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
1. 연구배경 및 목적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의 발효에 따른 교역 확대와 동북아 경제권 발전, 한중 학술연구의 강화, 문화교류의 활성화로 양국 간에 다양한 방면에 걸친 교류가 활발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 연구는 조선시대 '가구'의 문화사적 연구영역을 넓히고 한국과 중국의 전통가구 문화를 분석함으로써 가구를 매개로 한 한중 간의 문화적 소통과 교류의 과정을 규명하는 한편 향후 문화 교류 활성화를 위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는 의미 있는 작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국내 학계에서는 한중 양국의 전통 가구 간 비교연구 활동이 비교적 늦게 진행되고 있다. 학위논문의 경우 이화여자대학교의 이순희가 1984년 발표한 석사 논문 「韓國과 中國의 傳統家具 樣式의 比較 :14C~19C 中心으로」가 최초이다. 2004년까지는 김국선이 석사논문인 「韓·中·日 住居文化 脈絡에서 본 傳統家具 디자인特性 比較硏究」를 발표하였다. 2006년 황영혜는 「한ㆍ 중ㆍ일 수납가구 장석의 비교연구」라는 제목의 석사 논문을 발표했다. 2009년 왕배의 「중국과 한국의 전통가구 조형성에 관한 비교연구 :명청시대와 조선시대 가구를 중심으로」와 류티에의 「15-19世紀 韓·디자인의 特性 및 比較 硏究」 석사 논문이 발표되었다. 2010년에는 이목성의 「한ㆍ중 소반 디자인에 대한 분석 연구」 석사 논문이 발표되었다. 2017년 왕억함은 「한중 가구 디자인 비교」라는 제목의 석사 논문을 발표했다. 2011년 홍선아는 「韓·中·日 坐具 硏究」라는 제목의 박사 논문을 발표했다. 2018년 왕명경은 「한국 전통 소반과 중국 전통 탁자의 조형미 비교 분석을 통한 가구 디자인 연구」라는 제목의 박사 논문을 발표했다.
학술논문의 경우 현재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5편이다. 2003년 김국선, 이연숙의「한국과 중국 주거문화를 통한 전통가구 비교연구 - 조선시대 반가와 명.청시대 사합원를 중심으로 -」, 2006년 김진욱의「한.중.일 전통가구의 유형에 따른 특성 비교연구」, 2012년 류태준, 최경란의「15~19C 한국과 중국 가구디자인의 표현양식 및 특성」, 2018년 이정, 이성원의「한 · 중 전통가구 장식의 상징적 의미를 활용한 디자인 연구」,2019년 이정, 이성원의「한⋅중 전통 목가구의 비례 연구 - 조선시대와 (중국) 명⋅청시기 장(欌)가구를 중심으로 -」.
현재 국내 연구 성과에 따르면 중국 전통가구에 대한 국내 학계의 연구는 '왕조'와 '국가'를 주제로 하고 있으며, 중국 전통가구의 예술양식을 연구주제로 삼지 않고 있다. 중국 전통가구의 발전 과정에서는 한 왕조 내에서는 시간대별로 국가 발전의 중심과 사회 풍조가 달라지며, 중국 전통가구의 조형적 특징에도 변화가 생기게 된다. 이런 연유로 단순히 '왕조'와 '국가'를 연구주제로 삼아 연구하는 것은 적절치 않을 것이다. 명나라 초기의 가구 스타일은 명(明) 중후기 가구와 전혀 다른데, 명(明) 중후기 가구와 청(淸)나라 초기의 가구 스타일이 똑같고, 청(淸)나라 초기의 가구 스타일과 청(淸) 중후기 가구 스타일은 완전히 다르다.
국내 학계에서는 중국 가구 연구의 키워드를 '중국 전통 가구' '중국 가구' '명나라 가구' '청나라 가구' '명청 가구'로만 정의하고, 명식(明式)가구에 대한 연구가 부족해 명식(明式)가구의 연구 분야는 거의 전무하다. 국내 학계에서는 '명식(明式)가구'라는 용어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2015년 공주대학교의 왕정림은 「명식(明式) 가구와 중국 현대 가구에 관한 연구 :서재용 가구를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석사논문을 발표했는데, 이는 국내 유일의 "명식(明式)가구"를 대상으로 한 논문이다.
중국 칭화대학교의 한국 유학생 국문리는 2009년 「조선시대 후기의 전통가구를 논하다-겸론과 명식(明式)가구의 관계」라는 제목의 박사논문을 발표했다. 국문리의 박사논문은 현재 한중 양국의 박사논문 중 유일하게 '조선시대 후기 가구'와 '명식(明式)가구'라는 두 학술적 개념을 명시한 학위논문이다.
