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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에 대(對)한 고증(考證) (A research on Hyang-Yack-Ku-Keup-Bang(鄕藥救急方) (Restoration and Medico-Historic Investigation))

  • 신영일
    • 한국한의학연구원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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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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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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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6
  • Hyang-Yack-Ku-Keup-Bang(鄕藥救急方) is our own, medical work written about the middle of the time of Korea Dynasty. I restored and researched this book because it needed to be illuminated about its medico-historic value and then I came to some conclusions as follows. 1. Hyang-Yack-Ku-Keup-Bang was published in Dae-jang-do-kam(大藏都監) of Kanghaw island(江華島) about the middle of Korea Dynasty. Choi Ja-ha(崔自河) republished it on original publication ground in Euiheung(義興) of Kyungsang-Province(慶尙道) in July, Taejong's(太宗) 17th year of Chosen Dynasty (A.D.1417) and this book was published again in Chungcheng Province(忠淸道) in Sejong's(世宗) 9th year(A.D.1427). The book published in Taejong's days was in the possession of books department of Kung-nae-cheng(宮內廳) in Japan and was the oldest medical book of existing ones. 2. Bang-Jung-Hyang-Yack-Mock-Cho-Bu(方中鄕藥目草部) of this book was originally intended to be adjusted in each division with the title of Bang-Jung-Hyang-Yack-Mock(方中鄕藥目). But Herb part(草部) only followed editing progress of Jeung-Lew-Bon-Cho(證類本草), the rest is not divided into each part and is together arranged at the below of Herb part with the title of Bang-Jung-Hyang-Yack-Mock-Cho-Bu. The Korean inscriptions on some drugstuffs in this book are different between Native Name(鄕名) of three volumes of provisions and general-spoken(俗云) of Bang-Jung-Hyang-Yack-Mock-Cho-Bu. In this, it is estimated that the publishing time and editor of tile volume of provisions and Bang-Jung-Hyang-Yack-Mock-Cho-Bu are different. I think Choi Ja-ha compiled this behind three volumes of provisions when he published. 3. This book picked some prescriptions which consisted of obtainable drugs with ease in Korea in the books of Chell-Keum-Yo-Bang(千金要方), Oi-Dae-Bi-Yo(外臺秘要), Tae-Peong-Sung-Hye-Bang(太平聖惠方), Ju-Hu-Bang(?後方), Kyung-Hum-Yang- Bang(經驗良方) Bo-Je-Bon-Sa-Bang(普濟本事方) Bi-Ye-Baik-Yo-Bang(備預百要方) and so on and got together our own prescriptions. On the whole Bi-Ye-Baik-Yo-Bang was a chief referrence book, On this, other books referred to and corrected. 4. In provisions quoted from Hyang-Yack-Jip-Sung-Bang(鄕藥集成方), there are seven provisions; leg-paralysis part, coughing part, headache part, obstetrics part, etc. don't show in this book. This is why Choi Ja-ha published only certain texts on Dae-jang-do-kam edition his own posession. So we can think the existing edition has a little misses compared with original edition. 5. This book recorded only names of drugstuffs in animal drug department like fowls, crab, goldbug, earthworm, etc. and didn't tell us ways of taking those. This is effect of Buddhist culture on medicine. This is efforts to practice 'Don't murder';one of Five Prohibition of Buddhism. 6. Beacause this book was published at the time, when our originative medicine would be set forth. This followed the Chinese ways in Theory, Treatment, Prescription and used 'Hyang Yack' in Medication out of theory of Korean medicine, which was a transitional form. So this is all important material which tell us aspects of development of 'Hyang Yack' the middle of Korea Dynasty.and this is also the beginning of originative, medical works like Dong-Eui-Bo-Kam(東醫寶鑑), Dong-Eui-Su-Bo-Won(東醫壽世保元). 7. There are few contents based on 'Byen-Jeung-Lon-Chi(辨證論治)'in this book. So we can see this book is not for doctors who study medical thoughts but for general public who suffer from diseases resulted from war. Because this book was written for a first-aid treatmeant, this is an index of medical service for the people those days. And this is also an useful datum for first-aid medicine or military medicine in these modern days. 8. Nowadays, parts of learned world of Korean medicine disregard essential theories and want to explain Korean medicine only by the theories or the methods of Western medicine. Moreover they don't adopt Chinese and Japanese theorys & thoughts about Oriental medicine in our own style and just view in there level. What was worse, there is a growing tendency for them to indulge in a trimming policy of scholarship and to take others' ideas. I think these trends to ignore our own medical thoughts involving growth of 'Hyang Yack' in the middle of Korea Dynasty, Dong-Eui-Bo-Kam and Dong-Eui-Su-Se-Bo-Won. So we, as researchers of Korean medicine, must get out of this tendency, and take over brilliant tradition and try to develop originative Korean medic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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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실 주조 청동활자의 복원과 과학적 분석 (Restoration and Scientific Analysis of Casting Bronze Type in Joseon Dynasty)

