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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예술치료와 호스피스 완화의료 (Art Therapy and Hospice & Palliative Care in Korea)

  • 김창곤
    • Journal of Hospice and Palliative C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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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8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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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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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한국의 현대적 예술치료는 1960~1970년대 국내 정신과 환자들을 대상의 보조치료인 활동요법(activity program)의 형태에서, 1982년 정신과 의사들을 중심으로 한국임상예술학회가 창립되면서, 음악치료(music therapy), 미술치료(art therapy), 무용치료(dance therapy), 시치료(poetry therapy), 정신치료극(Psychodrama) 등의 예술치료가 정신장애환자를 대상으로 발전하였다. 1990년대에는 한국미술치료학회와 한국음악치료학회 등 분야별 전문단체가 본격적으로 출범하였고, 2001년 한국예술치료학회가 창립되었다. 통합예술치료의 예술은 한 개인의 내적인 세계와 연관된 인간자체가 가지는 본연의 능력인 창조적 활동이며, 여기에는 음악치료, 미술치료, 무용치료, 시치료 등이 포함된다. 통합예술치료는 인간의 체험현상을 그대로 인정하고 자각하게 하는 현상학적 측면에서 신체와 창조성의 회복을 목표로 예술매체를 활용한 심신치료활동이면서 심신의 성장과 발달을 목표로 하는 치료예술활동이다. 최근 국내 음악치료, 미술치료, 무용동작치료, 통합예술치료를 중심으로 예술치료의 효과에 대한 메타분석 결과, 신체기능 효과 변인군을 제외한 모든 변인군에서 효과크기가 유의했고, 심리적응 효과, 행동적응 효과 그리고 생리적 효과 변인군 순으로 효과크기가 확인되었다. 2015년 7월, 보건복지부는 완화의료 건강보험수가 급여를 일당정액제로 시행하면서, 국내 56개 호스피스전문기관에서 대부분 시행중인 음악치료, 미술치료, 원예치료에 대한 수가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논의하고 있다. 이것은 1977년 정신과 환자에 대한 예술요법의 수가가 인정된 이후, 호스피스 완화의료 환자에 대한 예술치료의 수가가 인정된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그러나, 예술치료매체와 중재유형, 그리고 치료효과간의 인과관계의 명확한 제시, 즉 치료기전의 문제와 무분별하게 발급되는 자격증 취득자의 교육 수련 수퍼비젼을 통한 전문성과 정체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문학회 및 협회 등 전문단체간의 유기적인 협력과 노력이 요구된다.

중국 만화 애니메이션 창작과 발전 방향에 관한 연구 -국가광전총국(國家廣電總局) 지원정책에 따른 제작환경 변화를 중심으로- (Study on the creative development of China Cartoon & Animation - Focusing on changes in a production environment with supporting the policy of the State Administration of Press, Publication, Radio, Film and Television of China -)

