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human weal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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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비스주의 민주주의 모델 연구 (A Servicism Model for A New Democracy)

  • 김현수
    • 서비스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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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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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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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본 연구는 현대 대의제 대중민주주의의 개선안 도출을 위해 수행되었다. 본래의 민주주의 모델인 이소노미아(isonomia)가 퇴색하고 대중이 통치하는 데모크라시(democracy)로 현대 민주주의가 운영되면서 민주주의시스템의 문제가 심화되고 있다. 다수결 승자독식주의와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이 야기하는 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해 민주주의는 더욱 큰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현대의 평등 정신에 의해 모든 대중이 동등한 자격의 주권자가 되는 대중민주주의는 선동가들이 권력을 장악하기 쉬운 구조다. 경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 정직성과 용기 헌신 희생 성실성을 가진 자유인들이 동동한 자격으로 법률을 정하고, 그 법을 스스로 지키는 이소노미아는 자유인들의 양심과 덕성에 크게 의존한 시스템인데 비해, 현대 대중 민주주의는 경제력과 무관하게 주권자의 절대 평등성은 구현하였지만, 공동체에 대한 희생정신과 헌신이 없이도 주권자나 공직자가 되어 권리를 누리고 이기심을 채울 수 있는 구조가 되었다. 본 연구는 이소노미아의 본질을 구현하면서 현대 대의제 대중민주주의의 장점을 유지할 수 있는 제도로서 서비스주의 민주주의를 제시하였다. 재산 유무와 관계없이 모두에게 공평한 덕성 자격 요건을 중심으로 시스템을 구현하였다. 인간의 불완전성은 인공지능의 활용으로 보완하였다. 주권자와 공직자 대리인의 본성에 대한 가정을 새롭게 정립하고, 승자독식주의 문제를 해결하였다. 본 연구는 인류 공통원리와 서비스철학을 기반으로 하는 서비스주의 민주주의를 통해 이소노미아의 철학과 대중민주주의의 장점이 동시에 구현될 수 있음을 입증하였다. 자본주의가 20세기에 수정자본주의로 개선되었듯이, 21세기에는 현재 대중민주주의가 수정민주주의인 서비스주의 민주주의로 발전될 필요가 있다.

인물 기호와 비인물 기호 관계를 바탕으로 한 '계급의 한' -봉준호 영화를 중심으로- ('Han of the Class' based on the Relationship between Character and Non-Character Symbols - on the Film of Bong Joon-ho -)

  • 조송림;김유진
    • 문화기술의 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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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0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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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23-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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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
  • '한(Han)'은 한국인들이 오랜 민족적 고난을 경험하면서 형성한 심리적 특성이다. 이는 집단적 무의식의 형태로, 모든 한국인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으며,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예술 형식과 융합되었다. 봉준호 감독의 작품들은 사회적 문제의식을 담은 영화로, 계급 간의 '한'을 서사화하여 한국 역사와 현실의 문제를 재조명한다. 이 연구는 봉준호 감독의 여섯 편의 영화를 통해 '계급의 한'이라는 주제로 한국의 '한 문화'를 고찰한다. 영화 분석에는 인물기호와 비인물 기호를 구분하여 기호학적 접근을 적용한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후반까지의 대표작들은 사실주의와 초현실주의 기법을 활용하여 계급적 계층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명확히 표현한다. 이 연구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풍자-폭로-희망'의 순서로 분석하여, 그의 작품이 계급에 미치는 문화적 비판적 성격과 대중의 정신 문화적 측면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한다.

