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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살기의 논리 -삼국유사의 "피은"과 16세기 강호시조 - (The Logic of Seclusion)

  • 신영명
    • 한국시조학회지:시조학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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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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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5-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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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 이 글은 삼국유사 $\lceil$피은$\rfloor$ 편의 연회 이야기와 16세기 강호시조에 있어서 숨어사는 삶의 논리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를 비교적으로 검토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 검토의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첫째, 삼국유사 $\lceil$피은$\rfloor$ 편의 연회 이야기에는 숨어사는 삶의 진정한 의미는 보살도 정신을 구현하는 데 있다는 변증법적 논리가 나타난다. 문수보살이나 변재천녀로부터 연회가 배운 것은, 세속을 떠나 자연에 숨음으로써 완성하고자 한 보현관행이 오히려 세속으로 다시 돌아옴으로써 완성된다는 역설적인 사실이다 둘째, 강호시조에는 사대부의 삶의 양식을 보여주는 출처관이 나타난다. 출은 정치현실로의 나아가기를, 처는 강호자연으로의 물러서기를 각각 가리킨다. 강호시조는 이 출처의 갈등을 자연을 매개로 한 심성수양을 통해 해소하고자 한다. 그러나 작가에 따라 그 갈등을 해소하는 정도의 차이는 약간의 편차를 갖는다. 셋째, 숨어살기의 전개에 있어서 연회 이야기는 변증법적 특성을 지니는 반면, 강호시조는 평면 분할적인 성격을 지닌다. 전자가 찰나적인 깨달음을 통해 삶의 방향을 설정하고 있다면, 후자는 과정상의 실천적인 노력을 통해 조화로운 삶을 실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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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신화의 복식사적 의의 (I) (A Costume historic study of TANGUN Mythology (I))

  • 김종진
    • 대한가정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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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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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9-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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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4
  • This study analyzed a costume historic meaning of TANGUN Mythology. TANGUN Mythology have been transmitted from many literatures but TANGUN Mythology recorded Samgukyusa(II-Yun) is not false piece or a fiction. A Costume historic meaning of TANGUN Mythology was studied in the clothing system meaning of a headgear worn by nobles in court in the Chun-Boo-In three and meaning of bear and tiger. However results are not clear. In addition the Han stones of Wu Liang Tz'u relates to TANGUN Mythology but results also are not manif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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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를 통해 본 분황사(芬皇寺)의 중대신라 불교미술 (Mid-Silla Buddhist Art of Bunhwangsa Temple Seen through the Record of Samgukyusa)

  • 최성은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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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7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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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6-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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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본고에서는 선덕여왕대에 창건되어 신라 왕실불교의 중심사찰이었던 분황사에 봉안되었던 중대신라기 불교조각과 벽화의 성격을 "삼국유사"의 기록을 바탕으로 유추해 보았다. "삼국유사"에는 분황사 관련하여 원효의 소조초상조각, 좌전 북벽의 천수대비상 벽화, 금동약사여래상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 가운데 아들인 설총을 향해 얼굴을 돌렸다고 전하는 원효의 '고상(顧像)'은 설총이 만들었다는 초상조각으로 중국 남북조시대 이래 유행했던 유마거사상의 이미지를 모델로 하여 조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기본적으로 문수보살을 향해 고개를 옆으로 돌린 자세로 앉은 초당기 유마거사상의 모습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나아가 석굴암 감실 유마거사상에서 보이는 이미지와 유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분황사 좌전 북벽에 그려져 있던 천수대비상은 솔거(率去)의 작품으로 생각되고 있는데, 경덕왕대에 한기리에 사는 여인 희명의 눈먼 아이의 눈을 뜨게 했다는 영험함이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들이 불렀다는 "도천수대비가"의 내용을 보면, 이 그림 속의 천수대비상은 눈이 그려져 있는 손을 천 개 가지고 있는 천수천안관음보살상이었다. 이 분황사 천수관음상을 '천수대비'로 불렀던 점에서 볼 때, 이 상은 당초(唐初)에 가범달마(伽梵達摩)가 번역한 "천수경"의 경궤에 따른 것으로 생각되며, 마찬가지로 '천수대비'로 불렸던 중생사와 백률사의 천수관음상 역시 같은 경궤에 의거한 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경덕왕대에 조성된 분황사 약사여래상의 주조에는 30만 6700근의 동(銅)이 사용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많은 동이 사용된 것은 약사여래상 뿐 아니라 "약사경"에 언급된 약사여래의 권속 및 상징물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동본이역(同本異譯)의 여러 "약사경"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약사신앙의 행법(行法)에는 7구의 약사불상을 조성하고 등명대를 설치하여 등(燈)을 밝히는 내용이 보인다. 또한 수대(隋代) 이래 나타났던 <약사여래변상>에 등장하는 약사여래의 협시(脇侍)로서는 일광 월광보살을 비롯해서 8대보살, 십이신장이 배치될 수 있다. 나라(奈良)시대에 창건된 신야쿠시지(新藥師寺)에는 7불 약사상과 그 권속의 여러 상들이 조성되었는데, 거의 비슷한 시기에 신라에서 이루어진 분황사의 불사(佛事)에서도 본존 약사불상 외에 관련된 여러 도상이 함께 조형화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환웅(桓雄)과 염제신농(炎帝神農)과 기록학적 비교고찰 (A Philological Comparative Study on HwanWoong of Samgukyusa and YanDi-ShenNong)

