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thesis examines analyzing how historic knowledge was shaped in museum. Examining by Tokyo Imperial Museum, Government General Museum of Taiwan, Yi Wang Ga Museum, Government General Museum of Chosun, and NanTong Museum of late 19th and early 20th century, tried to find out similarities and differences. These museums are similar in that they adopt museums as modern system considering models of other countries(Europe or Japan) and exhibitions played important roles in gathering relics. Experts who leaded adoption of western civilization played an important role. These experts were conservatives who valued tradition and relics while they aimed for western civilization. It originated in the character of museum system. Historical Knowledge by museums was constituted with five combinations of conceptions which are nationality, locality, coloniality, and artistry. Every museum cannot help having modernity for museum itself is modern system. Modernity was symbolized by museum building of western style in Yi Wang Ga Museum, Government General Museum of Chosun. Tokyo Imperial Museum revealed nationality in that it tried building of imperial history which includes colonies. In early time, Tokyo Imperial Museum pursued modernity and artistry, however it concentrated on artistry than modernity later. We can find locality in that Tokyo Imperial Museum tried to find meaning about Japanese art by relating with natural characteristics. It is Taiwan Governor Museum that extremely expressed coloniality and artistry was not considered. Government General Museum of Chosun could not be exceptions of features of coloniality, but it need to recognize that artistry was focused all over the exhibitions. It was NanTong Museum that most directly expressed locality. Like these, Museums of East Asia established in around 1900 made different historical knowledge by varying weigh of five factors, nationality, locality, modernity, coloniality and artistry.
한국, 중국, 일본의 작가 107명이 참가한 '타이포 잔치 2011: 서울 국제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가 지난 8월 30일부터 9월 14일까지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렸다. 세계 유일의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인 이번 행사는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정병국) 주최, 한국공예 디자인문화진흥원(원장 최정심), 한국타이포그래피학회(회장 원유홍), 예술의 전당(사장 김장실) 공동 주관으로 '동아시아의 불꽃(동아화화(東亞火花), Fire Flower of East Asia)'이라는 주제로 열렸다. 한국, 중국, 일본 3개국의 타이포그래피 대표 작가 107명이 전시에 참가했다.
