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독립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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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적관계 국가들에 대한 연구 - 숙적관계 종식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요인들을 중심으로 - (Understanding Contemporary Interstate Rivalries: Consensus Rivalries and Rivalry Termination)

  • 오순근
    • Strategy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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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권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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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2-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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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서구 근대 국제관계학의 태동은 "전쟁의 원인"을 밝혀내려고 했던 유럽 지식인들의 학문적 도전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1, 2차 세계대전의 잔혹함을 겪으면서 이들은 전쟁(특히 전쟁의 원인)에 대한 좀 더 과학적인 연구를 통해 어떻게 하면 국가들 간의 전쟁을 예방할 수 있을까에 집중해 왔다. 이러한 학문적 경향을 반영한 것이 잘 알려진 미국 미시간 대학의 "전쟁 상관성 연구 프로젝트(Correlates of War Project)"이다. 이는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비엔나체제가 시작된 1815년 이후 국가들 간 발생한 모든 전쟁 관련 자료를 데이터베이스화하여,국제관계학자들이 전쟁(Interstate War)이나 군사분쟁(Militarized Interstate Disputes)을 정량 또는 정성적으로 연구할 수 있도록 다양한 정보들을 제공하고 있다. 최근 Paul F. Diehl, William R. Thompson과 같은 학자들은 전쟁을 분석단위로 하는 전쟁의 원인(Causes of War)을 연구하는 학풍에서 벗어나, 국가들 간의 분쟁과 전쟁을 연구하기 위해 숙적관계(Rivalry)라는 새로운 분석의 단위를 제시하였다. 숙적관계는 국제관계에 있어서 지속적으로 분쟁 또는 전쟁을 일으키는, 즉 무력분쟁의 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두 국가를 일컫는다. 국가들 간의 숙적관계는 학자들에 따라 Interstate Rivalry, Enduring Rivalry, Strategic Rivalry 등 다양한 정의와 성격을 갖고 있다. 이러한 국가들의 사례로는 2차대전 이전까지 프랑스-독일 관계, 2차대전 이후 중동지역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 간의 관계, 냉전기 미소관계, 인도-파키스탄 및 남북한 관계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렇게 널리 알려진 숙적관계 외에도 남미의 칠레-아르헨티나, 에콰도르-페루와 아프리카의 소말리아-에티오피아 등 학자들에 따라 1815년 이후 약 200개의 숙적관계를 제시하고 있다. 숙적관계에 대한 연구는 기존의 전쟁의 원인 중심이었던 정량적 국제분쟁 연구에 두 국가의 분쟁역사를 포함시키는 정성적 연구를 접합시키고 있다. 본 연구는 1945년 이후 숙적관계 국가들의 관계종식과 관련하여, 거시론적이고 전체론적 접근방법(Macro - level Holistic Approach)을 제시하고 있다. 먼저 1945년 이후 발생한 국가들 간의 숙적관계 종식(Rivalry Termination)을 이해하기 위해, 거시적 관점에서 숙적관계를 발생시키게 된 역사적 원인을 살펴보고 있다. 특히 1945년 이후 숙적관계와 관련된 중요한 요인들 중에서 전쟁, 영토분쟁, 그리고 근대국가 형성에 대해 살펴보고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명제(proposition)를 제시한다. 첫째, 1945년 이후의 숙적관계 형성과 지속에는 2차대전 이후 독립국가 형성, 헌팅턴이 주장한 제3의 물결(민주화), 그리고 냉전기 미소경쟁 등의 역사적 배경이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둘째,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 더하여 1945년 이후 숙적관계는 전쟁에 의해 시작된 숙적관계와 전쟁 없이 시작된 숙적관계 등 2가지로 나눌 수 있으며, 전쟁에 의해 시작되고 영토분쟁과 근대국가 형성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숙적관계가 그렇지 않은 숙적관계에 비해 오랫동안 지속되며 관계해결이 어렵다는 것이다. 앞서 제시된 2가지 명제들과 관련하여 본문에서는 다양한 학자들이 제시한 숙적관계 정의들에 일치하는 23개의 숙적관계(Consensus Rivalries)를 선정하여 이들에 대한 비교분석(Descriptive Analysis)을 실시하였다. 이들 사례들을 1945년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숙적관계 형성과 종식에 있어 핵심요소인 국가들 간 힘의 차이(Power Relations), 분쟁의 주요 원인(Primary Conflict Issue), 숙적관계에 있어 다른 국가들과의 연계성(Rivalry Linkage), 전쟁의 횟수와 시기 등을 통해 비교하였다. 숙적관계의 종식과 관련하여 약소국 간의 숙적관계(Minor Dyad)가 오래 지속되고, 영토분쟁(Territorial Disputes)이 숙적관계를 지속시키는 주요인이며, 다른 숙적관계와의 연계성이 적은 숙적들이 오래 지속된다는 비교분석 결과가 나왔다. 또한 전쟁의 횟수는 숙적관계 종식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만 전쟁으로 인해 시작된 숙적관계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더욱 오래 지속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끝으로 2차대전 이전의 숙적관계는 대부분 전쟁을 통해 종식되었지만, 1945년 이후에는 전쟁 없이도 숙적관계가 종식된 경우가 많았음을 보여 주고 있다. 본 연구의 주목적은 "1945년 이후 형성된 숙적관계를 어떻게 종식시킬 수 있을 것인가?"라는 규범적 논제를 통해, 23개의 주요 숙적관계를 발굴하여 거시적, 역사적 관점에서 비교분석함에 있다. 이는 특히 우리나라가 처한 현실과 관련하여 중요한 시사점을 갖는다. 남북관계가 갖는 특수성보다는 1945년 이후 국제정치 역사속에서 발생한 숙적관계 현상이라는 일반성의 틀에서 남북관계를 이해하고자 했다. 남북관계를 베트남, 예멘, 독일 등 분단국가의 사례들과만 비교 연구하는 제한된 시각에서 벗어나, 인도-파키스탄, 그리스-터키, 에콰도르-페루 등 유사한 숙적들 간의 관계들과 비교하는 새로운 연구의 장을 제시하고자 한다. 따라서 앞으로 숙적관계 종식에 대한 더욱 다양화된 사례연구를 통해 한반도 분쟁해결에 필요한 새로운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2차대전 이후 발생한 국경을 접하고 있는 비강대국들의 평화적인 숙적관계 종식에 대한 사례연구는 남북한이 앞으로 지향해야 할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본 연구는 특정한 정책적 함의를 도출하기 보다는 숙적관계와 관련된 하나의 거시적 이론를 제시하고, 주요 숙적관계 국가들에 대한 비교설명을 통해 현존하는 숙적관계 해결을 위한 하나의 분석의 틀을 제시하는 것으로 국제분쟁 연구에 기여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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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정체성과 국가형성과정에서 정보의 역할 연구 (The Role of Intelligence Activity in the Building of Israel and its Identity)

