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itle/Summary/Keyword: 국왕

검색결과 54건 처리시간 0.023초

조선후기 호위제도의 고찰 (Study on the Guarding System in the latter "Choson" era)

  • 이성진
    • 시큐리티연구
    • /
    • 제16호
    • /
    • pp.229-241
    • /
    • 2008
  • 조선시대의 경호제도는 경국대전 세조, 예종 때에 완비되고 성종 때에 보충됨으로 써 이 법전을 근거로 하여 우수한 군사를 선발하여 근접경호를 담당하는 금군과 수도 방위와 시위임무를 담당하는 중앙군에 편성함으로써 왕실호위체계가 확립되었다. 임진왜란을 기준하여 볼 때, 전기에는 내금위, 겸사복, 우림위, 정로위로 구성되었던 금군이 후기에 들어 상황에 따라 변화를 거듭하였다. 조선전기에 국왕의 신변보호와 수도권 방위에 주력하던 금군의 임무가 임 병 양란의 영향으로 변란과 외적침입을 막아내는 전쟁을 아울러 수행 하는 상황에서 전에 임시방편적으로 설치되었던 비변사의 역할이 확대되는 등의 군사제도의 변화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5군영제의 실시로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의 3 군영이 국왕 호위와 수도방위를 담당하였고, 총융청, 수어청은 북한산성과 남한산성을 거점으로 수도권외곽의 방어를 담당케 하였다. 따라서 왜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금군의 기능이 확대됨에 따라, 인원이 대폭 증가되고 현실인식과 자아각성으로 인한 서민의 지위가 높아짐에 따라 왕실과 국가의 호위체제에도 상황에 따라 변화가 잦게 되었다. 그러나 종전에 있던 제도가 그대로 남아 있어 실제로 호위를 맡은 군사보다 명분상의 숫자가 늘어난 결과가 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약해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호위청, 금군청, 숙위소, 장용영 등의 금군의 재편성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에 뒤따르는 재정적 뒷받침에도 문제가 되는 가운데 기존의 기본조직들의 위상에 대한 변화도 심해졌다. 정조의 등극은 호위제도의 변화에 획기적인 시대였다. 정조는 친족들의 세력을 물리치기 위하여 숙위소를 신설하고 장용영을 강화하여 새로운 정치를 실현하고 당대에 한했지만 왕권을 강화하였다.

  • PDF

조선전기 습진(習陣)과 군사훈련 (The Study of Military train through Soupjun in Early Joseon Dynasty)

  • 곽낙현
    • 동양고전연구
    • /
    • 제35호
    • /
    • pp.359-385
    • /
    • 2009
  • 이 연구의 목적은 조선전기 군사훈련인 습진(習陣)이 어떠한 모습으로 변화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이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습진(習陣)'은 진법훈련 또는 진법교련의 뜻으로 정의할 수 있다. 둘째, 오위체제와 "오위진법(五衛陣法)"의 간행은 군제조직의 개편과 진법교범서들의 지속적인 편찬 속에서 하나의 종합적인 결과물로 완성된 것이다. 셋째, 조선전기 태조부터 선조대까지의 진법 내용의 총 기사 수는 268개이며, 이를 왕별로 세분하면, 태조 2개, 태종 2개, 세종 23개, 문종 20개, 단종 11개, 세조 70개, 예종 7개, 성종 25개, 연산군 4개, 중종 50개, 선조 54개이다. 이 내용을 살펴보면 역대강무제도, 진법훈련, 친열, 오진법 편찬 시행, 진법 사목 논의, 진법훈련 절차개선, 진법서적편찬, 신진법 완성 및 반포, 진법훈련조목 개선, 진법강론, 진법능부, 진법열병, 진법훈련정지, 척계광의 절강진법, 기타 등 15개 항목으로 추출할 수 있다. 넷째, 태조, 태종, 문종, 세조, 예종, 중종은 신하들에게 직접 진법훈련을 지시하고 주도한 국왕이었다. 이 중에서 문종과 세조는 신진법인 "오위진법(五衛陣法)"을 편찬, 개정하고 군사조직의 일원화를 꾀한 점이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외에 중종은 역대 국왕들이 편찬한 진법교범서를 강론하고 훈련시킨 것을 알 수 있었다. 반면, 선조는 중국의 척계광이 지은 "기효신서(紀效新書)"를 받아들여 남방의 왜구를 방비하는 진법으로 전환시켰다. 다섯째, 진법훈련을 통해 알 수 있는 변화는 세조대부터 성종, 예종, 중종까지 형명과 진퇴좌작을 강조하였다. 이는 조선 건국 후 북방의 기마병에 대한 방비책으로써 진법훈련이 시행되었다. 반면,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선조부터는 남방의 왜구를 효과적으로 방비하는 척계광의 절강진법이 수용되면서 새로운 진법체제로의 전환이 모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조선의 침략방어대상이 북방에서 남방 왜구로 변화되었다는 점과 기존의 북방기마병을 막는 전술인 오위진법체제로는 수군과 보병위주인 왜구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이 주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合部金光明經』 간행과 『高麗大藏經』 각성사업

