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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릉 석인상(문인석, 무인석)의 크기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Size of the Stone Pillars(A Statue of confucian Official and A Statue of Military Officer) in the Royal Tomb of the Joseon Dynasty)

  • 김진명;최태월;이용선
    • 산업진흥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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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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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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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본 연구는 조선시대 왕릉 석인상의 크기에 관한 연구로서 분석 결과를 요약하면, 석인상의 문인석, 무인석은 1600년대에는 크기가 증가하였다가 1700년대에는 크기가 다소 감소하였으나 1800년대에는 석인상의 크기가 증가하는 것으로 평균 분석 결과 확인되었다. 조선 왕릉의 석인상은 당시 인물을 반영하고 있으며, 이를 통하여 그 시대 인물상의 전형을 살펴볼 수 있다. 왕릉은 일관성과 고유성을 지니고 있으며, 석인상의 크기에 관한 규범은 시대별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지배계급의 권위적 상징의 건축물로서 의식과 법제에 따라 왕릉이 축조된 국가적 공사였다. 조선시대 묘의 석인상 크기는 능의 석인상에 비하여 약 90cm의 차이로 작았으며 조선전기에 제작된 석물은 지위에 따라 석물의 크기에 차등을 두었다고 한다. 본 연구에서는 조선 왕릉 석인상의 연대별 석물 크기를 확인하는데 본 연구의 의의가 있다.

숲속에 사는 사람, 숲밖에 사는 사람 : 생태인류학적(生態人類學的) 관점(觀點) (People within the Forest, People outside the Forest : A View from Ecological Anthropology)

  • 전경수
    • 한국산림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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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9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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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30-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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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0
  • One might have a retrospect on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forest and human being from the viewpoint of ecological perspective. It is no doubt that most of the fossil humans should have lived on the forest and the latter provided foods and shelters for humans from their beginning stages, Since the so-called agricultural revolution, humans have extensively started to exploit the forest which had beer, their cradle. The industrial revolution has created another situation against the forest in terms of the quality of ecosystem. These two revolutions have set up the so-called civilization which seems to have been based on the sacrificial oblation of the forest. The cradle for human being has been kept exterminating for the shake of "economic development and miracle." This might be a synoptic history of relationships between the forest and human beings in a sense. designates the behavioral aspects of human being against the forest and people consider the forest only as exploitable resource in this context, and the latter means that people live on the forest and strive to adapt the order of forest ecosystem. The resourcism has developed a strategy of colonialism to exploit the forest and provided a winner's position for the human beings against the forest, This idea and behavioral perspective seems to have started the backfire against the exploiter who is the owner of the civilization. However, there are different philosophies and ideas to view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forest and human beings. People within the forest who are mostly considered as "primitives" still keep their idea of the ontology of the forest. There is a theoretical assumption of the "socionatural system" to look into the ecosystem. The forest could be viewed in the above frame of analysis. There are five variables : environment, resource, technology, organization, and ideology. Ideological aspect of the forest can be explained in the context of belief systems. Forest has a meaning of religion and rituals and people within the forest should admire it in anyway of religious reasons. This aspect of the forest cannot be separated from the environmental aspect of the forest. People within the forest acknowledge and practice the above idea. People outside the forest have lost the idea, however, at the cost of acquiring the civilization. They have expelled themselves from the forest and divided the socionatural system of the forest by way of colonialism. The efforts like agroforestry and social forestry would be strategies for recovering the idea of ontology of the forest as well as the sense of community including the forest and human being. People within the forest will be a prospective model for the future socionatural system of the forest for the people outside the forest. At this point, an ecological anthropologist can work with the forest speciali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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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 공연에 관한 공법적 고찰 (A legal study on a Street Performance)

