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경성부청은 본정(本町) 1정목(丁目) 52번지에 있다가 1926년 태평통(太平通) 경성일보사를 헐고 그 자리(현재 서울시청사 터)에 새 청사를 지어서 옮겨갔다. 남은 터와 주변은 경성 행정의 중심에서 이탈되자 새로운 성격을 가지게 되고 경성부 도시조직으로서 위상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1926년 신축된 새 경성부청사 건물 및 부지에 대한 연구는 있었지만1) 옛 경성부청사 터가 어떻게 바뀌었는지에 대한 관심은 많지 않았다. 이곳은 남대문통(南大門通)이 굽어지는 지점의 남측에서 본정(本町)·장곡천정(長谷川町)·욱정(旭町)이 만나는 곳이자 일제강점기 일본인 상권이 압도한 대표적 가로인 본정통(本町通, 혹은 진고개길, 현재 명동8나길)이 시작하는 곳이다. 기존 연구는 이곳을 일본인 상권이 본정통 일대에 집중하는 모습을 탐색하거나2) 남대문통의 변화를 추적하거나3) 조선은행 앞 광장(이하 선은전(鮮銀前)광장)의 성격을 조명하면서 부청사 이전과 새로운 건물이 등장한 사실만 간단히 다루었다.4)
본 연구는 1926년 경성부청의 이전을 계기로 불거진 옛 터의 처리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이 터의 도시적 성격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그 변화를 추동한 힘은 무엇이었지 연구의 함의로서 간단히 정리하고자 한다.
부청은 1926년 10월 이전되었고 연구는 그 이후 옛 터의 변화에 집중하겠지만, 연구시기를 넓게 잡아 주변 도시조직의 변화가 가시화되는 1914년경부터 옛 터 주요 구역에 새 건물들이 들어서는 1935년경까지 약 20년간으로 한다. 연구방법은 문헌연구에 의존하는데, 지도·토지대장·지적·조선총독부공문서 등 변해가는 도시조직을 보여주는 자료와 경성부·조선총독부·경성상권 등 이 터의 변화와 관련된 각 주체들의 반응과 새로 들어서는 건물의 성격을 살펴볼 수 있는 신문·잡지·단행본 등을 활용하고 기존연구도 참조하겠다.
2. 기존부지에 신축계획 좌절과 새 부지에 신축 결정
2-1. ‘선은전광장’에 면하는 신축 계획안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조선을 경영하는 내내 지방행정관청사를 건축하는 데 충분한 재원을 투여하지 않았다. 그 탓에 보통 공사비의 절반 정도를 조선총독부의 재정지원(‘국비지원’)에 의존한 도·부·군(道·府·郡) 등 지방행정조직은 쉽게 청사를 건축하거나 수리하지 못했다.5) 경성부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1910년 10월 부제(府制)가 시행되자 경성부는 통감부 시기(1906.2∼1910.8) 경성이사청 건물(<그림 1>)에서 부청 업무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 건물은 1896년 일본영사관으로 신축되어 1905년까지 사용되다가 1906년 2월 이른바 통감정치가 시작되자 경성이사청으로 전용된 것이다. 부청사로 재전용할 당시 이미 많이 낡은 상태였고 무엇보다 공간이 부족했다. 이에 따라 1910년대에 이미 두 차례 증축된다.6)
그림 1. 경성부청사와 부지정문(1924 촬영) ([그림 2]의 회색 칠한 본관의 정면)
출처: 京城府, 1941, 쪽수 없음
<그림 2>는 1916년경 부지 및 건물 상황을 보여주는 『경성부사』의 배치평면도(위쪽이 선은전광장이 난 북북동 방향이고, 이쪽으로 부지정문을 냄)인데, 회색칠한 부분이 당시 본관으로 사용한 <그림 1>의 건물이다. “재원이 없어 응급책으로 뒷마당 협소한 공지” 즉 남동쪽에 여러 부속사를 지어 본관과 복도로 연결해 놓고 있다.7) 그러나 늘어나는 부서와 직원, 왕래하는 민원인 등을 감당하기에 역부족이었고 업무에 큰 불편을 겪고 있었다.8)
그림 2. 「경성부청구내배치도」(1916) (출처 도면의 각도를 조정함)
출처: 京城府, 1941, 315쪽
그런데 경성부는 본관과 부지정문 사이 꽤 넓은 공지에 충분한 규모의 새 청사를 짓고 싶어 했다. 이 위치는 부지 북쪽 선은전광장을 비롯한 도시상황을 다분히 의식한 것이라 보인다. 1911년과 1914년 각각 작성된 지도 <그림 3>와 <그림 4>를 비교하면, 그 사이에 부지정문이 났던 앞길과 그 북쪽 남대문통 사이 구역(<그림 3>의 연두색 칠)이 광장에 편입되어 부지 북쪽에 누운 사다리꼴의 ‘선은전광장’이 생겨났다.