유가(儒家)의 전인적(全人的) 지도자상(指導者像) 고찰(考察) (A Study on the Ideal Leadership whole person of Confucian philosophy)

  • 김경미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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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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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5-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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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고는 개인의 덕성(德性)과 사회적 덕행(德行)의 보편적 가치와 규범이 제시되어 있는 유가(儒家) 경전(經典)을 토대로 군자(君子)다운 지도자상은 어떠한 것인가를 파악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인간다움을 참다운 것으로 삼고, 인간관계의 사회성을 제대로 실천하는 유덕자(有德者)의 가치관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다. 군자상의 진면목은 조화의 균형 감각이 있고 자기 수양에 엄격하며 인간관계의 상생적 가치를 창출하는 등 진선미가 삼위일체로 융합되는 '성기성물(成己成物)'의 참된 인물상(人物像)이라는 점을 찾아보고자 한다. 유가(儒家)에서 말하는 성인(聖人), 현인(賢人), 대인(大人), 군자(君子) 등은 인간세상을 이끌어가는 사회지도자를 의미한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인간다운 도리를 지키며 사회풍토를 아름답게 교화하고 정신과 물질(物質)의 조화(調和) 인격(人格)과 능력(能力) 경제(經濟)와 도덕(道德)을 겸비한 인물로 지목(指目)하고 있다. 현대 사회인들은 순수한 지성(知性)문화의 가치보다는 물질적 가치의 선호도(選好度)에 따라 개인적인 성장(成長)을 꾀하고, 시각적으로 보여 지는 외형적인 무한경쟁(無限競爭)에 편중되어 있다. 오늘날 디지털 시대에 자신의 개성을 연출하는 것은 부정할 수는 없지만, 외모(外貌)에 집착(執着)하여 지나친 다이어트로 건강미를 상실하고, 그로 인(因)한 정신적 스트레스는 외모 집착과 외모중시의 병적인 폐단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극복(克復)하기 위해 절실하게 요청되는 대안으로 내적 소양과 외적 전문성을 고루 겸비한 온전한 인격체, 즉 이른바 "문질(文質)이 빈빈(彬彬)"한 진선미(眞善美)의 융합적 지도자상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유교사상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道)를 현실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수기는 개인적으로는 덕성적 능력을 계발하여 도덕적 인격을 함양하는 것이며, 치인은 사회적으로는 함께 일하는 올바른 인간관계를 갖도록 소통(疏通)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leader 또는 지도자는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까지도 감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수기치인은 '스스로의 덕성을 가다듬어 다른 사람들을 이끈다.'는 의미이다. 참다운 지도자는 수기(修己)를 통해 자기성찰과 자기정립을 한 다음에 치인(治人) 또는 남들과 함께 살아가는 안인(安人)의 경지에 서게 되는 것이다. 모든 물건에는 값어치가 있고 나름대로의 德이 있듯이. 인간 역시 인격과 덕성(德性)을 갖추고자, 배우고 익혀 자신만의 전문성 신뢰성 그리고 인격과 능력을 겸비하여, 자신만의 브랜드(Brand)가치를 창출해 내고자 한다. 개인의 인격(人格)은 높은 지위나 재력 권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인격이란 개인의 덕성으로서 자기수양을 통하여 마음에 조금도 티가 없는 상쾌함으로, 굳이 한자로 표현하자면 맑고 깨끗한 '소쇄(瀟灑)'에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즉 인간이 天性으로 품부 받은 덕성인 지(知) 인(仁) 용(勇)을 겸비한 지극히 인간다움의 인격(人格)을 지닌 지도자상으로 군자상(君子像)을 제시한다. 자아개발은 self leader, 즉 수기(修己)를 통하여 덕성수양과 자아경영의 힘을 기르게 된다. 관계영역의 leader(治人)는 자신(自身)의 덕성(德性)을 덕행(德行)으로 미루어 가는 즉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으로 확대(擴大) 시킬 수 있다. 이처럼 자신의 마음을 미루어 남을 생각하는 리더십을 "대학(大學)"에서는 "혈구지도(?矩之道)"라고 한다. 논자의 견해는, 인격미(人格美)는 지(知) 인(仁) 용(勇)'으로 덕성(德性)의 씨앗을 일구고 상생미(相生美)는 '서(恕)'로써 타인(他人)에게 행동으로 보여주는 덕행의 마땅한 올바름을 구현하며 조화미(調和美)는 '혈구지도(?矩之道)'로써 남을 나처럼 아끼고 사랑하여 나와 같은 마음 즉 보편적 원리인 덕화(德和)를 구현할 수 있다고 여긴다. 이처럼, 지도자상의 자질은 자신의 소양과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총체적으로 잘 조화를 이룰 때 지도자가 지니고 있는 능력을 무한히 발휘하며, 많은 사람들과 공생(共生) 공존(共存)하며 서로 승승적(乘勝的)관계로 거듭 성장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ICT 기반 지역 공유경제형 사회적 기업 사례 연구 (A Case Study: ICT and the Region-based Sharing Economy of a Start-up Social Enterprise)