  • 윤용현;조남철;이승철
    • 보존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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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5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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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7-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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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임진왜란 이전의 청동활자인 계미자, 경자자, 을해자 등 10종을 복원하기 위하여 계축자인 동국여지승람의 복원 활자를 통하여 주조할 당시의 합금비율, 주조방법과 각 주조 단계 별 미세조직 변화를 관찰하였다. 청동활자의 평균 조성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을해자의 평균 성분조성(Cu: 86.7%, Sn: 9.7%, Pb: 2.3% 등)을 기준으로 하여 구리와 주석, 납의 합금 비율을 구리 87%, 주석 15%, 납 8%로 정하였다. 주요 금속활자를 복원하기 전에 모합금을 제작한 후 다시 모합금을 용융하여 활자를 복원하였다. 1차로 복원한 계축자의 성분조성은 Cu 85.81~87.63%, Sn 9.27~10.51%, Pb 3.05~3.19%의 범위를 보였다. 2차로 복원한 계축자는 1차 주조 후 남은 가지쇠를 용융하여 주조한 것으로서 성분조성은 Cu 87.21~88.09%, Sn 9.06~9.36%, Pb 2.80~3.05%의 범위를 보여주고 있다. 이 결과는 1차로 복원한 활자에 비하여 주석과 납의 함량이 소량 감소하였으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을해자의 평균조성과는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복원한 계축자의 미세조직을 관찰한 결과 청동의 전형적인 주조조직인 수지상(dendrite)조직이 잘 발달해 있으며, 납편석물들이 조직 내에 산재해 있음을 관찰할 수 있었다. 1차 주조 후 관찰한 미세조직과 남은 가지쇠를 용융하여 2차로 활자를 제작한 후 미세조직을 비교한 결과 1차로 주조한 것에 비하여 2차로 주조한 것이 일부 공석상 영역이 감소한 것으로 보이나 조직별 차이점은 발견하지 못하였다. 조선왕실 금속활자의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복원 실험을 통해 활자 주조방법의 기준 및 합금조성의 비율 등을 제시할 수 있었으며 앞으로 활자 복원 연구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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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입병원균(侵入病原菌)과 식물검역(植物檢疫) (Introduced Plant Pathogenes and Plant Quarantine in Korea)