그림 3. 경성부청사지(1911)
출처: 「용산합병경성시자전도」(1911), 서울역사박물관, 2006, 36쪽
그림 4. 경성부청사지(1914)
출처: 「경성부명세신지도」(1914), 장규식, 2004, 47쪽
광장에 편입된 이 구역은 남대문통을 따라 남동쪽에 치우쳐 한말 가가(假家)들이 줄지어 섰던 2겹의 작은 필지들 중 일부이다. 선은전광장의 조성은 1912년 11월 조선총독부가 고시로 발표한 ‘경성시구개수예정계획노선’에 등장하는 ‘노선번호 제5’구간(남대문통: 남대문-조선은행 앞-종로)의 확장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다. 공사는 이 노선번호 제5구간의 남쪽구간인 남대문-조선은행간 도로 확장공사 때9) 함께 진행되었다. 착공은 <그림 3>의 연두색 칠한 구역이 도로로 수용되는 1913년 10월 즈음인 듯하고10) 준공은 1914년을 넘기지 않았다(<그림 4>).
선은전광장이 조성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16년, 경성부는 <그림 2>의 부지 북측 공지에 약 60만원으로 신청사를 짓겠다는 희망으로 「경성부청사신축계획도」를 작성하는데, 그 1층 평면도가 <그림 5>, 배치도가 <그림 6>이다.11) 배치도에서 계획 건물이 선은전광장에 바짝 면해 있는 점이 주목된다. 기왕 조성된 광장에 잘 노출되는 동시에 광장을 면해 이미 들어선 조선은행 본점(1912)이나12) 경성우편국(1915)에13) 버금가는 위용을 갖출 것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림 5. ‘경성부청사신축 계획도’의 1층평면도
그림 5,6 출처: 京城府, 1941, 312쪽
그림 6. ‘경성부청사신축계획 도’의 배치도
그림 5,6 출처: 京城府, 1941, 312쪽
이전에도 경성부는 더 큰 계획안을 만들었으나 조선총독부의 승인을 얻지 못했고, 이 계획안은 계획을 축소한 것인데, 이 안도 승인되지 않았다.14) 1919년경에는 조선총독부 정무총감·내무부장, 경기도장관, 경성부윤이 모여서 “극히 소규모”로 신축할 것을 논의했는데,15) 이때 조선총독부도 너무 좁고 불편해서 조만간 신축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만 신축예산이 배정되지는 않았다.16) 이렇게 확인된 것만 해도 경성부는 1916년 이전, 1916년, 1919년 세 차례나 기왕 조성된 선은전광장에 바로 면하게 된 부지에 신청사 신축을 성사시키기 위해 계획안 규모나 예산을 점점 줄여갔지만, 모두 비용 문제로 실현이 좌초되었다.
2-2. 새 부지에 신축 결정과 신축재원 마련 방안
이렇게 되자 1920년대 들어서 조선총독부의 승인을 독려하는 민간의 움직임이 나타난다. 1921년 8월 경성 반관반민단체인 도시계획연구회가 조직되어17) 이듬해(1922) 5월 경성부청사의 조속한 개축을 결의한 뒤 조선총독에게 그 결의서를 제출했다. 7월에는 마침 새로 부임한 조선총독을 방문하여 1923년 예산에 부청사 신축비를 계상해 줄 것을 간청하고 관계 국장들을 찾아 진정하는 등 적극 나선다.18) 경성부윤과 경기도지사도 신축의 필요성을 총독에게 호소했다. 그러자 총독은 직접 경성부청사를 찾아 돌아보며 신축의 필요성을 실감하고는 경성부가 원하는 만큼의 국비는 지급하기 곤란하다며 내무국·재무국·심의실에 조속히 신축할 수 있는 방안을 조사하도록 명령했다.19)
드디어 1922년 여름 조선총독부가 해법을 내 놓았다. 경성부가 무상으로 사용하던 조선총독부 소유의 기존 부지를 매각한 금액에 경성부 부비(府費)를 보태서 다른 부지에 신청사를 건립한 후 조선총독부에 기부하는 방안이었다. 매각대금을 제외한 40∼50만 원가량을 부비로 감당해야 하는 것이 경성부로서는 “큰 문제”였지만20) 얼마 안 있어 이 안에 동의한다. 곧이어 그해 9월 설계안을 조선총독부 토목과가 작성하기로 결정된다.21)
그러나 신청사를 지을 위치를 곧바로 정하지 못하면서22) 조속한 실행에 차질이 생겼고, 여러 의견들 가운데 “태평통 경성일보사 자리와 그 뒤 빈 터”로 최종 결정되어 발표된 것이 1923년 2월 말,23) 새 부지에 신청사 건축인가된 것이 3월 17일이다. 이때 승인된 예산은 약 131만 원이었는데, 93만 원은 부지매각대금으로 충당하고 부족액은 경성부가 빚을 얻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경성부는 10월 8일 총독부의 기채허가를 얻은 후 안전은행에서 필요금액 중 일부만 빌려 이듬 해 1924년 8월 신축에 착수했다.24)
3. 신축재원 마련을 위한 옛 터의 분할매각
3-1. 옛 터의 분할과 도로 개설 및 확장
조선총독부의 해법은 1910년대 내내 기존부지에 지으려던 경성부의 희망을 철회하는 계기가 된다. 또한 뜻밖의 복병을 만나 이후 경성부 재정을 악화시키는요인도 된다. 부지매각이 순조롭지 않았던 것이다. 처음에 경성부는 부지 전체를 일괄로 팔 생각이었다.25) 구입자는 “시가미(市街美)를 상하지 않는 3층이나 4층의 훌륭한 건물”26) 혹은 “웅장 미려한” 건물을 지어야 한다는 부대조건까지 내걸었다.27) 그러나 부지와 금액이 커서 구매자가 나서지 않았다. 경성부는 빚만 없다면 매각하기 않고 부민유원지로 활용할 의향도 있어서 조선총독부의 의향을 타진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8) 이렇게 되자 경성부는 땅을 팔지 못한 채로 식산은행에서 다시 20만 원 빚을 얻게 되고29) 부지를 매각하지 못한 채 1926년 신청사가 완공되자 그리로 옮겨간다.
