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김창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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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인물성론(人物性論)의 초(初)·만년설(晩年說) 구분에 대한 비판 (A Critic on Analysis for theory of Nature between Human and Animal in Nongam Kim Changhyob)

  • 이종우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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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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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9-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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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에 대하여 당시 학계에서 그의 인물성론(人物性論)에 대한 해석에서 초년미정설(初年未定說)과 만년정론(晩年定論)이라는 논란이 일어났다. 오희상(吳熙常)은 "상우재중용의의문목(上尤齋中庸疑義問目)"은 초년미정설, "여권유도재론사변록변(與權有道再論思辨錄辨)"은 만년정론이라고 해석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동생 김창흡(金昌翕)도 "상우재중용의의문목(上尤齋中庸疑義問目)"을 초년미정설이라고 해석한다. 김창협의 제자 어유봉(魚有鳳)은 서변(書辨)과 잡식(雜識)을 만년정론이라고 해석하였다. 임성주(任聖周)는 잡지를 초년미정설과 만년정설이라고 해석하였다. 이로 인하여 현재의 연구자들도 그에 동조하여 김창협의 인물성론에 대하여 초년설과 만년설에 차이가 있다고 해석한다. 반면에 임성주는 김창협의 잡지에서 초년의 인물성동론이 만년에 인물성이론으로 고쳤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김창협의 "상우재중용의의문목(上尤齋中庸疑義問目)"에서는 기의 통색(通塞)으로 인하여 리도 그에 따라서 편전(偏全)이 있다고 말함으로서 인물성이론이 나타나고 있다. 반면에 "여권유도재론사변록변(與權有道再論思辨錄辨)"에서 직접 동론과 이론이 모두 나타나고 있다. 만물과 인간의 리가 같다고 여겼고 그것은 인물성동론을 의미한다. 반면에 인간이 생성될 때 형기의 정을 얻었기 때문에 그 성은 온전하지만, 다른 생물은 그 편을 얻었기 때문에 그 성이 온전하지 못하다고 하는데 그것은 인물성이론이다. 인물성동론의 이유는 리(理), 이론은 형기(形氣)의 차이에서 일어난다고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잡지에서 직접은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인물성동론과 이론이 나타나고 있다. 반면에 낙론의 어유봉과 오희상은 잡지를 만년정론이라고 해석한다. 같은 글에 대한 해석에서 이러한 차이점이 있다는 것은 결국 이들 모두 자신의 학설을 김창협에 가탁했다고 할 수 있다. 김창협의 인물성론에 대한 해석으로서 초년미정설과 만년정론은 후세 학자들의 구분일 뿐이다. 자신들의 학설을 김창협의 권위에 가탁했던 것이다. 결국 김창협에게서 그러한 변화는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남당 한원진의 김창협 지각론 비판 (Han Wonjin's Criticism of Kim Changhyup's Theory of Jigak)

  • 이선열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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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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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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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본 논문의 목적은 18세기 호학(湖學)의 종장이었던 남당 한원진의 김창협 지각론에 대한 비판을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는 것이다. 당시 호락논쟁에서 지각과 관련된 논쟁을 주도했던 인물은 김창협이었고, 따라서 당시의 지각 담론은 대체로 그에 대한 찬반 논의로 전개되는 양상이었다. 낙학(洛學)와 대립한 한원진에게 농암설을 성공적으로 반박하는 것은 호학(湖學)의 학파적 입장을 정립함에 있어 주요한 사안이었다. 쟁점은 주로 지각의 연원에 관한 문제, 혹은 지(智)와 지각(知覺)의 관계에 관한 문제였다. 김창협은 지(智)와 지각(知覺)가 본질상 별개의 범주에 속하며 양자 간에 체용(體用)의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는 지(智)와 지각(知覺)의 관계를 실현되어야 할 '도(道)'와 그것을 실현해야 할 '기(器)'의 관계, 또는 객체(所)와 주체(能)의 관계로만 보는 입장을 정식화한다. 나아가 김창협은 심(心)의 지각활동이 본성과 직결된 것이 아니며 그로부터 비롯되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하여 심(心)의 독자성을 강조한다. 한원진은 그러한 김창협의 구도가 성(性)과 심(心)을 분리하며 궁극적으로 본성이 아니라 마음을 본체로 삼는 오류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계한다. 그는 심(心)의 지각활동이 본성이라는 절대적 근거가 없이 이루어진다면, 결국 지각은 자의적으로 대상과 관계맺는 맹목적인 인지활동에 지나지 않게 된다고 본다. 만약 본성에 근거하지 않더라도 지각이 도덕적 성격을 띠게 된다고 가정할 경우, 이는 본성이 아니라 마음 자체에 도덕의 근거가 내재한다는 얘기가 되므로 결국 본체를 성(性)과 심(心) 둘로 나누는 셈이 되고 만다. 한원진에 따르면 인간의 지각이란 도덕본성에 근거하여 이루어지는 활동이어야 한다. 그렇게 볼 때 김창협이 도덕실현의 주체로서 지각의 역할을 강조하는 입장이라면, 한원진의 경우 도덕실현을 가능케 하는 본원으로서 지(智)의 위상을 중시하는 입장에 선다.