  • 이장희
    • 법제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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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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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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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이 논문은 거리 공연의 법적 의미와 쟁점을 검토한 것이다. 거리 공연(또는 거리 예술)의 법적 의미를 이해하는데 핵심 징표는 '공공장소'와 '예술행위'에 있다. 따라서 '공공장소에서의 예술 행위'라 할 수 있는 한, 원칙적으로 그 예술성의 수준이나 대가의 지급 여부, 공연의 규모, 예술행위의 장르를 불문하고 거리 공연 또는 거리 예술이라 할 수 있다. 거리 공연은 개방된 길거리에서 행해짐으로써 누구나 자유롭게 참여하고 예술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이다. 또 누구나 거리공연가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거리 공연은 주류적 예술문화보다 더 대중적이고 민주적인 예술행위라 볼 수 있다. 다만 거리 공연이 유행하고 보편적 문화현상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지만, 아직 법적으로 정돈되어 있는 상황은 아니라고 보인다. 하지만 거리 공연을 뭔가 이질적이면서 특별한 것으로 취급하면서 법으로 규제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예술의 자유 등을 보장하는 헌법의 취지에 맞게 거리 공연을 자유롭게 행하고 즐길 수 있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타당하다. 거리 공연이 사회적 유해성을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최근 여러 지방자치단체들이 지역 경제를 활성화한다는 이유에서 거리공연을 적극적으로 조례로 규율하고 있지만, 거리 공연을 규율하기 위한 법률이 별도로 필요하지는 않다고 판단된다. 다만 거리 공연에 관해 제기되는 주요 쟁점별로 관련 법률을 정비하는 것은 필요하다. 예컨대 공연 무대를 설치하는 대규모 거리 공연에서 별도의 허가가 필요한지 좀 더 분명하게 규정해 줄 필요가 있으며, 거리 공연으로 인한 생활소음의 규제를 받기 위해 "소음 진동관리법"상 거리 공연에 관한 근거 규정과 소음 기준을 별도로 마련해 주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거리 공연이 문화 현상으로 잘 정착되기 위해서는 거리공연가의 법질서 준수 노력, 거리 공연을 즐기는 시민들의 성숙된 의식과 문화적 관용태도, 그리고 거리 공연을 활성화하려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문화국가적 보호 노력이 조화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포천 출토 철조여래좌상에 대한 소고 (An Inquiry into the Iron Seated Buddha Excavated from Pocheon in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 강건우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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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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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9-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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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철조여래좌상은 한동안 미등록 상태로 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었다가 최근 본관9976으로 유물번호가 새롭게 변경되었다. 이 철조여래좌상은 '포천 철불'로 불리는 철조여래좌상(본관9975)과 함께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백운리 흥룡사 일대에서 발견된 불상이다. 필자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 공문서와 유리건판 사진 등을 비교·검토하여 두 구의 철조여래좌상이 동일한 절차를 거쳐 1925년 12월 17일에 조선총독부박물관으로 이관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철조여래좌상은 높이가 105cm, 어깨폭은 57cm, 무릎폭은 77cm에 이르고, 편단우견(偏袒右肩)의 착의법에 옷주름은 물결무늬식으로 새겨서 유려하다. 철조여래좌상의 얼굴은 타원형으로 이목구비의 묘사가 잘 남아있다. 양감 있는 볼에 넓게 타원형을 그린 안와, 수직으로 길게 뻗은 눈, 짧은 코와 도툼한 입술은 9세기에 제작된 전라북도 남원 실상사(實相寺) 철조여래좌상, 경북 예천 한천사(寒天寺) 철조여래좌상, 강원도 동해시 삼화사(三和寺) 철조여래좌상 등과 유사하다. 또한 결가부좌한 다리와 편단우견의 착의법, 물결무늬식 옷주름은 8세기 석굴암 본존불을 연상시킬 만큼 조각수법이 우수하다고 생각된다. 철조여래좌상의 존명은 유리건판 사진(원판번호 M442-2, M442-7)을 통해 알 수 있다. 유리건판 사진을 보면 오른쪽 손바닥은 위를 향하고, 왼쪽 손바닥으로 약기(藥器)를 받치고 있다. 지금까지 원주 출토 철조약사좌상(본관1970)만이 철로 만든 유일한 약사불상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이번에 약기를 든 철조약사여래좌상을 새롭게 확인할 수 있었다. 철조여래좌상은 혜철의 제자 도선(道詵)(827~898)이 밀교신앙의 영향을 받아 사찰을 보호하고 국토를 비보(裨補)하기 위해 9세기경에 조성했을 가능성이 있다. 흥룡사의 전신인 내원사에는 도선이 백운산 등 중요한 세 곳을 택하여 비보사원을 세우고 다시 약사여래삼존상을 조성한 후 사원에 봉안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또한 「선암사중수비」에는 도선이 비보를 위해 도량을 세우고 철불 등을 조성했다고 전한다. 흥룡사가 소재한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도평리에 고려시대에 약사(藥寺)라는 사찰이 창건되었다는 점에서, 이 일대는 약사도량과 관련된 지역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서울 석촌동 고분군 출토 기와의 소성온도와 열변형 특성 해석 (Interpretation of Firing Temperature and Thermal Deformation of Roof Tiles from Ancient Tombs of Seokchon-dong in Seoul, Korea)

