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The time of enlightenment(開花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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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과학 교육자의 배경과 역할 (The Backgrounds and Roles of the Science Educators during the Enlightenment Period of Korea)

  • 박종석;정병훈
    • 한국과학교육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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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0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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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43-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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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
  • 개화기 과학교과서의 편저자들을 당시 과학교육의 도입과 활동에 있어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들로서 그들의 배경과 역할을 연구하여 한국 과학교육의 정착 과정을 논의하였다. 당시 출판된 과학교과서의 편저자들 중 한국인은 38명에 이르고, 대한제국 관원 이력서나 학회지를 통해서 그들 중 12명의 배경을 알아냈으며, 교과용도서일람과 학회지로부터 그들의 활동 내용을 밝혀냈다. 7명은 일본에서 유학하였고, 5명은 국내에서 전문 교육을 받았다. 4명이 과학교육과 관련된 자연분야를 일본에서 전공하였다. 이들은 활동 초기 학회지 등에 과학이나 전문 학문 분야에 관련된 기사를 게재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과학 교과서나 일반 교과서를 편술 또는 저술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역할은 1910년대부터 점차 활동의 비중이 커진 일본인 교사들로 대체되며, 그들 자신도 전문적 학술 훈련을 받은 집단이 아니라 기술과 관련된 전문학교 수준의 응용과학을 배웠다는 점에서 독자적인 과학교육을 실시하는 데는 학문적으로나 교육적으로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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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형태논적(形態論的) 고찰(考察) (Morphological Study Of The 「Kyeong Syeong Baek In Baek Saek()」 - Focusing On the Declensions)

  • 전병용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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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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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07-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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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본 연구의 목적은 개화기 풍자소설인 <>을 대상으로 형태론적 특징을 고찰하고, 창작 시기를 추정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하여 먼저 조어의 특징을 살핀 다음 조사를 중심으로 분석하였으며, <경셩>의 창작 시기에 대한 형태론적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창작시기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였다. <경셩>의 창작시기에 대한 기존의 논의를 타당한 것으로 본다. 문학전공자를 중심으로 선행 연구에서 <경셩>의 창작시기를 대체로 1901년 이후 1907년 이전으로 잡았는데, 본고의 형태론적 고찰을 통한 결과와도 일치하기 때문이다. 조어 특징에서, 조건법 표현인 '~ 말이면' 등장은 <경셩>의 창작시기를 추정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경셩>의 창작시기(1910년 전후) 이전의 문헌에서는 이에 상응하는 조건법 표현은 '~ 작시면'이었는데, <경셩> 시기의 신소설에서는 '~ 말이면'으로 나타나고, 그 이후에는 '~ 것 갓흐면'이나 '~'으로 바뀌면서 현대국어의 양상에 근접하기 때문이다. 조어의 특징으로 오기(誤記)를 분석하였다. 단순한 오기와 무지(無知)에서 비롯한 오기로 나누어 살펴본 바, <경셩>의 필사자는 창작자는 물론 아니고 원전(原典)에 대한 이해가 깊은 교양인도 아닐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조사의 특징에서 주격조사 '-가'의 전면적 사용이 특기(特記)할 만하였다. 주격조사 '-가'는 근대국어 초기에 이미 등장하였으나, <이언(易言)>의 한글본의 언해시기(1883년)까지는 전면적으로 쓰이지 않고 '-ㅣ'가 대신하였다. 하지만 <경셩> 시기에서는 '-ㅣ'가 화석형으로 흔적만 남기고 대부분 '-가'로 대체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를 근거로 <경셩>의 창작시기는 최소한 1883년 이후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근대 한국기독교 자료의 디지털 아카이브 시스템 구축에 관한 연구 (A Study on Constructing a Digital Archive System of the Modern Korean Christian Collections)