  • 사술복;김종두
    • 만화애니메이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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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권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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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9-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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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2014년 최근 몇 년간 중국 만화 애니메이션 산업은 창작과 제작인력 증가, 관련기술발전, 신기술 도입, 정부 지원정책 등 다양한 환경 변화로 급속한 발전을 보이고 있다. 국가의 지원정책에 따른 환경변화는 만화 창작자와 제작자들에게 자국의 만화 애니메이션 산업 발전 가능성에 대한 높은 기대감을 갖게 하였다. 2004년에 국가광전총국(國家廣電總局)은 "국내 영상 애니메이션 산업의 발전에 관한 약간의 의견"등의 '문건'으로 중국 애니메이션 발전을 위한 제작을 장려했으며, 애니메이션 산업기지, 애니메이션 교육기관 등의 기구를 잇달아 설립하게 되었다. 그 동안 일본만화 확산으로 자국의 만화 애니메이션 창작 활성화가 부진하였음을 자각하고 동(同) 기관은 자국의 전통문화를 기반으로 창작 만화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활성화 전략을 세운 것이다. 2004년 이후 창작자들은 창작만화에 중국 역사의 전통성과 고유성을 잘 녹여내는 소재로 2004년 이전의 만화와 차별화된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오늘날 중국 만화 애니메이션은 자국의 전통이 중요한 원천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과거의 창작성과 현재의 제작 체계를 융합하여 더욱 발전시키고 있다. 만화 창작자들이 전통문화를 만화 이야기로 발굴하기 위해서는 현대적 의식과 감각을 가져야 한다. 중국만화가 다른 아시아 국가 만화들과는 다른 점은 만화 이야기 안에 전통문화를 자연스럽게 녹여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본 연구는 '디지털 만화제작 육성 정책'을 통한 만화 애니메이션 창작 의식 고취와 제작 활성화가 향후 중국 뉴미디어 콘텐츠산업을 견인할 수 있도록 방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제 중국은 뉴미디어 산업 발전을 위해 주변국의 환경변화에 대한 능동적 대처와 끊임없는 정보교류, 기술개발, 지원 사업 확대 등의 다양한 정책들을 쏟아내어 '신중국만화' 산업의 재 도약기를 맞아야 한다.

1970년대 잡지 『여학생』의 소녀 담론과 만화 -강요된 모범과 만들어진 명랑 (The Discourse on Girls and the Comics in the 1970s Magazine, Schoolgirl - A Forced Model and the Invented Cheerfulness)

  • 김소원
    • 대중서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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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7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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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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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본 논문의 목적은 만화 연구에서 소외되었던 1970년대 순정만화를 조명하는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1970년대의 잡지인 『여학생』의 기사와 연재만화를 분석하고 당시의 이상적인 소녀상을 고찰한다. 순정만화는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차이가 상당히 크다. 단행본 순정만화 분석만으로는 이러한 간극에 대해 설명되지 않는다. 만화 검열이 만화 전반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했지만 다른 장르의 만화와 비교했을 때 1970년대 순정만화의 정체는 지나치다. 순정만화와 함께 소녀를 대상으로 하는 대표적인 대중매체였던 잡지 연구를 통해 순정만화 변화의 원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잡지의 기사는 그 잡지의 편집방침과 특징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 시대의 가치관과 이념을 반영한다. 잡지에 실린 만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특히 잡지 만화는 검열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다. 본 논문에서는 1970년대 소녀잡지의 기사와 만화가 당시의 소녀상을 어떻게 형성했는지 『여학생』의 특집 기사와 만화를 통해 분석했다. 『여학생』에 연재된 만화 중에서 엄희자의 <푸른 지대>와 방영진의 <미니 행진곡>을 살펴보았다. <푸른 지대>와 <미니 행진곡> 모두 『여학생』의 기사에서 강조한 이상적인 소녀상을 보여준다. <푸른 지대>는 가정 안의 성실하고 순종적인 딸의 모습을, <미니 행진곡>은 명랑하고 밝은 소녀의 모습을 그린다. 연구를 통해 1970년대 잡지는 사회에 순응하면서 화목한 가정을 돕는 소녀를 이상적인 소녀로 평가했다는 것 그리고, 잡지에서 끊임없이 주장했던 이상적인 소녀상은 순정만화의 검열과 창작의 기준이 되어 많은 작품의 내용과 표현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970년대는 만화 검열과 합동 출판사의 독과점 전횡으로 연구사적 의미에서 그 중요성이 희석된 시기이다. 검열의 틀에서 표현의 한계가 명확했고 그 결과 양질의 작품도 많지 않아 1970년대 한국만화 연구는 많은 부분이 공백으로 남아 있다. 본 연구는 1970년대 만화 연구의 공백을 채우는 데에 의미가 있다.

