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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고등학교 지리교과서에 나타난 한국 관련 담론 분석 (Korea-Related Discourse Analysis of High-School Geography Textbooks in Japan)

  • 조철기
    • 대한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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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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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55-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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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본 연구는 일본 고등학교 지리역사과 학습지도요령과 지리 교과서를 대상으로 하여 한국 관련 내용의 선정 근거 및 서술의 특징을 분석한 것이다. 학습지도요령에서는 두 세 개의 '근린제국(이웃국가)'을 선정하여 그들의 생활 문화를 일본과 비교하여 유사성과 차이를 이해 존중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근린제국과 관련한 지역학습이 생활 문화에 초점을 둠으로써 자연환경 내용은 이들에 영향을 주는 요인으로서 일부 다루어지고 있을 뿐이다. 독도는 대부분 분쟁 가능 지역으로 기술하고 있지만, 일부 교과서에는 시마네현의 영토로 명기하거나, 지도상에 일본의 영토로 표기 한 사례도 있다. 한국의 독특한 생활 문화로는 문자로서 한글, 사상으로서 유교, 종교로서 불교와 기독교, 의식주로서 한복, 쌀과 국, 불고기와 가위, 숟가락과 젓가락, 온돌 등에 대해 삽화를 곁들여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한일 교류와 관련하여서는 정치 경제적 교류보다는 최근에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예술과 스포츠 분야 교류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와 같이 일본의 지리 교과서는 주로 생활과 문화에 초점을 둠으로써 인간이 중심이 된 지리를 실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례 지역과 일본과의 상호 비교를 통한 유사성과 차이에 초점을 둠으로써 지식과 이해의 성장뿐만 아니라 이타심과 공감적 이해의 발달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이는 세계화 및 다문화 시대에 요구되는 대안적인 지역학습의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대한제국의 최초 황제릉인 금곡 홍릉의 정체성 (A Study on the Identity of Geumgok Hongneung as Origin of Imperial Tomb in Korean Empire)

  • 홍윤순;이종영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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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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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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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본 연구를 통해 대한제국 최초의 황제릉인 금곡 홍릉의 조영특성에서 발견되는 '정체성'을 해석코자하였으며 그 결과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우선 정체성을 구성하는 양면적 국면 중 내적 자기인식인 '동일성' 측면에서 홍릉은 조선왕조의 번성기를 계승하면서도 명성황후의 청량리 홍릉과 연계되는 '지속성'을 보유하며, 황제 및 황제국가로서의 자존감을 드러내기 위한 다양한 '동일화'의 환경을 드러낸다. 반면 이와 반대되는 국면인 '외적 타자인식'으로서의 '개별성' 측면에 볼 때, 고종황제의 의지와 일제의 간섭이 혼재된 홍릉은 기존의 전통과 구별되는 '특이성'을 통해, 조선왕릉 5기의 양식을 탄생시키는 결과를 이루게 하였다. 아울러 홍릉의 가치는 당시의 혼란스럽고 어려웠던 시대상을 진정성 있게 투영하며, 고종의 국장과 3.1운동 촉발의 장소이라는 '수월성' 역시 보유한다. 이렇듯 금곡의 홍릉은 세계적 문화유산인 조선 왕릉 중에서도 당시의 시대상을 극명하게 반영하는 기록경관인 동시에 역사경관이며, '황제릉'이라는 독특한 특질을 드러내는 비범한 경관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왕실과 대한제국 황실 어보 보수(寶綬)의 재료학적 분석 (Material Analysis of Bosu of the Royal Seals of the Joseon Dynasty and the Korean Empire)

  • 이혜연;김주영;조문경;김민지;박대우;이정민
    • 보존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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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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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4-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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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조선의 어보는 국가 왕실을 상징하는 인장이다. 보수(寶綬)는 어보에 달린 붉은 끈으로, 어보의 품격을 높여주는 장식의 목적과 취급의 편리를 위해 제작되었다. 보수는 끈목과 방울술로 이루어졌다. 본 연구는 1441년부터 1928년까지 제작된 조선 왕실 및 대한제국 황실 어보의 보수 총 318점을 대상으로 형태 조사, 색상, 재질, 성분 분석 등을 실시하였다. 연구 결과 끈목은 시기가 후반으로 갈수록 길어지고 얇아지는 양상을 보인다. 방울술은 1800년대 중후반부터 방울목이 대부분 사라지고 술 끝에 고리가 나타난다. 보수의 색상은 대부분 다홍색이지만 주황색과 자주색도 확인된다. 보수의 재질은 대부분 실크로 확인되지만 1900년대 제작된 어보의 보수 5점과 1740년대에 제작된 어보의 보수 1점은 레이온으로 추정된다. 1740년대에 제작된 어보의 보수는 1900년대에 교체된 것으로 보인다. 방울술을 장식하는 금지의 주요 성분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1800년대 중반까지는 술과 방울에 금(Au)이 주요 성분인 금지를 사용하지만 1800년대 중반 이후부터 술에는 금(Au), 방울에는 황동(Cu-Zn)이 주요 성분인 금지를 사용하다가, 후반 이후 술과 방울에 황동이 주요 성분인 금지를 사용하였다. 보수는 어보의 한 부속품이지만 본 연구를 통하여 시대에 따른 제작 기법과 재질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일제시대 신품종 벼의 도입과 보급 (A Diffusion of Transplanted Rice Varieties in Colonial Korea)

