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문화유입수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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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의 한국 드라마 시청정도가 한류 지속 가능성에 미치는 영향과 한류호감도와 문화유입 수용성의 다중매개효과 (The Influence of Chinese People's Viewing Degree of Korean Contents on Sustainability of 'Korean Wave' with the Multiple Mediation Effects of Liking for Korean Wave and Receptiveness to Foreign Cultural Inflow)

  • 이희진
    •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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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4권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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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14-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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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본 연구는 한류 지속가능성에 한류 드라마 '시청정도'가 미치는 직접효과와 '한류호감도' 및 '문화유입수용성'의 매개효과 그리고 '경쟁의식'의 조절효과를 실증적으로 규명하였다. 표본은 중국 광서성의 계림시와 하남성의 정주시에 거주하는 대학생(N=371명)이다. 분석 결과, 한국에 대한 '경쟁의식'이 상대적으로 약한 응답자들의 경우에는, '한류 지속가능성'에 유의한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지만, 경쟁의식이 상대적으로 강한 응답자들은 한국 드라마 '시청정도'가 증가할수록, 오히려 한류 지속가능성에 대해서 회의적인 입장을 표명하여 주목하게 되었고, '경쟁의식'의 조절효과가 입증되었다. 한류 드라마를 많이 시청할수록, '한류 호감도'도 증가시키지만, '문화유입 수용성'에는 유의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시청정도'가 증가할수록, '한류지속 가능성'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경향은 '한류 호감도'가 증가할수록 유의하게 감소될 수 있어, '한류 호감도'의 매개효과가 입증되었다. 주요 발견점을 토대로 시사점과 함의를 논의하였다.

한국에 대한 경쟁의식과 문화유입수용성이 중국인들의 자국방어적 대응에 미치는 영향: 합리적 분쟁해결인식의 매개효과와 한류호감도의 조절효과분석을 중심으로 (Effect of Chinese's Sense of Rivalry toward Korea and Receptiveness to Foreign Cultural Inflow on National Defense Respond: Focusing the Mediating Effects of the Reasonable Dispute Resolution between China and Korea and the Moderating Effects of Liking for Korean Wave)

  • 이희진
    •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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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8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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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77-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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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본 연구의 목적은 중국인들의 한국인에 대한 경쟁의식과 문화유입수용성이 국가 간에 분쟁이 발생하였을 때, 중국인들의 자국방어적 대응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파악하고, 이러한 영향에 합리적 분쟁해결인식의 매개효과와 한류호감도의 조절효과가 어떻게 유의미하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실증적으로 규명하고자 하였다. 본 연구는 중국의 11개 도시(7개 성소재)에 거주하는 30세 미만의 695명의 중국인들을 설문조사하여 얻은 자료를 분석한 실증연구이다. 자료분석 결과, 첫째, 한류호감도가 높은 경우에는 국가간 경쟁의식이 한국과의 분쟁의 합리적 해결에 부적영향을 미치지 않았지만 한류호감도가 낮은 집단은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둘째, 한류호감도가 높은 경우에는 문화유입수용성은 합리적 분쟁해결인식을 매개(mediation)로 하여 자국방어적 대응 성향을 완화시키는데 유의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이 확인된 반면 한류호감도가 낮은 집단에서는 매개효과가 유의하지 않아 한류호감도의 조절효과(moderating effect)가 입증되었다. 주요 발견점을 토대로 함의를 모색하며 논의하였다.

여성결혼이민자에 대한 지역사회 수용성: 안산과 영암의 지역주민을 중심으로 (Receptivity to Migrant Wives in Korea: A Qualitative Approach)

