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militar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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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에서 후쿠시마까지, 핵과 미술가의 대응 (From Hiroshima to Fukushima: Nuclear and Artist Response in Japan)

  • 최태만
    • 미술이론과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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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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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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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The purpose of this essay is to examine the responses of artists on nuclear experiences through an analysis of the nuclear images represented in contemporary Japanese art. Japan has previously as twice experienced nuclear disaster in 20th century. The first atomic bombs were dropped in 1945 as well as the 5th Fukuryumaru, Japanese pelagic fishing boat, exposed by hydrogen bomb test operated by the US in 1954 nearby Bikini atoll. Due to Tsunami taken place by the great earthquake that caused the meltdown of Fukushima Nuclear Power Plant in March 2010, Japan is being experienced a nuclear disaster again. Despite practical experiences, comtemporary Japanese art has avoided the subject of nuclear disasters since the end of the Asia-Pacific War for a variety of reasons. Firstly, GHQ prohibited to record or depict the terrible effect of atomic bomb until 1946. Secondly, Japanese government has tried to sweep the affair under the carpet quite a while a fact of nuclear damage to their people. Because Japan has produced numerous war record paintings during the Second World War, in the aftermath of the defeated war, most of Japanese artists thought that dealing with politics, economics, and social subject was irrelevant to art as well as style of amateur in order to erase their melancholic memory on it. In addition, silence that was intended to inhibit victims of nuclear disasters from being provoked psychologically has continued the oblivion on nuclear disasters. For these reasons, to speak on nuclear bombs has been a kind of taboo in Japan. However, shortly after the atomic bomb dropped on Hiroshima, the artist couple Iri and Toshi Maruki visited to ruin site as a volunteer for Victim Relief. They portrayed the horrible scenes of the legacy of nuclear bomb since 1950 based on their observation. Under the condition of rapid economical growth in 1960s and 1970s, Japanese subculture such as comics, TV animations, plastic model, and games produced a variety of post apocalyptic images recalling the war between the USA and Japanese militarism, and battle simulation based on nuclear energy. While having grown up watching subculture emerged as Japan Neo-Pop in 1990s, New generation appreciate atomic images such as mushroom cloud which symbolizes atomic bomb of Hiroshima. Takashi Murakami and other Neo-Pop artists appropriate mushroom cloud image in their work. Murakami curated three exhibitions including and persists in superflat and infantilism as an evidence in order to analyze contemporary Japanese society. However, his concept, which is based on atomic bomb radiation exposure experience only claimed on damage and sacrifice, does not reflect Japan as the harmer. Japan has been constructing nuclear power plants since 1954 in the same year when the 5th Fukuryumaru has exposed until the meltdown of Fukushima Nuclear Plant although took place of nuclear radiation exposures of Three Mile and Chernobyl. Due to the exploding of Fukushima Nuclear Power Plant, Japan reconsiders the danger of nuclear disaster. In conclusion, the purpose of this paper may be found that the sense of victim which flowed in contemporary art is able to inquire into the response of artist on the subject of nuclear as well as the relationship between society, politics, culture, and modern history of Japan and international political situ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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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디자인그룹 "형이공방(型而工房)"의 활동과 업적에 관한 평가-토요쿠치 카츠헤이의 디자인 활동을 중심으로- (A Study and Evaluation of Japanese Design Group "Keiji Kobo" -especially on the designs of Toyokuchi Katshei-)

