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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재조대장목록고 (A study on the second edition of Koryo Dae-Jang-Mock-Lock)

  • 정필모
    • 한국문헌정보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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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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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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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9
  • This study intends to examine the background and the procedure of the carving of the tablets of the second edition of Dae-Jang-Mock­Lock(재조대장목록). the time and the route of the moving of the tablets. into Haein-sa, and the contents and the system of it. This study is mainly based on the second edition of Dae-Jang-Mock-Lock. But the other closely related materials such as restored first. edition of the Dae- Jang-Mock-Lock, Koryo Sin-Jo-Dae-Jang-Byeol-Lock (고려신조대장교정별록). Kae-Won-Seok-Kyo-Lock (개원석교록). Sok-Kae­Won-Seok-Kyo-Lock (속개원석교록). Jeong-Won-Sin-Jeong-Seok-Kyo­Lock(정원신정석교록), Sok-Jeong-Won-Seok-Kyo-Lock(속정원석교록), Dea-Jung-Sang-Bu-Beob-Bo-Lock(대중상부법보록), and Kyeong-Woo-Sin-Su-Beob-Bo-Lock(경우신수법보록), are also analysed and closely examined. The results of this study can be summarized as follows: 1. The second edition of Tripitaka Koreana(고려대장경) was carved for the purpose of defending the country from Mongolia with the power of Buddhism, after the tablets of the first edition in Buin-sa(부이사) was destroyed by fire. 2. In 1236. Dae-Jang-Do-Gam(대장도감) was established, and the preparation for the recarving of the tablets such as comparison between the content, of the first edition of Tripitalk Koreana, Gal-Bo-Chik-Pan-Dae­Jang-Kyeong and Kitan Dae- Jang-Kyeong, transcription of the original copy and the preparation of the wood, etc. was started. 3. In 1237 after the announcement of Dae-Jang-Gyeong-Gak-Pan-Gun­Sin-Gi-Go-Mun(대장경핵판군신석고문), the carving was started on a full scale. And seven years later (1243), Bun-Sa-Dae-Jang-Do-Gam(분사대장도감) was established in the area of the South to expand and hasten the work. And a large number of the tablets were carved in there. 4. It took 16 years to carve the main text and the supplements of the second edition of Tripitaka Koreana, the main text being carved from 1237 to 1248 and the supplement from 1244 to 1251. 5. It can be supposed that the tablets of the second edition of Tripitaka Koreana, stored in Seon-Won-Sa(선원사), Kang-Wha(강화), for about 140 years, was moved to Ji-Cheon-Sa(지천사), Yong-San(용산), and to Hae-In-Sa(해인사) again, through the west and the south sea and Jang-Gyeong-Po(장경포), Go-Ryeong(고령), in the autumn of the same year. 6. The second edition of Tripitaka Koreana was carved mainly based on the first edition, comparing with Gae-Bo-Chik-Pan-Dae-Jang-Kyeong(개보판대장경) and Kitan Dae-Jang-Kyeong(계단대장경). And the second edition of Dae-Jang-Mock-Lock also compiled mainly based on the first edition with the reference to Kae-Won-Seok-Kyo-Lock and Sok-Jeong-Won-Seok-Kyo-Lock. 7. Comparing with the first edition of Dae-Jang-Mock-Lock, in the second edition 7 items of 9 volumes of Kitan text such as Weol-Deung­Sam-Mae-Gyeong-Ron(월증삼매경론) are added and 3 items of 60 volumes such as Dae-Jong-Ji-Hyeon-Mun-Ron(대종지현문논) are substituted into others from Cheon chest(천함) to Kaeng chest(경함), and 92 items of 601 volumes such as Beob-Won-Ju-Rim-Jeon(법원주임전) are added after Kaeng chest. And 4 items of 50 volumes such as Yuk-Ja-Sin-Ju-Wang-Kyeong(육자신주왕경) are ommitted in the second edition. 8. Comparing with Kae-Won-Seok-Kyo-Lock, Cheon chest to Young chest (영함) of the second edition is compiled according to Ib-Jang-Lock(입장록) of Kae-Won-Seok-Kyo-Lock. But 15 items of 43 vol­umes such as Bul-Seol-Ban-Ju-Sam-Mae-Kyeong(불설반주삼매경) are ;added and 7 items of 35 volumes such as Dae-Bang-Deung-Dae-Jib-Il­Jang-Kyeong(대방등대집일장경) are ommitted. 9. Comparing with Sok-Jeong-Won-Seok-Kyo-Lock, 3 items of the 47 volumes (or 49 volumes) are ommitted and 4 items of 96 volumes are ;added in Caek chest(책함) to Mil chest(밀함) of the second edition. But the items are arranged in the same order. 