  • 노태협
    • 경영정보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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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8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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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7-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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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시장 경제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부의 불평등, 재분배 기능의 한계, 자본의 흐름에 따른 비효율적 과대생산과 과대소비, 인간 존엄성과 자유의 제한 등의 한계점이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한계를 조정하기 위하여 새로운 공생의 가치 마련이 요구되고 있으며, 개별 기업 단위에서도 사회적 책임과 공유가치에 대한 요구가 강조되고 있다. 기업의 사적 영리와 사회적 가치를 동시에 추구하고자 하는 사회적 경제 또는 사회적 기업의 형태가 사회공유 가치창출의 대안으로 제시되어, 그 가능성과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기술적인 면에서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비롯한 모바일 단말기의 급속한 보급은 대중 참여의 공유경제 확산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정보통신 플랫폼과 빅테이터 분석과 같은 초고속 네트워크 통신 및 대용량 데이터 처리 기술의 발달은 개인 대 개인, 기업 대 개인 간의 소통이 실시간으로 가능하게 함으로써 광범위한 수요자와 공급자를 연결해 주어 공유 시장을 확대함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논문에서는 지역 협력적 소비를 바탕으로 정보통신기술(Information & Communication Technology)을 활용하여 자전거 관련 공유경제 시스템을 구축, 사회적 기업으로 창업한 (주)푸른바이크쉐어링의 사례를 살펴본다. 푸른바이크쉐어링은 공유, 공생, 공헌의 사회적 책임을 사업 모형 속에 접목하여, 지역 내의 다양한 협력 주체들과의 협업을 통한 사회적 기업을 운영하고 있다. 사례 분석을 통하여, 사회적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핵심적 요인으로 지역 사회 네트워크 활용이 가능하며, 사회적 기업과 공유경제의 융합 사업 모형을 통해 사회적 기업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음을 검토하였다. 또한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따른 기술적 환경 변화가 어떻게 공유경제 시스템에 효과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지를 보이고자 하였다. 선행적 이론 정리를 위하여, 사회적 기업의 개념과 현황,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선행 연구의 내용을 살피고, 공유경제의 개념과 특징, 기업의 공유가치 확대에 대한 이론을 정리하였다.

16~18세기 영·호남 누정에 깃든 문화경관의 의미론적 해석 - 지정 문화재를 중심으로 - (Semantic Interpretation of the Nu-Jeong Cultural Landscape During the 16~18th Century at Youngnam and Honam Area -Focusing on the Designated Cultural Properties-)