일본의 민예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시대 목공예의 아름다움을 숭앙했다. 그는 조선시대 목공예에 대한 미적 평가에서 '인간의 척도로서 잘 재지지 않는, 말로써도 표현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이다[1].'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한국의 미술사학자 고유섭은 조선시대의 미술에 대해 '정치(精致) 한 맛은 부족하나 질박하면서도 둔후(鈍厚) 한 맛이 있어 비정제성(非整齐性),무관심성(无关心性)의 아름다움이 있다[2]'고 평가했다. 조선시대 후기의 가구는 소박한 아름다움, 투박한 아름다움과 순진함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조선시대 후기 가구의 아름다움은 함축적이고, 수렴적이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자연미를 갖고 있다. 중국의 저명한 문화재 전문가인 왕세양은 명식(明式)가구에 대해 16개의 '품(品)'을 제시한 바 있다. 왕세양은 명식(明式) 가구가 '간련(简练)'、'순박(淳朴)'、'후졸(厚拙)'、'응중(凝重)'、'웅위(雄伟)'、'원혼(圆浑)'、'침목(沉穆)'、'농화(穠华)'、'문기(文绮)'、'연수(妍秀)'、'경정(劲挺)'、'유완(柔婉)'、'공령(空靈)'、'영롱(玲珑)'、'전아(典雅)'、'청신(清新)' 등 16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조선시대 가구조형의 미의식은 명식(明式)가구의 미의식과 마찬가지로 예교(禮敎)를 중요시하고, 이 것이 가구에 반영되었기 때문에 두 나라의 기본적인 미의식은 일치했다[3]. 조선시대 후기 가구와 명식(明式) 가구는 조형 디자인에서 고도의 미적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조선시대 후기 가구와 명식(明式)가구 중 두 나라의 전통가구 제작기술과 예술적 조형미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에 나타난 가구의 조형 디자인은 한중 전통가구의 특성과 아름다움을 잘 드러내고 있다. 양국 탁자(卓子)류 가구의 조형디자인 측면에서 유사성에 대한 연구를 통해 조선시대 후기 가구와 명식(明式) 가구의 유사한 조형 요소를 정리했다. 또한 한국 전통 가구 문화를 중국의 전통 가구 문화와 횡적으로 대비해 분석해 봄으로써 한국 전통 가구에 대한 연구 영역을 넓히려고 시도했다.
2. 연구 범위 및 목표
한국과 중국은 특수한 역사적 연원과 지리적 근접성, 활발한 문화 교류 등으로 인해 오랜 세월동안 서로 영향을 미쳐왔고, 가구 조형 디자인의 발전 역시 이 같은 영향 때문에 공통점과 유사성이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17세기 이후부터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 일기 시작한 새로운 개혁의 기운은 18세기 이후 숙종·영조·정조의 3대에 걸친 제2의 문예 부흥으로 인해 역사적 재정립의 기회를 가져왔다[4]. 17세기 이후 관청의 수공업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조선 전기에 국가기관에 의존해 상류층을 위해 일해 왔던 '경장인(京匠人)'이 점차 감소했다. 관서(官署)의 신분을 가진 많은 장인들이 사장인(私匠人)으로서 수공업 생산에 종사하기 시작했고, 가구의 품목이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가구의 품질이 크게 향상됐다. 또한 18세기에는 가구 전문상점이 생겨 '칠목기전'이라 불리며 상업성을 띈 수공업이 싹트기 시작했는데, 이 시기가 한반도 가구 발전의 전성기가 됐으며, 이로 인해 조선시대 후기의 가구 역시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가구가 됐다.
중국 전통가구의 학술연구에서 '명식(明式) 가구'와 '명나라 가구'는 큰 차이를 보이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중국의 유명한 문물 전문가 왕세양(王世襄)은 「명식(明式)가구연구」라는 책에서 '명식(明式)가구'라는 용어를 명확하게 정의했다. '명식(明式) 가구"라는 단어는 넓고 좁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넓은 의미로는 명대에 만들어진 가구뿐만 아니라 일반 잡목제, 민간 일용품, 귀중목재, 세세한 조각도 모두 포함된다. 이 것은 곧 근현대 제품인데 명식(明式) 스타일만 있으면 다 명식(明式) 가구라고 할 수 있다. 좁은 의미로는 명나라 중후반부터 청나라 전기까지 재료가 훌륭하고 조형이 아름다운 가구를 가리킨다. 특히 명나라 가정(嘉靖), 만력(萬曆)에서 청나라 강희(康熙), 옹정(擁正)(1522~1735년)까지 200여년 간의 제품을 말한다[5]. 본 논문에서 사용한 명식(明式) 가구의 개념은 좁은 의미의 명식 가구를 말한다.
조선시대 후기 가구와 명식(明式) 가구는 가구류, 제작공예, 예술성 등에서 양국 가구의 발전사에서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본 연구는 가구 조형 풍격(風格)을 구분하는 방식으로 연구를 진행했는데, 이는 '왕조'와 '국가'를 구분하는 방법에 의한 이전 국내 학계의 연구와의 차이점이다. 본 연구는 조선시대 후기 가구와 명식(明式) 가구 중 탁자(卓子)류 가구를 연구 대상으로 하고 있다. 사례 연구 방법을 통해 두 가구의 유사성 조형 요소를 명확하게 규명하고, 이론적, 감각적 관점에서 양국 가구문화의 특징을 분석함으로써 한중 양국의 전통가구의 디자인 발전에 대한 참고자료를 제시코자 했다.
Ⅱ. 시대적 특징의 유사성 분석
한중 두 나라는 지리적으로 가깝고 문화적으로 유사하며 수천년의 오랜 교류 역사를 통해 역사적, 문화적으로 불가분의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16-19세기 조선 왕조와 명나라, 청나라는 서로 사신을 파견하고 대외무역, 유학생 선발, 종교 교류 등을 통해 폭넓게 교류해 왔다. 이 같은 오랜 교류를 통해 두 나라는 서로 간에 다양한 문화적 영향을 미치고 상대방의 각 영역에 여러 가지 자취를 남겼다.
1. 시대의 교류
조선 왕조는 명나라와 국가 간에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1392년 12월 17일 태조는 문하시랑 우인열을 남경에 파견해 명나라에 대한 우호적 외교 노선을 처음으로 제안했다. 이때부터 조선 왕조는 명나라와 다방면에 걸쳐 심층적인 교류를 전개했다.
