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민간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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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애니;이연희
    • 복식문화학회:학술대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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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식문화학회 2004년도 정기총회 및 춘계학술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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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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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 현대의 시대가 산업화되고 문명화되어가고 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확실성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을 가지고 살아가며 현세의 안위를 걱정한다 이러한 현상은 종교에 대한 관심의 증가와 건강에 대한 지나친 걱정, 지구의 종말론을 논하는 등의 여러 분야에서 나타난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며 매스컴에서 끊임없이 보도되고 있는 현대 사회의 미신과 민간 신앙에서도 알 수 있다. 미신과 민간신앙은 민족의 고유한 전통이며 또 하나의 종교이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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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마을 공동체 신앙의 공간적 해석 - 전통 문화마을 장흥군 방촌을 사례로 - (Spatial Analysis of Communal Folk Belief in Traditional Village - A Case Study on Bangchon Traditional Village -)

  • 박의준;이정록;천득염
    • 대한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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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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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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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2
  • 인간에 의해 형성된 공동체와 그 공동체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독특한 신앙체계는 인간이 특정 지역을 점유하고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발현된 하나의 공간적 행태라고 정리할 수 있다. 따라서 민간신앙의 하나인 공동체 신앙은 마을이라는 공간을 점유하고 발현되었다는 점에서 전통 사회 마을 구성원의 공간인식을 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우리나라 전통마을에 나타나는 공동체 신앙의 특성을 공간적 관c점에서 해석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설정하였으며, 연구지역으로는 전통문화마을로 지정된 전라남도 장흥군 방촌마을을 사례로 하였다. 본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연구지역인 방촌마을은 내동, 계춘, 탑동, 호동. 호산, 산저, 신기의 7개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마을의 입지과정은 고려시대 이후 시공간적으로 차별성을 가지고 진행되어 왔다. 둘째, 방촌마을의 공동체 신앙은 크게 7개의 입석과 돌장승, 별신제터와 허제비골로 구분할 수 있다. 셋째. 방촌마을 공동체 신앙은 크게 마을과 마을의 경계 표시, 마을의 존재를 외부에 알리는 기능, 마을의 중심공간 표시, 마을의 입구와 외곽 경계 표시라는 공간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전통마을에 나타나는 공동체 신앙은 민속학적인 측면에서 해석하는 신앙과 상징이라는 의미 이외에. 과거 전통사회 자연마을의 공간구조를 파악하게 해주는 지시자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 민간도교의 발현과 전개 - 조선후기 관제신앙, 선음즐교, 무상단 - (Expression and Deployment of Folk Taoism(民間道敎) in the late of Chosŏn Dynasty)

  • 김윤경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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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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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09-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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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본 연구는 조선후기 민간도교가 어떠한 형태로 존재해 왔는가를 고찰하고, 민간도교의 근간을 이루는 사상적 측면의 내용과 특징에 대해 논구하려는 것이다. 조선 후기 관제신앙이 관우를 중심으로 하는 민간신앙이라면, 선음즐교(묘련사)와 무상단은 조직을 갖춘 종교결사이다. 선음즐교(묘련사(妙蓮社))의 경우 '선음즐(善陰?)'은 "서경(書經) 주서(周書)"의 홍범전(洪範傳)에서 유래한 유학의 천관을 담고 있지만 수행의 방법으로는 보살성호(예-관세음보살)를 주문으로 수행하고, 신앙의 대상은 삼성(三聖)(관제, 문창, 부우)이다. 이러한 점은 조선 후기 민간도교의 삼교합일적 현상을 보여준다. 임란 이후 왕실의 주도로 국가적 차원에서 시작되었던 관제신앙은 민간에서 확고히 자리 잡게 된다. 조선 후기 관제(關帝)는 충과 효의 화신이면서 유 불 도의 삼교 교권을 집장하며, 생사 죄과 명운을 관장하는 신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신의 위력과 가피력이 민간에 경전으로 유포되면서 관제신앙은 벽사와 구복의 대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선음즐교 '묘련사'는 명청대 '백련사(白蓮社)'를 모방한 종교결사이다. 선음즐교는 염불을 통한 신과의 '감응(感應)'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종교적 엑시터시(ecstasy)의 상태에서의 강필(降筆)을 비난(飛鸞)으로 표현하였다. 비난(飛鸞)이란 부난(扶鸞) 부계(扶?)라고도 하는데, 종교결사에서 경전을 만드는 방법으로, 신과의 합일 상태에서의 강필을 의미한다. 선음즐교는 부주수행을 통해 신과의 합일 상태를 추구하였으며, 신과의 합일 상태에서 강필한 경전을 교단의 중심 교리로 삼았다. 선음즐교의 난서 "제중감로(濟衆甘露)"의 서문을 장식한 여순양이 강림한 곳이 '무상단(無相壇)'이다. 무상단은 서정(徐珽), 정학구(丁鶴九), 유운(劉雲), 최성환(崔?煥)이 주축이 된 독립된 교파로 관성제군, 문창제군, 부우제군의 삼성제군(三聖帝君)을 숭배하면서 난서(鸞書)와 선서(善書)를 편찬하고 간행 보급하였다. 조선후기 민간도교 경전은 크게는 난서(鸞書)와 선서(善書)로 구분할 수 있다. 난서(鸞書)는 비난시(飛鸞時)의 관성제군 문창제군 부우제군 강필서이고, 선서(善書)는 "태상감응편"과 "공과격" 같은 선행의 표준을 보여주고 권면하기 위한 책이다. 조선 후기 민간도교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정치적 이유로 지어진 관묘가 조선 후기 민간도교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관제신앙은 구복과 벽사의 대상으로 민간에 널리 확산되었다. 둘째 조선 후기에는 묘련사와 무상단이라는 구체적인 민간도교단체가 등장했다. 이들은 '감응'을 통한 영성(靈性)의 고양을 통해 신과의 합일을 추구한 난단도교(鸞壇道敎)였다. 셋째 조선의 민간도교는 청대 민간도교의 유불도 합일과 종교결사의 조직형태 난단도교 등의 영향을 받았다. 넷째 조선의 민간도교 경전은 난서(鸞書)와 선서(善書)로 구분되는데, 조선에서 직접 만들어진 난서(鸞書)는 민간도교의 특징을 밝혀줄 열쇠가 되리라고 기대한다.