  • 박종성
    • 농업과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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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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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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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6
  • 1) 우리나라가 외국(外國)과 식물(植物), 농산물무역(農産物貿易)을 시작한 20세기초이후(世紀初以後) 현재(現在)까지 여러가지 식물병원균(植物病原菌)이 수입식물(輸入植物), 농산물(農産物)과 함께 국내(國內)에 침입정착(侵入定着)하여 피해(被害)를 준 증거(證據)가 있다. 2) 외국(外國)의 식물병원균(植物病原菌)이 국내(國內)에 침입(侵入)하는 경로(經路)는 여러가지 있으나 주(主)로 수입(輸入)하는 식물(植物), 농산물(農産物)에 잠복(潛伏), 부착(附着)하여 침입(侵入)한다. 3) 식물병원균(植物病原菌)의 국내침입(國內侵入)을 효과적(效果的)으로 방지(防止)할수 있는 식물검역제도(植物檢疫制度)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시행(施行)된 것은 1912년(年)이며 세계식물검역사(世界植物檢疫史)에서 볼때 그 시행(施行)이 비교적(比較的) 일은 국가(國家) 크릅에 속(屬)한다. 4) 식물검역제도(植物檢疫制度)가 시행(施行)된 다음에도 여러가지 식물병원균(植物病原菌)이 침입(侵入)한 증거(證據)가 있다. 특히 2차세계대전(次世界大戰) 이후(以後) 1961년(年) 식물검역법(植物檢疫法)이 제정(制定)되어 식물검역(植物檢疫)이 재개(再開)될때까지의 약(約)15년간(年問)은 식물검역(植物檢疫)의 공백기(空白期)로서 여러가지 식물병원균(植物病原菌)이 국내(國內)에 침입(侵入)할수 있는 좋은 기회(機會)가 되었다. 5) 국내(國內)에 침입(侵入)한 식물병원균(植物病原菌)의 대다수(大多數)가 일본에서 유래(由來)한 것이며 이는 우리나라의 식물(植物), 농산물(農産物)의 무역(貿易)이 일본에 편중(偏重)되어 있었다는데 기인(起因)하는 것으로 추정(推定)된다. 6) 오늘날의 식물검역(植物檢疫)에는 더욱 정확성(正確性)과 지속성(遲速性)이 요구(要求)되므로 훈련(訓練)된 전문직검역관(專問職檢疫官)의 증원(增員) 대량(大量)의 식물(植物) 농산물(農産物)은 수용검역(收容檢疫)할수 있는 시설(施設)의 확보(確保)등 검역체제(檢疫體制)의 정비(整備)와 새로운 검역기술(檢疫技術)의 도입(導入), 개발(開發)등이 필요(必要)하다. 7) 식물검역(植物檢疫)의 체제정비(體制整備)와 기술향상(技術向上)은 국내(國內)에 침입(侵入)하는 식물병원균(植物病原菌)을 효과적(效果的)으로 방지(防止)하여 국내농업(國內農業)을 보호(保護)하는데 중요(重要)한 것 일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식물농산물수출(植物農産物輸出)의 증대(增大)와 안정화(安定化)를 위하여도 중요(重要)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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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서브컬처 콘텐츠에서 한국 신화에 대한 연구 (Research on Korea Mythology in Korea Subculture Contents)

  • 윤영석
    • 만화애니메이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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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권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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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53-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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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20세기 한국사회는 일제의 침략에 따라 강제로 병합되었으며, 일제의 식민정책에 따라 한국의 전통문화가 심하게 훼손되었다. 광복 이후 한국사회는 한국전쟁으로 급격한 사회적 변화를 맞이하였고, 근대화와 민주화를 통해 산업경제와 민주주의제도가 발전하였다. 그러나 한국사회가 산업경제와 민주주의가 발전하면 할수록 한국의 전통문화가 더 심하게 해체되었다. 20세기 중후반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이 도래하면서 기존 서구사회 중심에 대한 비판과 비서구권 및 제3세계의 문화적 정체성이 강조되면서 국제사회에서는 획일적인 문화적 가치보다는 다양한 국가와 민족의 문화가 서로 교류하기를 추구했다. 그동안 한국의 문화적 정체성이 해체되고 있었다면, 이제는 반대로 한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되찾을 필요가 있었다. 한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 한국의 역사, 언어, 예술, 건축, 문학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했으나, 한국의 신화에 대해서는 깊이 다루지는 않았다. 근대화 이후 한국의 신화는 미신으로 여기거나 미개한 것으로 취급당했기 때문이다. 신화는 어느 특정한 지역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무의식적인 집단 심리를 보여준다. 한국 신화를 연구하는 것은 한국인 문화적 정체성을 새롭게 찾을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이다. 한국의 신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는 신화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를 매체로 전달해야 할 것이다. 기존 한국 신화를 소재로 제작된 것으로 영화, 연극, 드라마, 소설 등이 대중문화로 소개되었으나, 최근 만화, 애니메이션, 웹툰, 게임, 라이트노벨 등과 같은 서브컬처 콘텐츠에서 등장하고 있다. PC, 인터넷, 스마트폰의 보급에 따른 게임 및 웹툰 이용자들이 증가했으며, 서브컬처 콘텐츠 시장규모 증가는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이용자들을 증가시켰다. 서브컬처 콘텐츠가 한국 신화를 소재로 제작되면서 서브컬처 콘텐츠 이용자들은 한국 신화에 대하여 관심과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한국 신화를 소재로 만든 서브컬처 콘텐츠에 등장하는 한국 신화와 그 의미에 대하여 연구하였다.