10. Comparing with Dae- Jung-Sang-Bo-Beob-Bo-Lock, the arrangement of the second edition is entirely different from it. But 170 items of 329 volumes are also included in Doo chest(두함) to Kyeong chest(경함) of the second edition, and 53 items of 125 volumes in Jun chest(존함) to Jeong chest(정함). And 10 items of 108 volumes in the last part of Dae-Jung-Sang-Bo-Beob-Bo-Lock are ommitted and 3 items of 131 volumes such as Beob-Won-Ju-Rim-Jeon(법원주임전) are added in the second edition. 11. Comparing with Kyeong-Woo-Sin-Su-Beob-Bo-Lock, all of the items (21 items of 161 volumes) are included in the second edition without ;any classificatory system. And 22 items of 172 volumes in the Seong­Hyeon-Jib-Jeon(성현집전) part such as Myo-Gak-Bi-Cheon(묘각비전) are ommitted. 12. The last part of the second edition, Joo chest(주함) to Dong chest (동함), includes 14 items of 237 volumes. But these items cannot be found in any other former Buddhist catalog. So it might be supposed as the Kitan texts. 13. Besides including almost all items in Kae-Won-Seok-Kyo-Lock and all items in Sok-Jeong-Won-Seok-Kyo-Lock, Dae-Jung-Sang-Bo­Beob-Bo-Lock, and Kyeong-Woo-Sin-Su-Beob-Bo-Lock, the second edition of Dae-Jang-Mock-Lock includes more items, at least 20 items of about 300 volumes of Kitan Tripitaka and 15 items of 43 volumes of traditional Korean Tripitake that cannot be found any others. Therefore, Tripitaka Koreana can be said as a comprehensive Tripitaka covering all items of Tripitakas translated in Chinese charac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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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주오소경과 명주(하서주) - 그 도시구조를 중심으로 - (9 Provinces and 5 Secondary Capitals, Myeong-ju(Haseo-ju) - Revolve Around Urban Structure -)

  • 야마다 타카후미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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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5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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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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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신라는 문무왕 18년(678) 당나라군이 철수함에 따라 명실공히 한반도를 통일한 뒤, 그 판도를 중국 지방행정구획 제도를 모방하여 아홉 개의 주로 구분하고, 거기에 소경 군 현을 배치한 지방행정 조직을 정비하였다. 이른바 9주5소경(九州五小京)이라 불리는 지방행정제도이다. 주는 현재의 대한민국(이하 한국)의 도(道)에 해당하며, 소경은 광역시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 수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덕왕 16년(757) 겨울 12월조에 의하면 5소경, 117군, 293현에 이른다 통일신라시대의 지방도시인 9주5소경(九州五小京)의 연구는 문헌사학 중심으로 이루어져, 주성(州城)과 소경성(小京城)의 위치와 그 도시구조에 대해서는 지금껏 크게 논의되었던 적이 없어 명확치 않은 점이 많다. 고고학적 도시구조의 복원연구는 박태우의 논고("통일신라시대의 지방도시에 대한 연구" 1987년)와 필자의 논고("新の九州五小京城郭の構造と實態について-統一新による計畵都市の復元硏究-"2009년) 정도이다. 강원도 강릉시는 원래 예(濊)의 고국(古國)으로 고구려의 하서량(河西良)이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선덕왕 8년(639)에 북소경 하서양주(北小京; 河西良州))으로 되었는데, 무열왕 5년(658)에 하서주(河西州)로 소경에서 주로 바뀌었다. 이후 경덕왕 16년(757)에는 명주로 개칭되었고 그 뒤, 고려시대 이후로도 명칭은 여러 가지로 변하였다. 박태우는 나성 흔적이 남은 도시로 분류하여 명주동에 있었던 성지로 비정하고 있는데, 현재는 시가지화로 인하여 확인할 수가 없다고 한다. 또한 관동대학교에서는 강릉시 중심부로부터 서남서 약 3km에 위치하는 명주산성을 주치(州治)로 보는 설을 제시하고 있다. 필자는 일제시대의 측량도에서 볼 수 있는 유존(遺存) 토지구획로 보아 경주시의 신라금경이나 다른 많은 도시와 같이 방격의 가구, 즉 방리(坊里)를 갖춘 도시로 복원하였다. 다음은 그 구조에 대해 서술하였다. 강릉의 시가지는 시내를 남서에서 북동으로 흐르는 남대천의 왼쪽 기슭 평탄지에 위치하고 있다. 부근에 그다지 높은 산은 없으나 시가지의 북측에는 산이 동서로 이어져 있으며, 남대천으로부터의 평지부분 너비는 최대가 1km 정도로 그다지 넓지는 않다. 현재는 강릉시의 중심부로 시가지화가 진행되어 강릉역을 중심으로 한 방사상의 구획정리 등도 이루어져 옛 토지구획이 거의 소멸된 상태이다. 그러나 일제시대의 지형도 등을 보면 시가지 중심부인 옥천동, 임당동, 금학동, 명주동 등의 일대에 한 변 약 190m를 기본으로 하는 방격의 토지구획이 북서-남동에 약 0. 8km, 북동-남서에 약 1. 7km의 범위로 잔존하고 있는 것이 확인 가능하다. 방격의 유존 토지구획은 다른 9주5소경(九州五小京)의 사례를 통해 보면 통일신라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생각된다. 단, 방격 한 변의 길이가 190m로 신라의 금경이나 다른 도시유적에서 볼 수 있는 한 변 160m나 140m의 규격과는 다르다는 점이 앞으로의 검토과제이다. 토지구획의 방위는 지형에 준하여 북서-남동 축에서 북쪽으로부터 약 $37.5^{\circ}$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이는 남대천의 방위와 북측의 산지에 제약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보여 진다. 방격의 유존 토지구획이 잔존하는 범위로부터, 최소로 보더라도 북서-남동 4방${\times}$북동-남서 7방 크기라는 장방형으로 복원하였다. 단, 방격의 유존 토지구획이 퍼지는 정도로 보아, 남서측과 북서측에 각각 1방 씩 늘어난 북서-남동 5방${\times}$북동-남서 8방(북서-남동 약 $950m{\times}$북동-남서 약 1520m)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전체의 형상은 장방형으로, 당의 장안성(長安城)이나 일본의 평성경(平城城)과 같은 중축대로(주작대로)가 상정 가능한 토지구획은 확인되지 않는다. 