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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양 아프리카연안 트로올어장의 어황에 관하여 -II (Studies on the Catch by Trawl Fishing in the Atlantic Coast of Africa -II Diurnal Variation of the Catch of Important Species Groups per Unit Hauling)

  • 김진건
    • 수산해양기술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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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5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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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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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9
  • 트로올선 No.85 Ptaro가 1975년 9월부터 1976년 8월까지 대서양 아프리카 연안 어장에서 조업한 어획상황을 분석한 결과 예망당 어획량의 일주기변동은 대략 다음과 같다. 1. 오징어는 일출후에 월등하게 많고 일몰후에 현저하게 적으며 주야간의 어획량비는 54:17로 획간에 많았다. 2. 갑오징어는 개체중량 300g이상의 대형어는 일출후에 다소 많고 일몰후에 적으며 주야간의 어획비는 45:28로서 획간에 많고, 개체중량 300g 미만의 소형어는 주야간의 어획량비가 40 : 32로서 큰 차이가 없다. 3. 문어는 개체중량 700g 이상의 대형어는 일출후에 적고 일몰후에 적으며, 오전보다 오후에 많은 경향이 있고, 주야간의 어획량비는 43 : 31로서 획간이 많으나, 개체중량 700g 미만의 소형어는 일출후에 적고 일몰후에 많은 경향이 있고, 주야간의 어획량비는 32 : 44로서 야간에 많았다. 4. 서대류는 일출후에 현저하게 적고 일몰후에 월등하게 많으며, 주야간의 어획량비는 16 : 41로서 획간에 많았다. 5. 돔류, 기타 A, B 잡어는 일출후에 월등하게 많고 일몰후에 현저하게 적으며, 주야간의 어획량비는 돔류 51 : 19, A 잡어류 50 : 19, B잡어류 42 : 25로서 획간에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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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민간 빈민구제시설 진민소[賑民所]에 관한 연구 (Study on Jinminso as an Indoor Relief Institution)

  • 양옥경
    • 한국사회복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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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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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57-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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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본 연구는 구한말 민간 빈민구제시설로 보이는 진민소에 관한 연구이다. 연구의 목적은 진민소 관련 사료의 발굴과 발굴된 사료의 객관적인 분석 및 해석이다. 연구를 위해 진민소로 인터넷 검색이 가능한 사료들을 검색했으며, 관찬사료 11개와 민간사료 40개를 찾았다. 분석결과 진민소는 민간에서 민간의 자본으로 조선사람들이 스스로 설립한 민간 구빈 시설이었다. 전 승지였던 고운정과 교원 윤태진 등 16명이 1898년 6월 25일 서소문 전 선혜청 자리에 설립하였다. 설립비용은 16명이 추렴한 각 2만냥과 시골부인들의 의조금 10만냥으로 총 42만냥의 민간자금이었다. 설립취지는 곤궁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는 황제의 구휼부담의 분담이었으며, 백성들이 유망하는 것을 좌시할 수 없는 동포의 의리로 볼 때 빈부가 비록 다르더라도 사랑하고 보호해야겠다는 마음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약 300명에게 밥과 옷을 지급하고, 치료 및 장례를 진행하였다. 그러다 같은 해 10월 27일 고종황제로부터 혁파의 명을 받아 폐쇄되었다. 이후 1899년 3월 20일경 재설치되었는데, 고운정에 의해 추진되었으며, 운영은 정부에서 하였다. 장소는 종로 전 감옥의 자리였다. 진민소는 비록 짧은 기간동안 존재했었지만, 빈민구제가 주로 정부의 역할이었던 때 정부 진휼기관인 진휼청이 폐지된 상태에서 민간이 설립, 운영한 시설이다. 갑오개혁으로 진휼청이 폐쇄되면서 정부가 해야 할 진휼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아 기민구휼이 문제였던 시점에 세워진 진민소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사회복지역사에 있어 큰 의의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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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황실재산 관리 제도에 대한 연구 -구황실재산의 문화재관리체계 편입 관련- (Establishment of Old Imperial Estate and Cultural Property Management System -Focused on Inclusion of Imperial Estate as Cultural Property-)