작물형질전환의 현황과 한국내의 발전전망 및 과제 (Current Status and Perspective and Future Task in Korea of Crop Genetic Transformation)

  • 한지학
    • Journal of Plant Biotechn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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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3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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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1-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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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형질전환작물의 재배면적은 초창기 1996년에 비해 2005년 기준으로 약 50배 늘어났고 매년 10% 이상 꾸준한 증가세를 유지하고 있으며 지난 10년간 형질전환작물에 의한 산업가치가 매우 큰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2010년에는 약 60%의 종자 매출이 형질전환기술을 이용한 개량종자일 것으로 예측하고 있어서 인류 먹거리에 막대한 영향력을 가져다주고 있는 제 2의 녹색혁명이라고 간주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에서는 형질전환작물에 대한 상업화가 전혀 활성화가 되지 않아서 미래 종자전쟁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결코 기술적으로 뒤떨어져 있지 않으며 실제로 외국과 비교하여 많은 작물들에 대한 protocol이 국내 연구자들에 의해서 완성되어 왔다. 또한 몇몇 작물은 세계 최초로 형질전환시스템을 구축한 경우들도 있어서 외국과의 경쟁력에서 우위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형질전환개발 기술측면에서는 국가 경쟁력이 있었지만 상업화하기 위한 몇 가지 시스템이 부족하였던 것이 현주소라고 사려 된다. 가장 큰 문제는 형질전환작물 개발 초기서부터 target 유전자가 제대로 상업화가 될 수 있도록 설정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형질전환작물이 개발되었을 경우 육종가에 의한 형질전환육종이 실행되지 않고 비육종가 직접 재배한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체세포 변이에 의한 열성 개체들이 선발되거나 tansgene의 효과가 자식열세에 의해서 상쇄되어 원예적으로 불량하게 선발된 것이 아닌가 사려 된다. 앞으로 이런 문제점들을 잘 숙지하고 형질전환작물의 상업화를 위하여 정부, 대학, 국립연구소, 산업체, 국민 모두 자기 역할을 활성화하여야한다. 향후 종자전쟁의 경쟁에서 우리가 시장점유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는 지금서부터 짊어지고 가야할 숙제와 난관이 너무 많다. 이미 국제적 경쟁에서 많이 뒤져있어서 우리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작물을 선택하여 개발하는 것을 제 1우선순위로 채택하고 산 학 연 협력으로 집중 연구하여 많은 사람들이 진정으로 인정하는 형질전환작물 품종개발이 가급적 빠른 기간 내에 마련되어야할 것이다.

1960년대 한국의 뮤지컬 수용 역사와 문화제국주의 (Acceptance History of Korean Musical Theatre in 1960s and Cultural Imperialism)