주희(朱熹) 지각론(知覺論)과의 비교를 통해 본 김창협 지각론(知覺論)의 특징 (The Character of Kim Chang Hyup(金昌協)'s Zhi-Jue(知覺) Theory Through Comparison With Zhu Xii(朱熹)'s)

  • 이창규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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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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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1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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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본 논문은 주희(朱熹)와 김창협의 지각론(知覺論)을 비교함으로써 김창협의 지각론(知覺論)이 어떠한 특징을 띄는지 살펴보았다. 주재(主宰)의 측면에서, 주희(朱熹)는 한편으로는 지각(知覺)을 주재(主宰)를 통해 나타난 상태로 여겼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재(主宰)를 가능케 하는 주체의 작용으로 여겼다. 김창협은 지각(知覺)이라는 표현을 부각시키는 과정에서 이러한 혼용을 해소하고 지각(知覺)을 한정적인 의미에서 재정의했다. 그는 심(心)의 여러 측면 중에서 주재(主宰)의 주체 측면에 해당하는 작용이 지각(知覺)이며, 주재(主宰)를 가능하게 하는 작용, 혹은 주재(主宰)를 행하는 주체 자체를 지각(知覺)이라고 상정했다. 그리고 지각(知覺)을 성(性)이나 정(情)과 구분하고 지각(知覺)의 작용을 상술함으로써 주재(主宰) 주체로서의 심(心)의 역할을 구체화시켰다. 그러나 지각(知覺)과 성(性)의 구분에서 주체와 본성의 괴리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는 기(氣)가 리(理)와 별개로 움직인다고 볼 수 있으므로 이기불리(理氣不離)를 침범한다고도 볼 수 있다. 김창협 당대에 제기된 지각(知覺)의 소이연(所以然)이 무엇인가 하는 쟁정은 이 문제를 거론한 것이다. 김창협은 지각(知覺)과 성(性)을 각각 주재(主宰)의 주체와 대상으로 구분하려 했으므로, 한편으로는 소이연(所以然)이 아닌 소당연(所當然)으로서의 성(性)을 강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각(知覺)의 근거가 기(氣)의 허령(虛靈)함이라고 주장했다. 기(氣)의 허령(虛靈)함으로 근거를 제시하는 것은 지각(知覺)의 소이연(所以然)이 되는 리(理)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회피에 가깝다. 또한 성(性)이 소당연(所當然)으로 설정될 경우 지각(知覺)이 성(性)을 갖추고 작용으로 드러날 때는 이기불리(理氣不離)라고 할 수는 있지만 주체인 지각(知覺) 자체는 여전히 성(性)과 구분되므로 이기불리(理氣不離)에 대한 문제제기가 완전히 해결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주희(朱熹)는 지각(知覺)을 지(智)의 용(用)이라고 주장하여 지각(知覺)의 소이연(所以然)을 지(智)로 설정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불교 비판에서 지각(知覺)을 언급할 때는 김창협과 유사하게 성(性)을 지각(知覺)의 소당연(所當然)으로 설정하기도 했다. 주희(朱熹)가 성(性)을 지각(知覺)의 소이연(所以然)으로 설명하려 했는가에 대해서 재고의 여지가 있는 셈이다. 지각(知覺)의 소이연(所以然) 문제에 대한 해명은 주자학의 체계를 공고히 하려 했던 조선 학자들에 의해 심각한 문제로 떠오른 것이다. 지각(知覺)과 본성의 관계에 있어서는 주희(朱熹)와 김창협은 유사한 관계에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지각(知覺)을 주체의 측면에만 한정하고 구체화하려고 한 것만을 김창협 지각론(知覺論)의 특징이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민이승(閔以升) 사상을 통해 본 조선후기 지(智)와 지각(知覺)의 동이논쟁(同異論爭) (The same and diferent opinions about knowing and consciousness through Min-yisheng's idea in the latter period of korea)

