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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동사리사지(東寺里寺址) 오층석탑 건립 연대 고찰 (A Study on the Construction Date of the Five-story Stone Pagoda at the Dongsa-ri Temple Site in Buyeo)

  • 강삼혜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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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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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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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부여 동사리사지 오층석탑은 수도 개성 양식 계열의 남방한계선을 점하는 중요한 위치에 건립된 고려 전기 탑이다. 갑석 받침인 부연의 사선형 곡면 처리 등에서는 고려 개경 중심의 탑에서 보이는 고려중앙 양식의 특징을 잘 살펴볼 수 있었으며, 11세기 석탑과 양식을 공유하는 특징들도 뚜렷하게 관찰되었다. 하층기단의 안상문에서는 고려 1028년(현종 19)에 대대적으로 중수된 것으로 추정되는 부여 정림사지에 있는 석불좌상 대좌와, 천안의 천흥사지 당간지주에서 동일한 문양과 치석 수법이 조사되어, 동사리사지 오층석탑 건립 연대를 11세기로 추정했다. 부여 동사리사지는 금강 인근에 위치해 고려의 조운제도상 중요한 교통로이며, 고려 왕실의 원찰인개태사로 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어 고려 현종대(1009~1031) 부여 정림사지가 크게 중수되고 동사리사지도 주요 거점으로 부각되면서 석탑이 조성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동사리사지 석탑은 1021년(현종 12) 천안의 홍경사와 홍경원의 창건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인근의 천흥사지 석탑 및 당간지주와도 양식을 공유하고 있어 이를 통해 개경 양식의 유입 루트도 살펴볼 수 있었다. 부여 동사리사지 오층석탑은 고려 11세기 문화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이 지역의 또 하나의 석조미술품이다. 수도 개경의 거대한 현화사 석등과 석탑과 비견되는 고려 초 논산 개태사나 관촉사, 부여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등의 거불(巨佛)과 함께 이 석탑 역시 고려 특유의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미감을 보이고 있다. 11세기 활발한 지역간 문화교류의 배경 아래 부여 동사리 지역은 고려 개경의 불교문화 영향권 아래 완숙한 문화 역량을 총 발휘해 경쾌하고 날렵하며, 엄정하면서도 세련된 이러한 석탑을 탄생하게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풍수 형기론(形氣論)으로 본 대순진리회 금강산토성수련도장 (Daesoon Jinrihoe's Geumgangsan Toseong Training Temple Complex as Appraised through the Hyeonggi Theory in Fengshui)

  • 신영대
    • 대순사상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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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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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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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본 논문은 대순진리회 금강산토성도장을 풍수학의 형기학적인 관점에서 전반적인 풍수의 국세와 특징들을 밝히고자 하였다. 겉으로 드러난 산의 형세를 보고, 그 안에 흐르는 기의 세력을 살펴 산천에서 발생하는 기운의 강약과 후박 등을 통해 생기의 흐름을 파악하고 그에 따른 길흉을 살펴보았다. 이곳은 특히 "일만 이천의 도통군자로 창성하리라"라는 상제님의 말씀이 서려있는 곳이며, 미륵불과 도전님의 능소가 있다는 점에서 수도를 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의미 있는 도장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관련하여 풍수론에 부합한 금강산토성수련도장의 풍수적 상징성과 생왕지지에 대해 탐색하고, 그에 따른 지세와 형국, 동해의 맑은 수기가 어울린 용맥과 지맥, 금강산의 산세, 대순진리회 금강산토성수련도장의 풍수적 입지와 지세, 지맥 등을 탐색하고자 하였다. 