경성부는 하루빨리 터를 매각해서 원금과 이자를 지불해야 했다. 그러나 매각이 성사되지 못한 채 시간만 흐르면서 이자가 상당히 불어난다. 이에 일괄매각이 어렵다고 본 경성부는 1926년 봄 “가운데 종횡으로” 도로를 신설하여 부지를 분할한 후 매각하기로 결정한다.30) 분할은 1926년 11월 이후에 된 듯하고, <그림7>은 1929년 2월 14일 조선총독부 내무국장이 경성부윤에게 보낸 「경성부청사신영에 관하여 관민유 토지 건물 교환에 관한 건(京城府廳舍新營ニ關シ官民有土地建物交換ニ關スル件)」(CJA0003995)에 첨부된 도면이다. 부지가 4개 필지로 분할되어 있다. 가운데 크게 52-1대(垈), 오른편에 길쭉하게 52-4대가 있고, 아래에 작게 52-2대 및 52-3대가 나눠져 있다. 각 필지 사이에 도로는 아직 나지 않았다.
<그림 8>은 1940년 작성된 지적도인데, 52-1번지가 더 작게 분필되고 가운데로 대에서 도로로 지목 변경된 십자로(하늘색)가 나 있다. <그림 7>에서 52-1과 52-4의 분필선을 우측 소로(욱정 2정목 구역, 당시 도로명 미확인, 현재 소공로, 이후 소공로로 지칭)에 평행하게 내어서 52-4대(하늘색)가 길쭉한 모양인데, 1929년 2월 26일 조선총독부에 귀속되어 ‘국유지(國有地)’가 된 후 도로로 지목 변경되고 곧바로 소공로에 편입된다. 그 결과 <그림 8>에서 보듯 선은전광장에서 남산 쪽으로 뻗는 상당히 넓은 대로(하늘색+회색)가 생겨났다.
그림 7. 본정 1정목 52-1번지 분할도 (1926.11-1929.2) (지번·색: 필자기입, 선은전광장 쪽 지적선은 출처에 없음)
출처: CJA0003995(1932)
그림 8. 본정 1정목 52-1번 지의 재분할(1932.8이후) (지번·색: 필지기입, 붉은색-岱, 푸른색道路:, 연두색-선은전광장에편입된필지)
출처: 서울시중구폐쇄지적도(1940.4.1
<그림 8>의 부지 중앙 십자로 개설을 보면, 52-5와 52-6 사이 남북도로와 그 아래 동서방향 도로가 ┷자를 이루며 먼저 1929년을 넘기지 않고 개설된다. 그 아래 남북방향 도로가 추가 개설에 따른 십자로 완성은 52-10에서 52-20으로 재분할과 동시에 진행되며 1932년 8월이다(3-2절 (3) 참조). 이는 경성부가 필지 구획과 도로개설을 일괄 계획한 것이 아니라 상황을 보며 점차 진행했고 가능하면 대규모 필지로 매각하려 했음을 말해준다.
경성부는 분할한 52-5와 52-6은 직접 매각하고 나머지는 경쟁 입찰에 부쳐 매각하려 했다. 그러나 필지를 분할하고 도로를 개설한 뒤에도 터는 쉽사리 팔리지 않았다.31) 설상가상으로 1927년 경제공황이 닥친다. 경성부가 청사를 이전하면서 식산은행에 빌린 20만원 부채를 갚을 기한은 1927년 6월 30일까지였다. 부지매각이 실패하자, 늘어가는 이자는 고스란히 경성부민의 부담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우려하는 소리가 높아졌다.32)
3-2. 옛 터의 분할 매각
(1) 1929년 1차 매각
1929년 3월 9일 <그림 8>의 52-5번지 728.3평이 평당 평균 411원, 총 30만 원에 삼월 오복점(三越 吳服店, 이후 ‘삼월’로 약칭)에 매각되고, 같은 달 14일 토지 소유권이 이전된다.33) 부지가 재분할된 후에야 선은전광장과 소공로에 동시에 면하고 본정통을 마주해서 상업적 가치가 가장 높은 필지부터 팔린 것이다.34)
(2) 1931년 2차 매각
1차 매각을 위한 협상이 무르익어가는 와중에 바로 인접하여 남대문통에 면하는 <그림 8>의 52-6번지와 그 서측 53-1번지의 매각논의도 활기를 띈다. 52-6 동측과 52-6 및 53-1 남측에 각각 도로가 개설되면서 이 땅도 주목받게 된 것이다. 세 곳에서 매수에 관심을 보이지만, 모두 성사에 이르지 못한다.35)
1차 매각 이후 더 이상의 매각은 진행되지 않은 채 부채 93만 원 중 삼월에서 받은 매각대금 30만 원을 제외한 63만 원은 여전히 갚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해 1930년 9월경에는 이자만 35만 원에 이르는 지경이 되었다.36) 게다가 1931년 불경기가 닥치자 땅값은 높아봐야 300원대로 내려앉는다.37) 땅을 팔아도 손해가 나는 지경이었고 경성부는 진퇴양난에 빠지게 된다.38)
그러던 차에 1931년 2월 중순 2차 매각이 성사된다. 52-6번지와 경성학교조합 소유 53-1번지를 합한 656평이 조선저축은행에 팔리고 같은 달 20일 토지소유권이 이전된다.39)
(3) 1932년 3차 매각