조선 왕조는 사신에게 정치적인 사명을 부여함과 동시에 명나라에서 대량으로 책을 사들여 귀국하도록 했다. 중국 역사서는 ‘조선인들은 책을 가장 좋아한다. 사신이 조공할 때마다 최대 50명이 올 수 있었다. 옛 전적이나 새로 나온 책, 패관소설 등 그들 나라에 없는 책이 있다면, 그들은 아침부터 시장에서 책을 찾고, 책 이름을 적고, 사람을 만나면 물어보고, 아무리 많은 돈을 써도 아까워하지 않고 구입해 가져갔기 때문에, 그들 나라는 희귀한 장서들을 가질 수 있었다'(朝鲜人最好书,凡使臣入贡,限五十人,或舊典,或新书,或稗官小说,在彼所缺者,日出市中,各写书目,逢人便问,不惜重值购回,故彼国反有異书藏本也)[6]’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 왕조가 명나라에서 들여온 한문 서적은 품목이 많아 사서오경 등 유가 경전뿐만 아니라 지리, 천문, 의약, 문학, 회화 등의 서적도 많았다. 한문서적이 도입됨에 따라 명나라의 문화와 한반도 본토의 문화는 상호 작용과 융합이 이뤄졌으며, 조선 왕조는 정치, 사상, 문화, 건축 등에 있어서 명나라의 풍모를 띄면서 명에 대해 강한 동질감을 갖게 됐다.
명나라 멸망 후 북방 유목민족이 세운 청나라가 등장하자 정주리학관(程朱理学观)을 고수했던 조선 왕조는 이 같은 정권 교체를 화이(華夷)가 뒤바뀌고, 천지(天地)가 용납하지 못할 일로 생각해 줄곧 청나라를 싫어했다. 청나라는 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주자이학(朱子理學)을 관학으로 받들어 명나라의 많은 제도를 그대로 답습했다. 17세기 말 서문중은 일찍이 「연행일록(燕行日录)」에서 청조에서의 견문을 이야기 한 적이 있다. '오늘날 크고 작은 예의는 모두 명제를 사용한다(今大小禮仪皆用明制)[7]', 관리제도 또한 과거의 제도를 존중한다'(官制亦尊舊制)[7]' 1738년 2월 14일 영조가 대신을 모아 국사를 상의하고 군신들의 의견을 묻는 자리에서 영의정 이광좌가 말했다. '청나라 사람들이 비록 오랑캐 종족이기는 하지만 모든 일이 극도로 문명화 해, 전장(典章)과 문한(文翰)이 모두 명나라[皇明] 때와 같습니다.(淸人雖是胡種, 凡事極爲文明, 典章文翰, 皆如皇明時)[8]'. 이런 기록들로 볼 때 청나라의 정치체제는 오랜 기간 동안 명나라의 특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명나라 때 조선의 사신들은 중국에서의 활동을 '조천(朝天)'이라고 불렀는데, 길을 따라 가며 보고 들은 것을 '조천록(朝天錄)'이라고 기재했다가 청나라에 이르러서는 '연행(燕行)'으로 개칭했다. 이에 따라 조천록(朝天錄)도 연행록(燕行錄)으로 대체됐다. 이러한 명칭의 변화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 왕조는 청나라와의 교류에서 시종 위화감을 품고, 청(淸)을 오랑캐로 간주했다.
이 같은 '시청위이(视清为夷)'의 태도는 양국 문화 교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청나라의 중국 통치는 여진과 조선 왕조 두 정권 사이의 관계를 바꿔놓았다. 전통적인 화이관의 영향으로 조선 왕조는 청나라의 문화를 경멸하였고, 비록 두 나라 사이에 공식적인 종번(宗藩) 관계가 수립돼 사절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지만, 교류는 대부분 정치 활동에 국한됐고 문화 교류는 명나라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다. 명나라 때는 양국 간의 서적 교류가 관민 간에 활발하게 이뤄졌으나 청나라 때는 서적 교류 활동은 거의 민간에만 한정됐다. 청나라 초기에는 정권이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청나라는 조선 왕조가 그들의 적대 세력과 연계하고 정보를 알아내는 것을 막기 위해 조선 왕조를 철저하게 관리하고, 사신의 책 구입에 대해 엄격하게 감독했다. 청나라가 지도(地圖) 문제로 조선 왕조를 여러 차례 문책했다는 사료가 있다.
전통 화이관의 영향으로 조선 왕조에 대한 청나라의 문화적 영향력이 명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게 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중후반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사상은 줄곧 존재했고, 1644년 멸망했지만 명나라의 사상문화는 조선왕조(1392~1910년) 519년의 역사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조선시대 후기 사회의 사상문화 등은 여전히 명나라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므로, 조선시대 후기 가구와 명식(明式) 가구 사이에는 반드시 깊은 연관성이 있었을 것이다.
