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4년 모사된 <허목 초상>의 원본은 1676년(숙종 2)에 처음 그려졌다. 허목이 우의정이 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고자 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제작된 82세 허목 초상은 경기도 연천 은거당(恩居堂)에 보관되어 왔는데, 118년이 지난 1794년 정조가 오래도록 흠모하였다고 밝히며 허목 초상을 구해 들여올 것을 지시하면서 모사가 시작되었다. 채제공(蔡濟恭)(1720~1799)은 은거당에서 허목 82세상을 들여와 당시 최고의 초상화가 이명기에게 허목 초상을 모사하도록 하였다. 완성된 초상은 정조가 열람하였으며, 첩장본을 추가로 모사하여 궁궐 내에 두도록 하였다. 정조는 이를 통해 선대(先代)의 명신(名臣)을 자신의 근신(近臣)으로 삼아 탕평책을 강화하고 남인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정조와 대신들은 논의를 거쳐 영주 소수서원(紹修書院)을 비롯하여 경기도 연천과 전남 나주에 소재한 서원에 봉안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이러한 내용은 채제공의 문집을 비롯하여, 소수서원과 미천서원 관련 기록에 남아 전한다. 본고에서는 기록과 현존 유물을 통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첩장본으로 다시 모사된 본, 미천서원, 미강서원에 봉안된 본, 총 4점과, 종손가에 소장되어 온 반신상 1점까지 총 5점이 1794년에 모사된 것으로 결론지었다. 허목 사후에 바로 그를 모신 서원이 세워졌지만 초상은 봉안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1794년 모사본 제작이 되면서 봉안되었음이 확인된다. 모사를 위해 은거당 원본이 연천에서 도성 안으로 들어오던 날과, 모사된 초상이 도성 밖으로 떠나던 날에 남인들은 채제공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회합을 가졌다. 초상화 제작은 서원 봉안이라는 의미를 넘어, 정치적으로 학맥을 결합하고 결속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소수서원이 허목을 모신 서원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신들이 허목 초상을 소수서원으로 보내야한다고 주장했던 것은 초상의 모사와 봉안의 과정을 통해 이황(李滉)(1502~1571)에서 정구(鄭逑)(1543~1620)로, 다시 허목으로 이어지는 학문의 정통성을 정립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정조의 입장에서도 선대 왕의 명신이었던 허목 초상을 모사함으로써 채제공 및 남인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는 의미에서, 근기남인(近畿南人)의 대표 허목을 그의 근신 그룹으로 끌어온 것과 마찬가지 효과를 이루었을 것이니, 이렇게 정조와 남인은 각각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초상화는 원본이 낡았을 경우나 서원 봉안을 목적으로 모사되었던 전통이 있었는데, 허목 82세상은 그러한 전통적인 모사 맥락을 넘어서, 정조의 전략과 남인들의 학맥 결집이라는 정치적 맥락 속에서 재탄생하였다는 중층적 의미를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