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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교육의 쟁점과 동양윤리교육 (Main Issues in Korean Moral Education and Eastern Moral Education)

  • 고대혁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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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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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33-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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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우리 문화는 다른 어떤 국가나 문화보다도 학교교육에서 도덕의식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 전통문화에서 교육은 인간의 자기완성과 초월(초범입성(超凡入聖))을 위한 실천적 과업으로 이해된다. 본 연구는 다음 두 가지 문제의 식에서 출발한다. 첫째, 한국사회에서 도덕교육은 19세기 후반 근대적인 학교 교육의 출범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사회 정치적 상황에 따라 어떤 형태로 유형화될 수 있는가? 둘째, 해방이후 한국 교육의 전개 과정에 나타난 도덕교육의 주요 쟁점은 무엇인가? 특히 본 연구는 이들 쟁점을 동양 윤리 교육의 맥락에서 반성하고 검토하는 논의를 본 연구의 주요 관심사로 삼고 있다. 19세기 후반 이후 우리나라 도덕교육은 "충효교육과 수신교육", "민주시민교육과 반공교육", "도덕교육과 인성교육"의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도덕교육의 유형은 우리 근대사의 사회정치적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한국사회에서 도덕교육의 유형은 전통 도덕교육의 정신이나 기본 가치를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보다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그 정신을 일정한 형태로 왜곡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본 연구의 주된 주장이다. 더 나아가 본 연구는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주요한 두 가지 쟁점, 곧 "국가 중심주의"와 "서양 중심주의"를 중심으로 도덕교육의 특징과 발전 방향을 논의하고 있다. 국가중심주의는 개인의 인격 함양에 기초한 공동체 건설보다는 국가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구성원들의 의지를 집단화함으로써 개인들로 하여금 "자기 소외"를 심화하게 하였고, 서양 중심주의는 서양을 중심부로 한국이나 기타 전통과 사상을 주변부로 인식하게 함으로써 한국인들에게 "자기부정" 의식을 강화하여왔다. 본 연구는 이러한 두 가지 쟁점, 특히 한국 도덕교육에서 "서양 중심주의"를 극복하기 위하여 동양윤리교육에 대한 재해석과 이해를 위한 노력이 무엇보다 요청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역사드라마는 왜 로맨스를 필요로 하는가 -<미스터 션샤인>(2018)을 중심으로 (Why Does Historical Drama Need Romance? -Focused on the Television Drama Mr. Sunshine)

  • 양근애
    • 대중서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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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6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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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3-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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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역사드라마에서 기록의 중요성이 약화되면서 다른 장르와의 결합 양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 논문에서는 역사드라마에서 로맨스가 다루어지는 방식을 살펴봄으로써 역사드라마가 취택하는 역사적 사건의 속성과 사랑의 모티프가 어떻게 연관되는지, 그리고 사랑과 연애의 서사가 역사효과에 어떤 기여를 하는지 <미스터 션샤인>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미스터 션샤인>은 김은숙 작가가 처음으로 쓴 역사드라마로, 의도적으로 재배치된 역사와 김은숙 작가 특유의 로맨스 문법이 결합되어 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실패한 의병 운동은 자기부정성에 기반 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병치된다. 일본 제국주의의 폭압성과 조선의 독립을 다루고 있는 이 드라마는 주요 인물과 사건을 허구적으로 배치하여 사랑의 욕망을 애국에 대한 정념으로 비약시킨다. <미스터 션샤인>에서 로맨스는 역사적 사건의 비극성을 강조하는 촉매 역할을 하며 문화적 기억을 재구성한다. 역사드라마에서 로맨스라는 가공의 플롯은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역사 속에 놓인 인간의 삶을 성찰하도록 이끈다. 개인의 내밀한 감정은 역사의 재현에 어떤 기여를 하는가. 이 논문은 역사드라마와 로맨스의 관련 양상을 다각도로 살펴보고자 하는 첫 시도로 의의를 가진다.

