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late Joseon Era

검색결과 79건 처리시간 0.021초

한국 기록관리의 사적 고찰과 그 특징 (Historical Observation and the Characteristics of the Records and Archives Management in Korea)

  • 이영학
    • 기록학연구
    • /
    • 제34호
    • /
    • pp.221-250
    • /
    • 2012
  • 이 글은 조선시기부터 현재까지 한국 기록관리를 역사적으로 고찰하면서 그 특징을 소개한 것이다. 조선시기에 기록관리 제도가 구축되게 된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고 1894년 갑오정권에서 근대적 기록관리 제도가 성립하였으며,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미국의 행정학과 기록관리 방식을 수용하면서 새로운 기록관리제도가 정립되게 된 과정을 소개하였다. 끝으로 1999년 이후 "공공기관의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후 현대 기록관리제도가 확립되게 된 과정을 설명하였다. 조선시기에 기록을 잘 관리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관료제를 기반으로 한 조직사회이어서 기록을 잘 관리하는 것이 중요했다. 둘째 조선왕조의 성립과정에서 왕권과 신권이 대립하였는데, 그 대립과정의 타협물로서 "조선왕조실록" 등 기록이 남게 되었다. 셋째 현재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비슷한 일을 치룰 때에 참조하도록 하였다. 넷째 당대의 역사적 사건을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후세에 역사적 평가를 받고자 하였다. 그런 측면에서 조선왕조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기록을 많이 남겼다. 1894년 갑오정권은 권력을 장악하자 군국기무처를 설치하면서 개혁정책을 실시해갔다. 그것은 기록관리 부문에서도 나타났다. "명령반포식"을 공포하면서 법령의 제정과정을 규정하였고, 공문서 형식을 변화시켰다. 공문서 형식에서는 중국의 연호 대신에 '개국기년'을 사용하였으며, 사용 문자를 한자로부터 한글 혹은 국한문 혼용으로 바꾸었으며, 공문서 양식을 인쇄하여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정권의 독자성 및 자립성을 드러내도록 하였다. 1910년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을 식민지로 병탄하면서 조선의 기록관리 전통은 단절되고, 일제는 식민통치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기록관리제도를 구축하였다. 1945년 한국은 일본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되고,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였다. 1950년대에 한국 정부는 일제의 기록관리제도를 그대로 원용하였다가, 1950년대 후반 이후 미국의 행정학과 기록관리 방식을 수용하면서 새로운 문서관리방식을 구축하게 되었다. 그러나 관료들의 기록관리에 대한 인식은 희박하였으며, 대통령기록 등 중요한 역사기록은 많이 파기되거나 유실되는 등 기록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한국에서 기록관리가 제대로 행해진 것은 1999년 이후였다. 1999년에 "공공기관의 기록물관리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기록관리에 대한 인식이 강화되었고, 2005년 "국가기록관리혁신 로드맵"이 작성되고 추진되면서 한국의 기록관리제도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2005년 이후 기록관리 프로세스와 시스템의 정비, 기록관리 표준의 제정, 법과 제도의 정비, 기록물관리 전문요원의 배치 등이 이루어지면서 한국의 기록관리는 한 단계 진전되게 되었다.

시문과 바위글씨로 본 함양 대고대(大孤臺)의 경관 향유자와 장소패권(場所覇權) (A Study on the Persons Enjoying the Landscape of Daegodea in Hamyang and Space Hegemony through Analysis of Poetry and Letters Carved on the Rocks)

