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The annals of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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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의 적조(HABs) 고찰 (A Study of Red Tide(HABs) in the Annals of the Joseon Daynasty)

  • 민승환;서영상;박종우;황재동
    • 한국지리정보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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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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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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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14세기 말부터 19세기 초까지 적조(HABs) 발생상을 분석하였다. 적조기사는 모두 81건으로 표로 정리하고, 적조지도를 구축하였다. 해역별 발생횟수는 남해 62건, 동해 50건 그리고 황해 22건으로 나타났다. 남해와 동해에 접한 경상도에서는 82건으로 가장 많았다. 경상남도에서 함경북도까지의 적조발생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는데 첫 번째는 3월 강원도에서 시작되어 4월 함경남도에서 발생이 증가하고 5, 6월에는 중심이 함경북도로 북상하는 형태이다. 두 번째는 8월 경상남도를 중심으로 발생하다 9월에는 경상북도에서 발생이 증가하는 형태이다. 월별 발생 수는 8월이 가장 높았다. 그 외는 대부분 4~9월에 나타났다. 그 중 조개류를 먹고 인명 피해가 발생한 사례는 2~6월 진해, 거제, 통영에서 나타났다. 수산물 피해는 7~9월 경상도연안 전반에서 나타났다. 적조가 대규모로 발생한 시기는 1394~1451년, 1654~1706년으로 나타났고, 적조의 소규모 발생은 1493~1534년, 1588~1609년 이었으며, 공통적으로 홀수 해(1399, 1403, 1413, 1681년)에 대발생을 보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통해 본 왕의 위락활동 유형과 변천 (A Study on the Types and Changes of the King's Amusement Activities through 『Annals of The Joseon Dynasty(朝鮮王朝實錄)』)

  • 강현민;신상섭;김현욱;마일초;한서정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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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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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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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조선왕조실록"을 중심으로 분석한 조선시대 제왕들의 위락활동과 변천에 관한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궁중 안팎 외부공간에서 행해진 왕의 위락활동은 연회형, 강무형, 유희형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연회형은 회례연, 진연(進宴), 풍정(豊呈), 진찬(進饌), 양로연, 사신연, 수연(壽宴), 곡연(曲宴) 등이었고, 강무형은 활쏘기, 격구, 사냥 등이며, 유희형은 나례(가면놀이), 처용무, 풍두희(?頭戱), 그리고 화산붕(불꽃놀이), 꽃놀이(賞花), 투호, 수박희(手搏戱), 낚시, 뱃놀이, 각투(角鬪), 상희(象戱), 잡희 등이었다. 위락 활동은 고려시대 답습기[1기, 태조~세조(예종)], 확립기[2기, 군사문화가 성리학 문화로 전환되었고 연회의 규례가 제도화, 성종~중종]. 단절기[3기, 임진왜란 등 불안한 정세 속에서 침체, 단절 초래, 성종~현종]. 중흥기[4기, 위락 문화 재정비, 수준 높은 왕실 문화의 자긍심 표출, 숙종~정조]. 그리고 쇠퇴기[5기, 세도정치로 왕권이 추락하면서 위락 활동이 급격히 퇴조, 순조~순종] 등 5단계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왕들의 사냥 관련 기사는 600건 이상 추적 되는데, 태종, 세종, 세조 등은 각 100여회 이상이었다. 사냥 대상은 호랑이, 곰, 사슴과 노루, 표범, 멧돼지, 매 등 이었고, 한양의 동북쪽 산림지역에서 주로 행해졌는데, 산수풍광이 수려하고 지리에 익숙한 풍양, 철원지역 등 북방의 정세와 안전을 살피기 위한 방안, 그리고 풍양이궁(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 장소성 등과 밀접하게 연계된다. 단오절 세시풍속으로 대중에 확산된 격구놀이는 조선 초 왕과 신하들의 최상류층 마상격구로부터, 중기이후 무과시험의 마상격구와 상류층의 보상격구로 전환되는 과정을 거쳐, 조선 후기에는 민간에 확산되어 겨울철 남성들의 집단유락문화로 전승되는 과정이 추적된다. 특히, 강무형 위락문화는 봄(활쏘기), 여름(투호), 가을(활쏘기), 겨울(격구) 등 심신수양을 겸한 4계절 행위요소로 작용되었다. 한편, 조선시대 왕과 왕비들의 연향과 같은 위락 활동은 공식적 의례의 경우 내정(內庭)에서, 비공식적 관유(觀遊)의 경우 궁궐 후원이나 별궁에서, 특수 연회의 경우 모화관과 태평관, 기로소 등 별원(別園)에서, 활쏘기의 경우 성균관 사단에서, 사냥의 경우 금표가 설치된 강무장(금원과 원유)에서, 매사냥의 경우 한강변 광나루에서, 격구의 경우 보격구 중심으로 내정이나 별궁에서 다양하게 행해졌다. 즉, 외조, 치조, 연조, 후원의 범위를 넘어서 별원과 금원, 원유 등 한양에서 최대 100리 범위 까지를 활동영역으로 설정하는 위락문화 확장성(정(庭)${\rightarrow}$원(園)${\rightarrow}$원(苑)${\rightarrow}$원유(苑?))을 추적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본 연구를 통해 수준 높은 기록문화의 추적을 통해, 역대 왕들의 위락문화를 연회형, 강무형, 유희형으로 유형화 할 수 있었고, 위락 활동(진찬, 회례연, 양로연, 대사례, 사신연 등은 물론 사냥, 활쏘기, 격구, 투호, 처용무, 낚시, 뱃놀이, 불꽃놀이 등) 전모와 장소성, 그리고 상징적 의미, 역사적인 전승과정과 위락문화 등을 복합적으로 탐색할 수 있었다.

