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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vestigating 'Model-Dependent Realism' from the Viewpoint of the Traditional Medical Theories Research

한의학 이론 연구의 관점에서 살펴 본 '모형 의존적 실재론'

  • Lee, Choong-Yeol (Department of Physiology, College of Korean Medicine, Gachon University)
  • 이충열 (가천대학교 한의과대학 생리학교실)
  • Received : 2015.09.15
  • Accepted : 2015.10.20
  • Published : 2015.10.25

Abstract

In a essay that was published on 'Science' in December 2014 as a part of the supplement "The Art and Science of Traditional Medicine," the eastern and western medical theories are discussed with reference to the model-dependent realism suggested by Stephen Hawking and Leonard Mlodinow. This paper examines what the model-dependent realism is, and how it affects the future direction of researches in traditional Korean medical theories. The model-dependent realism holds a meaning in that it puts traditional medical theories in a perspective of models, and allows for application of recent studies in scientific philosophy for researches in traditional medical theories. Especially, the model studies by R. Giere et al. will help elaborate the traditional medical theories from a model perspective. From a model perspective, the 'visceral manifestation', 'meridian and collateral', 'qi-blood', 'eight principles' and 'constitution' theories of traditional medicine have the potentials to develop into valid models, and the traditional medical theory's phenomenological and holistic perspective distinguishes it from western medicine, giving it a competitive edge. In addition, the epistemological pluralism of model-dependent realism can serve as an alternative to relativism or rationalism perspective which put eastern and western medicine in opposition until now.

Keywords

서 론

2014년 12월, “사이언스(Science)” 잡지의 부록(supplement)으로 ‘The Art and Science of Traditional Medicine, Part 1: TCM Today – A case for Integration’이 발간되었다. 총 3부로 나누어져 발간되는 시리즈의 제1부인 이 특별부록에서 발행인들은 중의학(TCM)을 현대 의료 체계 속으로 통합하는데 사례가 될 수 있는 기고문들로 특집을 구성했고, 또 통합적인(integrated), 네트워크 기반 보건 의료체계(network-based health care system)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가능성을 부각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1)

눈길을 끄는 것은 이 잡지에 실린 한 논문2)에서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과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Leonard Mlodinow)의 ‘모형 의존적 실재론(model-dependent realism)’ 개념을 끌어들여 동서양 의학 이론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즉, 얀 쇠렌 등은 “East is East and West is West, and never the twain shall meet?”(이하 “East, West”)라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은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서양의학과 중국의학이 각기 서로 다른 고유한 문화와 세계관 속에서 발전되었고, 그 결과 환원주의적 접근(reductionistic approach)이 발달한 서양 의과학(biomedical sciences)은 해부학, 생리학, 조직학, 유전학, 생화학 분야에서 엄청난 지식을, 반면에 현상학적 접근(phenomenological approach)이 발달했던 중국의학은 생체에 대한 전일론적(holistic) 이해를 생산해 내었다.3)

둘째, ‘모형 의존적 실재론’ 개념에 기초할 때, 현대 서양의 과학적 ‘모형’과, 동아시아 문화 속에서 형성된 실재와 자연법칙을 이해하기 위한 또 다른 접근방법 모두 ‘모형’으로서 유효한(valid) 것이고, 각각 고유한 ‘모형 의존적 실재론’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4)

셋째, 의료 체계 또한 동서양이 서로 구별되는데 서양에서는 환원주의적, 분석적 ‘모형’이 지배했고, 동아시아에서는 현상학적, 기술적(descriptive), 시스템 기반(systems-based)의 관점이 지배했다. 최근 서양의 시스템 사상가들이 발전시킨 시스템적 사고, 특히 이것을 의학과 생물학 분야로 확장시킨 시스템 생물학(systems biology)은 서양의학과 전통의학의 ‘모형들’ 사이에서 과학적인 가교(scientific bridge)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5)

“East, West”에서 취하고 있는 입장은 현재 미국의 보완대체의학 정책이 전통의학 이론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과 차이가 있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는 ‘모형 의존적 실재론’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고, 한의학 이론 연구의 관점에서 과연 이것이 “East, West”에서처럼 서양의학과 한의학 이론을 아우르는 철학적 관점으로서 취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또 한의학 이론 연구의 미래를 위해 참고할 만한 시사점이 있는지 검토해 보려고 한다.

 

본 론

1. ‘모형 의존적 실재론’(model-dependent realism)이란?

‘모형 의존적 실재론’은 호킹과 믈로디노프가 2010년에 발간한 <위대한 설계(The Grand Design)6)라는 책에서 처음 제안한 개념이다.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과학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저자들은 이 책에서 생명, 우주, 만물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에 철학적 대답을 시도하고 있으며, ‘인본 원리’, ‘모형 의존적 실재론’, ‘자발적 창조’와 같은 용어들을 핵심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저자들이 전통적인 철학적 주제를 다루려고 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 일까? 이것은 철학이 현대 과학의 발전, 특히 물리학의 발전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는 저자들의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철학은 이제 죽었다는 다소 과격한 주장도 서슴지 않는다.7)