  • 홍금수
    • 대한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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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8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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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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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
  • 식민화는 정치경제적인 현상일 뿐만 아니라 사람, 작물, 잡초 가축. 병원균의 이식을 수반하는 생태적 제국주의의 또 다른 표현이다. 일제시대 한반도는 일본에서 개발한 신품종 벼가 도입. 개발, 보급되는 생물학적 식민주의의 실험장이었다. 신품종은 빠르게 퍼져나가 강점기 후반이 되면 수도 재배면적의 90%이상을 점거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신품종의 전파에는 일차적으로 농업이민, 농장. 권농기관. 농업연구기관이 관여하였다. 제도와 정책적인 측면의 지원도 활발했는데. 장려품종 지정. 품평회 개최. 곡물검사소 설치. 중견인물양성소 설립, 농회보를 통한 소개의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화학비료의 투입을 전제로 하는 신품종 벼는 먼저 자본이 부족한 소농의 입지를 축소시켰다. 생산된 미곡은 대부분 반출되어 국내의 식량문제를 초래하였고, 농민으로서는 일본 소비시장의 기호변화에 맞추어 영농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등 왜래 품종의 이식으로 한반도의 종속적인 상황은 더욱 강화되었다. 일선 농촌에서는 새로운 농법과 영농설비의 도입으로 우리 고유의 문화경관이 크게 변질되었다.

조선시대 목판재료 자작목(自作木)의 실체와 명칭 변화 (The True Identity and Name Change of Jajak-mok, the Wood Species for Woodblock Printing in the Joseon Dynasty)

  • 이운천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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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6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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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6-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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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조선시대 왕실 출판 과정에서 책판의 주요 수종으로 사용된 나무는 '자작목(自作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명칭을 보면 껍질이 하얀 자작나무가 연상되지만, 문헌에 기록된 산지(産地)와 쓰임을 살펴보면 조선시대의 '자작목'은 우리가 알고 있는 자작나무와는 다른 나무로 추정된다. 본고는 조선시대 왕실 출판에 사용된 '자작목'이 실은 거제수나무이고,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껍질이 하얀 자작나무는 우리말 봇나무 즉 '화목(樺木)'이었음을 밝히고자 한다. 더불어 조선시대 거제수나무를 지칭하던 '자작목'이 어떠한 연유로 껍질이 하얀 자작나무를 지칭하게 되었는지 살펴본다. 당시 일본에서는 '화(樺)'라는 글자를 산벚나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는데, 18세기 중반에 일본의 백과전서류가 조선으로 들어오면서 지금의 자작나무를 의미하는 '화목'과 혼용되게 되었다. 더욱이 '화목'의 우리말인 '봇나무'와 산벚나무의 우리말인 '벗나무'는 발음마저 비슷하여, 이후 두 나무는 '벗나무'로 표기가 통일되었다. 그러던 것이 20세기에 들어 세 나무의 공식적인 명칭이 정리되었다. 1910년 대한제국농상공부고시와 1912년 조선총독부고시에 의하여 '화목'은 '자작나무'가 되었고, 이후 산벚나무를 뜻하는 '벗나무'는 '벚나무'가 되었다. 그리고 본래의 '자작목'에는 '거제수'라는 이름만이 남게 되었다. 오늘날 한자 사전에서는 '화(樺)'의 뜻을 '1. 벚나무 2. 자작나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세 나무의 명칭이 혼용되었던 역사적 배경을 엿볼 수 있다.