When Disease Defines a Place: Batavia in British Diplomatic and Military Narratives, 1775-1850

  • Keck, Stephen
    • 수완나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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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4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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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7-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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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The full impact of COVID-19 has yet to be felt: while it may not define the new decade, it is clear that its immediate significance was to test many of the basic operating assumptions and procedures of global civilization. Even as vaccines are developed and utilized and even as it is possible to see the beginning of the end of COVID-19 as a discrete historical event, it remains unclear as to its ultimate importance. That said, it is evident that the academic exploration of Southeast Asia will also be affected by both the global and regional experiences of the pandemic. "Breakthroughs of Area Studies and ASEAN in the Era of Homo Untact" promises to help reconceptualize the study of the region by highlighting the importance of redefined spatial relationships and new potentially depersonalized modes of communication. This paper acknowledges these issues by suggesting that the transformations caused by the pandemic should motivate scholars to raise new questions about how to understand humanity-particularly as it is defined by societies, nations and regions. Given that COVID-19 (and the response to it) has altered many of the fundamental rhythms of globalized regions, there is sufficient warrant for re-examining both the ways in which disease, health and their related spaces affect the perceptions of Southeast Asia. To achieve "breakthroughs" into the investigation of the region, it makes sense to have another glance at the ways in which the discourses about diseases and health may have helped to inscribe definitions of Southeast Asia-or, at the very least, the nations, societies and peoples who live within it. In order to at least consider these larger issues, the discussion will concentrate on a formative moment in the conceptualization of Southeast Asia-British engagement with the region in the late 18th and early 19th centuries. To that end three themes will be highlighted: (1) the role that British diplomatic and military narratives played in establishing the information priorities required for the construction of colonial knowledge; (2) the importance not only of "colonial knowledge" but information making in its own right; (3) in anticipation of the use of big data, the manner in which manufactured information (related to space and disease) could function in shaping early British perceptions of Southeast Asia-particularly in Batavia and Java. This discussion will suggest that rather than see social distancing or increased communication as the greatest outcome of COVID-19, instead it will be the use of data-that is, big, aggregated biometric data which have not only shaped responses to the pandemic, but remain likely to produce the reconceptualization of both information and knowledge about the region in a way that will be at least as great as that which took place to meet the needs of the "New Imperialism." Furthermore, the definition and articulation of Southeast Asia has often reflected political and security considerations. Yet, the experience of COVID-19 could prove that data and security are now fused into a set of interests critical to policy-makers. Given that the pandemic should accelerate many existing trends, it might be foreseen these developments will herald the triumph of homo indicina: an epistemic condition whereby the human subject has become a kind of index for its harvestable data. If so, the "breakthroughs" for those who study Southeast Asia will follow in due course.

베네수엘라 위기와 라틴아메리카의 고독 그 오래된 미래 (Crisis in Venezuela, Solitude of Latin America, the Old Future)

  • 최명호
    • 이베로아메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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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1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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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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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베네수엘라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라틴아메리카 국가이다. 불행하게도 민중의 생존권이 위험한 상황이며 뉴스의 대부분이 부정적이다. 국내 일부에서는 모든 것이 미 제국주의에 의한 침략의 결과라고 주장하고 다른 일부에서는 과도한 포퓰리즘에 인한 국가부도 상황이라고 한다. 또 다른 일부에서는 신냉전적 국제질서에 의한 강대국들의 파워 게임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소외되는 것은 바로 생존권 위기의 베네수엘라 민중들이다. 베네수엘라의 위기는 대내적/대외적 요인이 모두 작용한 것으로 보이나 대내적 요인이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대내적 요인은 라틴아메리카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는 정실 자본주의, 족벌세력의 독재와 부정부패에 의한 것이다. 차베스는 과두세력을 비판하며 정권을 잡았지만 역설적으로 차베스주의자 혹은 현 집권 세력은 또 다른 과두세력이 된 것이다. 불행하게도 미국과 EU 등 서구세력과 베네수엘라의 현 집권 세력은 극단적인 대립 중이며 서로 벼랑 끝 전술을 사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가장 좋은 해법은 자유롭고 평화로운 대통령 선거이나 2019년 10월 현재 상황은 악화되고만 있다. 족장의 가을과 겨울이 지나가고 어떤 봄이 올지는 베네수엘라 민중이 결정해야 할 것이다.