‘모형 의존적 실재론’은 “그림이나 이론에 의존하지 않는 실재 개념은 없다(There is no picture- or theory-independent concept of reality)”라는 것을 핵심 주장으로 한다.8) ‘모형 의존적 실재론’에서는 “물리 이론이나 세계에 대한 그림들이 모형(model)(일반적으로 수학적 성격을 띤)과 그 모형의 요소들을 관찰자료와 연결하는 규칙들의 모음”으로 간주된다.9) ‘모형 의존적 실재론’이 담고 있는 핵심적인 주장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의 실재에 대한 인식은 우리 뇌가 만든 ‘모형’에 의존해서만 가능하다. 즉, “‘모형 의존적 실재론’에 따르면 우리의 뇌는 외부 세계에 대한 모형을 만듦으로써 감각기관들에서 온 입력정보들을 해석한다. 그리고 전기, 원자, 분자 등의 개념들을 형성한다. 이런 개념들 외에 우리가 알 수 있는 실재는 없으며, 모형에 의존하지 않고 무엇인가의 실재 여부를 판단할 방법은 없다. 요컨대 잘 구성된 모형은 그 나름의 실재를 창조한다.”10) ‘모형’에 의존하지 않는 실재 개념은 없다.

이것은 근래에 이루어진 인지과학에서의 연구 성과를 반영한 것이다. 저자들은 ‘모형 의존적 실재론’이 우리의 뇌가 우리의 감각기관들에서 온 입력을 해석한다는 생각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11) 즉, 눈을 통한 지각을 예로 들면 우리의 뇌는 시신경을 통해 일련의 신호를 받는데 이 신호들은 결코 선명한 상을 만들지 않는다. 뇌로 들어온 미가공 데이터들은 상태가 아주 나쁘고 구멍까지 송송 뚫린 그림이다. 하지만 인간의 뇌는 양쪽 눈에서 온 입력을 조합하고, 보정을 통해 구멍을 메우며, 더 나아가 2차원 데이터 배열을 읽어 3차원 공간의 인상을 창조하기까지 한다. 뇌는 뛰어난 모형 만들기 능력을 통해 정신적인 그림 혹은 모형을 구성한 다.12) 다시 말해 우리의 뇌가 외부 세계에 대한 모형을 만듦으로써 감각기관들에서 온 정보들을 해석한다는 것이다.13) 저자들은 이러한 인지과학 분야 연구 성과들을 기초로 기존의 전통적인 철학적 인식론이 수정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현대물리학이 출현하기 전에는, 세계에 대한 모든 지식을 직접적인 관찰을 통해 얻을 수 있고, 사물들도 우리가 감각을 통해 포착한 그대로 존재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이런 순진한 실재관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14)

둘째, 우주의 모든 면을 기술할 수 있는 단일한 수학적 모형이나 이론은 없다. 대신 ‘M이론’이라고 부르는 이론들의 그물망(network)이 존재한다. M이론이라는 그물망 속의 이론들 각각은 특정한 범위 내에서만 현상들을 잘 기술할 수 있다. 그물망 속의 어떤 단일 이론도 우주의 모든 면을 기술하지는 못한다.15)

저자들은 물리세계 전체에서 얻은 관찰들 모두를 충실하게 재현하는 단일한 이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16) 저자들은 이것을 지도에 비유하고 있다. 즉, 지구 표면 전체를 충실하게 재현하는 단일한 평면 지도는 없으며 지구 전체를 충실하게 표현하려면 각각 제한된 영역을 표현하는 지도들을 여러 장 사용해야 한다. 예를 들어 세계 지도에 흔히 쓰이는 메르카토르 투영법(Mercator projection)은 북극과 남극 근처로 갈수록 면적들을 점점 더 크게 표현하며 북극과 남극은 표현하지 못한다.17) 과학이론도 그렇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기본적으로 궁극적인 만물의 이론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이른바 ‘M이론(M-theory)’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M이론은 궁극의 이론이 갖춰야 하는 속성들을 모두 갖춘 유일한 모형을 가리키는 일종의 은유인데, 저자들은 이 M이론이 다양한 이론들의 집합 전체를 일컫는 이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18) 그리고 이 M이론에 속하는 이론들은 각기 물리 세계의 특정 범위에 국한해서만 관찰들을 타당하게 기술할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19) 이것은 저자들이 실재에 대한 일종의 다원주의적 접근을 옹호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모형 의존적 실재론’은 이런 맥락에서 제안되고 있다.

셋째, ‘모형 의존적 실재론’에서는 모형이 실재에 부합하느냐는 질문은 무의미하고, 오로지 모형이 관찰에 부합하느냐는 질문만 의미가 있다. 그리고 만일 관찰에 부합하는 모형이 두 개가 있을 경우 어느 한 모형이 다른 모형 보다 더 실재에 가깝다는 말은 할 수 없다. 해당 상황에서 더 편리하다면 어떤 모형을 써도 무방하다.20)

예를 들어 빛의 파동이론과 입자이론은 빛이라는 현상을 설명하는 두 종류의 모형이다. 뉴턴은 빛이 “입자(corpuscles)”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뉴턴의 모형은 빛이 직선으로 나가는 이유, 빛이 다른 매질로 들어갈 때 굴절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뉴턴의 원 무늬(Newton’s rings)라고 불리는 현상을 설명하는 데는 입자이론이 쓸모가 없었다. 반면 빛의 파동이론은 뉴턴의 원 무늬는 간섭(interference)이라는 현상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었다. 19세기에는 이 현상이 빛의 파동이론을 입증하고 입자이론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지금은 빛은 파동의 행동도 하고 입자의 행동도 한다는 것을 안다.21)

