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late 19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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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화'에서 '생의료화'로: 정신장애의 사례 (From 'Medicalization' to 'Biomedicalization': the Case of Mental Disorder)

  • 김환석
    • 과학기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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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4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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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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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지난 40여 년 동안 의료에 대한 사회과학의 지배적 관점은 '의료화' 이론이었는데, 이는 비의학적 현상으로 취급되던 문제(예: 동성애, 알코올중독, 비만 등)를 질병으로 재정의하여 의학적 개입의 영역으로 포함시킴으로써 의료전문가의 권력이 확대되는 사회적 과정을 가리켰다. 그런데 1980년대 중반 이후 의료 분야에서 생물과학과 정보기술의 확산에 따른 급속한 기술과학적 변화와 이와 연관된 생명경제 등 새로운 사회적 배치의 출현은 최근 '생의료화' 이론이라는 새로운 사회과학적 관점을 대두되게 하였다. 이 논문에서는 현대 의료에 대한 사회학적 및 과학기술학적 이해를 심화시키기 위한 기본 작업의 하나로서 의료화 이론과 생의료화 이론을 비교하고 그 장 단점을 평가해보고자 하였다. 그리고 또한 이 중에서 어떤 이론이 더 적실성이 있는가를 정신장애의 사례를 통해서 분석하고자 하였다. 분석의 결과, 적어도 정신장애의 경우에 의료화는 19세기 초부터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전개되어 온 것이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20세기 말부터 현재까지는 생의료화 이론에서 주장하는 다섯 가지의 핵심적 과정들도 대체로 관찰되며 실현되고 있는 것으로(정신장애에 대한 위험 감시의 기술을 제외하곤) 보인다. 이것은 의료화가 지속적으로 관철은 되어 왔지만, 단지 의료적 영역의 양적 확대가 아니라 생의료화 이론에서 주장하는 질적 변형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의료화의 개념이 비록 오늘날에도 타당하고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적절하고 충분하게 포착되지 않는 새로운 현상들을 생의료화의 개념이 포착할 수 있게 만든다고 인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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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晉州) 망진산(望晉山)의 역사문화경관과 명승적 가치 (The Historical and Cultural Landscape, and the Scenic Value of Mangjinsan Mountain in Jinju)

  • 김세호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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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0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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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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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이 글은 경상남도 진주시에 소재한 망진산(望晉山)을 중심으로 역사문화경관을 고찰하고 이를 통해 명승적 가치를 살펴본 논문이다. 문헌분석 방법에 따른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망진산은 진주의 안산(案山)으로 봉수(烽燧)가 자리해 역사에 주목되었다. 망진산의 정보는 그 위상으로 인해 점차 배가되었고, 봉수는 진주 일대 방어를 담당하는 기능을 도맡았다. 이러한 망진산은 진주의 상징적인 경물로 묘사되었다. 망진산의 어원과 관련하여, 성여신(成汝信)은 진주의 지세를 분석해 봉황에서 비롯된 지명임을 제기했다. 다만 여러 기록을 살펴보면, 망진산의 이름은 한결같이 유지되지만 그 표기는 통일되지 않는 양상으로 귀결됨을 알 수 있다. 둘째, 망진산은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정유재란(丁酉再亂)의 중요한 무대가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진주성 전투 승리의 계기를 제공했지만 정유재란 때에는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애환 어린 공간임이 확인된다. 한편, 망진산 일대에는 별서, 사찰, 행정시설 등이 자리해 당대 문화사를 구가했고, 19세기에는 진주성을 조망하는 경관적 가치로 인해 망경대(望景臺)가 들어섰다. 진주의 역사문화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증언하는 사례이다. 셋째, 조선 후기 망진산을 읊은 시문이 등장하고 이는 망진산이 진주의 명승으로 자리매김한 현실을 보여준다. 진주의 명승을 열거한 작품에 망진산을 묘사한 대목이 확인된다. 반면, 진주에 거주한 문인들은 봉수대에 주목하여 전란이 없는 평화로운 현실을 노래하고 역사를 회고했다. 19세기에는 전별연이 베풀어지기도 하였으니, 이는 진주를 조망하고 지역을 개관하는 아름다움에 기인한 결과로 보인다. 진주 망진산이 지닌 상징성과 명승적 가치를 확인할 수 있다.

