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선소(船所)는 단순한 군선의 접안과 수리를 하는 좁은 의미의 연안(沿岸) 항만시설뿐만 아니라 군무와 관련한 공무를 보는 공해, 군선에 필요한 물자를 보관하는 창고 등의 육상시설들과 아울러 선소 입구의 방어 시설 등을 총칭하는 용어이다. 선소의 용례는『태종실록1)』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문헌에 보이는 선소에 관한 기록은 대부분 수군(水軍)의 선소에 대한 것이다. 경상도의 향토사 자료에는 선소 외에도 전선소(戰船所)·대변정(待變亭)·선진(船鎭)·선창(船艙)·주사(舟師)등으로 일컫고 있다.
선소는 선박을 교통 및 군사용으로 운용하던 고대에 발생하여 선박 및 해상 교통의 발달과 함께 발전해온 것으로 보인다. 조선 초 남동해의 연해(沿海) 군현에는 내지(內地) 군현보다 먼저 읍성을 쌓도록 하여 왜(倭)의 침략에 대비했다. 특히 삼포왜란(1510년) 이후 병사수군겸치제를 제승방략에 따른 분군법으로 변경하고 이에 따라 연해 군현에 군선을 배속시키면서 선소의 설치가 본격화되었다. 그래서 수군의 영진성에서는 반드시 선소를 갖추고 있었고 이후에 수군의 물자를 보호하기 위한 진성이 선소 인근에 축조되었다.
그림 1. 『남해지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시대 연해지역 군현의 선소는 연안 관방 및 해상 교통의 중요한 시설이었음에도 그간 이에 관한 건축사적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최근 소수의 고고학, 역사학 분야 연구자들이 영진성(營鎭城)의 선소의 연혁과 운영에 대한 개략적인 연구가 수행되었을 뿐 선소의 입지와 지역적 특성 및 주요 시설과 공간구조 등에 대한 연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연구의 목적은 그간 제대로 연구되지 않은 조선시대 연해 군현과 수군영진에 속한 선소를 대상으로 선소의 기능과 입지, 시설 종류, 공간구조에 대해 살펴보는데 있다. 연구 대상은 기록이 비교적 풍부하고 유구가 남아있어 실증적인 연구가 가능한 조선시대 경상도 남동부지역의 연해 군현과 수군 영진에 속한 선소(船所)이다. 공간적 범위를 경상도 동남부지역으로 한정한 것은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워 일찍부터 연안관방시설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연구방법은 문헌연구와 고지도와 항공사진 등을 이용한 실증적인 연구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먼저『조선왕조실록』·『경국대전』·『신증동국여지승람』·『영남진지』·『읍지류』등의 문헌을 통해 선소의 연혁과 기능 등을 고찰한 후 고지도와 지적원도·항공사진·일제강점기 지형도 등을 사용하여 선소의 위치를 비정하고 입지특성과 각종 시설 및 공간구조 등에 대해 살펴보았다.
2. 선소의 용어 및 실례
2-1. 용어와 용례
선소(船所)는 삼국사기와 중국의 삼국지, 자치통감에도 보이나2) 군현 또는 수군영진에 속한 선소는 조선시대 문헌과 고지도 등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김재근은 “선소는 배가 정박하는 선창은 물론이고 그에 인접한 누정이나 창고 등 모든 부두 시설을 갖추고 있는 일정한 전 지역이고, 선창(船搶)은 선소 안의 일정한 장소로서 배가 정박하는 수역과 그 축대이다.3)”라고 정의한바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조선시대 수군의 선소는 배가 정박하는 수역과 그 인근의 육상 부대시설을 합한 넓은 구역을 의미한다. 즉, 김재근은 조선시대 수군기지로서의 선소를 배가 정박하는 수역과 그 인근의 육상 부대시설을 합한 넓은 구역을 선소로 보았다. 류창규도 선소를 “수군의 정박, 보급기지, 조선소로서 역할을 넘어 다양한 기능을 가진 공간”이라고 했다.4) 위 견해를 종합해볼 때 선소는 다양한 기능을 가진 대규모 항만시설 내지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조선왕조실록』 『홍재전서』 『세종실록지리지』 『일성록』 등의 문헌과 고지도(古地圖)에 보이는 ‘선소(船所)’의 용례는 대략 360여건 정도이다. 이를 용례별로 살펴보면 다양한 항만 공간 선소 집결처(점호)의 의미로 쓰인 것이 313건으로 가장 많았고, 선착장 부두 포구 정박처 배가 있는 곳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 3건, 부교․배다리의 의미로 사용된 것이 3건, 창고 軍器船所의 의미로 사용된 것이 1건, 조선소 선박 수리의 의미를 가진 것이 1건 이었다.5)
이 연구에서는 ‘선소(船所)’를 군선의 정비·수리·건조하는 굴강(掘江)을 비롯 수군의 공무와 수군의 육상조련(陸操)에 필요한 공해(公廨)와 누정 및 군선에 필요한 무기와 물자의 보관 창고, 항만 출입시설 등 군선의 운용과 정비, 방어에 필요한 시설을 갖추고 있는 항만 내외의 공간으로 정의하고 연구를 진행했다.