  • 최훈석;양애경;이선주
    • 한국심리학회지 : 문화 및 사회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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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4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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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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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한국 사회의 다문화, 다인종 사회로의 이행 과정에서 중요한 사회 변동의 축으로 자리잡은 여성결혼이민자들에 대한 지역사회 수용성의 제 단면을 질적 연구를 통해 알아보았다. 여성결혼이민자들이 거주하고 있는 도시(안산)와 농촌(영암) 지역의 내국인 주민 23명을 대상으로 심층면접을 실시하여, 여성결혼이민자에 대한 인식과 접촉 경험, 그리고 여성결혼이민자에 대한 개방성 및 다문화 사회로의 변화에 관한 인식을 조명하였다. 심층면접 결과, 조사된 지역주민들은 여성결혼이민자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긍정적 인식과 개방적 태도를 지니고 있지만 이러한 긍정적 인식의 실체는 한국사회에 깊게 뿌리박힌 가부장제와 성역할 고정관념에 기반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결과를 얻었다. 또한 여성결혼이민자들의 한국 문화 적응에 대한 지역주민들의 인식 역시 한국문화에 대한 일방적 동화를 전제로 공생관계를 인정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반적으로 본 연구의 결과는 현 단계로서는 여성결혼이민자들의 유입 및 그들과의 상호작용 경험이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고 양방향의 문화통합을 추구하는 형태의 문화적 다원화 과정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본 연구 결과의 시사점 및 의의, 그리고 장래연구의 방향을 논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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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지방 점토대토기문화기의 묘제와 지역성 (Burials and Regionality of the 'Jumtodae' Pottery(Pottery with Clay Strips) Cultural Age in Honam Province)

  • 이동희
    • 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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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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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7-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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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2
  • 기존에 호남지방에서 점토대토기문화기의 묘제로 알려진 것은 적석목관묘(적석석관묘), 토광(목관)묘, 옹관묘, 주구묘 등이다. 그런데 이러한 묘제가 호남지방에 있어서 점토대토기문화기의 묘제를 모두 포괄하고 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점토대토기문화기에도 청동기시대의 묘제가 잔존하고 있어, 지역마다 그 양상이 상이하였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호남지방에 있어 점토대토기 유입기의 묘제의 양상과 그 변천, 그리고 지역성 등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호남지방의 점토대토기문화기 묘제를 유물상과 관련지어 보면 크게 4단계로 구분된다. 원형점토대토기 문화의 유입기(I한계)에, 세형동검${\cdot}$조문경${\cdot}$흑도${\cdot}$원형점토대토기 들의 새로운 유물이 확인되고 있지만, 묘제는 청동기시대 이래의 묘제에 신묘제인 적석목관묘의 일부 속성이 가미된 적석석곽묘${\cdot}$석개토광묘, 지석묘 등이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적석석곽묘와 석개토광묘는 전북지역에서, 지석묘는 전남지역에서 확인되는데, 이는 청동기시대 묘제의 지역성에 그대로 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호남지방에서 원형점토대토기문화기의 초기에 호서지방의 대전 괴정동 적석목관묘와 같은 신묘제의 유입이 바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유물에서도 뒷받침되다싶이 요법지방 등지에서의 유이민의 1차 도래지가 호서지방이 중심이었고, 호남지방은 그러한 문화의 2차적인 파급속에서 묘제에 부분적으로만 영향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현재까지의 자료로는, 호남지방에서 화순 대곡리와 같은 적석목관묘가 출현하는 것은 호서지방보다 늦은 기원전 3세기대에 이르러서이다(II단계). 이후에 토광묘${\cdot}$주구묘${\cdot}$옹관묘 등이 나타난다. 다뉴조문경이 출토되는 I단계를 요녕지방과 일정한 관련성을 가지면서 점토대토기문화가 파급되는 시기라고 한다면, 다뉴세문경이 확인되는 II단계 이후는 점토대토기문화의 토착화가 진전되는 시기로 볼 수 있다. 호남지방에서도 전남지역은 새로운 문화의 영향이 더 늦었다고 판단된다. 전남지역에서 영산강유역의 전남서부지역에는 지석묘가 일부 지속되고는 있지만 상대적으로 이른 한계의 토광묘나 적석목관묘가 조사되고 있어 전남동부지역과도 차별성을 보인다. 현재까지의 조사성과로는 전남동부지역에 토광목관묘 이전의 적석목관묘 한계가 확인되지 않으며, 주구묘나 옹관묘도 조사된 바가 없어 지역적인 특색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전남동부지역이 산악지대이면서 문화 전파의 종착지였고, 청동기시대 이래의 지석묘가 장기적으로 사용되어 신묘제와 은화를 바로 수용하지 못하는 문화적 보수성에 기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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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文)과 화(畵)의 절합 -만문만화(漫文漫畵)를 중심으로 (Articulation of Characteristics and Image - Focused on the Manmun-Manwha)