  • 노재현;이정한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 /
    • 제32권1호
    • /
    • pp.10-21
    • /
    • 2014
  • 본 연구는 함양 남계천변에 돌출한 바위 대고대의 경관성과 향유 주체에 주목하였다. 옛 시문과 석벽에 의탁(依託)된 인명 등 바위글씨의 분석과 해석을 통해 이곳의 장소 특성을 밝히고, 대고대에서 벌어졌던 경관 향유와 장소 패권 양상을 조명한 본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고지도에서 나타난 대고대는 지근거리에 5개소의 서원이 집중 포치(布置)되고 있으며, 대(臺) 자체의 입체적 볼륨감과 기괴함이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16C 옥계(玉溪) 노진(1518~1578)에 의해 최초로 명명된, 대고대(大孤臺)의 쓰임새를 고대(孤臺) 정경운(鄭慶雲: 1556~?)의 고대일록(孤臺日錄)에 근거해 분석한 결과, 남계서원 등의 임원과 유생의 조망 놀이 휴양 회의 계회 등 다양한 용도의 정치 사회적 소통의 장으로 활용된 것으로 확인된다. 대고대의 공간구성을 살펴보면 구졸암(九拙菴) 양희(梁喜: 1515~1581)의 신도비를 중심으로 상단 암벽에는 청근정(淸近亭)이, 그 서측에는 산앙재(山仰齋)가 위치한다. 동서로 펼쳐진 높이 11m, 넓이 약 $350m^2$의 대고대 반석 상부는 강론과 음영을 위한 장소로 널리 활용되었다. 반석 북서측에 '석송(石松) 추사(秋史)'라고 음각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서체의 바위글씨와 그 옆의 일명 '석송'이라 불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사목의 잔해는 이곳의 역사성과 진정성을 한층 강화시켜 주는 경관요소이다. '대고대(大高臺) 개은서(介隱書)'와 '묵헌(默軒)' '정근상('鄭近相)' 바위글씨는 각각 개은(介隱) 정재기(鄭在箕: 1811~1879)와 그의 증손(曾孫) 정근상(鄭近相: 1893~1934)에 의해 기록된 배타적 공간 향유와 장소패권의 산물이자 조선 말기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그들이 이곳 대고대의 향유 주체였음을 알리는 낙관(落款)이다. 요컨대 대고대는 조선 중기 이후 '구졸양선생장구소'로서 장소 선점의 묵시적 의미를 지녀왔으며, 조선말기와 일제강점기에는 정재기와 정근상의 연이은 장소패권 과정을 거치면서도 '동북강회소 천령제선현장구소'라는 범함양(凡咸陽)의 다자(多者) 강회 및 추념공간으로 변형 계승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벽에 쓰여진 다수의 인명 바위글씨는 '하동정씨(河東鄭氏)'와 '풍천노씨(豊川盧氏)'가 대고대의 경관 향유 및 장소패권의 주체였음을 묵언한다. 대고대에서 새긴 '바위글씨'는 경관향유 의지의 표상이자 장소 주도권 쟁탈을 보여주는 또 다른 형태의 문화경관이자 정원 경영의 사례이다.

현존 최고(最古)의 매향비(埋香碑): 영암 정원명(貞元銘) 석비(石碑) (The oldest Maehyang-bi (埋香碑) of Memorial Inscriptions existing on record; Yeong-am's 'Jeongwon (貞元)' Stone Monument)