파동의 개념은 호수에 돌을 던졌을 때 일어나는 현상의 관찰로부터 우리 사유 속으로 들어 왔을 것이고, 입자 개념은 바위, 돌멩이, 모래를 통해 쉽게 습득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파동/입자 이론은 각기 빛이 가진 특정 속성들을 기술하고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둘 중 어떤 이론도 다른 이론보다 더 낫다거나 더 실재적이라고 할 수 없다. 빛이 파동/입자 이중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파동/입자이론은 모두 유효한 이론이 된다.22)

2. ‘모형 의존적 실재론’에 대한 평가

<위대한 설계>는 출판된 이후 여러 나라에서 번역되고 매스컴의 조명을 받았다. 하지만 저자들의 높은 학문적 지명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내용을 학술적으로 진지하게 다룬 논문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이것은 이 책이 전문가 보다는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쓴 것에 가까워서 전문서로 보기에는 깊이와 엄밀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또 “철학은 죽었다”는 과격한 주장과 함께, 자연법칙과 실재(reality)의 본성, 우주의 기원 같은 철학적인 질문들에 대해 철학보다는 과학이 더 잘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철학자들의 역할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과학철학자 파예(Jan Faye)는 이 책에 대해 반응하면서 과학과 형이상학은 서로 다른 영역이고, 과학자와 철학자는 하는 일과 전문성이 달라 위의 철학적 질문들이 과학에 의해서는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저자들을 비판하고 있다.23) 그리고 호킹과 믈로디노프가 과학철학, 특히 물리학의 철학 분야안에서 논리 실증주의의 전성기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잘 알지 못하고 있으며, 오늘날의 물리학 분야에 포함되어 있는 철학적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24)

그리고 파예는 ‘모형 의존적 실재론’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그들의 책에서 호킹과 믈로디노프는 그들이 ‘모형 의존적 실재론’이라고 부르는 입장을 주장한다. 이것은 실재론도 반실재론도 아니다. 이것은 이 입장이, 속성들이 유한하고 또 그것들을 지각하는 관찰자로부터 독립해 있는 그런 객관적 세계의 존재를 가정하고 있지 않다는 이유에서 실재론이 아니다. 그리고 과학을 관찰될 수 있는 것으로 한정하려고 시도한다는 의미에서 반실재론도 아니다. 실제로 물리학은 직접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것들을 넘어서서 나아가고 있다. 그들도(호킹과 믈로디노프) 말했듯이 양자역학에 따르면 한 입자는 관찰자에 의해 양적으로 측정되었을 때 오직 위치(position) 또는 운동량(momentum)만을 갖기 때문에 실재론은 옹호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닐스 보어의 상보성 관점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보어는 실체적 실재론자(entity realist)이면서 동시에 이론적 반실재론자(theory antirealist)이다”25)

“호킹과 믈로디노프 이전에도 몇몇 과학철학자들은 이들이 견지하고 있는 “서로 다른 이론들이 상이한 개념틀(conceptual frameworks)을 이용하여 동일한 현상을 성공적으로 기술할 수 있다”는 주장과 유사한 형태의 이론적 다원주의를 주장해왔다. 가장 두드러진 예가 로날드 기어리(Ronald Giere)일 것이다. .... 호킹과 믈로디노프가 이론과 모델에 관해 쓴 것과 이것들이 어떻게 실재를 표상할 수 있는가는 과학철학자들에게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내용이다”26)

이런 평가를 감안한다면 학계는 ‘모형 의존적 실재론’이 제안수준의 개념이고, 또 이 책이 담고 있는 철학적 주장도 기존의 과학철학 분야에서 이루어진 연구들과 비교해서 크게 새로울 것이 없는 내용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모형 의존적 실재론’이 담고 있는 주장을 기존의 과학철학 분야에서 이루어진 논의들을 기초로 살펴 보면 다음과 같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이것은 일종의 자연주의(naturalism) 철학의 관점을 담고 있다. 자연주의는 종종 “철학은 과학과 연속되어 있어야 한다(philosophy should be continuous with science)”는 말로 정리된다.27) 즉, “철학은 철학적 물음에 답하는데 도움을 받기 위해 과학의 결과물들을 이용할 수 있으며, 과학철학 안에서 까지도 이렇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28)

자연주의는 대체로 콰인(W.V.Quine)의 논문 ‘자연화된 인식론(Epistemology Naturalized)’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29) 콰인은 이 논문에서 첫째, 철학자들 자신이 과학적 지식의 ‘토대’를 제시해야 한다는 생각을 공격했고, 둘째, 인식론적 물음이 심리학의 물음과 밀접하게 묶여 있어서 인식론은 심리학으로 대체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30) 즉, 과학을 철학적 물음의 원천이자 대답으로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극단적인 형태의 자연주의로서 자연주의자들 모두가 이런 생각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의 자연주의자들은 대체로 과학자들이 제기하는 물음과 철학자들이 제기하는 물음 사이에는 구별이 있으며, 철학적 물음에 대한 대답을 얻는데 과학이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학이 철학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31)