  • 양지안
    •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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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2권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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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81-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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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본 연구는 우리나라 개화기 이후 해방될 때까지 근대 시기에 발행된 한국기독교 관련 자료를 다수 소장하고 있는 S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의 자료목록을 분석하여 이를 대상으로 디지털 아카이브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목적이 있다. 한국 근대 시기의 기독교자료에 관한 디지털 아카이브 시스템 구축을 위해 대상 자료에 대한 색인과 메타데이터를 형식에 맞게 작성하였다. 선별된 자료를 디지털화한 후, 메타데이터 정보를 이용하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였고, 실제 시스템은 웹 표준 기반의 관리시스템과 이용자서비스시스템으로 나누어 구축하였다. 디지털 아카이브의 원활한 이용을 위해 내용기반의 검색시스템을 구축하였으며, 한 글자 단위의 검색결과 매칭값을 제공하고 검색어 자동완성 기능을 구현함으로써 이용자의 편의성을 제고하였다. 이를 통해 원문접근이 어려운 박물관 자료를 손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디지털화하여 제공함으로써 인문학 콘텐츠의 장기적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여 연구자 및 대중들의 자료 접근성 및 활용성을 제고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일제강점기 언론사연구와 안재홍의 "조선신문소사(朝鮮新聞小史)" (A Study on the History of the Press during the Japanese Ooccupation Period and "Josun Shinmun Sosa" by Ahn Jae-Hong)

  • 김영희
    • 한국언론정보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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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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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5-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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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이 연구는 안재홍의 신문사 연구에 대해, 그가 1935년 발표한 "조선신문소사"를 중심으로 한국언론사의 연구사적 시각으로 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일제강점기 언론사를 주제로 한 주요 논의들을 살펴본 결과, 안재홍의 연구는 비교사적 방법과 사회사적 접근방법으로 고찰한 것으로 일제강점기 언론사 연구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성과로 평가된다. "조선신문소사"는 신문의 기원으로 인행조보와 긔별(저보)을 먼저 설명하고, 구한말 주요 신문에 참여한 인물, 신문의 논조, 주요 기사에 대한 평가를 통한 신문의 성격 분석, 신문체제, 신문광고, 친일신문, 일본인 경영 신문, 해외 교포 신문 등 구한말 신문현상의 다양한 주제를 설명했다. 신문에 기고한 글의 성격상 정밀한 연구라기보다는 개괄적으로 언급한 부분들이 있고, 객관적인 분석과 주관적인 감상이 혼합되어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안재홍의 연구는 일제강점기에 발표된 신문사 논의 가운데 연구대상의 여러 문제를 가장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고, 해석의 시각과 방향에서 이 시기 신문현상에 대한 선구적인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동시대의 신문사연구와 해방이후 언론사 연구의 시기구분과 서술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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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시기 동양평화에 대한 두 시각 - 안중근과 박영철을 중심으로 - (Two Views on the Oriental Peace of Modern Era - Focusing An, Joonggeun and Park, Youngcheol)

  • 오재환;구사회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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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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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49-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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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이 논문에서는 민족 존망의 위태로운 시기에 활동했던 안중근과 박영철이라는 두 사람을 통해 근대 지식인의 자세와 현실에 대한 대응 방식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민족정신의 표상인 안중근과 친일파였던 박영철을 비교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고에서 그것을 시도한 것은 사회진화론이라는 똑같은 이데올로기라도 그것을 어떻게 적용시키느냐에 따라 결과는 판이하였기 때문이다. 안중근과 박영철은 같은 시기에 태어나서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로 이어지는 변혁기를 살았다. 이들에게 민족 주권과 동양평화라는 공통적인 화두가 있었지만 삶의 방향이나 행적은 서로 달랐다. 전자는 일제의 심장을 겨누었고, 후자는 그것의 심장부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들은 동양평화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19세기 이래로 대두된 적자생존과 우승열패로 귀결시키는 사회진화론을 전제로 개진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들의 논리는 사회진화론에 결합된 인종주의를 토대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중근은 동양 각국이 서로의 주권을 침해하지 않고 공존해야 동양평화가 이룩된다고 보았고, 박영철은 동양이 일본을 중심으로 뭉쳐야 동양평화가 이룩된다고 보았다. 이들 두 사람은 같은 시기를 살았지만 시대 의식도 대조적이었다. 안중근은 일제가 한국의 주권을 빼앗아 동양평화가 깨질 것으로 보았다. 반면에 박영철은 일본과 한국이 일체가 되어 대동아공영을 이룩한 바, 평화시대가 도래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후자는 한국의 주권보다는 일본의 근대 문명에 관심을 보이며 한국이 그것을 본받아야 한다고 보았다.