명주의 도시유적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는 이제껏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도시유적 추정지 내부에 위치하는 조선시대의 강릉읍성이나 관아지의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기와류, 토기류 중에는 통일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갈만한 것이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또한, 관아지에서 검출된 조선시대의 건물지는 모두 정방위가 아닌 크게 기울어진 방위를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강릉에서 볼 수 있는 방격 유존 토지구획이 예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사실을 보여주는 방증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명주성"의 명문 막새기와가 출토된 명주산성의 역할로, 이것이 주치였던 것을 필자는 부정하지 않는다. 한국의 고대도성은 평지성과 산성의 세트로 구성되어 있으며, 통일신라가 되어도 방리제 도성인 금경 주위로 명활산성, 남산산성, 서형산성의 산성군이 계속되어 유지되고 있었다. 구주오소경 이외의 다른 도시에서도 도시유적 부근에 산성이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명주도 평지의 도시와 산성이 세트가 되어 주치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조선후기 관서지방의 공연 시공간과 향유에 관한 연구 (A Study of the Time-Space and Appreciation for the Performance Culture of Gwanseo Region in Late Joseon Period: Focusing on Analysis of Terminology)

  • 송혜진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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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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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87-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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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고는 조선후기 관서지방 공연문화의 시공간과 향유에 관한 연구이다. 관서(關西) 지방은 중국 대륙과 인접한 접경지대로 군사적 요충지이자 대외무역과 상업의 발달로 재화가 풍부한 문화의 중심지였다. 조선후기에는 중국과 조선을 오가던 수많은 사신과 역관, 상인들이 이 지역을 경유하였고, 1~2년 간격으로 관찰사가 교체되었으며, 지역 인재 선발을 위한 도과(道科)과 빈번하게 시행되면서 환영과 전송 의례, 위로, 향연에 따른 공연활동이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와 같은 양상은 여러 문헌자료와 읍지(邑誌), 그림 자료로 전하며, 문학, 음악, 무용, 민속학 분야의 연구를 통해서도 확인되고 있다. 그런데 <관서악부>를 비롯하여 평양, 성천의 자연과 풍류를 노래한 가사문학작품, 연행록 등을 문학작품을 세밀하게 읽다보면, 기존의 연구에서 주목해 온 공연의 종목과 악기편성, 음악기구, 음악인 등 뿐 만 아니라 공연활동의 주체와 시공간, 향유방식에 대한 유용한 정보들이 매우 풍부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를 통해 공연이 '어디서',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언제, 얼마나 긴 시간 동안 지속되었고, 공연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는지, 관객과 공연주체가 어떻게 소통하였는지를 알아볼 수 있다. 음악과 춤에 관한 단적인 정보 외에 '공연', '사람', '시간', '공간'의 관계성에 관한 연구는 지금까지 미진했던 '전통공연예술 양식' 연구의 기반이 되리라고 판단된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관서악부> 108편, 한글 가사 작품 8편, 한문연행록 9종에 표현된 공연관련 정보를 '주요어' 에 주목하여 분석한 결과 조선후기 공연문화의 시공간과 향유 양상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었다. 공연의 시기와 시간, 전체 소요시간에 대해서는 별도의 기준이 마련되어 있지는 않았다. 사신연의 경우, 국가나 개인의 상례(喪禮), 기일(忌日) 등의 '금지사유'가 없는 한, 더위나 추위를 무릅쓰고라도 진행되었다. 그 외에 계절을 선택하여 '놀음'을 벌일 경우, 계절적으로는 '삼사월 좋은 때', '춘풍' 불고 '일기 화창'한 날과 '가을 물결' 아름다운 '추강(秋江)'의 계절이 선호되었다. 공연 시간 대는 '아침밥을 먹고 나서', '포시(오후 4시경)', '석반을 물리치고~', '야심(夜深)', 의 예에서 처럼 매우 가변적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밤에 열리는 야연(夜宴)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공연의 지속시간은 '잠깐 보고'부터 '전날 오전부터 다음날 낮까지' 차이가 컸다. 공연시간대와 전체 소요시간은 사신일행의 일정에 영향을 받았다. 공연 공간은 자연, 누정이나 관아의 건축 공간, 선유놀음의 선상 공간, 영송(迎送)의 행차음악이 연주된 연도(沿道)로 구분해볼 수 있었다. 평양의 연광정, 부벽루, 성천의 백상루, 선천의 의검정, 천연정, 의주의 통군정 등의 건축공간과 강상에 배를 띄운 선유놀음의 크고 작은 선상공간은 관서지방 공연문화의 중심이었다. 공연 공간에는 공연주체와 좌상(座上)객의 필요에 따른 주물상, 다담상, 찬을 갖춘 상, 병풍, 의자, 향로 등이 구비되었으며, 야연에서는 청사초롱, 홍촉대, 횃불이 갖춰졌다. 약산동대 등, 자연 공간에서의 공연도 선호되었다. 공연 향유와 관련하여 공연주체와 관객, 공연내용, 향유자의 소감과 비평 등을 살폈다. 공연주체는 기생과 무동, 악공, 전악, 취타군, 무동, 가아(歌兒) 등 수많은 명칭이 사용되었다. 특히 공연에서 춤과 노래, 연주를 담당했던 기생에 대해서는 기생의 수, 연령, 역량, 이미지 등을 알 수 있는 아주 많은 이칭(異稱)이 조사되었다. 공연에서 향유자는 유객(遊客), 좌상(座上)으로 불렸고, 특정 작품에서는 '풍류 태수', '학탄 신선' 등의 표현도 사용되었다. 향유자들이 즐긴 공연은 정재류의 춤과 관서지방의 민속무, 이에 따른 삼현육각 편성의 음악, 12가사, 한문 낭송조, 잡가, 민요, 광대소리 등의 노래, 거문고, 가야금, 양금, 피리, 해금, 퉁소, 옥저 등의 기악 독주, 혹은 병주. 행차에 따른 연주 등이었다. 세부곡목에 주목해보면 조선후기 관서지방에서는 궁중 예술과의 교섭이 매우 활발하였고,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었던 <홍문연>, <항장무>, <선유락> 등의 레퍼토리를 탄생시켰는가 하면 고유의 민속가무도 함께 향유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공연의 규모는 '대연', '크게 벌이다', '수삼 동기', '성천기 7명', '60기생', '기생 2~3명', '삼자비' 등으로 표현되거나 독주, 독창, 독무인 경우 이름으로 표기하였다. 역시 공연 계기와 장소에 따라 공연의 규모가 매우 유동적이었음을 알려준다. 공연자의 연령은 10대 초반부터 늙은 기생까지 다양하게 소개되었는데, 특히 어린 기생들의 가무에 대한 관심도가 높았다. 공연은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되었지만, 반대로 '잡악(雜樂)', '졸렬', '웃음거리'로 분류되어 외면당한 예도 있다. 