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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시대(李朝時代)의 임지제도(林地制度)에 관(關)한 연구(硏究) (A Study on the Forest Land System in the YI Dynasty)

  • 이만우
    • 한국산림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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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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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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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4
  • 토지국유원칙(土地國有原則)을 표방(標榜)하고 "공사(公私) 공리(共利)"를 기본원칙(基本原則)으로 하고 있었던 고려조(高麗朝)의 시전과제도(柴田科制度)도 집권력(執權力)의 약화(弱化)로 인(因)하여 조만간(早晩間), 붕괴(崩壞)되고 말았던 것이나 임지제도(林地制度)에 있어서는 분묘설정(墳墓設定)의 자유(自由)와 개간장려(開墾奬勵)를 이용(利用)한 삼림(森林)의 광점(廣占) 및 전시과제도(田柴科制度)로 인(因)한 시지(柴地)의 수조권위양(收租權委讓)으로 유래(由來)된 사적수조권(私的洙組權)이 결부(結付)된 삼림(森林)의 사점현상등(私占現象等)이 점차(漸次) 발전(發展)하여 고려중기(高麗中期)의 국정해지기이후(國政解地期以後)에는 대부분(大部分)의 삼림(森林)이 권력층(權力層)의 사점지(私占地)로 화(化)하여 왔었다. 고려조(高麗朝)의 모든 제도(制度)를 그대로 계승(繼承)한 이조(李朝)는 건국후(建國後) 국가소용(國家所用)의 삼림확보(森林確保)를 위(爲)한 삼림수용(森林收用)의 제도확립(制度確立)이 긴요(緊要)하였음으로 전국(全國)의 삼림(森林)을 국가권력(國家權力)에 의(依)하여 공수(公收)하고 국가(國家)와 궁실소용이외(宮室所用以外)의 모든 삼림(森林)은 사점(私占)을 금(禁)한다는 "시장사점금지(柴場私占禁止)"의 제도(制度)를 법제화(法制化)하였고 도성주변(都城周邊)의 사산(四山)을 금산(禁山)으로 함과 아울러 우량(優良)한 임상(林相)의 천연림(天然林)을 택(擇)하여 전조선용재(戰漕船用材)와 궁실용재(宮室用材)의 확보(確保)를 위(爲)한 외방금산(外方禁山)으로 정(定)하고 그 금양(禁養)을 위(爲)하여 산직(山直)을 배치(配置)하였다. 그리고 연병(練兵)과 국왕(國王)의 수렵(狩獵)을 위(爲)한 강무장(講武場)과 관용시장(官用柴場), 능원부속림(陵園附屬林)의 금벌(禁伐), 금화(禁火)를 제정(制定) 등(等) 필요(必要)에 따라 수시(隨時)로 삼림(森林)을 수용(收用)하였으나 고려조이래(高麗朝以來)로 권력층(權力層)에 의(依)하여 사점(私占)되어온 삼림(森林)을 왕권(王權)으로 모두 공수(公收)하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이조초기(李朝初期)에 있어서의 집권층(執權層)은 그 대부분(大部分)이 고려조(高麗朝)에서의 권력층(權力層)이었던것 임으로 그들은 이미 전조시대(前朝時代)로부터 많은 사점림(私占林)을 보유(保有)하고 있었던 것이고 따라서 그들이 권력(權力)을 장악(掌握)하고 있는 한(限) 사점림(私占林)을 공수(公收)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으며 그들은 오히려 권력(權力)을 이용(利用)하여 사점림(私占林)을 확대(擴大)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왕자(王子)들도 묘지(墓地)를 빙자(憑藉)하여 주(主)로 도성주변(都城周邊)의 삼림(森林)을 광점(廣占)하고 있던 터에 성종(成宗)의 대(代) 이후(以後)로는 왕자신(王自身)이 금령(禁令)을 어기면서 왕자(王子)에게 삼림(森林)을 사급(賜給)하였음으로 16세기말(世紀末)에는 원도지방(遠道地方)에 까지 왕자(王子)들의 삼림사점(森林私占)이 확대(擴大)되었고 이에 편승(便乘)한 권신(權臣)들의 삼림사점(森林私占)도 전국(全國)으로 파급(波及)하였다. 