  • 서은영
    • 대중서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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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7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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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9-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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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이 연구의 목적은 식민지 조선에서 만문만화가 수용·형성된 배경에 관한 '재고(再考)'다. 만문만화의 등장을 일본의 식민지 언론 탄압이라는 정치적 산물로만 해석한 기존의 논의에 의문을 제기하고, 안석영의 행보와 대중문화 유입이라는 식민지 조선의 상황을 고려해 또 다른 가능성을 엿본다. 이 과정에서 '만문만화' 용어의 등장이 1927년 안석영이 아니라 『신여성』 1925년 1월호의 '은(銀)파리'임을 밝히고, 글의 성격을 분석한다. 또한 안석영의 도쿄 유학과 귀국 이후의 행보를 통해 그가 만문만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배경과 의미를 추적한다. 만문만화가에게 "필치와 필법"을 강조했던 것으로부터 '문학성을 갖춘 만화', '글을 쓸 줄 아는 능력을 갖춘 만화가'의 탄생은 문자 위주의 텍스트에서 이미지텍스트로 재편되는 1920-30년대의 문화장을 만문만화라는 독특한 양식의 출현으로 보여준다. 이 연구는 '만문만화'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했던 시기를 바로 잡고, 독자 확보라는 저널리즘의 재편과 대중화 전략으로 문(文)과 화(畵)의 절합으로 나타났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여 만화(漫畵)와, 만문(漫文), 만화(漫話)와 같은 잡문과의 연관성 속에서 만문만화(漫文漫畵)의 수용을 다각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이처럼 만문만화와 만문만화 내에서의 문(文)과 화(畵)의 형식 실험은 단순히 만화장 내에서뿐만 아니라 근대 매체의 이미지 텍스트로의 재편이라는 식민지 문화장을 구성하는 한 징후로써 포착할 수 있다.

다문화사회에서 종교의 교육적 수용 - 협력 종교 교육을 중심으로 - (The Educational Acceptance of Religion in Multicultural Society: Focused on Cooperative Religious Education)

  • 김진영
    • 대순사상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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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5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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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3-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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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2000년대 들어 한국 사회는 이주노동자, 결혼이주자, 유학생, 난민 등의 유입이 급증하면서 다문화사회로 이행하고 있다. 이에 따라 다종교 사회로서 종교 간 평화와 공존이 유지됐던 한국 사회는 갈등이 표면화되며 사회 문제로 확대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다문화 환경을 인식하고 대처하는 데 있어서 종교는 다문화 사회화 과정에서 공동체의 통합과 안전에 기여하나 다른 한편에서는 공동체 내부에 갈등을 유발할 수 있는 양가성을 띰으로써 교육적 차원에서의 논의를 필요로 한다. 이는 교육의 주요 기능 중 하나가 사회통합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종교 교육이 다문화사회의 안정적인 정착을 위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 속에서 종교 다양성에 대응하기 위한, 그리고 현재의 사회를 이해하고 세계 시민으로 거듭나기 위한 새로운 관점의 종교 교육에 대한 논의를 필요로 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종교 이해'(religious literacy)를 배양하기 위해 다양한 종교적, 비종교적 세계관을 교육하는 '교양 종교 교육'(general religious education) 모델이다. 그렇지만 다문화사회에서 교양 종교 교육이 학생들이 통합 환경 속에서 편견과 차별을 줄이는 데 유용할지라도 다문화주의의 가장 효과적인 접근법이 각 인간 집단의 고유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개별 종교 교육'(special religious education) 또한 필요성이 인정된다. 이에 본 연구는 종교 교육의 방안으로 교양 종교 교육과 개별 종교 교육을 결합한 '협력 종교 교육'(co-operative religious education)을 제안할 것이며, 이에 기초하여 한국의 종교 정책과 종교 교육을 검토하고 학교 현장에 실천 가능한 현실적인 방법을 제시할 것이다.

외국인 밀집지역 형성에 따른 지역사회 적응과정 연구 -광진구 자양동 중국인 밀집지역을 중심으로- (The Process of Local Adaptation in the Community with High Foreign Population: The Case of Chinese Ethnic Community in Jayang-Dong, Seoul, Korea)