  • 임홍태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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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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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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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이 글에서는 민이승(閔以升) 사상 가운데 주로 1)지와 지각의 문제, 즉 심성(心性)의 구분에 관한 논의문제, 이와 관련하여 펼쳐진 2)정제두와의 양지 지각의 동이성 문제에 관한 논의 등으로 나누어 살펴본다. 민이승은 양명학자 정제두와 양명학의 시비문제를 둘러싸고 논쟁을 전개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양명학의 중심개념인 양지와 지각의 동이문제이다. 또한 민이승은 양지와 지각 논쟁의 연장선상에서 김창협과 지(智)와 지각(知覺)의 동이문제를 둘러싸고 논쟁한다. 민이승은 정제두와의 양명학 논쟁에서 양명학의 '심즉리'설과 '지행합일'설에 대해 부정하고 있으며, 양명학의 중심개념인 양지는 천리와는 구분된 지각으로 파악하고 있다. 정제두와 양지와 지각의 관계에 대해 논쟁하고 있는 민이승은 당시 학계에서 진행되고 있었던 지와 지각의 관계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 결과, 민이승은 김창협과 지와 지각의 동이문제에 대해 한차례 논쟁을 벌이게 된다. 민이승과 김창협 사이에 전개된 지와 지각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지와 지각의 관계를 불상잡(不相雜)의 측면에서 보느냐 아니면 불상치의 측면에서 보느냐 하는 차이점에 있다. 김창협은 지와 지각이 서로 섞일 수 없다는 불상잡의 입장을 강조하는 데 비해, 민이승은 지와 지각의 관계를 불상리의 입장에서 양자의 연관성에 주목하고 있다. '양지와 지각의 동이문제', '지와 지각의 동이문제'라는 논쟁 주제를 중심으로 양자의 입장 차이를 살펴보고, 이러한 논쟁이 사상사적으로 어떠한 의의가 있는가 살펴보기로 한다.

지각설(知覺說)을 중심으로 본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성리학(性理學) - 심즉리설(心卽理說) 성립의 역사적 배경을 중심으로 - (Lee, Jin sang' Neo-Confucianism in the viewpoint of Perception in Toegye School)

  • 김낙진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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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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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9-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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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본고는 이진상의 특색 있는 이론인 심즉리설의 연원을 지각론의 전개과정을 통해 탐색해 보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황과 이이 이후 양대 학파로 분기된 조선유학계는 상호 비판과 영향 수수를 통해 발전하여 왔고, 조선후기의 논쟁적 주제 중의 하나가 지각론이었다. 주자학의 일반적인 지각론을 심도 있게 논의하기 시작한 것은 호락의 학자들로부터 비롯되었다. 이들은 심합이기와 심시기라는 이이의 심론 중 후자에 비중을 두어 자신들의 학문적 정체성을 가다듬었다. 이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는 가운데 퇴계학파에 속한 대산학맥의 학자들은 이주기자설에 의하여 이기를 새롭게 해석하고, 지각론에도 이를 적용하여 퇴계학적인 지각 이론을 새롭게 만들어 내었다. 이진상의 심즉리설은 호락의 심시기설에 대한 비판정신을 바탕으로, 대산학파의 새로운 이기론과 지각론을 세밀하게 가다듬고 과감한 이론적 비약을 통해 만들어진 이론이었다. 그는 이를 통해 인간의 본심, 즉 리(理)를 지각할 수 있는 근본적 가능성의 기반을 찾고자 하였던 것인데, 성선론의 논리적 발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돈암서원의 강학 활동 (The educational activities of Donam Seowon)