  • 윤순
    • 한국기록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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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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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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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
  • "삼국유사(三國遺事)", 권일(卷一)의 "고조선(古朝鮮)"조(條)를 신화와 역사기록 두 부분으로 나누어, 먼저 단군신화(檀君神話) 속의 환웅(桓雄)과 중국의 염제신농(炎帝神農)의 신격(神格)을 비교 고찰하였는데, 그들은 매우 유사한 신격을 가지고 있었다, 즉 인류의 생활과 농업에 필수적인 태양신(太陽神), 농경을 가르친 농업신(農業神), 그리고 약초(藥草)의 성질을 밝혀내어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했던 의약신(醫藥神) 신격과, 문물을 발명하고 문화를 창시했던 문화영웅(文化英雄)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신화시대에서 역사시대로 발전해 가는 단계상에서 신(神)들이 담담했던 역할은 창세(創世) ${\rightarrow}$ 교화(敎化) ${\rightarrow}$ 통치(統治) 과정으로 변천해 가는데, 환웅과 염제신농은 모두 교화(敎化)의 단계에 있었고, 교화의 내용은 모두 그들의 신격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환웅신화와 염제신농신화는 고대 한국과 중국의 정신문화 발전과 물질문명 발달과정 중 같은 단계에서 발생한 신화인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역사기록 부분을 통하여 "위서(魏書)"의 본질과 단군 환웅의 시대를 고찰하였다. "위서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었다"라는 기록은 "위서"의 저술 시점(時點)을 밝히는 것이고 '위(魏)'는 위(魏)는 (위(衛))만조선(滿朝鮮)을 가리키는 것이다. 위만조선으로부터 2천여 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본문기록의 "당요동시(唐堯同時)"설(說)과 매우 근접한다. 그러므로 "위서"는 중국의 사서(史書)가 아니라 위만조선의 역사서일 가능성이이 크다. 본문의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와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는 단군 건국년대를 밝히는 중요한 기록이다. 기자동래(箕子東來)는 은주교체(殷周交替) 때(B.C 1122년)로, 단군이 이때까지 1500년 간 나라를 통치하였으므로 고조선 건국년대는 B.C 2622년이다. 이는 요(堯)임금보다 훨씬 이전인 왕제(黃帝)(B.C 2698-2358) 시대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단군의 부신(父神)인 환웅의 사대는 아무리 늦어도 B.C 3000년 전후일 것인 바, 이는 염제신농(B.C 3218-2699) 시대에 해당되므로 환웅과 염제신농이 교화활동을 한 것도 동시대였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이 "삼국유사 고조선"편은 우리민족의 상고시대(上古時代) 역사를 규명해주는 기록학적으로 의의가 깊은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신라가 대백제전시(서기 660년) 투입하였던 부대수, 병력수, 부대편제, 전투대형 (The com.mit.ted unit, the strength, The Organization, and The battle formation of the Silla Force During the Silla-Baekche War at 660 A.D)