통감부시기(統監府時期)(1906-1910)의 삼림정책(森林政策)에 관한 고찰(考察) - 완도봉산(封山) 불하미수사건을 중심으로 - (A Revisit to the Forest Policy of Korea during the Period of 1906-1910 under the Spheres of Influence of Japan - With a Special Reference to an Attempted Incident of Wando Bongsan -)

  • 배재수;윤여창
    • 한국산림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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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84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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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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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5
  • 이 논문의 목적은 완도봉산의 불하미수사건을 중심으로 통감부 임업정책의 성격을 규명하려는데 있다. 일제에 의한 통감부 설치는 세계사적으로 특수한 형태라기 보다는 당시 제국주의에 의해 널리 파급된 세력권 (Sphers of Influence)과 보호령(Protectorate)의 체현과정이라는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제국주의가 식민지를 만들기 위해 일정기간동안 약소국을 자국의 세력권하에 두고 외교권의 장악 및 내정을 간섭하여 이후 식민지로 만들어 나가고자 하는 통치기구로서 일제에 의해 설치된 통감부를 정의할 수 있다.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통감부가 임업정책의 목표로 삼았던 것은 크게 두가지로 볼 수 있다. 그 하나가 조선의 식민지화를 전제로 하여 대규모의 국유림 창출을 통한 산림수탈 및 조세수입의 안정적인 확보를 도모하고자 한 것이다. 통감부 영림창이 당사의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국가 산림경영기구(=수탈기구)로서 역할을 담당하였고 삼림법 부칙 제 19조를 통하여 강점 이후 막대한 국유림 창출의 기반을 조성하였다. 다른 하나는 일본자본의 조선 임업부분으로의 침투요구를 반영한 법적 조항의 제정이었다. 이를 가능케 한 것으로 삼림법 제3조 부분림 조항을 들 수 있다. 특히 후자의 요구, 일본인 자본이 조선 산림으로 침투하고자 한 최초의 사건으로 완도사건을 규정할 수 있다. 완도사건은 통감부라는 일제의 대리 통치기구와 친일관료, 일본인 자본가가 결탁하여 조선시대 이래로 금양되어 온 황장봉산을 일본인 자본가에게 불하하려는 제국주의적 의도로 규정할 수 있다. 이러한 증거는 통감부의 농상공부 차관 강희칠랑(岡喜七郞), 산림국 기토(技土) 도가충지(道家充之) 및 일본인 자본가인 강등항책(江藤恒策)의 회동에서 확인된다. 완도사건이 전해지자 민족일간지인 황성신문(皇城新聞)과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는 즉각적으로 통감부의 초법적인 행태와 친일매판 관료의 매국적인 의도를 강도높게 비판하였고 결국 1908년 12월 각의를 통해 불하불가판정이 내려졌다. 이는 통감부가 불하불가 판정을 내리기를 원했던 것이 아니라 당시 민족일간자의 선도적인 노력과 국민적 반일감정으로 인해 통감부로 하여금 불하불가 관정을 강제해 낸 사건으로, 통감부 시기 [반일운동(反日運動)]으로 다시 쓰여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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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호안』 분석을 통해 본 개화기 경상남도의 가옥형태와 구조 (House Type and Household Structures of South Kyongsang Province in the Enlightenment Period)

  • 최영준
    • 대한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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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9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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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97-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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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 1904년 대한제국 정부에서 간행한 $\boxDr$경상남도가호안$\boxUl$은 총 31개군 가운데 11개군의 자료가 현전하는데, 이 자료는 당시 이 지방의 민가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담고 있다. 이 논문은 제1차자료인 가호안의 분석을 통하여 동ㆍ면ㆍ군별 가좌의 토지등급ㆍ가옥의 규모, 가좌와 가옥의 소유관계, 초ㆍ와가의 분포 등을 파악한 연구이다. 가호안의 분석결과 전체 가호의 약 20%는 사유지 또는 국공유지를 임대한 가좌에 지어졌다. 또한 가옥의 90%는 방 한칸 또는 두칸에 부엌이 딸린 집이었으므로 지역의 가옥규모는 2.75칸에 불과하였다. 다시 말하면 100년전 경상남도의 가옥규모는 조선시대의 이상 가옥형인 삼간초옥에도 못미쳤던 것이다. 이러한 열악한 주거조건 때문에 1인당 점유공간이 2-4평방미터에 불과하며 결과적으로 수용가능한 가족의 수도 4인 내외로 한정되었다.

조선시대의 일본지도와 일본 인식 (Maps of Japan and the Understanding of Japan in the Joseon Dynasty)

  • 오상학
    • 대한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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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8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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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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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
  • 조선은 교린정책을 바탕으로 일본과 교류하면서 일본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입수하여 지도를 만들었다. 1403년에 제작된 $\ulcorner$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lrcorner$에는 행기도 계열의 상세한 일본지도가 수록되어 있고. 1471년 간행된 신숙주의 $\ulcorner$해동제국기$\lrcorner$에는 보다 정교한 일본지도가 실려있다. 이러한 성과는 15세기 대외인식의 개방성에서 기인하는 바가 컸다. 16세기 이후 주자성리학이 사회운영의 원리로 정착됨에 따라 화이관에 입각한 일본 인식이 강해졌다. 이 같은 경향은 일본지도에도 반영되어 민간에서 유행되었던 각종의 여지도책에 수록된 일본지도는 수록된 내용이 간결하고 지형의 윤곽도 많이 왜곡되어 있다. 이러한 흐름과 별도로 통신사의 왕래가 활발해지면서 상세한 일본지도들이 유입되어 제작되었고.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일본에 대한 인식을 제고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19세기 말 전환기의 비엔나 아르누보에 대한 연구 (A Study on Art Nouveau in the late 19th century in Vienna)