  • 이계창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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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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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49-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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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뮤지컬은 유럽의 오페라로 대표되는 서구 음악극 전통에서 시작된 대중예술 장르로서 20세기 미국 브로드웨이를 중심으로 꽃을 피웠으며, 현재 전 세계적으로 공연예술 분야에서 대중의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상업예술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이 장르의 특성 상 드라마의 전개나 캐릭터의 표현 등은 말이나 몸짓이 아닌 음악을 주요 매개체로 사용하며, 그 음악의 스타일은 특정 계층이 아닌 대중의 기호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근대화는 곧 서양화이고 일본이 조선의 개화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일제의 식민주의 음악교육은 조선 민중에게 일본 이데올로기 및 문화를 강제적으로 주입함으로써 일본에의 협력과 순종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일제가 편찬한 "보통교육 창가집"을 교재로 한 식민주의 음악교육은 한민족의 음악적 정체성이 일본음악 및 서양음악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해방 이후 냉전체재 하에서 미국의 대외정책에 따른 친미적 남한 정부 수립을 위한 자본주의 경제 메커니즘과 더불어 '미8군 쇼 무대'와 '영화'로 대표되는 미국 대중문화, 이 두 가지 요소들의 유입으로 인한 비가시적인 '문화제국주의'의 영향으로 우리의 전통음악은 '국악'이라는 단어에 갇혀 '과거의 음악'이라는 의미로 한정되어지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미국 대중문화의 유입으로 뮤지컬을 접하게 되었고, 우리 전통예술의 현대화를 통한 '건전한 문화'의 보급을 지향한 당시 박정희 정권의 문화정책 기조에 따라 '한국적 뮤지컬'을 지향하는 '예그린악단'이 창단되었다. 그러나 우리 민족예술을 기반으로 현대화 된 공연예술을 만들고자 했던 계획은 1966년 <살짜기옵서예>의 성공으로 가능성을 보였으나, 이후 정권 실세의 후원 중단 등의 이유로 더 이상 주체적으로 운영할 능력을 상실한 관변단체로 전락하는 운명에 처하면서 무산되고 만다. 일제의 식민주의 음악교육과 해방 이후 미국 대중문화의 유입이라는 문화제국주의 책략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한국 뮤지컬의 태동기에 우리의 전통연희 양식이 서양 음악과의 교류, 확장을 통한 자주적인 민족예술로 자리매김하지 못한 1960년대의 상황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것이 21세기 현재 한국 뮤지컬 시장을 서구 라이센스 뮤지컬이 주도하게 된 배경이며, 아울러 서양음악을 기반으로 한 뮤지컬 창작 현실의 주요 원인으로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부여고적의 재해석과 고적관광의 성격 (A Study on Characteristics of Reinterpretation and Tourism on Historic Sites of Buyeo Region during Japanese Colonial Era)

  • 김종수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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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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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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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일제는 일선동조론에 바탕을 둔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우리의 역사를 식민사관에 맞춰 재구성하는 한편 고고학적 조사와 고적에 대한 재해석을 통하여 이를 증명하려고 하였다. 경주, 부여 등 고도(古都)에 대한 고적조사 및 고적의 재해석 그리고 고적관광은 이러한 맥락에서 추진되었다. 특히, 부여지역의 경우 고적조사와 고적에 대한 재해석을 통하여 백제 사비기와 일본 고대 아스카(飛鳥)시기와의 밀접한 관련과 친연성을 강조하고 이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고적을 식민지 조선인에게 보여주는 고적관광을 실시하였다. 본 논문은 일제강점기 부여지역에 대한 고적조사와 고적의 재해석 및 고적관광이 어떤 맥락으로 이루어졌고 그것이 일반 대중들에게 어떻게 수용되었는지를 고찰하였다. 첫째, 부여지역의 고적조사는 1909년 세키노 다다시에 의해 처음 시도되어 일제강점기 동안 고분과 사지(寺址)에 대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세키노는 부여의 고적조사 결과를 토대로 고대 중국(梁) 한국(百濟) 일본(倭)간의 문화적 관계와 영향을 설정하였고 사비시기의 백제문화가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를 다시 일본에 전달하여 아스카 문화를 형성하게 했다는 문화 전달 자설을 역설하였다. 이는 우리문화의 고유성을 부인하고 백제문화를 중국문화의 아류 또는 단순 전파자 역할로 왜곡 해석한 것으로 이러한 세키노의 관점은 일제강점기 내내 일관되게 유지되었다. 둘째, 1915년에 발족한 부여고적보존회는 부여고적에 대한 탈맥락적 해석을 통하여 고대 일본과 백제와의 관계를 동화론적 관점에서 재정립하였다. 특히 낙화암, 고란사, 청마산성 등에 대한 재해석을 통하여 일본과의 친연성을 강조함으로써 일제의 동화정책을 역사적 사실관계로 확정지으려고 하였다. 셋째, 부여지역의 고적관광은 부여고적보존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주된 관광대상과 코스는 고적의 재해석을 통해 재구성된 고적들이었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부여를 일본 고대문화의 원형 또는 본향으로 이념화된 공간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이처럼 일제강점기 부여의 고적조사와 고적에 대한 재해석 그리고 고적관광은 서로 밀접한 관련하에서 추진되었고 그 추진 주체가 조선총독부와 친일 관변단체였다는 점에서 타자의 시선에 의해 '만들어지고' '보여진' 것이었으며 그것은 식민지 표상공간으로서 부여의 재발견이었다.