국보 제230호 송이영(宋以穎)의 혼천시계(渾天時計)는 동아시아에 유일하게 현존하는 혼천시계로서 현재 보존 상태는 부품 일부가 훼손되고 유실되어 작동되지 않고 있다. 우리는 고려대학 박물관에 소장된 이 유물의 학술조사를 수행하여 혼천의 부분의 구조와 원리를 분석하고, 유실된 기계의 태양과 달의 구동장치를 복원하고, 각 부품과 장치를 제작 조립하여 혼천시계의 혼천의 부분의 작동모델을 복원함으로서 천체운행 장치를 작동하게 하였다.
탄자니아의 이시밀라 유적은 중부홍적세의 후반에 형성된 전형적인 아슐리안 석기공작을 출토하는 유적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 유적에 대한 3번째의 발굴조사에서 많은 주먹도끼를 비롯한 석기 공작들이 수습되었다. 그리고 이시밀라 유적의 층위는 확인된 것이 모두 13개 층으로 구성되는데, 상부의 라테라이트 토양군과 하부의 수성퇴적물로 구분된다. 수성퇴적물은 호소성환경과 유로환경에서 퇴적된 것으로 유적 형성 당시의 환경이 현재보다도 훨씬 습윤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점은 이번의 수습된 하마뼈와 악어뼈의 존재에서도 할 수 있다. 3개의 지점에서 실시된 발굴에서 드러난 양상은 상부층의 석기집합에서는 주먹도끼가 다수 포함된 반면에 하층에 해당되는 선인장 지점은 불규칙한 형태의 석기공작들이 산발적으로 출토되었다. 그리고 선인장 지점에서도 상부층에서 재퇴적된 석기공작에서는 많은 주먹도끼가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서 상층부와 하층부 사이에 석기공작의 차이를 암시하고 있다고 판단되며 석기공작의 발달이 관찰될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석기공작에서 주먹도끼를 비롯한 대형 자르개 석기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것으로 미루어 제작과는 별도의 행위가 당시의 물가 환경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유적에서 출토되는 주먹도끼의 형태적인 분석에서는 석재에 따라서 주먹도끼의 정형성이 크게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점은 동아시아의 아슐리안 형의 석기공작이 서구의 비교에서 원시형을 유지하는 것은 석재에서 기인되었을 가능성이 많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장무이묘 명문전은 여러 가지 면에서 매우 낯설다. 첫째, 명문전이 백여 점에 육박할 정도로 많다. 둘째, 똑같은 명문이 다수 확인된다. 셋째, 소성 방식 등 제작 방식이 다양하다. 넷째, 명문이 찍힌 전돌의 형태가 일정하지 않다. 다섯째, 명문이나 문양이 찍힌 면과 아무 문양이 없는 면의 위치 및 명문의 상하 방향이 일정하지 않다. 여섯째, 명문의 대부분이 반서로 찍혀 있다. 일곱째, 명문전 표면에 흰색 석회가 칠해져 있다. 그러나 시야를 넓혀 중국 위진시기의 명문전과 비교하면 장무이묘의 명문전은 더 이상 낯선 물건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문화를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한 명문을 문자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문자가 전돌에 압인된 하나의 기물로 이해하여 그것이 무덤 속 어디에 어떻게 위치해 있었는지를 주목하고, 이를 관람자의 시선에서 바라보아야 장무이묘의 명문전이 갖는 의미가 명확하게 드러나게 된다.
희랑대사상은 고려시대에 제작된 상으로 높이 82.4cm, 무릎폭 66.6cm, 앞뒤 최대폭 44cm에 이르는 등신상에 가까운 크기이다. 제작 기법은 승상의 앞면과 뒷면을 건칠과 나무를 접합하여 만든 것으로 동아시아의 유일한 사례로 주목된다. 유사한 기술이 나말여초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봉화 청량사 건칠약사여래좌상에 이미 적용된 바 있어 이 시기의 특징으로 이해된다. 희랑대사상에 대해서는 18세기에 쓰여진 가야산을 여행하면서 쓴 기행문에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즉 승상의 가슴에 있는 구멍과 힘줄과 뼈가 울퉁불퉁하다는 등의 독특한 특징은 현재의 희랑대사상과 정확하게 부합된다. 가슴에 있는 구멍은 신통력의 상징으로 3~4세기에 활동한 서역의 승려 불도징(佛圖澄)의 가슴에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에는 흑칠 상태였으며, 19세기에 현재와 같이 채색되었음도 알 수 있다. 봉안 전각은 해인사의 해행당(解行堂)과 진상전(眞常殿)이었으며, 이후 조사전과 보장전을 거치면서 현재에 이른다. 