2-2. 연해 군현과 수군 영진의 선소
조선시대 경상도 남부지역의 연해 군현인 울산 기장 김해 웅천 창원 칠원 진해 거제 고성 사천 곤양 하동현에는 선소6)가 설치되어 있었다. 경상도 남부지역 연해 군현에 선소를 둔 시기는 확실치 않다. 삼포왜란(1510) 직후 병사수군겸치제를 제승방략에 따른 분군법(分軍法)으로 변경하고 이에 따라 삼남의 해안 군현에 군선(軍船)을 배치하면서 선소를 설치했던 것으로 보인다.7)
그림 2. 조련에 참가한 기장현 수군 (『海陳圖』,부산시 박물관)
<표 1>은 이들 군현에 속한 선소의 소재지와 읍성과의 거리, 입지를 정리한 것이다. 선소의 입지는 읍성에서 가까운 하구(河口)나 연안에 위치했는데, 울산·기장·김해·하동의 경우 바다와 접한 하구에 위치한 것이 특징이다. 연해읍성과 선소의 이격거리는 웅천읍성의 경우 불과 1.2km이내지만 곤양읍성의 선소는 15.4km 이격되어 있다. 곤양현의 선소가 다소 멀리 이격된 것은 남해현의 병합과 군사적 요충지인 노량을 통제하려는 목적 때문으로 보인다. 이처럼 연해 군현의 선소는 읍성에서 대개 2~6km 떨어진 하구나 연안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선소의 수군이 지방수령의 명을 받아 작전을 펼쳐야 하므로 짧은 시간에 수령의 명을 하달할 수 있는 장소이면서 방어에도 유리한 하구와 연안을 선정하여 선소를 건설하는 것이 여러 면에서 유리했기 때문이다.
표 1. 경상도 남부지역 연해 군현의 선소(船所)
선소는 연해 군현 외에도 수군이 운영하는 통영의 삼도수군통제영(이하 통제영)·동래의 경상좌수영·각 수군진에서도 설치되어 있었다. <표 2>는 이들 통제영과 수군 영진에 속한 선소의 소재지와 진성과의 거리, 입지 등을 정리한 것이다. 통제영의 선소는 1603년(선조 36)에 두룡포(현 통영 문화동)로 이전하면서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경상좌수영성은 부산포에 설치되었다가 1459년(성종 14)에 개운포진으로 옮겼는데, 당시 선소는 지금의 개운포진성 앞 동해와 만나는 외항강 하구의 선수마을에 위치했다.20) 다시 1534년(중종 29)에 부산에 있는 좌수영지로 옮겼고 선소는 수영강 하구에 위치했다.22)
표 2. 경상도 남부지역 수군 영진의 선소(경국대전)
그리고 제포23)에 설치되었던 경상우수영의24) 선소는 지금의 제포만에 있었으나 1403년(태종 3) 이후 창원 합포를 거쳐 거제의 산련포와 탑포 등지로 옮겨다니다가 1419년(세종 원년)에 거제 오아포, 1604년(선조 37)에 고성현 춘원포로 이전했다.25) 임란 시 통제영에 병합되었다. 따라서 임란 이전의 선소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공히 연안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상좌도의 개운포·서생포·두모포·부산포·다대포 등에도 영진성이 축조되었는데, 이 중 개운포·서생포·두모포진의 선소는 하구에 위치했다. 동해안의 연해 군현과 마찬가지로 이 지역 영진성의 선소도 하구에 입지한 특징을 보였다. 경상우도의 영진성인 가덕·안골포·영등포·율포·옥포·지세포·조라포·가배량·미조항·적량·미조항·노량 등은 연안에 위치했으며, 부속 선소도 진성과 같이 연안에 입지했다.
왜와의 교역 거점이던 제포·부산포· 포진에는 왜관(倭館)이 있었다. 왜인을 통제하기 위해 배치한 군선을 위한 선소도 설치되었는데, 왜인(倭人)이 사용하는 선소와는 별도로 조성되었다. 그리고 동해안에 입지했던 염포의 선소는 그 유구가 남아 있지 않으나 태화강 하구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영진성과 선소의 거리를 보면 연해군현과 마찬가지로 인접 배치되었지만 더 밀접해 배치해 있었다. 이는 수군의 영진성은 군선을 운용하기 용이한 위치에 선소를 먼저 조성한 후 그 인근에 진성을 축조했기 때문이다. 반면 연해 군현은 읍성 축조 후 나중에 연안이나 하구에 선소를 조성했기 때문에 대개 선소와 읍성은 일정한 거리(2~6km)를 두고 떨어져 있다.
3. 선소(船所)의 입지와 기능
3-1. 입지 유형 <표 1·2>
선소의 그 입지에 따라 바다에 접한 연안형과 하구에 위치한 하구형으로 크게 구분된다. 먼저 연안형에 선소를 둔 연해 군현으로 기장·웅천·창원·칠원·진해·거제 사등성·거제 고현성·후기 거제현·고성·사천·곤양·후 기하동·남해이며 수군영진에서는 부산포·다대·제포·안골포·옥포·지세포·영등포·조라포·구(舊)당포진·신(新)당포진·사량진·적량진·평산포가 있다. 하구형 선소에는 연해 군현 중에서 울산·동래·김해·전기하동이며 수군 영진에서는 염포·개운포·서생포·두모포·해운포가 있다.