  • 진홍주;장성윤;이명성
    • 자원환경지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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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4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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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71-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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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이 연구에서는 서울 석촌동 고분군 연접적석총에서 출토된 기와의 물리적 및 광물학적 특성을 바탕으로 소성온도를 추정하고, 열변형 과정을 해석하였다. 석촌동 고분군에서는 다량의 기와가 출토되었는데, 일부 기와는 열에 의해 형태가 변하고 불균일한 소성상태를 나타냈다. 원형기와의 표면과 속심의 색조는 비교적 균일한 황갈색 계열로서 약 12% 이상의 높은 흡수율을 나타내며, 미정질 기질에 세립질 석영, 장석류, 운모, 각섬석 등을 포함한다. 또한 미세조직 관찰 결과, 느슨한 기질과 운모의 층상구조가 확인되어 900℃ 이하의 산화환경에서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열에 변형된 기와는 주로 적갈색과 청회색의 불균일한 표면 색조를 보이며, 단면은 치밀한 적갈색 표면과 다공성의 자회색 내부기질이 함께 나타나는 샌드위치 구조를 나타낸다. 흡수율은 0.8~11%이며, 멀라이트, 헤르시나이트가 동정되어 소성온도가 1,000℃ 이상으로 추정된다. 일부 시료에서는 과소성에 의한 블로우팅 포어(bloating pore)가 관찰되었고, 1,200℃ 이상의 고온을 경험한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원형기와를 800~1,200℃ 사이에서 온도별로 재소성하여 물리적 및 광물학적 특성을 확인한 결과, 1,000℃ 부근에서 흡수율이 급격히 낮아지고 고온 광물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또한 점차 온도가 올라갈수록 기질이 부분 용융되고 재결정화되어 변형기와의 열변형 특성과 유사한 결과를 나타냈다. 따라서 석촌동 고분군 기와는 불균일한 소성상태와 1,000~1,200℃에 달하는 2차 고온을 경험하여 형태 변형, 광물 상전이 등의 열변형 특성이 발생하였고, 이는 백제시대 화장의례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남해안 물건리 방조어부림의 식생구조 특성 및 관리방안 (Vegetation Structure Characteristics and Management Plan of Mulgeun Fish Shelter Forest in the Southern Coast)