  • 김문준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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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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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1-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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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한국 서원의 교육 내용과 방식은 주자가 제시한 교육 내용 및 방식과 대부분 유사하지만, 학파에 따라 다소 다른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돈암서원의 초기 원장으로 재임한 이들은 모두 김장생의 문인이었던 김집 송준길 송시열 등이다. 돈암서원은 같은 노론계 서원이었던 화양서원 석실서원이 기호 지역의 중심 서원으로 성장하면서 서원의 위상과 강학 활동도 약화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돈암서원 설립 초기의 학규는 전하지 않는다. 돈암서원의 운영 방식은 돈암서원 운영 전반에 관하여 17세기 후반 원장으로 재임하던 송준길에게 문의한 윤증의 서신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이 서신을 통해 볼 때, 돈암서원의 학규는 이이의 <은병정사학규>와 유사하였다고 추정된다. 18세기 이후 돈암서원의 역대 원장은 노론의 낙론계 학자들로서 권상하 계열보다 김창협 계열의 원장이 많았다. 돈암서원 원장은 화양서원, 석실서원의 원장이 겸임하거나 전후로 재임했을 가능성이 많다. 돈암서원에서 행한 강학 활동은 서원 설립 초기에는 김장생-송시열의 교학체계에 따라 소학${\rightarrow}$가례${\rightarrow}$심경${\rightarrow}$근사록 등 성리서를 우선하고 다음에 사서 오경을 가르쳤다. 점차 노론계 낙론 서원인 석실서원 출신의 학자들이 원장으로 부임하면서 소학${\rightarrow}$사서${\rightarrow}$오경을 먼저 가르치고 다음에 성리서를 가르치는 이이의 교학체계를 시행하였으리라 추정된다. 이러한 강학 순서는 김창협 계열의 학자들이 설립하고 운영했던 석실서원의 강학 내용과 순서이다. 돈암서원의 입학 자격은 신분은 중시하지 않았으며, 학문과 인품을 중시했다. 서원에서 과거 공부는 허용되지 않았다. 원생들은 서원에서 거재(居齋)하면서 강학에 참여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점차 서원의 재정이나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자기 집에 거가(居家)하면서 삭망에 행하는 강회에 참여하는 형태로 변화되었다.

영재(寧齋) 오윤상(吳允常)의 경학관(經學觀) (Kyunghakkwan (經學觀: Views on Confucius Canonical Studies) of Youngjae O Yunsang (寧齋 吳允常))

  • 김영호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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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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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9-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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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본 논문은 조선조 후기 경학자인 영재 오윤상(1746-1783)의 경학관에 대해 고찰한 것이다. 영재의 경학관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사서집주대전"의 소주(小注)를 깊이 천착하고 있다는 점이다. '안(按)', '경안(更按)' 형식을 통해 "대학장구대전", "중용장구대전" 소주의 제가의 견해에 대해 비판적인 학설을 많이 개진하고 있는 점이 특색이다. 둘째, 우리나라 유학자의 설을 인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율곡을 비롯한 농암 김창협, 남당 한원진의 학설을 주로 소개하고 있다, 특히 그 중에서도 한원진의 "경의기문록"을 자주 인용하고 있으며 농암설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한다. 셋째, 다양한 경서에 대해 접근하였다는 점이다. 영재는 당시 조선유학의 일반적 경향인 "사서" 중심에서 벗어나 "서경"에 대해서도 연구를 하고 있다. 특히 채침의 "서집전" 뿐만 아니라 "서경정의"의 공안국전과 주소까지도 자주 참고 인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서집전"에 대해서는 반대 의견을 내고 있으며 공안국전에 대해서도 때로는 오류를 지적하고 있기도 한다. 넷째, 영재의 경설 중 특히 "중용"의 경우는 당시의 기호학자들에게는 인정받아 채택되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는 제헌 심정진의 미간행 정고본(定稿本)인 "중용집설" 3책을 소장하고 있는바 여기서 제헌은 영재의 "중용"에 대한 견해를 본문에서 자세하게 인용하고 있다. 다섯째, 공자의 견해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재는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여 "논어" 본문의 공자의 말에 대해서도 자신의 견해를 토로하고 있다.

석당(石堂) 김상정(金相定) 문학론과 산문 일고 (A Study on Suk Dang Kim Sangjeong's Prose Works)