이처럼 상당수의 선소가 연안에 위치하고 있지만 단지 1/4정도의 선소만 하구에 입지하고 있다. 또한 남해안의 선소는 연안형이 많았고 동해안의 선소는 하구형이 많았다. 이러한 선소의 입지적 차이는 남해안과 동해안의 지형 특성과 관련이 있다. 남해안은 리아스식 해안(Rias Coast)이 발달한 관계로 만입(灣入)한 곳이 많아 양항이 발달해 있었다. 또한 크고 작은 섬들이 다도해를 형성하고 있어 해류의 속도를 늦추고 해풍을 막아 내해(內海)를 이루어 좋은 항로를 형성하고 있었다.
반면 동해안은 해안선이 단조롭고 섬도 거의 없어 해류가 빠르고 해풍을 막을 수 없어 양항이 발달하기 어려운 조건이고 아울러 선박 운항도 쉽지 않았다. 이러한 지형 조건에서 선소를 조성할 수 있는 곳은 태백산맥에서 동해안으로 흐르는 중소 하천이 형성한 만입된 하구뿐 밖에 없었다. 울산 태화강의 울산군 선소, 외황강의 개운포진 선소, 회야강의 서생포 선소는 이를 잘 말해준다. 또한 경상도에는 대하천인 낙동강과 섬진강이 있어 내지 수운이 발달했으며, 강변을 따라 선소가 조성되어 있었다.
3-2. 군선(軍船)의 수량과 선소
선소의 공간적 규모는 해당 선소를 지휘 통솔하는 지휘관의 품계와 관직 및 배속된 군선의 수, 수군의 수 등에 따라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먼저 조선전기 경상도 수군의 관직<표 3>을 보면 최고위 벼슬에 해당하는 3명의 수군절도사(정3품)가 파견되어 있었는데, 이 중 1명은 관찰사가 겸임하여 실제로 2명이 배치되었다. 부산포진과 제포진에는 종3품의 수군첨절제사, 경상좌도와 우도에는 정4품의 수군 우후가 각각 배치되었다. 그리고 수군진에는 종4품의 수군만 호가 파견되었으며, 만호(萬戶)는 군현의 군수와 품계가 같았다. 다만 임란 때 설치된 삼도수군통제사는 종 2품으로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를 겸했다.
표 3. 경상도 수군의 품계와 관직(『경국대전』, 1469)
선소의 시설 규모를 좌우하는 것은 군선(軍船)의 수와 종류였다. 이 연구에서는 조선 후기『만기요람』에 기록된 군현과 영진성의 군선에 관한 기록을 토대로 이를 분석했다.26) 연해 군현의 선소에 정박하는 군선으로는 전선(戰船)·귀선(龜船)·병선(兵船)·사후선(伺候船)이 있었고, 통제영에는 좌우별선(左右別船)을 비롯한 좌우방선(左右防船)이, 경상좌수영에는 탐선(探船)이 추가로 배치되었다.
즉, 통제영과 경상좌수영의 선소에 정박하는 군선은 수군 영진보다 다양하고, 그 수도 많음을 알 수 있다.
통제영에 속한 선소에는 전선 3척·좌우별선 2척·귀선 1척·좌우방선 2척·병선 7척·사후선 21척 등 모두 36척의 군선이 배치되었다. 해상 조련인 수조(水操)시 삼남(三南)의 군선들도 정박해야 했으므로 선소의 항만 규모도 가장 컸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경상좌수영의 선소에는 전선 3척· 귀선 1척·병선 5척·사후선 11척·탐선 1척 등 모두 21척의 군선이 있었으며, 수군의 수상 조련에 대비해 관내 각 연해 군현의 군선들도 정박할 수 있는 대 규모의 선소가 필요했다.
이밖에 영진성의 군선은 수와 종류 면에서 통제영 및 경상도 좌우수영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거제현과 가덕진의 선소에는 전선 2척·병선 2척·사후선 4척 등 모두 8척이 있었고, 부산진 선소에는 전선 1척·귀선 1척·병선 1척·사후선 4척 등 모두 7척이 배치되어 있었다. 다대포의 군선은 부산진보다 병선이 1척 많은 8척이 있었으며, 나머지 연해 군현과 진(鎭)의 군선은 전선 1척·병선 1척·사후선 2척의 4척으로 구성되거나 귀선 1척·병선 1척·사후선 2척의 4척으로 이루어졌다. 즉, 4~8척의 군선을 가진 영진성의 경우 소규모 선소로도 군선의 운용이 가능했다.