  • 석재왕
    • 시큐리티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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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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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51-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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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본 논문의 목적은 이스라엘의 정보활동이 정체성 즉 국민들의 자의식의 형성과 변화, 그리고 국가건설 과정에서 미친 영향력을 분석하는데 있다. 19세기말 유대인들은 역사의 희생자 이미지를 공유하고 있었으며 이들에 대한 박해는 정치적, 신앙적 공동체인 독립국가 이스라엘 건설을 추동하는 요인이 되었다. 당시 이스라엘의 정보요원들은 유대인들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시키는 한편, 아랍인들과 투쟁하면서 국가건설에 매진했다. 다시 말해서, 정보활동은 유대인들의 국가건설을 위한 민족주의인 시오니즘을 구현하는 수단인 셈이다. 1948년 독립이후에도 정보기관은 아랍 국가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소련 등 국가들과 협상을 통해 UN에서 공식적으로 국가승인을 획득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아랍 국가들로부터 '사라져야할 국가'로 인식되면서 국가정체성이 부인되었다. 이후 4차례에 걸친 전쟁에서 승리와 이집트와 정상회담을 통해 비로소 국가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이를 성서상의 '약속의 땅'의 회복이라는 예언의 성취로 이해하며 승리자로서의 정체성을 공유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이스라엘에서 정보활동은 국가의 독립과 건설, 그리고 국민들의 자의식의 형성과 변화를 유발한 기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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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소음.진동 대책의 현황과 장래 (Vehicle N.V.H - Today and Tommorrow)