  • 하지영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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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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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9-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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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석당 김상정(1722~1788)은 18세기 중반 노론계 3대 문장가로 꼽혔으며 "고문론(古文論)"을 추구해야 하는 당위를 어느 누구보다 뚜렷하고도 과격하게 피력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작가이다. 그가 안도제(安道濟), 신대전(申大傳) 등과 주고받은 서신에서 펼친 고문(古文)-금문(今文) 문학논쟁은 조선 내에서 진한 고문론의 지속적인 전개를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단서가 된다. 그의 고문론(古文論)은 김창협(金昌協) 이후로 노론계 문단에서 정통으로 계승되어왔던 당송고문론에 대한 자체적 반성과 함께 문학적, 시대적 자신감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표절과 모방을 경계한다는 점에서 명대 전후칠자(前後七子)가 피력한 진한고문론과도 변별점을 두고 있다. 실제로 그의 문장에서는 전범을 표절하고 과도하게 인용하거나, 난해하게 문장을 조탁하는 등의 방식은 잘 확인되지 않는다. 그는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선별하고 장면과 대화 중심으로 담백하게 재현해 나가며, 우언적 글쓰기를 통해 당위적 교훈을 전달하였다. 이는 그가 추구하였던 진한고문, 특히 사체 산문의 미감과 접점을 가진 부분으로 논할 수 있다. 김상정의 글쓰기는 이전 시대 진한고문을 추구하며 난삽한 글쓰기를 하였던 작가들과도 구분되면서도, 의론을 중시하는 당송고문과도 변별되는 독특한 특징을 지닌다. 김상정의 상고적 문예 지향은 대명의리를 추구하고 고동(古董)과 고문(古文)을 선호했던 이윤영(李胤永), 김상숙(金相肅), 이인상(李麟祥), 홍악순(洪樂純) 등 노론 청류(淸流)계 문단의 예술 담론과도 상통한다. 이들의 문예 취향은 자신들의 보수적 세계관을 반영하는 것이면서도 문예에 전념하는 자신들의 삶을 옹호하는 근거로 활용되었으리라 생각한다.

도암(陶菴) 이재(李縡)의 상소문(上疏文) 연구 (A study about the petition to the king of Doam(陶菴) Leejae(李縡))

  • 권진옥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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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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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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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본고는 18세기 노론계 핵심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도암(陶菴) 이재(李縡, 1680-1746)에 대한 문학 연구의 일환으로 그가 남긴 상소문(上疏文)을 고찰하였다. 이재의 문집에는 총 49편의 상소문이 수록되어 있는데, 거개가 사직상소문(辭職上疏文)이다. 여타 작가의 사직상소문과 마찬가지로 이재의 사직상소문 역시 '사직'이라는 궁극적 목표 아래 다양한 논리와 서술기법으로 상대방 즉 임금을 설득하고 있다. 상소문의 집필 방식이 고정된 관습이 지배적이긴 하지만 그 이면에는 궁극적으로 관철시키려는 의견, 부수적으로 노리는 효과 등이 깔려 있고, 각자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논리적으로 서술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요인으로 상소문은 더 이상 정치, 역사 분야의 취재 대상에서 머무르지 않고 문학 연구의 대상이 된다. 이재는 상소문을 작성할 때 진정(眞情)을 가장 중요시하였고, 상황에 적실한 설득 논리를 강조하였다. 그가 작성한 상소문의 실제 양상을 살펴보더라도 이것과 어긋나지 않는다. 이재는 대제학을 사직하기 위해 3차례에 걸쳐 상소문을 작성하였는데, 각각의 글에서 다양하게 설득 논리를 변주하였다. 일반적으로 특정 관직에 대해서 여러 번 사직상소문을 올릴 경우, 동일한 논리와 서술로는 상대방을 설득시키기 어렵기 때문에 다양한 설득 전략을 구사할 수밖에 없다. 첫 번째 상소문에서는 직임의 막중함에 적임자가 아니라는 이유만을 건조하게 나열하는 정공법(正攻法)도 사용하였고, 두 번째 상소문에서는 모친 봉양과 확고한 출처관을 뒤섞어 상대방의 감정과 이성에 호소하였고, 마지막 상소문에서는 다소 과격한 언사로 상대방을 궁지에 몰아넣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결론적으로 사직상소문의 궁극적 목표인 면직(免職)의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동일한 주제를 두고 설득 논리를 변주하는 양상을 살필 수 있다. 이상은 이재 상소문의 내용적 측면 즉 입의(立意)의 고찰이다. 다음으로 살펴본 것은 이재 상소문의 형식적 측면 즉 수사(修辭)이다. 사직이라는 분명한 목표 아래 작성되는 사직상소문은 고정된 관습적 글쓰기의 한계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이러한 난점을 극복하기 위해 사직상소문을 작성하는 자는 다양한 수사법을 동원하게 되는데, 장법(章法)이나 구법(句法), 배비(排比)나 대구(對句) 등과 같은 구성적 측면은 물론이고 억양(抑揚), 비유(比喩) 등과 같은 표현적 측면까지 고려하게 된다. 대제학을 사직하기 위해 첫 번째로 올린 상소문은 구성적 측면에서 탄탄하게 직조되었고 적절한 억양법을 구사하였다. 일반적으로 고문(古文)의 문예미는 문종자순(文從字順)의 순정함을 추구하는데, 표현에 있어서는 생소하거나 난삽하지 않은 어사(語辭)를 사용하고, 구성에 있어서는 구절과 문장, 문장과 단락, 단락과 주제가 유기적으로 조응(照應)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이재의 상소문은 이러한 고문의 색채를 지니고 있다. 또한 치밀한 구조 가운데에도 자신의 진정(眞情)을 강하게 전달하는 김창협(金昌協)의 상소문처럼 이재의 상소문도 번다한 언사나 화려한 수식은 자제하면서 정제된 구법으로 작자의 솔직한 소회를 자연스레 드러내어 상대방을 설득하는 글쓰기를 구사하였다. 끝으로 이재의 졸기(卒記)에 언급될 만큼 그의 상소문의 백미라 할 수 있는 글, 이른바 만언소(萬言疏)라고 하는 "도성에 들어온 뒤에 소회를 아뢴 상소(入城後陳所懷疏)"를 살펴보았다. 그 내용은 신임옥사의 잘잘못을 가리면서 영조의 탕평책을 논리적으로 신랄하게 비판한 것인데, 총 5,300여 자로 이루어진 장문의 글이다. 이 글에서 이재는 반어법, 설의법, 점층법을 반복적으로 구사하여 신랄하게 영조의 탕평책을 비판하며 영조의 입지를 궁지로 내몰았다. 이 상소문을 열람한 영조는 자신을 향한 강경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언사가 곡진하며 의미가 분명하다고 고평하였다. 이채(李采)가 이재의 상소문을 두고 의리에 근본하고 충간을 밝혔다고 평가한 점, 이재가 상소문의 중요한 덕목으로 조어(措語)의 진정성을 꼽았다는 점, 영조가 곡진한 언사와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었다고 평가한 점에서 이재의 만언소는 상소문의 모범이 될 만하다.