  • 최연주
    • 고문화
    • /
    • 66호
    • /
    • pp.37-56
    • /
    • 2005
  • 이 연구는 강화경판 『高麗大藏經』에 入藏된 『合部金光明經』과 13세기 중엽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口訣本 『合部金光明經』의 조성에 참여한 刻成人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국가적·범종파적 사업으로 전개된 각성사업에 『합부금광명경』이 조성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구결본 『합부금광명경』 조성에 참여한 이들은 각성사업과 어떤 관련성을 갖고 있는지 검토해 보았다. 이에 『고려대장경』에 입장된 『합부금광명경』과 구결본 『합부금광명경』을 상호 비교해 본 결과 경전의 내용과 板式, 그 구성 체계가 相異한 본이었다. 그리고 彫成에 참여한 각성인을 조사해 본 결과 『고려대장경』에는 ‘부령’이었고, 구결본은 ‘存植’, ‘立成’, ‘正安’, ‘孝兼’ 등이었다. ‘存植’, ‘正安’, ‘孝兼’은 고종 24년부터 16년간 전개된 각성사업에 참여한 각성인들과 동일 인물이었다. 특히 ‘孝兼’은 자신을 비구라고 밝힌 점으로 볼 때 당시 활동하던 刻字僧으로 파악된다. ‘存植’과 ‘正安’은 고종 33년에 간행된 『禪門三家拈頌集』과 13세기 중엽에 간행된 『圓覺類解』, 『弘贊法華傳』의 조성에도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전문 刻手로 보여진다. 그래서 각성사업에 참여한 각성인들은 각자의 여건에 따라 활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合部金光明經』은 『妙法蓮華經』·『仁王經』과 함께 호국삼부경 중의 하나로서 고려시기에 수시로 간행되고 있었다. 『금광명경』은 국가를 보호하고 내우외환을 소멸시키기 위해 왕실을 비롯한 관료층들이 깊이 존신하고 권장하려 하였던 불교 경전이었다. 특히 대외관계상의 위기상황에는 『금광명경』을 바탕으로 하는 功德天道場이라는 호국적 성격의 법회를 개최되고 있었다. 따라서 『합부금광명경』의 간행 배경에는 『고려대장경』이 국왕을 정점으로 반외세력인 몽고군을 격퇴시키고, 또 최씨무인정권으로부터 왕권을 회복시키고자 시대적 분위기가 적극 반영되어 있다. 구결본 『합부금광명경』의 간행은 민족적·국가적 사업이었던 각성사업에 적극 동참하면서 현실을 직시하고 고려 불교의 창조적 발전은 물론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고자 하는 호국의식을 바탕에 두고 있었다. 〔주제어〕『高麗大藏經』, 『合部金光明經』, 刻成人, 최씨무인정권, 護國經