민간신앙(民間信仰)을 중심(中心)으로 한 지리산(智異山) 화엄사(華嚴寺) 가람(伽藍)의 조영사상(造營思想)에 관한 연구(硏究) (A study on the Organizing Principle of Hwaeomsa Temple in Ghiri Mountain Focused on the Folk Beliefs)

  • 이동영;최효승
    • 한국농촌건축학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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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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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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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
  • In the organizing principle of Hwaeomsa temple, we could see the procedure of absorption and combination on folk beliefs and Buddhism like other temples. One of Representative folk beliefs took in and combined in its temple is Sam-Sung-Gak, which is located at the same place with Won-Tong-Geon. And Myong-Bu-Geon is affected by the Ten-Kings belief of Taoism very deeply, is also very rare folk belief case grown naturally. The diversification of Buddhist sanctum' function is absorption and combination between proper belief for the Buddhist Goddess of Mercy and folk native belief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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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일기』에 나타난 국가의례와 민간신앙 일고찰 (Consideration on National Rituals and Folk Beliefs Found in 『Hajaeilgi』)

  • 송재용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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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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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49-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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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사옹원(司饔院) 분원(分院)의 공인(貢人)이었던 지규식이 1891년 1월 1일부터 1911년 윤6월 29일까지 20년 7개월에 걸쳐 거의 매일 쓴 "하재일기"에는 보고 들은 국내외 정세와 풍속, 의례, 분원 관련 각종 제반사항, 일상생활사 등을 다방면에 걸쳐 다양하게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필자가 여기서 주목한 것은 "하재일기"에 기록된 민속 관련 내용이다. 지규식은 양반이 아닌 신분으로 당시 실제로 행했던 세시풍속 민속놀이 의례 민간신앙 등 민속 관련 내용을 "하재일기"에 기록으로 남겼다. 이러한 일기는 드물 뿐만 아니라 자료적으로도 그 가치가 매우 높이 평가되며, 민속학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필자는 "하재일기"에 나타난 민속을 연구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국가의례와 민간신앙에 초점을 맞추었다. 앞에서 논의된 사항들을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국가의례의 경우, 가례(嘉禮)는 황제의 즉위기념일과 황제 황태자 탄신기념일 관련 기록만 전하고 있어 아쉬움이 남지만, 국가적인 기념식과 경축식행사를 백성들이 충실하게 실행하였는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특히 이러한 국가적인 기념식과 경축식행사 때 학생들에게 애국가를 제창케 했다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 흉례(凶禮)는 궁중상례 관련 내용만 전하고 있는데, 민비의 상례를 제외하고는 궁중 상례를 종전처럼 절차에 의해 제때 제대로 치루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정부의 명에 따라 이를 잘 실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일본인들이 민비를 살해하고 석유를 뿌려 시신을 불태워 재로 된 것을 버려둔 채 간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민간신앙의 경우, 분원에서 정기적으로 동리의 신사를 지냈고, 동리에서도 매년 고청신사를 지냈는데, 제사비용은 마을 사람들의 경제적 사정에 따라 차등적으로 배분해 추렴하고, 마을 사람들 모두 힘을 합쳐 제수를 준비하고 제사를 지냈다. 제사는 산신당과 부군당에도 지냈으며,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 것이 통례였다. 이는 자료적으로 가치가 있다. 그런데 지규식은 기독교인이 된 후, 회사에서 지내는 신사 제사를 폐지하려 한 적이 있을 뿐 아니라 새신(賽神), 즉 굿이나 푸닥거리하는 것도 없애려 했지만, 전례대로 어쩔 수 없이 따랐다. 한편, 지규식은 마을에 홍수가 나고 전염병이 퍼지자 마을의 안녕과 건강을 위해 자기 집 앞에 제단을 설치하고 희생과 술 등 제수를 갖추어 마을사람들과 함께 황천후토(皇天后土)에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이 있는바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지규식은 집안에 우환이 있을 경우, 무당을 불러 굿을 하거나 산신에게 치성을 드리는 등 이러한 무속이나, 주로 정초에 관성제군(關聖帝君)을 참배하고 한 해의 운수를 점쳤던 것들은 모두 민간신앙으로서 당시 민간에 널리 퍼져 있었을 뿐 아니라, 그의 생활 속에도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지규식의 풍수신앙 선호도 당대인들의 일반적인 인식태도와 다르지 않다고 여겨진다. 이상에서 보듯, "하재일기"에 나타난 국가의례와 민간신앙 관련 내용은 자료적으로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민속 연구의 일환으로도 의미가 있으며, 민속학적으로도 나름대로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한국의 뇌신(雷神) 신앙과 술법의 역사적 양상과 민족종교적 의미 (The Historical Development of Beliefs in the Thunder God and their Magico-ritual Techniques as Viewed from the Perspective of Korean National Religious History)