노론의 연원과 전개, 철학사상과 현실인식 (An origin and development, the thought and understanding of actual world of Noron)

  • 김문준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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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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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9-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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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노론(老論)은 숙종대에 결성된 이후 조선의 정국을 주도한 집권 세력으로서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조선의 정국을 주도했다. 노론의 학문과 사상의 전개는 크게 네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17세기 후기에서 18세기 초에 이르는 숙종대의 붕당 정치 시기, 둘째 18세기 중기에서 후기에 이르는 영정조대의 탕평 시기, 셋째 19세기 이후의 세도 정치 시기, 넷째 19세기 후기에서 구한말에 이르는 시기 등이다. 이렇게 구분하여 노론의 연원과 전개 양상을 개략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노론의 전반적인 특징은 노론의 정신적 지주로 송시열을 존숭하였고, 존주자 양이적을 추구하는 조선중화론에 의한 군자당론을 주장하였으며, 일도설(一途說)과 기질지성(氣質之性)에 관한 학설에 대해 율곡 성리학을 보완적으로 계승하였고, 이단 배척과 정학 수호를 중시하여, 결국 천주교 탄압으로 표출된 양상으로 요약 정리할 수 있다. 노론계의 특징적인 학자로는 학문과 정치 양 측면에서 보았을 때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1641~1721),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1651~1708), 도암(陶庵) 이재(李縡)(1680~1746) 등이 주목되는 인물이다. 17세기 이후의 치열한 권력 쟁탈 가운데에 사상적 맥락이나 학문사상이 정국 변화의 핵심적인 요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조광조의 지치주의 이후 조선시대 공론(公論)은 누구나 동의하는 보편적인 논의를 지칭하지만 사림이 분열한 이후에는 당파적 이해를 반영하는 당론(黨論)과 구분하기 어려워지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송시열을 추숭한 노론 계열의 학자들은 존주자(尊朱子) 양이적(攘夷狄)을 기치로 삼고 왕이나 권세가들의 권력 남용을 제어하고 강력한 정치적 통일을 이루어 도의(道義) 사회를 구현하려고 했다. 그러나 점차 17세기에 수립한 당시의 정치적 동기와 목표는 상실하고 결국 탕평에 반대한 노론 벽파가 정조(正祖) 사후에 세도정권(勢道政權)을 만들어 내면서 정국을 장악하고 권세를 전횡하는 폐해로 귀결되었다. 노론의 현실 대응 논리와 행적은 정학일치(政學一致)라는 한국 도학정치의 특성이 극단화되어 표출된 모습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