  • PDF

외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었던 천문학 관련 도서

  • 안상현
    • 한국우주과학회:학술대회논문집(한국우주과학회보)
    • /
    • 한국우주과학회 2011년도 한국우주과학회보 제20권1호
    • /
    • pp.19.3-19.3
    • /
    • 2011
  • 1631년 정두원이 명나라로부터 가져온 네 권의 과학서와 한 편의 보고서 가운데, 치력연기(治曆緣起)라는 책과 서양공헌신위대경소(西洋貢獻神威大鏡疏)가 강화도의 외규장각에 소장되고 있었다. 이 점에 유의하여 강화도 외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었던 천문학 및 수학 관련 서적을 조사해 보았다. 외규장각 소장 도서의 목록에 해당하는 외규장각형지안(外奎章閣形止案)을 조사하여, 소장 도서의 내역과 소장 상태의 변천을 알아낼 수 있다. 그 결과 서양공헌신위대경소는 1791년 신해박해 때 천주교 서적으로 오인되어 소각되었고, 치력연기는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해군에 의해 소각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외규장각에는, Napier의 대수(logarithm)에 관한 아이디어가 반영되어 있는 쟈크 로우(Rho)의 주산(籌算)이란 책이 소장되어 있었고, 조선조 양대 물시계에 관한 보고서인 흠경각영건의궤(欽敬閣營建儀軌)와 보루각중수의궤(報漏閣重修儀軌)가 있었으며, 조선 국왕들이 천문에 관해 작성한 어제 및 어필이 소장되어 있었으며, 천문류초(天文類抄)와 천기대요(天機大要)와 같은 널리 사용되던 천문 및 음양학관련 서적이 소장되어 있었다. 특히, 1866년 프랑스 해군에 의해 약탈되어 현재 프랑스 파리 국가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숙종석각의 탁본으로 추정된다. 현재 10여 개의 탁본이 국내외에 남아 있으나, 최근 프랑스로부터 반환되게 된 외규장각 도서 내역에 천상열차분야지도가 포함되지 못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약간 토의하고자 한다.

  • PDF

[ "규장전운" ]을 통해서 본 정조조의 서적 반사와 그 규모 (The Distribution and Scale of Book in the Reign of King Jeong-jo as "Kyujangjeonun")

  • 신승운
    • 한국도서관정보학회지
    • /
    • 제35권4호
    • /
    • pp.293-316
    • /
    • 2004
  • 조선시대의 서적의 출판과 그 유통은 국가가 중심이 되어 편찬하고 간행하여 제한된 신분의 신료에게 배포하는 소위 반사본이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국왕이 반사하는 반사본이 그 숫자가 극히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당시의 관료$\cdot$학인들이 새로운 서적을 습득하게 되는 중요한 제도였기에 서적의 반사대상을 연구하는 것은 지식의 습득에서 책이 차지하는 비중이 거의 절대적이었던 상황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서적 유통의 문제는 서지학의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분야임에 틀림없지만 이러한 유통에 관한 자료가 극히 희소한 관계로 종래에는 현존본을 대상으로 한 연구가 주류를 차지하였다. 반사본의 연구도 그 중의 일환이었다. 정조의 부단한 관심과 지원하에 이덕무가 중심이 되어 편찬하고 여러 신료들의 교정을 거쳐 정조 20년 (1796)에 반사된 $\ulcorner$규장전운$\lrcorner$ 의 반사기는 그 수사 대상자가 방대하고 또 그 대상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어서 조선후기의 서적 반사의 대상과 그 규모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글에서는 $\ulcorner$규장전운$\lrcorner$의 반사대상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다루었으며, 특히 책을 반사 받은 사액서원의 분포를 자세하게 다루었다.

  • PDF

이충무공 종가 관련 고문서의 지질 특성 조사 (Investigation of Paper Characteristics on Old Documents Related to the Head Family of Admiral Yi Sun-sin)

  • 안지윤;배수빈
    • 보존과학회지
    • /
    • 제34권5호
    • /
    • pp.407-420
    • /
    • 2018
  • 이충무공 종가 관련 고문서는 덕수이씨 후손가에서 보관해오던 것으로 다양한 종류의 문서가 전해지고 있다. 연구대상인 고신교지, 증직교지, 교첩, 교서, 유서, 홍패, 칙명의 국왕문서 7종은 그 제작시기가 명확하고 고문서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보존처리 과정에서 과학적 조사 분석을 통해 당시 고문서 제작에 사용되었던 종이 특성을 확인하고 문헌 기록의 내용과 실제 문화재를 일부 비교해 볼 수 있었다. 표면 섬유 형태에서 '외발뜨기(흘림뜨기)' 초지방식으로 제작된 형태 특성이 확인되었으며, 밀도 측정과 종이 표면 분석에서는 대부분의 고문서에서 도침 가공된 종이특성이 관찰되었다. 섬유 분석에서는 모두 닥섬유를 원료로 제작하였으며, 주로 성숙한 닥나무 인피섬유가 사용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견우성은 어느 별인가?