한편 대부분의 읍진(邑鎭)에서는 1개소의 선소를 운용했지만 일부에서는 2개소를 운용하기도 했다. 특히 위계가 높은 통제영(통제사, 종2품)과 좌수영성(수군절도사, 정3품)의 경우 통제사와 절도사에 속한 선소 외에 우후(虞侯, 정4품)가 지휘하는 선소가 따로 있었다.27) 이는 영성(營城) 내부에 우후가 사용하는 공해를 별도로 지어 운영하던 것과 유사하다. 이처럼 읍진의 격과 위계에 따라 군선의 수와 종류에 차이가 있었으며, 이는 선소의 규모와 수 그리고 내부 시설의 규모와 종류에도 큰 영향을 미친것으로 보인다.<그림 13·16>
3-3. 수군의 조련(操練)
선소는 군선의 정박뿐만 아니라 수군의 조련장으로도 사용되었다. 수군의 조련은 해상에서 실시하는 수조(水操)와 육상에서 실시하는 육조(陸操)로 크게 구분된다. 수조는 매월 1일과 5일에 하며, 한 달에 모두 6차에 걸쳐서 실시했으며, 육조는 매월 3일과 7일에 하며, 한 달에 모두 6차에 걸쳐서 실시했다.28)
수조(水操)는 수군을 운용하면서 시작했을 것으로 보이며, 용어는『광해군일기』에 처음 보인다.29) 『인조실록』에도 봄·가을에 수조를 실시했는데 장소는 모두 (부산) 가덕도 앞바다였다는 기록이 있다.30) 『비변사등록』에도 봄철 통영에서 삼도 수군의 합동 조련을 실시하고, 가을에는 각도의 앞바다(各道 前洋)에서 수상 조련을 실시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31) 가을에 실시한 수조는 통제영을 비롯한 각도의 수영성에서 실시되었다.『1872년 지방지도』인「경상좌수영영지도형(慶尙左水營營址圖形)」과 「장연지도(長淵地圖)」에는 ‘수조처(水操處)’가 기록되어 있는데, 경상좌수영의 가을 수조처는 수영강 하류에 위치한 판곶리(板串里, 부산 민락동 널구지 마을, 水操處板串里前洋) 앞 이었다32).<그림 3> 이밖에 장연(長淵)지도에도 영창(營倉) 앞의 죽강(竹江) 하구 넓은 곳에 수군의 조련장소로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33) 동해안의 경우 파도가 심해 이를 피해 안정적으로 수조를 할 수 있는 곳이 하구 밖에 없어 강 하구에서 수조를 실시한 것으로 보인다.
그림 3. 경상좌수영 수상 조련 장소(『1872년 지방지도』)
『거제부도(巨濟府圖)』에는 거제의 선소(죽림리) 앞 바다에 나가 거제현 자체적으로 춘추로 수조를 실시한 기록이 기록되어 있다.34) 육조는 수군이 배에서 내려 보전(步戰)을 하기 위한 훈련으로, 이를 위해 넓은 마당과 이를 지휘하는 시설로 중층 누각을 건축했던 것으로 보인다.35) <그림 4>
그림 4.『거제부도』- 동아대박물관 소장
3-4. 봉수(烽燧)와 통신
연해 군현에서는 왜구를 비롯한 외적의 침략에 대비하고 신속히 구원병을 요청하기 위해 읍성에서 봉수군의 신호를 수신할 수 있는 위치에 봉수대를 건축했다.36) 봉수의 신호를 인근 읍성에도 신속히 알려주기 위해 봉수 노선을 의도적으로 길고 굴절시켜 연결하기도 했다. 수군의 영진성에서도 가급적 봉수군의 신호를 직접 수신할 수 있는 위치에 봉수대를 설치했다.
<표 4>는 연해 군현과 수군 영진에 속한 선소(船所)에서 봉수대의 신호를 직접 수신할 수 있는지를 살펴본 것이다. 봉수와 읍진성 및 선소를 구글어스(Google Earth)에 탑재하여 가시권을 분석하는 방법으로 봉수군의 신호를 읍성과 진성에서 수신할 수 있었는지를 검토했다. 이 분석에서 봉수대 위치는『신증동국여지승람(1530』의 기록을 기준으로 삼았으며, 읍성과 수군 영진의 위치는 『經國大典』의 외관직조 기록을 근거로 했다.
표 4. 군현, 진에 속한 선소의 봉수신호 수신 여부 (新增東國輿地勝覽)
※영등포진에 신호를 전해준 봉수는 확인되지 않았음
이 같은 분석 결과, 연해읍성은 대개 조선시대 봉수의 직봉(直烽)이나 간봉(間烽) 노선에 위치했다. 수군진성도 가급적 봉수의 직봉이나 간봉에 연결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여건상 그것이 어려운 경우 본진(本鎭)에 신호를 전달하는 별도의 권설(權設)봉수(요망대·별망)를 설치 운영했다. 권설(權設)봉수의 대표적인 사례로 천성진 동쪽의 요망사(瞭望舍)와 천수대(天秀臺)를 들 수 있다.
