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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일기』에 나타난 국가의례와 민간신앙 일고찰 (Consideration on National Rituals and Folk Beliefs Found in 『Hajaeilgi』)

  • 송재용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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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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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49-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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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사옹원(司饔院) 분원(分院)의 공인(貢人)이었던 지규식이 1891년 1월 1일부터 1911년 윤6월 29일까지 20년 7개월에 걸쳐 거의 매일 쓴 "하재일기"에는 보고 들은 국내외 정세와 풍속, 의례, 분원 관련 각종 제반사항, 일상생활사 등을 다방면에 걸쳐 다양하게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필자가 여기서 주목한 것은 "하재일기"에 기록된 민속 관련 내용이다. 지규식은 양반이 아닌 신분으로 당시 실제로 행했던 세시풍속 민속놀이 의례 민간신앙 등 민속 관련 내용을 "하재일기"에 기록으로 남겼다. 이러한 일기는 드물 뿐만 아니라 자료적으로도 그 가치가 매우 높이 평가되며, 민속학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필자는 "하재일기"에 나타난 민속을 연구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국가의례와 민간신앙에 초점을 맞추었다. 앞에서 논의된 사항들을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국가의례의 경우, 가례(嘉禮)는 황제의 즉위기념일과 황제 황태자 탄신기념일 관련 기록만 전하고 있어 아쉬움이 남지만, 국가적인 기념식과 경축식행사를 백성들이 충실하게 실행하였는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특히 이러한 국가적인 기념식과 경축식행사 때 학생들에게 애국가를 제창케 했다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 흉례(凶禮)는 궁중상례 관련 내용만 전하고 있는데, 민비의 상례를 제외하고는 궁중 상례를 종전처럼 절차에 의해 제때 제대로 치루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정부의 명에 따라 이를 잘 실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일본인들이 민비를 살해하고 석유를 뿌려 시신을 불태워 재로 된 것을 버려둔 채 간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민간신앙의 경우, 분원에서 정기적으로 동리의 신사를 지냈고, 동리에서도 매년 고청신사를 지냈는데, 제사비용은 마을 사람들의 경제적 사정에 따라 차등적으로 배분해 추렴하고, 마을 사람들 모두 힘을 합쳐 제수를 준비하고 제사를 지냈다. 제사는 산신당과 부군당에도 지냈으며,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 것이 통례였다. 이는 자료적으로 가치가 있다. 그런데 지규식은 기독교인이 된 후, 회사에서 지내는 신사 제사를 폐지하려 한 적이 있을 뿐 아니라 새신(賽神), 즉 굿이나 푸닥거리하는 것도 없애려 했지만, 전례대로 어쩔 수 없이 따랐다. 한편, 지규식은 마을에 홍수가 나고 전염병이 퍼지자 마을의 안녕과 건강을 위해 자기 집 앞에 제단을 설치하고 희생과 술 등 제수를 갖추어 마을사람들과 함께 황천후토(皇天后土)에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이 있는바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지규식은 집안에 우환이 있을 경우, 무당을 불러 굿을 하거나 산신에게 치성을 드리는 등 이러한 무속이나, 주로 정초에 관성제군(關聖帝君)을 참배하고 한 해의 운수를 점쳤던 것들은 모두 민간신앙으로서 당시 민간에 널리 퍼져 있었을 뿐 아니라, 그의 생활 속에도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지규식의 풍수신앙 선호도 당대인들의 일반적인 인식태도와 다르지 않다고 여겨진다. 이상에서 보듯, "하재일기"에 나타난 국가의례와 민간신앙 관련 내용은 자료적으로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민속 연구의 일환으로도 의미가 있으며, 민속학적으로도 나름대로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누항도(陋巷圖)와 누항록(陋巷錄)을 통해 본 이만부의 공간철학과 식산정사의 원형경관 (A Study on Lee, Man-Bu's Thought of Space and Siksanjeongsa with Special Reference of Prototype Landscape Analyzing Nuhangdo(陋巷圖) and Nuhangnok(陋巷錄))

  • 강병선;이승연;신상섭;노재현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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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9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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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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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76호로 지정된 '천운정사(天雲精舍)'는 식산 이만부가 1700년에 건립한 식산정사이다. 본 연구에서는 식산정사와 관련한 이만부의 생애와 은일관을 알아보고, 그의 정사경영의 결과물인 「누항록」과 《누항도》를 분석해 정사의 풍수적 입지와 영역성 및 원형경관을 추정하고, 은거한 선비가 자신의 공간에 담고자 했던 철학을 고찰하여 다음의 결과를 도출하였다. 첫째, 식산 이만부는 조선 후기 대표적 은둔형 유학자이다. 정사의 이름이자 이만부의 호인 '식산'은 마을의 뒷산(主山)에서 연유한 것으로 그는 생각(思), 몸(躬), 말(言), 사귐(交) 네 가지를 쉬고자 했다. 다난했던 숙종년간 남인 집안의 이만부는 '식산'이라는 호를 통해 은둔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를 표상하였다. 둘째, 이만부는 식산정사의 입지, 공간구조, 건축물 및 조경시설물, 수목, 주변경관, 이용행태 등을 「누항록」에 기록하였고, 《누항도》화첩을 남겨 원형에 가까운 식산정사 복원 가능성이 비교적 높다. 셋째, 이만부는 외노곡이 밖에서 보면 사면이 두로 막혀있으나 안으로 들어서면 아늑하고 깊숙하며 멀리까지 내다보인다는 풍수적 지리관을 언급하고 있으며, 노곡마을 전체를 일컬어 식산정사라 했는데 이는 명명을 통해 의미를 부여하고 영역을 형성·확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넷째, 식산정사의 공간구성은 연식공간, 교육공간, 후원공간, 휴식공간, 채원 및 약초밭으로 구분할 수 있다. 당과 루, 연지로 구성된 연식공간은 개인적 공간으로 호연지기, 천인합일의 흥취, 군자의 도리, 인을 생각하는 이만부의 거처이자 강학을 베풀던 공간이다. 다섯째, 양정재 영역은 교육공간으로서 양정재는 주역 몽괘에서 취한 이름으로 어린 학생들의 학문과 덕이 크고 밝게 성장하기를 기원한 이름이다. 여섯째, 간지정, 고반대, 세한단 등으로 구성된 후원공간은 식산정사 가장 안쪽의 숲이 우거진 곳을 정리하고 자연 입석과 고송을 병풍삼아 작은 정자를 지을 축대를 쌓은 곳으로, 멈춤의 미덕과 은자의 여유, 군자의 지조 등에 관한 뜻을 담고 있다. 일곱째, 식산정사 담장 밖 동쪽 시내 건너 고목이 우거진 곳에 단을 조성하여 영귀사라 하고 괴석을 쌓고 화초를 심어 휴식의 장소로 삼았다. 여덟째, 조선시대 선비들처럼 채소와 약초의 효능을 상세히 알고 있던 이만부는 정사 내에 채원과 약초밭을 가꾸었다. 아홉째, 식산 이만부는 식산정사의 각 공간별 건축물과 조경시설물에 대한 명명을 통한 의미 부여와 고사(古事)를 따른 식재를 통해 자신의 정사에 성리학적 이상향을 실현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