그런가 하면 여러 지역에서 유사한 공연종목을 관람한 뒤, 이를 '비교(比較)' 평가한 예가 있는데, 이는 관서지방 공연문화 향유양상을 알려주는 중요한 지표라고 생각된다. 공연은 주로 사신맞이. 사신연, 순행에 따른 연회 등 공적인 성격을 띤 것이 많았고, 그밖에 사적인 향유 차원에서 이루어진 예도 적지 않게 조사되었다. 관서지역의 사신맞이는 대동강의 관선을 이용한 도강(渡江)의례가 특징적이다. 이는 관찰사, 부사, 감사 등의 관리의 이임과 부임뿐만 아니라 정례적으로 중국에 오가던 사신일행의 행차가 끊이지 않았으므로 이와 관련된 공연문화의 지속성이 탄탄하게 확보될 수 있었다. 이와같이 '주요어 추출'을 중심으로 조선후기 관서지방의 공연 시·공간과 향유양상에 관해 살핀 본 연구는 향후 관서지방의 재정과 경제, 생활문화의 측면과 관련지어 '관서지방 특유의 공연문화'를 밝히는 연구로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지금까지의 연구가 미진한 전통공연예술의 시공간과 공연양식에 관한 연구의 외연을 넓히는데 풍부한 근거자료로 활용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일본(日本) 의학醫學의 '절충파(折衷派)'에 관(關)한 연구(硏究) (A Study on the 'Zhe Zhong Pai'(折衷派) of the Traditional Medicine of Japan)

  • 박현국;김기욱
    • 대한한의학원전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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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0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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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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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The outline and characteristics of the important doctors of the 'Zhe Zhong Pai'(折衷派) are as follows. Part 1. In the late Edo(江戶) period The 'Zhe Zhong Pai', which tried to take the theory and clinical treatment of the 'Hou Shi Pai (後世派)' and the 'Gu Fang Pai (古方派)' and get their strong points to make treatments perfect, appeared. Their point was 'The main part is the art of the ancients, The latter prescriptions are to be used'(以古法爲主, 後世方爲用) and the "Shang Han Lun(傷寒論)" was revered for its treatments but in actual use it was not kept at that. As mentioned above The 'Zhe Zhong Pai ' viewed treatments as the base, which was the view of most doctors in the Edo period, However, the reason the 'Zhe Zhong Pai' is not valued as much as the 'Gu Fang Pai' by medical history books in Japan is because the 'Zhe Zhong Pai' does not have the substantiation or uniqueness of the 'Gu Fang Pai', and also because the view of 'gather as well as store up' was the same as the 'Kao Zheng Pai', Moreover, the 'compromise'(折衷) point of view was from taking in both Chinese and western medical knowledge systems(漢蘭折衷), Generally the pioneer of the 'Zhe Zhong Pai' is seen as Mochizuki Rokumon(望月鹿門) and after that was Fukui Futei(福井楓亭), Wadato Kaku(和田東郭), Yamada Seichin(山田正珍) and Taki Motohiro(多紀元簡), Part 2. The lives of Wada Tokaku(和田東郭), Nakagame Kinkei(中神琴溪), Nei Teng Xi Zhe(內藤希哲), the important doctors of the 'Zhe Zhong Pai', are as follows First. Wada Tokaku(和田東郭, 1743-1803) was born when the 'Hou Shi Pai' was already declining and the 'Gu Fang Pai' was flourishing and learned medicine from a 'Hou Shi Pai' doctor, Hu Tian Xu Shan(戶田旭山) and a 'Gu Fang Pai' doctor, Yoshimasu Todo(吉益東洞). He was not hindered by 'the old ways(古方), and did not lean towards 'the new ways(後世方)' and formed a way of compromise that 'looked at hardness and softness as the same'(剛柔相摩) by setting 'the cure of the disease' as the base, and said that to cure diseases 'the old way' must be used, but 'the new way' was necessary to supplement its shortcomings. His works include "Dao Shui Suo Yan", "Jiao Chiang Fang Yi Je" and "Yi Xue Sho(醫學說)" Second. Nakagame Kinkei(中神琴溪, 1744-1833) was famous for leaving Yoshirnasu Todo(吉益東洞) and changing to the 'Zhe Zhong Pai', and in his early years used qing fen(輕粉) to cure geisha(妓女) of syphilis. His argument was "the "Shang Han Lun" must be revered but needs to be adapted", "Zhong jing can be made into a follower but I cannot become his follower", "the later medical texts such as "Ru Men Shi Qin(儒門事親)" should only be used for its prescriptions and not its theories". His works include "Shang Han Lun Yue Yan(傷寒論約言) Third. Nei Teng Xi Zhe(內藤希哲, 1701-1735) learned medicine from Qing Shui Xian Sheng(淸水先生) and went out to Edo. In his book "Yi Jing Jie Huo Lun(醫經解惑論)" he tells of how he went from 'learning'(學) to 'skepticism'(惑) and how skepticism made him learn in 'the six skepticisms'(六惑). In the latter years Xi Zhe(希哲) combines the "Shen Nong Ben Cao jing(神農本草經)", the main text for herbal medicine, "Ming Tang jing(明堂經)" of accupuncture, basic theory texts "Huang Dui Nei jing(黃帝內徑)" and "Nan jing(難經)" with