2. 조선시대의 '유생'과 명말의 '문인'
조선시대 후기의 탁자(卓子)류 가구의 종류는 그리 많지 않았는데 주로 소반(小盤), 경상(經床), 연상(硯床), 제상(祭床), 향상(香床), 그리고 소반과 같은 탁자(卓子)류 가구가 있었다. 서안, 경상, 벼루는 모두 사랑방 가구로 주로 주인의 학습에 사용되며, 이 가구들의 사용 주체는 선비이다.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조선시대에는 '가묘제(家庙)'가 시행되었는데, 사당은 가묘제의 산물로 제상이 사당가구로 주로 제사에 사용되었다. '부부유별(夫婦有別;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분별이 있어야 한다)',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岁不同席), 남녀불공식(男女不共食 ; 남녀가 일곱 살에 자리를 같이하지 않고, 남녀가 함께 먹지 않는다)' 등 유교적 학설에 따라 소반이 대표적인 음식용 가구로 등장했다. 이번 연구 분석을 통해 유가문화가 조선시대 후기 탁자(卓子)류 가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고 유생이 주요 사용 집단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유생(儒生)'은 조선시대에 학식이 있고 품행이 단정한 사람들에 대한 사람들의 존칭으로, 선비는 조선 왕조가 통치하던 정권의 중심적인 지주였다. 유생은 조선왕조의 시대정신을 대표하고 있으며, 선비의 품행과 생활에 대한 추구와 심미적 성향이 조선시대 후기 가구의 발전을 이끌었다.
조선시대 후기 가구양식 디자인의 발달은 선비들이 보여준 '허(虛)'와 '실(實)'의 두 가지 방식에 영향을 받았다. '허(虛)'는 정신적인 측면을 말한다, "사랑방"은 선비의 일상생활의 장소이며, 사랑채 가구의 양식 디자인은 선비의 심미와 정신의 표현이다. 가구 조형 디자인 면에서 사랑방 가구는 반듯하고 전체적인 틀이 직선으로 돼 있어 선비들이 신체가 의젓하고 단정함을 추구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가구장식 디자인에 있어서는 선비의 '절제' 정신에 기초해 조선시대 후기 사랑채 가구는 과도한 장식 없이 화려함을 피하고 전체적으로 소박하고 간결하며 자연미를 담고 있다. '실(實)'은 실제로 가구 디자인과 생산 활동에 개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시대 후기 사공장(私工匠)이 생기면서 선비들은 디자인에 직접 참여해 가구의 표면 장식에 자신이 좋아하는 문양이나 그림, 시구를 넣고 이를 통해 자신의 뜻을 표현할 수 있도록 장인들에게 요청할 수 있었다. 이런 허(虛)와 실(實)의 결합 속에서 조선시대 후기 가구에는 선비의 취향이 선명하게 남게 됐다.
사회문화 발전의 주체였던 문인이 갖고 있던 취향은 사회기풍의 흐름을 결정짓는데, 명말(明末)의 문인은 명식(明式) 가구의 발전을 이끄는 주요 요소 중 하나였다. 명말의 정치는 어두웠고, 과거시험의 부정이 성행했으며, 공평의 원칙은 이미 상실됐다. 게다가 인구수가 급증하고 과거시험의 경쟁이 치열해 문인들의 과거시험을 향한 열정이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도덕을 지키고,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많은 문인들은 더 이상 과거를 통해 공명을 얻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지 않았다.
명나라 후기 상품경제가 발전하고 서민계층이 부상함에 따라 새로운 세계를 마주한 문인들의 가치관은 점점 다원화되고, 동시에 '실학(實學)' 사상이 성행해 문인들이 민생을 이해하고, 민생과 관련된 활동을 적극적으로 섭렵하게 됐다. 이 시기에 문인은 가구와도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명말 청초부터 수많은 가구 디자인 이론이 담긴 저서들이 많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가구와 관련된 책으로는 「장물지(长物志)」, 「한정우기(闲情偶寄)」, 「통아(通雅)」, 「고반여사(考槃馀事)」, 「삼재도회(三才图会)」, 「광지역(廣志绎)」, 「오잡조(五杂俎)」, 「유구아편(游具雅编)」, 「준생팔전(遵生八笺)」 등이 있다.
명말 사회 가치 체계의 재구성과 함께, 문인들이 가구에 관해 저술을 내고 장인과 접촉하기 시작하면서 문인과 장인 사이에는 비교적 평등한 대화와 직접적인 연관이 생겼으며, 문인들이 점차 일부 공예미술 분야의 디자인과 제조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장인들과 직접적인 협력관계를 형성했다. 가구 이론 학설과 가구 실천 활동이 상호작용하는 상황에서 명나라 말기 가구의 발전과 변화는 문인의 취향에 의해 주도됐고, 문인의 심미적 경향과 사용습관은 모두 가구의 양식디자인에 녹아들었다. 문인과 장인의 이런 긴밀한 협력은 명나라 말기 가구의 급속한 발전을 직접적으로 이끌었고, 문인의 심미관과 정신적 추구를 담은 '명식(明式) 가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조선시대 선비와 명말의 문인은 모두 문화적 배경이 유교문화였다. 조선시대 후기 홍만선의 「산림경제」와 서유구의 「임원경제지」는 명나라 문인들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생활백과사전이다. 「임원경제지」의 일부 내용은 「준생팔전(遵生八笺)」「장물지(长物志)」 등 명나라 문인들의 문헌을 중요한 참고 문헌으로 채택했는데, 이는 당시 조선 시대 선비들이 명나라 문화를 흠모하고 추앙하였음을 증명한다[9]. 유생과 문인의 선호와 취향은 동질화를 피할 수 없었으며, 조선시대 후기 가구와 명식(明式) 가구의 발전을 이끈 주체로서 비슷한 선호와 취향이 양국 가구의 조형 디자인에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두 가구 모두 유가문화의 영향과 충격이 불가피했으므로 조형디자인에서 유사성도 필연적으로 나타났다. 조선시대 후기 가구의 발달은 중국 전통사상의 영향을 받아 조선후기에는 다양한 이유로 조선 고유의 가구양식과 심미관념이 형성되었지만, 중국의 전통사상이 조선시대 후기 가구에 미친 영향, 특히 명식(明式)가구가 조선시대 후기 가구에 미친 영향은 부정할 수 없다[10].