  • 김동빈;안상현;송두종;이용삼
    • 한국우주과학회:학술대회논문집(한국우주과학회보)
    • /
    • 한국우주과학회 2009년도 한국우주과학회보 제18권2호
    • /
    • pp.31.3-31.3
    • /
    • 2009
  • 견우와 직녀의 사랑 이야기가 얽혀 있는 두 별은 여름철을 대표하는 별들로서 중국 문화권에서는 지난 수 천 년 동안 매우 인기가 높은 별이었다. 두 별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의 노래를 모아 놓은 시경(詩經)에 이미 등장하고 있고, 서기 408년에 조성된 고구려의 덕흥리 고분 속에 있는 벽화에도 그려져 있다. 고려시대에는 이 별들에 대한 국가적인 제사를 지냈으며, 조선 시대에는 칠월칠석에 국왕이 신하들과 어울려 잔치를 베풀고 칠석시(七夕詩)를 지어서 책으로 편찬하는 일도 있었다. 한편 견우성은 주로 농사와 관계된 별점을 가지고 있었고, 시각제도와 긴밀한 관계가 있는 28宿(수)의 하나였으므로 천문학자들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관측한 별이다. 그러한 관측의 결과는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에 다수가 남아 있다. 그런데 동양 천문학에서 이미 널리 다루어졌던 문제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 문학적 견우성과 천문학적 견우성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일반 시민들에게 견우성은 독수리자리의 알테어(Altair)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모든 사서와 고대 천문서 및 천문도가 지칭하는 견우성은 염소자리의 다비(Dabih)라는 별이다. 견우성이 28宿(수)의 하나라는 사실은 그 별(별자리)이 황도와 백도 근처에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알테어는 적위가 높아서 도저히 28宿(수)에 속할 수가 없다. 게다가 알테어는 은하수 속에 들어가 있으므로, 견우와 직녀가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는 일반적인 설화와도 어긋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대다수의 서적과 매체, 그리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행사와 천문관에서 상영되는 프로그램들에는 모두 알테어를 견우성으로 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불일치는 상당한 혼란을 초래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 연구에서는 이러한 불일치가 천문학적인 견우성과 인문학적인 견우성의 불일치로 보고, 이 문제를 실증적으로 접근해 본다. 즉,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에 실려 있는 견우성 엄폐 관측 기록을 조사하여 한국사에서 전문 천문학자들은 어느 별을 견우성이라고 보아왔는지 알아보고, 또한 일반인들이 지은 시문에는 어떤 별을 견우성으로 여겼는지 고찰한다. 아울러 역사적으로 이 문제에 대한 선인들의 생각을 짚어보고, 중국과 일본의 학자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살핀 다음, 마지막으로 현실적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고찰해 본다.

  • PDF

조선 가각고의 인력구성과 존재시기에 관한 재고찰 (Reconsideration of Gagakgo's Staff and Period of Existence in Joseon)

  • 이형중
    • 한국기록관리학회지
    • /
    • 제20권3호
    • /
    • pp.23-37
    • /
    • 2020
  • 가각고는 국왕의 명령인 수교(受敎)를 비롯한 국가 중요문서와 노비문서·행사기록 등 다양한 국가기록을 보존하는 일종의 기록보존을 위한 공간이었다. 때문에 가각고에 대한 연구는 조선의 전반적인 기록보존 공간 운영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는 기초적인 자료로 활용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이를 위해 본 논문에서는 가각고의 인력구성과 혁파시점을 중심으로 가각고의 실상을 보다 상세히 규명해 보고자 하였다. 먼저 가각고는 운영을 위해 별도의 실무인력을 두었으나, 조선 초기 정치적 환경 변화에 따라 가각고의 소속과 인력 구성 또한 변경되었다. 그리고 이에 따라 가각고의 위상 및 그 운영의 양상 또한 변동되었다. 이후 세조대 들어 가각고는 혁파되었다고 알려졌으나, 조선 후기 효종~영조 연간 가각고라는 이름의 기관이 운영되었음이 확인된다. 이 가각고 또한 조선초기 가각고와 마찬가지로 실무 인력을 배치하고 기록을 보존하는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는 가각고의 존재에 대한 재논의가 필요함을 보여주는 사료라고 할 수 있다. 이상의 연구를 통해 가각고 운영과 조선 기록보존의 실상에 보다 근접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태국 민주주의의 심화와 헌정공학 (Democratic Deepening and Constitutional Engineering in Thailand)