the "Shang Han Za Bing Lun", a book that the 'Gu Fang Pai' saw as opposing to the rest, and became 'an expert of five scriptures'(五經一貫). Part 3. Asada Showhaku(淺田宗伯, 1815-1894) started medicine at Zhong Cun Zhong(中村中倧) and learned 'the old way'(古方) from Yoshirnasu Todo and got experience through Chuan Yue(川越) and Fu jing(福井) and received teachings in texts, history and Wang Yangmin's principles(陽明學) from famous teachers. Showhaku(宗伯) meets a medical official of the makufu(幕府), Ben Kang Zong Yuan(本康宗圓), and recieves help from the 3 great doctors of the Edo period, Taki Motokato(多紀元堅), Xiao Dao Xue GU(小島學古) and Xi Duo Cun Kao Chuang and further develops his arts. At 47 he diagnoses the general Jia Mao(家茂) with 'heart failure from beriberi'(脚氣衝心) and becomes a Zheng Shi(徵I), at 51 he cures a minister from France and received a present from Napoleon, at 65 he becomes the court physician and saves Ming Gong(明宮) jia Ren Qn Wang(嘉仁親王, later the 大正犬皇) from bodily convulsions and becomes 'the vassal of merit who saved the national polity(國體)' At the 7th year of the Meiji(明治) he becomes the 2nd owner of Wen Zhi She(溫知社) and takes part in the 'kampo continuation movement'. In his latter years he saw 14000 patients a year, so we can estimate the quality and quantity of his clinical skills Showhaku(宗伯) wrote over 80 books including the "Ju Chuang Shu Ying(橘窓書影)", "WU Wu Yao Shi Fang Han(勿誤藥室方函)", "Shang Han Biang Shu(傷寒辨術)", "jing Qi Shen Lun(精氣神論)", "Hunag Guo Ming Yi Chuan(皇國名醫傳)" and the "Xian Jhe Yi Hua(先哲醫話)". Especially in the "Ju Chuang Shu Ying(橘窓書影)" he says "the old theories are the main, and the new prescriptions are to be used"(以古法爲主, 後世方爲用), stating the 'Zhe Zhong Pai' way of thinking. In the first volume of "Shung Han Biang Shu(傷寒辨術) and "Za Bing Lun Shi(雜病論識)", 'Zong Ping'(總評), He discerns the parts that are not Zhang Zhong Jing's writings and emphasizes his theories and practical u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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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시아 고대 궁원과 왕도의 위치 관계에 대한 연구 (A Study on the Location Relationship between Ancient Royal Garden and Royal Capital in North-East Asia)

  • 전용호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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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0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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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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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동북아시아 고대 궁원은 왕도와 왕궁에서의 위치 관계에 따라 왕궁 내부의 북쪽, 왕궁 외부의 북쪽, 왕궁 내부나 외부의 남쪽에 위치하는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첫 번째는 전조후침(前朝後寢)의 중국 고대 궁실제도를 따른 전형적인 궁원이다. 두 번째는 왕궁과 독립적으로 위치하거나, 금원(禁苑)으로 확장되는 궁원이다. 세 번째는 왕궁의 남쪽에 위치하면서 유락(遊樂)이나 향연(饗宴)으로 특화한 궁원이다. 동북아시아 고대 궁원의 유형은 정궁(正宮)과 별궁(別宮) 혹은 이궁(離宮), 금원(禁苑)과의 관계에 따라 구분되고 각각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 번째는 익산 왕궁리 유적의 궁원을 비롯하여 한 장안성, 북위 낙양성과 남조 건강성, 당 대명궁 등에 이르기까지 정궁의 궁원으로 자리잡아왔다. 여기에서는 왕궁 안으로는 궁원이 내원(內苑)으로, 왕궁 밖으로 금원이 외원(外苑)으로 분리되어 있다. 반면에 두 번째는 궁원(宮苑)과 금원(禁苑)이 일체화되어 있다. 세 번째는 왕궁의 일부분을 구성하거나 왕도에서 정궁과 독립된 공간으로 별궁이나 이궁의 궁원으로 특화되어 왔다. 중국은 동북아시아 고대 궁원의 전형(典型)을 만들었으며, 이를 기초로 하여 한국의 백제와 신라, 일본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나름대로 독창성을 발휘하여 독특한 궁원을 발전시켜 나갔다. 백제왕도 익산의 궁원은 위진남북조시대의 궁원을, 사비도성의 궁원은 진·한대와 수·당대의 궁원을, 신라왕경의 궁원은 사비도성과 당의 궁원을, 일본 아스카~나라시대의 궁원은 백제와 신라의 궁원을 영향을 각각 받았다. 그렇지만 이들 궁원은 각각 나름대로 자신만의 독특한 궁원의 특징도 지니고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동북아시아 고대 궁원은 지역에 따라 계통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평양 안학궁은 궁원으로 보아서는 삼국시대부터 조영될 가능성이 높다. 다만 안학궁 하부의 유구 중복 관계나 유물로 보아 그 초축 시기는 5~6세기로 올려보기 어렵고 대체로 7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평양 안학궁의 궁원은 평양 장안성의 정궁에 대응하는 별궁 혹은 이궁의 궁원으로서 한국 통일신라시대 동궁과 월지나 일본 나라시대 평성궁 동원정원(東院庭園)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점으로 보아, 평성궁 동원정원(東院庭園)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궁원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본 연구는 동북아시아의 고대 왕도라는 큰 틀에서 궁원의 위치 관계로 그 특징과 변천을 중점적으로 다룬 연구로 적지 않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런 한계들을 조금씩 해결하여 나간다면, 동북아시아 고대 궁원에 대한 이해의 폭이 훨씬 넓어지리라 기대해 본다.