유지(油紙) 관련 고문헌 고찰 - 조선시대 문헌을 중심으로 - (Study on the Oiled Paper in the Literature of the Joseon Dynasty)

  • 신효영;최태호;정선화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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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6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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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4-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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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유지(油紙)는 선조들이 사용했던 생활필수품으로 종이에 기름을 먹인 전통적인 가공지이다. 그러나 현재 유지(油紙)에 대한 정확한 연구가 부족한 실정이므로 유지의 문헌사적 연구를 통해 유지의 기원과 명칭, 용도, 제작기법에 대하여 조사하였다. 고문헌으로 확인된 유지의 기원은 "고려도경(高麗圖經)", "고려사(高麗史)"의 내용을 통해 고려시대로 추정하였으나,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타난 기름과 종이의 기록으로 보아 7세기경부터 유지제작이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조선시대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일성록(日省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기록을 통해 유지의 명칭과 사용법에 대해 조사하였으며, 의궤류와 "탁지준절(度支準折)" 등 기타 여러 분야의 고문헌 내용을 바탕으로 절가와 용도, 제작재료에 대하여 조사하였다. 조선시대의 문헌 조사결과 유지는 방수, 방습, 투명성 등의 특성으로 인해 각종 생활 용품으로 사용되었으며, 그 용도와 제작과정에 따라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본 연구를 통하여 조선시대 유지 관련 문헌조사가 이루어졌으나 전통 유지 복원에 관한 연구는 아직도 부족한 상태이다. 그러므로 현재 남아 있는 유지 유물조사연구와 전통 유지 샘플 제작 실험, 또한 유지를 제작하고 있는 장인들에 대한 사례 조사가 병행되어 전통 유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역사 문헌을 통한 극한홍수 데이터베이스 구축 (Development of Extreme Flood Database through Historical Records)

  • 조한범;김현준;노성진;장철희
    • 한국수자원학회:학술대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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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수자원학회 2007년도 학술발표회 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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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4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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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자연재해의 크기나 규모는 예년에 비해 크게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이상기후에 대해 합리적인 대응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제한된 계측기록으로 인한 데이터 확보가 어려운 상황이다. 따라서 현재의 재해 데이터를 과거 역사 기록으로부터 확장하여 획득하고자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조선의 홍수기록을 찾아 조사하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이를 분석하여 이를 극치수문 연구에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도록 조선왕조실록과 증보문헌비고의 홍수기록 자료를 획득하고 이를 정리, 분석 하였다. 조선왕조실에 기록된 479건의 기록과 증보문헌비고의 143건의 홍수기록을 통계적으로 분석하여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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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실 가례의 부용향(芙蓉香) 연구 - 『순조순원왕후가례도감의궤』를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Use of Buyonghyang During the Joseon Royal Wedding Ceremony - Focused on Sunjo Sunwonwanghoo Garyedogam Uigwe -)

  • 하수민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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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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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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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본 연구는 문헌을 통해 조선왕실의 부용향을 "순조순원왕후가례도감의궤"의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본 것이다. 한국에서 향은 삼국시대부터 불교문화와 함께 전래되었다. 부용향은 조선시대 왕실을 상징하던 향이며 왕실의 각종 의례에 사용되었다. 민가에서도 혼인할 때 신부의 가마 앞에서 부용향을 태우기도 했다. 부용향은 의례, 방향, 방충, 의료의 목적으로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부용향은 침속향과 백단향을 주 향재로 하여 모향, 백급, 영릉향, 감송향, 팔각향, 삼내자, 정향, 소뇌, 비초 등 10가지 향재를 혼합해 만든 합향이다. "탁지준절"과 "세종실록지리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통해 향재의 수급 방법을 추적했다. 각 향재의 특성을 파악하고 "제중신편", "동의보감" 등의 의서를 통해 제조법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의 기록을 통해 부용향을 제작한 향장의 협업과 처우를 살펴보았다. 가례에서 부용향이 사용된 사례를 통해 조선시대에 향이 갖던 의의를 알아보았다. 가례는 이전의 가례도감의궤에 비하여 그 체제가 잘 정비된 것으로 평가받는 "순조순원왕후가례도감의궤"를 참고했다. 궁에서는 의례를 진행하는 동안 항상 향을 사용했다. 반면 신부의 집에서 진행된 경우 오로지 비수책의에서만 향로 차비 등의 향과 관련된 차비가 동원되어 이 시기에만 향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책봉 후에야 비로소 향을 사용하게 됨을 통해 부용향은 왕실 사람만이 사용했으며 왕실을 상징하는 향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열화된 밀랍지 시제품의 습식크리닝 처리효과 분석 (Effect of Wet Cleaning on the Property of Aged Duplicated Beeswax-Treated Paper)

