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ancestral ri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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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종묘제도의 좌조우사(左祖右社)와 전묘후침(前廟後寢) 설에 대한 일고찰 (A Study on the Theories of Jwajowusa(左祖右社) and Jeonmyohuchim(前廟後寢) of an Ancient Jongmyo Shrine System)

  • 서정화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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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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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1-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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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주대(周代)의 종묘(宗廟)는 '조(朝)의 의례(儀禮)' 등 수많은 의례들이 이행되는 장소인 군주의 정전(正殿)으로, 태침(太寢) 로침(路寢) 정침(正寢) 등은 그것의 또 다른 명칭들이다. 보다 더 이전 대(代)에서는 태실(太室)과 세실(世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는데, 특히 태실(太室)의 용어는 서주시대(西周時代) 초기에 대한 기록에서도 나타난다. "서경(書經)"에서는 노침(路寢)은 물론 '침(寢)'자의 사용이 전혀 보이지 않는 반면, '실(室)'자는 우서(虞書)를 제외한 모든 서(書)에 여러 차례 등장한다. '선군(先君)의 신주(神主)를 모신 종묘(宗廟)는 좌측에, 토지와 곡식의 신(神)을 모신 사직단(社稷壇)은 우측에 세운다'고 하는 "좌조우사(左祖右社)"라는 언급이 처음으로 기록된 곳은 "주례(周禮)" "동관고공기(冬官考工記)"에서의 '장인영국(匠人營國)' 부분이다. 아울러 일명 '좌묘우사(左廟右社)'라고 하는 "우사직(右社稷) 좌종묘(左宗廟)"의 언급은 "춘관종백(春官宗伯)"에 수록된 제사를 주관하는 소종백(小宗伯)의 여러 직분들 중의 하나로 표현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후에 출현한 "동관고공기(冬官考工記)"의 "좌조우사(左祖右社)"라는 말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정현(鄭玄) 등 한대(漢代) 이후의 많은 예학자(禮學者)들이 여기서의 '좌(左)'와 '우(右)'를 종묘 사직의 좌우 배치 관계로 해석하고 있지만, 그것을 "사직에서의 (제사의) 일을 돕고[우(佑)], 종묘에서의 (제사의) 일을 돕는다[좌(佐)]."라는 의미로 보아야 '종백(宗伯)'의 직분에 부합된다. '전묘후침(前廟後寢)'은 "주례" "하관사마(夏官司馬)"와 "예기(禮記)" "월령(月令)"편을 설명한 정현(鄭玄)의 주(注)에서 "전왈묘(前曰廟) 후왈침(後曰寢)"이라는 표현에서 시작된 말이다. 정현과 동시대의 채옹(蔡邕)은 "전유조(前有朝) 후유침(後有寢)"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본고에서는 전묘후침(前廟後寢) 설(說)에 대해 두 가지 가설(假說)을 논하였다. 하나는 '앞쪽에는 정무(政務)를 보는 조정(朝廷), 뒤쪽에는 편안한 실내 공간'이라는 하나의 울타리 안에 포함된 두 가지 시설을 표현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앞쪽에는 치조(治朝) 영역으로서의 종묘 건축물, 뒤쪽에는 사친(私親)들과의 거주 영역인 주거용 건축물'로서, 독립된 별개의 두 가지 건축물을 표현한 것이다.

유교경전의 동이 인식에 관한 연구 - 13경 및 그 주석서를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awareness about "Dong-YI(東夷)" in Confucianism scripture)

