼈들에 대한 강화제의 종류와 농도이다. 부여 응평리 인골의 경우 paraloid B-72를 사용하였으며 현장에서 강화 처리 시 사용했던 약품을 동일하게 사용하여 표면의 이물질 제거·강화·접합 등 최소한의 보존처리를 수행하였다. 토양의 영향으로 인골의 외부 형태 식별이 어려운 경우 X-ray와 CT촬영 자료를 활용하였다. 안정동위원소와 DNA분석을 수행하기 앞서 근적외선 분석을 진행하였으며 그 결과를 토대로 시료 채취 부위를 선정하였다. 인골의 콜라겐을 이용하는 탄소·질소 안정동위원소 분석의 경우 콜라겐의 수율이 3.8~6.1%로 나타났으며 안정동위원소비는 EBW, EBE 개체 각각 δ13C -18.3‰±0.1‰, -19.0‰±0.1‰이고, δ15N 10.7‰±0.5‰, 10.6‰±0.1‰로 확인되었다. 두 개체는 C3 식물을 위주로 약간의 잡곡류를 함께 섭취했고, 단백질은 육상 동물로부터 공급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두 개체의 데이터 편차가 근소하여 유사한 식이를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DNA 분석의 경우 증폭이 불가능하여 결과를 얻기 어려웠으며 이는 시료의 보존상태 등을 연관 지어 보았을 때 DNA가 극미량으로 잔존하여 증폭에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부여 응평리 유적 석실묘에서 출토된 인골의 경우 안정동위원소분석 및 DNA 분석과 근적외선 분석의 연관성은 도출하기 어려웠으며 뼈의 보존상태 평가를 위한 추가 분석이 필요할 것으로 사료된다.

석실로 본 나주 복암리 세력과 주변 지역의 동향 (The Character of Bogamni group and trends in the surrounding area seen through the stone chamber)

  • 김낙중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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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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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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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이글에서는 최근에 영산강유역권 및 서남해 도서에서 발굴조사된 횡혈식석실을 나주 복암리 고분군의 석실과 비교하여 영산강유역 중핵지역의 유력세력인 복암리 집단의 성격과 영산강유역권의 동향을 살펴보았다. 복암리 고분군에 처음 축조된 석실은 북부규슈계(北部九州系)의 영산강유형 석실이다. 그런데 최근 조사가 진전되면서 그러한 석실의 조영에 이어지는 흐름이 이미 서남해안의 연앙항로를 따라 5세기 전 중엽에 축조된 왜계 고분에서부터 보이고 있다. 즉, 백제와 왜의 통교 이후 서남해안을 통한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연안항로의 중요성과 관련하여 섬이나 해안가에 왜계 수혈식 고분이 축조되었다. 처음에는 부장품도 왜계 일색이었으나 점차 그런 고분이 축조된 지역 내에 현지의 묘 장제 요소가 가미된 고총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당시 내해에 해당하는 영산강 하구의 바닷가에 위치한 영암 옥야리 장동 1호분이다. 그런데 이와 흡사한 매장시설을 사용한 고분이 5세기 중엽경에 나주 복암리 고분군과 인접한 곳에 축조되었다. 나주 가흥리 신흥 고분이 그것인데 이 고분의 축조에 복암리 집단이 직접적으로 관여하였는지는 밝히기 어려우나 지리적인 인접성이나 동일한 원통형토기편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신흥 고분은 영산강 본류 가까운 저평구릉의 말단이나 섬에 위치하여 5세기 전 중엽 서남해안 일대에 축조된 왜계 고분과 유사한 배경, 즉 해로 혹은 수로의 이용이나 장악과 관련하여 입지가 선정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그런데 다음 단계에는 복암리 고분군과 동일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생각되는 정촌 고분에서 영산강유형 석실이 매장시설로 사용되어 이러한 내륙수로 이용의 주도권이 복암리 집단으로 넘어갔을 것으로 여겨진다. 정촌 고분의 축조는 복암리 집단의 급격한 성장의 배경을 보여준다. 이후 복암리 집단은 복암리 3호분 '96석실을 시작으로 7세기까지 고분군을 지속적으로 조영하여 영산강유역에서 주도적인 세력으로 번성하였다. 사비기에 백제의 직접적인 지배 아래 들어간 이후에도 왜와의 밀접한 관계를 지속하며 영산강유역은 물론 서남해 항로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신안의 여러 섬들에서 발견된 복암리유형 석실을 통해 추정할 수 있다.