  • 윤일영
    • 안보군사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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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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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93-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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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In order to restore the Hwangsanbeol Combat at present, it is necessary to make a close examination on the name of the military cops, the number of units, and the numerical strength, an unit organization, and a combat formation. Based on Samguksagi, Samgukyusa, other historical documents and military history information, I tried to restore the Hwansanbeol Combat as follow. The Shilla, at the 7 year of Mooyeol Dynasty, AD. 660, maintained 35 military units. The Shilla committed18 military units from among 35 units to battle against Baekje at the 7 Year of Mooyeol Danasty. The names ofmilitary units are as follow: 1) Daedang, 2) Sangjoojeong, 3) Hajoojeong, 4) Seodang, 5) Nangdang, 6) Eumlihwajeong, 7) Samryanghwajeong, 8) Sosarnjeong, 9) Namcheonjeong, 10) Leehwahaejeong, 11) Kaegeumdang, 12) Geupdang, 13) Nodang, 14) Woonjaednag, 15) Chungdang, 16) Suktoodang, 17) Gwidang, and 18) Soogun. The numerical strength, which the Shilla maintained at the year of A.D. 660, was total 106,353 persons from 35 military units. Shilla committed 57,433 military personnel to combats against the Great Baekche. Ground Forces from the 57,433 personnel were 58,343 persons, and the naval forces were 9,100 persons. Finally, 2,602 persons from among the 9,100 naval forces were only combating forces, and non-combat forces were 6498 pers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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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alysis of Korean Historical Records of Comet Halley

  • 이기원
    • 천문학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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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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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2.1-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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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In this paper, we analyzed Korean historical records of the periodic comet Halley in three periods (Three Kingdoms, the Goryeo dynasty, and the Joseon dynasty) using various sources such as Samguksagi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Goryeosa (History of the Goryeo Dynasty), and Joseonwangjosillok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To determine the apparition time of the comet at each return, we referred to the works of Kronk. For the Three Kingdoms period, we could not find any record relevant to Halley's comet from Samguksagi. Instead, we examined the suggestion that the phenomenon two Suns appearing on April 1, 760 (in a luni-solar calendar), which is recorded in Samgukyusa (Renaissance of the Three Kingdoms), indicates an appearance of comet Halley during the daytime. In contrast, we found that all the returns of Halley's comet during the Goryeo dynasty are recorded, although some accounts are questioned. In addition, we found that the appearance of Halley's comet in 1145 is also mentioned in a spirit-path stele made in 1178. For the Joseon dynasty period, we found that all the returns of the comet are recorded, as with the Goryeo dynasty, except for the return of 1910, in which the former dynasty fell. In conclusion, we think that this study will be helpful for understanding Korean historical accounts of Halley's com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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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기이편 '수로부인'조에 근거한 헌화가(獻花歌)와 해가(海歌) 배경지 추정에 관한 연구 (The Estimation on the Background Place of Heonhwa-ga(獻花歌) and Hae-ga(海歌) Based on the Suro-buin(水路夫人) Item, Giyi(紀異) part in Samgukyusa(三國遺事))

  • 전영권
    • 한국지역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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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0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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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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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삼국유사" '수로부인'에 나오는 '헌화가'의 배경 설화를 토대로 헌화가와 해가의 배경지를 다양한 관점에서 추정해보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1) 헌화가 배경지는 경북 영덕군 남정면 부경리 지경천 골곡포(骨谷浦) 부근 암석단애지 일대로 판단된다. 2) 해가 배경지(임해정 옛터)는 헌화가 배경지인 골곡포에서 이틀거리(약 60km)에 위치하는 울진의 월송정 일대로 판 단된다. 3) 일부 지자체에서 주장하는 헌화가 배경지와 해가 배경지는 지자체들의 장소 마케팅(place marketing) 차원에서 설정된 경향이 강해 설득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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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ical Records on Halley's Comet Revisited

  • Lee, Ki-Won;Mihn, Byeong-Hee;Ahn, Young Sook
    • Journal of Astronomy and Space Sci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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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1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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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15-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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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In this paper, we report the analysis of Korean historical records on the periodic Halley's comet according to the period (i.e., the Three Kingdoms, Goryeo Dynasty, and Joseon Dynasty) using various sources such as the Samguksagi (The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Goryeosa (The History of the Goryeo Dynasty), and Joseonwangjosillok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With regards to the apparition time of the comet for each return, we referred to the works of Kronk. For the Three Kingdoms period, we could not find any record relevant to Halley's comet from the Samguksagi. Furthermore, we examined the suggestion that the phenomenon of "two Suns" which appeared on April 1, 760 (in a luni-solar calendar), as recorded in the Samgukyusa (The Legends and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indicates an instance of the the daytime appearance of Halley's comet. In contrast with the Three Kingdoms period, we found that all returns of Halley's comet are recorded during the Goryeo Dynasty, although others have questioned some accounts. We also found that the appearance of Halley's comet in 1145 is mentioned in a spirit-path stele made in 1178. For the Joseon Dynasty period, we found that all apparitions of the comet are recorded, as with the Goryeo Dynasty, except for the return of 1910, at which time the former dynasty had fallen. In conclusion, we think that this study will be helpful for understanding Korean historical accounts on Halley's comet.