  • 함현찬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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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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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3-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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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본 연구는 한국사상의 원류를 연구하는데 필수적인 이(夷) 또는 동이(東夷) 관련 유교경전 자료를 정리 분석 및 주해하는 한편, 동이 관련 유교경전 자료에 대한 대중적 접근성이 용이한 연구 자료를 제공하기 위하여 기획되었다. '동이'는 동아시아의 역사뿐만 아니라 한국의 사상과 문화의 원형을 탐구하는 데서도 필요한 핵심적 키워드이다. 또한 동이와 관련된 유교경전 자료는 시간적으로 선진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의 역사 전반에 걸쳐 있으며, 공간적으로는 중국, 한국, 일본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아직까지 이(夷) 또는 동이(東夷)와 관련된 자료가 체계적으로 분류 정리 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자료의 번역과 주석 또한 이루어지지 않아서 연구자들이나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동이와 관련된 유교경전 자료를 종합적이고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아울러 유교경전 관련 주석서에서 시대별로 이 혹은 동이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파악하여, 이를 토대로 이(夷) 내지는 동이(東夷)에 대한 인식과 그 정체성을 규명해 보았다. 일반적으로 이(夷) 또는 동이(東夷)라고 하면 '동쪽 오랑캐' 또는 '중국 사람들이 그들의 동쪽에 있는 족속들을 멸시하여 일컫던 말', '사이(四夷)의 하나. 동쪽 오랑캐. 중국(中國)이 동쪽 나라의 이민족(異民族)을 멸시(蔑視)하여 일컫던 말', "자세히는 황하의 중간쯤으로부터 하류 동쪽의 이민족, 곧 한국 만주 일본 등을 가리킴" 등으로 알려져 있고, 또 "중국 역사에서 동쪽에 사는 오랑캐(이민족)를 일컬어 부르는 말이다. '사이(四夷)'와 같이 이(夷)는 오랑캐 전체를 일컫는 대명사로도 사용되었으나, 일반적으로 동서남북의 각 방위에 따라 오랑캐를 구분하여 동이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으로 불렀다." 라는 식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유교경전에 언급된 이(夷) 개념에 대한 분석을 통해 그것이 오랑캐 라기 보다는 오히려 군자(君子) 재지는 군자국(君子國)을 의미하는 뜻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상에서의 동이관련 유교경전 자료를 분석해 볼 때 과거 "'동쪽 오랑캐' 또는 '중국 사람들이 그들의 동쪽에 있는 족속들을 멸시하여 일컫던 말' 이라는 식의 인식은 매우 잘못되고 왜곡되어진 인식임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夷)는 인(仁)이며, 인(人)이고, 또한 군자(君子)이다. 따라서 이(夷)라는 단어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바로 '사람다운 사람' '군자', 내지는 '군자국(君子國)'을 나타내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는 단어라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한 민족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언어와 역사 그리고 정신 혹은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변하기 쉽고 또 지키기 어려운 것이 정신일 것이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고 다른 것과 구별하거나 정의하기 어려운 특성 때문이다. 정신 혹은 사상은 변하는 것이고 변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렇듯 변하지 않는 것, 변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해서는 안 되는 그 부분이 바로 정체성의 뼈대에 해당한다. 따라서 동이와 관련된 유교경전 자료를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분석하는 것은 이러한 뼈대를 구축하는 초석이며, 무엇보다 시급한 역사적 당면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한 한국의 정체성 확립은 정치 사회적 측면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우리 국가와 문화 및 사회 발전의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도교 생태사상이 반영된 도교 건축의 현대적 의의 (The Modern Significance of Taoist Ecological Ideas as Reflected in Taoist Architecture)