우리나라에서 승상의 제작과 봉안은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문헌 기록에 등장하지만 현존하는 작품은 매우 드문 편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승상의 초상조각은 고려시대의 희랑대사상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에 제작된 나옹과 의상대사상 등 모두 네 구뿐이다. 이 가운데 희랑대사상은 고려 초기 10세기경에 제작된 상으로서 최고의 제작 기술과 사실적인 재현 그리고 내면의 인품까지 표현한 점에서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작품이다. 승상을 제작하여 숭배하고 신성시하는 전통은 한국만이 아니라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다만 재료와 제작 기술에 대해서는 나라마다 차이와 특이성을 보이며 발전하였다. 중국은 육신불(肉身佛)이 많은 편이며 일본은 건칠, 나무, 흙 등 시대마다 다양한 재료를 이용하여 많은 승상을 제작하였다. 저마다 다른 재료와 기법을 사용했지만 동아시아 각국의 승상 제작은 승려의 참모습과 정신성의 성공적 표현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본고의 목적은 "성서조선"에 실린 글과 일기를 통해 김교신이 한국의 전통사상을 어떻게 인식했고 어떻게 기독교 사상과 전통사상을 회통시키고자 하였는지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김교신은 한국의 전통사상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표현하고 이들과 대화하며 기독교 신앙을 토착화하고자 하였다. 그는 불교가 준 민족문화유산에 대해 한없는 존경을 표했으며 한국 불교에 대해 연구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가장 주목한 전통사상은 유학이었다. 그는 계신공구의 자세로 유학적인 생활태도를 평생 실천하였다. 그는 유학의 성(誠), 경(敬)의 신독(愼獨)을 평생 묵묵히 실천하였으나 근본적으로 인간에 내재해 있는 죄성을 자각하고 대속신앙을 받아들여 결국 기독교 신앙을 택하였다. 그는 개인적으로 공자를 숭상하여 자기의 모범으로 삼았으나 민족을 새롭게 하는 새 생명의 기운은 기독교에서 찾으려 하였다. 학문적으로는 공자를 존경했고 신앙적으로는 예수를 믿었다. 그는 유학이 갖고 있는 호학(好學)의 학문적 태도, 인의(仁義)를 중시하는 지사(志士)적 태도를 높이 평가하였고 이런 관점에서 기독교의 맹목적이고 반지성적인 신앙을 비판하였다. 인간 개개인이 고유의 인격적 가치를 가지고 있듯이 그는 각 민족 역시 고유의 민족성과 시대적 사명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세계사의 모순과 질곡이 깃든 한반도가 지리적 위치로 인해 세계의 불의를 정화시킬 동아시아의 중심지이며 그 사명을 한국이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불교, 유학이 이 땅에 들어오기 이전에 우리 민족은 고유의 착한 마음[인(仁)]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한국의 전통사상 중 무엇을 바탕으로 기독교 사상과 접목할것인가에 관한 문제의식은 부족하였다.
필자들은 경주지역 최대 고분인 황남대총 남, 북분에서 출토된 칠기의 재질과 기법 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방법은 깨어진 칠기편을 이용하여 태골을 분류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도막단면(약2㎜)의 박편을 제작, 현미경하에서 하지의 혼입재 종류와 도막구조를 분류함으로써 칠기의 유래를 추정하였다. 그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남분에서 출토된 칠이배, 칠완, 칠장방형합자 등 협저제칠기의 하지에는 골분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칠기는 동시대 동아시아에 있어서 중국의 진~한대 이후 발달된 고급칠기의 계보에 위치된다. 2. 남, 북분에서 출토된 칠배, 완, 장방형합자 등은 식기류, 화장도구의 일부로서 세트로 부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3. 남분과 북분 출토 칠기에는 품질면에서 차이가 있다. 남분에는 중국칠기의 계보를 잇는 협저제칠기, 포태칠기 등 고급품이 다수 부장되어 있다. 북분에는 남분에서 출토된 칠기보다 제작방법이 간단한 목심제칠기가 많다. 4. 북분에서 출토된 흑칠지에 동물이나 새 문양이 그려진 용기류는 대부분 목심제칠기로 제작 공정이 비교적 간단하다.