  • 김종수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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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3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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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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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한국의 문화재 관리 제도는 일제강점기에 제정 시행된 근대 문화재 법제와 구황실재산 관리 제도를 기반으로 성립되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근대 문화재 법제를 중심으로 한 문화재 관리 제도에 대한 연구 성과는 축적해 왔으나 문화재 관리 제도의 또 다른 축을 이루고 있는 구황실재산 관리 제도에 대해서는 이를 문화재 제도사 관점에서 접근한 연구가 거의 없다. 구황실재산은 갑오개혁에 의해 봉건적 가산에서 분리 독립하였으나 일제의 식민지 침탈과정에서 정리 해체되어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지 왕가의 세습 재산으로 관리되었다. 그 후 정부 수립 후인 1954년 「구황실재산법」이 제정 시행됨으로써 구황실재산은 국유화와 함께 역사적 고전적 문화재로 규정되었고 구황실재산사무총국에 의해 관리되었다. 이때 구황실재산 중 영구 보존 재산으로 지정된 재산은 1963년 「문화재보호법」 1차 개정 시 부칙 제2조에 의거 국유 문화재로 정식 편입됨으로써 민족의 문화유산으로 인정받았다.결론적으로 말해서 한국의 문화재 형성과 문화재 관리 제도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연원인 근대 문화재 법제와 구황실 재산 관리 제도가 하나로 통합되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근대 문화재 법제의 변천이 일본의 그것을 식민지 조선에 이식·적용하여 문화재를 규율하고 관리하는 과정이었다면 구황실재산 관리는 일제가 대한제국을 식민지화 하면서 구황실재산을 침탈하고 정리하여 운용한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광복과 대한민국 정부수립으로 이 각기 다른 두 개의 흐름이 하나로 합쳐지는 계기가 마련되었고 마침내 1961년 문화재관리국 설치와 1962년 주체적인 「문화재보호법」 체제가 성립됨으로써 제도적 통합이 이루어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수산물에서 분리한 대장균의 혈청형 및 생화학적 특성 (Serotypes and Biochemical Properties of Escherichia coli Isolated from Seafood Products)

  • 함희진;진영희
    • 한국식품위생안전성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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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8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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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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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
  • 서울시 가락농수산물시장에서 2001년 1-12월 수거한 총 742건의 수산물(어류 192건, 패류 242건, 갑각류 39건 그리고 연체류 71건)을 대상으로 대장균을 분리 동정한 결과 12.4%(92/742) 검출율을 보였다. 분리된 92주의 월별분포를 살펴보면, 1월 10%(1/10), 2월 7.1%(2/28), 3월 9.7%(7/72), 4월 10.8%(8/74), 5월 1.9%(1/53), 6월 20.3%(16/79), 7월 13.3%(10/75), 8월 40.0%(20/50), 9월 8.1%(7/86), 10월 10.0%(9/90), 11월 8.3%(6/72) 그리고 12월 9.4%(5/53) 검출율을 보여 6-8월 등 하절기에 많은 대장균이 분포됨을 알 수 있었고, 검체별 분포를 살펴보면, 어류가 10.4%(20/192), 패류 14.5%(35/242), 갑각류 4.7%(10/212)그리고 연체류 28.1%(27/96) 검출율을 보여, 연체류가 어류, 패류 및 갑각류에 비해 대장균 분리율이 비교적 높게 나타났다. 또한, 지역별 분포를 살펴보면, 강원 12.5%(8/64), 경기 8.7%(6/69), 경남 18.4%(25/136), 경북 33.3%(1/3), 전남 13.2%(30/228), 전북 11.8%(8/68), 충남 6.3%(2/32), 제주 17.7%(3/17) 그리고 우리나라 이외의 지역에서 7.2%(9/125) 검출율을 보였다 92주 가운데 61주를 대상으로 분리균들의 O 혈청형을 동정한 결과, 개미더덕 1건에서 O6, 숭어와 갈치 각각 1건에서 O25가 확인되었고, 개미더덕, 한치알, 백합 각각 1건에서 O29가, 개미더덕 1건에서 O78 그리고 굴, 갑오징어, 갈치, 병어, 적어, 동죽살 각각 1건씩에서 O112, O136, O146, O159, O166, O168이 각각 확인되어 총 21.3%(13/61) 혈청형이 동정되어 어패류 등 수산물에 대장균이 분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관제기(1894-1906) 관립 외국어학교 연구 (Official Foreign Language Schools in Korea, 1894-1906)