설장고 놀이로부터 춤 변용으로의 텍스트 읽기 - 호남우도농악 이경화 설장고춤의 변용에 관해 - (Reading the text of transformation from Seoljanggo Nori to dance - Regarding the transformation of Honam Udo Farmers' Music Lee Gyeonghwa Seoljanggo Dance -)

  • 김지원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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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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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1-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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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본 연구는 민속예술인 춤이 놀이문화에서 분리되어 독자적인 춤 예술이 되면서 예술적 의미로 규정되는 춤 분석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있다. 특히 한국의 민속예술인 춤은 두레와 같은 성격의 공동체적 성향이 강하고, 독자적인 개인 예술이라기보다는 함께 아우르는 예술로서 같은 형식과 리듬의 반복적 양식을 당연히 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독자적인 형식의 춤은 근대화가 될 무렵 무대화의 영향으로 더욱 섬세해지고 예술적인 면모를 갖춰갔다고 단언하기에 앞서, 민속춤의 기저에는 독자성을 추구하기에 충분한 기량의 예술적 소재가 다량 있었다고 보는 견해이다. 그 중 설장고 놀이에서 설장고춤으로의 예술적 변용은 현재 한국을 대표할 만한 독자적인 예술로서 우리민족의 흥과 신명이 여실이 드러난 단연 돋보이는 종목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전통예술의 나아가야 할 한 단면을 춤이 독자적으로 어떻게 구성되어 예술형태를 보이고 놀이에서 발전 되었는가에 대해 분석하는데 의의가 있다. 그 중 설장고의 놀이적 변형과 현재 춤으로 무대에서 선보이고 있는 설장고춤에 대해 호남우도 농악의 멋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이경화 설장고춤을 중심으로 텍스트 읽기를 한 것이다. 과적으로 독창적인 구성이 돋보이는 가락과 춤사위가 함께 조화를 이루고 있는 양식에서 춤을 통해 기예를 표출하고 점차 세련된 기교로 발전해 과는 과정에 이경화의 설장고춤은 전통을 향해 새로운 시도를 한 것으로 보인다. 즉 민속춤의 예술화에 있어서 놀이적 성향인 농악의 설장고 춤사위를 미적 형식으로 승화해 무대기법으로서도 세련된 양식을 도입하고 있었다. 이는 전통과 재창조라는 예술의 교훈을 현실성 있게 정립한 민속예술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교육적 효과를 모색하고 한국적 정서를 기반으로 창작의 실현을 극대화할 필요가 있다.

<온천행궁도(溫泉行宮圖)>(1795)의 온양행궁지 추정 및 온양행궁 변천 고찰 (A Study on the Transitions and Site of temporary palace(Onyanghaenggung) according to the <Oncheonhaenggungdo>(1795))

