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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도와 고사도 사이, 음중팔선도의 표현 양상 (Modes of Expression in the Paintings of the Eight Drunken Immortals in Poetry Paintings and Narrative Paintings)

  • 송희경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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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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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31-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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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음중팔선도는 당나라 시인 두보가 유달리 술을 좋아한 여덟 명의 기이한 행동을 읊은 <음중팔선가>를 도해한 그림이다. 유달리 술을 사랑한 음중팔선은 동아시아의 지식인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고, 이들의 일화는 그림으로 표현되었다. 중국에서는 이공린 <음중팔선도>의 영향으로 두루마리에 백묘법으로 그린 음중팔선도가 유행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음중팔선도는 술을 좋아하는 취객의 엉뚱한 행적과 그들이 지닌 남다른 풍류를 그린 시각물로, 혹은 영원한 우정과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축수물(祝壽物)로 폭넓게 감상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김명국의 음중팔선도는 세밀한 담채기법의 8폭 그림이었고, 정조가 어람한 음중팔선도는 8폭으로 된 채색의 대경산수인물화였다. 또한 최근 이한철의 ${\ll}$음중팔선도${\gg}$ 8폭 병풍이 소개되어 김홍도, 김양기로 이어지는 화원들의 고사인물화 제작 양상도 상상해 볼 수 있었다. 특히 음중팔선 중에서 가장 인기가 높았던 이백의 고사는 음중팔선도와 별도로 많이 그려졌고, 심지어 19세기 이후에는 고사도 병풍의 한 폭을 차지하게 되었다. 화보와 초본이 활용되면서 민간에서 비슷한 이백 고사도가 대량 생산된 것이다. 이렇듯 음중팔선도는 세상과 완전히 단절하지 않은 애주가로, 솔직하게 행동하는 풍류인으로, 술로 맺어진 영원한 우정과 무병장수를 염원하는 축수물의 주인공으로 시각화되었다. 이것이 두보의 시의도이자 팔선의 고사도인 음중팔선도가 지닌 다층적 함의라고 할 수 있다.

영화에 나타나는 클래식음악의 중의(重義)적 특성 - 브람스의 교향곡 제1번 제1악장을 중심으로 - (The Ambiguous Characteristics of Classical Music in Films - Focused on The First Movement of Brahms' Symphony No.1 -)

  • 이상윤
    • 한국엔터테인먼트산업학회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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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4권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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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19-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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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본 연구는 영화 "테트로"와 "파괴자들"에 영화음악으로 쓰인 브람스의 교향곡 제1번 제1악장의 절대음악적 의미를 고찰하고 이 두 영화에 쓰인 이 음악의 의미를 해석함으로서 클래식음악이 중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특성을 탐구하는 데 목적이 있다. 특히 영화음악이 표제 음악이 아닌 새로운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지 고찰하였다. 브람스의 교향곡 제1번 제1악장은 소나타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낭만주의 시대의 반음계적 어법의 특성을 지닌다. "테트로"에서는 이 음악과 등장인물의 가치적 연관성에 관한 역설, 이 음악의 작곡과정과 등장인물 스토리에 나타난 역사성이 중요하게 나타났다. 반면 "파괴자들"에서는 이 음악의 반음계적 어법이 영화의 인물과 사건의 분위기의 감정적 의미를 표현하는 표제 음악의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테트로"의 종반부에 이 음악이 쓰인 장면은 여기에 등장하는 두 인물 중 어느 인물의 관점으로 이 음악을 해석하는지에 따라서, 하나의 음악을 각기 다른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중의적 특성 나타낸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브람스가 이 음악을 완성하기 위해 21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보낸 점과 영화의 주인공인 테트로가 연극 시나리오를 탈고하고 페스티벌에 출품하기까지 10여 년이라는 오랜 시간을 보낸 점이 역사성의 관점에서 서로 일치하는 상호작용의 의미를 보여준다. 이는 절대음악 또는 표제 음악의 관점이 아닌 새로운 관점으로 영화음악을 이해할 수 있는 의미를 부여한다. 또한 이러한 음악적 설정은 이 음악을 영화의 필수적인 요소로 인식하게 하고 대체 불가능한 청각적 주제로 인식하게 하였다. 클래식음악이 영화와 같은 다른 예술과 만났을 때, 이러한 음악의 중의적 특성은 클래식음악을 새롭게 인식하는데 많은 영향을 줄 것이다.