  • 신진식
    • 대순사상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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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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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59-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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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이 논문에서는 중국 도교(道敎) 건축의 발전 과정과 그 문화적 함의를 살펴보고, 도교 건축에 반영된 도교 생태 사상의 핵심적인 원리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해 보았다. 이것은 바로 현대 도시의 지속가능 생태건축을 위한 하나의 사상적 롤모델을 탐색하는 기초 작업이다. 도교의 건축은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변화, 발전하고 더욱 완숙한 단계에 이르게 된다. 초기 도교 교단의 최초의 건축 형식인 '치', '려', '정'은 후대 도교 궁관(宮觀) 건축 발전의 기초를 이룬다. 남북조(南北朝)시기를 거쳐 당대(唐代)에 이르기까지 국가적 지원을 받는 관방(官方)도교가 성립되면서 의례가 끊임없이 규범화되었으며, 궁관은 이에 따라 점차 상당한 규모를 갖추게 되었고 형식은 더욱 정형화되었다. 12세기 초 청정(淸淨)수련을 강조하는 전진교(全眞敎)가 창립된 이후부터는 엄격한 수도(修道)에 적합한 외딴 자연공간에 수도를 위한 건축이 생겨난다. 한편 이때의 도교 건축은 여러 다양한 신(神)들에게 예배를 드리기 위한 건축 형식과 구조가 강화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거치며 성립된 다양한 도교 궁관들에는 도교문화의 관념적인 요소와 제도, 생태사상 등이 집약되어 있다. 도교 건축은 기본적으로 동천복지(洞天福地)라는 이상향을 추구하면서 장소 선택과 건물 배치에 있어서 자연지형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풍수 이론을 수용하였는데, 여기에는 철저한 생태주의가 반영되어 있다. 한편 도교 건축은 음양오행의 원리에 따라 건축재료를 선택할 때 현지의 천연자재를 이용하여 되도록 자연의 평형을 파괴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 또한 도교는 소박한 마음을 유지하고 욕망을 억제하며 청정하고 순수한 자연본성으로 돌아가야 함을 강조하기 때문에 수행(修行)과 제례(祭禮) 장소는 되도록 소박한 장소를 선택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일종의 소박한 생태주의 사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며 도교의 검소한 가치관을 나타내는 것이다. 도교 생태사상은 주거환경 조성 중에 생겨난 생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풍부한 사상 자원과 사유방법을 제공해 준다. 도교 생태사상이 반영된 도교 건축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하여 지속가능한 주거 환경을 새롭게 형성할 수 있는 방향성을 모색해 볼 수 있다.

경운궁 흥덕전의 조영 및 사용 연혁과 설행된 의례의 특징 (Characteristics of the construction process, the history of use and performed rituals of Gyeongungung Heungdeokjeon)

  • 임초롱;주상훈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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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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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8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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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흥덕전은 경운궁의 확장 과정에서 궁역으로 편입된 수어청 부지에 최초로 지어진 전각이었다. 본 연구에서는 어진 모사처, 임시 봉안처, 빈전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던 흥덕전의 구체적인 조영 과정을 밝히는 한편, 흥덕전의 사용 연혁을 구체적으로 조사하고 설행된 의례를 분석하여 도출한 특징을 토대로 흥덕전의 역사적 가치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흥덕전은 1899년 하반기에 건립되기 시작되어, 1900년 2월 중순에서 3월 중순 사이에 완공된 것으로 추정된다. 흥덕전은 부속 전각으로 어재실과 내재실을 갖춘 의례시설이었다. 흥덕전의 이건은 1901년 4월에 계획되어 6월 이후에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는데, 이건 공사는 선원전 부속 전각의 공사 및 선원전 중건의 추가 공사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진행되었다. 또, 흥덕전의 영건 역비와 이건비의 기록, 선원전 중건 관련 비용 내역을 비교 검토한 결과, 흥덕전의 부속 전각인 어재실과 내재실이 선원전의 어재실과 이안청으로 이건되어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흥덕전은 1900년 초 영건되자마자 두 차례에 걸쳐 어진 모사처로 사용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확인되는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짧은 시간 동안 두 차례의 어진 모사처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조선 및 대한제국 시기의 어진 모사와 관련하여 선례가 없는 최초의 작업들이 진행된 장소였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황실 의례를 위하여 별도로 건립된 전각을 어진 모사처로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이후 흥덕전은 빈전으로 사용되었는데, 이전 시기의 빈전과는 다른 특징이 확인된다. 흥덕전은 빈전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미리 준비된 의례용 전용 전각이었으며, 어진 모사처로도 사용된 다목적의 의례용 전각이었다. 즉, 흥덕전은 경복궁 태원전과 함께 조선 후기 빈전 운영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전각인 것이다. 흥덕전에서 설행된 어진 관련 의례에서도 주목되는 특징이 확인된다. 첫 번째는 짧은 기간 동안 다수의 작헌례가 설행되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주로 지방의 진전에서 거행되는 속절제와 삭망일의 분향이 확인되었다는 점으로, 이는 궁궐 내 진전에서는 매우 드문 사례이다. 마지막은 전배 및 전알, 봉심이 다수 시행되었다는 점이다. 즉, 흥덕전은 황실 의례를 매우 중시하였던 고종의 의도와 경운궁 중건 과정의 특징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매우 상징적인 전각이라 할 수 있다.