  • 조민경;장원호
    • 한국경제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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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9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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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5-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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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 연구는 서울시 광진구 자양동이 중국인 밀집 거주지역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지역주민과 이주민과의 갈등 및 소통, 그에 따른 관계변화에 대하여 문화적응의 관점에서 살펴본 것이다. 이를 위하여 연구자들은 중국인 이주민과 한국인 원주민을 대상으로 심층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조사결과 자양동에서의 원주민과 중국인 이주민의 관계는 타 지역에 비하여 긍정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인 유입초기에는 원주민과 이주민이 서로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으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이해와 배려를 바탕으로 한 상호교류를 통해 갈등을 해소하고 서로를 수용하려는 문화적응의 양상이 나타났다. 이러한 변화는 자동의 공간적인 특징 때문에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자양동의 생활권역은 타 지역보다 개방적이며, 원주민과 이주민의 생활공간이 명확히 구분되어 있지 않아 상호간 교류가 활발해질 수 있었다. 이에 더하여 중국인 이주민은 자양동에서 오랫동안 살고자 하는 정주의식을 바탕으로 주류사회에 융화되는 형태의 문화적응 양상을 보였다. 본 연구는 한국에 정주(定住)하려는 외국인 이주민과 지역주민의 문화적응 과정에 대한 다각적인 분석을 시도하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 또한 외국인 이주민과 지역 원주민의 소통이 서로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경감시키고 공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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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공원에서 스케이트보드 활동 공간 발달에 관한 연구 (Study of the Transition of a Skateboarding Space in an Urban Park)

  • 조한솔;손용훈
    • 한국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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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4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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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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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 연구는 우리나라 도시공원에서 스포츠 활동 중 하나인 스케이트보드 활동이 어떻게 공간적으로 발달하게 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 과정을 통해 도시공원이 동적 활동을 수용하는데 나타나는 특징과 시사점을 도출해보고자 한다. 연구방법은 신문기사에 나타난 스케이트보드 문화 유입에서부터 공간 설치에 관한 내용을 담론분석을 통해 도출하고, 시기별로 어떠한 요인에 의해 공간 생성 혹은 소멸로 이어졌는지 알아보았다.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스케이트보드 행태가 공원에서 일부 공간으로 자리 잡은 데는 세 가지 원인으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도시 공원이 스케이트보드 이용에 적절한 장소로 이용자와 운영자 모두 받아드렸고, 이 이용에 대한 긍정적 시대 담론과 결합해 공원정비가 이루어졌다. 둘째, 시대적으로 다른 신생, 혹은 대중적 스포츠와 흐름을 같이 하면서 복합적인 용도 공간 창출이 가능할 때 스케이트 파크가 집중적으로 발달하였다. 셋째, 신도시간의 문화 비교 양상과 공원 유치를 스포츠 마케팅의 수단이 되어 지역경제를 부흥하려는 양상을 볼 수 있고, 이때 스케이트보드 공원의 보급이 이루어졌다. 반대로 공간 소멸로 이어지는 원인은 첫째, 일부 공간을 점유하는 방식이나 장소의 행태가 부딪치는 공간은 소멸로 이어졌다. 둘째, 이용자 행태를 담지 못한 설비의 부적절함과 일시적이고 이벤트성의 대회, 행태만을 위한 설비가 공간 자체를 오래 이용할 수 없는 설비로 이어졌다. 셋째, 메가 이벤트의 개최와는 상관없이 국내에서는 이런 기물을 지속적으로 활용할 만큼 문화현상이 지속되지 않았고, 공간용도와 다른 행태를 유도하는 스케이트보드 문화가 이어져 전용 공간에 대한 관심이 멀어지게 되었다. 분석 내용을 바탕으로 한 도시공원과 스포츠 활동의 수용에 대한 논의는 다음과 같은 과제를 논할 수 있다. 첫째, 일시적인 이슈와 경향 등 공간의 설정에 대한 담론을 뛰어넘는 스포츠 활동을 제공할 수 있는 계획 설정이 부족하다. 둘째, 공간적의 설정에서부터 생성 이후에 따라오는 공원에서 스포츠 활동 운영에 있어서 공간과 활동의 상호작용이 부족하다. 셋째, 다양하게 나타나는 스포츠 활동과 기존 공간의 문제점을 적극적으로 다양한 시도로 해결하는 움직임이 필요하다. 본 연구는 공원에서 스포츠 활동의 수용과 발달에 대한 고찰을 통해 현 도시공원의 체재에서 동적 행태를 수용하는 동안 나타나는 상황들을 파악해 봄으로써 스포츠를 공원에 계획하는 것에 대한 문제를 제고해볼 수 있는 연구가 될 수 있도록 하였다.