임진왜란후(壬辰倭亂後)에 시작(始作)된 왕자(王子)에 대(對)한 시장절급(柴場折給)은 삼림(森林)의 상속(相續)과 매매(賣買)를 합법화(合法化)시켰고 이로 인(因)하여 봉건제하(封建制下)에서의 사유림(私有林)을 발생(發生)시키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권신(權臣)들도 합법적(合法的)으로 삼림(森林)을 사점(私占)하게 되었고 따라서 이조시대(李朝時代) 임지제도(林地制度)의 기본(基本)이었던 시장사점금지(柴場私占禁止)의 제도(制度)는 건국초(建國初)로부터 실행(實行)된 일이 없었으며 오로지 국가(國家)의 삼림수용(森林收用)을 합법화(合法化)시키는 의제(擬制)에 불과(不過)하였던 것이다. 금산(禁山)은 그 이용(利用)과 관리제도(管理制度)의 불비(不備)로 인(因)하여 산하주민(山下住民)들의 염오(厭惡)의 대상(對象)이 되었음으로 주민(住民)들의 고의적(故意的)인 금산(禁山)의 파괴(破壞)는 처음부터 심(甚)하였고 이로 인(因)하여 국가(國家)에서는 용재림확보(用材林確保)를 위(爲)한 금산(禁山)의 증설(增設)을 거듭하였으나 관리제도(管理制度)의 개선(改善)이 수반(隨伴)되지 않았음으로 금산(禁山)의 황폐(荒廢)는 더욱 증대(增大)되었다. 영조(英祖)는 정국(政局)을 안정(安定)시키기 위(爲)하여 경국대전이후(經國大典以後) 남발(濫發)된 교령(敎令)과 법령(法令)을 정비(整備)하여 속대전(續大典)을 편찬(編纂)하고 삼림법령(森林法令)을 정비(整備)하여 도성주변(都城周邊)의 금산(禁山)과 각도(各道) 금산(禁山)의 명칭대신(名稱代身) 서기(西紀) 1699년(年) 이후(以後) 개칭(改稱)하여온 봉산(封山)의 금양(禁養)을 강화(强化)시키는 한편 사양산(私養山)의 권한(權限)을 인정(認定)하는 등(等) 적극적(積極的)인 육림정책(育林政策)을 퍼려하였으나 계속적(繼續的)인 권력층(權力層)의 삼림사점광대(森林私占廣大)는 농민(農民)들로부터 삼림(森林)을 탈취(奪取)하였고 농민(農民)들 이 삼림(森林)을 상실(喪失)함으로써 국가(國家)의 육림장려등(育林奬勵策)은 효과(効果)를 나타내지 못하였던 것이다. 임진왜란후(壬辰倭亂後)의 국정해이(國定解弛)로 인(因)한 묘지광점(墓地廣占), 왕자(王子)에 대(對)한 삼림(森林)의 절급(折給) 권세층(權勢層)에 대(對)한 산림사점(森林私占)은 인허(認許)하는 입안문서(立案文書)의 발행등(發行等)으로 법전상(法典上)의 삼임사점금지조항(森林私占禁止條項)은 사문화(死文化)되었고 이조말기(李朝末期)에 있어서는 사양산(私養山)의 강탈(强奪)도 빈발(頻發)하고 있음을 볼수 있다. 이와 같이 이조시대(李朝時代)의 시장사점금지조항(柴場私占禁止條項)은 오로지 농민(農民)에게만 적용(適用)되는 규정(規定)에 불과(不過)하였고 이로 인(因)하여 농민(農民)들의 육림의욕(育林意慾)은 상실(喪失)되었으며 약탈적(掠奪的)인 삼림(森林)의 채취이용(採取利用)은은 금산(禁山), 봉산(封山) 및 사양산(私養山)을 막론(莫論)하고 황폐(荒廢)시키는 결과(結果)를 자아냈으며 권력층(權力層)의 삼림점탈(森林占奪)에 대항(對抗)한 송계(松契)의 활동(活動)으로 일부(一部) 공산(公山)이 농민(農民)의 입회지(入會地)로서 보존(保存)되어왔다. 그럼에도 불구(不拘)하고 일제(日帝)는 이조말기(李朝末期)의 삼림(森林) 거의 무주공산(無主公山)이 었던것처럼, 이미 사문화(死文化)된 삼림사점금지조항(森林私占禁止條項)을 활용(活用)함으로써, 국가림(國有林)으로 수탈(收奪)한후(後) 식민정책(植民政策)에 이용(利用)하였던 것이나, 실제(實際)에 있어서 이조시대(李朝時代)의 삼림(森林)은 금산(禁山), 봉산(封山), 능원부속림등(陸園附屬林等)의 관금지(官禁地)와 오지름(奧地林)을 제외(除外)하고는 대부분(大部分)의 임지(林地)가 권세층(權勢層)의 사유(私有) 내지(乃至)는 사점하(私占下)에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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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금마 황각동 유상곡수 유적 일대의 현황과 장소성에 대한 일고찰 (A Review of Current Status and Placeness on the Yusang-Goksu Ruins in Hwanggak-dong, Geumma, Iksan)