서울 진오기굿의 재차구성과 의미 (The Composition and Principles of Seoul Jinogigut (Shamanistic Ritual))

  • 홍태한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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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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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3-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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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이 글은 서울지역에서 행해지는 진오기굿의 구성 원리를 도출하고 이를 바탕으로 의미를 규명한 글이다. 진오기굿은 신과 인간이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이승과 저승이 혼재되어 있는 세계이고, 인간의 세계에 있던 망자가 신의 세계로 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의례이다. 진오기굿은 망자를 저승으로 인도하는 과정을 차례로 보여준다. 먼저 신 중심의 거리가 연행되는데, 신이 어떤 과정을 통해 망자를 저승으로 인도할지를 보여준다. 다음으로는 신과 인간이 중심이 되는 거리로 사자를 따라 저승으로 가는 망자의 모습을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인간 중심의 구조로 인간이 어떻게 저승으로 들어가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반복을 통해 망자가 마침내 저승에 좌정했음을 드러낸다. 신 중심의 굿거리가 신과 인간의 만남을 거쳐 인간 중심으로 연행되는 것이 진오기굿 후반부 저승굿의 짜임이다. <도령돌기> 이후에 연행되는 <베가르기>, <뒷영실>은 망자가 온전하게 저승에 들어갔음을 확인하는 의례이다. 베를 갈라 망자가 저승으로 들어가는 것이 완벽하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고, <뒷영실>에서 망자는 다시 한 번 굿청에 들어와 굿을 해 준 것에 대한 감사함과 함께 죽음의 세계에 안착했음을 알려준다. 저승에 좌정한 조상신에게 비로소 제사를 올리는 <상식거리>는 진오기굿을 통해 인간이었던 망자가 조상신으로 변화했음을 알려준다. 진오기굿은 갑작스러운 죽음을 겪은 재가집을 위로해주는 기능도 수행한다. 재가집의 위로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망자가 무사히 저승으로 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진오기굿은 그러한 과정을 삼중구조를 통해 보여준다. 신들의 세계에서 망자가 어떻게 천도될 것인가를 보여주고, 저승에서 이승으로 나온 사재를 따라 망자가 무사히 저승으로 들어감을 보여준다. 다시 바리공주 뒤를 따라 저승으로 들어가는 망자의 모습을 보여주어 남은 가족의 마음을 달래준다.

<신자료> 『경자년(庚子年) 대통력(大統曆)』에 관한 고증 연구 - 비망 기록을 중심으로 - (<New material> A Historical Study on the Memorandum Record of 『Gyeongja(庚子)·Daetongryeok(大統曆)』)

  • 노승석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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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6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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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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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최근 조선 선조 때 유성룡의 『경자년 대통력』(1600)이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의해 일본에서 국내로 환수되었고, 이 책의 여백에 초서로 작성된 비망기록 4천여 자를 노승석이 해독하였다. 이는 203일 간의 대부분 새로운 내용들로서 그 당시 유성룡의 생활과 교유양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이다. 각 날짜별 날씨와 하루 일과, 당시 인물, 질병과 한약 처방 등이 적혀 있다. 특히 표지에 적힌 83자의 이순신의 전사 기록에는 당시의 상황이 상세하게 담겨 있다. 이순신이 전사한 후 1년여 기간이 지난 뒤에 그 전사내용을 적은 것은 선조의 전교를 받아 이순신의 공적을 현창하려는 조정의 여론에 부응하여 그의 전공을 오랫동안 되새기기 위해 적은 것으로 추측된다. 이 기록은 두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이순신이 고금도에서 유성룡의 파직 소식을 듣고 탄식하고 왜교성전투 이후 항상 배안에서 맑은 물을 떠놓고 다짐한 것. 둘째, 노량해전에서 부장들이 간언하여 만류함에도 끝내 부하들의 말을 듣지 않고 직접 나가 전쟁을 독려하다가 날아온 탄환을 맞고 전사한 것이다. 이는 오직 결사적인 각오로 싸우다가 전사했다는 의미로 작성되어 전사설에 중요한 근거가 된다. 그 외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술을 만드는 법 9건과 기타 방법 1건이 있는데, 당시 유행한 양주법과 새롭게 고안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동의보감』저자인 허준이 유성룡에게 약품을 소개했다는 내용이 있고, 그외 빈민을 구제하고 집안의 제사에 참석하지 못한 경우를 주서(朱書)로 표기하였다. 일본에 잡혀간 강항(姜沆)의 귀환 소식과 귀갑선도(龜甲船圖)를 선조에게 올린 이덕홍(李德弘)의 아들 내용도 있다. 요컨대 『경자년 대통력』은 현존하는 문헌에 없는 새로운 사실들을 다수 담고 있어서 유성룡과 관계된 인물 연구는 물론, 그 당시 시대상황을 실증적으로 고증 연구하는데 중요한 사료가 될 것이다. 특히 이순신의 전사기록을 통해 항간에 잘못 알려진 자살설을 바로 잡고, 허준이 유성룡에게 의학정보를 제공했다는 새로운 사실을 밝힌 점은 이번 연구의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앞으로 조선 선조 때의 유성룡과 관계된 역사와 인물을 연구하는 데 시금석이 될 것이다.