  • 성윤길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 /
    • 제54권1호
    • /
    • pp.70-99
    • /
    • 2021
  • 전라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영암 정원명(貞元銘) 석비(石碑)는 전남지역 소재 금석문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발견 직후부터 매향비의 가능성이 언급되어 더욱 주목되었다. 하지만 정원(貞元) 2년(786)이라는 절대 연대가 있어 비교적 이른 시기의 금석문임에도 불구하고 이 석비를 주제로 한 단독 논고는 많지 않다. 필자는 이 석비에 대한 기존 연구 성과를 검토하면서 3D 스캔 자료, 1995년 탁본 자료, 국립광주박물관 소장 탁본을 기초로 하여 4행 42자의 명문을 다시 판독하였다. 검토 결과 이 석비는 매향비임이 확인되었다. 특히 조선 후기 문헌인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에 매향(埋香) 입석(立石)이나 글자를 알아볼 수 없다고 기록되어 이 석비가 매향비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고려 말~조선 초의 현존 매향비에 자주 산견되는 '매(埋)' 혹은 '매향(埋香)'이라는 표현은 없으나, '탄장(呑藏)'과 '합향십속(合香十束)'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는 점에서 매향비임을 알 수 있었다. 즉 '매(埋)'의 의미를 '탄장(呑藏)'으로 대신 표현하였다고 생각된다. 이에 대한 방증 자료는 남북국시대 금석문인 888년 건립의 진감선사 대공탑비이다. 여기에는 '해안식향(海岸植香)'이라는 표현이 있어 '매(埋)'자를 쓰지 않아도 그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따라서 정원명 석비에 '매(埋)'자가 확인되지 않는다고 하여 매향비가 될 수 없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정원명 석비가 매향비라는 방증 자료는 도갑사 어귀에 있는 국장생(國長生) 주변 금표석(禁標石)의 명문에도 있다. 금표석의 명문은 조선 후기 중흥의 군주였던 정조의 능, 즉 건릉(健陵)에 사용되는 향탄(香炭)을 월출산 도갑사 주변에서 마련하였을 가능성도 시사하고 있다. 금표석에 새겨진 '향탄(香炭)'은 당연히 향(香)과도 관련 있기 때문에 예전부터 도갑사가 있는 월출산 주변 지역이 향(香)과 관련되어 오래된 역사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석비에 보이는 명문, 조선후기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의 기록, 금표석의 명문 등, 이 모든 것이 정원명 석비가 매향비임을 알려주고 있다. 실물로 현존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매향비가 고려 말 1371년과 조선 초 1410년 두 개의 연대를 보이고 있는 영암 입암리 매향비임을 고려할 때, 786년 건립의 정원명 석비는 조선 후기 문헌과 그 문헌을 증명하는 실물로서, 우리나라 최고(最古) 매향비라는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서울 서촌지역 조선조 원림의 위치추적을 통한 경관 해석 (The Landscape Interpretation of Joseon Era Gardens in Old West Village, Seoul through the Locational Investigation)

  • 김한배;이승희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 /
    • 제32권3호
    • /
    • pp.168-182
    • /
    • 2014
  • 조선시대 서촌에서는 많은 성시원림들이 만들어졌고 그들 중 다수가 진경산수화로 그려졌었다. 본 연구는 먼저, 서촌의 대표적 원림들의 위치를 보다 실증적 기법에 의하여 규명하려 하였다. 조선조 진경산수화에 나타난 원림경관을 ArcGIS 3차원 지형 모델링과 비교함으로써 사실에 근접한 위치를 밝혀내고 이에 근거하여 지형과 경관의 특징을 해석하려 하였다. 원림추정지 주변의 지형을 3차원 지형모델로 작성한 후, 조망점을 이동시켜 진경산수도와 근접한 3D 모델의 구도에서 대상지의 위치를 찾아내었다. 이후 모형에 지적도를 중첩시켜 원림 터의 지번을 확인하였다. 그 결과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서촌의 초기 원림인 '청풍계 원림'은 인왕산 계곡의 종단부에 위치하여 외부로부터 감추어진 '위요형 경관'을 보인다. 중기원림인 '청휘각 원림'은 옥류동 계곡과 능선 사이에 위치하여 외부로 보다 개방된 '반(半)개방형 경관'을 보인다. 후기원림인 '서원 원림'은 대상지 중 가장 높은 능선 상단에 위치하여 '조망형 경관'을 보인다. 말기원림인 '송석원 원림'은 능선과 시가지의 접점 언덕에 위치하여 '개방형 경관'을 보인다. 즉, 서촌원림의 경관과 사회적 기능은 함께 점진적으로 개방되어 온 것으로 나타난다.

서산(瑞山) 보원사(普願寺) 철조여래좌상(鐵造如來坐像) 고찰(考察) (A Study on the Iron Seated Buddha at Bowonsa Temple in Seosan)