  • 김홍구
    • 동남아시아연구
    • /
    • 제23권1호
    • /
    • pp.45-87
    • /
    • 2013
  • This paper aims to study Thai democratic deepening and the constitutional engineering with the analytical concepts of 'power sharing' and 'accountability' focusing on the 1997 and 2007 Constitution. With regard to power sharing, the 1997 Constitution had the characteristics of majoritarian principle including a two-party system, strengthening of prime minister and the executive's power etc. It enhanced significantly the aspects of accountability compared with the previous constitutions. The institutions such as Constitutional Court, Commission on Election, Administration Court, Commission on Human Right, Ombudsman, Commission on Anti-corruption, and the Measure for Anti-money Laundering were established by the 1997 Constitution. However, such empowered accountability system were often abused by the political power groups in the political process. The 2007 Constitution has the characteristics of consensual principle including a multiparty system, proportional representation system, weakened prime minister's power, balancing of cabinet and parliament's power, pushing ahead with decentralization. However, the consensual principle of the 2007 Constitution came, in part, from the factional interests. It is similar to the 1997 Constitution in terms of accountability system, which enhanced in law but abused often in practice. One of the critical reasons for the failure of the 1997 and 2007 constitutions to consolidate democratic system was the political game played around the so-called network for the monarchy composed by the military, the civilian bureaucracy, Constitutional Court and the privileged classes. The future of the Thai democratic deepening depends on the constitutional engineering in which the factional interests should be excluded, and the rules of power sharing and accountability which traditionally played around the network for the monarchy should be effectively institutionalized.

사경은(寫經院)과 염승익(廉丞益) 발원(發願)의 사경(寫經)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7권본 1부 (A Study on the set the seven roalls of the Saddarma Pundarika Sutra Prayed by Yeom Seong-Ik and Script Center)

  • 권희경
    • 한국기록관리학회지
    • /
    • 제3권1호
    • /
    • pp.1-21
    • /
    • 2003
  • 사경은 남계원(南溪院) 석탑의 출토품으로 1915년 남계원석탑(南溪院石塔)을 개성시(開城市)의 덕암동(德岩洞)의 원 위치로부터 경복궁으로 옮길 때 발견된 감지은니사경(紺紙銀泥寫經)의 염승익발원(廉丞益發願)의 사경(寫經)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7권본 1부는 권자본(卷子本)으로 세로 31.1cm이며, 표지화와 변상화(變相畵)가 안팍을 이루고 있는데 폭은 27.2cm이다. 이 사경은 또한 1행 14자로 쓰여지고 있는데, 이러한 특징은 표지화 변상화의 양식과 더불어 고려국왕별원 금 은자사경의 양식과 같다. 이 사경을 발원한 인물은 충렬왕대의 권신이던 염승익이다. 염승익은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의하면, 기인을 동원하여 지은 자신의 집을 대장경사경소(大藏經寫經所) 금자대장사경소(金字大藏寫經所)로 내놓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므로 이 사경은 염승익이 자신과 그 일가권속의 복락을 빌기 위해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7권부 1부를 금자대장사경소(金字大藏寫經所)에서 제작하고, 충렬왕(忠烈王) 9년 남계원석탑(南溪院石塔)을 수리할 때 탑에 함께 봉안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사경의 가장 중요한 점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기록처럼 금자대장소로 내놓았다는 점이라 할 수 있다. 금자대장소란 장소적 의미가 강조된 것으로 금경사와 더불어서 금자원과의 차이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단서라고 할 수 있는 점이다. 그러나 이 사경이 충렬왕대 고려국왕발원 금 은자사경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비록 개인발원사경이라 할지라도 금자대장사경소(金字大藏寫經所)에서 제작되었기 때문에 금자원(金字院)(혹은 은자원(銀字院))의 스타일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점과 이러한 점을 통해 남겨진 기록들과 발문을 중심으로 사경원 금 은자원의 성격을 밝히는데 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