조선 후기 절걸립패 풍물의 성립과 그 풍물사적 의의 (Establishment of Buddhist Monks' Pungmul in the Late Joseon Dynasty and Its Meanings)

  • 손태도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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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0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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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8-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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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조선 전기 줄곧 탄압의 대상이 된 불교는 임진왜란 때 승려들의 승병(僧兵)으로의 참가로 국가로부터 일정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결과의 하나는 많은 사찰들의 소실이란 참화였다. 이에 조선 후기에 들어 사찰의 재건이나 중수를 위해 승려들 스스로가 '${\bigcirc}{\bigcirc}$사(寺) 건립패(建立牌)'란 걸립 풍물패를 만들어 활동했다. 이러한 이른바 '절걸립패 풍물'은 그 이전부터 있었던 광대들이나 일반 농민들의 정초 집돌이농악 같은 걸립풍물을 흉내낸 것이었다. 조선 후기 절걸립패 풍물의 활동은 전국적으로 이뤄져, 오늘날에도 경북의 빗내농악, 전남 여수, 강진 일대의 '버꾸놀이', 경기 강원 충청의 절걸립패 고사소리, 경기 충청지역의 남사당패의 존재 등으로 그 분명한 모습들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농악들이나 농악과 관계되는 것들에 조선 후기 절걸립패 풍물의 모습들이 분명한 형태들로 남아 있는 것이다. 한편 조선 후기 절걸립패 풍물의 활동이 전국적으로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 절걸립패의 연장에서 생긴 남사당패가 오늘날 경기 충청지역에만 남게 된 것은 조선 후기에 경기도지역의 사찰 건립이 특히 많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에 들어 전국적으로 또 오랫동안 이루어진 절걸립패 풍물 활동은 종래의 풍물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우리나라의 풍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깔, 종이꽃, 색띠, 소고, 바라 등 불교적 요소들이 그러한 것들이다. 조선 후기 절걸립패 풍물은 우리나라 풍물사에서 분명 중요한 위치에 있다. 이에 대한 조사 연구들이 앞으로 보다 본격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창덕궁 대보단(大報壇)의 공간구성과 단제(壇制) 특성에 관한 고찰 (Studies on the Spacial Compositions and the Characteristics of the Alter System at Daebodan in the Changdeok Palace)

  • 정우진;심우경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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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6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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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18-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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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본 연구는 고문헌 및 도상자료의 분석을 통하여 조선 후기 정치사에 큰 비중을 점유하고 있는 창덕궁 대보단의 시대별 공간구성을 조명하고 단제(壇制) 형성에 이입된 요소를 고찰할 목적으로 수행되었다. 대보단에는 병자호란 이후 지배질서의 위기를 느낀 조선의 지배층이 타개책으로 내세운 존명의리의 이념적 장치가 녹아들어 있으며, 조선중화의식의 자부심과 역대 임금에게 내재된 제천의 욕구가 맞물려 있는 등 복합적 요인이 한데 얽혀 조적(組積)되어 있었다. 표면적으로 대보단은 사직단의 구성요소와 부속건물의 배치를 그대로 가져오되 지형의 제약과 후원의 출입 제한으로 인해 변통한 배치를 보이고 있었으나, 입면적 구조에서 9급의 계단, 5척의 단고(壇高), 단유(壇?)에 나타난 2성(成)의 정황 그리고 황장방 내부의 형태 등 황명제의 다양한 요소가 복합적으로 수용되었다. 또한 "예기 교특생"에서 따왔다는 단명(壇名)은 다분히 교천(郊天)을 상징하고 있었으며, 중국과 조선의 사직단의 제도를 적절히 조합하여 참례(僭禮)의 혐의를 피하여 건립되었다. 이러한 점은 대보단의 단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특징으로서 중화계승의식과 역대 임금에게 내재된 제천의 욕구가 제단의 구조와 형식을 통해 표출된 것으로 판단된다. 본 연구에서는 대보단의 창건, 확장, 쇠퇴, 훼철의 과정을 편년적 방법으로 살펴보았는데, 각 변천의 기점에서 당대의 정치 문화적 배경에 따른 조선 통치엘리트 집단의 지배이데올로기가 제단의 공간형식에 투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편 도상자료에 나타난 대보단에 조응되는 위치를 찾아 현장조사를 실시한 결과 창덕궁 천연기념물 다래나무 주변에서 대보단의 석재, 전돌과 와편 등의 유구가 발견되어 향후 발굴조사를 통한 확인이 요구된다.