1차, 2차 매각 후에도 1,569평이 처분되지 못하고 남았다.40) 그중 52-10번지(<그림 8>의 52-10과 52-20에 해당, 당시 분할되지 않았음)는 2차 매각 즈음 극장터로 관심을 받아 1930년 2월 경성권번 및 경성유지들과 매각논의가 있었고,41) 1931년 6월에는 경성권번이 남은 터의 60% 정도인 900평을 매수하기로 내약(內約)하지만 계약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토지마 유우지로우(戶島祐次郞)를 비롯해 경성권번과 경쟁하던 측도 극장계획을 전제로 경성부에 매수를 타진했다. 그러자 경성부는 양측이 합동으로 대극장을 계획하도록 유도하면서 남은 부지 전체를 매각하려고 시도했으나 불발되었다.42)
결국 1932년 여름 52-10번지의 서측 일부 550평만 체신국에 매각된다.43) 경성부는 8월 23일 이 구역을 52-20번지로 재분할한 후(<그림 8> 참조) 체신국에 매각했고 이 땅은 1932년 9월 1일 국유지가 된다.44)
(4) 1933년 4차 매각
이렇게 되자 재분할된 52-10번지가 남았고, 드디어 1933년 1월 이곳에 극장을 세울 계획을 내세운 주식회사 경성덕력(京城德力) 지배인 니와 고우자부로우(丹羽恒三郞)45)와 거래가 성립된다.46)
나머지 서남쪽 소필지들(52-3, 11~19)이 과연 경성부의 애초 계획인 경쟁입찰 방식으로 매각되었는지를 알려줄 자료는 찾지 못했다.
<그림 9>는 이상에서 정리한 1913년부터 1940년 1월까지 이 터와 선은전광장을 비롯한 주변 도시조직의 변화과정을 네 시기에 걸쳐 보여준다. ①은 시구개정사업을 통해 남대문통 남쪽구역은 확장되었으나 선은전광장 조성을 위한 토지수용이 아직 완료되지 않은 시점인 1913년의 도시조직이다. ②는 선은전광장이 조성된 1914년부터 1929년 2월까지 도시조직을 보여준다. 이 시기에 1926년 10월 경성부청은 이전해갔고, 경성부청 옛 터가 된 본정 52번지는 52-1·2·3으로 필지분할되고, 부지 남쪽 소로를 직선화하면서 분할된 52-2는 이 소로에 편입되고, 52-3은 도로 아래 작은 삼각지로 남게 된다. ③은 1929년 2월 상황으로, 1929년 3월 삼월에 매각하기 위해 52-4로 분할되기 직전이며 3.1에서 다룬 대로 52-4는 도로로 지목변경된 후 곧 소공로에 편입된다. ④는 52-10과 52-20이 분할되고 동시에 그 서측 도로까지 나서 옛 터의 필지분할 및 도로개설이 완료된 1932년 8월부터 1940년 1월 사이 도시조직이다.
그림 9. 경성 본정52-1번지(1926년 이후 경성부청 옛 터)의 변화(1913-1940) 출처: ① 1913 지적원도, ② 조선도시지형도간행회 편. 「경성부일필매지형명세도」, 조선도시지형도간행회, 1929, ③,④ 그림7 및 그림8 참조
약 30년간의 이 변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선은전광장의 조성과 함께 광장으로 흘러드는 부지 주변 도로의 확장 및 개설이다. 먼저 남대문통이 확장되고(①) 이어서 경성부청 옛 터 동측의 소공로가 확장되었으며(③,④) 터 서측의 남북 소로도 확장된다(④). 그 뿐 아니라 터 중앙에 도로가 신설되어(④) 광장으로 이르는 교통이 훨씬 좋아졌다. 그만큼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해지고 상업지로서 옛 터의 가치는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 변화로 인해 가장 혜택을 본 것은 경성우편국 옆 좁은 골목에 불과했던 본정통의 상인들이었다. 본전통이 광장과 직접 면하게 되어 도로와 광장의 동선을 쉽게 흡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곧이어 본정통의 발전이 뒤따라서 지가가 급등하고 고밀화가 심화되었다.47) 이제 선은전광장과 주변은 “전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변”했고 “밤낮 사람이 넘쳐나”는 곳이 되었으며,48) “경성의 센터 홀”이라고까지 불리게 된다.49)
4. 새 건물의 출현과 경성상업계의 대응
4-1. 새 건물의 출현
(1) 삼월 오복점 경성지점
삼월이 매입한 필지에는 1930년 10월 삼월 경성지점이 준공되었다.50) 당시 이곳은 선은전광장을 면하는 동시에 본정 입구를 점하고 있어 백화점이 들어서기에 최적인 상업요지로 평가되었다.51)
건물도 부지 이점을 최대한 살리며 들어선다. <그림 10>의 1층 평면도를 보면, 건물이 부지 외곽을 따라 최대한 가로에 많이 면하도록 한 다음, 주출입구를 선은전광장을 향해 부지 모서리에, 부출입구를 남대문통에 면해, 출구를 본정통에 면해 내었다.52) 세 출입구 사이에는 쇼 윈도우를 설치해서 주변을 오고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도록 했다(<그림 11>). 왕래가 많은 상업가로와 광장에 면하는 모서리 부지라는 입지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면서 부지가 면한 남대문통과 소공로의 동선을 모두 흡수하려는 의도를 잘 보여준다.