  • 강건우
    • 미술자료
    • /
    • 제100권
    • /
    • pp.22-49
    • /
    • 2021
  • 보원사(普願寺)는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가야산 북쪽에 위치한 사찰로, 경내에는 나말여초에 조성된 문화재가 남아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은 충청남도의 고적 조사를 계획했고, 1916년(대정 5) 보원사지에 가서 현지 조사를 진행했다. 현지 조사 과정에서 소옥(小屋)에 안치된 철조여래좌상(무릎너비 7척, 두께 5척 5촌)을 확인했고, 이듬해에 경복궁으로 해당 철조여래좌상을 이운했다. 이는 일제강점기 보원사지에 2m가 넘는 대형 철조여래좌상 1구만이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철조여래좌상은 법인국사(法印國師) 탄문(坦文)(900~975)이 955년에 조성하였을 것이다. 탄문은 광주 고봉의 유력가문 출신으로 태조의 보살핌 속에 화엄종의 중심인물로 성장했고, 연이어 혜종(惠宗)(재위기간 943~945)과 정종(定宗)(재위 945~949)대에도 왕실의 불교행사를 주관했다. 이후 탄문은 대목왕후(大穆王后) 황보씨(皇甫氏)(?~?)의 후원을 받은 균여(均如)(923~973)의 등장으로 개경에서 떨어진 보원사로 이주하게 되었지만, 그곳에서 충주 유씨의 후원을 받아 지지 세력의 결속을 다지고 한편으로는 광종(光宗)(재위 949~975)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해 대형의 철조여래좌상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탄문의 비문에 나오는 '주금상지삼존(鑄金像之三尊)'도 보원사에서 철조여래좌상이 주조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 근거이다. 철조여래좌상의 원(原) 봉안처는 보원사지 내 '건물지3'으로 추정된다. 발굴조사 결과 현재의 금당지는 조선시대에 세워진 건물지로 드러났기 때문에, 철조여래좌상은 조성 당시 다른 장소에 봉안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건물지3은 다른 건물지에 비해 고려시대 기와와 자기의 출토 빈도가 높고, 무엇보다도 정방형에 가까운 불단 유구가 남아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추정이 가능하다. 철조여래좌상은 조성 당시 고려시대 전각인 건물지3에 봉안되었다가 조선시대 중창불사를 통해 지금의 금당지로 이운되었을 것이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19세기 말~20세기 여성용 쓰개 장식의 재질분석 (Material Analysis of the late 19th century to 20th century Women's Hats Ornaments in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 이새롬;오준석;황민영
    • 보존과학회지
    • /
    • 제35권2호
    • /
    • pp.169-176
    • /
    • 2019
  •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19세기 말~20세기 여성용 쓰개에 사용된 장식 19점에 대하여 SEM-EDS로 조성을 분석하였다. 쓰개 장식 16점은 융제 성분인 $Na_2O$와 PbO를 함유하고 있어 한국의 고대부터 출토되거나 전승되어온 납유리와 조성이 다른 유형의 납유리였다. 쓰개 장식 2점은 $Na_2O$$K_2O$가 3% 혹은 5% 이상 함유한 알칼리혼합유리, 1점은 CaO를 5% 이상 함유한 포타쉬유리 III형으로 분류되었다. 이 중 납유리는 일제강점기 조선에 수입된 일본의 공예용 납유리와 조성이 유사하여, 19세기 말~20세기 여성용 쓰개 중 납유리를 사용한 장식은 원료를 일본에서 수입하였거나 조선 내 일본인 기술로 생산한 공예용 납유리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통해 근현대에 들어서 전통적으로 사용되어온 쓰개 장식의 사용된 옥이나 호박과 같은 보석이 일본에서 수입된 공예용 납유리로 대체되어 새롭게 사용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고려시대 왕실호위제도의 사적 고찰 (Historical Review on the Security Service for the Royal Household in the "Goryeo" Era)