경주지역 철기생산의 변천 (A Shift of Iron Production in Ky$\u{o}$ungju)

  • 정영화;김옥순
    • 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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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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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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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
  • 지금까지 철기문화에 대한 연구는 주로 개시기의 양상과 정치체의 성장과정을 연구해왔다. 그러나 한편 철기는 토기와 마찬가지로 그 지역의 사회적$\cdot$자연적환경에 따라 변화를 보이기 때문에, 통시적인 연구와 아울러 지역적 접근의 연구를 할 필요가 있다. 본고에서는 지역적 접근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질 수 있다. 경주지역 철기 개시양상에 대해서는 그 동안 보충된 조사자료를 토대로 기존의 논의를 재검토하고, 아울러 개시기부터 기술적으로 완성되는 한계까지 경주지역 철기생산의 변천과정을 검토했다. 경주지역 철기유물을 통해서 단계적 설정과 단계별 기술적 특징을 검토해 본 결과, 경주지역의 철기 개시기는 선한식계 한계로 별도의 설정이 가능하다. 이 개시기 철기유물의 반출 유적은 주로 경주의 남동부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남동부에서는 또한 이른 시기의 청동유물이 출토되고 있어서 초기 철기유입과 관련성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 유적이 대체로 정식조사를 거치지 않아서 명확한 양상을 규명할 수는 없지만, 동일한 한계의 임당동$\cdot$팔달동유적 출토철기와 비교 검토한 결과에 의하면, 중서부지방과는 또 다른 기술 수용경로를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결과는 주조철부의 형태와 단조철기의 출토양상이 중서부지방과 다르게 나타나는 현상에 의해 뒷받침된다. 경주지역의 중심부에서는 사라리 130호묘 이후의 제3단계부터 철기가 생산되었다. 사라리 130호묘 이후 경주주변지역에 형성된 대규모 집단에서 철기 생산력이 증대되기 시작한 현상은 낙랑군의 철수요량의 증가에 의한 영향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경주중심부에서는 3한계부터 철기 생산이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주변지역의 대규모 집단에 필적할 만큼 생산력을 갖춘 것은 아니었다. 한편, 3단계 경주지역의 철기는 형식적, 양식적 속성과 기종 조합상에서 중심 및 주변지역을 상호 비교해볼 때 유사성이 파악됨으로, 생산체계에 있어서는 주변지역과 밀접한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경주지역의 중심부에서 철기 생산력이 급격히 향상된 시점은 4단계이다. 이 단계는 영남지방 내의 다른 지역집단보다 월등하게 생산기술이나 생산량이 증대되었다. 월성로유적의 목곽묘에서 확인된 엄청난 양의 철기유물이 이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무엇보다도 낙랑군의 축출과 관련해서, 새로운 경제체제가 재편된 결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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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명적》을 통해 본 조선 초기 서풍 (Calligraphy Style in the Early Joseon Period : An Examination of Renowned Calligraphy of Korea)

  • 유지복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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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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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8-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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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이 논문은 ${\ll}$해동명적(海東名迹)${\gg}$에 실린 필적을 분석하여 조선 초기 서풍의 흐름과 그 성격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다. ${\ll}$해동명적${\gg}$은 16세기 초에 신공제(申公濟)가 간행한 서첩으로, 우리나라 역대 명필의 필적을 한데 모아놓은 최초의 집첩(集帖)이다. 필자는 선행연구에서 다양한 이본으로 남아 있는 목판본과 석판본의 간행 배경과 판본을 분석하였다. 이번 연구에서는 ${\ll}$해동명적${\gg}$에 실린 조선 초기 필적의 서풍을 분석하는 데 주력하였다.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 관각(館閣)의 문서를 담당했던 사수(寫手)들의 서풍과 고령신씨(高靈申氏) 집안에 가전(家傳)되어 오던 서풍의 변화상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전통적인 왕희지 서풍이 건재한 가운데 원말 복고주의의 영향으로 파생된 다양한 서풍이 수용되었음을 확인하였다. 특히 서역 변방 출신 강리노노(康里??)의 서풍이 폭넓게 수용된 흔적이 주목된다. 이는 으레 조맹부(趙孟?)의 송설체(松雪體)로 대변되었던 여말선초에 실은 다양한 원대의 서풍이 유입되고 있었다는 징표이다. 마지막으로 "패관잡기"에 실린 어숙권(魚叔權)의 기록의 진위 여부를 추론해 보았다. 어숙권은 ${\ll}$해동명적${\gg}$에 실린 박경의 필적이 실은 신자건이 쓴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어숙권의 출신과 정치적 입지를 기준으로 신자건과 박경의 관계성을 분석한 결과 어숙권의 주장이 타당치 못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