  • 노재현;한민순;서윤미;박율진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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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0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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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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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본 연구는 문헌연구와 옛지도 및 항공사진의 분석, 현장 관찰과 드론 사진 촬영과 고저측량 그리고 주민인터뷰를 통해 익산시 금마면 신용리 황각동에 소재한 '유상곡수(流觴曲水)' 암각서 유적의 입지성과 장소성을 추적하여 이곳에서의 유상곡수 수계(修禊) 등의 향유 가능성을 타진함으로써, 이곳의 장소성을 분명히 함으로써 국내 유상곡수로 정원 유적의 조명과 보존을 목적으로 시도되었다. 본 연구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유상곡수 유적이 존재하는 황각동 일대는 여러 문헌에서 익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경(佳景)으로 손꼽혀왔다. 황각동의 유래는 의정부(議政府)의 별칭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으로 판단된다. 즉 좌찬성(左贊成)을 역임한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과의 관련성에 주목하였는데 특히 그의 태생지와 인접하고 있을 뿐 아니라 별서인 태허정(太虛亭), 은거당인 퇴휴당(退休堂)과 묘소 그리고 사후 배향 서원 등이 인근에 다수 분포한 점을 그 근거로 제시하였다. 밭일 후 바위에 호미를 걸어 놓는 넓은 바위인 하서대(荷鋤臺)는 중국과 한국의 한시의 용례로 볼 때 한가로운 전원생활과 유유자적하게 살아가는 소박하고 은자적인 삶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본 유적의 핵심이 되는 '유상곡수' 바위글씨가 있는 수석바위 상부의 암혈(巖穴)은 수계를 지원하기 위한 차일공(遮日孔)으로 파악되며 인근의 일간정과 모정은 유상곡수를 지원하기 위한 공간 기능을 수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등잔바위 전면에 새겨진 '황각동(黃閣洞)'바위글씨는 황각동천(黃閣洞天)에 이르는 관문으로, 향촌에 존재하는 이상세계를 관념화한 표식으로 파악하였다. 본 연구를 통해서 '황각동'과 '하서대' 바위글씨는 대한제국 광무(光武) 5년인 1901년 3월 29일에 익산군수 오횡묵과 지인인 김인길(金寅吉)이 새긴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이봉구의 「황각동운(黃閣洞韻)」과 양곡의 후손인 소진덕의 「황각동시회(黃閣洞詩會)」란 시제로 볼 때 황각동에서 곡수연과 관련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사 모임이 최소한 일제강점기 초기까지도 행해졌음을 유추할 수 있다. 한편 현재 곡수로의 최대폭은 11.3m, 횡단구배는 15.04%로 계상되었으며 곡수로로 추정되는 수로 구간의 연장거리는 약 27.6m, 종단구배는 3.51%로 측정되었으나 현재 양안이 석축으로 처리된 점을 감안한다면 곡수로의 폭원과 연장거리는 훨씬 길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황각동 유상곡수 유적과 관련된 봄(삼월삼짇날) 모춘(暮春) 이용, 음주와 시 짓기, 시제 「황각동시회」, 유상곡수 바위글씨 그리고 인근 유상정으로 추정되는 일간정이라는 정자의 존재 등으로 볼 때 최소한 조선 말기까지 유상곡수연이 펼쳐진 공간이었음이 확인된다. 아쉽게도 '유상곡수'바위글씨에 대한 암각 주체와 조선 말기 이전의 향유자 등에 대해서는 자료 부족으로 확인하지 못함은 연구 한계로 남는다. 이는 향후 이에 대한 꾸준한 자료 발굴 노력을 통해 구명해야 할 부분이다.