  • 한용진
    • 한국교육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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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3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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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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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본 연구는 관제기 관립 외국어학교의 교육사적 의미를 정리하기 위한 것으로, 이 시기 설립 운영된 6개 관립 외국어학교의 교사진 특성과 학생수 변화를 통해 당시 외국어교육 정책과 외국어학교간 비교우위를 살펴보고자 한다.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해 과거제와 신분제를 폐지한 조선에서 외국어 교육은 근대적 문물 습득과 사회적 지위 상승을 위한 문화자본이었다. 본 연구를 통해 얻어진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관제기의 외국어학교는 당대 최고 수준의 교육기관이었다. 입학연령은 15세 이상 23세 이하였지만 실제 입학생들 대부분은 20세 이상이었다. 둘째, 관제기 외국어학교의 몇몇 교사 중에는 군사와 외교, 기술 분야 전문가도 있었다. 특히 법어학교 교사 마르텔은 대한제국 시기 중립외교 정책을 전개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셋째, 외국어학교의 학생 모집은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분위기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넷째, 관제기 관립 외국어학교의 입학생 통계를 보면 한어학교, 법어학교, 영어학교의 순으로 비중이 높으며, 이는 당시 재학생 통계상 영어학교와 일어학교에 학생들이 집중된다는 일반적인 주장과는 다른 결과이다. 다섯째, 관제기 관립 외국어학교는 역관통사를 양성할 뿐만 아니라 경세가가 될 수 있는 문무 관료를 양성하였다.

대순사상의 종교 문화 조화정신

  • 왕쭝위
    • 대순사상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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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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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7-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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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한국은 백 년 이래로 군사적 침략과 경제적 대변혁을 맞았으며, 또한 종교와 문화적 측면에서 전통의 중흥기와 서학의 유입에 대한 문제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역사적 경험은 주변 국가의 국민들이 배울 만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와 연관하여 대순진리회가 역사를 계승하고 창신을 이루어나가는 측면의 문제는 정리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대순진리회의 종지는 '음양합덕, 신인조화, 해원상생, 도통진경'이다. 특히 대순진리회는 해원상생 사상으로 조화정신을 집중적으로 잘 나타내고 있다. 대순진리회의 해원은 고대 단주로부터의 원을 푸는 것에서 시작되며, 인류가 근본적으로 여러 세대에 걸친 원한을 풀어야만 행복하고 안락한 시대에 진입할 수 있다는 역사관을 보여주고 있다. 대순진리회가 해원을 푸는 방책으로 제시하는 상생은 당시의 갑오동학혁명이나 역사상 많은 종교에서 원한을 해결하는 방법과 구별되는 것이다. 과거에 있어서는 상극의 방법으로 원한을 해결하여 왔으나, 상극의 방식은 오히려 새로운 원한을 더욱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에, 현대에 있어 원한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은 악을 선으로써 대하는 것이라고 한다. 증산 성사 및 그 후학들은 사회의 질서를 새롭게 세우는 문제와 전통사회에서 인간 간의 조화를 방해하고 원한을 용인하는 구습을 개조하고 원을 소멸하는 문제에 주의를 기울였다. 이러한 변혁은 평등의 관념을 나타내고 있다. 증산께서는 전 세계적인 관점에서 민족과 국가 그리고 종교 간의 조화를 실현해야 할 것을 강조하셨다. 당시 동아시아 국가는 매우 폐쇄적인 상황에서 서양 국가의 침략을 받던 시기였는데, 증산 성사께서 미래의 세계는 마땅히 화합을 이루고 서로의 장점을 배우는 세계가 될 것임을 예견하셨다는 것은 그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증산의 후천개벽사상 역시 조화의 정신을 나타내고 있다. 후천개벽사상은 전통적 참위를 현대적으로 개조한 것으로 민중을 적극적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다. 다음으로, 증산께서는 각 종교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표하셨고, 또한 매우 진지한 태도로 타 종교로부터 자신이 주창하는 사상과 관련한 자원을 흡수하셨다. 동양의 전통적인 유불선 삼교를 가장 중요한 종교와 문화형태로 인정하시고, 그 삼교의 내용을 두로 포용하셨으며, 심지어 예수교와 서양문화까지 모두 아우르는 태도를 보여주셨다. 서양의 문화 역시 증산께서 추구하시는 신세계의 한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증산께서 당시 세계의 역사적 방향에 대해 통찰하고 있었고 이 통찰 속에서 종교 간의 관계가 조화롭게 되어야 함을 주창했음을 말해 준다. 대순사상에는 민간 무교의 내용 역시 풍부하게 들어있다. 부뚜막신, 사명, 아표신, 마장군, 백의군왕, 황천신 등 민간에서 유행했던 다양한 신령숭배의 내용을 흡수했을 뿐만 아니라, 주문과 부를 태우는 법술로 신명과 관련된 내용을 표현하고 있으며, 칠성과 관우의 신앙까지 수용하고 있다. 또한 증산 성사는 동학과 같은 신종교까지 받아들이셨다. 증산께서는 동학혁명의 비참한 최후를 완화시켰던 위대한 역사적 공적을 이루셨으며, 신종교 운동의 사회적 형태를 변화시켰을 뿐 아니라, 서로 다른 내력을 지닌 교도들간의 관계를 조화롭게 하였다. 이로 볼 때 결국 증산께서 주창한 대순사상은 사람들 간의 충돌과 모순을 소멸시키고, 조화와 상생의 사회 환경을 창조하고자 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프리카 사하라 연안 트로올 어장의 어획량분포에 관하여 (Distribution of the Trawl Catch off the Shara Coast of Africa)