고드프리스미스는 자연주의 과학철학에서 다루는 중요한 주제가 첫째, 인간이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해 어떤 방법으로 지식을 얻는가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 둘째, 과학혁명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과학적 연구를 세계에 대한 다른 종류의 탐구와 다른 것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라고 했다.32) 실제로 자연주의 철학이 영향을 많이 미친 분야는 심리학과 신경생물학을 기초로 한 심리철학 분야다. 인지과학 분야에서 새롭게 밝혀진 지식들은 철학적 인식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위대한 설계>에서 저자들이 보인 입장은 콰인이 “자연화된 인식론”에서 주장한 것과 유사한 극단적인 형태의 자연주의로 생각된다. 이들은 철학은 죽었다고 선언하면서 철학, 철학자의 고유한 영역을 인정하지 않고 철학적 물음에 대해 물리학 등 과학 분야가 충분히 대답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33)

자연과학 분야에서 연구된 성과들이 철학적 성찰에 적극적으로 활용되어야 하고 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뇌과학, 신경생물학의 발전은 철학적 인식론에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철학적 문제가 과학적 연구에 의해 해결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생각인 것 같다.

둘째, 파예의 평가대로 ‘모형 의존적 실재론’에 포함된 ‘모형’개념이 중심이 되는 이론적 다원주의는 크게 새로울 것이 없는 주장으로 보인다. 과학이론과 ‘모형’의 관계는 이미 과학철학 분야에서 이전부터 활발하게 토론이 진행되어 온 주제다.

20세기 초반 논리실증주의자(논리경험주의자)들은 수학적, 논리적 도구들을 사용하여 과학이론을 언어적, 논리적 관점에서 분석하는데 치중했다. 그러나 논리경험주의의 기반이 되었던 언어관의 붕괴, 귀납의 문제, 과학적 실재론의 압력, 전체론적 시험이론(뒤엠-콰인 논제) 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1970년대쯤에는 논리경험주의가 퇴조하게 된다.34) 그리고 토마스 쿤 등에 의해 과학사 연구가 촉진되고, 과학사회학, 과학기술학 등 분야가 발전하면서 그 동안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연구에만 몰두하여 실제 현장과 멀어져 있던 과학철학도 실험실 등 실제로 과학연구가 이루어지는 현장에서의 연구방법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모형’에 대한 과학철학적 연구는 이런 관심의 방향 전환과 관련이 있다. 이론-관찰 이분법을 바탕으로 과학이론을 언어적 진술들로 보고 이를 논리적으로 분석하고자 했던 논리경험주의자들의 관점을 구문론적 관점이라고 한다.35) 이들은 보편진술과 관찰진술을 구분하고 이 두 진술을 연결시키기 위한 대응규칙을 정의하는 것을 임무로 생각했다.36) 반면 이런 구문론적 관점을 비판하면서 과학이론을 의미론적 관점에서 바라보려는 연구자들이 나타났다. 의미론적 관점을 옹호하는 연구자들은 이론-관찰의 이분법 자체를 거부하고 언어적으로 정의된 대응규칙이 아니라 수학적 또는 비수학적 ‘모형’이 이론과 세계를 연결시킨다고 생각했다.37) 의미론적 관점에서 과학이론은 이론을 세계 속의 특정 사례로 해석한 모형들의 집합이며, 모형은 현상을 기술하는 표상 체계가 된다.38)

모형에 대해 의미론적 관점에서 연구한 과학철학자로는 수피즈(P. Suppes), 반프라센(van Fraassen), 기어리(R. Giere) 등이 있다. 호킹과 믈로디노프의 <위대한 설계>에서 사용한 모형 개념은 이들의 모형 이론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모형을 지도에 비유하여 설명한 것은 기어리의 아이디어를 가져다 쓴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는 반 프라센도 지도의 예를 들면서 과학활동에서 모형들이 연구자의 관점에 따라서 다양하게 사용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기어리는 자신의 논문과 저서에서 지도와 지도가 그리고 있는 실제 지역의 관계가 과학에서의 이론적 모형들과 그것이 표상하는 세계의 관계와 같다고 이미 주장한 바 있다.39)

이상의 평가를 종합해 볼 때 ‘모형 의존적 실재론’은 철학적으로 잘 다듬어진 완성된 형태라기 보다는 단지 현대 물리학의 성과를 통해 ‘생명’, ‘우주’, ‘만물’에 대한 형이상학적 질문에 답변하는 과정에서 고안한 제안 수준의 개념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 같다.

그러므로 호킹과 믈로디노프가 제안한 ‘모형 의존적 실재론’을 동서양 의학 이론을 아우르는 철학적 관점으로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철학적으로 더 해명해야 할 부분이 많이 있으며, 수정, 보완해야 할 부분도 많아 보인다. 특히 호킹과 믈로디노프가 극단적인 자연주의적 관점을 취하고 있는 것은 만일 우리가 ‘모형 의존적 실재론’을 받아들인다고 할 때 충분히 고려하고 경계해야 할 사항인 것 같고, 또 물리학자로서 이들이 모형을 거론하면서 수학적 모형만을 말하고 있는 것도 의학 이론 연구의 현실에 잘 맞지 않는다. 의학 이론 연구에서는 수학적 모델 보다는 비수학적 모델이 더 많이 사용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모형 의존적 실재론’을 한의학 이론 연구의 철학적 기초로 삼는 것은 현 시점에서는 어려울 것으로 판단된다.