  • 서병기
    • 디자인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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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7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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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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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 형이공방(Keiji Kobo)은 독일 바우하우스의 교육활동이 그 정점에 있던 1928년에 결성되어 전쟁의 기운이 짙어져서 더 이상 활동을 할 수 없었던 제2차 대전 직전까지의 약 10년 간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으로 건축의 새로운 사조를 표방하는 근대디자인을 목표로 하여 여러 가지 활동을 한 희귀한 자생적 디자인 연구단체로써, 일본이 서구 디자인 사조를 흡수하여 현대 디자인의 장을 화려하게 펼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끼친 상징적 단체이다. 형이공방에서는 산업시대를 전제로 한 새 시대의 생활공예-합리적인 생활가구-를 추구함으로써 근대적 사고를 실천하기 위하여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공방의 작업은 조사 시작(試作) 실험 연구 전시회 강습회 주문판매 광고 집필이라는 많은 영역에 걸쳐있다. 그 활동은 결코 상업적인 목적으로 변질되지 않은 진지한 것이었으며, 군국주의 일본이라는 당시의 특수한 시대적 배경에 비추어 보더라도 놀랍도록 기능주의 사고를 견지한 순수하고 투명한 이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 공방은 어슬프고 규모가 적은, 10년 남짓 활동했던 연구집단이었다. 그러나 조용했던 그 활동 속에는 불같은 의지가 숨어 있었으며, 오늘의 기준에서 보더라도 그 파급효과를 과소평가 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일본의 오늘과 같은 발전의 이면에는 무수한 선각자의 기여가 있었을 터인즉, 형이공방의 그것도 디자인분야에 관한 한 빠트릴 수 없는 것 중 하나이다. 미루어 짐작컨대, 당시의 일본 지식인들은 그들의 헌신과 활동이 대중의 삶의 질을 근대화시키는 데 하나의 기여가 되기를 하나같이 열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형이공방은 어떤 의미에서 일본에서의 꽃피다 만 작은 바우하우스라고 평가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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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동왕자 서사의 근대적 재현 양상 연구 (The Modern Representations of Prince Hodong stories)

  • 유인혁
    • 대중서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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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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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13-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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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 연구는 근대 이후 호동왕자의 서사가 어떻게 재현되었는지 정리하고 그 의미를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호동왕자의 이야기는 12세기에 『삼국사기』에 처음 소개되었는데, 현재 TV 드라마, 영화, 소설, 희곡 등 다양한 갈래에 걸쳐 재생산되고 있는 대중적이며 민족적인 서사이다. 흥미로운 점은 『삼국사기』를 제외한 근대 이전의 문헌 속에서 호동왕자의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호동왕자는 1935년에 이르러 윤백남에 의해 최초로 문학적으로 재현되었으며, 비로소 현재와 같은 대중성을 갖게 되었다. 즉 호동왕자의 이야기는 근대에 들어와 발견(명)된 '전통'의 표상 중 하나라 볼 수 있다. 윤백남을 필두로 이태준의 『왕자호동』, 유치진의 『자명고』로 이어지는 글쓰기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호동왕자의 성격들을 주조했다. 윤백남은 정사(情死)의 모티프를 삽입하여 낭만적 연인으로서의 호동의 모습을 만들어 냈고, 이태준과 유치진은 낙랑을 한사군 중 하나인 낙랑군으로 설정함으로써 민족(국가)주의적 컨텍스트를 삽입했다. 이 두 양상 모두 『삼국사기』에는 드러나지 않는 것으로, 위 작가들에 의해 고안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삽입된 성격들은 각 텍스트들이 생산되었던 시기의 사회·정치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윤백남의 경우 과거를 노스탤지어의 대상으로 파악하는 근대적 미의식을 단면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태준의 경우 총동원체제를 (반)내면화하는 식민지 지식인의 사유체계를 보여 주고 있고, 유치진은 해방 공간 속에서 역사적 인물을 통해 민족의 남성성을 상상해내는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바로 이렇게 서로 다른 맥락 속에서 소환되고 전유된 호동의 표상들이 모여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호동왕자'를 구축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과 대만의 대학문화 비교 : 위계와 성차별, 폭력의 군대적 징후를 중심으로 (Comparison between South Korean and Taiwanese college culture: Focusing on the Hierarchical Sexist Influence of Military Culture)