판형 열교환기 크기에 따른 전열성능 비교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rmal Performance Comparison between Large and Small Sized Plate Heat Exchanger)

  • 박재홍
    • 한국산학기술학회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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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1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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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28-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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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판형 열교환기의 초기 개발 및 사용은 19세기 후반 유제품 내 존재하던 각종 바이러스의 살균에 대한 엄격한 법규 대응을 위해 시작되었고, 1920년대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상업화되었다. 이후 판형 열교환기의 기본 컨셉은 지금까지도 거의 변화가 없었지만, 고온, 고압 그리고 대용량 열교환에 적용되기 위해 설계 및 제작 방법들이 혁신적으로 발전하여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현재의 형태와 같은 쉐브론 타입 주름 전열판의 개발은 1970년대 후반 오일 쇼크 이후 에너지 합리화 및 에너지 효율 향상을 위한 요구들이 강하게 제기되면서 시작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판형 열교환기의 개발 트렌드는 전열 효율이 좋으면서 압력강하가 낮고 또한 유체 분배가 잘되는 대형 전열판의 개발과 일치한다. 본 논문에서는 전열판 개발방향을 제시하고자 동일 골깊이와 주름피치를 가진 소형 전열판과 대형 전열판의 열성능을 각 채널(H, M, L type)별로 실험적으로 비교, 분석하였다. 실험결과, 대류열전달계수의 경우, 소형 전열판이 대형 전열판에 비해 H type의 경우 평균 16.5%, M type의 경우 25%, 그리고 L type의 경우 약 40% 정도 더 높았다. 압력강하의 경우는 소형 전열판이 H type의 경우 평균 19%, M type의 경우 46%, 그리고 L type의 경우 약 61% 정도 더 높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는 여러 예상되는 요인들 중 두 전열판의 유체분배부 차이에 의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1920{\sim}1930$년대(年代) 독일(獨逸) 지지학(地誌學)의 연구(硏究) 동향(動向) (The Trend of Regional Geography in Germany in the 1920s and 1930s)

  • 김재완
    • 한국지역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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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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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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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
  • 20세기 전반기는 리터, 홈볼트로부터 시작된 근대 지리학이 꽃 피던 전성기였다. 19세기말 답보 상태였던 지리학이 20세기 들어서면서 지지학(地誌學)을 중심으로 유럽 각국에서 눈부신 발달을 보였다. 특히 독일의 헤트너와 쉬뤼터, 프랑스의 비달 드 라 블라쉬, 영국의 허버트슨 등을 지도자로 하여 각기 독특한 지지학(地誌學) 방법론(方法論)이 발전하였고, 경험적 연구도 많이 쏟아졌다. 그리하여 1920년대와 30년대에는 지지학(地誌學)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본고는 1920년대와 1930년대 독일에서 논의된 지리학자들의 지역 개념과 지지 방법론을 고찰하는데 연구 목적을 두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 독일(獨逸)의 지지학(地誌學) 동향(動向)은 일본 지리학자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 영향으로 당시 일본의 대표적인 지지자(地誌學者)인 전중계이(田中啓爾) 지형, 기후, 식물대, 인문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일본의 지역구분을 시도하였다. 그는 당시 일본 지리학자들과 일본에서 공부하던 한국의 지리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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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기 서양인들의 조선견문기를 통해 본 19세기 말 조선의 경관 - 경관 관련 어휘와 내용 분석을 중심으로 - (A Landscape of Joseon Dynasty in Late 19th Century through Experience Record of Modern Westerners - Focused on Landscape Vocabulary and Content Analysis -)