그 결과, 연해 군현 및 진(鎭)의 선소에서는 봉수대의 신호를 직접 수신할 수 없는 경우가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봉수대의 신호를 직접 수신할 수 없는 선소에는 지휘권을 가진 있는 읍진(邑鎭)에서 신호를 받아 전해준 것으로 보이며, 선소의 병선은 연해 군현의 수령이나 수군 영진의 지휘자의 명을 받아 출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4. 선소의 각종 시설
4-1. 감시 및 출입 통제시설
(1)감시 및 관측시설
선소의 공간은 크게 항의 입구에서 적선(賊船)의 침입을 감시·통제하기 위한 ‘선박 출입 통제시설’, 군선의 접안과 수리를 위한 ‘접안 및 수리시설’, 그리고 육상 조련(陸操)· 행정 업무 시설·군기(軍器)와 집물을 보관하기 위한 창고로 이루어진 ‘육상시설’ 세 시설로 구분 할 수 있다.
선소 입구의 적선(賊船) 감시 초소는 『1872년 지방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통제영에 속한 선소의 경우 입구 동쪽에 남망산(南望山), 안골포진의 경우 남쪽에 육망산(陸望山)이라고 쓴 관측용 망산이 있다. 고지도에 시설물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지 않으나 단어에 ‘망(望)’자가 들어있어 의미로 보아 적선을 감시하던 감사초소의 기능을 수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입지특성상 선소 내외를 잘 관측할 수 있어 적선의 침입을 알리는 신호를 선호에 전달하는데도 매우 접합하다. 요망대 처럼 관측시설을 설치하고 원거리 감시 초소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여건상 이러한 감시초소를 둘 수 없는 경우 인근 봉수 또는 야망대를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3∼4장 참고)
높은 산에 위치하는 봉수대가 야간에 침투하는 적선을 감시하기 어려울 경우 별도의 야망대(夜望臺)를 설치 운용했다.『1872년 지방지도』에는 옥포·조라포·다대포·서평포진의 선소 입구에 있는 야망대(夜望臺) 바로 이것이다.<그림 5> 위 고지도에 보이는 야망대는 구릉 정상부가 아니라 선소 가까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통제영의 선소 입구 좌우에 배치된 동파수(東把守)와 서파수(西把守)도 일종의 야망대 기능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선소 입구에는 적선의 동태를 감시하기 위해 야망대 또는 동파수(東把守)와 서파수(西把守) 등의 감시시설을 설치 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림 5. 옥포 진성(鎭城)의 야망대(『1872년 지방지도』)
(2)선박 출입 통제시설
선소 입구에는 소극적으로 적의 동태를 관측하는 시설뿐만 아니라 적선의 선소 출입을 막기 위한 적극적인 차단 시설도 있었다. 이 같은 적선이 선소로 진입하는 것을 막는 차단장치는 삼포왜란 당시 왜선(倭船)이 선소에 침입하여 제포·영등포·안골포·부산포·다대포에 정박 중인 아군의 군선을 불태운바 있어 이후 이에 대비하기 위해 설치했던 적극적인 방어시설이다.
『중종실록』에는 적선(賊船)이 선소로 침입하는 것을 통제 차단하기 위한 시설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선소 입구의 수면 아래에 긴 목재 말뚝을 촘촘히 박고 이를 쇠사슬로 고정하거나 칡넝쿨을 이용 목주(木柱) 아래에 무거운 돌을 달아 그 나무를 물 밑 한 자쯤 잠기게 하여 적선이 끊고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상호 연결한 목주 중앙에는 쇠갈고리를 설치하여 필요 시 잠글 수 있게 했다. 이처럼 선소 입구에 선박 출입통제시설을 설치하여 적선의 기동을 차단 및 통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입구의 선박 차단 시설의 개폐 장치를 우리 쪽에 만들어 아군 전선이 출전할 때는 갈고리를 풀고 출전할 수 있게 하면, 배를 지키는 계책에 합당하므로 우후 김양필을 시켜 수영에서 시험하도록 하여 편하고 도움이 된다면 좌·우도 각 포(浦)에 같은 모양으로 만들어 배치할 계획을 수립한바 있다.37)
전술한 선박 출입 통제시설은 발굴된바 없으나 삼도수군통제영을 그린 『남해지도<그림 6>』에서 선소 입구에 설치한 모습을 확인 수 있다. 선소 입구에 동서 양쪽에 동파수와 서파수를 두고 그 사이에 목책을 사용 평면 형태가‾‾< >‾‾ 모양의 출입 통제시설을 설치한 것을 볼 수 있다. 선박 통제시설 중앙부의 좁은 곳(< >모양)으로 군선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출입을 통제하여 적선의 공격 시간을 지연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지도에는 보이지 않지만 수중의 출입구 통제시설에 동아줄을 설치하여 선박 출입을 통제하기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아줄 또는 철선으로 적선의 출입을 통제한 유구는 발굴되지 않았지만 명량해전 당시 좁은 해협에 철선을 설치하여 적선을 통제한 것을 볼 때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38)
그림 6. 선소 입구의 선박 출입 통제 시설 (『남해지도』부분 확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위에 살펴본 문헌 기록과 고지도의 사례 그리고 철선의 사용 사례 등을 볼 때 선소 입구에는 적선의 침입을 막는 선박 출입 통제시설을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통제영의 선소 입구에 있던 동파수와 서파수는 감시 초소와 출입 통제시설의 기능을 겸했던 것으로 보인다.