3. 한의학 이론 연구의 관점에서 ‘모형 의존적 실재론’에서 찾을 수 있는 긍정적인 측면들

‘모형 의존적 실재론’ 그 자체는 완성된 형태의 세련된 주장이라고 볼 수 없어 이것을 한의학 이론 연구를 위한 철학적 입장으로 삼기는 어렵다. 하지만 ‘모형 의존적 실재론’ 주장에 담겨 있는 함의들 중에는 앞으로의 한의학 이론 연구를 위해 취할 점도 있는 것 같다. 즉, ‘모형’ 개념과 이론적 다원주의다.

1) ‘모형’개념

과학이론을 언어적 진술로 간주하고 이를 논리적으로 분석하는데 주력했던 구문론적 관점은 여러 가지 난관에 봉착했다. 이론과 관찰을 날카롭게 구분하는 이분법은 그 자체가 다른 문제들을 낳았고, 이론적 진술과 관찰적 진술, 그리고 이들 진술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이론적 용어와 관찰적 용어 사이를 연결하는 대응규칙 또한 한계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구문론적 관점에서의 과학이론이 실제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과학 활동과 동떨어져 있다는 비판이다.40)

의미론적 관점에서 과학이론을 연구한 철학자들은 이미 과학현장에서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었던 ‘모형’들에 주목했다. 그리고 이들은 언어적 진술이 아니라 수학적 형태 혹은 비수학적 형태의 모형이 이론과 실제 세계를 연결시킨다고 주장했다.41)

모형에 대한 과학철학자들의 연구를 소개하는 것은 이 논문의 목표가 아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과학이론과 모형의 관계에 대해 가장 뛰어난 연구자로 평가 받고 있는 기어리의 모형 개념을 중심으로 간단하게 모형 연구를 소개하려고 한다.

논의를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김진영이 기어리의 과학이론과 모형에 관한 견해를 정리해 놓은 내용을 기초로 해서 기어리의 모형 개념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기로 한다.

(1) 과학이론은 모형들과 그 모형에 대한 언어적 진술들의 집합이다.

(2) 모형은 세계 속의 특정 체계를 표상하기 위해 사용되는 비수학적인 체계이다.

(3) 과학자는 각자의 목적에 따라 세계의 특정 현상에 대한 표적체계를 설정한 후 그 체계를 표상하는 모형을 구성한다.

(4) 과학자는 표상적 모형(representational models)을 자료 모형(models of data)과 비교함으로써 그 모형이 세계를 성공적으로 표상했는지 판단한다.

(5) 과학 활동에서 흔히 사용되는 실험 및 측정 장치에 대한 모형이나 각종 해석 이론들은 위계적으로 정렬된다.42)

첫째, 과학이론을 단순한 모형들의 집합으로 본 수피즈와 반프라센과 달리 기어리는 과학이론이 모형과 이론적 가설, 이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고 보았다.43) 즉, 기어리는 스케일 모형들과 이론적 모형들을 모두 포함하는 모형군(family of models)과 함께, 실제 세계 속의 어떤 것이 모형군의 어떤 모형과 들어맞는다고 말하는 이론적 가설들의 집합까지 과학이론에 포함시키고 있다.44) 이 중 이론적 가설은 언어적 진술로 이루어진 것으로 이론적 가설에 대해서는 참과 거짓을 판단할 수 있다. 모형은 세계의 일부 측면을 표상(representation)한 것으로 모형 그 자체에 대해서는 참과 거짓을 판단할 수 없지만 모형과 그것이 표상하는 세계와의 관계에 대한 언어적 진술인 이론적 가설에 대해서는 참과 거짓을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형이 현상과 어떤 측면(respects)에서 높은 정도(degree)로 유사하다면 그 모형에 대한 이론적 가설은 참이 되고, 그 반대 경우는 거짓이 된다.45) 이론적 가설이 참이라는 것은 모형이 세계를 성공적으로 표상했다는 것을 의미한다.46) 이처럼 모형과 그것이 표상하는 실제세계 사이의 유사성(similarity)이 판단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 일부 철학자들은 유사성 개념이 너무 모호하다는 비판을 제기하기도 했다. 기어리는 이에 대해 인지과학에서 축적된 증거, 심지어 신경과학에서 까지도 지각이 어떤 유사성 메트릭(similarity metric)의 기초 위에서 작동한다고 연구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이런 비판들에 대응하였다.47)

둘째, 모형은 수학적일 수도 비수학적일 수도 있다. 수피즈는 수학적 모형만을 인정했지만 기어리는 비수학적 모형이 과학 현장에서 훨씬 더 많이 사용된다고 주장한다. 특히 물리학 같은 분야와 달리 의학, 생물학 분야에서는 대부분 비수학적 모형을 사용한 다.48) 예를 들어 1953년 왓슨(Jim Watson)과 크릭(Francis Crick)이 네이처(Nature)에 발표한 ‘핵산의 분자구조: 디옥시리보핵산의 구조(Molecular structure of nucleic acids: A Structure for Deoxyribose Nucleic Acid)’라는 논문에는 DNA 이중나선 구조에 대한 도식화된 그림이 사용되었고,49) 1970년 크릭이 네이처에 발표한 ‘분자생물학의 센트럴 도그마(Central Dogma of Molecular Biology)’라는 논문에서도 유전정보가 DNA로부터 RNA로 전달되어 단백질이 합성되는 과정이 간단한 그림 도식으로 제시하고 있다.50) 이에 반해 호킹과 믈로디노프는 ‘모형 의존적 실재론’에서의 모형이 주로 수학적 모형을 의미한다고 밝히고 있다.51)