  • 이현우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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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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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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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본 연구는 국가지정 또는 시도지정 문화재 중 총 22개의 영 호남 소재 누정을 중심으로 16~18세기 명리를 등지고 초야에 은거한 사림(士林)의 누정 문화를 고찰함으로써, 조영자의 자연관과 누정건립 등의 문화형성과정에서 축적된 미의식을 구명하고자 하였다. 특히 본 연구에서는 개별 누정에 작용된 의미론적 경관특성을 밝히기 위한 제안으로 '풍수적 입지 누정명 분석 누정문학 분석' 등의 해석을 시도하였다. 본 연구를 통해 확인된 주요 결과는 다음과 같다. 누정의 '입지[風水] 명칭[懸板] 문학[板上詩]' 등의 분석 및 해석 결과를 토대로 한국 누정만이 갖는 특수성을 논한다면, 누정의 입지는 풍수가 지향하는 목표와 일맥상통함이 확인되었는데, 이는 땅의 모양(物形)을 의미론적 풍수형국으로 해석함으로써 은유적이면서도 풍자적으로 '터잡기' 한 특징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특히 풍수형국론(風水形局論) 관점에서 본 누정의 입지는 배산임수의 요건을 모두 충족했으며, 지향했던 전형적인 좌향은 남동향임이 확인되었다. 또한 땅의 모양에 대한 직관적이거나 자연론적인 표현보다는, 서로 다른 의미를 부여하여 은유적이면서도 풍자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전통적 경관짜임의 특징을 형이상학적인 해학(諧謔)으로까지 승화시키고자 하는 보편성이 발견된다. 더 나아가 누정의 입지를 광역적 경관인식 체계로 본 의미론적 낙토(樂土) 개념이 표출되고 있다. 한편 누정명은 누정이 위치한 서로 다른 개별적 경관을 응축함으로써 상정된 의미론적인 어휘였다. '누정명의 어의 분석'에서 가장 높은 빈도를 보인 것은 주변경관을 간명한 어휘로 함축한 것인데, 그 특징은 첫째 '자연예찬(自然禮讚)' 즉 승경(勝景) 및 사시경물(四時景物)에 대한 흥취, 둘째, '유가사상(儒家思想)'과 관련된 경서(經書) 문장(文章) 성리학적 가치관 중국의 고사성어, 셋째, '선현칭송(先賢稱頌)'에 관한 상고성(尙古性), 넷째, 유유자적과 안빈낙도의 전형으로 청빈하지만 자존적인 삶의 '풍류(風流)', 다섯째, '도가사상(道家思想)'과 관련하여 좌절된 자아를 달래기 위한 치유수단으로써의 '선경(仙境) 갈구' 등이 깊이 내포되어 있었다. 특이하게도 16세기 초반까지는 유가사상에 기반을 둔 명칭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16세기 중반을 넘기며 '자연예찬 및 선현칭송'의 제재가 증가하면서 유가사상에만 편중되지 않는 제재 상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이와 함께 문학이란 예술장르를 빌어 아름다운 자연에 비긴 작가의 심상을 투영시킴으로써 내면의 문제를 완곡히 토로한 누정문학의 주요한 특성으로는 '자연예찬 풍류 도가사상 및 유가사상 선현칭송' 등의 보편성과 '우국충정 연군지정 과거회상' 등의 키워드가 도출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 팽배했던 '성리학적 유교관'에도 불구하고 누정문학을 주도한 일의적(一意的) 개념이 '자연예찬 및 풍류'였음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조선시대(朝鮮時代) 전기(前期)의 의료제도(醫療制度)에 대한 연구(硏究) (A study of the Medical System in the Early Chosun-Dynasty)