  • 이성진;김의영;이종환
    • 시큐리티연구
    • /
    • 제14호
    • /
    • pp.413-429
    • /
    • 2007
  • 고려시대의 왕실 호위라 함은 오늘날로 보면 국가원수에 대한 경호에 해당한다. 고려시대의 독특한 정치제도가 완성되기까지는 신라시대나 태봉국의 제도를 답습하여 왕의 신변을 중심으로 경호가 실행되었다. 고려의 중앙군은 2군과 6위라는 8개의 부대로 편성되었다. 2군은 6위보다 위였으며 이는 응양군(鷹揚軍)과 용호군(龍虎軍)으로서 이를 근장(近仗)이라고 불렀다. 이를 오늘날의 공경호와 관련을 지어보면 근접경호에 해당된다. 고려 귀족 사회의 안정기에 귀족문화의 전성기를 누렸으나 그 뒤로 귀족분열과 상극대립으로 중앙통제력이 약화되는 가운데 무신란이 일어나고 무신들이 집권함으로서 왕의 신변은 안정되지 못하였다. 최씨 무인집권시대에 이르러 무인집권의 안전을 위하여 도방을 설치했고 최우 시대에는 그의 문객들을 모아 사병들뿐만 아니라 정방, 서방, 등의 문신을 거느려 인사행정을 담당케 했다. 몽고에 항쟁하던 시대에는 무신통치의 군사적 기반이었던 삼별초를 중심으로 항쟁했다. 최씨 정권시대의 그들 나름의 국가관과 국가 호위의 정신을 알 수 있다.

  • PDF

증산의 풍수관(風水觀) 고찰 - 『전경(典經)』을 중심으로 - (A Study on Jeungsan's view of Pungsu: Chiefly focused on Jeonkyung)

  • 박상만
    • 대순사상논총
    • /
    • 제25_2집
    • /
    • pp.45-70
    • /
    • 2015
  • Master Jeungsan understood a general view of Pungsu but actually he used the theory of Pungsu in his own religious perspective, transcending it. The theory of Pungsu is different. But the fact that it is premised on the principle of 'in and yang', the five-element principle, the Book of Changes, energy thought, and To chugi piyung, etc. is generally recognized. The three important elements of Pungsu are mountain, water, and direction or man. Pungsu has formal principles such as Gallyongbeop, Jangpungbeop, Deuksubeop, Jeonghyeolbeop, Jwahyangbeop, and Hyeongukron. etc. In the late of Joseon, Jeungsan established a new traditional thought, understanding Bibopungsu, Gukdopungsu, Minganpungsu, etc. However, he reinterpreted them to be suitable to his religious ideal and let his followers understand them as well. In particular, Jeungsan overcame the previous view on earth and expressed a new perspective to enhance earth up to the level of heaven. In the perspective of the traditional world, earth is lower than heaven, but Jeungsan made it a status equal to heaven. He mentioned that in the past, the culture and history of man was influenced by earth's energy but today, at the age of man respect, he put passive man influenced by earth-condition on the more subjective and active status. Even though he mentioned different Pungsu, Hyeongguk, and Hyeolmyeong, he expressed the shape of Pungsu within the construction of three worlds, the one of heaven and earth transcending good or ill luck or a favorable change in fortune. He practised the expedient of Pungsu from the stand of the construction of heaven and earth instead of the usage of Bibopungsu, Gukdopungsu, and Minganpungsu. He diagnosed that the division of the world is caused by the one of earth and tried to solve it. Moreover, he said that Myeongdang(a propitious site) must be the man-orientation rather than the earth-orientation. It means that Pungsu, stressing the energy of earth and turning one's luck, is changing into the world of man-orientation. In other words, Jeungsan diagnosed the world of Pungsu but he ultimately used Pungsu theory in building up his own view of religious world transcending such a theory.

조선 초기 용준(龍樽), 분청사기 상감 운룡문 호의 특징과 성격 (A Research on Buncheong Jar with dragon and cloud patterns(龍樽) in the early the Joseon Dynasty with priority given to Buncheongsagisanggamunryongmunho, National treasures)