한국인 생활 속 인삼 문화의 상징성 (Symbolism of the Ginseng Culture in Korean Lifestyle)

  • 옥순종
    • 인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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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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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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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
  • 문화는 한 사회가 오랜 시간 동안 공동체 내에서 공유하고 전승해오고 있는 행동 양식과 생활 양식을 의미한다. 한국인의 일상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생활 도구, 공예품, 설화, 시문에 들어간 인삼은 한국인의 행동 양식과 생활 양식에 깊이 자리하고 있다. 인삼은 무병장수의 상징으로서 생활 기물과 공예품, 시문에 새겨져 우리의 문화가 되었다. 도자기에 기품있게 그려진 인삼은 조형미와 함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상징으로 그려진 것이다. 산신도에 공통으로 들어간 소품은 불로초(不老草) 인삼으로 수복강녕과 함께 인삼의 신령함에 대한 믿음이 컸음을 보여준다. 떡살, 밥상보, 장식품, 성냥, 부채 등 일상에서 매일 사용하는 생활 도구에 인삼이 새겨진 것은 인삼을 건강과 장수를 염원하는 부적처럼 여겨 가까이 두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떡은 제사, 회갑 잔치, 결혼의례, 생일잔치 등 제례와 잔치에 올리는 음식이었는데 우리 선조들은 신령하고 건강을 상징하는 인삼을 떡에 새기기 위해 떡살에 인삼을 무늬 틀로 만들었다. 가족 공동체 안에서 '기다림과 배려'를 의미하는 생활 기물인 밥상보에 인삼 무늬를 장식하는 둥 생활 기물 중에서도 특히 먹거리와 관련된 생활 도구인 젓가락, 숟가락, 찻잔. 단지 등에서 인삼문양을 많이 찾을 수 있다. 전승되고 있는 인삼 관련 설화(說話)중 가장 많은 것은 효행담으로 인삼은 효의 대표적 상징이었다. 건강을 기원하는 인삼을 선물하며 주고받은 서신과 시문에 인삼은 단순한 약재가 아니라 우정과 은혜를 나누는 귀물(貴物)로 감사의 상징이다. 생활 기물, 예술품, 시문과 서신에 드러난 인삼은 다음과 같은 상징성을 띠고 있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설화, 민담에서 나타나는 인삼은 부모에게 바치는 효행의 상징이었다. 둘째, 존경하는 스승, 우정 깊은 친구에게 보내는 감사의 표상이었다. 셋째, 생활 기물, 예술품에 새겨진 인삼은 심미성과 더불어 수복강녕을 상징하는 주술적 역할을 했다. 밥상보, 떡살 등 생활 기물에 새겨진 인삼은 무병장수의 기원과 함께 배려의 공동체 정신을 담고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통해 본 왕의 위락활동 유형과 변천 (A Study on the Types and Changes of the King's Amusement Activities through 『Annals of The Joseon Dynasty(朝鮮王朝實錄)』)