  • 최경화;박지희
    • 펄프종이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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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2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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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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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The beeswax-treated volumes of the Annals of Joseon Dynasty, designated as a UNESCO's Memories of the World, have been more seriously damaged than the untreated ones. As a continuous effort to develop the optimal conservation techniques for the damaged beeswax-treated volumes of the Annals, this study examines the effectiveness of wet cleaning on the conservation of the beeswax-treated paper. To do this, wet cleaning is performed on the duplicated beeswax-treated paper and the Hanji that are aged at $105^{\circ}C$ for 30 days using distilled water of $24^{\circ}C$ and $50^{\circ}C$. As results, it is observed that pH of the both the beeswax-treated paper and the Hanji increase, indicating the removal of the acid of the aged paper samples through wet cleaning. After the wet cleaning, however, the physical properties and viscosity of the Hanji decrease, while those of the beeswax-treated paper increase. It is also found that wet cleaning contributes to enhancement of most optical properties of the Hanji, but not for those of the beeswax-treated paper except for the $b^*$ value. Analyses of UV absorbance of cleaning water demonstrate that both the beeswax-treated paper and the Hanji have typical spectra of chromophore compounds of cellulose.

한국 기록관리의 사적 고찰과 그 특징 (Historical Observation and the Characteristics of the Records and Archives Management in Korea)

  • 이영학
    • 기록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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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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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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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이 글은 조선시기부터 현재까지 한국 기록관리를 역사적으로 고찰하면서 그 특징을 소개한 것이다. 조선시기에 기록관리 제도가 구축되게 된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고 1894년 갑오정권에서 근대적 기록관리 제도가 성립하였으며,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미국의 행정학과 기록관리 방식을 수용하면서 새로운 기록관리제도가 정립되게 된 과정을 소개하였다. 끝으로 1999년 이후 "공공기관의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후 현대 기록관리제도가 확립되게 된 과정을 설명하였다. 조선시기에 기록을 잘 관리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관료제를 기반으로 한 조직사회이어서 기록을 잘 관리하는 것이 중요했다. 둘째 조선왕조의 성립과정에서 왕권과 신권이 대립하였는데, 그 대립과정의 타협물로서 "조선왕조실록" 등 기록이 남게 되었다. 셋째 현재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비슷한 일을 치룰 때에 참조하도록 하였다. 넷째 당대의 역사적 사건을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후세에 역사적 평가를 받고자 하였다. 그런 측면에서 조선왕조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기록을 많이 남겼다. 1894년 갑오정권은 권력을 장악하자 군국기무처를 설치하면서 개혁정책을 실시해갔다. 그것은 기록관리 부문에서도 나타났다. "명령반포식"을 공포하면서 법령의 제정과정을 규정하였고, 공문서 형식을 변화시켰다. 공문서 형식에서는 중국의 연호 대신에 '개국기년'을 사용하였으며, 사용 문자를 한자로부터 한글 혹은 국한문 혼용으로 바꾸었으며, 공문서 양식을 인쇄하여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정권의 독자성 및 자립성을 드러내도록 하였다. 1910년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을 식민지로 병탄하면서 조선의 기록관리 전통은 단절되고, 일제는 식민통치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기록관리제도를 구축하였다. 1945년 한국은 일본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되고,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였다. 1950년대에 한국 정부는 일제의 기록관리제도를 그대로 원용하였다가, 1950년대 후반 이후 미국의 행정학과 기록관리 방식을 수용하면서 새로운 문서관리방식을 구축하게 되었다. 그러나 관료들의 기록관리에 대한 인식은 희박하였으며, 대통령기록 등 중요한 역사기록은 많이 파기되거나 유실되는 등 기록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한국에서 기록관리가 제대로 행해진 것은 1999년 이후였다. 1999년에 "공공기관의 기록물관리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기록관리에 대한 인식이 강화되었고, 2005년 "국가기록관리혁신 로드맵"이 작성되고 추진되면서 한국의 기록관리제도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2005년 이후 기록관리 프로세스와 시스템의 정비, 기록관리 표준의 제정, 법과 제도의 정비, 기록물관리 전문요원의 배치 등이 이루어지면서 한국의 기록관리는 한 단계 진전되게 되었다.