  • 오영인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 /
    • 제55권1호
    • /
    • pp.85-110
    • /
    • 2022
  • 본 논문은 조선 초기 용준(龍樽)의 실례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분청사기 상감 운룡문 호에 주목하여 제작과 용도, 그리고 전개양상에 주목한 것이다. 분청사기 상감 운룡문 호는 높이 50cm에 달하는 대형의 입호로 전체적인 기형에서 안정감을 주고, 동체 외면에는 상감 및 인화상감기법으로 시문된 문양으로 유려한 장식성을 갖추었다. 입호의 기형과 문양 소재, 제작수법은 중국 원·명대 자기를 연상시켰고, 세종연간에 제작된 왕실 자기로 그 가치가 인정되었다. 다만, 조선 초기의 도자사 연구에 있어 우수한 자기 제작수준을 보여주는 실례로 단편적인 기술 외에 생산유적이나 사용실태, 소멸 등 일련의 전개과정에 대한 논의가 미진하였고, 이에 따라 조선 초기 왕실 자기로서의 성격과 의미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였다. 분청사기 상감 운룡문 호는 세종연간 왕실 행사의 화준으로 사용된 용준이었다. 1420~1430년대라는 한정된 기간상주목 일대 특정 상품자기소에서 제작된 용준으로서 원·명대 백자 청화 운룡문 호와 기형 및 문양 구성에서의 친연성뿐만 아니라 문양면에서 고려청자의 전통성, 기형 및 문양면에서 조선 자기의 시대성을 모두 보여주었다. 조선 왕실은 개국의 당위성과 문물 정비의 근간을 명으로부터 찾았고, 어기 또한 백자 및 청화백자를 선택함으로써 지향대상이 명 황실임을 보여주었다. 왕실 의례에 사용할 용준 역시 명 황실로부터 사여 받은 '청화운룡백자주해'를 기준으로 삼았고, 분청사기가 아닌 백자로 제작된 용준이 오랜 기간 왕실 의례에 화준과 주준으로 사용되었다. 그 결과 조선 초기 왕실에서 화준으로 사용되어온 분청사기 상감 운룡문 호는 명 황실로부터 '청화운룡백자주해'가 전해진 1430년을 기점으로 점차 왕실의 용준으로서 가졌던 의미와 용도를 백자 청화 운룡문 호에 일임하였고, 제작과 사용의 중단으로 이어졌다.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의 학서(學書) 연마와 서예론(書藝論) 고찰 (A Study on Changam, Lee Samman's a course of learning calligraphy and calligraphy theory)

  • 김도영
    • 문화기술의 융합
    • /
    • 제6권1호
    • /
    • pp.327-334
    • /
    • 2020
  • 조선 후기 3대 명필로 지칭될 만큼 독자적 서풍을 창안한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1770~1845)은 '법고(法古)'를 중시하였는데, 한위대(漢魏代) 서예를 근본으로 하고,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완성한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를 마음의 스승으로 삼아 수련하였다. 만년에는 올바른 필법 전수를 위해 『창암서결(蒼巖書訣)』을 저술하여 보편적 서예의 기본원리와 자신의 서예관을 피력하였다. 창암(蒼巖)이 지향하는 서체는 해서(楷書) 근골(筋骨)의 확립을 통한 초서(草書)로 완결된다. 이를 위해 한위(漢魏)의 서체를 전범(典範)으로 제안하였는데, 온후간원(穩厚簡遠)한 한위근골(漢魏筋骨)은 무위자연적(無爲自然的) 무법(無法)의 경지를 보여준다. 이로 보아 창암(蒼巖) 서예론의 핵심이자 궁극적 지향점은 '자연(自然)'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법의 극치에 이르러 다시 무법(無法)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여기에서 음양(陰陽)이 생성되고 형(形)·세(勢)·기(氣)가 부드러움을 도모하면 기괴(奇怪)함이 생겨난다고 보았던 것이다. 한편, 고법(古法)에 얽매이지 않고 우졸(愚拙)한 자연천성(自然天成)을 발현하면 장법과 포치가 일운무적(逸韻無跡)한 득필천연(得筆天然)을 이룬다고 강조하였다. 우리는 이 연구에서 그의 서체가 자연을 예술로 승화하면서, 조선 고유의 서예미를 끊임없이 접목·시도하였음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리하여 근골이 풍부하고 생명력과 역동감이 넘치는 형세를 이룬 일운무적(逸韻無跡)을 체화(體化)하였고, 득필천연(得筆天然)한 극공(極工)의 심미경지를 이루어 독창적인 '행운유수체(行雲流水體)'로 구현하였고 마침내 호남지방에 동국진체(東國眞體)의 서풍과 서예정신을 더욱 창달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