출간 50년된 '유길준 전서(兪吉濬全書)'의 보존상태조사와 효과적인 자료보존과 공유방법 (Investigation on the Conservation Status of the 50-year-old "Yu Kil-Chun Archives" and an Effective and Practical Method of Preserving and Sharing Contents)

  • 유우식;유승선;유병호;유성준
    • 보존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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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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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7-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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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개화기 한국 근대사연구의 중요한 자료인 1971년에 출판된 2,866페이지에 달하는 『유길준 전서(兪吉濬全書)』 1질(5권)의 자료보존과 효율적인 공유를 위하여 해당 자료의 조사와 구입, 보존상태 조사, 자료의 물리적 보존, 자료의 상태와 내용 보존을 위한 전자문서화 작업까지의 과정을 정리하여 소개한다. 출판된 지 50년이 경과한 현대 인쇄물에서 문서의 변색(變色)과 경화(硬化), 부스러짐, 파손 등의 열화 및 손상 정도를 이미지분석을 통하여 정량화하고 손상영역의 가시화를 시도하였다. 사용된 종이의 재질, 표면상태, 광선에 노출된 정도, 보관환경에 따라 열화 및 손상 정도가 크게 의존하는 것이 관찰되었다. 유길준 전서 제1권에 수록된 『서유견문(西遊見聞)』의 전자문서화된 이미지와 다른 웹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이미지와의 비교를 통하여 이미지 촬영 당시의 보존상태의 비교, 고찰 및 이미지의 가공유무에 대한 판단이 가능함을 예시하였다. 본 연구를 통해서 전자문서화가 완료된 자료의 효과적인 보존과 학술연구자료로 공유하는 방법을 고려하면서 부딪치게 된 현실적인 문제에 관해서도 정리하였다.

영친왕비(英親王妃) 수식(首飾) 장신구(裝身具)의 디지털화를 통한 산업적 활용 연구 (The Research of Industrial Application through Digitalization of the Jewelry of Imperial Princess YEONG)

  • 정아영
    •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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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1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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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6-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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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정교한 금속공예기술을 바탕으로 아름다운 여성 장신구를 제작, 착용해왔다. 이러한 장신구 중 특히 조선시대의 장신구는 실용성과 장식성 그리고 사회적 상징성 등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 한국문화의 고유성을 표출할 수 있는 대표적 문화원형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그 가운데 본 논문의 연구대상인 된 영친왕비 장신구는 개화기 이후, 조선 말기의 유물이지만 궁중의식용으로 제작된 것이기 때문에 조선시대에 엄격히 지켜진 궁중복식 정례(定例)에 따라 전통적 형태나 기준에 맞추어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 종류의 다양성과 원형에 가까운 보존상태, 국말 상의원 소속 장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점 등에 있어서도 예술성 뿐 아니라 궁중 양식과 그 체제 등에 대한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된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조선 말기 영친왕비가 사용한 장신구 가운데 조형적 가치가 있는 수식 11점을 선정하여 연구하고, 그 형태와 문양을 디지털 콘텐츠화하여 전통문화 원형을 보존하고 사회적 활용방안을 추구하고자 한다. 또한 전통여성장신구에 대한 고찰을 통해 문양 자료를 제시함으로써 문화산업과 현대장신구 디자인 에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전통주택 마당에 나타나는 정원양식의 현대적 분화 (Modern Division of the Style of Gardens Presented in Korean Traditional House Yard)