  • 이정수;김일환;이경미;지원구;최재성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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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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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4-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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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온양행궁(溫陽行宮)은 <온궁영괴대(溫宮靈槐臺)>, 『온궁사실(溫宮事實)』<온천행궁도(溫泉行宮圖)>, 『영괴대기(靈槐臺記))』 등 문헌기록과 영괴대(靈槐臺)와 신정비(神井碑) 등 온행 유적 등을 통해 왕의 온행을 확인가능한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현재 온양행궁지로 추정되는 곳은 온양관광호텔이 입지하고 있어, 온양행궁 복원이 이루어지지 못한 채 그 정체성마저 위협받고 있다. 본 연구는 일제강점기 훼손 이전 『온궁사실』<온천행궁도>(1795)에 나타나는 온양행궁의 위치를 추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하여, 첫째 조선시대 역대 왕들의 온행관련 기록을 고찰하고, 둘째 조선시대 온양행궁의 건축물 변화 및 일제강점기 훼손과정 등을 정리한 후, 셋째 <온천행궁도> 및 읍지, 고지도 그리고 지적원도 등을 현재 온양관광호텔 및 주변 지역 변화와 비교분석하여 온양행궁의 위치를 추정하였다. 이상의 연구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첫째, 「온양군읍지」 및 「호서읍지」의 1,758척을 주척(周尺)으로 환산하면, 온양행궁의 범위는 지적원도(1914년)의 대(垈)로 표현된 부지 내측 둘레와 근접하고 있다. 둘째, 지적원도의 온양관 남측 잡(雜)으로부터 온천천으로 나가는 물길, <온천분포견취도(溫泉分布見取圖)>(1925, 1928)의 온천공, 그리고 <온천행궁도>의 내동문(內東門), 비각(碑閣), 신정(神井), 답도 등의 관계를 종합하면, 헤르만 산더(Hermann Gustav Theodor Sander, 1906) 및 한국저작권위원회 온양온천 사진의 건축물을 『온궁사실』<온천행궁도>의 온천(溫泉) 즉, 탕실(湯室)로 추정할 수 있다. 셋째, 경남철도회사가 온양행궁지 유원화(遊園化) 과정에서 관유재산인 영괴대 부지의 양도 및 이전(1927)을 요청하나 충청남도는 국유 영괴대기념비 및 영괴대를 괴수(회나무)를 함께 현 위치에 영구보존(1928) 하도록 한 기록과 <조선경남철도연선명소교통도회(朝鮮京南鐵道沿線名所交通図絵)>(1929)를 참고하면, 영괴대비각(靈槐臺碑閣)은 현 위치로 판단되며 신정비는 신정관(神井館) 전면으로 이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온양행궁 둘레범위, 『온궁사실』<온천행궁도>의 온천(溫泉) 즉, 탕실(湯室) 및 영괴대 위치 등을 기초로, 일제강점기 및 근대기 필지변화, 그리고 최근 주변 유구 등의 자료를 종합하면, <온천행궁도> 온양행궁지의 범위 및 주요 건축물 위치는 현재의 시민로 및 온양온천시장까지 확대하여 추정할 수 있다.

한국 사회와 사람에 대한 사회적 표상과 신뢰: 청소년과 성인의 지각을 통해 본 토착심리 분석 (The social representation and trust of Korean society and people: Indigenous psychological analysis of the perception of Korean adolescents and adults)

  • 김의철;박영신
    • 한국심리학회지 : 문화 및 사회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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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0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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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3-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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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 이 연구에서는 한국 청소년과 성인의 한국 사회와 사람에 대한 사회적 표상과, 신뢰의식의 기저에 있는 심리 문화적 토대를 토착심리학적 시각에서 분석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첫째, 한국에 대한 사회적 표상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사람에 대한 인식의 다섯 가지 측면에서 접근하였다. 둘째, 한국에 대한 신뢰와 불신의 이유를 분석함으로써, 한국 사람 신뢰의식의 토착심리를 이해하고자 시도하였다. 분석대상은 총 1,064명으로서, 학생 418명(중학생 218명, 대학생 200명), 성인 646명(중학생의 부 218명, 중학생의 모 218명, 교사 210명)이었다. 질문지는 연구자에 의해 제작되었으며, 자료는 2003년 4월-6월에 수집되었다. 한국에 대한 사회적 표상을 분석한 결과, 첫째, 한국 정치에 대해 응답자의 94.5%가 부정적인 지각(불신, 정치인 자질부족, 부정부패, 파벌주의, 후진성, 변화필요성)을, 한국 경제에 대해 84.9%가 부정적인 지각(불안, 불경기, 구조적 문제, 불평등, 비관적)을, 한국 사회에 대해 78.2%가 부정적인 지각(부정부패, 급격한 변화, 불안, 빈부격차, 이기주의, 보수적, 연고주의)을 하였다. 한국 문화에 대해서는 긍정적 지각(자부심, 오랜 전통, 아름다움, 독창적)이 54.3%, 부정적 지각(주체성 상실, 문화사대주의, 자긍심 부족, 보수적)이 45.7%를 차지했다. 한국 사람에 대해서는 부정적 지각(이기적, 도덕성 결여, 조급성, 체면/권력지향)이 58.6%, 긍정적 지각(인정, 착함, 단결력, 근면)이 41,4%였다. 둘째, 한국에 대한 신뢰 이유로는 우리나라(30.2%)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고, 이외에 가능성, 한국인의 인간미, 한국인의 노력 등이 지적되었다. 한국에 대한 불신 이유로는 정치인 불신(30.3%) 부정부패/비리(22.7%)가 가장 대표적이었으며, 이외에 공공기관 불신, 경제적 불안 등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결과에 토대하여 두 측면이 논의되었다: 1) 한국에 대한 부정적인 표상 변화를 위한 효능적 신념의 필요, 2) 신뢰와 불신의 심리적 기반으로서 관계지향 문화와 도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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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천행궁도(溫泉行宮圖)>(1795)의 온천(탕실) 건축 고찰 (A Study on the Hot Springs(Tangsil Building) of Temporary Palace(Onyanghaenggung) according to the <Oncheonhaenggungdo>(1795))