  • 박종천
    • 대순사상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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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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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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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이 글은 한국에서 뇌신 신앙과 술법이 전개된 역사적 양상과 특징에 대한 종교사적 연구로서, 역동적 종교문화의 이해를 위해 뇌신 신화를 통해 정치 권력을 초월적으로 정당화하거나 백성의 민생을 의례적으로 주관하는 국가권력 혹은 관방도교의 종교적 관심, 무교나 도교와 연관된 민간신앙 혹은 민족종교의 가능성 및 가뭄, 전쟁, 질병 등의 위기 혹은 문제상황에서 뇌신이 호출되고 신앙되는 다양한 종교적 관심의 유형을 파악하여 설명했다. 고조선을 비롯한 고대 국가의 신화에서 뇌신은 삼계를 다스리는 하늘의 지고한 주재자로 등장하고 지신 혹은 수신과 결합하는 신성혼을 통해 지상의 권력을 정당화했으며, 뇌신과 연관된 태일은 주변화되어 민간 도교 속에서 원시부려천존,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 옥황상제 등의 종교적 상상력의 근간이 되었다. 고려부터 조선 중기까지는 도교적 재초와 농경사회의 기우제를 해결하는 의례적 차원에서 뇌성보화천존이 국가적으로 주목받았으나, 조선 전기에는 선사시대의 돌도끼가 뇌신의 벼락 도끼인 뇌부로 인식되면서 다양한 병 치료에 효험이 있다는 신앙이 전개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뇌신이 전쟁 극복과 치병을 위한 존재로 부각되었는데, 전쟁 극복을 위한 다양한 도교 술법이 수용되기도 했고, 칠성검이나 사인검 등의 도검이 애호되었으며, 민간에서는 『옥추경』을 활용한 앉은 굿을 통해 면면히 영향력을 유지했다. 대순진리회를 비롯한 근대 민족종교에서는 후천개벽과 해원상생의 관점에서 뇌신의 위상이 초월적 주재자로서 조명되는 민간종교 혹은 민족 종교로서 새롭게 재전유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며느리-단혈형 부자 패가敗家 설화'에 나타난 한국인의 민간신앙의 한 단면 (Koreans' Folk Religions Concealed in a Oral Literary Tradition of "The story of ruining one's family by Daughter-in-law's Cutting-Condemnation(斷血)")

  • 서신혜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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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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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5-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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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이 글은 '며느리-단혈형 부자 패가 설화'를 통해서 한국인의 민간신앙을 살핀 것이다. 며느리-단혈 부자 패가 설화는 부잣집에 손님이 많아 괴로워하던 며느리가 시주승에게 물어서 그의 지시대로 어떤 사물을 끊었더니 손님도 끊기고 그 집도 망했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한 가문이 갑자기 망한 원인을 며느리의 탓으로 돌리는 젠더적 면이 있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며느리의 악행을 부각시키지 않고 그 고생에 대한 이해를 강조하였으므로 비윤리적인 행위와 그에 따른 징치(懲治)로 집안이 망한 것으로만 보기 어렵다. 이 이야기에는 '사물이 끊긴 것-손님이 끊긴 것-집이 망한 것'을 하나로 보는 인식이 드러난다. 인간사와 자연의 연계에 대한 인식은 결국 인간과 신령간의 흐름을 원활하게 해서 서로 잘 교류하고 소통할 때 만사가 잘 된다는 민간의 신앙을 드러낸 것이다. 또 어쩔 수 없는 인간사의 흥망을 천의(天意)로 보고 따르는 의미도 읽힌다. 요컨대 이 글을 통해 필자는 '며느리-단혈형 부자 패가 설화'에 내재되어 있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천의의 관계망을 살폈고, 그것을 민간신앙의 면에서 풀어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