백두대간은 금강산을 거쳐 신선봉으로 이어지고 그 중 한 줄기는 금강산토성수련도장으로 이어졌고, 다른 한 줄기는 상봉을 거쳐 미시령과 설악산으로 이어져 내려간다. 따라서 대순진리회의 여러 도장들 가운데 금강산토성수련도장을 형기풍수론을 토대로 살펴봄으로써, 대순진리회가 종교 건축물의 입지조건으로서 주위 환경과의 관계를 강력히 고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풍수지리 제반 이론들을 토대로 학술적 접근을 통해 그 본의를 논증하고자 하였다. 동시에 금강산토성수련도장이 자리하고 있는 현장을 중심으로 산과 물의 흐름을 파악하고 주변의 지세가 어떤 형태로 풍수의 이치에 부합하고 있는지 전반적으로 살펴보았다. 제반 풍수이론에 근거하여 볼 때 금강산토성수련도장은 신선봉을 필두로 하여 주맥이 행도 과정에서 산줄기가 흘러내리면 물이 따라 흐르고, 물이 휘돌아 흐르는 곳에 산이 따라 이어지는 수많은 지리적 음양변화를 거치며 금강산토성수련도장으로 이어져 내렸다. 자연의 이치라 할 수 있는 산과 물의 유기적인 관계로 볼 때 때 금강산토성수련도장의 가장 두드러진 풍수적 특징은 음양합덕에 부합한 빼어난 수세와 청룡과 백호가 조화를 이룬 국세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풍수이론에 부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순사상의 영성인본주의 비교연구 (A Comparative Study on Spiritual Humanism in Daesoon Thought)

  • 김용환
    • 대순사상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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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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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1-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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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본 연구는 비교종교학 방법과 대순사상에 관한 문헌학적 방법을 활용하여 대순사상의 영성인본주의를 규명한 글이다. 비교종교 분석은 역사현장에서 드러난 종교의 다양함을 연구대상으로 하기에 종교본질이라는 선험적 틀을 전제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회과학처럼 심리현상이나 사회현상으로 분해하고 환원시키지도 아니한다. 오늘날 종교다원주의 출현으로 종교 간의 유사성에 집중하는 풍토가 기정사실화 되었다. 아울러 현대영성으로 많은 영성운동들이 특정종교 제약을 받지 않고 혼합주의 성격을 드러내고 있음도 뚜렷한 변화양상이다. 세속적 인본주의에서도 도구화를 극복하고 본래적 초월성을 회복할 때가 도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대순사상의 후천개벽과 관련하여 현대문명의 병폐와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인식지평으로 다가온다. 실제적으로 문명파괴의 악행주범은 도구화되거나 변질된 이성의 영역이다. 이에 이성너머 영성회통의 가능성에 대한 탐구가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다. 종교는 인류의 지성결정체로서 인간완성과 구원에 목적을 둔다. 그런데 선천의 절대자 인식이 종교 간의 갈등을 증폭시키고 각각의 색다른 경험을 통해 그 지역에 부합한 사상을 형성하게 됨으로 정신사적 균열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선천시기에는 종교마다 대립하고 투쟁하였지만 종교다원주의 시대에 진입하면서 영성회통의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이에 비교종교학 방법과 문헌해석학 방법을 병행하여 대순사상의 영성인본주의 비전을 탐색함으로써 영성구현이 인간존엄과 공공행복의 계기임을 밝히고자 한다. 또한 인간적인 삶으로 영성을 모색하고 참 인간으로 사는 길에서 상호 인간존중이 이루어지는 영성인본주의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본 연구를 통해 논의하려는 영성인본주의는 수도양생 신선사상과 도통진경 대순사상의 영성회통, 사인여천 동학사상과 인간존엄 대순사상의 영성회통, 그리고 발고여락 미륵사상과 해원상생 대순사상의 영성회통을 상호 대비함으로써 우주신인론의 영성전망을 상관연동으로 밝히고자 한다.