  • 이충구
    • 한국소음진동공학회:학술대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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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소음진동공학회 1993년도 춘계학술대회논문집; 한국과학연구소, 21 May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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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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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3
  • 최근 인간의 생활을 가장 크게 바꾸어 놓은 수단중 하나가 바로 자동차이며 자동차문화라는 새로운 환경에서의 생활에 점점 더 익숙해져 가고 있다. 한 편 치열해지고 있는 무역전쟁, 경제전쟁에 있어서는 자동차가 가장 큰 주목 을 받고 있으며, 기술의 고도화를 통해 경쟁력을 제고시키는 것이 곧 오늘날 의 국제 경쟁에서 승리 할 수 있는 중요한 관건으로 인식되고 있다. 자동차 기술의 발달 과정은 크게 두 가지 요소의 요구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한 노 력의 결과로 점철되어 왔다. 이들은 주위 환경 여건과 소비자의 욕구로 볼 수 있으며, 전자의 경우는 환경 보전과 사회적, 법적 측면에서 요구되는 자 동차의 구조, 성능 기준이고, 후자의 경우는 순수하게 고객 즉 사용자의 입 장에서 본 욕구이다(물론 이들 두 가지가 완전히 독립된 것은 아니다). 따라 서 자동차의 기술 발달 과정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경향들은 이들 두 가 지 요소에 포함된 특정한 구조나 성능들이 주요 관심사로 되는 것과 부합되 어 나타나기 마련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최근의 자동차 관련 기술중 관 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공해, 안전, 성능, 경제성 등을 들 수 있으며 이들은 모두 당연히 자동차 산업의 사활을 좌우하는 요소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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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의 「만주기사(滿洲紀事)」 분석을 통해 본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의 하급교육기관 실태 - 유하(柳河)·통화현(通化縣)을 중심으로 - (Actual Condition on Preliminary Educational Organizations of Sinheung Military Academy Confirmed from Manjugisa by Yi Sang-nyon - Focused on Liuhexian·Tonghuaxian)

  • 박성순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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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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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3-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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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신흥무관학교는 신민회 인사들의 숙의에 따라서, 국망 직후 서간도에서 독립전쟁을 위한 배후기지로서 가장 먼저 설치된 곳이었다.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부터 1920년대까지 약 10년 간에 걸쳐서 무려 3,500명의 독립운동 간성들을 배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10년 세월 동안 많은 수의 학생들이 어떻게 충원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이 없다. 필자는 신흥무관학교의 학생 충원문제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이상룡(李相龍)의 "만주기사(滿洲紀事)"를 주목하게 되었다. "만주기사"는 총 16편에 이르는 연작 시이다. 이상룡은 신흥강습소를 설치한 후부터 양성한 군사가 오륙백에 이른다고 회고하였으나, 지금까지 연구자들은 이 부분을 단지 문학적 수사로 치부하여 간과한 측면이 있었다. 한편 제6편에서는 추가가에 정착한 후 8년 동안 건립한 소학교가 30개 소에 이른다고 회고하였다. 필자는 이를 바탕으로 신흥강습소 초기부터 길러낸 5백 명 이상의 학생들이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을 포함하여 인근의 하급교육기관, 즉 소학교 학생들을 통칭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그 소학교들을 구체적으로 증명하였다. 유하 통화 지역 소학교 학생들은 졸업 후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학규에 따라서 2년 간 의무적으로 인근 소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군사교육을 포함한 소학교 교육을 담당하였다. 결국 신흥무관학교와 그 인근의 소학교들은 독립전쟁이라는 큰 목적 하에서 서간도 한인들에 의해서 유기적으로 운영되었던 커다란 독립운동의 군영이었던 셈이다.

1차대전 연합군 총사령관 포슈 장군 군사사상의 현대적 함의 (Contemporary Application of General Foch's Military Thought)

  • 임종화
    • 산업진흥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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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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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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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이 논문은 프랑스 포슈 장군의 군사사상을 분석·규명하여 현실전의 최선방책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1. 포슈의 생애: 보불전쟁 패전으로 프랑스 명예회복을 인생목표로 삼아 군문에 들어선 후 육군대학 교수로서 실전의 지휘관으로서 1차대전의 연합군총사령관으로서 필승의 정신전력을 강조하며 대전을 승리로 종결짓는데 공헌하였다. 2. 포슈 활동기의 시대적 배경: 나폴레옹 실각이후 야기된 일련의 혁명은 유럽에 파급되어 근대국민국가 탄생을 위한 독립 및 통일전쟁의 격화와 해외식민지쟁탈전 심화를 초래하여 포슈 활동기의 유럽은 전 분야가 총체적인 위기일발의 상황이었다. 3. 포슈의 군사사상: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 심층연구를 통하여 기술존중과 전승을 위한 공격적 전투수행의지가 담긴 정신전력의 절대 중요성을 강조한다. 4. 포슈 사상의 현대적 함의 : 전투정신이 실추된 군대에게 필승의 정신전력의 중요성을 각인시키는 것은 전장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고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5. 결론 : 정신전력 등 무형전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포슈의 군사사상은 높이 평가하여 현대전은 필승의 정신전력과 최신의 정예무기활용의 균형적 조합이 최선의 결과를 초래한다는 교훈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6.25전쟁 이후의 중·북부지역 가면극의 변화양상 (The changes in the Korean Mask Dramas of the Central and Northern Regions after the Korean War)