Ⅲ. 한·중 탁자류 가구의 유사성 분석
한국의 전통적인 평좌식(平坐式) 생활방식과 중국의 전통적 수족좌식(垂足座式) 생활방식은 차이가 있지만 조선시대 후기 가구와 명식(明式)가구는 전체적인 조형면에서 상당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가구의 조형 디자인에 있어 두 나라 모두 직선을 위주로 하고, 곡선으로 이를 보완하는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직선형 가구는 힘이 넘치고 양(陽)의 강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어 이를 보완하기 위해 부분적으로 곡선 디자인을 적용해 부드럽고 온유한 느낌을 주도록 배려함으로써 이 시기 한중 가구의 전체적인 디자인이 유사한 조형미를 나타내게 된 것이다.
1. 전체적인 조형 디자인의 유사성
조선시대 후기의 탁자(卓子)류 가구는 주로 서안(書案), 소반(小盤), 경상(經床), 연상(硯床), 제상(祭床), 향상(香床) 등이 많았다. 명식(明式) 탁자(卓子)류 가구는 주로 항탁(炕桌), 항안(炕案), 항기(炕幾), 향기(香幾)、주탁(酒桌)、반탁(半桌)、방탁(方卓)、화탁(畵卓)、화안(畵案)、책상(书桌)、서안(书案) 등이 있었다.
자료의 분석을 통해 현존하는 조선시대 후기 가구와 명식(明式) 가구에서 동일한 조형 디자인을 가진 가구를 많이 찾을 수 있으며, 탁자(卓子)류 가구 중 전체 조형 디자인 유사성을 가진 가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표 1]의 귀납적 정리에 따른 탁자(卓子)류 가구의 유사성 분석도는 다음과 같다. 가구의 전체적인 조형디자인 분석도를 보면 동일한 사회문화체계의 영향으로 가구를 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비슷한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고 양국간의 긴밀한 교류의 영향으로 가구 조형 디자인에 대한 선호도가 어느 정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조선시대 후기 가구와 명식(明式) 가구의 탁자(卓子)류 가구에서 뚜렷한 유사성이 특징으로 나타나기까지 했다. 양국가구의 형태를 비교한 결과 중국의 명·청식가구와 조선가구는 모두 간결한 조형성이 있고 자연미와 소박미를 숭상하는 것을 알 수 있다[29].
표 1. 전체적인 조형 디자인의 유사성 분석[11-28]
2. 부분적인 조형 디자인의 유사성
조선시대와 명청(明淸)시대 탁자(卓子)류 가구의 부분 조형 디자인은 매우 유사한 것이 특징이다. 예를 들어, 불교에서는 '곤문(壸門)'의 조형 형태가 양국 가구의 다리 조형 디자인에서 자주 나타난다. 이 시기에 두 나라의 탁자(卓子)류 가구의 다리 모양은 풍부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으며, 많은 유사성을 갖고 있다. 구족반(狗足盤)의 '구족1)'은 중국의 '내번마제(內翻馬蹄)'와 비슷하고, 호족반(虎足盤)의 '호족2)(虎足)'은 중국의 '삼완퇴(三弯腿)'와 비슷하며, 대나무 마디 모양의 ‘죽절형(竹節形) 다리’는 중국의 방죽족(仿竹足)과 유사한 형태로 두 나라 가구의 다리 모양에서 모두 나타나고 있다. ‘두루마리’ 모양은 조선시대의 '경상(經床)'과 중국의 '교두안(翹頭案)'에서 모두 나타나고 있다. ‘운각(雲角)’ 조형은 한중 전통가구 조형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이다.
그림 1. 유사성 분석도[11-28]
2.1 풍혈(風穴) & 곤문(壸門)
'풍혈(風穴)'조형과 '곤문(壸門)'조형은 두 가지 종류의 가구조형 디자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디자인 요소이다. 여러 사례분석 연구를 통해 '풍혈' 조형물은 '곤문' 조형물과 유사성이 많고 방법은 다르나 결과는 같은 이곡동공(異曲同工)의 묘미를 지녔음을 알 수 있다.
명식 가구의 '곤문(壸門)'은 불교문화에서 유래했다. 서기 67년에 불교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래됐다. '곤문(壸門)'의 조형은 불교 건축에서 일종의 문 조형이자 불교의 '불감'에서 일종의 장식 양식인데, 불교 문화의 영향으로 명식(明式) 가구에서 많이 활용되고 있다.
그림 2. 곤문(壸門)[30]
삼국시대 불교는 중국에서 고구려로 전해져 한반도에 불교문화가 뿌리를 내렸다. 고려시대에는 한반도에서 불교의 발전이 절정에 달해 불교를 국교로 삼았다. 이와 반대로 조선 왕조는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을 시행함에 따라 불교문화는 조선시대에 억압과 배척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곤문(壸門)'과 유사한 스타일의 풍혈이 조선 가구의 조형 디자인에 많이 나타나는 것은 이상한 현상이다. 현재 한국 전통 가구에 관한 대부분의 문헌은 '풍혈'에 대한 논의는 조형양식에 불과하며, 그 연원(淵源)에 대한 명확한 언급이 없다. 배만실 교수는 '소반'이란 책에서 공고상(公故床)의 풍혈조형은 '여의두문'라고 지적했지만, 다른 가구에 나타난 풍혈조형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문헌자료 분석과 논증을 통해 본 연구에서는 조선시대 가구 조형 디자인에서의 '풍혈'양식이 출현한 이유를 두 가지로 추정한다.
