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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고 제도에 대한 몇 가지 쟁점: 기원과 운영, 기능.제도의 변천을 중심으로 (A Study on the Shinmoongo System: Issues of the Origin and Changes of Function and Institution)

  • 김영주
    • 한국언론정보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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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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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50-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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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이 논문의 목적은 조선시대 '청원 상소 고발의 최후 수단'으로 알려진 신문고 제도의 기원, 기능과 운영의 변천, 그리고 대체기능을 수행했던 격쟁 제도의 배경과 그 부침에 대해 몇 가지 쟁점 중심으로 살펴보는 데 있다. 조선시대 군주와 신하들은 신문고 제도의 기원을 이론적 차원에서 하은주 삼대(三代)에 설치되었다는 '감간지고(敢諫之鼓)'로 보았지만, 실천적 차원에서 주자(朱子)가 활동했던 송나라의 태조가 설치하였다는 등문고(登聞鼓)라고 인식하였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은 후한 때 이미 '간고'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위진남북조 시대의 진조(晉朝)부터 시작하여 당 송을 거쳐 명 청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등문고'를 설치 운영한 것이다. 신문고 제도는 태종 때 개인적 상소사건 사회적 청원사건 국가적 고발사건 등을 다양하게 상달하는 '언론제도'였지만, 세종 2년부터 개인적 원억문제를 주로 해결하는 '사법제도'로 전락하였다. 원래의 설치 목적은 '억울한 일이 있으나 고할 데 없는 일반백성'들에게 그들의 하정을 상달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건국 초기 무질서한 가전상언(駕前上言)이나 월소직정의 폐단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 활용되었다. 일부 사대부 계급들의 사적 이익을 도모하는 도구로 악용되기도 하고 관찰사나 수령의 권력남용을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던 신문고 제도는, 수도의 궁궐에 위치하고 여러 단계마다 각각 글로 올려야 되며, 위법 격고자에 대한 처벌도 과중하고 신분제 아래에서 상관에 관계되면 신문고 사용이 통제되는 까닭에 일반 백성들이나 천민들이 이용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신문고 제도의 폐지 후 탄생한 격쟁 제도는 중국에 없는 우리나라 고유한 언로양식으로, 세조 14년에 '불법 관리에 대한 고소'가 허용되자 관사의 노복들이 내부 고발자가 되어 고소활동의 한 방편으로 마련되었다. 격쟁 제도의 설립 초기는 개인적 원억문제 해결을 위한 것이 아니었지만, 나중에 결국 신문고 제도의 대안적 장치로 그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신문고 제도는 조선시대에 발달된 합법적 언론제도뿐만 아니라 비합법적 반(半)합법적 언론제도 예컨대, 통문(通文)이나 격문(檄文), 등장(等狀), 격쟁(擊錚), 가전상언(駕前上言), 규혼, 익명서(匿名書) 등과 함께 적절하게 연동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신권을 약화시키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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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통 문양을 활용한 국가 브랜드 연구 개발 전략 - 금문(錦紋)을 중심으로 - (National brand development research strategy using traditional Korean patterns)

  • 김미혜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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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4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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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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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최근 들어 세계 각국의 컬처노믹스(Culturenomics) 현상이 국가 브랜드 구축에 있어 중요한 핵심적 가치로 작용하고 있다. 말하자면 지구촌 사람들은 저마다 고유한 미의식을 계승하여 이를 경제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문화 산업이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그 존재성을 확고히 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현재 지구촌의 환경 변화에 따른 언택트(untact) 시대에 현대인들은 인터넷상에서 온라인 마케팅을 통해 그 어느 때보다 쉽고 빠르게 품질 좋은 디자인을 선택할 수 있다. 따라서 기업은 자국의 전통미를 간직한 문화적 소산물을 현대적 조형 디자인으로 재해석하려는 이른바 '문화 브랜딩' 전략을 구축하고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확립해야만 고립된 경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는 오랜 전통이 담겨 있는 단청 문양 중 금문(錦紋) 패턴을 현대적 조형 디자인으로 재해석하였다. 즉 한국 전통 문양을 활용한 국가 브랜드의 개발 전략을 제시하려는 게 본 연구의 목적이다. 본 연구자는 그동안 전통 건축의 목 부재를 보호할 목적으로, 그리고 건축의 의장적 성격에 따라 달리 도채(塗彩)되었던 단청 문양을 현대적으로 재조명하고자 하였다. 전통 건축에 채색되는 단청 문양은 궁궐, 사찰, 유교 단청에 따라 문양과 색상을 달리한다. 그 중 금단청에 채색되는 금문(錦紋)은 부처님이 계시는 주불전(主佛殿) 공간을 장엄하기 위한 의장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금문은 과거의 존속이 아니라 현재의 전통성을 이어가는 새로운 매개체라 할 수 있다. 단청의 일부인 금문은 독창적인 구성 방식과 소재, 그리고 장식적인 기법이 뛰어나기 때문에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기에 적합하다. 또한 동일한 문양이라 할지라도 색상에 따라 시각적으로 달리 해석되는 금문에 내포되어 있는 심미성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또한 전통 문양은 탐구와 이론적 연구로서의 보전 가치도 중요하지만 이를 현대적 조형 디자인으로 재창조하여 국가 브랜드화하고, 더 나아가 자국민의 자긍심을 높일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평면 디자인 과정과 입체적인 조형 방법을 거쳐 전통 문양을 실물처럼 재현하고자 하였다. 과거에 머물러 있는 한국적 조형미가 국가 브랜드 제고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를 기대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통해 본 왕의 위락활동 유형과 변천 (A Study on the Types and Changes of the King's Amusement Activities through 『Annals of The Joseon Dynasty(朝鮮王朝實錄)』)