셋째, 기어리는 이론적 모형을 지도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기어리가 지도 은유를 통해 설명한 모형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52)

(1) 지도는 대상 공간과 특정한 구조적 유사성을 드러낸다. 하지만 지도와 그것이 나타내는(represent) 것은 같지 않다. 모형도 세계 속의 특정 구조나 존재자를 표상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다. 모형은 표상하려는 대상과 구조적 유사성을 가지고 표현된다. 하지만 모형은 대상 그 자체와 같지 않다.

(2) 지도를 만들고 읽는 데 필요한 일단의 사회적 규약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잘 이해하고 있다. 모형도 마찬가지다.

(3) 대상 공간의 모든 특징을 빠짐없이 정확하게 나타내는 “완벽한 지도”는 없다. 지도는 선택된 특징들만 나타내고 다른 특징들은 무시한다는 점에서 완벽하지 않고 불완전한 것이다. 모형도 그것을 구성하는 과학자의 목적에 따라 어떤 특징은 선택되어 부각되고 또 불필요한 어떤 특징은 생략되어서 만들어진다. 이처럼 과학자는 자신의 목적에 맞는 다양한 모형을 만들어 세계를 표상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형은 모두 부분적인 것이다.

이처럼 기어리는 지도 은유를 통해 과학자들이 연구 현장에서 표적 체계를 표상할 수 있는 다양한 모형을 개발하여 사용하고 있으며, 이 모형은 표적 체계로서의 현상과 유사성(similarity)의 관계를 갖는 것이고, 또 과학자들이 만들어 사용하는 모형들은 모두 부분적인 것으로 대상 전체를 하나의 모형으로 표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표적 체계에 대한 다양한 모형의 사용을 허용함으로써 일종의 다원주의적 관점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넷째, 기어리는 다양한 모형들 사이의 위계(hierarchy)를 인정하고 있다. 즉, 추상적인 이론(model of theory)이 직접적으로 현상(phenomena)과 연결되지는 않으며 그 사이를 실험 모형(model of experiment), 자료 모형(model of data), 실험장치 모형(model of experimental design) 등 여러 모형이 매개하고 있으며, 이 모형들 사이에는 위계성이 있다고 본 것이다.53) 이것은 실제 실험실에서는 다양한 실험과 측정, 자료 해석 등이 수행되고 있으며 이 과정에 여러 종류의 모형들이 관여하고 있음을 반영한 것이다.

다섯 째, 기어리는 과학 연구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통상적인 에피소드는 실제 세계, 모형, 예측, 자료의 네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고 설명한다. 이 요소들 사이의 관계를 그림으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Fig. 1).54)

Fig. 1.The Four Elements of a Scientific Episode

(1) 실제 세계(real world)와 모형(model) 사이의 관계는 모형이 실제 세계에 들어 맞는다고 주장하는 이론적 가설에 의해 표현된다.55)

(2) 모형과 예측(prediction)은 실험 설계에 비추어 추론이나 계산에 의해 연관된다.56)

(3) 실제 세계와 자료(data)는 실험이나 관찰을 포함하는 물리적 상호작용에 의해 연관된다.57)

(4) 실험장치를 포함하여 실제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 실험장치에 대한 지식을 포함하는 세계의 모형과 구조적으로 유사하면 자료와 예측은 일치해야 한다.58)

(5) 모형과 실제 세계가 들어맞는다는 가설에 대한 평가는 예측과 자료가 일치하는가 여부에 결정적으로 좌우된다.59)

2) 한의학 이론 연구와 ‘모형’, ‘이론적 다원주의’

현재 한의학 이론의 입지는 한의학 연구와 임상 분야 모두에서 좁아져 있고, 이로 인해 한의학 이론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 또한 지지부진한 것이 사실이다. 현재 한의학 실험실 연구는 대부분 보완대체의학 연구방법론에 영향을 받아 한의학 치료수단의 안전성과 유효성을 입증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 연구방법론은 1930년대 중의 과학화론자들이 일찍이 주장했던 비과학적인 전통의학이론은 폐하고 과학적 방법으로 임상에서의 효과를 연구한다는 소위, ‘廢醫存藥’ 방식 과학화의 현대 버전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연구에서 한의학 이론이 차지할 수 있는 공간은 거의 없어 보인다. 그리고 임상 분야에서도 서양의학의 영향이 확대되면서 한의학 이론이 활용되는 빈도는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한의학 이론 연구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데 쉽지 않은 것 같다.