첫째, '풍혈' 양식은 불교 예술에서 유래한 것으로 문헌자료에 따르면 고려시대 불교회화 「관경서품변상도(觀經序品變相圖)」에서 탁상의 조형 디자인에 불교의 '곤문(壸門)'과 유사한 '풍혈' 양식이 등장한다. 이 그림을 통해 고려시대의 한국 전통 가구에 '풍혈' 디자인이 형성됐음을 알 수 있으며, 불교는 고려 왕조의 국교로서 불교 예술 양식이 한국 전통 가구의 발전에 영향을 준 것이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풍혈 조형에서 불교적 의미가 옅어지고 한국 전통 가구 조형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차츰 자리 잡으면서 풍혈 디자인의 양식에서 다양한 변화가 나타났으며, 억불 숭유정책을 시행한 조선 시대 가구 중에서도 많이 출현하고 있다. 이로 볼 때 풍혈 조형은 숭유억불 정책으로 불교적 색채가 희석되긴 했지만 조선 가구의 중요 요소로서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둘째, '풍혈' 양식은 명식(明式) 가구의 직접적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앞서 본 조선 왕조와 명나라의 교류사에 대한 논의와 조선 왕조가 '억불숭유' 정책을 시행했다는 사실에 근거해 본 연구는 조선시대 가구에 '풍혈'조형이 나타나고 있는 것과 관련해 '풍혈은 명식(明式) 가구의 직접적 영향을 받았으며, 중국에 간 사신들이 이 조형 요소를 한반도로 직접 가져왔거나 그들이 중국에서 구입해 온 서적을 통해 그 내용을 습득한 선비들이 이를 조선시대 가구에 응용함으로써 조선 사회에 남아있던 불교적 요소와 결합해 가구 조형으로 나타났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림 왼쪽의 한국 가구, 소반, 공고상 등 전통 가구의 다리 모양은 '풍혈'과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모양이 제각각이고 변화가 많다. 중국 전통 가구인 교두안(翹頭案), 주탁(酒桌) 등 가구의 조형 디자인에도 다양한 형태의 '곤문(壸門)'을 적용했다.
그림 3. 풍혈 & 곤문(壸門)[31-34]
2.2 족(足)
다리의 기능은 탁자의 안면(案面)을 지탱하는 것으로 탁자(卓子)류 가구에서 다리의 조형 디자인은 가구 전체의 조형 디자인에서 중요한 구성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조선시대와 명청(明淸)시대 가구의 조형 디자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식은 두 개의 널빤지와 네 개의 다리 형태이며, 두 나라의 탁자(卓子)류 가구에 있어 다리의 조형 디자인은 변화가 풍부하다. 조선시대 탁자(卓子)류 가구의 다리 모양에는 구족(狗足), 호족(虎足), 죽절형(竹節形) 등이 있고, 중국에도 이와 유사한 내번마제(內翻馬蹄), 삼완퇴(三弯腿), 방죽족(仿竹足) 등의 조형 디자인이 있다.
조선시대 후기 가구에서 '구족(狗足)'의 조형양식은 다리의 맨 아랫부분이 발인 형태로 발 부분이 안쪽으로 반전돼 개의 다리와 발과 모양이 비슷해 '구족(狗足)'이라 불렸다. 명식(明式) 가구에서도 다리 모양이 비슷하게 나와 '내번마제(內翻馬蹄)'로 불린다.
그림 4. 구족(狗足) & 내번마제(內翻馬蹄)[35-40]
조선시대 후기 가구에서는 '호족(虎足)'의 조형양식이 다리의 맨 윗부분을 밖으로 돌출시켜 중부는 안쪽으로 수납하고, 가장 아래쪽은 다시 밖으로 돌출시켜 선이 S와 같은 형태로 호랑이 다리와 발과 비슷하다고 해 '호족(虎足)'이라 불렀다. 명식(明式) 가구의 다리 모양도 비슷한 스타일로 '삼완퇴(三弯腿)'라 불린다.
그림 5. 호족(虎足) & 삼완퇴(三弯腿)[10][41-43]
판각은 일반적으로 세 개의 널빤지 양식으로 사용되던 가구의 조선시대 후기 가구에 들어가는 서안과 소반에 판각의 양식이 흔히 있다. 명식(明式) 가구 중 항기(炕几), 안(案) 등의 가구 디자인에도 판각의 양식이 사용된다.
그림 6. 판각 & 판각[44-49]
서안(書案)은 중국의 서안(書案)의 다리 모양과 디자인이 비슷하다. 두 가구의 다리 모양은 모두 '판각' 디자인으로 넓은 널빤지 중간에 문양이 있다. 가구의 다리 모양의 가장 큰 특징은 발 밑부분을 말아 올려 스타일링을 한 것이다.
그림 7. 두루마리 다리 & 권식(卷式) 다리[17][18][50][51]
나주반의 다리는 중국 방탁(方卓)의 다리 모양과 디자인이 비슷하다. 두 가구 모두 다리와 발이 대나무 마디 모양을 하고 있으며, 날렵한 다리와 더불어 경쾌한 발의 디자인이 돋보인다.