4-2. 군선의 접안(接岸) 및 관리시설
(1)굴강(掘江)의 유형
굴강(掘江)은 군선을 선소에 접안시키기 위한 시설이다. 자연의 지형을 활용하여 만들거나 인위적으로 축조하기도 했다. 굴강은 축조 방식과 형태에 따라 돌로 쌓아 만든 석축형(石築形), 지연지형을 凹자형으로 굴착한 굴입형(堀入形), 그리고 일부만 축조하고 자연의 지형을 그대로 이용한 자연형(自然形), 세 유형으로 구분된다.
그림 7.서생포진의 선소(굴입형) (近世韓國五萬分之一地形圖, 1918)
그림 8.김해현의 선소(자연형) (近世韓國五萬分之一地形圖, 1918)
석축형 굴강의 사례는 당포진·안골포·미조항진·천성진·다대포진·부산포진(조선 후기)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그림 9·10> 돌을 쌓아 만든 석축형 굴강은 주로 연안에 위치하는 선소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굴입형 굴강은 주로 하구(河口)에 조성한 것으로 울산(조선 초기)·경상좌수영의 연훈강·하동(조선 초기)·서생포진의 선소에서 확인된다.<그림 7> 이는 강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여 굴강 안에 하천 퇴적물이 적게 쌓이도록 축조한 특징이 있다. 이밖에 자연지형을 그대로 살려 선소로 이용한 사례는 경상좌수영(조선 후기)·김해·삼도수군통제영성·개운포진 등에서 볼 수 있으며, 통제영성 외에는 모두 하구(河口)에 선소를 조성했다.<그림 8> 굴강의 유형 중 자연형은 연안과 하구에 입지한 모든 선소에서 볼 수 있고, 석축형은 연안 선소에만 사용되었다. 그리고 굴입형 굴강은 강 하구에 입지한 선소에서만 조성되어 있었다.
그림 9. 안골포진의 굴강 (1967년, 국토지리정보원소장)
그림 10. 안골포진의 굴강 (경남기념물 제143호)
(2)계선주(繫船柱)
선소에 정박한 군선이 파도와 바람 등에 의해 표류하거나 파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고정해야 한다. 대형 군선의 경우 여러 방향에서 선박을 결박해야 하며, 이를 위해 육상과 수중에 설치한 계선주(繫船柱)를 이용했다.『1872년 지방지도』의「제포진지도」를 통해 계선주의 구체적인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고지도에는 제포진 선소에 정박 중인 3척의 군선 모두 선수(船首), 선미(船尾)가 육상 또는 수중의 계선주와 동아줄로 결박해 놓은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그림 11>현존하는 육상 계선주의 유구는 전라좌수영의 선소에서 확인할 수 있으나39) 수중에 박아 세운 계선주로 추정되는 것이 제포진성과 당포진에서 발굴된바 있다. <그림 12> 보고서에는 수중 목책(말목)을 선박 출입 통제시설40)이라고 서술하고 있으나 선소 입구를 가로질러 조성되어 있지 않고 해안선과 나란하게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수중 계선주일 가능성이 더 높다.
그림 11. 제포진성 선소의 계선주(1872년 지방지도)
그림 12. 제포진성 추정 계선 주(동아대박물관,진해제포수중유적)
(3)연훈시설
군선(軍船)의 관리와 내구성을 증진시키기 위해 주기적으로 수리와 연훈(煙燻)41)을 실시했으며,『經國大典』에는 군선의 내구연한에 대해 아래와 같이 규정되어 있다. 즉, 군선의 수리는 선박을 건조한지 8년, 6년마다 수리하고, 이로부터 6년이 경과하면 새로 건조하도록 했으며, 매달 그믐과 보름에는 선박을 연훈하도록 했다. 이를 통해 조선시대의 선박 내구연한은 20년이었고, 연훈은 15일 간격으로 실시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달리 동해안에 접한 ‘경상좌도·강원도·영안도(함경남북도)의 경우 이와는 달리 병선을 건조하고 10년이 되면 수리를 하고 또 10년이 지나면 새로 건조하되 연훈을 하지 않고 항상 강에 정박시켜 놓는다.’ 고 규정되어 있다.42)
전술한 『經國大典』의 병선 관리규정을 볼 때 선박의 내구연한은 공히 20년이나 수리 연한과 연훈의 실시 유무에서는 지역 차(동해안과 그 외 지역)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선소가 동해안에 접해 있는 경상좌도·강원도·영안도 지역의 경우 선박 수리 주기가 타 지역보다 길고 연훈도 실시할 필요가 없었다. 이는 동해 안에 입지하는 경상좌도·강원도·영안도 모두 지형적인 이유로 선소가 강과 바다에 접하는 기수역(氣水域)43)인 하구(河口)에 위치하고 있어 연훈할 필요가 적었다. 그래서 연훈하는 대신 군선을 항상 강에 정박시키도록 했다.