북한산 이계구곡(耳溪九曲)의 위치비정과 집경(集景) 특성 (Studies on the Assumption of the Locations and Formational Characteristics in Yigye-gugok, Mt. Bukhansan)

  • 정우진;노재현;이희영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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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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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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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본 연구는 이계 홍양호가 설정하고 그의 손자 관암 홍경모가 경영한 이계구곡의 향유거점을 문헌 및 현지조사를 통해 실증적으로 추적하는 한편, 구곡의 형식 및 집경방식에 나타난 특징을 검토하는 것이다.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우이동은 조선시대에 도성의 영역에 속한 땅이자 지금도 행적구역상 서울특별시에 속한 곳이다. 따라서 이계구곡은 예나 지금에나 수도에 있는 유일한 구곡이었다는 특별한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이계구곡은 우이천 상류의 만경폭을 제1곡으로 시작하여 계곡을 따라 내려오며 제2곡 적취병, 제3곡 찬운봉, 제4곡 진의강, 제5곡 옥경대, 제6곡 월영담, 제7곡 탁영암, 제8곡 명옥탄, 제9곡 재간정으로 구성된다. 이중에서 만경폭, 찬운봉, 옥경대는 그 위치를 확정할 수 있을 정도로 특징적인 경물상이 명확히 드러나 있었으며, 진의강, 월영담, 명옥탄, 재간정 터는 구곡기의 묘사와 현지의 지표상황을 통해 유력한 추정지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적취병, 탁영암의 경우 비근한 영역 내에 기문의 내용과 유사한 복수의 지점들이 나타났는데, 지형 경관 경물의 현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제1의 추정지를 판단하였다. 이로서 1곡에서 9곡까지 총거리 2.1km의 선적 경로와 구조를 파악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점은 구곡이 5리(약 1.96km)에 지나지 않는다는 관암의 설명과도 근사하다. 2. 18세기 말에 설정된 이계구곡은 홍양호가 우이동을 풍산 홍씨의 소유로 귀속시킨 뒤 선영의 묘소가 있는 터전을 가문의 공간으로 만드는 일련의 작업에서 비롯되었다. 이계구곡은 구곡이 상류에서부터 하류방향으로 전개된다는 점과, 거점지가 8곡에 위치하는 등 구곡의 일반적인 형식과 적지 않은 차이점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는 가문의 영역을 우이동 초입에 위치한 타 가문의 세력권과 분리시켜 우이동을 점유하려는 원심적 구성으로 해석되지만, 한편으로 우이동을 대표하는 경물인 미륵폭포[만경폭]부터 계곡의 주요 승경에 곡의 순서를 정하고 8곡에 위치한 자신의 거처를 사실상 구곡의 지향점으로 삼는 구심적 공간 만들기의 결과로도 판단된다. 3. 이계구곡에는 여타의 구곡에 비해 설정자와 경영자가 남긴 기문과 시문이 다량 제작된 반면, 구곡도, 각자 등 동반되는 시각적 매체가 전무하다. 그러나 관암의 문집에 수록된 "이계구곡대자첩(耳溪九曲大字帖) 발미(跋尾)"에는 각자를 새기려고 했던 시도가 있었음이 나타나 있다. 본 연구는 송시열 글씨로 알려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미공개 필첩이 홍양호의 구곡명 유묵을 성첩한 "이계구곡대자첩" 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창산 김정기의 유적조사와 한국고고학 (Excavation of Kim Jeong-gi and Korean Archeology)

  • 이주헌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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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0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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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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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창산 김정기(昌山 金正基, 1930.3.3~2015.8.26)는 우리나라 문화재 발굴사에 있어서 큰 획을 그으신 분이다. 1959년 국립박물관 직원으로 문화재와 인연을 맺으신 이후, 1987년 문화재연구소를 퇴직할 때까지 약 3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유적과 유물을 발굴하고 자료를 정리하며 2015년 영면하기 전까지 대학과 발굴 전문기관에서 우리 문화재의 가치와 의미를 밝히려고 노력하였다. 창산은 국내의 기념비적인 고고학 발굴조사를 모두 진두지휘하고 초창기 한국 고고학을 대표하는 학자로 국내외에 알려져 있으며, 한국 고고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남겼다. 그의 활동과 역할은 고고학사적으로 의미가 있으나 나름의 한계 또한 찾아 볼 수 있다. 다양한 성격의 유적이 활발히 조사되어 한국 고고학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시기로 평가되고 있는 국립박물관의 덕수궁시기(1955~1972년)에 창산은 선사시대 패총유적이나 주거지와 같은 고고학 조사에 적극 참가하여 유적측량과 유구 실측을 비롯하여 사진촬영과 유물 제도 등을 맡아서 하였다. 그는 일본에서 익힌 발굴기술을 마음껏 발휘하였고, 전국을 무대로 종횡무진 이루어진 그의 고고학조사는 학사적으로도 높게 평가되고 있다. 특히, 창산의 견해 가운데 고고학적으로 주목되는 것은 고분에 있어 수릉의 가능성을 지적한 것과 청동기시대 문화의 이해에 "해미문화"라는 지역문화론을 처음으로 언급한 것은 탁견이었다. 