그림 8. 죽절형(竹節形) & 방죽족(仿竹足)[19][20][52][53]
2.3 두루마리(卷筒) & 교두(翘头)
'두루마리' 조형과 '교두(翘头)' 조형은 두 가지 가구 조형 디자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디자인 요소이다. 예로부터 가구 조형 디자인의 변화는 건축 형태 발전에 영향을 받았으며, 명식 가구 중 '교두(翘头)'의 형태는 중국 전통 건축에서 나오는 처마끝에서 유래했다. 옛날 책은 죽간을 위한 책으로 평소에 말아서 보관하고, 읽을 때 열어서 올려놓는 것으로, 교두(翘头) 조형은 죽간의 미끄러짐을 방지하는데 효과적이다. '두루마리형'은 불교 예술에서 유래한 것으로, 배만실은 일찍이 《한국 목가구의 전통 양식》에서 경상의 조형이 중국에서 유래했다고 명시한 바 있다. 단지 그 유래를 살펴보면 사찰에서 불경을 읽는 데 사용한 것에서 그 명칭이 붙었으며, 중국 송당(宋·唐) 시대의 경상(经床) 양식에서 형태를 받아온 것 같다[54]. 이런 것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두루마리' 조형과 '교두(翘头)' 조형은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다.
그림 9. 두루마리(卷筒) & 교두(翘头)[55-58]
2.4 운각(雲角) & 아판(牙板)
운각은 나무의 가로부분과 세로 부분을 연결하는 것으로,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구를 견고하게 지탱해주고 장식성까지 가미해 주는 중요한 기능을 갖고 있다. '운각' 조형과 '아판(牙板)' 조형은 두 가지 종류의 가구 조형 디자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디자인 요소이다. 여러 사례 분석을 통해 '운각' 조형은 '아판(牙板)' 조형과 유사성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각형의 운각으로 연결 안면 횡목과 다리는 입목을 하고, 위는 넓고 아래는 좁아서 안면과 다리 사이에 매달린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명식(明式) 가구는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아자(牙子)'라고 불리는데, 그림의 한국 가구와 비슷하게 생겼다. 긴 줄무늬의 '운각'은 다리와 다리 사이에 설치되어 연결과 장식의 역할을 할 수 있으며, 명식(明式) 가구에서 유사한 구조를 '아판(牙板)'이라고 부른다.
그림 10. 운각(雲角) & 아자(牙子)[25][34][55][57][59][60]
그림 11. 운각(雲角) & 아판(牙板)[41][60-62]
2.5 중대 & 정(棖)
'중대'는 조선시대 후기 가구에서 중요한 연결 구조로, 중대는 가구의 무게를 높이면서도 가구의 견고함을 강화시켜준다. 명식(明式) 가구에도 유사한 구조가 있는데, 명식(明式) 가구에는 "중대"와 유사한 기능과 조형을 가진 구조를 '정(棖)'라고 부른다. 가구 조형디자인의 변화에 따라 중대 조형양식이 다양하게 변화했다.
조선시대 후기 가구의 '중대' 양식은 두 가지로 구분돼 있다. 하나는 직선식 중대, 하나는 '凸'자식 중대로 중대의 중간은 돌기돼 있고, 양쪽은 낮은 형식이다. 명식(明式) 가구 중에도 유사한 조형 구조를 가진 것이 있는데, 직선식 중대와 비슷한 정(棖)을 '직정(直棖)'이라고 부른다. '凸'자식의 정(棖)는 '라과정(羅鍋棖)'이라고 불린다.
그림 12. 중대 & 직정(直棖)[63-66]
그림 13. 중대 & 라과정(羅鍋棖)[53][67-69]
2.6 족대(足臺) & 탁니(托泥)
족대(足臺) 조형과 탁니(托泥) 조형은 두 가지 가구 조형 디자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디자인 요소이다. 다양한 사례분석을 통해 족대(足臺) 조형과 탁니(托泥) 조형은 유사성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족대(足臺)는 가구의 조형 디자인에서 발을 받치는 구조로, 발을 연결해 바닥과의 접촉면적을 늘림으로써 가구의 견고함과 안정감을 높여준다. 중국 가구에도 '탁니(托泥)'라는 유사한 구조가 있는데, 족대를 분류할 때 한중 두 나라가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 직선형을 띄고 있다.
그림 14. 족대(足臺) & 탁니(托泥)[12][13][36][37][70][71]
2.7 가락지 & 과퇴주(裹腿做)
가락지는 중대(中帶)의 특수한 조형 디자인으로, 왼쪽의 통영반의 다리 조형에 가락지를 사용했다. 중대 조형 디자인은 네모꼴로 다리는 중대로 감싸져 있어 다리 표면보다 중대가 약간 높게 튀어나와 있다. 중국 전통 가구의 조형 디자인도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를 '과퇴주(裹腿做)'라고 부른다. 오른쪽의 항탁(炕桌)과 방탁(方卓)의 중대와 다리가 교차하고, 이 둘이 서로 만나는 곳에서는 중대가 다리면(腿面) 보다 높아 마치 다리를 감고 있는 듯한 모양을 띄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이런 제작 기법은 마디가 있는 대나무 가구를 모방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그림 15. 가락지 & 과퇴주(裹腿做)[19][20][52][72]
Ⅳ. 결론
1. 본 연구는 '조선시대 후기 가구'와 '명식(明式) 가구 '를 연구 주제로 하고, '명식(明式) 가구'를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본 연구는 조형 풍격(風格)을 구분하는 것을 연구대상으로 삼았으며, 이는 '왕조'와 '국가' 중심의 구분법으로 연구해온 이전의 국내 학계 연구와의 차이점이다. 국내 학위논문과 학술논문을 보면 '명식(明式) 가구'라는 단어의 개념에 대한 학계의 인식이 뚜렷하지 않다. 2015년 공주대학교의 왕정림은 '명식(明式) 가구와 중국 현대 가구에 관한 연구 :서재용 가구를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석사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은 '명식 가구'의 개념을 명확히 한 유일한 것이다. 현재 국내 학계에서 중국 가구에 대한 연구의 키워드는 '중국 전통 가구' '중국 가구' '명나라 가구' '청나라 가구' '명청가구'로만 정의될 만큼 "명식(明式) 가구"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
2. 본 논문의 연구 분석을 보면 조선시대 후기 가구와 명식 가구를 발전시킨 주체들 간에는 고도의 유사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선비와 문인의 유사한 기호와 취향이 양국 가구의 조형 디자인에 반영될 수밖에 없었고, 두 가구의 발전에서 유교문화의 영향과 작용으로 인해 조형디자인의 유사성이 필연적으로 나타났다.