  • 유보현
    • 디자인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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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2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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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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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9
  • 19세기 말, 새로운 예술에 대한 열정은 유럽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형태로 발전 되었으며, 이들의 활동은 단지 예술 행위와 활동에 국한 되지 않은, 영국의 미술, 공예 운동과 같은 사회개혁의 실천적 성격을 강하게 띄기도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비엔나는 유럽제국의 중심지로 성장하면서, 새로움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을 시도하는 은 예술가들의 중심 무대로 성장 할 수 있었다. 비엔나 아르누보 운동은 "모든 예술은 평등하다"라는 예술의 민주화 사상을 실천하려고 노력한 비엔나 분리파 등과 같은 선각자들과 이들이 활발히 활동 할 수 있었던 토양이 되어 준 비엔나의 정치, 경제, 문화적 배경으로 꽃 피울 수 있었다. 이들은 기계 기술문명을 거부하고 과거의 수공예적인 전통적 방법으로 희귀로 현실을 극복하고자 했던 미술, 공예운동 주의자 들과는 달리 기계 문명을 적극적으로 수용 함으로써 대량생산 시스템 속에서 새로운 형태 미학의 방향을 제시 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의 목적은 세기 말 전 유럽을 풍미했던 아프누보의 물결 가운데 하나의 신양식 운동으로 그친 대부분의 나라들과 달리 근대 기계 미학의 기초가 되었던 비엔나 아르누보 운동을 당시 시대적 배경과 기엔나 아르누보 운동을 전개한 분리파 들의 활동등을 통하여 고찰해 봄으로써 그 의의를 찾아내는데 있다고 하겠다.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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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연간(1863~1907) 제작 어보(御寶) 연구 (A Study on the Production of Royal Seals during the Reign of King (Emperor) Gojong (r. 1863-1907))

  • 제지현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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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4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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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6-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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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고종이 집권했던 1863년부터 1907년은 불안한 국내 정세와 열강의 침입으로 혼란한 시기였지만, 조선 왕실과 대한제국의 전환기로 왕(황)실의 어보(御寶) 제작에 있어 중요한 변화를 맞이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고종 연간 제작된 보인(寶印)은 대략 138과로 거북뉴(龜鈕)와 용뉴(龍鈕) 어보의 제작 장인, 조형을 분석하면 이시기 보인 전반을 이해할 수 있다. 고종 연간 활동했던 대표적인 금보장(金寶匠) 전흥길(全興吉)은 왕실에서 다양한 금속공예품을 제작하며 실력을 인정받아 활동했던 장인으로, 거북뉴 금보(金寶)와 용뉴 금보를 모두 제작할 수 있었던 뛰어난 장인이었다. 옥각수(玉刻手)·옥보장(玉寶匠)으로 활동한 김은석(金殷錫)도 전흥길과 마찬가지로 거북뉴 옥보(玉寶)와 용뉴 옥보를 모두 제작할 수 있었던 장인이었다. 또한 옥보장 이중려(李仲呂)의 활동도 주목되는데, 김은석이 활동하지 않는 동안 옥보의 새로운 양식을 창출했을 뿐 아니라 이 양식이 금보에도 적용되어 고종 연간 후반기인 1890년 이후 주요한 양식으로 자리하게 된다. 대한제국 수립 이후 제작된 용뉴의 경우 금보와 옥보가 유사한 양식을 공유하는데, 당시 『대례의궤(大禮儀軌)』에 기록된 장인들은 전흥길, 김은석 등 고종 연간 계속 활동해온 금보장, 옥보장이었다. 이들은 처음 용뉴의 어보를 제작해야 할 때 문헌이나 기록 등으로 중국의 용뉴 인장 형식을 차용하였지만, 용뉴 형태와 용 모습은 당시 조선시대부터 제작되어온 용 조각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어보는 왕실과 황실의 정통성과 권위를 상징하는 의물로, 국내외 정세에 따른 변화를 가장 많이 반영하는 공예품이다. 고종 연간은 역대 왕들의 재위 기간 중 어보가 가장 많이 만들어진 시기로 기존의 어보 제작 전통을 지키면서도 새로운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