1969년 문화재연구실이 설치됨에 따라 그 책임을 맡은 창산은 미약한 규모인 연구실의 운영과 총체적인 책임을 맡아 찬란한 우리문화를 지켜내고자 조사와 연구에 고심하였다. 그는 불국사 복원공사와 경주 천마총, 황남대총의 발굴 등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고, 이후 황룡사지, 분황사, 미륵사지 등을 조사하며 삼국시대 불교문화와 가람의 구조를 체계적으로 파악해 보고자 노력하였다. 당시 창산이 기획하여 진행한 대형 발굴조사는 한국 고고학의 기틀을 다짐과 동시에 관련분야의 연구를 활성화시키는데 크게 이바지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한국 고고학의 계기적인 발전과정 상에서 볼 때, 다양한 발굴조사법의 시도와 체계화, 고고학 전문 인력의 양성과 발굴조사의 대중화, 조사기록의 정형화 및 자료공개 활성화 등은 이 시기 창산의 열정으로 이루어진 성과로 손꼽을 수 있다. 한편, 유적조사에 있어서 정확한 기록과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열정적으로 발굴에 심혈을 기울인 발굴왕 창산도 유적의 성격을 밝히고 유구를 해석하는 과정에 있어서는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는데, 황남대총 주인공 논쟁의 불씨를 남겨둔 것은 그의 역할을 재음미해볼 때 매우 아쉬운 한부분이다.

일제강점기 경주 남산 삼릉계 약사여래좌상 반출 경위에 대한 고찰 (A Study of the Removal of the Seated Medicine Buddha from the Samneung Valley at Namsan, Gyeongju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 아라키 준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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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3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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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0-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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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경주 남산의 불적에 대한 본격적 조사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경주 남산 불적조사에 대한 연구는 오늘날 경주 남산 불적을 심도 있게 고찰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선행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경주 남산의 불적조사는 192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한일병합을 전후한 초기 조사는 예비 조사 정도로 간주되어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기초 조사로 후속 조사의 발판이 되었고, 1910년대에 남산이 불적의 보고로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특히 1915년 경주에서 반출되어 경성 경복궁에서 개최된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에 출품된 삼릉계 약사여래좌상은 관람객의 눈길을 가장 끄는 미술관 중앙홀에 전시되어 세간에 불적으로서의 경주 남산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 약사여래좌상은 남산 불상 중에서 가장 원상태를 잘 유지하고 있고 아름다웠기 때문에 공진회에 출품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그 반출은 한일병합을 전후하여 구상된 석굴암 경성 이전계획과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 진행되었다. 석굴암 경성 이전계획은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중심이 되어 구상된 식민 이데올로기인 '일선동조론'과 '조선정체성론'을 바탕으로 조선왕조의 상징인 경복궁을 해체하고 그 한복판에 과거의 영광을 상징하는 석굴암을 안치시킴으로써 일본 제국에 의한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을 시각적으로 선언하려는 기획이었다. 그러나 그 구상이 무산되자 석굴암 본존불 대신에 경성으로 반출된 것이 다름 아닌 삼릉계 약사여래좌상이었다. 약사여래좌상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는 1911년 세키노 다다시가 실시했으나 그 위치를 세키노에게 알린 것은 모로가 히데오나 고다이라 료조와 같은 경주 거주 일본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들 현지인은 총독부로부터 요청을 받아 공진회에 출품할 만한 불상을 찾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약사여래좌상은 총독부와 세키노 다다시, 그리고 경주 거주 일본인들 사이의 긴밀한 연계 속에서 경성으로 반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경주 남산의 불적이 그 신비의 베일을 벗기는 과정이기도 했다. 요컨대 초기 남산 불적조사는 기초 조사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석굴암 경성 이전계획과 1915년 공진회의 성공적 개최라는 데라우치 총독의 제국주의적 야망과 깊은 관계 속에서 진행되어 순수한 학문적 목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하기 어렵다. 한편 석굴암 경성 이전계획이 좌절되고 경성으로 반출될 가능성이 컸던 미륵곡 석조여래좌상이 현지에서 보존될 수 있었던 것에는 경주 조선인의 저항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본고에서는 자세히 논할 수 없었으나 그들을 단순한 방관자가 아니라 역사를 움직이는 주체로 부각시킬 연구가 요구된다.