  • 강현민;신상섭;김현욱;마일초;한서정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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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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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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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조선왕조실록"을 중심으로 분석한 조선시대 제왕들의 위락활동과 변천에 관한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궁중 안팎 외부공간에서 행해진 왕의 위락활동은 연회형, 강무형, 유희형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연회형은 회례연, 진연(進宴), 풍정(豊呈), 진찬(進饌), 양로연, 사신연, 수연(壽宴), 곡연(曲宴) 등이었고, 강무형은 활쏘기, 격구, 사냥 등이며, 유희형은 나례(가면놀이), 처용무, 풍두희(?頭戱), 그리고 화산붕(불꽃놀이), 꽃놀이(賞花), 투호, 수박희(手搏戱), 낚시, 뱃놀이, 각투(角鬪), 상희(象戱), 잡희 등이었다. 위락 활동은 고려시대 답습기[1기, 태조~세조(예종)], 확립기[2기, 군사문화가 성리학 문화로 전환되었고 연회의 규례가 제도화, 성종~중종]. 단절기[3기, 임진왜란 등 불안한 정세 속에서 침체, 단절 초래, 성종~현종]. 중흥기[4기, 위락 문화 재정비, 수준 높은 왕실 문화의 자긍심 표출, 숙종~정조]. 그리고 쇠퇴기[5기, 세도정치로 왕권이 추락하면서 위락 활동이 급격히 퇴조, 순조~순종] 등 5단계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왕들의 사냥 관련 기사는 600건 이상 추적 되는데, 태종, 세종, 세조 등은 각 100여회 이상이었다. 사냥 대상은 호랑이, 곰, 사슴과 노루, 표범, 멧돼지, 매 등 이었고, 한양의 동북쪽 산림지역에서 주로 행해졌는데, 산수풍광이 수려하고 지리에 익숙한 풍양, 철원지역 등 북방의 정세와 안전을 살피기 위한 방안, 그리고 풍양이궁(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 장소성 등과 밀접하게 연계된다. 단오절 세시풍속으로 대중에 확산된 격구놀이는 조선 초 왕과 신하들의 최상류층 마상격구로부터, 중기이후 무과시험의 마상격구와 상류층의 보상격구로 전환되는 과정을 거쳐, 조선 후기에는 민간에 확산되어 겨울철 남성들의 집단유락문화로 전승되는 과정이 추적된다. 특히, 강무형 위락문화는 봄(활쏘기), 여름(투호), 가을(활쏘기), 겨울(격구) 등 심신수양을 겸한 4계절 행위요소로 작용되었다. 한편, 조선시대 왕과 왕비들의 연향과 같은 위락 활동은 공식적 의례의 경우 내정(內庭)에서, 비공식적 관유(觀遊)의 경우 궁궐 후원이나 별궁에서, 특수 연회의 경우 모화관과 태평관, 기로소 등 별원(別園)에서, 활쏘기의 경우 성균관 사단에서, 사냥의 경우 금표가 설치된 강무장(금원과 원유)에서, 매사냥의 경우 한강변 광나루에서, 격구의 경우 보격구 중심으로 내정이나 별궁에서 다양하게 행해졌다. 즉, 외조, 치조, 연조, 후원의 범위를 넘어서 별원과 금원, 원유 등 한양에서 최대 100리 범위 까지를 활동영역으로 설정하는 위락문화 확장성(정(庭)${\rightarrow}$원(園)${\rightarrow}$원(苑)${\rightarrow}$원유(苑?))을 추적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본 연구를 통해 수준 높은 기록문화의 추적을 통해, 역대 왕들의 위락문화를 연회형, 강무형, 유희형으로 유형화 할 수 있었고, 위락 활동(진찬, 회례연, 양로연, 대사례, 사신연 등은 물론 사냥, 활쏘기, 격구, 투호, 처용무, 낚시, 뱃놀이, 불꽃놀이 등) 전모와 장소성, 그리고 상징적 의미, 역사적인 전승과정과 위락문화 등을 복합적으로 탐색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