  • 박은영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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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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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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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주거는 그 시대의 사회 문화적 가치관이 총체적으로 표현되는 것으로 지속성과 변화를 반영한다. 한국 전통주택의 마당은 외부공간이긴 하나, 안채와 맞물린 한 짝의 공간으로 내부공간에서 못다 이룬 주거기능의 많은 부분을 수행하고 있다. 개화기 이후 우리의 주거문화는 급격한 환경변화의 과정 속에서 가치관과 주생활 양식의 변화와 함께 마당의 형태, 기능, 의미가 달라지고 있다. 이에 47개 연구대상지를 통해 주택마당의 현황과 실태를 파악하여 마당의 변용과 분화를 분석, 종합하였다. 연구대상지에 전통주택 마당의 원형과 달리 분화된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는 대표적인 요소는 재식의 재료와 방법, 점경물의 이용, 포장재료, 물의 이용, 텃밭의 변화 등이었다. 전통주택 마당에 나타나는 정원양식의 현대적인 분화는 마당의 역할이 변화함에 따라 정원 영역의 분화가 나타났고, 경계와 적극성의 정도에 따라 정원 형태의 분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또한 장식성과 실용성의 추구에 의한 정원의 기능 분화와 편리성 추구에 따라 정원의 소재 분화가 나타났다. 그 밖에 상징과 일상적인 의미에서 상업성, 개방정원의 의미가 추가되어 정원의 이용 분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1920년대 전통음악공연의 형태와 특징 - 서양식 장르와의 혼성공연형태를 중심으로 - (Types and Characteristics of Traditional Music Performance of the 1920s - Focused on the mixed performances type in the western-style genre -)

  • 금용웅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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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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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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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일제강점기 전통음악공연은 식민지라는 특수한 상황에 놓이면서 점차 축소, 약체화 되어 갔고, 개화기 이후부터 사회전반에 꾸준히 확산되기 시작한 서양문물의 영향으로 서양식 장르의 공연이 활성화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전통음악공연은 단독공연형태보다는 서양식 장르와 함께 연행되는 혼성공연(混成公演)형태를 보이는데, 특히 서양음악과의 혼성공연형태가 주를 이루었고 이 밖에 연극, 강연, 영화, 댄스, 마술과 같은 장르와도 함께 공연되었다. 이와 같은 서양식 장르와의 혼성공연형태는 1920년대에 들어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전통음악공연의 한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다. 따라서 서양식장르와 전통음악의 혼성공연형태에 대한 연구는 한국근대음악사에서 아직 조명되지 않은 전통음악의 공연형태를 밝혀, 일제강점기 전반적인 전통음악공연의 동향을 파악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고 하겠으나, 지금껏 이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진 바가 없는 실정이다. 이에 본 연구는 1920년대 서양식 장르와 전통음악의 혼성공연형태에 대해 당시의 신문기사들을 중심으로, 서양식 장르와 전통음악의 혼성공연형태 활성화 배경과 형태별 특징에 대해 고찰하였다. 서양식 장르와 전통음악의 혼성공연형태 활성화 배경에서는 1920년대에 들어 서양식 장르와 전통음악의 혼성공연형태가 이전에 비해 활성화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원인은 1920년대에 들어 공연의 주최나 후원 단체들이 늘어남에 따라, 전반적인 공연의 개최 수가 이전보다 급격히 증가하였고, 증가한 공연의 양상이 서양문물의 확산으로 더욱 다양해진 대중들의 기호 충족을 위해 대부분 혼성공연형태로 이루어진 데에 기인하고 있었다. 서양식 장르와 전통음악의 혼성공연형태별 특징에서는 전통음악과 함께 공연된 서양식 장르들을 분류하여, 전통음악이 개개의 서양식 장르와 함께 공연되었을 때 어떠한 특징이 나타나는지 살펴보았다. 첫째, 서양음악과 전통음악의 혼성공연형태에서는 전반적으로 서양음악의 프로그램 수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으며, 당시에 흔치 않았던 서양악기와 전통악기의 합주가 이루어지기도 하였고, 부제나 날짜별로 두 장르를 구분하여 공연되기도 하는 특징을 보였다. 둘째, 연극과 전통음악의 혼성공연형태에서는 전통음악이 창극과 유사한 형식으로 연극에 직접 참여하거나, 연극의 무대전환을 위한 막간공연의 역할로 연극과 독립되어 공연되기도 했고, 관객모집이나 여흥을 위해서도 공연되는 특징이 있었다. 셋째, 강연과 전통음악의 혼성공연형태에서는 전통음악이 강연의 전이나 후에 연주 되어서 강연의 분위기 조성과 여흥의 역할을 하는가 하면, 관객모집을 위해서도 공연되는 특징을 보였다. 넷째, 영화와 전통음악의 혼성공연형태에서는 전통음악이 영화에 직접 참여하거나, 독립적인 공연의 성격을 띠기도 했고, 영화 상영 후 여흥을 위해서도 공연되는 특징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