  • 강현민;신상섭;김현욱;마일초;한서정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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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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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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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조선왕조실록"을 중심으로 분석한 조선시대 제왕들의 위락활동과 변천에 관한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궁중 안팎 외부공간에서 행해진 왕의 위락활동은 연회형, 강무형, 유희형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연회형은 회례연, 진연(進宴), 풍정(豊呈), 진찬(進饌), 양로연, 사신연, 수연(壽宴), 곡연(曲宴) 등이었고, 강무형은 활쏘기, 격구, 사냥 등이며, 유희형은 나례(가면놀이), 처용무, 풍두희(?頭戱), 그리고 화산붕(불꽃놀이), 꽃놀이(賞花), 투호, 수박희(手搏戱), 낚시, 뱃놀이, 각투(角鬪), 상희(象戱), 잡희 등이었다. 위락 활동은 고려시대 답습기[1기, 태조~세조(예종)], 확립기[2기, 군사문화가 성리학 문화로 전환되었고 연회의 규례가 제도화, 성종~중종]. 단절기[3기, 임진왜란 등 불안한 정세 속에서 침체, 단절 초래, 성종~현종]. 중흥기[4기, 위락 문화 재정비, 수준 높은 왕실 문화의 자긍심 표출, 숙종~정조]. 그리고 쇠퇴기[5기, 세도정치로 왕권이 추락하면서 위락 활동이 급격히 퇴조, 순조~순종] 등 5단계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왕들의 사냥 관련 기사는 600건 이상 추적 되는데, 태종, 세종, 세조 등은 각 100여회 이상이었다. 사냥 대상은 호랑이, 곰, 사슴과 노루, 표범, 멧돼지, 매 등 이었고, 한양의 동북쪽 산림지역에서 주로 행해졌는데, 산수풍광이 수려하고 지리에 익숙한 풍양, 철원지역 등 북방의 정세와 안전을 살피기 위한 방안, 그리고 풍양이궁(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 장소성 등과 밀접하게 연계된다. 단오절 세시풍속으로 대중에 확산된 격구놀이는 조선 초 왕과 신하들의 최상류층 마상격구로부터, 중기이후 무과시험의 마상격구와 상류층의 보상격구로 전환되는 과정을 거쳐, 조선 후기에는 민간에 확산되어 겨울철 남성들의 집단유락문화로 전승되는 과정이 추적된다. 특히, 강무형 위락문화는 봄(활쏘기), 여름(투호), 가을(활쏘기), 겨울(격구) 등 심신수양을 겸한 4계절 행위요소로 작용되었다. 한편, 조선시대 왕과 왕비들의 연향과 같은 위락 활동은 공식적 의례의 경우 내정(內庭)에서, 비공식적 관유(觀遊)의 경우 궁궐 후원이나 별궁에서, 특수 연회의 경우 모화관과 태평관, 기로소 등 별원(別園)에서, 활쏘기의 경우 성균관 사단에서, 사냥의 경우 금표가 설치된 강무장(금원과 원유)에서, 매사냥의 경우 한강변 광나루에서, 격구의 경우 보격구 중심으로 내정이나 별궁에서 다양하게 행해졌다. 즉, 외조, 치조, 연조, 후원의 범위를 넘어서 별원과 금원, 원유 등 한양에서 최대 100리 범위 까지를 활동영역으로 설정하는 위락문화 확장성(정(庭)${\rightarrow}$원(園)${\rightarrow}$원(苑)${\rightarrow}$원유(苑?))을 추적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본 연구를 통해 수준 높은 기록문화의 추적을 통해, 역대 왕들의 위락문화를 연회형, 강무형, 유희형으로 유형화 할 수 있었고, 위락 활동(진찬, 회례연, 양로연, 대사례, 사신연 등은 물론 사냥, 활쏘기, 격구, 투호, 처용무, 낚시, 뱃놀이, 불꽃놀이 등) 전모와 장소성, 그리고 상징적 의미, 역사적인 전승과정과 위락문화 등을 복합적으로 탐색할 수 있었다.