  • 이수동;김미정;강현경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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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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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8-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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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 연구는 남해안 물건리 방조어부림의 인문사회적, 자연생태적 특성을 토대로 효율적인 보전 관리방안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연구대상지는 천연기념물 제 150호로 1,600년경 전주 이씨 후손들이 정착하면서 조성한 숲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마을의 평안을 위하여 매년 10월마다 동제를 지내고 있다. 방조어부림은 방재적, 경제적, 환경생태적 기능과 함께 대표적인 역사문화자원으로 남해군에서 관리하고 있다. 선형의 대상지 면적은 $23,962.6m^2$로 주변은 경작지(48.5%), 도시화지역(38.2%)이 넓게 분포하고 있다. 세부적인 현존식생은 이용압 및 훼손여부에 따라 층위형성지와 식생복원지, 훼손지로 구분되었으며 세부적인 식물군집유형은 이용압이 낮은 푸조나무군집(I), 느티나무군집(II), 이용압이 높은 느티나무-이팝나무-푸조나무군집(III), 푸조나무-느티나무군집(IV), 이용에 의해 하층이 훼손된 팽나무-푸조나무군집(V)으로 구분되었다. 숲 내부의 관통도로와 해안도로, 목재데크 산책길, 주차장, 세면대 등의 교통 휴게시설 설치로 인하여 숲의 파편화 및 내부 식생의 생육이 어려워지고 있다. 이를 위한 복원방안으로서 우선복원지역 설정, 복원 식생종 선정과 적정 복원방법이 요구되었다. 훼손지역($7,868.2m^2$)을 우선 복원지역으로 설정하고, 복원 식생종은 후대림을 위하여 숲내 우점종인 느티나무, 푸조나무, 팽나무, 이팝나무를 모수로 한 실생묘를 육성하며, 다층식생구조 형성을 위하여 아교목층과 관목층에 각각 5개체, 115개체(단위면적 $100m^2$)를 보완식재해야 할 것이다. 또한, 숲 내부의 곳곳에 산재하는 휴게시설물 철거 및 무분별한 이용을 통제하고 낙엽활엽수림으로 보전, 복원될 수 있도록 관리 및 모니터링이 수반되어져야 한다.

조선시대 왕릉 석물의 재료와 제작 방법 변화에 관한 연구 - 신도비와 표석, 상석을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Change of Materials and Fabrication Techniques of Stone Figures in Royal Tombs of the Joseon Period - Focusing on Shindobi, Pyo-Seok, and Sang-Seok -)

  • 차문성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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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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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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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비석은 상례문화의 보고이자 서예사의 정수로서 시대사·사회사를 조명할 수 있는 중요한 문화재지만 그 연구는 아직 미미하다. 특히 비각의 제작 방식에 관한 것은 아직 미증유의 분야로 남아 있어 연구가 절실한 편이다. 비석의 제작은 석재의 탁마 과정과 조각, 그리고 글씨를 새기는 북칠 과정으로 대별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몇 가지의 사실을 밝히고 있다. 첫째, 신과 관련한 의물(神儀物)인 상석, 혼유석, 비석에는 정교한 마정(磨正) 작업을 가한다. 이는 임진왜란, 병자호란의 영향으로 인한 유교적 상·제례의 정착과 전파로 혼유석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 기인한다. 둘째, 영조 때 오석(烏石)의 비약적인 확산과 사저취용(私儲取用)은 사회·문화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상품(上品)의 강화석이 고갈되자 사대부에서 사용하던 오석을 천릉한 장릉에 사용한 이후 사대부들을 중심으로 퍼지게 된다. 특히 오석의 사용과 마정 작업은 화학적·물리적 손상을 최소화시킬 수 있었다. 셋째, 비석의 각자 기술은 북칠(北漆)에 있다. 효종 영릉 천릉 시에 송시열의 지문을 북칠한 이후부터 북칠 과정은 동아시아에서 우리나라가 가장 성행했고 제도화된 점은 특기할 만하다. 북칠은 오석의 검은 색으로 인해 흑묵보다 붉은 당주를 이용하면서 더욱 정교화된다. 넷째,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각자 방식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영조 연간까지 각자는 획의 두께에 따라 각의 깊이를 결정해 음영을 표현하고 양감을 나타냈다. 물론 이 같은 기법은 모든 표석이나 신도비에서 나타나는 것은 아니나 내수사에 소속된 뛰어난 경공장들의 전습에 의해 유지되었다. 따라서 비석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숙석, 연정, 마정, 정간, 초도서입, 중초, 입각, 교정, 장황의 단계를 거쳐 하나의 완성품이 이뤄진다. 이러한 것은 묘주에 대한 존경심과 공업을 알리는 목적이지만, 이를 통해 공예 기능의 분업과 협업에 바탕을 둔 작업이 표석의 전체 제작 과정에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문화재 보존에 나타난 과거인식에 대한 고찰 - 19세기 영국의 교회 건축복원의 사상적 배경과 보존사례를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Change of Perspectives on the Past in Heritage Conservation - Focusing on the 19th Century Restoration of Religious Buildings in England -)