그림 10. 1층 평면도 삼월 경성지점(그림 10의 ▲는 주출입구, △는 부출입구 및 출구 표시, 이하 평면도에서 같음)
그림 10 출처: 『朝鮮と建築』, 9권, 11호, 1930.11, 13쪽
그림 11. 전경
그림 11 출처: 경성부, 1941, 쪽수 없음
(2) 조선저축은행 본점(경성지점)
본점(경성지점)을 세우기 위해 부지를 매입한 조선저축은행은 처음에는 은행 건물 설계로 유명한 나카무라 마코토(中村誠)에게 설계를 맡겼으나53) 1932년 6월 경 ‘대중의 은행’이라는 저축은행의 이미지를 살려 현상모집을 해서 설계안을 얻는 것으로 계획을 바꾼다. 여기에서 1등에 당선된 안의 1층 평면도가 <그림 12>이고 이에 기초하여 조선저축은행 기술부가 만든 최종안의 1층 평면도가 <그림 13>이다. 당선안에 없던 배면 공간(<그림 13>의 회색 선 처리 부분)은 은행과 등지고 동시에 기공된 저축은행빌딩이다.
그림 12. 1등 당선안 1층 평면도
그림12 출처: 『朝鮮と建築』, 11권, 8호, 1932.8, 쪽수 없음
그림 13. 최종 신축 계획안 1층 평면도
그림13,14 출처: 『朝鮮と建築』, 15권,1호, 1936.1, 쪽수 없음
은행은 1935년 6월경 준공되는데, <그림 14>에서 보듯 정면성을 강조하면서도, 당선안과 최종안 평면모두 주출입구를 남대문통에 내고 우측 모서리를 필지 외곽선을 따라 둔각으로 처리해 길에 적극 대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54)
그림 14. 전경
그림13,14 출처: 『朝鮮と建築』, 15권,1호, 1936.1, 쪽수 없음
(3) 경성중앙전화국
경성중앙전화국은 경성우편국 내의 전화과로 있다가 1923년 7월 1일 국(局)으로 분리 독립 후 조선총독부 직속기관인 체신부에 소속된 기구이다.55) 1933년 경성 전화가입자 수의 증가로 자동전화교환기를 추가 구입하자 1924년 6월 증축해 있던 공간마저 부족해졌고, 아예 부지를 옮겨 청사를 신축하기 위해 1932년 9월 삼월 뒤 550평 부지를 매입했다.56) 그러나 부지매입 후 경성의 신규전화가입자가 더 늘면서 계획안을 수정하느라 설계안 확정이 늦어졌다. 신축은 2년이나 지난 뒤인 1934년 9월 시작되었고 1935년 6월 준공된다.57)
<그림 16>의 정면 외관을 보면, 모서리를 둥글리고 2·3층은 가로로 긴 창을 내고 1층은 필로티로 처리해 모더니즘 양식을 구사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둥근 모서리에 주출입구를 내어 선은전광장 쪽을 향하면서 필지 모서리를 차지하도록 한 점이다.58) 분할 필지들 중에서 선은전광장에서 바로 볼 수 없는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광장에서 부지를 관통해 남쪽으로 난 도로로 조금만 접어들면 인지할 수 있도록 부지 모서리에서 광장을 향해 둥근 정면을 설정하는 방식으로 존재감을 부각시킨 것이다.
그림 15. 1층 평면도 그림 16. 정면 경성중앙전화국
출처: 『朝鮮と建築』, 14집, 8호, 1935.8, 쪽수없음
그림 16. 정면
출처: 『朝鮮と建築』, 14집, 8호, 1935.8, 쪽수없음
(4) 지어지지 않은 경성대극장
옛 터에서 마지막으로 매각된 구획에 들어설 예정이던 경성대극장은 지어지지 않았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두 가지가 추측된다. 삼월과 새로 지을 대극장을 연결하는 지하도로를 만들어 광장 쪽 동선을 끌어들이려는 계획을 세운 것으로 보아,59) 부지가 선은전광장에서 떨어져 있고 삼월에 가려져 상업적 매력이 부족하다는 판단이 작용한 듯하다. 이에 더해 1933년 봄 불황으로 주식회사 덕력이 “현저한” 타격을 받으면서 극장을 건설할 만한 자금 여유도 없어졌다.60) 1934년 4월 잡지에 25만원 공사비로 3층, 1,800석 규모의 조선 제일의 극장을 짓기로 결정되었다는 꽤 구체적인 기사가 실리기도 하지만,61) 극장 공사는 없었다.