초등학교 아동의 개인위생에 대한 조사 (A Study on Personal hygiene of Primary School Students)

  • 김재삼;남철현;강희양
    • 한국학교보건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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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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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9-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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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6
  • The study was designed to gain necessary basic data, in order to grasp the actual condition on personal hygiene of primary school students and to help school health education and child health education data development of parents of students, the survery was carried out through this reporter's interview for mothers who have primary school pupil in KyungBug area during the period of a month from 14 the April to 30 the April 1994. The results of this study can be summarized as follows. 1. As for general characteristics, the percent of answer mothers with 30~34 years 44.9%, and the percent of answer mothers with 35~39 years was 37.6%, 14.6% of answer mother was 40 years and over. The most house types was apartment house, that is 64.8% and independence house was 18.9%, 13.7% of answer mothers was multivalent house residents. As for level of school career, the percent of high school was 64.2% and the percent of university was 20.5%, 10.1% of answer mothers was finishment of middle school. As for religion a lack of religion was 38.4% and a Buddhist was 36.8%, a christian was 13.4%, 10.4% of answer mothers was a catholic. As for jobs, the percent of office was 33.9%, specialist and expert skiller was 17.3%, self-management was 16.0%, fishing and agrarian villiages was 11.6%, public service personnel and shool personnel was 9.1%. As for the number of sons and daughters, the percent of two was 70.5%, the percent of one was 16.0%, and the percent of male students was 54.1%. As for level of economic life middle level was 59.9%. 2. The percentage of washing hand after school hours was 66.8% and not washing hand after school hours was 33.2%. In washing hand after school hours family of independence house, mothers that have schoolcareer of university, female students, three and over of sons and daughters was high individually (p<0.05). 3. As for paring one's nails, once a ten days was 52.9% once a five days was 22.5% once a fifteen days was 19.0%, once a twenty and over was 5.6%. 4. 54.7% of primary school students of answer mother's take a bath once a few days and 31.6% take a bath once a week, 10.1% take a bath once a tendays. 5. The percentage of changing of underwear once a day was 60.9%, once a few days was 37.1%, once a week was 2.0%, as for changing of underwear, sons and daughters that has mothers with 29 years and downward, one number of sons and daughters, females students was high individually (p<0.01). 6. The percentage of haircut once a 20~30 days was 59.9%, once a 31~40 days was 17.9%, once a 40 days and over was 16.6%. As for the percentage of haircut once a 20~30 days apartment house residents, male students was high (p<0.01). 7. The percentage of experience in taking nutrition was 79.8% and the percentage of experience in taking restorative was 72.3%. As for taking nutrition, apartment house residents, one number of sons and daughters, male students was high individually (p<0.01). As for taking restorative apartment house residents, on number of sons and daughters, male students was high individually (p<0.05). 8. The percentage of habit of unbalanced diet was 44.0%, sons and daughters that have mother with 40 years and over apartment house residents, male students, one number of sons and daughters was high indivdually (p<0.05). 9. As for hygiene condition of sons and daughters, the percentage of good state of health was 65.2%, middle state of health was 3.5% bad state of health was 11.4%. In good state of health sons and daughters that have mothers with 29 years and downward, multivalent house residents, three numbers of sons and daughters, female students, high birth was high individually. 10. As for fattness of sons and daughters, existence was 18.2%. No existence was 81.8%. in existence sons and daughters who have mothers with 40 years and downward, independence house resident, special job and expert skill job, three and over number of sons and daughters, female students, low birth was high individually. 11. As for use aspect of medical facilities of sons and daughters, hospital doctors was 53.1%, drugstore was 42.3%, chinese medicine hospitals or health organization was 4.6%. In usage of drugstore, sons and daughters of mothers with 29 years, 40 years and over was 55.6%, 61.4% individully, inusage of hospital doctors 30~34 years, 34~39 tears was 64.5%, 49.1% individully (p<0.01), apartment house residents, one or two numbers of sons and daughters, male students was high individually. In the percentage of using drugstore, school career of middle school and downward, in occupation, three and over numbers of sons and daughters, low birth was high individually (p<0.05). According to the results mentioned above. An actual condition and a related matters on personal hygiene of primary school students must be used as the basis data of a health education program and a health data of a health education program and a health data related, a teaching materials development and must be helped to the health life education of parents of students and chil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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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열과 영구치열의 구개 각부의 관계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RELATIONS OF VARIOUS PARTS OF THE PALATE FOR PRIMARY AND PERMANENT DENTITION)

  • 이용훈;양연미;이용희;김상훈;김재곤;백병주
    • 대한소아치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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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1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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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69-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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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 본 연구는 유치열과 영구치열에서 구개의 길이, 폭, 깊이 및 치열궁의 형태 등을 조사하여 남녀간의 차이와 유치열과 영구치열간의 변화양상을 파악하는 것이다. 유치열기 아동 100명과 영구치열기 성인 100명 총 200명을 대상으로 하여 상악 석고 모형을 채득하고 3차원 laser scanner(SD Scanner, DS4060, LDI, U.S.A.)를 통한 석고 모델의 측정을 통해 cloud data, polygonization, section curve and loft surface, fit and horizontal plane (Surfacer 10.0. Imageware, U.S.A.)을 기초로 하여 구개의 폭, 길이, 높이 및 치열궁의 형태 등을 계측하였다. 통계학적 분석을 위해 t-tests가 사용되었다. 이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1. 구개의 계측항목에서 유치열 전방부 구개높이를 제외한 나머지 항목에서 남자가 여자보다 크게 나왔으며, 유치열은 전구개폭(p<0.05)과 후구개폭(p<0.01), 영구치열은 구개폭(p<0.05)과 전구개길이(p<0.01), 중구개, 후구개길이(p<0.05)에서 남녀간에 유의한 차이가 있었다. 2. 남녀의 구개지수에서 유치열에서는 구개장고지수(p<0.05)와 구개장폭지수(p<0.01)가 남녀간에 통계학적으로 유의한 차이가 있었다. 영구치열의 구개지수에서는 남녀간에 유의한 차이가 없었다. 3. 유치열과 영구치열의 계측항목 비교에서 후방부 구개폭이 가장 많이 증가하였으며, 다음으로 후방부 구개높이, 전방부 구개폭, 전방부 구개길이 순이었다. 전방부 구개높이와 후방부 구개길이는 오히려 감소하였다. 4. 유치열과 영구치열의 구개지수 비교에서 구개장고지수와 구개장폭지수, 후구개폭고지수는 영구치열에서 증가하였고, 나머지 지수는 감소하였다.보아 Er:YAG 레이저와 Chinese ink로 photosensitization을 시행한 후의 Nd:YAG 레이저 조사는 일정시간 동안 S. mutans의 증식과 산 생성능을 억제시키므로써 치아우식증 예방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사료되나 억제효과가 오래가지 않아 임상적으로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자주 조사를 해주어야 한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어 임상적으로 치아우식증 예방이란 단독 목적으로 사용하기에는 실용성이 크지 않다고 사료된다.전자현미경 관찰에서 초음파 진동을 가한 군에서 resin tag의 길이가 길었고, lateral branch의 수도 많이 관찰되었다.TEX>$1\rightarrow6$ 결합이 주된 결합인 수용성 글루캔이었다. 이상의 결과를 종합하면 구강에서 분리된 Streptococcus salivarius 119에 의한 Streptococcus mutans의 인공치태 형성 억제작용은 수용성 글루캔 형성에 의한 것으로 사료되었다.동을 유도할 수 있다고 사료된다. 또한 이유식을 통한 다양한 식품의 경험 및 식품 섭취방법 등을 연습하는 과정을 통해 앞으로의 식생활 및 성장 발달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사료된다. 따라서 영유아의 성장발달에 따른 적절한 영양교육의 실시가 보다 체계적으로 활성화 되어야 하겠으며 이를 위해 실제로 도움이 될 수 있는 구체적인 교육내용, 방법 및 도구의 개발이 요구된다.어서, B군은 A군,C군,D군과 비교하여 통계학적으로 유의성 있는 차이를 보였고(p<0.05), E군은 F군,G군과 비교하여 통계학적으로 유의성 있는 차이를 보였다(p<0.05). 3. 광중합형 및 자가중합형 교정용 전색제는 법랑질탈회 예방효과가 있었다. 4. 광중합형 및 자가중합형 교정용 전색제는 법랑질탈회 진행억제효과가 있었다. 5. 광중합형 및 자가중합형 교정용 전색제 표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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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면교잡에 의한 가잠의 몇가지 실용형질의 유전변이와 조합능력 분석 (The Analysis of the Genetic Variance and Combining Ability in some Quantitative Characters by Daillel Crosses of the Silkworm, Bombyx mori L.)