일제강점기 역사 서사를 중심으로 한 스토리텔링의 환경과 그에 따른 문제점과 개선 방안 연구 - 밀정, 암살, 박열, 동주, 군함도 그리고 덕혜옹주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Environment of Storytelling Based on the History of Japanese Imperialism and Its Problems and Improvements - Around the Militia, Assassination, The Battleship Island, Anarchist from Colony, Dongju and Princess Deokhye -)

  • 진승현
    • 한국엔터테인먼트산업학회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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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3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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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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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이 논문에서는 계획 및 장르 영화가 고품질 영화를 만드는 경향이 계속될 것으로 예상되지만, 고부가 가치의 의미있는 영화와 탄탄한 스토리 텔링이 필요하다. 블록버스터 군함에서 예술 및 저예산 영화에 이르기까지 영화 장르는 픽션과 스토리텔링을 중심으로 영화를 제작한 선례이다. 본 논문은 일제강점기를 소재로 한 영화를 중심으로 성공 사례와 그 특성을 분석하고 연구한 논문으로 영화제작에 있어 시의성과 그 가능성을 제시하려 노력하였다. 이처럼 일제강점기를 포함한 과거의 역사를 소재로 한 역사 영화는 역사적 사실을 사실적 가치에 두고 다루기는 하되 흥미로운 요소를 결합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현재의 영화산업 구조상 투자와 배급 시스템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상업영화라는 구조적인 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는 현재 한국 영화산업이 역사 영화에 대해 가진 한계이다. 하지만 감독과 작가의 역사 해석과 그에 가미된 창작력은 관객들에게 역사는 물론 또 다른 감동과 재미를 선보일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앞으로 기획, 장르 영화가 제작비 높은 영화가 제작되는 경향이 지속될 수 있다고 예측하나, 영화의 가치와 그 의미가 높은 영화나 탄탄한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 사료된다. 블록버스터 군함도에서 예술, 저예산의 동주까지 영화 장르는 허구와 스토리텔링을 중심으로 만들어지고 있다고 사료되며 논문주제의 분석과 연구를 통해 스토리텔링의 대한 중요도를 다시 한 번 재확인하는 연구라 하겠다.

간송미술관 소장 《삼청첩(三淸帖)》의 역사성에 대한 고찰 (A Study on Historicity of 《Three Purities Album (三淸帖)》 in the Kansong Art Museum)