1467년에 완성된 원각사13층석탑은 한국 역사상 최후의 호불군주에 의한 최후의 도성불탑이다. 필자는 세조가 즉위 10년을 맞이하여 도성(都城) 중심부에 13층석탑을 세우고 탑에 석가사리(釋迦舍利)와 함께 '신역원각경(新譯圓覺經)'을 봉안한 뜻을 세조의 관점에 입각하여 살펴보았다. 머리말에 이어 제II장에서는 13층탑의 경전적 배경을 다각도로 고찰하였다. 특히 필자는 13층탑 건립의 직접적인 소의경전으로서 『대반열반경후분(大般涅槃經後分)』을 최초로 발굴하고, 이 경전이 7세기 후반 중부 자바에서 번역되고 동아시아에 유통된 사실을 추적하였다. 아울러 13층탑의 기원으로서 이른바 카니시카양식의 탑을 주목하고 동아시아와 한국에서의 13층탑 조성 사례를 개관하였다. 그리고 불교문헌을 탐색하여 '13층'이 깨달음[Buddha]으로 나아가는 수행 단계를 상징함을 입증하였다. 확실히 '13'은 불교도에게는 매우 특별하면서도 신성한 숫자라 할 수 있다. 이어서 제III장에서는 세조의 원각사13층탑 건립의 불교적 정치적 함의를 탐색하였다. 불교적 함의와 관련해서는, 세조가 중국에서 직접 구입하여 조선에 최초로 유통시킨 『번역명의집(翻譯名義集)』과, 그가 최초의 한글 번역에 직접 개입한 『원각경(圓覺經)』에 주목하였다. 『번역명의집』은 14세기에 출현한 일종의 불교용어집인데, 세조는 원각사탑을 창건할 무렵 이 문헌을 통하여 13층탑의 소의경전인 『대반열반경후분』을 알았을 것으로 추론하였다. 한편 세조는 대장경 전체를 상징하는 단일경전으로 '신역 원각경'을 원각사탑에 봉안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그가 최초의 한글 번역에 깊이 관여한 『원각경언해』였다. 아울러 『원각경언해』의 저본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 달리 종밀(宗密)의 『원각경략소(圓覺經略疏)』임을 밝혔다. 원각사탑 건립의 정치적 함의와 관련해서는, 조선 초 왕실의 능사(陵寺)(또는 진전사원(眞殿寺院))에 세워진 석탑-경천사13층석탑(敬天寺13層石塔), 개경사석탑(開慶寺石塔), 연경사석탑(衍慶寺石塔), 신륵사다층석탑(神勒寺多層石塔)-들을 비교 검토하였다. 그 결과 세조가 자신의 왕위계승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정치적 상징으로서 원각사13층석탑을 건립하였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본고에서 필자는 13층탑으로서의 원각사탑의 의미체계를 온전히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여말선초 정점에 달한 불탑 문화를 이해할 뿐 아니라, 카니시카대탑에서 기원하고 『대반열반경후분』에 근거하는 동아시아의 13층탑을 연구하는 데 한국적 연구모델로서 기여하리라 기대된다.
해방 직후 한국 고고학의 성립기에서 청동기시대의 설정은 가장 핵심적인 성과중 하나이다. 일본의 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금석병용기시대를 반박하고 청동기시대라는 개념을 안착시키고 청동기 연구의 기반을 수립한 대표적인 인물은 윤무병이라는 데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동안 윤무병의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꼽히는 세형 동검의 형식분류와 전개과정이외에도 청동기시대의 설정도 주요한 성과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한국 지석묘 연구 프로젝트로 일환으로 진행된 파주 옥석리의 발굴이 한국 청동기시대의 설정에 결정적인 근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본 고에서는 이러한 윤무병의 성과를 그와 함께 한국 고고학계를 주도한 김원룡과 비교하여 살펴보고, 아울러 해방이후 한국 고고학을 둘러싼 환경도 고려하여 그 현상을 해석했다. 윤무병의 연구는 동아시아재단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재정적 지원이라는 하드웨어적 기반과 일본 고고학에서 출발한 정치한 형식적 기법이 결합된 것이다. 한편 자료적 측면에서 본다면 아울러 195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개시된 북한연구의 소개와 북방 지역 자료를 소개한 김원룡의 역할 등이 주요한 역할을 했다. 이와 같이 윤무병의 연구는 1960년대 탈식민지라는 주요한 과제를 한국 고고학계가 어떻게 성취했는가를 볼 수 있는 주요한 근거가 된다. 다만, 일본 편년관의 의존으로 청동기시대의 편년관을 지나치게 낮게 잡아서 한반도 청동기의 편년을 '문화지체 현상'에 근거하여서 만주나 북한과는 동떨어지게 본 점은 한계로 지적된다. 물론, 21세기의 시각으로 윤무병의 연구를 재단하거나 폄하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오히려 윤무병이 견지했던 유물에 대한 천착이라는 고고학적 전통을 새로운 연대관과 거시적인 안목에 결합하여 새로운 연구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21세기 세계화와 거시적인 안목으로 한국 고고학의 저변을 확장해야하는 시점에 윤무병의 연구를 다시 살펴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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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일 2004년 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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