연훈시설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은 없으나 『1872년 지방지도』의 「경상좌수영영지도형」을 통해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위 지도에 한자로 ‘연훈강(煙燻江)’이라고 명기한 것이 있어 이것이 연훈시설임을 알 수 있다.<그림 13> 굴강은 굴입형이며 선박을 육상으로 인양하는 녹로와 같은 시설은 묘사되어 있지 않으나 여기서 선박을 육상으로 끌어 올려 연훈을 실시한 것으로 보인다. 경상좌수영성의 선소에는 2기의 선소와 1기의 연훈을 위한 굴강이 연접하여 있다. 경상좌수영성은 경상좌도에 속해 있고 또한 수영강 하류에 입지하여 별도의 굴강이 필요하지 않았음에도 별도의 굴강을 설치한 것은 경상좌수영의 높은 수군 위계와 관련이 있다. 즉, 유사시 또는 수군 훈련시 서남해안 지역 병선의 접안 및 수리시 연훈시설을 이용하거나 조선 후기 부산포 인근의 군소 수군진(다대포·부산포·개운포 등)의 군선을 공동으로 연훈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림 13. 경상좌수영의 선소와 연훈강 (『1872년 지방지도』)
4-3. 육상(陸上) 시설
선소의 육상시설은 수군의 행정 업무와 사열을 위한 공해(公廨), 누각 및 수군의 물자를 보관하는 창고로 구성되어 있다.「1882년 지방지도」를 토대로 조선 후기 선소 내 공해와 육상시설의 수와 규모 <표 5> 등을 살펴본바 군현과 수군 영진의 위계에 따라 큰 차이가 있었다. 「1882년 지방지도」를 보면 웅천․진해 선소에는 어변정 1동의 명칭만 보이고, 거제․사천․안골포진에는 다소 차이는 있으나 누정을 비롯한 창고로 향창(餉倉), 사창, 군기(고), 변물고 등의 시설명이 있다. 공해로는 사천의 비우당, 안골포진의 교사청, 포수청, 옥포진의 포청 등이 있으나 이들 누정 및 공해, 창고의 경우 규모와 건축 형식은 알 수 없다. 이처럼 선소의 육상 시설로는 누정 성격의 연주루(蓮籌樓)·비우당(備虞堂)·영가대(永嘉臺)를 비롯한 직능별 관청으로 보이는 포수청과 교사청, 사부청이 있었고, 이밖에 창고로 군기고·화약고·집물고·변물고․사창·환곡고 등이 배치되어 있었다. 신(新)당포진의 선소에는 특이하게도 연구대상 다른 선소에서 볼 수 없는 객사(客舍)가 배치되어 있다.
울산·기장·동래·김해·창원·고성·곤양·하동·서생포·두모포·해운 포·다대포·지세포진에 대한 기록은 없음.
표 5. 선소의 공해와 육상시설(1872년 지방지도)
앞에서 설명한 연해 군현과 수군의 영진성보다 위계가 높은 통제영 선소에는 보다 다양한 육상시설이 배치되어 있었다. 중층 누각인 수항루(受降樓)를 비롯한 수군의 직능별 관청으로 보이는 선장청(船將廳), 사부청(射夫廳), 주화포청(舟火砲廳), 선기패관청(船旗牌官廳), 사공청(沙工廳), 포수청(砲手廳), 균세소(均稅所) 및 창고인 평무고(平貿庫)와 2동의 선집물고(船什物庫) 등이 있었다.44) 한편 우후가 지휘하는 선소에도 중층 누각인 천척루(千尺樓)를 비롯 필요한 공해와 창고 등이 배치되어 있었다.<그림 14∼16> 편 경상좌수영의 선소에도 척분정(滌氛亭)과 비우당(備虞堂)45)을 비롯 공해와 창고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림 14.『남해지도』에 보이는 선소의 육상시설 - 삼도수군통제영·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 15. 『남해지도』에서의 선소의 육상시설 확대 - 삼도수군통제영·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 16. 근대기 사진에서 통제영의 육상시설 - 수원광교박물관소장, 사운51145
이를 종합하면 선소에는 수군 조련시 사용하는 누각을 중심으로 수군의 직능별 관청 및 다양한 용도의 창 고가 주로 선소 외곽에 배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육상시설과 관청 등 공해의 규모와 종류는 연해 군현과 수군 영진의 위계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이들 각종시설의 배치형식을 명확히 규명하기 위해서는 발굴성과와 구체적인 기록이 부족하여 선소의 공간 구조를 명확히 밝히기는 한계가 있었다.
5. 결론
조선왕조는 왜(倭)의 침구를 대비하기 위한 일환으로 수군의 수와 군선의 수를 증대하였고 이를 위해 선소가 본격적으로 조성 운영되었다. 성종대에는 수군의 육상 시설을 보호하기 위한 수군 영진성을 축조했고 1510년에 발생한 삼포왜란이후 수군겸치제를 실시하면서 연해 군현에도 수군을 운영해야 하기 때문에 내지 군현에서 볼 수 없는 선소를 설치 운영했다. 조선시대 경상도 남부지역 연해 군현과 수군영진의 선소에 대해 살펴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선소의 입지는 연안형과 하구형으로 구분된다. 선소의 유형을 지역별로 살펴보면 남해안에는 연안형, 동해안에는 하구형 선소가 다수였다. 하구형은 연구대상 선소 중 약 1/4의 비중을 차지하며, 이는 한국의 지형특성과 관련이 있었다. 선소와 군현의 읍성 또는 수군 영진성의 본진과의 거리를 살펴본바 수군 영진성(營鎭城)의 경우 영진성과 선소가 인접해 위치하는 반면 연해 군현의 경우 읍성에서 2~6㎞ 이내에 선소가 위치했다. 수군 영진의 경우 먼저 선소를 조성하고 후에 진성을 축조한 반면 연해 군현은 읍성을 먼저 축조한 후 나중에 선소를 조성한 것으로 나타났다.