한국남부지역 판축토성의 연구 (A Study on the Earth Wall, of The South Korea Area)

  • 고룡규
    • 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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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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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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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
  • 본 논문은 한국 남부지역에서 조사된 판축토성에 대하여 살펴본 것이다. 남한지역에서는 성곽조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980년대이래 지금까지 20여개소에 이르는 판축토성이 조사되었다. 판축토성들은 입지면에서 대부분은 평지나 구릉성 야산에 분포하고 있다. 규모면에서는 일부 소형급도 있지만 백제의 경우는 도성이나 거점지역의 토성 축조에 주로 이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행정적인 치소로서의 기능에 더 비중이 두어졌다고 보여진다. 판축토성은 성벽, 건물 기초부, 흙담장 등을 조성할 때 틀을 만들고 그 만에 흙을 채워 넣고 나무나 돌로 만든 달고(符)로 다져서 축조한 토성들 말한다. 이러한 판축토성은 비단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 등 동양 삼국을 분포권으로 하고 있으며, 판축기법에 관한 문헌도 각각의 나라에 전해오고 있다. 판축토성을 석열의 유무와 목주간격을 기준으로 2개 유형으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판축토성에서 출토되는 유물을 대상으로 축조시기와 구조의 변화를 검토하였다. I 유형은 순수 판축기법만으로 토루를 축조한 것으로서 목주간격은 100$\~$150cm가 보편적이다. 성벽은 먼저 중심토루를 축조한 후 그 안팎으로 준판축의 외피토루가 덧붙여지는 2차 공정으로 완성된다. 초기 판축의 경우는 대체로 판축의 켜는 두터운 편이며, 성벽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벽 안쪽에 구가 설치된다. 백제지역의 경우 기원 후 3세기경부터 7세기까지의 인대 폭을 가지는 것으로 밝혀졌다. 한강유역의 풍납동토성과 몽촌토성에서는 성벽의 폭이 매우 넓고, 목책의 사용과 판축용 구조물이 발견되지 않는 점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신라지역의 순지리토성의 경우도 판축토성 축조 이전 시기의 목책을 이용하여 판축하고 있다. 풍납토성에서는 성벽 보호를 위해 안쪽에 구를 설치하고, 성벽의 상면에는 인위적으로 돌을 깔아 빗물 등에 의한 성벽의 유실을 방지하고 있다. 따라서 판축토성의 구조는 아직까지 정형성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비하여 남한강상류의 정북동토성과 망이산성에서는 목주와 판목 등 판축용 구조물에 의해 거푸집을 만들어 축조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리고 한강유역의 판축토성에 비하여 성벽의 폭이 좁아지는 현상이 나타나는 점으로 미루어 점차 구조상 정형성을 띠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종장목과 횡장목의 흔적이 보이지 않으며, 성벽보호를 위하여 성벽 안쪽에 구와 배수 및 보도기능을 겸한 부석시설이 설치된다. 6세기 중$\cdot$후반의 백석동토성과 부소산성 포곡식 성벽에서는 목주, 판목, 횡장목, 종장목 등 완전한 판축용 구조물이 조사되었다. 성벽은 I 유형에 이어서 중심토루와 외피판축의 2차 공정에 의해 완성되며 판축의 켜가 매우 정교해진다. 목주와 판목은 위로 끌어올려 재사용되지만, 횡장목과 종장목은 판축토내에 희생목으로 남아있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성벽보호를 위하여 성벽 안쪽에 구와 배수 및 보도기능을 겸한 부석시설도 계속해서 설치된다. II 유형은 기저부의 한쪽 또는 양면에 석열을 배치한 후 판축한 형식으로 점차 석재의 의존도가 높아진다. 7세기의 삼국시대 말에서 9세기대의 통일신라시대까지의 연대 폭을 갖는다. 기저부 한쪽에 석열을 배치하는 II a식(7세기$\~$9세기)과 양면에 석열을 배치하는 II b식(9세기 초반이후)로 나누어진다. 성벽은 기저부 석열과 목주, 그리고 이 목주 안쪽에 판목을 청으로 막아 그 내부에 흙으로 판축하였는데 I 유형에 비해 판축의 켜는 상대적으로 두터워진다. 사비기의 I 유형에서 나타나는 횡장목이나 종장목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목주간격은 300cm이상으로 넓어지며, 목주를 기준으로 좌우의 토질이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목주간의 간격이 구간별 판축공사의 단위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I 유형에 비해 성벽의 폭은 좁아지는 반면에 단위당 축조 길이는 길어진다. 따라서 우리나라 고대토성의 축조기법은 초기의 순수판축에서 점차 판축용 구조물과 기초부에 석열을 배치하는 방법이 도입되어 정형성을 갖추어 갔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구조상의 변화는 보다 효율적으로 토성을 축조하는 동시에 성벽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축조 기술상의 발전을 의미한다고 본다. 이러한 판축토성의 전통은 부소산성의 테뫼식 판축토성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조선초기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 구조는 성토타짐 정도에 불과하여 이전 시기의 정교한 판축토성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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