<그림 17>는 1933년, <그림 18>은 1936년 제작된 지도인데, 각 시기에 옛 터가 분할되고 도로가 난 모습과 신축된 건물들이 간략히 표시되어 있다. 모든 건물이 분할된 필지의 외곽선에 면하게 배치되어 선은전광장이나 개설·확장된 도로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17. 분할매각된 옛 터에 들어선 삼월
출처: 「경성시가도」(1933), 서울역사박물관, 2006, 51쪽
<그림 1>의 기존건물을 재전용했던 경성부청사는 아예 부지 안쪽에 깊숙이 물러나 앉혔고, <그림 6>의 신축계획안 경성부청사는 광장에 바짝 면하기는 했지만 도시조직에 적극 대응하기보다는 건물 자체의 정면 성과 좌우대칭성을 통해 행정관청사로서 권위를 확보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분할된 필지에 새로 들어선 건물들은 모두 광장과 도로의 교통동선을 최대한 끌어들일 수 있도록 계획되었다. 상업시설, 금융시설, 관청사라는 용도에 상관없이 배치부터 외관, 평면과 출입문 구성까지 이 터의 상업적 가치를 의식하고 최대한 활용하는 데 건축계획의 초점이 맞추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 18. 분할매각된 옛 터에 들어선 삼월·조선저축은행·경 성중앙전화국
출처: 「대경성정도」(1936), 서울역사박물관, 2006, 58-59쪽
4-2. 경성 상업계의 대응
(1) 자구책 마련
1930년대 전반기 옛 터의 분할매각과 새로 들어설 건물 소식이 전해지고 터의 성격이 행정에서 상업으로 변모될 기색이 완연해지자, 기존 상권을 유지하려는 측에서 저항이 나온다. 삼월 오복점이 경성부와 매각 협상에 나서면서 그 자리에 ‘대(大) 데파트먼트스토아’, 즉 대형 백화점 건설계획을 발표하자, 경성의 일본인 상업세력은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대형 백화점이 들어서 기존상권에 줄 타격을 염려한 것이다.
당시 백화점을 개업하고 있던 삼중정(三中井) 오복점, 평전(平田) 상점, 정자옥(丁字屋) 상점 등이 삼월에 대항하기 위해 잇달아 대규모 확장에 나섰다.62) 또한 3-2의 (2)에서 살펴보았듯이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일본인 대상(大商)들이 조직한 도매상연합은 돈을 모아 삼월에 대항할 만한 화려한 건물의 연합백화점을 지을 계획을 세우고 옛 터의 남은 구획을 매입하기 위해 경성부와 교섭에 나섰다.63)
이 터에 삼월에 더해 연합백화점마저 생길 수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번에는 본정 1정목 소재 소상인들이 긴장했다. “이와 같이 광대한 백화점이 둘씩이나 본정 입구에 서게 되면 모든 고객이 전부 그 두 백화점에 흡수되어 본정 상인에게 큰 타격이 미치리라” 예측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반대운동을 조직하고 경성부에 진정서를 제출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64)
본정 1정목에서 땅을 소유하며 오랫동안 상점을 운영해온 여섯 점주들은 나름대로 삼월에 대항하기 위해 필지를 합한 후 공동출자해서 지하1층, 지하3층 규모의 “광대한 일용품 시장”인 연합빌딩을 짓기로 했다. “근대의 경향인 백화점에 압박받고 있는 일반소매점의 고육지책”이었다.65) 그러나 마침 불경기를 맞아 자금 압박에 신축은 성사되지 못한 듯하다. 본정 1정목에서 땅이나 건물을 빌려서 상점을 낸 임대 점포들도 나름대로 점포 개축 등 대책마련에 부심했다.66)
백화점부터 소형 임대점포들까지 이 일대 상권의 변화는 종로 일대의 “조선인 상점 측”에도 위기감을 조성했다. 그러나 “종로 화신상회가 백화점 설비를 하였을 뿐이고, 기타 상점은 아무런 방침 없이 대세에 희생됨을 탄식”했다.67) 이렇듯 삼월이 경성 상업계에 미친 영향은 꽤 컸고 그 처해진 입장에 따라 대응도 각양각색이었다.
(2) 옛 터 건축에 대한 간섭
조선저축은행이 들어서는 과정에서 상업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는 성격이 강했던 경성도시계획위원회나68) 부협의원회는 새로 들어설 건물의 용도와 외관 디자인에 대해 간섭한다. 조선저축은행에 부지 일부가 매각되기 바로 한 달 전인 1931년 1월 경성부청사에서 열린 경성도시계획위원회 협의원간담회에서 “그 부지를 팔되 지금 같은 불경기 때 헐값에 팔 필요가 없고 또 경성의 장래 번영을 위하여 은행과 같은 비교적 한산한 회사에 팔지 말고 데파트와 같은 것을 건축하도록 그 방면에 매각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나온다.69) 그보다 몇 달 앞서 아직 매각협상이 진행되던 와중에는 들어설 건물 1층의 용도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한다. 즉, 1930년 11월 경성부청사에서 열린 간사회에서 “저축은행은 그 본질상 대중적이지만, 필요 없는 사무실은 되도록 상층에 설치하고 하층은 주로 중소상업자를 위해 데파트식으로 이용하는 방법을 희망”한다는 의견을 내 놓은 것이다.70)
매매계약이 체결된 후 경성부윤이 협약에 앞서 부협의회에 매각자문을 구했을 때는 마츠모토 세이지로우(松本淸次郞)가 “본정 일대, 특히 경성 상공가의 요지에 은행처럼 둔중한 감을 주는 건물은 조선은행 앞의 외관을 매우 어둡게 하고 본정의 번영에도 큰 영향을 준다”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그러자 경성상공조합연합회도 이 의견에 찬성을 표하며 각 정총대(町總代)의 동조를 얻은 후 경성부윤을 방문하여 새로 들어설 건물은 “적어도 4-5층으로 하되 1층은 첸스토어로 이용되도록 설계하기를” 요구했다.