  • 권인숙;나윤경;문현아
    • 여성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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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7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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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5-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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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본 연구는 징병제가 존재하고 한국과 사회적 역사적 유사성이 두드러지지만, 한국과는 달리 위계적 대학문화에 대한 증상이 거의 없는 대만과 대학생문화에 대한 양적 질적 비교를 병행하였다. 이런 비교조사와 분석을 통하여 한국대학의 위계적, 성차별적 군대문화의 현황을 좀 더 명확히 짚어내고 원인을 파악하려 노력하였다. 비교 연구 결과를 보면 대만의 대학문화는 한국보다 위계적이지 않고, 위계문화의 필요성에 대한 지지도가 낮았다. 폭력이나 단체기합등 군대문화적 요소는 주로 한국대학문화에서만 나타났고 남성중심적 술문화와 성매매문화의 지배력도 한국에서 더 강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대만과 한국의 대학문화의 이러한 차이를 낳는 사회 역사적 원인을 살펴보면 대만이 한국보다 위계적 집단주의 문화의 근거이고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는 국가주의적, 군사주의적 국민의 내적 동의나 뿌리가 약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대만 대학문화가 상대적으로 덜 위계적인 가장 중요한 직접적 원인은 징병시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국은 일반적으로 재학중 군대를 다녀오지만 대만은 대학을 마친 후 군대를 다녀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국의 대학문화에서 군유경험자는 폭력성이나 위계문화 또는 술문화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로 확인되었다.

김용환의 일본에서의 작품 활동 연구 : 1930~40년대 삽화를 중심으로 (A Study on Kim, Yong-Hwan's Works of Art in Japan: Focusing on the Illustrations between 1930s and 1940s)

  • 김소원
    • 만화애니메이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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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권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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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47-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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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김용환은 1940~60년대에 활동한 한국의 주요 만화가의 한명이다. 김용환은 어린이 만화에서 시사만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만화를 그렸다. 뿐만 아니라 김용환은 해방 후 한국의 만화잡지와 만화신문의 발행을 주도 했고 한국만화의 선구자로서 높이 평가 받고 있다. 김용환은 만화뿐만 아니라 잡지와 신문, 소설의 삽화, 동양화, 역사화, 캐리커처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미술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갔던 것이 계기가 되어 김용환은 일본에서 기타 코우지(북굉이(北宏二)) 라는 이름의 삽화가로 데뷔하게 된다. 이후 김용환은 일본의 유명 출판사의 잡지와 소설의 삽화가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러나 국내에는 김용환의 일본 활동에 대한 간단한 이력과 몇 장의 삽화만이 소개 되어 있을뿐 구체적인 작품이나 그 내용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본 논문에서는 그동안 한국에 소개되지 않았던 김용환의 일본 활동과 작품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도록 한다. 김용환이 삽화가 기타 코우지로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잡지에 어떠한 작품들을 실었는지, 그리고 삽화가로서 기타 코우지의 평가에 대해서도 서술해 보겠다. 본 논문은 일본의 국회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자료를 바탕으로 기타 코우지의 이름으로 남겨진 잡지와 단행본의 삽화들에 대해 고찰 했다. 본 연구를 통해 김용환은 일본에서 다양한 출판사와 잡지에서 활발하게 활동 했으며 김용환이 삽화를 그린 많은 잡지들이 유명 출판사에서 간행된 인기 잡지였던 점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김용환이 일본에서도 그 실력을 크게 인정받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김용환의 삽화 상당수가 1930년대 말에서 1940년대 초에 그려졌다. 이 시기는 일본이 국가 총동원법을 내세워 전쟁을 위해 국가의 모든 역량을 집결 시키던 시기로 출판물도 엄격한 검열을 받았다. 이 시기 출판물의 대부분은 군국주의를 옹호하고 전쟁을 미화하는 내용이었고 김용환의 삽화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김용환의 일본 활동에 있어 큰 아쉬움으로 남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본 논문은 김용환의 일본 활동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의 발굴이라는 부분에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향후 김용환의 작품에 대한 평가와 김용환의 다양한 이력에 대한 좀 더 깊이 있는 연구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 한다.