  • 백인산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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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6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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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6-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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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간송미술관 소장 ${\ll}$삼청첩${\gg}$은 조선 중기 문인 화가인 탄은(灘隱) 이정(李霆)이 매화, 난초, 대나무를 그리고, 시를 지어 함께 장첩한 시화첩(詩畵帖)이다. 조선 묵죽화의 전범(典範)을 세운 화가로 평가받는 이정의 시화(詩畵)를 한 곳에서 감상할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ll}$삼청첩${\gg}$의 미술사적 가치는 매우 높다. 그러나 ${\ll}$삼청첩${\gg}$의 가치는 여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ll}$삼청첩${\gg}$의 이력(履歷)이라 할 수 있는 제작배경, 성첩(成帖)과정, 전래시말 등에는 제작 당시의 시대상은 물론, 통시대적인 다양한 역사상들이 투영되어 있다. ${\ll}$삼청첩${\gg}$은 이정이 임진왜란시 왜적에게 칼을 맞는 수난을 겪은 후, 필생의 역작을 남기려는 의도 하에 만들어졌다. 이후 최립(崔?), 차천로(車天輅), 한호(韓濩) 등 시서(詩書) 각 분야에서 당대 최고의 성가를 구가하던 문인들이 동참하여 성첩되었다. 그리고 유근(柳根), 이안눌(李安訥), 유몽인(柳夢寅) 등이 찬문과 제시를 지어 상찬하였다. 그야말로 '일대교유지사(一代交遊之士)'가 동참하여 만들어낸 '일세지보(一世之寶)'였던 것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ll}$삼청첩${\gg}$은 이정 개인의 작품을 넘어 조선 중기 문예의 지향과 역량이 한 자리에 모인 종합예술품이며, 조선 중기 문화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ll}$삼청첩${\gg}$은 이정이 세상을 뜬 후, 선조의 부마인 홍주원(洪柱元)에게 넘어갔고, 병자호란 시 소실(燒失)될 위기를 겪는다. 현재까지도 그때의 화흔(火痕)이 역력하게 남아 있어,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호란이 끝나고 홍주원은 동서(同壻)인 윤신지(尹新之)의 도움으로 훼손된 일부 제발문(題跋文)들을 복원하였고, 이후 풍산 홍씨(豊山洪氏) 집안에서 7대를 이어가며 가보(家寶)로 전해진다. 홍중기(洪重?)의 요청에 의해 쓰여진 송시열(宋時烈)의 발문과 홍상한(洪象漢)의 요청에 의해 쓰여진 어유봉(魚有鳳)의 발문 등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정 생존시 문인들이 이정과 ${\ll}$삼청첩${\gg}$의 지닌 작품성에 대해 상찬한 것과는 달리 후대 문인들의 글은 ${\ll}$삼청첩${\gg}$의 전래과정과 그와 관련된 인물들에 초점을 두고 있어 대조적이다. 후대의 문인들은 ${\ll}$삼청첩${\gg}$ 자체의 작품성보다는 그에 얽힌 일화와 그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흥미를 느끼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ll}$삼청첩${\gg}$을 다시 복원한 홍주원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는 ${\ll}$삼청첩${\gg}$의 소장자로 글을 부탁한 홍주원의 후손들인 홍중기, 홍상한 등의 정치적, 사회적 입지를 강화시켜 주고자 하는 의도가 없지 않을 것이다. 홍주원의 후손들에게는 ${\ll}$삼청첩${\gg}$이 가문의 조상을 추숭(追崇)하는 기재인 동시에, 정치적 정통성과 가격(家格)을 담보하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미술품의 미적 가치 못지않게 그 안에 내재된 역사성을 중시했던 동아시아 특유의 예술 인식의 근인(根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ll}$삼청첩${\gg}$은 조선 말기 외세 침탈의 와중에서 일본인 츠보이 코우소(坪井航三)에게 넘어가는 비운을 맞게 된다. 다행히도 일제시기 심혈을 기울여 우리 문화재를 수호했던 전형필(全鎣弼)이 이를 되찾아왔고, 현재 간송미술관에 수장되어 전해오고 있다. ${\ll}$삼청첩${\gg}$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일제 침탈로 이어지는 조선시대 국난과 이를 극복하는 과정이 그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으며, 우리 문화재의 수난과 보존의 역사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를 통해 하나의 미술품이 유전과정에서 또 다른 역사성을 지속적으로 축적하며 그 의미와 가치를 강화시켜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중층적인 시의성(時宜性)과 지속적인 역사성(歷史性)을 지닌 ${\ll}$삼청첩${\gg}$은 미술품이 미적 가치와 더불어 사료적 가치를 얼마나 풍부하게 지니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라 생각된다. 이를 계기로 향후 미술품의 이력과 그 역사적 의미를 찾는 고찰들이 활성화되기를 기대해 본다.

양식해태의 유통에 관한 조사 연구 (A Study on Marketing of Cultured Laver Products)