실록에 나타나는 15세기 태평관·모화관 건축과 관련 인물연구 (A Study on the Taepyeonggwan, Mohwagwan and the Architects Contrived these Architectures as Shown in The annals of the J oseon Dynasty of 15C)

  • 김버들;조정식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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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5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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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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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This study is based on the 15th century's architecture Mohwagwan and Taepyeonggwan and the architects behind it. The results were as follows: First, inline with Ming dynasty's protocol, the King of Joseon marched with honor guard in front of his people. Therefore, the Joseon dynasty needed to match space was implemented and result in Mohwagwan and Taepyeonggwan. Second, King Taejong founded Mohwaru to share the role with Taepyeonggwan. He appropriately utilized Mohwaru as a place in manners before people enter the Seoul city wall. And He organized this architecture on the level of the palace. Third, Pak Jacheong was overseer the whole constructive process, from the selection of site, landscaping, construction, maintenance to civil engineering of Mohwaru. There are many difficulties, but he completed through the construction work owing to the protection of King Taejong. Forth, Hong Li worked with Pak Jacheong to build Taepyeonggwan and Mohwagwan from Taejong to Sejong. Supervisors in King Sejong times were required not only private capability but also understanding the Confucianism ritual. Hong Li was faithfully performed the role. Fifth, Sejong was recognized only an excellent ruler but he was also a great coordinator with a professional knowledge about architecture. These Sejong's action fully can be seen as an architect.

열화율이 상이한 밀랍지의 초임계유체추출 탈랍처리효과 비교분석 (Comparisons of Effectiveness of the Supercritical Fluid Extraction Dewaxing on the Beeswax-Treated Paper with Different Aging Degrees)

  • 정혜영;강영석;고인희;양은정;최경화
    • 펄프종이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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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6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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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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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This study aims to investigate the applicability of supercritical fluid extraction as a dewaxing technique to restore the beeswax-treated volume of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in various deterioration and damage conditions. Thus, this study analyzed the dewaxing efficiency and changes in physical and morphological properties before and after dewaxing, by applying the optimal supercritical fluid extraction dewaxing condition ($70^{\circ}C$, 40 MPa, $CO_2$, Co-solvent 20% DCM, 2 hour) to 3 kinds of beeswax-treated paper with different deterioration rates (dry artificial aging of 10, 20 and 30 days at $120^{\circ}C$). After dry artificial aging at $120^{\circ}C$ for 30 days, the average molecular weight of the beeswax-treated specimen was $1.856{\times}10^5g/mol$, showing deterioration about 80% of the beeswax-treated paper before dewaxing. It was a similar level to the molecular weight of the bees-waxed volume of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that has a higher degree of damage. As a result of analyzing the dewaxing efficiency through FT-IR analysis, this study discovered that it was possible to effectively dewax beeswax-treated paper in the range of deterioration 20 to 80% with this supercritical fluid extraction dewaxing technique applied. As a result of analyzing changes in the physical and morphological properties before and after dewaxing, the viscosity tended to decrease to a slight degree, and since no morphological deformation or damage of stencil fibers was found, it was concluded possible to conduct stable dewaxing through this supercritical fluid extraction technique.

조선 최초의 가삼 재배지에 대하여 (The first region of ginseng cultivation in the Joseon dynasty)

  • 고승태
    • 인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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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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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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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인삼은 예로부터 연명(延命)의 약물로 분류된 상약(上藥)의 하나로 자리를 잡고 지닌 약성에 따라 만병통치약으로 사용되었으며, 특수계급만을 대상으로 하였던 인삼 수요가 다른 계층으로 확대되면서 그 수요가 급증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무분별한 채취로 멸절(滅絶)되어 채취하기가 어렵게 되어 자연산 인삼으로는 공급의 한계에 이르게 되자, 인삼 공급 방법은 힘든 자연산 인삼의 채취보다는 가성비 높은 가삼 재배 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인삼종주국인 우리나라의 가삼 재배 시기에 관해서는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으나, 첫 재배지에 관한 연구는 아직 보고되지 않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가삼 재배 관련 자료의 정리를 통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가삼 재배지에 관한 정리와 고찰을 하였으며, 여기에 인용된 사료는 조선왕조실록, 임원십육지, 오주연문장전산고, 중경지, 증보문헌비고, 인삼사 등이다. 정리와 고찰의 결과, 조선 시대 최초의 가삼 재배지는 영남지역으로 특히, 풍기면(현재의 경북 영주시 풍기읍)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