부채 이자가 계속 불어나면서 섣부른 부청사 신축결정이 부민에게 손실을 끼쳤다는 여론이 비등하고 매각도 거의 성립된 상황에서 경성부가 이런 무리한 간섭을 수용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저축은행과 교섭할때 반영하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할 수밖에 없었다.71) 물론 저축은행은 이런 간섭들을 수용하지 않은 채 1등 당선안대로 외관을 하고 1층에도 은행 영업장을 두었다. 그러나 저축은행 측도 “삼월, 선은, 우편국 등 대건물에 비해 적어도 손색없이 차분하고 우아하며 침착한 근대식 건물”을 계획 중이라면서 광장 주변의 상업지로서 성격을 해치지 않도록 신경 쓴 것은 분명하다.72)
경성중앙전화국의 건축에도 도시계획연구회의 간섭이 있었다. 신축공사가 시작되기 전에 번화가로 성장할 절호의 기회를 맞은 땅에 큰 규모의 관청사가 들어서는 것을 반대한다면서 “인접지에 극장이 생길 예정이니 가능하면 양보해서 극장 쪽에” 땅을 팔라며 체신국을 압박하는 움직임을 보인다.73)
이 의견이 나온 시기가 경성부와 체신국의 토지매매 계약이 끝나 신축은 이미 확정되었고 단지 설계가 늦어져 착공이 미루어진 와중이라 무리한 주장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경성중앙전화국 본청사와 신청사 사이 지하에 자동식 전화교환용 케이블 매설용 터널을 설치한 것으로 보아, 체신국으로서는 공사비를 절약하기 위해 경성중앙전화국과 최대한 가까운 땅을 확보해야 했고, 이미 매입한 땅을 양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끝으로, 극장을 신축하기로 경성부와 구두약속하고 51-10번지를 매매한 니와 코우자로우(丹羽恒三郞)는 극장신축을 포기하고 땅을 매각하려 했으나, “각 방면의 반대”에 부딪혀 매매교섭을 차단당했다74) 이 때문에 51-10번지는 오랫동안 빈 땅으로 남았다. 반대란 약속을 지키던지 극장을 신축할 자에게 양도하라는 것이었다. ‘각 방면’은 경성부와 경성상업계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배경에는 근대적 극장을 통해 “문화도시”로서 부의 위상을 높이고 싶은 경성부의 속내와 더불어 극장이 들어서게 해서 일대의 상업적 가치를 높이려는 주변 상업계의 의도가 있었다.
요약하면, 경성부는 청사신축에 따른 부의 부채부담을 경감시켜야 할 골치 아픈 과제를 땅의 상업적 가치를 제대로 활용할 구매자를 선택하고 그 구매자에게 그런 계획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풀려고 했다. 그런데 경성상업계와 그 이익을 대변한 경성도시계획위원회는 기왕 상업지로 터의 성격이 변할 수밖에 없다면 새로 들어서는 건물이 구매력을 자극할 수 있고 기존 상권까지 활성화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압력을 행사했다.
5. 결론
1926년 경성부청 이전을 계기로 옛 터의 처리과정과 도시조직 및 건축의 변화를 시간 순으로 살펴보고 변화를 추동한 배후의 힘으로서 경성 소재 일본인 식민세력들의 다각적인 움직임을 고찰하였다. 연구결과를 두 면에서 정리하겠다.
첫째, 본정 52번지 경성부청사 터의 성격은 1926년 부청 이전을 계기로 경성 행정의 중심에서 상업의 중심지로 변모하는데, 이 변화는 두 단계로 구분된다. 1단계는 남대문통 남측구간의 확장과 선은전광장 조성이 완료되는 1914년부터 경성부청 신청사가 완공되어 옮겨가는 1926년 9월까지이다. 2단계는 1929년 9월부터 옛 터가 된 부지 동측 소공로가 대폭 확장되고 터 안으로 도로가 개설되며 터가 분할되어 차례로 매각된 후 주요 필지에 건물이 들어서는 1935년 중반까지다.
1단계까지만 해도 경성 행정의 중심이라는 터 자체의 기능과 성격에 변화는 없었고 경성부나 조선총독부도 바꾸려는 계획을 가지지 않았다. 이는 어디까지나 경성부청이 이전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진행되었다. 오히려 경성부는 조성된 선은전광장을 염두에 두고 광장에 곧바로 면하는 신청사를 이 터에 지어서 행정 중심지로서 터의 성격을 강화시킬 요량이었다. 이대로 실현되었다면 2단계 변화는 전혀 다른 쪽으로 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를 실현할 만한 재원부족이 큰 걸림돌이 되었다. 사실 조선총독부의 건축재원 부족 문제는 식민지 기간 내내 지방행정관청사를 건축하거나 수리하는 데 걸림돌이었다. 경성의 새 부청사 건축에서도 바로 이 문제를 풀기 위한 궁여지책이 옛 터를 비롯해 주변을 상업중심지로 변모시키는 2단계로 가는 변곡점이 되었다. 따라서 상업지로서 잠재력이 현실화된 것은 부청이 옮겨간 1926년 이후이다.