과시된 효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인왕선영도(仁旺先塋圖)> 연구 (Showing Filial Piety: Ancestral Burial Ground on the Inwangsan Mountain at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 이재호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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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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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3-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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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인왕선영도(仁旺先塋圖)>(덕수5520)는 그림과 발문(跋文) 열 폭으로 이루어진 병풍으로, 작가는 조중묵(趙重黙)(1820~1894 이후), 주문자는 박경빈(朴景彬)(생몰년 미상), 발문을 쓴 사람은 홍선주(洪善疇)(생몰년 미상), 제작연대는 1868년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낱장으로 보관되어 온 <인왕선영도>를 병풍으로 복원하고 특별전 '우리 강산을 그리다: 화가의 시선, 조선시대 실경산수화'에서 최초로 공개하였다. <인왕선영도>에는 오늘날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동과 홍은동을 아우르는 인왕산 서쪽 실경이 묘사되어있고 원경에는 북한산 연봉이 그려져 있다. 화면 속에는 인왕산(仁旺山), 추모현(追慕峴), 홍재원(弘濟院), 삼각산(三角山), 대남문(大南門), 미륵당(彌勒堂)이라는 지명이 표기되어있다. 이 지역을 나타낸 조선후기 지도와 비교해보면 지형 표현과 지명 표기에 유사성이 있다. 조중묵은 넓은 공간을 포착하기 위해 지도의 지리정보를 숙지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경의 현장을 답사한 결과, 조중묵은 각각의 경물을 과장하거나 생략하였고 수평의 화면에 나열식으로 조합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조중묵은 남종화풍 정형산수에 뛰어났던 화가로, <인왕선영도>의 세부 표현에서 사왕파(四王派) 화풍의 영향을 찾을 수 있다. 19세기 도화서 화원들이 화보를 활용하여 가옥을 그리거나 토파에 호초점을 찍고 당분법(撞粉法)으로 꽃을 나타내는 등 장식적인 화풍을 구사한 경향도 부분적으로 나타난다. <인왕선영도>에는 바위를 짙은 먹으로 쓸어내리듯 붓질한 기법, 산세의 괴량감, 가로로 붓을 대어 단순하게 그린 소나무 등 18세기 정선(鄭敾)(1676~1759)의 개성적 양식도 가미되어있다. 조중묵은 인왕산 실경산수로 유명한 정선의 양식과 권위를 차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인왕선영도>는 유기적 공간감과 현장의 인상이 잘 드러나지 않으며, 연폭 화면이라는 매체도 조중묵의 개인 양식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인왕선영도>는 발문의 텍스트와 화면의 이미지가 잘 조응하는 작품이다. 발문의 내용을 여섯 단락으로 나누어 보면 ①무덤의 주인공과 이장 경위, ②무덤의 입지와 풍수, ③묘제(墓祭)와 신이(神異)한 응답, ④무덤 관리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협력, ⑤병풍 제작의 동기인 박경빈의 효성과 수묘(守墓), ⑥발문을 쓴 의의로 파악된다. 이 가운데 화면에서 시각적으로 구현하기 용이한 ②의 내용은 화면에 충실하게 재현되었다. <인왕선영도> 제작의 직접적 동기인 ⑤를 보면 주문자 박경빈이 "무덤이 마치 새롭게 단장한 것 같이 눈에 완연하다."라 하여 <인왕선영도>에 만족했음을 알 수 있다. 경물 하나하나를 설명하듯 나열한 구도는 회화미는 떨어지더라도 무덤의 풍수지리를 전달하는 데는 더 적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상당수의 산도(山圖)는 18세기 이후 제작된 목판본 선영도로서, 족보와 문집에 수록된 경우가 많다. 16~17세기의 기록에서는 족자 선영도를 첨배(瞻拜)의 대상으로 삼은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선영도 첨배는 현실적으로 수묘(守墓)가 곤란할 때 이를 대신할 수 있는 의례로 인정되었다. 