지난 연말 사이언스 잡지의 부록으로 발간된 전통의학 특집은 통합의학의 틀 속에서 중의학을 위시한 전통의학의 미래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하다. 이 특집은 동서양 의학 이론을 연결하는 가교로서 시스템 생물학, 네트워크 방법을 활용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East, West”에서 호킹과 믈로디노프의 ‘모형의존적 실재론’을 끌어들인 것도 전통의학과 서양의학의 통합에 대한 저자들의 고민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모형 의존적 실재론’에 포함된 ‘모형’개념과 ‘이론적 다원주의’는 한의학 이론 연구에 어떤 시사점을 던져 줄 수 있을까?

첫째는, 한의학 이론의 입지를 넓혀 주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 동안 한의학 이론을 바라보았던 철학적 시선은 합리주의와 상대주의 두 극단이었다고 생각된다. 일찍이 한의학의 고유한 본질을 지키려고 했던 한의사, 한의학 연구자들은 상대주의의 틀 속에서 한의학의 자리를 찾았다. 이들은 토마스 쿤의 비정합성(incommensurability)60) 개념을 가져와 서양의학과 한의학 체계사이에도 비정합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쿤의 비정합성 개념은 패러다임이 다르면 판단기준도 다르고, 개념의 의미도 달라지며, 심지어 관측된 현상 자체도 바뀐다는 세 가지 차원에서의 주장을 담고 있다.61) 그러므로 쿤의 비정합성 개념을 한의학과 서양의학의 관계에 적용하면, 한의학의 이론과 개념들은 모두 한의학 체계에 의존해서만 의미를 갖는 것이므로 이것을 한의학과 완전히 다른 패러다임에 속하는 서양의학 체계의 이론과 개념으로 번역할 수도, 비교할 수도 또 서로 평가할 수도 없는 것이 된다. 상대주의는 그동안 한의학을 서양의학의 관점에서 재단하는 것을 막아 한의학을 서양의학으로부터 지킬 수 있는 좋은 방편이 되어 왔다. 한의학과 서양의학 영역을 날카롭게 구분하는 지금의 이원화된 의료제도는 모두 상대주의 철학에 기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서양의학 진영에서는 합리주의 관점에 기반한 일원주의 관점을 가지고 있다. 합리주의는 진리는 체계를 초월하여 존재하며 한의학과 서양의학도 충분히 체계를 뛰어 넘어 번역, 비교, 평가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참, 거짓을 가릴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런 입장을 가진 사람들은 지구상의 유일한 과학적 의학은 서양의학이기 때문에 한의학이 과학화되기 위해서는 서양의학과 동일한 과학적 잣대를 한의학이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또 이들은 음양, 오행 같은 비과학적인 사상에 기반을 둔 한의학 이론을 비과학적인 것으로 보고 배척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상대주의와 합리주의적 관점은 한의학 연구와 임상 현장에서 수시로 이루어지는 한의학과 서양의학 사이의 융합을 설명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런 관점 자체가 지나치게 이데올로기화 되어 동서의학 사이를 대결적인 관계로 만들고 있다는 문제점이 있다. 그러므로 현장을 있는 그대로 잘 설명할 수 있는, 그리고 미래지향적인 새로운 대안적 관점의 발견이 절실하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모형 의존적 실재론’이 담고 있는 이론적 다원주의는 현재의 상대주의와 합리주의, 두 극단을 피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제3의 철학적 입장이 될 수 있다. <위대한 설계>라는 책에는 ‘모형 의존적 실재론’이 내포하고 있는 철학적 함의들이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모형 의존적 실재론’에 담긴 함의들을 통해 유추해 본다면 존재론적 관점에서는 실재론, 인식론적 관점에서는 다원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모형 의존적 실재론’과 기어리의 모형 이론에 포함되어 있는 이론적 다원주의는 우리가 충분히 음미해 볼만 하다. 기어리 등의 모형 연구에 따르면 우리는 단일한 모형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양한 모형을 통해 인체에 접근할 수 있다. 이것은 생의학적 연구방법만 이 인체에 대한 유일한 과학적 연구방법이고, 한의학 이론은 비과학적인 것이어서 인정할 수 없다고 낙인찍어 온 기존의 일원주의적 관점에 대항할 수 있는 관점이다. 인체는 다양한 모형에 의해 연구될 수 있다. 그리고 한의학 이론도 인체에 대한 일종의 모형으로서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장하석은 다원주의를 한 과학 분야에서도 여러 가지의 실천체계를 발달시키고 유지하는 것이 좋다는 주장이라고 정의한다.62) 그리고 다원주의는 상대주의와 전혀 다른 입장으로서 다원주의는 한가지만 하지 말자는 것이지 상대주의처럼 아무거나 하자는 것이 아니며, 몇 가지 체계를 동시에 유지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관용의 이점과 상호작용의 이점을 추구하는 것이지 모든 체계를 다 허용하자는 입장이 아니라고 말한다.63) 실제로 다원주의에서 얻을 수 있는 상호작용의 이득으로서 체계 간의 융합, 상대 체계에서 서로 좋은 것이 있으면 빌려다 쓰는 채택, 그리고 선의의 경쟁 같은 것들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64) 이처럼 다원주의는 한의학과 서양의학의 미래 관계를 설정하는데 좋은 철학적 입장이 될 수 있으며, 한의학 이론의 입지를 넓히는 데도 도움을 줄 수 있어 충분히 음미해 볼 가치가 있는 관점이다.