장르 드라마에서의 표정연기연구 - 드라마 '보이스2'를 중심으로 - (A Study on Facial Expression Acting in Genre Drama - with Focus on K-Drama Voice2 -)

  • 오윤홍
    • 한국엔터테인먼트산업학회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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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3권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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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13-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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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영상연기자들에게 표정연기는 '억지표정'이나 '오버액팅'이 되기 쉽고, 또 지나치게 절제를 강조하면 감정이 부족한 '밋밋한 연기'가 된다. 이러한 표정 연기 방법에 관한 문제제기를 통해서 상업적 색채가 짙은 장르 드라마에서의 배우들의 표정연기를 분석하였다. 결론적으로, 장르 드라마의 배우들의 표정연기 방법은 일종의 전형(典型)적인 방법으로 수행되고 있었다. 이는 영상연기의 시각적 관습에서 미적 기준이 배우들의 표정연기에서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르 드라마에서 인물의 감정은 주로 클로즈업 숏에서 발현된다. 클로즈업 숏 안에서 '확대된 얼굴'중 가장 중요한 표현 매체는 '눈동자'이며, 눈과 눈 주변의 근육 움직임을 통한 감정 표현이 주가 된다. 그 뒤로 중요한 표현 매체는 '입'이다. 입을 벌리고 다물면서 그 정도의 차이에 따라서 다양한 감정이 '눈'의 표현과 함께 전달되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얼굴 근육의 긴장은 감정표현에 크게 저해되며, 얼굴 근육의 움직임을 최소화하여 얼굴 표면의 지나친 주름을 만드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얼굴 표정은 근육 움직임으로 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결국, 근육의 움직임은 감정으로 인해서 이루어지는 결과이다. 표정을 일으키는 감정이 먼저 형성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배우의 '정서적 기억', '이완', '집중'등을 통해 '자기화'하는 스타니슬라브스키의 심리적 연기술이 필연적이다. 또한, 표정이 발현되는 클로즈업 숏이 요구하는 시각적으로 절제된 연기술이 필요하다. 그 외에, 표정연기는 내러티브 전개에 중요한 지점을 제공하는 반응 연기(reaction acting)이며, 주연과 조연이라는 인물의 역할에 따라서 배우에게 요구되는 표정연기의 방법과 숏의 사이즈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경주 남산 삼릉계 약사여래좌상 반출 경위에 대한 고찰 (A Study of the Removal of the Seated Medicine Buddha from the Samneung Valley at Namsan, Gyeongju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 아라키 준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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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3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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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0-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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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경주 남산의 불적에 대한 본격적 조사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경주 남산 불적조사에 대한 연구는 오늘날 경주 남산 불적을 심도 있게 고찰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선행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경주 남산의 불적조사는 192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한일병합을 전후한 초기 조사는 예비 조사 정도로 간주되어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기초 조사로 후속 조사의 발판이 되었고, 1910년대에 남산이 불적의 보고로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특히 1915년 경주에서 반출되어 경성 경복궁에서 개최된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에 출품된 삼릉계 약사여래좌상은 관람객의 눈길을 가장 끄는 미술관 중앙홀에 전시되어 세간에 불적으로서의 경주 남산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 약사여래좌상은 남산 불상 중에서 가장 원상태를 잘 유지하고 있고 아름다웠기 때문에 공진회에 출품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그 반출은 한일병합을 전후하여 구상된 석굴암 경성 이전계획과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 진행되었다. 석굴암 경성 이전계획은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중심이 되어 구상된 식민 이데올로기인 '일선동조론'과 '조선정체성론'을 바탕으로 조선왕조의 상징인 경복궁을 해체하고 그 한복판에 과거의 영광을 상징하는 석굴암을 안치시킴으로써 일본 제국에 의한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을 시각적으로 선언하려는 기획이었다. 그러나 그 구상이 무산되자 석굴암 본존불 대신에 경성으로 반출된 것이 다름 아닌 삼릉계 약사여래좌상이었다. 약사여래좌상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는 1911년 세키노 다다시가 실시했으나 그 위치를 세키노에게 알린 것은 모로가 히데오나 고다이라 료조와 같은 경주 거주 일본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들 현지인은 총독부로부터 요청을 받아 공진회에 출품할 만한 불상을 찾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약사여래좌상은 총독부와 세키노 다다시, 그리고 경주 거주 일본인들 사이의 긴밀한 연계 속에서 경성으로 반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경주 남산의 불적이 그 신비의 베일을 벗기는 과정이기도 했다. 요컨대 초기 남산 불적조사는 기초 조사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석굴암 경성 이전계획과 1915년 공진회의 성공적 개최라는 데라우치 총독의 제국주의적 야망과 깊은 관계 속에서 진행되어 순수한 학문적 목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하기 어렵다. 한편 석굴암 경성 이전계획이 좌절되고 경성으로 반출될 가능성이 컸던 미륵곡 석조여래좌상이 현지에서 보존될 수 있었던 것에는 경주 조선인의 저항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본고에서는 자세히 논할 수 없었으나 그들을 단순한 방관자가 아니라 역사를 움직이는 주체로 부각시킬 연구가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