  • 한대희;강효신
    • 대한한의학원전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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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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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55-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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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6
  • Up to the present the scholastic achievements in the history of the medical system have been rather scare despite its importance in the Korean History. Hence, this dissertation attempts to examine the significance of the institute in the Korean History, covering the period from the ancient times through the early Chosun-Dynasty. In the ancient times, the medical practice relied primarily upon human instincts and experiences at the same time, shaman's incantations were widely believed to cure diseases, the workings of evil spirits supposedly. For the period from the Old Chosun through Samhan(巫堂), Chinese refugees brought a long medical knowledge and skills of the continent. New Chinese medicine, traditional practices and incantations were generally used at this time. Medicine and the medical system were arranged by the period of the Three Countries(三國時代). No definite record concerning Koguryo remains now. As for Paekje, however, history shows that they set up the system under the Chinese influence, assigning medical posts such as Euibaksa(medical doctor), Chaeyaksa(pharmacist), and Jukeumsa(medicine man) within Yakbu(department of medicine). Scientifically advanced, they sent experts to Japan, giving a tremendous influence on the development of the science on ancient Japan. After the unification of the three countries, Shilla had their own system after the model of Dang(唐). This system of the Unified Shilla was continued down to Koryo and became the backbone of the future ones. In the ancient time religion and medicine were closely related. The curative function of the shaman was absolute. Buddhism played a notable part in medical practice, too, producing numerous medical monks. The medical system of Koryo followed the model of Dang with some borrowings from Song(宋). Sangyakkuk(尙藥局) was to deal exclusively with the diseases of the monarch whereas Taeeuigam(太醫監) was the central office to handle the national medical administration and the qualification test and education for doctors. In addition, Dongsodaebiwon(東西大悲院), Jewibo(濟危寶), and Hyeminkuk(惠民局) were public hospitals for the people, and a few aristocrats practiced medicine privately. In 987, the 6th year of Songjong(成宗), local medical operations were installed for curing the sick and educating medical students. Later Hyonjong(顯宗), established Yakjom(clinics, 藥店) throughout the country and officials were sent there to see patients. Foreign experts, mainly from Song, were invited frequently to deliver their advanced technology, and contributed to the great progress of the science in Korea. Medical officials were equipped with better land and salary than others, enjoying appropriate social respect. Koryo exchanged doctors, medicine and books mainly with Song, but also had substantial interrelations with Yuan(元), Ming(明), Kitan(契丹), Yojin(女眞), and Japan. Among them, however, Song was most influential to the development of medicine in Koryo. During Koryo Dynasty Buddhism, the national religion at the time, exercised bigger effect on medicine than in any other period. By conducting national ceremonies and public rituals to cure diseases, Taoism also affected the way people regarded illness. Curative shamanism was still in practice as well. These religious practices, however, were now engaged only when medication was already in use or when medicine could not held not help any more. The advanced medical system of Koryo were handed down to Chosun and served the basis for further progress. Hence, then played well the role to connect the ancient medicine and the modern one. The early Chosun followed and systemized the scientific and technical achievement in medicine during the Koryo Dynasty, and furthermore, founded the basis of the future developments. Especially the 70 years approximately from the reign of Sejong(世宗) to that of Songjong(成宗) withnessed a termendous progress in the field with the reestablishment of the medical system. The functions of the three medical institute Naeeuiwon(內醫院), Joneuigam(典醫監), Hyeminkuk(惠民局) were expanded. The second, particualy, not only systemized all the medical practices of the whole nation, but also grew and distributed domestic medicaments which had been continually developed since the late Koryo period. In addition, Hyeminso(惠民局, Hwarinwon(活人院)) and Jesaenwon(濟生院)(later merged to the first) played certain parts in the curing illness. Despite the active medical education in the capital and the country, the results were not substantial, for the aristocracy avoided the profession due to the social prejudice against technicians including medical docotors. During the early Chosun-Dynasty, the science was divided into Chimgueui (acupuncturist), Naryogeui(specialist in scrofula) and Chijongeui (specialist in boil). For the textbooks, those for the qualification exam were used, including several written by the natives. With the introduction on Neoconfucianism(性理學) which reinforced sexual segregation, female doctors appeared for the female patients who refused to be seen by male doctors. This system first appeared in 1406, the sixth year of Taejong(太宗), but finally set up during the reign of Sejong. As slaves to the offices, the lowest class, female doctors drew no respect. However, this is still significant in the aspect of women's participation in society. They were precedents of midwives. Medical officials were selected through the civil exam and a special test. Those who passed exams were given temporary jobs and took permanent posts later. At that time the test score, the work experience and the performance record of the prospective doctor were all taken into consideration, for it was a specialized office. Most doctors were given posts that changed every six months, and therefore had fewer chances for a goverment office than the aristocracy. At the beginning the social status of those in medicine was not that low, but with the prejudice gradully rising among the aristocracy, it became generally agreed to belong to the upper-middle technician class. Dealing with life, however, they received social respect and courtesy from the public. Sometimes they collected wealth with their skills. They kept improving techniques and finally came to take an important share in modernization process during the late Chosun-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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