둘째, ‘모형 의존적 실재론’의 중심이 되는 모형 개념은 그 동안 기어리 등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연구되어 왔다. 따라서 이러한 모형에 대한 철학적 연구들을 한의학 이론 연구에 적용할 경우 한의학 이론을 과학화하는데도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East, West”에서 ‘모형 의존적 실재론’을 끌어들여 한의학 이론을 모형의 일종으로 본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한의학의 장상, 경락, 기혈, 팔강, 체질 등의 이론은 분명히 좋은 모형으로 발전할 잠재성을 갖추고 있다. 다만 이 이론들을 연구와 임상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기 위해서는 더 정교하게 모델링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최근 과학철학 분야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모형에 관한 연구들을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 “East, West”는 서양의학에서는 환원주의적 접근을 주로 하여 환원론적, 분석적 ‘모형’이 지배했고, 한의학에서는 현상학적 접근을 주로 하고 전일론적(holistic)으로 세계를 이해했으며, 이로 인해 현상학적, 기술적(descriptive), 시스템 기반(systems-based)의 관점이 지배하게 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65) 한의학 이론이 현상 중심이고, 전일론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특성이다. 이것은 한의학의 이론 모형이 미래에 갖게 될 경쟁력으로서 이를 잘 발전시킬 경우 서양의학과 겹치지 않고 상호 보완할 수 있는 중요한 자원이 될 것이다.

또 기어리는 모형은 예측(prediction)이 가능해야 하고 또 이것은 실제 세계(real world)에 대한 관찰 자료(data)와 일치해야 모형으로서 가치가 있다고 했다.66) 그리고 좋은 모형과 관련하여 맥멀른(Ernan McMullin)은 산출력(fertility)을 말하기도 했다. 즉, 모형(이론)은 언어에서 은유(metaphor)가 기능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기능하는데, 좋은 은유가 자신 만의 정교함을 갖추고 그 동안 우리가 보지 못했던 표적 영역(target domain)의 새로운 측면들로 우리들을 이끌어 가듯이 좋은 모형도 이런 은유적 힘(metaphoric power)를 갖추고 있어 기존 이론에게 가능한 수정 내지는 확장의 방식을 제시해 줄 수 있다고 했다.67) 좋은 모형이 갖추어야 할 이런 덕목들은 우리가 한의학 이론을 모델링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사항이라고 생각된다.

 

결 론

2014년 12월, ‘사이언스’의 특별부록으로 발간된 전통의학 특집의 한 논문에서는 스티븐 호킹과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가 제안한 ‘모형 의존적 실재론’을 끌어들여 동, 서양의 의학 이론을 다루는 철학적 관점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논문에서는 ‘모형 의존적 실재론’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았고, 한의학 이론 연구의 관점에서 과연 이것이 “East, West”에서처럼 서양의학과 한의학 이론을 아우르는 철학적 관점으로서 취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또 한의학 이론 연구의 미래를 위해 참고할 만한 시사점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그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모형 의존적 실재론’은 “그림이나 이론에 의존하지 않는 실재 개념은 없다”는 것을 핵심 주장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과학이론을 일종의 모형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이 관점은 우리 뇌가 만든 ‘모형’에 의존해서만 실재에 대한 인식이 가능하다는 근래 인지과학에서의 연구 성과에 기초하고 있다. 또 ‘모형 의존적 실재론’은 우주의 모든 면을 기술할 수 있는 단일한 수학적 모형이나 이론은 없으며, 다양한 이론들의 그물망에 의해 기술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일종의 다원주의적 관점을 포함하고 있다.

둘째, 그러나 ‘모형 의존적 실재론’은 제안 수준의 개념이며, 이들이 사용한 ‘모형’ 개념 또한 기어리 등 기존의 과학철학계의 ‘모형’연구 성과와 비교하여 크게 다른 것이 없는 것으로 평가된다. 오히려 이들의 주장 속에 담긴 극단적 자연주의는 문제가 있어 보이고, 이들이 사용한 ‘모형’ 개념 또한 수학적 모형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비수학적 모형을 주로 사용하는 의학 이론 연구 현실에 잘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현 시점에서 ‘모형 의존적 실재론’을 한의학 이론 연구의 철학적 기초로 삼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형 의존적 실재론’이 담고 있는 함의들은 충분히 음미할 가치가 있으며, 한의학 이론 연구에도 시사하는 점이 있다. ‘모형 의존적 실재론’에 포함되어 있는 이론적 다원주의는 기존에 동서의학계를 지배해 왔고 동서의학의 관계를 대결 구도로 만들어 왔던 합리주의, 상대주의적 관점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 관점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다양한 모형의 존재를 용인한다는 점에서 한의학 이론의 입지도 지금 보다 넓어질 수 있다.

넷째, ‘모형 의존적 실재론’의 중심이 되는 모형 개념은 한의학 이론에 적용할 경우 한의학 이론의 과학화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기어리의 모형에 대한 철학적 연구는 한의학 이론을 모형의 관점에서 정교하게 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어 이들의 연구를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모형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한의학의 장상, 경락, 기혈, 팔강, 체질 등의 이론은 좋은 모형으로 발전할 잠재성을 갖추고 있으며, 한의학 이론은 서양의학과는 구별되는 현상 중심, 전일론적 관점을 갖추고 있어 경쟁력도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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