그런 의미에서 1926년은 경성 주요 도시공간의 기능 변화에서 중요한 시점이다. 경성부청이 있을 당시 배후 남산의 조선총독부와 함께 경성 정치와 행정의 중심을 이루다가, 경성부청이 이전되었을 뿐 아니라 경복궁 앞마당에 조선총독부가 준공되자 태평통이 경성의 새로운 정치·행정의 중심지로 떠오른 것과 맞물리기 때문이다. 1926년을 경계로 경성에는 정치행정과 상업금융이라는 서로 다른 기능을 담당하는 도시공간이 확연히 분화된다.
2단계 변화의 구체적 모습은 광장과 건물을 통해 읽을 수 있다. 1930년 삼월의 등장이 중요한데, 주변의 건물들의 정비되고 새로운 상업·금융·소비시설이 연달아 들어서는 데 촉매가 되었기 때문이다. 옛 터에 새로 지어진 건물들의 배치·평면·입면은 광장을 중심으로 해서 사방 확장되고 신설된 도로의 교통동선을 흡수하도록 계획된다. 이는 선은전광장 반대편에 자리한 조선은행·경성우편국·상업은행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광장에 적극 대응하는 계획기법을 취한 건물들이 밀도 높게 광장을 둘러싸면서 옛 터와 주변은 상업중심으로 변모가 확연해진다. 특히 선은전광장은 전차·자동차·보행교통이 복잡하게 교차하는 경성의 번화한 상업·금융·소비의 중심지로 부상한다.
요약하면, 1단계시기에 시구개정사업으로 남대문통이 확장되고 선은전광장이 조성되면서 경성부청 옛 터의 상업지로서 잠재력은 훨씬 커졌다면, 1926년을 경계로 한 2단계에서 광장과 화장된 남대문통·소공로를 비롯해 터 내에 새로 뚫린 길에 대해 건축계획적으로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잠재력이 가시화되었다. 이 일대를 1910년대 후반 남산에서 촬영한 <그림 19>와 1951년 9월 촬영한 <그림 20>을 비교해도 이 변화를 실감할 수 있다.
그림 19. 옛 경성부청사 터에 들어선 건물들
(1951.9.8., LIFE지, 남에서 북으로 내려다 봄)
출처: 김지훈, 2011, 38쪽
그림 20. 경성부청사(채색한 세 건물 중 右)
(1910년대 후반, 左: 경성일본인거류민단사무소, 中: 본정경찰서)
출처: 전성길, 2011, 49쪽
둘째, 1926년 경성부청이 이전된 후 옛 터와 선은전광장 일대는 ‘상업과 소비의 도시’ 경성을 상징하는 중요한 도시공간으로 재구성된다. 그런데 이 변화를 식민지 경영을 위한 전략적 도시계획이 일관성 있게 실행된 결과로 보기 어렵다. 또한 변화를 이끈 주체를 주도적인 하나의 식민권력으로 수렴할 수도 없다. 물론 시구개정사업을 벌이고 새 부청사 신축비용 마련을 위해 땅의 상업적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 도로를 개설하고 토지를 분할매각한 조선총독부나 경성부라는 해정권력이 변화를 주도했다. 그러나 이는 이 둘의 입장이 일치하거나 경성부가 조선총독부의 뜻에 일방적으로 따른 것은 아니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터의 변화에는 경성 상업계라는 상업세력의 대응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런데 상업계라 해도 대자본, 중소자본, 소자본의 입장이 같지 않았고 각자 입장에 따른 자구책과 대응이 달랐다. 그런가 하면 때로는 행정권력, 때로는 상업세력의 이익을 대변한 도시계획 전문가 집단도 변화에 관여했다.
즉, 경성부청 옛 터의 변화를 추동한 힘은 계획적이거나 추진력을 갖춘 식민지 도시경영의 의도를 가진 식민권력 주도하여 이 아니라, 행정·상업·도시계획전문가 집단으로 대표되는 경성의 상층부 식민권력들이 각자의 이해관계와 필요에 따라 대립하거나 협조하는 복합적인 상호작용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연구를 통해 겉으로 드러나는 도시공간과 건축의 변화 이면에는 조선총독부 대 경성부의 입장차이, 행정권력 대 상업세력의 갈등, 일본 대자본가 대 소자본연합의 긴장, 전문가집단의 압력세력으로서 도시정책에 개입, 일본인 상권의 적극적 대응과 대조적으로 조선인 상권은 소외 등이 꽤 복잡하게 얽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연구는 1930년대 중반까지 연구시기를 한정했기에 선은전광장 내 로터리의 조성과 전차선로의 이동, 지하도로의 설치, 옛터 남쪽에서 동서방향으로 가로지르는 남부간선도로의 개설, 삼월의 증축 등 1930년대 중반 이후 옛 터의 성격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을 살펴보지 못함으로써 식민지기 이 도시공간의 변화를 총괄적으로 정리하지 못한 한계를 지닌다. 이는 향후 과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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