  • 김진건;손태준
    • 수산해양기술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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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9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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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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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3
  • 한국 토로올어선들이 아프리카 사하라 연안어장에 출어하여, 1975년 5월부터 1976년 4월까지, 이 해역의 중심어장으로 알려진 22$^{\circ}$00'~25$^{\circ}$30'N의 연안에서, 연 16,725척이 252,609회 예망하여, 살오징어 3,754,786kg, 대형갑오징어(체중 300g 이상) 7,540,532kg 소형갑오징어(체중 300g 미만) 9,539,570kg, 문어 11,130,462kg, 서대 2,010,540kg, 돔류 2,360,970kg, 기타 어종 15,951,250kg을 어획하였다. 이들이 어획된 해역을 경위도 30분간의 소해구로 분할하고, 이 소해구별 월평균 예망당 어획량을 구하고 그로부터 어종별 어획량 분포를 고찰한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어종별 예망당 어획량을 비교하면, 살오징어 14.9kg,, 소형갑오징어 대형갑오징어 37.8kg, 문어 44.1kg, 서대 8kg, 돔류 9.3kg 기타어종 63.1kg의 비율로 혼획한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2) 살오징어는 23$^{\circ}$00'N 이남과 24$^{\circ}$30'N 이북의 해역에서 많이 어획되었고, 주어기는 8~11월이었다. 3) 갑오징어는 대형은 23$^{\circ}$00'~25$^{\circ}$00'N의 해역에서 많이 어획되었고, 주어기는 12~5월이었으며, 소형은 23$^{\circ}$30'~25$^{\circ}$00'N의 해역에서 많이 어획되었고, 주어기는 4~6월과 11~1월이었다. 4) 문어는 23$^{\circ}$00~25$^{\circ}$00'N의 해역에서 많이 어획되었고, 주어기는 3~4월과 9~1월이었다. 5) 서대는 23$^{\circ}$00'N 이남과 25$^{\circ}$00'N 이북의 해역에서 많이 어획되었고, 주어기는 6~11월이었다. 6) 돔류는 23$^{\circ}$30'N 이남과 25$^{\circ}$00'N 이북의 해역에서 많이 어획되었고, 주어기는 5~11월이었다. 7) 기타어종은 23$^{\circ}$30'N 이남과 25$^{\circ}$00'N 이북의 해역에서 많이 어획되었고, 주어기는 5~10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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