  • 김동현;신현실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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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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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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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본 연구는 서양인들의 시각에서 조선이 근대화되기 시작한 19세기말 조선의 경관을 조명하는데 목적이 있으며, 서양인들의 경관 관련 기록의 역사적 의미를 도출하고 이에 대한 경관의 유형화 및 그들의 인식을 분석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당시 조선을 방문했던 서양인들은 조선의 역사적, 정치적 상황에 개입되거나 오랜 기간 여행을 통해 조선의 문화를 이해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설명이 여러 저서에서 공통으로 확인되는 점은 그들의 기록을 통해 당시의 경관을 조명하는 과정이 유의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서양인들의 기록에 나타나는 조선의 경관은 소도시 및 마을, 자연환경, 명승 고적, 근대시설, 경작지 등이 주로 언급되었다. 소도시 및 마을은 허름한 뒷골목과 빼곡히 들어선 가옥들이 주로 언급되고 있으며, 자연경관은 산악경관과 해안 및 하천을 따라 펼쳐지는 다양한 지형경관과 주변식생이 확인되었다. 궁궐과 산성, 사찰 등은 명승 고적의 주요 대상으로 기록되었으며 근대화된 시설에는 외국인 공사관 및 거류지, 교회나 학교 등의 서양식 건축이 언급되고 있었다. 경작지는 낙후되고 방치된 모습이 확인되었으나, 조망구도가 넓어질수록 평화롭고 번창한 분위기의 농촌경관으로 비춰지고 있었다. 셋째, 조선에 대한 당시 서양인들의 인식은 비위생적이고 낙후된 주거환경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빼어난 산수와 수려한 명승고적, 상류층의 주택정원을 대상으로 하는 긍정적 인식이 나타났다. 근대화된 경관에 대해서는 문명화된 경관 개선이라는 점에서 긍정적 인식이 형성되었으며, 전통경관의 훼손 및 이질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유사한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송남잡지(松南雜識)』에 기록된 '영산(靈山)'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Youngsan(靈山)' recorded in 『Songnamjabji(松南雜識)』)

  • 조석연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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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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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69-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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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일반적으로 영산은 판소리 단가(허두가)를 가리키는 용어로 알려져 있으나 『송남잡지(松南雜識)』의 기록은 다르다. 조재삼은 『송남잡지』에 '영산'에 관련된 내용 따로 두어 설명하고 있다. <신광수의 시>, <백호 임제의 시>, <김명원의 시> 세 종류 시(詩)를 예시가 그것이다. 첫째, <신광수의 시>에 등장하는 '우조 영산'은 춘면곡에 앞서 부른 노래이다. 신광수가 <제원창선>(1750)을 쓴 시기는 유진한의 『만화집(晩華集)』(1754)이 발표된 시기로 판소리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우조 영산'을 판소리 단가로 볼 수는 없다. 둘째, <백호 임제의 시>와 연결된 '영산 도두음'은 피리와 도드리장단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흔적으로 보아 기악곡인 영산회상과 연결된다. 영산은 불교적인 것에서 비롯되었으며, 불교용어를 가진 영산회상은 민간 뿐 아니라 궁중에서도 계속 사용되었다. 셋째, <김명원의 시> '월하정인'을 영산 항목에 등장 시키며 '타령'이라 칭하였다. 당시 타령의 용어 쓰임새가 판소리와 정가 모두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후 신재효의 <광대가>등 19세기 자료 대부분 '영산'의 용어는 판소리 단가와 같이 본격적인 판소리를 하기 앞서 목을 풀기 위한 용도로 기록되었다. 『송남잡지』에서 기록된 초창기의 영산은 불교적인 성격을 지닌 용어로 영산 회상, 가사와 같은 도드리장단이 중심이 되는 독립된 음악 양식이었으며, 『송남잡지』가 쓰여진 1855년 당시 영산은 타령이라는 용어로 변모하면서 창부음악과 가객음악 모두를 포함하여 지칭하는 말로 영산과 타령 두 용어가 혼재하였다. 그리고 판소리가 성행하면서 '타령'이라는 용어는 판소리를, '영산'은 판소리 단가를 가리키는 용어로 불리게 된 것이다. 따라서 모든 기록의 영산을 판소리 단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은 상황은 종교 및 사회적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숭유억불정책은 불교적인 영산이라는 용어를 배척하였고 불교가 탄압받던 조선중기에는 영산과 타령이 혼재하거나 영산 대신 타령이 사용되다가, 조선 후기 불교가 재성장되면서 판소리의 등장과 함께 또 다른 의미인 단가의 뜻으로 영산이라는 용어가 새롭게 재정착된 것으로 보여진다. 19세기 이르러 판소리가 등장하며 영산이 단가로 사용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사회적. 종교적인 변화양상에 따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韓國) 패션저널리즘의 현황(現況) 연구(硏究)(1) - 5개 종합일간지(綜合日刊紙) 기사(記事)를 중심(中心)으로 - (A Study on the Fashion Journalism in the Field of Daily Newspaper)