삼국시대(三國時代) 병기체제(兵器體制)의 연구(硏究) (This Study of the Arms Used in the Three Kingdoms)

  • 김성태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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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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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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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
  • In order to unravel the characteristics of arms used in the 'Three Kingdoms,' Kokuryo, Silla and Paikje. the classification and the developing procedures of the arms should be first discussed. At first, the basic arms of the soldiers of Three Kingdoms were iron swords, iron spearheads, and bows. During that period, swords attached a ring pommel were commonly used. But after 5A. D. a sword with a decoration pommel appeared. Infantry generally used iron spearheads. From the late 4A. D. the long spearheads were broadly used in cavalry battles. In the late 6A. D. infantry mainly used long spearheads, and this resulted in the foundation of long spearheads units. There were two kinds of bows: Short Bow whose arch is small and Long Bow whose arch is long. It is known that the Short Bow was widely used in Kokuryo and Paikje up to 5A. D. In the early era, infantry used Long Bow, yet it was vastly used after 6A. D. when a castle's strategical value was great and defending a castle was. significant. Above mentioned, as basic combat weapons, iron spearhead and bow were fundamental. In particular, the spearhead was the essential weapon to a soldier. Yet, arrow gun and hook-shape cutters were important weapons. Especially, after 6A.D., when a castle became strategically pivotal in military, the arrow gun became the important weapon. This resulted in the foundation of arrow gun units. Hook-shape cutters were used to snatch horsemen or to climb up to fall the castle. Yet, the cutter was not the Three Kingodoms' basic weapon. In addition, the three stages of arms development in the Three Kingdoms are formation stage, development stage, and settlement stage. The formation stage was the period when premitive military unit appeared in the Three Kingdoms. It ranged from 1B. C. to the mid 3A. D. At that time according to regions. there were two weapon systems operating: North area including Kokuryo and the northern part of Paikje and South area including Silla, Kaya and the southern part of Paikje. ln North area a sword with a ring attached at the end of the holder, iron spear with neck and mid-size flat holder and iron arrowhead with an extension to fix, were used. In this period, during a war calvary units were mostly used and their weapon systems seemed possibly to succeed in that of Kochosun. In the development stage, when LoLang's influence on surroundings became weak, Koguryo, Paikjae and Silla had directly contacted each other. In the late 3A.D. to the early 6A.D., Silla achieved a drastic improvement in weapon system. This was the period when Kokuryo played a leading role in arms race. Kokuryo's arms manufacturing techniques passed onto Silla, Kaya and Paikje. In combat strategy a joint operation between infantry and calvary prevailed even if their military tactics were different. In a calvary battle heavily armed horsemen played import roles at this period. The horsemen and even horses were heavily guarded with iron armors. After all, the appearance of fully armed horsemen implies the very need of powerful destructive forces in weapon system. At that time, basic weapons were a big sword with a ring attached at the end of the holder, swallow's tail-shape spear with neck, and iron spearhead with neck and an extension. The settlement stage began at the mid 6A.D., when it was the revolutionary period in the arms development history. Of course, actual proofs and picture documents were not sufficient enough to penetrate full scale of the weapon system. But, according to historical circumstances and historic records, it is very certain that this period was the peak in arms development. In this period special military units, such as infantry-calvary companies, Archery units and Long spear units, that executed particular duties with special weapons, were founded. This became the characteristics of the settlement st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