  • 이수정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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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7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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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8-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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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홈스봄의 '만들어진 전통'은 최근에 등장한 역사인식의 한 방법론이다. 그에 따르면 만들어진 전통의 특수성은 과거와의 연속성을 인위적으로 내세우려 하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전통들을 구성하는 데 낡은 재료들을 이용한다. 또한 그는 만들어진 전통은 사회화나 신념, 가치체계, 행위규범을 주입하는 데에 그 목표가 있다고 보았다. 본 논문은 그러한 인식틀을 가지고 19세기의 문화재 보존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그리고 단순히 이를 적용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한 단계 더 발전적으로 나아가 그러한 현상들의 사상적 배경은 무엇이며, 그러한 현상을 만들어내는 데 있어서 과거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사례를 통해 분석하였다. 19세기 중반에 카톨릭의 교리와 의례를 새로운 신념과 가치체계로 주입하여 영국 국교의 종교적인 부활을 이루고자 했던 옥스퍼드 운동과 이를 실천하기 위한 행위규범으로 고딕양식을 종교적 공간에 재현하고자 한 캠브리지캄덴협회의 활동은 홈스봄이 제시한 전통을 만드는 행위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이다. 그리고 그것이 종교건축의 보존에 있어서 그대로 적용되고 실천되었다는 점에서 전통과 보존은 같은 축 선상에 존재한다. 당시에 과거는 종교적 목적을 실천하기에 적합한 특정시대와 특정한 건축양식으로만 이해하는 단층적인 재료였으며, 과거를 인식하는 틀 역시 종교적인 목적이나 사회적, 정치적인 이념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19세기 후반의 반복원 운동은 전대의 무분별한 양식적 복원을 막고자 했던 행위이다. 그리고 그 사상적 배경에는 변화된 과거 인식의 틀이 존재한다. 복원이라는 행위에 대한 개념정의가 보다 구체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면서, 행위의 속성을 인식하는 관점에서 전대의 과거에 대한 인식이 수정되었다. 전통은, 혹은 과거는 현재에 되살려야 하는 대상이 아니고 현재에도 살아있는 생명체이며, 복원은 그러한 생명력을 오히려 빼앗는 행위라는 관점으로 과거에 대한 인식이 변화된 것이다. 즉, 있는 그대로의 과거, 다양한 가치가 존재하는 과거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그러한 태도가 문화재 보수에 적용되기 시작하는 시대이다. 이러한 고찰을 토대로 향후, 국내에서도 보다 다면적인 관점과 충분한 자료를 축적하여 우리의 문화재 보존사를 이해하고 분석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장서각 소장 선생안(先生案)의 현황과 사료적 가치 (The status, classification and data characteristics of Seonsaengan(先生案, The predecessor's lists) in Jangseogak(藏書閣, Joseon dynasty royal library))

  • 이남옥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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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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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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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선생안은 인명부로써 관원의 성명 부임일 체직일 내직 거직 본관 자 과거 급제 여부까지 다양한 정보를 수록하고 있다. 따라서 일반적인 조선시대 인사 관련 자료에서는 살펴볼 수 없는 지방 수령과 중인들의 관직생활에 대한 선행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조선시대 선생안의 현황과 분류조차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본고는 조선시대 선생안의 현황과 분류 그리고 선생안 자료의 자료적 특징에 대해서 밝히고자 한다. 현재까지 전하고 있는 조선시대 선생안은 176종이다. 이 선생안들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47건), 서울대학교 규장각(80건), 국립중앙도서관(24건), 기타 소장처(25건)에 소장되어 있다. 장서각에는 왕실관련 선생안이, 규장각에는 중앙관청 관련 선생안이, 국립중앙도서관과 기타 소장처에는 지방관청 관련 선생안이 소장되어 있다. 다만, 본고는 접근 가능한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선생안 47건에 대해서 중심으로 그 내용을 검토하였다. 앞서 밝힌바와 같이 장서각 소장 선생안은 대체로 왕실과 관련된 선생안이다. 이를 분류해보면 중앙관청 선생안 18건, 지방관청 선생안 5건, 왕실관련 선생안 24건이다. 이를 다시 내용으로 분류해보면, 의례 및 외교 관련 관청 선생안 6건, 왕실 관리 관청 선생안 12건, 지방 관청 선생안 5건, 혼전 능원 선생안 14건, 왕실 교육 선생안 10건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선생안에 수록된 성명 본관 자 과거 급제 여부 제수일 부임일 체차일 내직 거직 등의 내용을 검토한 결과는 다음의 여섯 가지 특징으로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 수록 인원에 대한 기본적인 인적 사항을 알 수 있다. 둘째, 각 관청 및 관직의 재직기간과 승직 및 체직 사유를 알 수 있다. 셋째, 관제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넷째, 내직과 거직을 통해 조선시대 인사행정 시스템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 다섯째, 각 관청별로 특별히 중요한 날을 알 수 있다. 여섯째, 포폄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법전에 기록된 내용만으로는 알기 어려운 조선시대 현실의 모습이며, 이를 통해 조선시대 인사행정 시스템에 대해서 살펴볼 수 있다. 다만, 정밀한 검토를 하기 위해서는 현재까지 전하는 선생안 176종에 대한 DB화 작업이 필요하며, 이후 기존에 구축된 방목 족보 등의 자료와 연계하여 데이터를 분석해나간다면 조선시대 인사행정 시스템을 알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중수기 및 발굴 자료로 본 상주 양진당의 배치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Arrangements of YangjinDang in Sang-ju Foundation by Date on the Excavation and Jungsuki)