  • 이성희;조규화
    • 패션비즈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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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8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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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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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discover the present situation of fashion journalism, which is a collaborator and watchdog of the fast-growing fashion business industry, then to proffer fundamental data for the setting of desirable fashion journalism in the field of newspaper. Unlike magazine and internet news service which are focused on a specific group, daily newspaper has a far-reaching influence without regarding the age, gender and social status of the readers. Therefore, how newspaper deals with fashion and fashion phenomena has immense influence on the attitude and understanding of common people on fashion. Defining fashion journalism is an activity of gathering and mediating of various ideas and opinions on fashion, the beginning of fashion journalism of newspaper traces back to the late of 19th century. From then to the period of Japan's occupancy by force, newspaper used fashion articles to lead enlightenment of lifestyle. After Korean War, newspaper was one of the main path of in-flowing western culture and fashion trend till 1970s. During $1980s{\sim}1990s$, fashion articles in newspaper were separated from woman and family section and fashion journalism made their own way to a specialized field. In the beginning of 21st century, fashion journalism in the field of newspaper is armed with more various and profound contents then ever, but it is also true fashion journalism is not free from accusation of commercialization and agitation of preference on imported luxury goods. Today fashion articles of daily newspapers are not subordinated to the common idea, 'fashion is only for women'. Fashion articles deals with men as well as women. Information on new products is regarded more important than fashion trend. Articles are not restricted in the fashion section. It means fashion journalism is expanding its territory to business section, opinion section and so on. However, fashion news dealing with aged people or young children are very rare. It suggests target readers of fashion news are concentrated on the people who have a considerable buying power. An main article usually has more than 3 photos. That means not only photos in fashion news are established as essential visual information today but also commercialization of fashion news makes rapid progress in this field. Also the considerable dependancy on the information sources from manufacturing side can be a problem of sustaining accuracy and impartiality of news.

"무역상무(貿易商務)에의 역사적(歷史的) 어프로치와 무역취인(貿易取引)의 전자화(電子化)" (E-Commerce in the Historical Approach to Usage and Practice of International Trade)

  • 춘홍차
    • 무역상무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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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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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4-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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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
  • The author believes that the main task of study in international trade usage and practice is the management of transactional risks involved in international sale of goods. They are foreign exchange risks, transportation risks, credit risk, risk of miscommunication, etc. In most cases, these risks are more serious and enormous than those involved in domestic sales. Historically, the merchant adventurers organized the voyage abroad, secured trade finance, and went around the ocean with their own or consigned cargo until around the $mid-19^{th}$ century. They did business faceto-face at the trade fair or the open port where they maintained the local offices, so-called "Trading House"(商館). Thererfore, the transactional risks might have been one-sided either with the seller or the buyer. The bottomry seemed a typical arrangement for risk sharing among the interested parties to the adventure. In this way, such organizational arrangements coped with or bore the transactional risks. With the advent of ocean liner services and wireless communication across the national border in the $19^{th}$ century, the business of merchant adventurers developed toward the clear division of labor; sales by mercantile agents, and ocean transportation by the steam ship companies. The international banking helped the process to be accelerated. Then, bills of lading backed up by the statute made it possible to conduct documentary sales with a foreign partner in different country. Thus, FOB terms including ocean freight and CIF terms emerged gradually as standard trade terms in which transactional risks were allocated through negotiation between the seller and the buyer located in different countries. Both of them did not have to go abroad with their cargo. Instead, documentation in compliance with the terms of the contract(plus an L/C in some cases) must by 'strictly' fulfilled. In other words, the set of contractual documents must be tendered in advance of the arrival of the goods at port of discharge. Trust or reliance is placed on such contractual paper documents. However, the container transport services introduced as international intermodal transport since the late 1960s frequently caused the earlier arrival of the goods at the destination before the presentation of the set of paper documents, which may take 5 to 10% of the amount of transaction. In addition, the size of the container vessel required the speedy transport documentation before sailing from the port of loading. In these circumstances, computerized processing of transport related documents became essential for inexpensive transaction cost and uninterrupted distribution of the goods. Such computerization does not stop at the phase of transportation but extends to cover the whole process of international trade, transforming the documentary sales into less-paper trade and further into paperless trade, i.e., EDI or E-Commerce. Now we face the other side of the coin, which is data security and paperless transfer of legal rights and obligations. Unfortunately, these issues are not effectively covered by a set of contracts only. Obviously, EDI or E-Commerce is based on the common business process and harmonized system of various data codes as well as the standard message formats. This essential feature of E-Commerce needs effective coordination of different divisions of business and tight control over credit arrangements in addition to the standard contract of sales. In a few word, information does not alway invite "trust". Credit flows from people, or close organizational tie-ups. It is our common understanding that, without well-orchestrated organizational arrangements made by leading companies, E-Commerce does not work well for paperless trade. With such arrangements well in place, participating E-business members do not need to seriously care for credit risk. Finally, it is also clear that E-International Commerce must be linked up with a set of government EDIs such as NACCS, Port EDI, JETRAS, etc, in Japan. Therefore, there is still a long way before us to go for E-Commerce in practice, not on the top of information manager's de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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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귀화식물: 신귀화식물상의 현황과 생태형질 특성 (The Exotic Flora of Korea: Actual List of Neophytes and Their Ecological Characteristics)