세상으로 나아가기의 문화적 의미 - 『삼국유사』 <피은>편을 중심으로 (Cultural Implications of Moving into the World - Focusing On section of 『Samkukyousa』)

  • 김경섭;김정래
    • 문화기술의 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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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8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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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33-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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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우리 문화 내부에 존재하는 수많은 콘텍스트가 옛이야기의 텍스트화에 개입한 흔적을 찾는 작업은 이야기를 새롭게 읽기 위한 실마리가 된다. 『삼국유사』의 <피은(避隱)>편에는 세상을 피하고 숨는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는데, 편찬자인 일연의 의도하에 서로 다른 성격의 이야기들이 공존하고 있다. 즉 편찬자에 의한 텍스트화가 발생한 것이다. 본 논의는 <피은>편 내의 구체적인 이야기를 세심하게 분석하여, '세상으로 나아갈 것인가' 혹은 '세상으로부터 숨을 것인가'에 대한 편찬자 일연 스님의 통찰을 읽어 내고자 한다. 이를 통해 <피은>편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숨고자 하는 인물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논의한다. 그 결과 편찬자 일연 스님의 의도 하에 표제의 의미와 정반대 서사인 연회 이야기에 존재하며, 이런 이야기를 굳이 포함시킨 일연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거나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숨기는 행위가 한 개인에게 중요한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강조하고 있다. 세상으로 나간 사람과 세상을 등진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색다른 해석을 제시하는 불교적 변증법이 발생한 것이다.

동양사상에서의 물에 대한 관점과 한강의 시원에 관한 전통인식 고찰 II - 불교사상을 중심으로 - (Consideration II of Traditional Recognition on Origin of the Han River and Oriental View Point of Water - Centering on Buddhist Idea -)

  • 염중섭
    • 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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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1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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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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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전통적으로 한강의 시원으로 인식되던 곳은 우통수(于筒水)와 금강연(金剛淵)이다. 그런데 이는 공히 문수성지(文殊聖地)인 오대산(五臺山)에 위치하고 있어 우리로 하여금 불교적인 영향의 개연성을 상정케 한다. 즉, 한강의 시원인식에는 불교적인 영향력이 작용하고 있을 수가 있는 것이다. 한강의 시원인식에 대한 불교적인 이해에 있어서 먼저 주목해 볼 수 있는 것은 '불교의 물에 대한 인식'과 '인도문화에서의 강에 대한 시원인식'이다. 이러한 검토를 통해서 우리는 한강의 시원인식에 불교적인 영향이 존재한다면, 그것이 어떠한 입각점에 의해서 존재하게 되는지에 대한 관점을 수립해 보게 된다. 이와 같은 불교와 인도문화적인 관점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필자는 한강의 시원으로 인식되는 우통수와 금강연에 대해서 보다 명확한 정리를 개진해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우통수와 금강연에 대한 관념들에 대한 불교와 인도문화적인 영향관계를 파악해 볼 수가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인도문화에 있어서 강의 시원인식과 관련해서 주목되는 것은 아뇩달지이다. 그런데 이러한 아누달지에는 8공덕수(功德水)라는 물에 의한 신성성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우통수에 "색과 맛이 보통 물보다 뛰어나고 그 무게 역시 그러하다. ${\cdots}$ 한강을 흘러도 색과 맛이 변하지 않는다"는 신성한 특징과 대비될 수 있는 질료적인 신성함이다. 또한 아뇩달지와 우통수에는 최고의 용왕(龍王)과 신용(神龍)이 산다는 용에 의한 상징성이 공존하고 있다. 이러한 두 가지 강의 시원인식에서 발견되는 구조적인 유사도는 한강의 시원인식에 있어서 불교적인 영향이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한강의 시원인식은 전통적인 문화배경에 기초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속에 불교문화가 녹아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가 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중국문화적인 관점 역시도 존재하고 있다고 하겠다. 즉, 우리의 한강에 대한 전통적인 시원인식에는 인도문화와 중국문화에 의한 다양성과 복합성이 공존하며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