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Seongho Lee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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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학(星湖學)의 개념(槪念) 정립(定立)을 위한 시론(試論) - 적용의 가능성과 쟁점의 제시를 중심으로 - (An Essay for the Concept Formulation of Sungho-Studies - Focused on the Possibility of Application and the Presentation of Issues)

  • 윤재환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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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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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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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이 글은 그간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사용해 왔던 '성호학(星湖學)'의 개념을 반성적으로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성호학(星湖學)'을 성호의 학문세계 전반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지만, 현재 사용하고 있는 '성호학(星湖學)'이라는 용어가 지칭하는 구체적인 실체가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성호학(星湖學)'이라는 용어의 개념을 규정하기 위해서는 성호의 학문세계 전반을 관류하는 특성을 찾아야 하며, 그 특성은 성호만의 독창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만 이 작업은 성호의 학문세계가 지니는 광대함과 다양함 때문에 쉽지 않다. 성호 학문세계의 광대함과 다양함에서 오는 '성호학(星湖學)' 개념 규정의 어려움은 '성호학(星湖學)'의 개념을 성호 학문세계의 내용이 아니라 성호가 그 자신의 학문세계를 만들어 나간 학문의 방법에서 찾게 만든다. 성호의 학문 태도와 방법은 '회의(懷疑)와 자득(自得)'으로 규정할 수 있는데, '회의(懷疑)와 자득(自得)'을 근거로 '성호학(星湖學)'을 개념화 한다면 '성호학(星湖學)'은 "회의(懷疑)와 자득(自得)의 학문 태도와 방법을 통해 이룩된 성호의 학문세계 전반으로, 그 자신의 현실적 처지에 기반하여 대상에 대해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인식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이 개념이 성호나 성호의 문하 제자들이 이룩했던 학문세계에 대해 일정한 기준에 따른 통합적이고 체계적인 해명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는 하지만, 이 개념 역시 다양성 한계를 지닌다. 따라서 이 글에서 제시한 내용은 '성호학(星湖學)'의 명확한 개념이 아니라 명확한 개념을 정립(定立)하기 위한 시론(試論)의 하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근기남인(近畿南人)으로서의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역학사상(易學思想) - 「시괘고(蓍卦攷)」를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I-Ching of Lee Ik(李瀷) as a Member of South Faction near Seoul - Centering around "Shiguakao(「蓍卦攷」))

  • 서근식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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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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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1-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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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학문은 포괄적이면서도 회의(懷疑)를 통한 자득(自得)을 중시한다. 그의 학문태도는 성호학파(星湖學派) 가운데에서도 모범적이었으며, 그의 제자들은 그를 본받기 위해 노력하였다. 성호학(星湖學)의 위대성은 그의 직후 바로 성호학파(星湖學派)가 성립됨으로써 드러났다. 성호(星湖)는 "주역(周易)"의 육화(六?)이 내괘(內卦)와 외괘(外卦)로 나뉘어 서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소옹(邵雍)의 방법과 같이 일화(一?)에서 육화(六?)까지가 연결된 것이 아니라 내괘(內卦) 삼화(三?)과 외괘(外卦) 삼화(三?)이 독립된 것임을 밝힌 것이다. 성호(星湖)는 서법(筮法)과 변효(變爻)에 있어서도 주자(朱子)의 서법(筮法)이나 "역학계몽(易學啓蒙)" "고변점(考變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이 많다. 서법(筮法)에서는 주자(朱子)의 "서의(筮儀)"와는 다른 서법(筮法)을 제시함으로써 후에 다산(茶山)이 새로운 서법(筮法)인 '시괘법(蓍卦法)'을 제시하는데 일조한다. 성호(星湖)의 역학(易學)은 획기적으로 다름을 주장한 것은 아니다. 회의(懷疑)를 통한 자득(自得)이라는 그의 목표아래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시괘고(蓍卦攷)" 역시 마찬가지이다. 성호(星湖)의 역학(易學)은 후대에 다산(茶山)의 역학(易學)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하겠다.

여모의 구성적 특징과 유래 (A Study on the Origin and Clothing Composition of the Yemou)

  • 장인우
    • 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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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3권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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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4-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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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This study examined the Yemou(a hat for a dead woman) from the ladies' clothes excavated from the Lady Lee's tomb in order to trace the significance of the clothing composition and its social origin in the Chosun dynasty. The compositional characteristic of Yemou covers the body of the hat which is not connected with the cover, Wonsal which has a round shape that covers the face of the dead body, and two Gae(a ribbon on the backside of a hat). Seongho Lee-ik(one of representative Confucian scholars in the Chosun dynasty) stated in his book entitled "Seongho Notes", that the structural elements of Yemou originated in Yum(wrapping cloth for the head of a dead body). According to Seongho, Yemou's body part came from the scarf used to cover the head. Wonsal(the cloth of round shape for covering the face) and Gae were derived from Yum made of two ends of long cloth for covering and binding the head of a dead body. Yongjae Kim-kunhang(one of Confucian scholars in the late-Chosun dynasty) demonstrated in his "Yongjae Collection" the social background of the emergence of Yemou. Yemou was the hat produced from the process of nationalizing the Chinese courtesy of clothing. In other words, Bokgun(a man's hat) in the Chosun dynasty replaced the Chinese Yum. Unlike the Chinese custom, man and woman in the Chosun dynasty wore different clothes respectively. According to the clothing custom of the Chosun dynasty a woman wore a female hat, Yemou instead of men's Bokgun.

18세기 상(喪)·제례(祭禮) 실천과 종통(宗統)의 이상 -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승중(承重)·입후(立後) 논의를 중심으로 - (The Practice of Funerary and Ancestor Memorial Service and the Theory of Jongbeob in the Eighteenth Century: Focusing on Seongho Lee Ik (星湖 李瀷)'s Discussion on Seungjung (承重) and Yiphu (立後))

  • 김남이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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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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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87-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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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이 논문은 18세기에 예학을 대표하는 인물인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예설 중 상제례(喪祭禮)와 관련하여 입후(立後)와 승중(承重), 곧 한 가문/국가의 후사를 세우고 종통(宗統)을 계승하는 문제를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성호 이익은 종통의 문제에서는 국가와 개인, 황실과 대부, 서인에게 모두 동일하게 적용해야 할 대일통(大一統)의 원리가 있다고 보았다. 성호는 이러한 대일통의 논리를 세우기 위해 각 계층마다 신분과 현실적 여건에 맞는 예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서인가례(庶人家禮)'의 이념과 실천을 내세웠다. 각 계층이 신분에 맞게 예를 실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회의 기초 질서를 세우고 사회를 통합하는 길이라 여겼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해할 수 있다. 다음의 논제로 승중, 입후와 관련해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가장의 부재'를 선고하는 시점, 그리고 이와 맞물려 누군가 그 가장의 부재를 대신하는 방식에 관한 문제였다. 성호는 왕실이든 가문 내에서든 '종통을 잇는다는 것'과 '아버지의 후사가 되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보았다. 성호는 기본적으로 종통의 문제를 왕실과 대부, 사서인 등 계층에 따른 별개의 문제로 구분지어 생각하지 않았다. 왕실과 대부, 그리고 사서인에게서 후사의 문제는 현실적으로 그 양상이 다를 수도 있지만, 성호 이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할 수 없는 부자(父子)의 윤리'가 관통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는 그가 대일통(大一統)의 종통(宗統)의 논리를 세우는 한편, 이를 계층별 예의 실천을 통해 사회의 기본 구조를 확립해야 한다는 뜻에서 '서인가례'의 정신을 주장했던 예 정신 및 실천의 맥락 위에 서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