한효원(韓效元)(1468~1534), 조실구(曺實久)(1591~1658) 등이 선영도를 제작한 후 당대의 명사에게 서문을 요청하고 효심을 과시한 사례는 <인왕선영도>의 선구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정처사유거도(石亭處士幽居圖)>(개인 소장), <화개현구장도(花開縣舊莊圖)>(국립중앙박물관) 등은 선영도는 아니지만 계회도 형식의 족자이고 풍수를 도해했다는 점에서 17세기 선영도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인왕선영도>는 첨배라는 측면에서 초상화와도 의미가 비슷했다. 발문의 "부친의 기침소리를 직접 접하는 듯하고, 그 태도와 몸가짐을 눈으로 보는 듯하다."는 표현과 부친의 초상에 조석 문안을 올린 서효숙 고사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박경빈이 일반적인 선영도 형식이었던 족자나 목판화 대신 연폭 병풍의 실경산수화를 주문한 의도는 분명히 알기 어렵다. 19세기에는 민간에서도 사례(四禮) 의식에 다수의 병풍을 배설(排設)하였는데, 의례의 성격에 따라 그림의 주제를 반드시 구분하여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인왕선영도> 또한 여러 의례에 두루 배설하거나 장식 병풍으로도 사용하기 위해서 선영 그림이라는 주제를 실경산수화 이미지 아래에 가렸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인왕선영도>의 핵심 소재인 무덤 봉분이 모호하게 처리된 것은 사산금표(四山禁標)의 금제 위반을 숨기기 위함일 가능성이 있다. <인왕선영도>에 묘사된 인왕산 서쪽 산기슭은 분묘 조성 금지구역이었다. 1832년에 금표 내에 몰래 쓴 묘를 적발하여 즉시 파내고 관련자를 엄히 처벌한 사례로 볼 때, 19세기 중엽까지도 사산금표 내의 분묘 금제는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인왕선영도>의 발문에는 장지를 얻기 위해 쏟은 정성이 상세하게 쓰여 있다. 장지조성에 마을사람들의 협조와 묵인이 필요했던 것은 금표 구역 내에 묘지를 조성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인왕선영도>와 비교 가능한 동시대 연폭 병풍의 실경산수화로 이한철(李漢喆)(1808~1880)이 그린 <석파정도(石坡亭圖)>(미국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를 들 수 있다. <석파정도> 제작시기를 전후한 1861년에 이한철과 조중묵은 철종어진도사에 함께 참여하였으므로 조중묵이 이한철의 <석파정도> 제작 과정을 보았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조중묵이 몇 년 후 <인왕선영도>를 주문받았을 때 <석파정도>의 인상적인 연폭 실경산수를 본 경험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두 작품의 화풍 차이는 주문자의 취향과 제작 목적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인왕선영도>는 실경산수화와 선영도의 중층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관람자의 지식수준과 주문자와의 친분, 관람에 들이는 시간에 따라 천차만별의 의미로 수용되었을 것이다. <인왕선영도>의 발문에는 무덤 주인의 이름과 자호, 본관이 일체 작성되지 않은 채 '박공(朴公)'이라고만 표기되어 있다. 주문자인 박경빈의 인적 사항도 파악할 수 없었으나 다만 관직에 나아가지 못한 가계를 미루어 볼 때 재력이 있음에도 지배계층으로 올라설 수 없는 신분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음은 짐작할 수 있다. 발문을 쓴 홍선주 또한 사대부로 보기 어려우며, 『승정원일기』 기록에 나타나는 경아전 서리일 가능성이 있다. 박경빈은 상류 계층에 진입하고 싶은 욕망으로 보수적인 가치인 효(孝)를 강조하여 부친의 무덤을 명당으로 이전하고 <인왕선영도>를 제작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인왕선영도>는 금제위반 적발에 대한 우려, 병풍의 다목적성 등의 이유로 본래의 제작의도를 뚜렷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모순적인 이미지가 되었다. 병풍이 제작된 지 47년 만에 각 폭이 분리된 채 미술상을 통해 이왕가미술관 소장품이 된 상황을 보더라도, 박경빈이 <인왕선영도>에서 꿈꾸었던 명당 발복과 가문의 신분상승은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