  • 김찬영;정명섭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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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0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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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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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This study estimated the prototype of Yangjindang at the time of its foundation by putting together the literature and discovered data and historical research on family related to Sangju Yangjindang, and looked at its architectural characteristics. These are summarized as follows: First, Yangjindang is an office building which was completed in three years [1629] after its start of construction when Keomgan Jojeong was at the age of 72 [1626] in his latter days and it was used for performing ancestral rites for Jojeong's forefathers of the head family of Pungyang Jo by family origin. Yangjindang was founded as a base of utopia for putting ancestral rites & commemoration, harmoniousness of a tribe, and educational idea into practice together with Ojakdang. Such a movement can be judged to interpret and apply the circumstances of the times realistically and flexibly where they tried to pursue the promotion of Confucianism & studies of the proprieties as well as the consciousness of practice, and to bring a tribe into harmony after the war through the retirement of Toegye School. Second, it is located at a topographically ideal spot on the edge of the Jangcheon-a tributary of Nakdong with a good physiology and landscape and its location was also the lot for a house of Jojeong's ancestor, which was burned down by war. Behind such a location and planning of Yangjindang, it is presumed, though not certain that it was modelled after Naeap village at Andong- Jojeong's parents-in-low's home. Third, as for its foundation size, it's a head house as much as about more than 100-kan, and its structure is composed of Samyo, Bonche, and Yangjindang. In addition, arrangements of buildings and its composition system and renovation procedures followed Chu-tzu Garyoe. Composition of Samyo can be restored to Yangjindang, Jugo, Woesammun, and Samyo; however, there has been no case of existence in case of Jugo building composition & arrangement takes on an aspect of a compromise between Gamyojido and Sandangjido of Garoe, which seems to be the result from flexibly interpreting and applying the rituals and studies of the proprieties of Toegye School in keeping with locational topography and realistic circumstances while making it a principle for them to observe by Toegye School. There exists a difference between Bonche and its counterpart of the upper class housing at Sangju district in that Bonche[main building] is a squre-shaped 'Ttuljip' typical of Andong setting a family ancestral ritual as a main function. Fourth, there existed a lot of hardships in raising money to cover repairs in time of doing repairs to this structure after 180 years since its establishment. In case of the repair work on Bonche, the level of renovation was limited to the replacement of old materials for rafters, doorpost, roof members and railings with new materials, together with partial alterations in case of window system. It is estimated that Yangjindang was renovated in 1808, and afterwards it was renamed Okryujeong after being re-built at another site. Through the repairs, the floor was expanded for the clan's meeting, and angle rafters and roof members were mended as well. Especially, the plane and structure of Okryujeong which was re-built at another site are expected to give clues to its restoration due to the resemblance to original appearance of Yangjindang at the time of its renovation in 1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