  • 전경욱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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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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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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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한국의 가면극은 대부분 세시풍속의 하나로 연행되었으며, 동제·줄다리기·지신밟기·횃불싸움·길놀이·사또놀음 등 여러 세시행사와 연계되어 전승되었다. 6.25전쟁 이후에는 이러한 세시행사와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연행하기 때문에 원래의 기능과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또한 연행시간이 대폭 줄어들었기 때문에 연희내용, 노래, 대사를 많이 생략하고 있다. 북청사자놀이는 6.25전쟁 이후 사자춤이 한 마리에서 두 마리로 늘어났고, 애원성춤·사당춤·넉두리춤·칼춤을 새로 추가했다. 사자가 아이를 잡아먹던 내용도 토끼인형을 잡아먹는 내용으로 바뀌었다. 사자가면은 원래 여러 유형이 있었으나, 현재는 호랑이 모습의 가면으로 획일화되었다. 양주별산대놀이는 '애사당 법고놀이'에서 먹중 8명과 왜장녀·애사당 등 모두 10명이 등장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데, 현재는 이외에 말뚝이 가면을 쓴 배역이 등장한다. 현재의 연희에서는 성(性)과 관련된 노골적인 부분을 생략하고 있다. 또한 신할아비·미얄할미 과장에서 할미의 죽음 후에 예전에는 신할아비가 넋타령을 했는데, 최근에는 무당굿을 한다. 대사에서는 비속어와 육담을 대폭 생략하고 있다. 가면은 특히 연잎·옴중·샌님가면이 큰 변화를 보인다. 봉산탈춤은 6.25전쟁 이후 노장과장에서 가장 큰 변화를 보인다. 예전에는 소무가 두명 등장했으나 현재는 한 명만 등장하고, 신장수와 원숭이의 퇴장도 차이를 보인다. 예전의 가면들은 연희자가 내다볼 수 있는 구멍을 코 양옆으로 크게 뚫었지만, 현재의 가면들은 가면의 눈동자에 구멍을 뚫어놓았다. 특히 먹중가면이 큰 변화를 보인다. 봉산탈춤을 복원할 당시에 봉산 출신의 연희자가 적었기 때문에, 다른 해서탈춤의 연희자들과 함께 연희를 복원했다.

라틴아메리카의 독립과 이베로-아프로-아메리카 공동체의 역할 (Independence of Latin America and the Role of Afro-Ibero America: Mainly with Cimarron's Resistance and Comuneros Revolution)

  • 차경미
    • 비교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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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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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5-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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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Meantime there has been a tendency to keep silent about the role of Afro-Ibero America Diaspora which contributed to the spirit of independence and the realization of country foundation ideology in the official history of Latin America. In some countries, although the collective resistance of Afro-Ibero America Diaspora, which intended to establish a liberal and equal society resisting against slavery and colonization system, was the foundation of independence and the establishment of a new country, their contribution has been difficult to leave an official trace in Caucasian criollo-centered history system. Along with the development of Hcienda in 17th Century, black slaves' collective resistance was developed mainly with el Virreinato de la Nueva Granada, the center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of Brazil and South America. The black people who escaped resisting against slavery formed communities and developed organized activities through various politics and social activities. However, such communities were mostly dispersed or destroyed by the colonial power, and the collective resistance of Afro-Ibero America Diaspora lost life. On the other side, in case of Colombia, a community of escaped black slaves which was formed in the early 17th Century is solely remaining in Latin America, moreover, Afro-Ibero America Diaspora's struggle for liberty and equality became the foundation for Comuneros revolution and Independence movement in the late 18th Century. Comuneros revolution which occurred in 1781 awoke self-awareness of liberty and equality, and became an ideological base for independence movement based on revolutional republicanism and philosophy of enlightenment. It is considered that South America's independence movement lead by $Sim{\acute{o}}n$ Boívar was a history that could not have started without historical base of Afro-Ibero America Diaspora's resistance against colonization system. Therefore, this study intends to discuss the role and achievement of Afro-Ibero America Diaspora in the process of independence of Latin America mainly with Colombia, which is the center of Independence movement of South America. Through this process, this study intends to revaluate historical contribution of Afro-Ibero America which has been relatively neglected meanwhile in the process of independence and the establishment of country.