  • 장창식;손해룡
    • 한국잠사곤충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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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7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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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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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5
  • 교배친인 일본종계통 잠197, 잠113, 잠117 및 잠119와 중국종계통 잠108, 잠114, 잠118 및 잠120의 8품종을 이면 교리형식으로 교배하여 실용형질 중에서 전령기간, 5령기간, 자견층중, 웅견층중, 자견층비율, 웅견층 비율의 귀전 변이와 조합능력을 분석한 바 그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전령기간과 5령기간의 귀전변이와 조합능력은 협의의 귀전력보다도 광의의 귀전력이 크며, 일반조합 능력, 특정조합 능력 및 상반조합 능력이 고도의 효과를 나타냈다. 교배친의 우성효과는 컸으나, 잡종강세는 적게 나타났다. 환경 변이와 상가적 작용도 크게 나타났다. 우성의 방향은 부의 방향으로 열성귀전자가 많이 작용하였다. 또한 잡종강세도 부로 유충기간이 짧아졌다. 한편 이 형질들의 귀전자들은 초우성을 나타내냈다. 교배친의 전령기간의 우성 순서는 잠119>잠113>잠117>잠108>잠120>잠114>잠107>잠118 순이었으며, 5령기간에서는 잠117>잠113>잠108>잠114>잠119>잠117>잠120>잠118 순으로 나타났다. 단견중의 귀전변이와 조합 능력은 협의의 귀전력보다는 광의의 귀전력이 컸다. 일반조합 능력과 특정조합 능력이 컸으나 상반조합 능력은 없었다. 교배친의 우성효과는 컸으며, 잡종강세도 크게 나타났다. 환경변이는 자단견중에서 크게 나타났으나, 웅단견중에서는 적게 나타났다. 상가적 작용은 둘 다 적게 나타났다. 단견중의 우성의 방향은 정의 방향으로 우성귀전자가 크게 작용하였다. 이 형질들의 귀전자들은 초우성을 나타냈다. 교배친의 자단견중의 우성순서는 잠107>잠108>잠119>잠113>잠114>잠120>잠117>잠118 순이었고, 웅단견중에서는 잠114>잠120>잠108>잠113>잠107>잠119>잠117>잠118 순이었다. 견층중의 귀전변이와 조합능력은 광의의 귀전력이 협의의 귀전력보다 컸다. 일반조합 능력과 특정조합력은 유의차가 컸으나, 상반조합 능력은 없었다. 교배친의 우성효과는 컸다. 잡종강세 환경변이 및 상가적 작용도 컸다. 우성의 방향은 정의 방향이었으므로 우성귀전자가 크게 작용하였다. 이들 형질들의 귀전자들은 초우성을 나타내었다. 교배친의 자견층중의 우성순서는 잠120>잠114>잠108>잠119>잠118>잠107>잠117>잠113 순이었고, 웅견층중에서는 잠114>잠108>잠120>잠117>잠118>잠107>잠119>잠119>잠113 순이었다. 자견층 비율에서는 광의의 귀전력이 협의의 귀전력보다 컸고, 웅견층 비율에서는 같았다, 견층 비율에서는 일반조합 능력은 크게 나타났으나, 특정조합 능력과 상반조직 능력은 나타나지 않았다. 자견층 비율에서 교배친의 우성효과는 컸다. 자견층 비율에서는 교배친의 우성효과는 적었다. 자웅견층 비율의 잡종 강세는 적게 나타났다. 환경변이와 상가적 작계는 자웅견층 비율에서는 크게 나타났다. 우성의 방향은 자견층 비율에서는 정의 방향으로 우성 귀전자가 크게 작용하였으며, 자견층 비율에서는 정의 방향으로 우성 귀전자가 부분적으로 작용하였다. 교배친의 자견층 비율의 우성순서는 잠117>잠114>잠108>잠120>잠118>잠119>잠107>잠113 순이었고, 자견층 비율에서는 잠114>잠117>잠108>잠118>잠107>잠119>잠113>잠120의 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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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고려대장경 보각판(補刻板) 연구 -『대반야바라밀다경』 보각판을 중심으로- (Supplementary Woodblocks of the Tripitaka Koreana at Haeinsa Temple: Focus on Supplementary Woodblocks of the Maha Prajnaparamita Sutra)

  • 신은제;박혜인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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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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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4-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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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해인사 소장 고려대장경판은 현전하는 유일한 완질의 한역 대장경판이다. 국보이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고려대장경판은 총 81,352판으로 알려져 있다. 이 경판 가운데에는 동일 경판이 두 개 이상 존재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중복판'이라 명명하기도 했다. 두 개 이상의 경판이 존재하게 된 원인은 후대 보각판(補刻版)이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보각판은 총 118판으로 전체 경판의 0.14%에 불과하다. 따라서 고려대장경판은 기본적으로 원판이 현재까지 온전히 잘 보전되어 오고 있다. 그럼에도 보각판에 대한 연구는 고려대장경판의 보존과 관리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보각판은 인경 과정에서 마모되기도 했고 때때로 인경이 불가능할 정도의 손상이 있었기 때문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보각은 크게 일제강점기와 조선 시기에 이루어졌다. 일제강점기 보각판의 특징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정리된 바 있으나 조선 시기 보각판의 특징과 제작 시기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본 연구는 고려대장경판 보각판의 특징과 제작 시기를 분석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전체 대장경 가운데 보각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진 경전은 『대반야바라밀다경』이다. 