봉수당진찬(奉壽堂進饌)의 무대와 공연 요소 분석 (Analysis of the Stage and Performance Elements for Bongsudang-jinchan Banquet in Joseon Dynasty)

  • 송혜진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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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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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13-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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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본고에서는 1795년 화성 행궁에서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열린 봉수당진찬의 의례와 악무를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 및 "정조실록", "홍재전서(弘齋全書)"등의 봉수당진찬 의례기록과 <화성능행도병>등의 도상자료, 일기체의 한글가사 작품인 이희평(李羲平)의 <화성일기(華城日記)>등의 자료를 중심으로 분석하여 무대와 공연요소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잔치의 주인공에게 충(忠)과 효(孝)의 의미를 담은 음악과 춤, 꽃과 음식, 술과 글을 예를 갖춰 올리는 궁중연향은 예악(禮樂)의 원리에 바탕을 둔 국가의례로서 조선왕조 500년 동안 고유한 음악문화를 형성해왔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막을 내리면서 '예'라는 상징적이며 총체적인 틀 안에서 상호 유기적인 관계에 놓여있던 연례의 음악과 춤들이 개별 악곡과 춤으로 해체되어 '작품화'되었고. 궁중음악과 춤의 철학이나 원리, 시공간에 대한 이해는 현저히 축소된 채, 음악과 춤의 전통은 형식과 예술적 표현 중심으로 변화해왔다. 1990년대 이후, 궁중의례 전통의 재현(再現)을 목적에 둔 연구와 행사가 추진되면서, 이와 연관된 공연예술 활동도 점차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며, 특히 봉수당진찬은 다양한 방식으로 현대무대화 하고 있다. 그러나 원전(原典)의 재현(再現) 및 복원(復原) 문제, 완성도 및 예술성에 대한 문제는 과제로 남아있으며, 지금까지는 "원행을묘정리의궤"에 수록된 의주의 외형적 재현에 관심을 두었을 뿐, 무대조건이나 공연요소에 중점을 둔 심도있는 분석은 부족하였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본 연구에서 무대구성과 공연요소 중심으로 분석해 본 결과, 조선시대 궁중연향 중에서 유일하게 '행궁'에서 개최된 봉수당진찬은 '예악의 정치'를 의례와 악무로 구현하는 궁중연향의 기본적인 면모를 보여주면서도 '군신동락(君臣同樂)'의 친화의 비중이 높은 연향이었음을 밝혔다. 내연과 외연의 성격이 섞인 봉수당진찬에서는 가림막을 최소화하여 신분의 차서(次序)와 남녀유별(男女有別)의 원리를 충족시키면서도 삼면에 둘러친 휘장 안에 외빈의 자리를 마련함으로써 술과 음식, 음악과 춤을 다 같이 공유하도록 배치되었다. 또한, 연향공간의 상징성을 내포한 차일을 백관들의 공간에 치고, 임금이 솔선하여 선찬(膳饌)과 산화(散華)를 명함으로써 군신동연(君臣同宴)의 의미와 범위를 확장시킨 점을 알 수 있었다. 이는 봉수당진찬이 '예악의 원리'가 강하게 드러나는 여느 궁중 연향에 비해 '정(情)'을 나누는 화친(和親)에 기반을 두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봉수당진찬에서는 여느 내연에서보다 임금의 역할과 비중이 높았으며, 특히 의주 외의 기록으로 전하는 여러 가지 상황 - 7작 이후에 정조가 신하들을 가까이 불러 나눈 대화, 신하들에게 음식과 꽃을 내림, 잔치를 주제로 직접 시를 짓고, 신하들에게도 이에 화답하게 한 일 등-은 의주에 따른 단선적인 연향의 진행에 변화를 주고, 연향의 의미를 확장시키는데 한 몫 하였다. 이밖에, 봉수당진찬의 주악과 정재의 구성을 분석해 본결과 연향에서 여러 인물들의 대화와 움직임이 매우 절제된 것은 여느 궁중연향과 비슷하지만, 춤과 음악을 통해 구현된 소리와 색채감은 매우 다채로웠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봉수당진찬에서는 정조 이전에 치러진 내연에 비해 다양한 종류의 정재를 상연하였고, 이 중에는 새롭게 초연된 레퍼토리도 있었으며, 또 기존의 공연을 새롭게 재구성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선유락>이나 <검무> 등, 지방 관아 및 민간의 레퍼토리를 궁중연향으로 수용한 점, 풍류방에서 즐겨 연주되기 시작한 생황을 <학무> 와 연계한 것은 전통적인 규범과 관습에 매이지 않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궁중연향의 '열린구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