DEVS 형식론에 기반한 하이브리드 시스템 모델링 시뮬레이션 방법론

  • 임성용;김탁곤
    • 한국시뮬레이션학회:학술대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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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시뮬레이션학회 2000년도 추계학술대회 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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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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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
  • 하이브리드 시스템의 행동 표현을 각각의 시스템에 적합한 모델링 형식론으로 표현하면, 각각의 모델이 지니고 있는 정확도를 유지할 수 있고, 수행속도를 증가시키는 이점을 가지게 된다.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모델링 하는 과정에서 시간 진행에 따른 수행 의미의 고찰은 모델링 방법에 중요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이산 사건 시스템과 연속 시간 시스템간의 입출력 교환을 위해서, 사건을 연속 입력으로 변환하고, 연속 출력을 사건으로 변환하는 인터페이스를 표현하는 형식론을 정의하고, 시뮬레이션의 시간 진행에 따른 종속 관계 방법과 독립 관계 방법을 모두 수행할 수 있는 알고리즘을 제안한다. 이 때, 이산 사건 시스템은 DEVS 형식론에 기반한 알고리즘으로 수행하고, 연속 시스템을 미분방정식의 산술적 누적 알고리즘에 따라 수행하는 통합 환경을 구축하며, 이를 바탕으로 두 미사일의 격추 예제를 수행하여 전쟁 시뮬레이션 분야에 적용가능성을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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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대만몽동맹관계(淸代滿懜同盟關係) 특징에 관한 연구 (A Study of the Characteristics of the Manchu-Mongol Alliance during the Qing Dynasty Era)

  • 임종화
    • 산업진흥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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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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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5-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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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본 논문의 국어제목은 "청대만몽동맹관계(淸代滿懜同盟關係) 특징에 관한 연구"이다. 본 연구는 17세기 초반 동아시아 명청전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청나라를 건국한 만주족이 어떻게 국력의 열세를 극복하였는지에 관해 서술하였다. 청나라는 총 12명의 황제를 배출하였다. 그 시호들을 살펴보면 한족의 이름, 몽골족의 이름, 만주족의 이름이 각각 독립된 개체로써 기록된다. 본론에서는 만주족들이 몽골과의 동맹에 대해 서술될 것이다. 연구결과, 만주족의 건주여진들은 명나라와의 전쟁을 진행하기 위해 몽골귀족들과 혼인을 통해 전략적인 동맹을 맺었다. 또한 팔기제도라는 것을 통해 사회구성원들을 전투에 최적화된 집단으로 재편하는데 성공했다. 이 팔기군 안에는 동맹을 맺은 몽골족과 전투중인 명나라의 귀순병들까지 포함시켜 명나라와 대적할 만한 전투 집단을 만들었다. 만주족들은 이 팔기제도와 몽골과의 혼인동맹을 통해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도 열세였던 명나라를 제압하고 결국에는 중국 전체를 통일하는 저력을 발휘했다.

조선시대 설인귀 서사의 대중화 양상과 그 시대의식 (A Popularise Aspects and Consciousness of Times about Seol-In-Gui's narrative in the Joseon Dynasty)

  • 서혜은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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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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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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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이 논문은 <설인귀전>의 여러 이본과 <당태종전> <울지경덕전> <천개소문전> <서정기> <설정산실기> <번리화정서전>을 대상으로 조선시대 설인귀 서사의 대중화 양상과 시대의식을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설인귀는 여 당 전쟁 당시 활약했던 당나라 장수이다. 적국의 장수였던 설인귀에 대한 서사가 조선시대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임병양란 이후 강성한 국력을 지녔던 고구려사를 재인식하고 고토회복 담론의 부각으로 인해 가능했다. 또한 설인귀 서사와 유사하게 전개되는 <소대성전>이 인기를 확보하고 있었고 설인귀와 함께 여 당 전쟁에서 활약했던 당태종과 울지경덕에 대한 고사가 성행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 속에서 설인귀의 요동 정벌 서사와 영웅성이 점진적으로 부각되고 <설인귀전>에 등장한 당태종 울지경덕 합소문에 대한 독립 서사가 형성되며 여성 영웅들이 서번을 정벌하는 서사로 확장된 설인귀의 후속 서사가 수용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대중성을 확보했다. 이러한 설인귀 서사의 대중화 양상에는 민중과 여성의 등용과 이민족 세력 통합의 필요성과 국력이 약화된 조선의 현실과 함께 중국을 견제할 국력을 강화할 필요성을 제시하는 시대의식이 반영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