  • 이정수;김일환;이경미;지원구;최재성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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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7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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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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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
  • 온양행궁은 <온천행궁도(溫泉行宮圖)>『온궁사실(溫宮事實)』(1795), 『영괴대기(靈槐臺記)』 및 <영괴대도> 등의 문헌자료와 영괴대(靈槐臺), 신정비(神井碑)로 왕의 온행을 확인가능한 문화유산이다. 특히 1906년 헤르만 산더(Hermann Sander)가 촬영한 사진을 통해, 조선시대 온양행궁의 온천(탕실)이 일제강점기 초기까지 유지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본 연구는 온양행궁 관련 문헌 및 <온천행궁도>(1795)에 기초하여, 온양행궁 탕실의 건축형식을 밝혀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첫째 온양행궁 및 탕실의 변천을 살펴보고, 둘째 왕의 목욕문화 및 행태를 고찰한 후, 셋째 <온천행궁도> 온천(탕실) 건축을 「온궁수리」를 통해 정리하고, 넷째 일제강점 초기 헤르만 산더(Sander)의 사진과 비교하여 조선 후기 마지막 온양행궁 온천(탕실) 건축 형식을 고찰하였다. 이상의 연구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첫째, 온양행궁 온천(탕실)은 현종 초 온정실(溫井室, 8칸), <온천행궁도> 온천(탕실)로 이어지면서 조선 후기 『호서읍지』(1871)까지 유지되고 있는데, 일제강점기 초기 헤르만 산더(1906) 및 <1912년 충남 아산시 온양온천>(한국저작권 위원회) 사진 건축물과 일치하고 있다. 둘째, 조선시대 국왕의 목욕법은 목욕평상(沐浴平床) 또는 교의(交倚)에 앉아 세두, 유두, 목두 등을 시행하거나, 온천수 증기를 직접 쐬는 훈세, 탕정 앞에 목판을 깔고 앉아 물에 발을 담그는 침족 또는 침세, 그리고 배꼽 아래만 물에 담그는 반신욕인 체욕, 좌탕 등의 다양한 목욕방법을 채택하였다. 셋째, 온양행궁 온천(탕실)은 온천수가 상탕 서북쪽에서 분출되어 동쪽으로 꺾여 중탕으로 들어가고 남쪽으로 꺾어지면서 바깥으로 나와 하탕이 되는 구조로서, 탕체 주변부는 태안에서 실어 온 바둑돌을 탕실 바닥에 깔았다. 이상의 고찰로부터, 어실로부터 왕의 접근동선, 왕의 목욕법과 목욕도구, 입대하는 의관과 목욕보조 인력 등 목욕행태와 「온궁수리」에서 언급된 각 실 등의 구성을 헤르만 산더의 사진과 비교하여, 온양행궁 온천(탕실) 건축물을 추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