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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고학 성립 시기 청동기 연구에 대한 새로운 인식 - 윤무병(1924~2010)의 연구를 중심으로 - (A new glimpse on the foundation of the Bronze Age concept in Korean archaeology)

  • 강인욱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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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4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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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4-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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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해방 직후 한국 고고학의 성립기에서 청동기시대의 설정은 가장 핵심적인 성과중 하나이다. 일본의 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금석병용기시대를 반박하고 청동기시대라는 개념을 안착시키고 청동기 연구의 기반을 수립한 대표적인 인물은 윤무병이라는 데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동안 윤무병의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꼽히는 세형 동검의 형식분류와 전개과정이외에도 청동기시대의 설정도 주요한 성과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한국 지석묘 연구 프로젝트로 일환으로 진행된 파주 옥석리의 발굴이 한국 청동기시대의 설정에 결정적인 근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본 고에서는 이러한 윤무병의 성과를 그와 함께 한국 고고학계를 주도한 김원룡과 비교하여 살펴보고, 아울러 해방이후 한국 고고학을 둘러싼 환경도 고려하여 그 현상을 해석했다. 윤무병의 연구는 동아시아재단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재정적 지원이라는 하드웨어적 기반과 일본 고고학에서 출발한 정치한 형식적 기법이 결합된 것이다. 한편 자료적 측면에서 본다면 아울러 195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개시된 북한연구의 소개와 북방 지역 자료를 소개한 김원룡의 역할 등이 주요한 역할을 했다. 이와 같이 윤무병의 연구는 1960년대 탈식민지라는 주요한 과제를 한국 고고학계가 어떻게 성취했는가를 볼 수 있는 주요한 근거가 된다. 다만, 일본 편년관의 의존으로 청동기시대의 편년관을 지나치게 낮게 잡아서 한반도 청동기의 편년을 '문화지체 현상'에 근거하여서 만주나 북한과는 동떨어지게 본 점은 한계로 지적된다. 물론, 21세기의 시각으로 윤무병의 연구를 재단하거나 폄하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오히려 윤무병이 견지했던 유물에 대한 천착이라는 고고학적 전통을 새로운 연대관과 거시적인 안목에 결합하여 새로운 연구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21세기 세계화와 거시적인 안목으로 한국 고고학의 저변을 확장해야하는 시점에 윤무병의 연구를 다시 살펴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고성 삼덕리유적 출토 적색마연토기의 제작 특성 연구 (Resarch on Manufacturing Technology of Red-Burnished Pottery Excavated from Samdeok-ri, Goseong, Korea)

  • 한이현;김수경;진홍주;장성윤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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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3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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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0-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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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고성 삼덕리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 후기의 묘역식 지석묘와 석관묘가 발굴되었으며 적색마연토기, 석촉, 석검 등의 부장품이 출토되었다. 고성 삼덕리유적에서 출토된 적색마연토기는 약 50~160㎛ 두께의 안료층이 남아 있으나 대다수의 토기 표면에서 안료층의 박리, 박락현상이 관찰되었다. 적색마연토기의 태토는 중립의 석영, 장석, 각섬석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부분적으로 철산화물의 불투명 광물도 확인되었다. 6호 석관묘에서 출토된 적색마연토기는 비짐으로 각섬석, 장석이 다량 포함되어 있어 다른 무덤에 부장된 적색마연토기와 차이를 보였다. 적색 안료는 태토와 유사한 광물 조성을 보이고 있으나 적철석(hematite)이 상당량 함유되어 있고, 미립의 석영, 장석, 각섬석 등이 관찰되었다. 광물 조성으로 볼 때 소성 온도는 900℃ 내외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덕리 일대 3km 이내에는 장석과 각섬석이 우세한 섬록암과 화강섬록암이 노출된 지역이 확인되므로 이 일대에서 토기 제작을 위한 원료를 채취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적색마연토기는 성형 후 안료를 물에 풀어서 토기 전면에 채색한 후 마연 기법으로 마무리한 것으로 판단된다. 태토와 안료층의 소결 상태를 고려할 때 채색 후 소성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며 '성형-반건조-채색-마연'의 과정을 거친 후 소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토기에 도포하는 안료의 농도, 채색 시점과 방법에 따라 적색마연토기의 표면과 단면 상태가 다르게 나타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대부분의 삼덕리유적 토기들은 안료층과 태토층이 뚜렷하게 구분되었으나 안료가 태토층에 스며들어가 안료와 태토가 뚜렷이 구분되지 않는 토기편도 관찰되었다. 이는 미립질의 안료가 묽은 농도로 도포되었거나 성형 직후 도포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대부분의 적색마연토기에서는 안료층의 박락과 마모현상이 관찰되었고 안료층이 일부만 잔존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는 안료를 도포하고 마연 처리한 토기에서 마모에 의한 손상이 더 쉽게 발생한다고 보고되고 있어 삼덕리유적 적색마연토기도 매장 환경에서 풍화에 의해 마모와 박락이 진행된 것으로 생각되며, 매장주체부 출토품보다 고분 외곽에 뿌려진 잔편에서 이러한 손상이 가속화되어 나타났다.

해남반도 백포만일대 취락경관에 대한 시론 - 청동기시대를 중심으로 - (A preliminary study on the village landscape in Baengpo Bay, Haenam Peninsula - Around the Bronze Age -)

  • 김진영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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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6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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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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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해남반도 백포만일대의 고고학적 성과는 고대사회에 대한 연구를 촉진하였으나, 선사시대에 대한 연구는 미진한 상황으로 이를 보완하고자 청동기시대 취락 경관을 고찰하였다. 백포만일대는 지리적으로 내륙의 한계선이 확인되고, 문화적으로도 한계선이 나타난다. 백포만일대에서 황산리 분토취락은 지금까지 유일하게 조사된 청동기시대 취락이지만, 일반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백포만일대의 청동기시대 문화는 탐진강유역과 영산강유역에서 확산되었다. 취락 밀도분포는 지석묘 분포밀도와 대응할 것이고, 전남지역 취락유적을 통해 확률을 기반으로 소촌-중촌-대촌으로 구분하고, 10기 미만은 소촌으로, 40기 이상은 대촌으로 설정하였다. 전남지역에서 84% 정도가 소촌이고, 대촌은 3% 정도이고, 중촌은 지역별로 분포하는 경향을 보인다. 취락의 단위는 지역별로 차이가 있을 수 있고, 위계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황산리 분토취락은 주거군과 무덤군이 공존하고, 2~4기의 주거지가 개별주거군을 이루며, 부속건물이 딸려 있는 3개의 개별주거군으로 구성되었다. 개별주거군들은 혈연들의 복합공동체들이고, 농경을 기반으로 구산천일원에서 조망권, 이동, 생태전략적 측면에서 뛰어난 입지를 갖는 취락경관을 이루었다. 백포만일대 취락경관은 황산리 분토취락의 양상과 유물산포지 등의 분포로 보았을 때 현산천과 구산천 주변의 구릉이나 사면부에 대부분 소촌단위로 산재하여 분포하고, 황산리 분토취락은 구산천일원의 중촌취락의 경관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취락들은 농경을 기반으로 가족공동체가 하천과 산지, 바다에서 다양한 야생자원을 획득하는 자급자족형의 안정화된 마을들이 경관을 이루었다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