  • 류태복;김종원;이승은
    • 한국환경생태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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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1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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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65-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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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외래 귀화식물상의 급격한 변화는 국가 및 지역 생물상의 질적 양적 변질을 초래하는 생태학적 문제이다. 본 연구의 목적은 현존 분포하는 신귀화식물상의 실체를 밝히는 것이다. 2016년까지 발표된 선행 연구자료 151편을 분석하였다. 귀화식물에 대한 시공간적 수준(level)과 학술 용어 적용의 엄격성 결여로부터 선행 연구 간에 양적 질적 차이가 있었다. 본 연구에서는 공간적으로 국가 대신 동아시아구계구(Eastern Asiatic Province)의 식물지리구계, 시간적으로 개화기(19세기말)를 기준으로 신귀화식물(Neophyte)을 정의하였다. 목록화 된 신귀화식물은 그 원산지와 서식처 특성을 분석하였다. 신귀화식물은 총 39과 184속 326분류군이고, 약 87%(285분류군)가 단층초본식생형의 구성요소였음이 밝혀졌다. 온대림 생물군계의 유럽 및 북아메리카 원산(211분류군)이 가장 많았다. 습지식생 구성요소는 전체 6.4%(21분류군)로 매우 제한적이었지만, 수생태계 서식처의 구조와 기능에 급격한 질적 변질을 야기하는 침입외래식물종을 다수 포함하는 것으로 지목되었다. 일시정착외래식물(Ephemerophyten), 반고유문화종(Apophyten) 등과 같은 귀화식물 범주에 대한 생태학적 접근이 대두되었다.

종합적 유해생물 관리 - 이론과 실제 - (Integrated Pest Control - Principles and Practices -)

  • 현재선
    • 한국응용곤충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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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4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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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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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
  • 종합적 유해생물 관리(Integrated pest management)라는 용어가 최초로 제기된 것은 30년 전의 일이었다. 물론 그 기원은 방제에 있어서 생태학적 지식이 기초가 되어야 함을 주장하기 시작한 19세기 후반이었다. 그 후 종합적 유해생물관리의 개념은 해충 뿐 만 아니라 식물병이나 잡초 등 유해 생물 전반에 걸쳐 다양한 발전을 거듭하여 왔으며 그 철학은 식물보호학의 기본으로 확고한 자리를 잡게 되었다. IPM의 개념은 현재 널리 인식되어 있으나 그 개념의 내용이 다면적이기 때문에 연구자나 기술자들 간에도 상당한 혼란이나 오해가 있어 왔다. 본 논문은 이와 같은 이론상의 혼란을 정리하고 IPM의 이념과 기술개발 간에 존재하는 괴리를 해소하려 노력 하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개념 발달의 역사적 배경과 개념의 기본이 되고 있는 EIL의 개념을 설명하여 기본개념의 이해를 돕고 관리 수단의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적용에 필수적인 해충 개체군 생태학과 관련 표본조사법과 밀도변동동태를 논하여 이론발전을 위한 중요한 연구 방향을 논하였다. 한편 IPM의 이론이나 실험적 연구가 아무리 발전하여도 IPM은 과학이기 이전에 기술이기 때문에 그것을 사용하는 현장의 조건에 맞는 것이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사용자인 농민에게 신속히 전달되어야 하며 현재와 같은 다양화된 농업생산 체제에서는 농민각자의 자발적 참여가 중요하다고 생각되며 우리나라 병해충 발생예찰 체제와의 관계에 대하여 단견을 피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