  • 유충열
    • 수산경영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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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권1_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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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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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3
  • Laver io one of the most necessary and seasonal items in Korean food from oldtimes. Laver is lagely eaten in dried form, and its supply depends entirely upon culture weeds. The history of laver culture in Korea about sixty or seventy years is older than in Japan. Significance of laver culture is divided into two aspects, one is food supply in the nation, and the other is export to other countries. Houses engaged in laver culture are about foully thousands, and laver production in 1972 is estimated as 1, 3 bitten sheets. (1 sheet is a dried laver of 20 cm sq, in the shape of paper) Especcially meaning of layer production is the concentration of labour input, and systematic management of labour. From around 1920, the method of laver culture was introduced by Japanese Imperialism for mono culture in shallow seas, and mass products of laver is provided to Japan market, DOMESTIC MARKET Fundamental consume function calculates at below, $D_{(68_71)}$=16354 $Y^{0.471}$ $P^{-1.0662}$ where D is total layer demand, Y income variable, P price variable. It means income elasticity is 476. in the whole country, and price elasticity is 1, 07. But generally income elasticity is higher in urban area than in rural area, as shown at 1, 3 in Seoul city. Expence of laver in house expenditure is mutually correlated with another expence, See Table 12 about the relative function. See Table 14 and 16 about the relation between the gathering and the changes of price in auction, wholesale and retail price support system is for two effects, one of which is constraint of the upper price, the other is rise of the lower price. Before the system control, the equation in three year average calculated as below, $Y_{b}$ =18, 907.7455+15435.9364 t (r=0.89) where the origin t=0 is the November and the units are month. Post the system control, $Y_{p}$ =30, 047.9636+1, 631.1721t (r=0.97) therefore, this system has an effect only on the rise of lower price, Average annual margins of laver products at four market levels according to the consumer spent is below. EXPORTING MARKET Japanese demand function of laver products is, Log D=5, 289+1, 108 Log Y-1, 395 Log P (r=0.987) where D is Japanese laver demand, Y income variable, P price variable. according to which income elasticity is 1. 1 and price elasticity is 1.4. Laver production in 1970 tile highest record till then, is estimated as six billion sheets. But the recent improvement of laver culture techniques, the production of seeds and freezing storage of seeds has been stabilized. Futher new culture farms have been developed by means of break- water fences or by floating culture method. These improvements have been backed up with increased demand of laver products. Import quantity and price of Korean laver products are restrained by three organizations, that is producer, distributor and consumer. This relationship calculated by regression equation shows that import is influenced only producer organization, at the sacrifice of consumer profit. For increase to export of laver products, we urgently require to open foreign trade of laver products for Japanese consumer, .and Japan has political responsibility to solve Korean laver structure. But with long run timeseries, as regards Japanese production and import quantity, importing function shows increasing trend as below, 250 million sheets <3, 947.1674+0.005 $L_{g}$ >) 600 million sheets where $L_{q}$ is relative production quantity of laver in Japan. (unit; 100 thousand sheets) Our Export effort should be put on the highly processed products whithin the restraind quote.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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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연간에 조성된 궁궐 후원 다용도 공지(空地)의 활용양상 (A Study on the Status of Multi-functional Vacant Ground at the Palace Rear Garden during the Era of King Kojong)

  • 정우진;권오만;심우경
    • 한국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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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1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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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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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본 연구는 조선시대 궁궐 후원에 위치한 다용도 공지의 조영역사를 구명하고, 이와 내적 맥락을 같이 하는 고종 연간의 다용도 공지를 고찰한 것으로서, 중건 경복궁 및 경운궁 임어기에 후원 공지를 조성한 배경과 그 이용에 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궁궐 내의 다용도 공지는 조선의 정치무대에서 매우 중요한 기능적 공간이자, 국가운영의 기반시설이 되었다. 조선이 성립된 후로 창덕궁에서 왕실의 행사를 거행하는 공지로는 광연루(廣延樓)와 해온정 사이의 공터, 열무정(閱武亭) 일대, 서총대와 춘당대(春塘臺)가 조사되었으며, 여기서 활쏘기, 과거시험, 군사훈련과 다양한 연회가 이루어졌다. 고종 즉위 후에는 중건 경복궁에 경무대(京武臺)가 조성되었고, 경운궁에 환어한 고종 34년 뒤에는 경희궁이 영외 후원처럼 사용되었다. 두 공간의 특징으로, 신무문(神武門) 밖 후원의 경무대는 창덕궁의 공간구성이 이입된 특성이 있으며, 경희궁의 경우 원활한 공간 연계를 위해 운교(雲橋)가 설치되었다. 특히 고종 시대 후원 다용도 공지는 과거시험이나 시사(試射)와 같은 이전에도 있었던 국가적 행사장의 의미를 넘어서 제국주의 열강의 조선 침탈이 가속화 되는 시점에서 일국의 자주독립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하고, 국왕의 위엄과 권위를 보여주는 장소로 기능하였다. 또한 다용도 공지가 대규모 인원을 동원한 관병식(觀兵式) 등의 군사조련장으로 주로 활용된 사실은 시대성을 반영한 결과로 간주된다.