식민지 신문 '사회면'의 감정정치 -사회적 사실들의 정치적 서사화 (The Society Page of Newspaper of the colonized Korea, its politics of sentiment and modulation of social facts)

  • 유선영
    • 한국언론정보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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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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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7-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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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이 연구는 1920~1930년대 식민지 시기 신문의 사회면-사회적 보도가 정치적으로 부호화되고 해독되는 양식화의 메커니즘을 분석하고 있다. 민족국가와 정치부재, 그리고 주밀한 검열체제 하에서 신문은 비정치적 장르를 정치화하는 담론전략을 시도하며 사회면은 이 식민지적 맥락 안에서 정치적 언설로 구성되고 해독되었다. 이를 규명하기 위해 첫째 민간지의 사회면의 위상 및 편집방향, 둘째 사회면의 사회적 사실을 생산하기 위한 취재, 조직, 기자, 기사작법, 셋째 사회면을 둘러싼 신문과 기자의 부호화 전략 및 이에 공조하는 독자의 해독 규약을 분석했다. 사회면 또는 사회적 사실의 정치적 양식화는 객관적 사실보다 이면의 심리적 사실을 중시하고, 식민지 현실의 부정적 현상(現狀)에 주목하면서 운명공동체로서 민족적 비참을 형상화하며 뉴스를 극적 구조의 감정적 현실 서사(實事敍辭)로 구성하였다. 사회면은 민족공동체적 감각을 공유하고 유지하는 데 의미를 부여하며 이를 위해 민족적 감정을 동요하는 취재보도와 기사의 양식화를 이룬 것이다. 식민지에서는 모든 사회적 사실들이 정치적 문제로 환원된다는 점을 전제하면 사회면에 배치되는 사회적 사실들에 정치적 함의를 덧씌우기 위한 식민지 지식인/기자들의 전략과 전술, 의도는 식민지 저널리즘의 한 특수한 양상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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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앙의 변법과 법치사상의 특성 - 규범 3단계설의 적용을 중심으로 - (The Characteristic of Shang Yang's Legal Reforms and Thought - Focusing on the application of the three-step theory of norms -)

  • 이종성
    • 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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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4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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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33-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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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상앙은 전기법가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후일 한비자에게 사상적인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변방의 약소국이던 진나라를 일약 신흥 강대국의 반열에 올려놓음으로써 진시황이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는데 초석을 놓은 인물이다. 그는 특히 법을 중시하여 법가의 법치사상에 대한 이론적 틀을 체계적으로 정립하는데 기여한 인물로서 주목되는 인물이다. 이 글은 먼저 상앙의 법치사상의 선결 요건에 해당하는 변법시행의 내용을 역사 기록물에서 살펴봄으로써, 상앙이 두 차례에 걸친 변법을 성공적으로 완수해낸 사실과, 변법의 목표가 천하통일을 위한 부국강병을 목표로 수행된 것임을 확인한다. 또한 이 글은 상앙의 법치사상이 법의 권위와 군주의 권능을 일원화해 나아가기 위한 구체적인 단계행정을 밟아나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 글은 특히 서구의 사회정치적 규범이론에서 제시한 규범 3단계설을 상앙의 법치사상에 적용하여 그 특성과 의의를 명시적으로 검토해보는데 초점이 맞추어진다. 이른바 사회정치적 규범은 발생, 단계적 확산, 내부화라는 3단계를 거치는데, 이 글은 상앙의 법치사상 역시 이와 같은 3단계의 과정을 거쳐 구체화되었음을 살펴본다. 요컨대 이 글은 상앙의 법치사상이 발생론적 선택 규범주의, 엄형을 통한 군주 전제주의, 부국강병을 위한 내부적 군국주의라는 단계를 거쳐 점차적으로 체계화되고 있음을 논의한 결과물이다. 상앙 법치사상의 내용들이 사회정치적 규범의 3단계설에 각각 대응하여 개별적 의의를 생산해내고 있다는 점을 밝히는 것이야말로 이 글의 독자적 고유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적인 검토를 통해 상앙 법치사상의 체계와 의의가 보다 명료하게 확인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이 글의 취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