둘째, 선소의 입지적 차이는 남해안과 동해안의 지형 특성과 관련이 있다. 남해안은 리아스식 해안으로 만입(灣入)한 곳이 많아 양항이 발달했으며, 다도해를 형성하고 있어 해류의 속도를 늦추고 해풍을 막아 내해를 이루어 좋은 항로를 형성을 하고 있었다. 반면 동해안의 선소는 태백산맥의 동쪽의 중소하천의 하구를 이용 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선소의 입지특성으로 인해 선박의 수리 주기, 연훈실시, 수조(水操) 장소, 굴강(掘江) 조성 등에 차이가 있었다. 즉, 남해안의 연안형 선소는 군선 수리 주기가 연 2회인데 반해 동해안의 하구형 선소의 군선 수리주기는 연 1회로 수리 주기가 더 길었다. 또한 동해안의 하구형 선소에서는 선박에 연훈을 실시하지 않았는데, 이는 기수역에 속해 해조류, 패류 등이 잘 부착되지 않아 연훈을 실시할 필요가 적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셋째, 군선 접안시설인 굴강(掘江)은 축조 방식과 형태에 따라 돌로 쌓아 만든 석축형, 지연지형을 凹자형으로 인공적으로 굴착한 굴입형, 그리고 일부만 축조하고 자연의 지형을 그대로 이용한 자연형의 세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석축형 굴강은 주로 연안에 위치하는 선소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하구(河口)에 조성하는 굴입형 굴강은 강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도록하여 퇴적물이 굴강에 적게 쌓이도록 축조한데 그 특징이 있다. 자연지형을 살려 선소를 조성한 사례로는 김해·삼도수군통제영성·개운포진 등이 있으며, 통제영성 외에는 모두 하구(河口)에 선소를 조성했다는 특징이 있다. 이를 입지별로 보면 하구에 입지한 선소는 굴입형이거나 자연형이며 연안에 조성한 선소는 석축형이거나 자연형이였다.
넷째, 연해 읍성과 영진성 및 이에 속한 선소와 봉수의 신호를 수신할 수 있는지 여부를 검토한 결과 연해 읍성과 영진성에는 성내에서 직접 수신이 가능했다. 그러나 연해 읍성 및 영진성의 선소에서는 봉수의 신호를 수신 할 수 없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이는 지휘권이 있는 읍진(邑鎭)에서 선소에 출항여부를 전해준 것으로 보인다.
다섯째, 선소 내외에는 육상시설을 비롯한 선박의 출입을 통제하는 감시 및 출입 통제시설, 군선의 접안과 수리를 위한 시설 등이 배치되어 있었다. 육상에는 수군 조련시 사용하는 누각을 중심으로 수군의 직능별 관청 및 다양한 용도의 창고가 배치되어 있었다. 이들 육상시설의 규모와 종류는 연해 군현과 수군 영진의 위계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실증할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하여 육상시설의 배치형식을 명확히 규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선소의 육상시설로 누정과 공해를 비롯한 창고가 있고 공해의 사례로 사천의 비우당, 안골포진의 교사청, 포수청, 옥포진의 포청 등이 있다. 그러나 공해의 규모와 건축형식은 알 수 없다. 이밖에 누정 성격의 연주루(蓮籌樓)·비우당(備虞堂)·영가대(永嘉臺)를 비롯 수군의 직능별 관청으로 보이는 포수청과 교사청, 사부청이 있었고, 이밖에 군기고·화약고·집물고·변물고․사창·환곡고 등의 창고가 배치되어 있었다. 신(新) 당포진의 선소에는 특이하게도 연구대상 다른 선소에서 볼 수 없는 객사(客舍)가 배치되어 있었다. 이밖에 선소 의 입구에는 적선을 감시하는 망대, 야망대, 동파수, 서파수 등의 관측·감시시설이 있었고, 입구의 수중에는 적선의 출입을 통제하는 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육상과 수중에는 정박한 군선이 파도와 바람 등에 의해 표류하거나 파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군선을 결박 고정하기 위한 계선주가 설치되어 있었다.
선소의 수는 보통 읍진(邑鎭)에서 1개소가 운영되었지만 통제영과 수영성에는 통제사와 절도사의 선소 외에 우후(虞侯, 정4품)가 사용하는 선소가 별도로 설치되어 운영되었다.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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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經國大典
- 萬機要覽
- 紀效新書
- 備邊司謄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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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新增東國輿地勝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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