근대 도시 문화로서 창경원 야앵 - 벤야민의 '판타스마고리아'를 중심으로 - (Changgyeongwon Ya-Aeng as Modern Urban Culture - An Interpretation based on Benjamin's Phantasmagoria -)

  • 권영란;배정한
    • 한국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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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6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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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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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이 연구는 창경원 야앵이 근대 도시 내부에서 일어났다는 점에 주목하여 도시사회적 관점에서 야앵을 해석하고자 했다. 야앵이 시작된 1920년대 경성의 사회적인 모습은 전근대와 근대 사이의 과도기였으며, 경성의 사회적 근대화 과정은 도시 문화로서 야앵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연구는 당시 경성 사회와 야앵에 만연했던 '판타스마고리아'를 통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시사점을 찾았다. 첫째, 경성의 판타스마고리아는 군중, 스펙터클, 체험의 양상으로 나타났으며, 야앵에서도 같은 모습이었다. 이는 자본주의에 의해 통제되는 근대 사회와 야앵이 동일한 매커니즘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야앵은 축소된 경성이자 근대적 상품 세계 그 자체가 된다. 둘째, 판타스마고리아가 야앵의 경관을 구성한다는 점은 야앵에 특별한 보는 방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근대적 주체들에게 야앵의 판타스마고리아는 근대 도시 경성과 이전부터 살아오던 삶의 공간 사이의 간극을 메울 수 있게 해 준, 근대적 보는 방식에 대한 학습 기제의 역할을 했다. 마지막으로, 야앵의 판타스마고리아는 야앵의 지속적 소비를 부추기는 환상인 동시에, 일제의 영향이 지배적인 자본주의에 의해 작동되는 도시 문화를 망각하게 하는 장치가 된다. 이 연구는 야앵을 창경원 내부의 이벤트에서 근대 도시 사회를 투사하는 도시 문화로 확장해 다루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전통적인 상춘의 방식과 비교하여 퇴폐적이고 질 낮은 상춘 문화로 치부되었던 야앵에 도시사회적 맥락에서 새로운 시각을 투사했다는 점도 또 다른 연구의 의의라 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 이슬람 극단주의 실태 연구 (A study on the recent trends of Islamic extremism in Indonesia)

  • 윤민우
    • 시큐리티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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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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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5-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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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이 연구는 인도네시아 이슬람 극단주의 역사와 최근의 인도네시아의 국제 이슬람 극단주의의 확산 실태를 조사한다. 이 연구의 수행을 위해서는 인도네시아 이슬람 극단주의 관련 문헌조사와 관련자들의 질적 인터뷰를 병행한다. 문헌조사를 위해서는 미디어 보도, 관련 연구 보고서와 논문 등을 수집하고 활용한다. 질적 인터뷰를 위해서는 국내체류 인도네시아 학생들과 체류자들, 인도네시아인과 결혼한 한국인 배우자들, 인도네시아 현지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선교사들 등을 포함한다. 이들에 대한 질적 인터뷰는 30분에서 2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연구대상의 모집단을 사실상 특정화 할 수 없으며 연구주제의 성격상 인터뷰 대상에 접근이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에 편의 샘플과 눈덩이 샘플 추출 방식을 활용하였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인도네시아의 이슬람 극단주의는 뿌리가 깊고 일반적으로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등과 같이 이슬람 극단주의가 공고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다른 무슬림 국가들과 유사한 역사적 경험을 공유한다. 즉, 서방 제국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슬람 원리주의가 시작되었으며, 독립이후 근대국가 발전과정에서 소외되었고 소련-아프간 전쟁을 거치며 극단화 폭력화 하는 과정을 거쳤다. 또한 9.11테러 이후 국제적 이슬람 극단주의 네트워크와 연결되어 글로벌 지하드에 편입되는 발전경로를 보여준다. 이러한 역사적 발전 궤적은 인도네시아의 이슬람 극단주의가 상당히 조직적이고 공고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한편, 최근 들어 IS와 알카에다 등의 국제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의 동아시아 확장전략에 따라 인도네시아로의 침투와 확장이 관찰된다. 이는 특히 인도네시아의 소외되고 낙후한 시골지역에서 보다 뚜렷이 관찰된다. 이러한 인도네시아에서의 국제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의 확산은 지리적 근접성, 국내 상당규모의 이주자 공동체의 존재 등의 사실을 고려할 때 직접적으로 우리 국가에 위협을 미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도네시아 내에서의 이슬람 극단주의 확산 동향에 대한 주의와 관심은 시기적으로 매우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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