『대반야바라밀다경』의 보각판은 총 76판으로 전체 보각판 118판의 64.4%를 차지하므로 『대반야바라밀다경』의 인경본을 잘 분석하면 고려대장경판 보각의 추이와 그 시대적 특징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 판단된다. 『대반야바라밀다경』 보각판 76판을 분석한 결과, 일제강점기인 1915년(12판)과 1937년(11판)에 보각한 23판을 제외하면 53판은 조선시대 보각판이다. 조선시대 보각은 세 시기에 걸쳐 이루어졌다. 첫 번째 시기는 무진년(1448년, 세종 30) 경으로 총 14판이 보각되었다. 이를 무진년 보각판이라 명명했다. 무진년 보각판은 상하 광곽 단면의 길이가 21cm 내외로 초각판보다 1cm가량 짧으며 광곽 외부에 음각으로 각수명이 기재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조맹부체로 제작된 경판이 있었으며, 옅은 계선이 확인되고, 판면부 바닥이 거칠게 마감되었다. 이 형식의 경판 가운데 '무진년경각해지(戊辰年更刻海志)'라는 각수명이 확인되었고 또 다른 각수 가운데 한 명인 성견(性見)이 1446년에 활동하였으므로 무진년은 1448년(세종 30)으로 편년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두 번째 시기는 1865년 인경 직후이다. 1865년 남호(南湖) 영기(永奇)와 해명(海冥) 장웅(壯雄)은 고려대장경 두 부를 인경하였는데 이때는 손상된 경판이 다수 확인되어 인경하지 못한 경우가 있었다. 이는 현재 전하는 월정사 인경본의 결락장에서 잘 확인된다. 이에 인경 직후 일부 경판의 보각이 실시된 것으로 생각된다. 1865년 보각판은 계선이 있으며 붉은 칠이 도포되어 있지 않고 발원자의 서원이 판각되어 있다. 그러나 1865년 보각판은 6판 8면에 불과해 당시 보각은 여러 사정에 의해 본격적으로 진행되지 못했다. 세 번째 시기는 1899년 인경 직전이다. 1899년 인경은 대한제국 황실의 후원 하에 이루어졌으며,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체계적으로 실시되었다. 때문에 인경 전에 경판에 대한 조사가 실시되었고 손상으로 인경이 불가능한 경판의 보각이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1899년 보각판은 붉은 칠이 도포되어 있으며 판수의 앞, 판미의 뒤에 한 행을 띄워 놓았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33판 56면이고, 전체 『대반야바라밀다경』 보각판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다. 1899년 판이 가장 다수를 차지한다는 사실은 1899년 즈음 고려대장경판에 대한 관리와 보수가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고려시대 쌍룡문경(雙龍紋鏡) 유입(流入)과 독자성(獨自性) (Inflow at Ssangyongmun Gate During the Goryeo Dynasty and Its Identity)

  • 최주연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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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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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2-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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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용(龍)은 동서양 전설 신화에 등장하는 상상 속 동물이다. 서양의 용은 대부분 공격적이고 부정적 의미로 표현되지만, 동양에서는 황제를 상징하거나 상서로운 의미를 갖고 있어 긍정적 의미를 내포한다. 또한 용은 물을 다스리는 신물(神物)로 여겨져 그 종류가 다양해지고 이를 형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고려시대 용과 관련된 기록은 "고려사"에서 다양한 주제로 등장하며, 크게 건국설화 기우제 신이(神異) 등과 관련되어 있다. 건국설화는 용을 통해 고려 왕권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왕(王)=용손(龍孫)'이라는 '용손의식(龍孫意識)' 형성에 영향을 끼친다. 또한 용의 특징인 물을 다스리는 능력은 가뭄에 비를 바라는 기우제와 관련한 토용(土龍)으로 상징화된다. 이와 같은 용의 다양한 성격 중 용이 왕실의 상징이기에 용문(龍紋)의 사용은 민간에서 엄격히 제한되었으며, 용을 소재로 한 용문경(龍紋鏡) 역시 그 제작 사용에 있어 왕실과의 연관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고려시대 쌍룡문경(雙龍紋鏡)은 종류 수량이 많은 편으로 중국에서 유입된 동경(銅鏡)과 함께 국내에서 제작한 쌍룡문경이 혼재하면서 고려시대 쌍룡문경의 제작과 유통은 다른 동경에 비해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본고에서는 10~14세기 중국에 존재한 다양한 쌍룡문경의 특징을 정리했다. 고려의 장인들은 쌍룡문경을 제작할 때 중국 쌍룡문경의 문양 구성에서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는 중국 쌍룡문경과 국적을 판별하기 어려운 예가 많으며, 그 차이 또한 면밀한 분석을 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려는 유입된 쌍룡문경을 그대로 답습했던 것은 아니며, 자체적으로 제작하고자 했음을 국내 현존하는 쌍룡문경의 유형 분류를 통해 살펴보았다.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뉘는 쌍룡문경은 요대(遼代) 동경 계열인 I 유형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며, 그 외 II III 유형에서는 수량은 적으나 문양 구성이 독특한 쌍룡문경이 있어 고려에서 제작한 쌍룡문경으로 분석했다. 고려시대 쌍룡문경은 중국의 영향 하에서 제작된 만큼 고려에서 제작한 동경과의 구분이 어렵다는 점을 앞서 언급했다. 이중 평창 월정사 구층석탑에서 발견된 쌍룡문경은 그 제작지에 대한 의문점이 있으며, 동경의 문양 구성도 중국 쌍룡문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예이기에 이 동경에 대한 제작지를 검토했다. 이 쌍룡문경은 I 유형에 속하는 동경의 문양 구성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세부 문양의 조합이 중국에서 찾기 힘든 예라는 점에서 요대 동경의 문양 구성을 차용하여 고려에서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