먼저, 조선시대 후기 가구와 명식(明式) 가구의 탁자(卓子)류 가구는 디자인상에서 전체적인 면과 부분적인 면에서 긴밀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전체적인 조형에 있어서는 '경상'과 '교두항안(翘头炕案)'의 조형이, '향상'과 '평두항안(平头炕案)'의 조형이, '두루마리 서안'과 '권식(卷式) 서안'의 조형이, '나주반'과 '방죽방탁(仿竹方卓)'의 조형이, '원반'과 '원형향기(圆形香幾)'의 조형이, '제상'과 '주탁(酒桌)'의 조형이, '반월반'과 '반탁(半桌)'의 조형이, '다정자'와 '향기(香幾)'의 조형이 각각 유사하며, 조형 디자인에서는 두 가지 탁자(卓子)류 가구 모두 질박하고 순진하며 간결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다음으로, 전체적인 조형상의 유사함이 우연의 일치일 뿐이라면, 부분적인 조형 상에서 유사성의 요소가 다수 나타나는 것은 이런 주장을 강력하게 반박할 수 있는 유력한 근거이다. 부분적인 조형에서는 조선시대 후기 가구의 '풍혈'과 명식(明式) 가구의 '곤문(壸門)'의 조형이, '구족(狗足)'과 '내번마제(內翻馬蹄)'의 조형이, '호족(虎足)'과 '삼완퇴(三弯腿)'의 조형이, '판각'과 '판각'의 조형이, '두루마리 다리'와 '권식(卷式) 다리'의 조형이, '죽절형(竹節形) 다리'와 '방죽족(仿竹足)'의 조형이, '운각(雲角)'과 '아판(牙板)'의 조형이, '중대'와 '정(棖)'의 조형이, '족대(足臺)'와 '탁니(托泥)'의 조형이, '가락지'와 '과퇴주(裹腿做)'의 조형이 서로 유사하다.
본 연구는 이전과는 다른 시각으로 연구를 진행했으며, 이 시기의 탁자(卓子)류 가구를 연구 대상으로 삼아 유사성이라는 가설에 따라 양국 가구의 발전을 추동해 온 주체군의 유사성을 연구의 시발점으로 삼았다. 한중 양국의 가구조형 디자인에서 많은 유사점을 전체적인 조형 디자인과 부분적인 조형 디자인의 두 가지 측면에서 동시에 찾을 수 있었다. 이러한 유사한 특징들을 비교해 보면 앞서 본문에서 언급한 것처럼 조선시대 후기 가구에 나타난 풍혈의 연원(淵源)에 대해 조선의 사신과 그들이 귀국할 때 구입해 온 서적을 통한 중국 도래설(渡來說)의 추론이 가능하다.
3. 한중 양국 간에는 지리, 기후, 주택, 민속, 사회문화 등의 요인이 다르기 때문에 조선시대 후기 가구와 명식(明式)가구의 조형 디자인이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며 유사성도 있고 차별성도 있다. 이런 현상은 탁자(卓子)류 가구의 전체적인 조형디자인의 비교분석을 통해 볼 수 있다. 평좌식 생활습관의 영향으로 조선시대 후기의 탁자(卓子)류 가구는 높이가 낮고 크기가 작으며 모양이 가늘어 이동이 용이했다. 중국 명식(明式)가구의 탁상용 가구들은 대부분 높이가 높고, 형체가 굵고, 체량감이 비교적 강하고, 입체적이다.
가구 척도 크기에 따라서는 가구의 부분적인 조형 디자인이 달라지고, 부분적인 조형 디자인의 양식이 발전한다. 조선시대 후기 가구들의 부분적인 조형 디자인은 조선시대 후기의 심미 관념과 생활양식을 뚜렷이 나타내주는 것으로 당시 사람들의 사상과 삶의 지혜가 반영된 것이다. 조선시대 후기 가구는 명식(明式) 가구의 부분적인 조형물에 비해 한결 질박하고, 간결하며, 실용적이다.
4. 이러한 유사성의 발견과 분석을 통해 조선 왕조와 명나라의 교류사에서 가구조형 디자인의 교류가 활발했음을 입증할 수 있다. 아울러 조선시대 후기 가구와 명식(明式) 가구는 여러 면에서 유사성이 있지만, 조선 시대 후기 가구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발전해 질박하고 순진하며 간결하고 성실한 느낌의 미적 감각까지 갖춘 독특한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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