주자학과 대순사상의 수양론 비교 연구 (The Comparative Research on the Theory of Self-cultivation in Neo-Confucianism and Daesoon Thought)

  • 이광주
    • 대순사상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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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4_2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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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1-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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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This thesis examined Chu Hsi's self-cultivation theory as the representative theory of cultivation in Confucianism, while juxtaposing it to self-cultivation theory in Daesoon thought, concentrating on its similarity and difference. Neo-Confucianism is a scholarship which has wielded a tremendous influence upon East Asia, while functioning as an official scholarship for long period up to Yuan, Ming, and Ching period, after achieving its synthesis by Chu Hsi. After 13th century, Neo-Confucianism has been a representative academic system in Confucianism, and self-cultivation theory was in its center. It suggested various virtues that classical scholars have to equip to fulfill the sainthood and the politics of royal road. The self-cultivation theory of Chu Hsi was developed upon the basis of the theory 'Li-Qi' and the theory of mind. Here, the practice of Geokyung(morally awakened state with a reverent spirit in every moment) and Gyeokmul-tsiji(reaching into the utmost knowledge through investigation of things) formed a nucleus of Chu Hsi's self-cultivation theory. While Geokyung was to reveal one's true nature through cultivation of mind, Gyeokmul-tsiji was to demonstrate the complete use of mind's essence and function. Chu Hsi's self-cultivation theory attempted to realize the unity of heaven and man, and through cultivating self and governing people, it also tried to achieve its ideal of the society of Great Union(Daedong). Daesoon Thought is originated from Sangjenim who has descended to this world as a human being called Jeungsan. He went on his circuit to rectify the disorder of heaven and earth for 9 years to rectify the Three worlds of heaven, earth and human being which were faced with total annihilation due to its rule of mutual conflict, while creating an earthly paradise. Respecting the will of Sangjenim, Dojunim established the foundation of Do through launching 'Meukeukdo' and setting tenet, creed and object so that the cultivators (Doins) could believe and respect the truth of Sangje's great itineration (Daesoon). Among those, the two components of creed, which are four fundamental principles and the three fundamental attitudes are of great account as precept and cardinal point. Through this means, the cultivators of Daesoonjinrihoe aspire to guard against self-deception through transforming the human spirit, to realize earthly immortality through renewing human beings, and to create an earthly paradise through transforming the world. This thesis attempted to compare and analyze the theory of self-cultivation in Neo-Confucianism and Daesoon Thought in the aspect of ground, method, and object of cultivation. First, as for the ground of cultivation, the doctrines of Chu-tzu and Daesoon thought place the essence of cultivation on 'heaven'. Yet, whereas the former postulates Taekeuk (the Great Ultimate) as a principle as well as the heaven of a natural order, Daesoon thought postulates Sangenim as the heaven of superintendence as well as the heaven of a natural order, signified as its equation of Daesoon with circle, along with the unity of Meukeuk (Endlessness) and Taegeuk (the Great Ultimate). Further, the doctrine of Chu-zhu and Daesoon thought is identical in the point that both thoughts see mind as the subject of cultivation, while trying to restore a pure essence. Nevertheless, whereas Neo-Confucianism intends to give scope to ability of the complete use of mind's essence and function, Daesoon Thought sees mind as the essence which is used by spiritual beings and as an organ that heaven, earth and human being rely upon as the center of the universe. In the aspect of method of cultivation, the doctrine of Chuzhu lays emphasis on the rational factor in that it brightens its 'myung-deoki'(bright inner virtue),' while trying to correspond to the law of heaven on the basis of 'Geokyung' and 'Gyeokmul-tsiji.' On the contrary, Daesoon thought lays much emphasis on faith factor in that it aspires for human perfection based on the restoration of conscience by cultivating Daesoonjinri with sincerity, reverence and faith along with 'quieting the heart-mind', 'quieting the body', 'respecting the God of the Ninth Heaven', and 'observing ritual practice on the basis of the faith in Sangjenim. Yet, both thoughts have similarities in that cultivation of body forms the basis and that they attempt to realize their ideals through cultivation in daily life while taking 'Guarding against self-deception' as the key method of self-cultivation.' However, the principle of Chu-zhu can be said to be a voluntary and autonomous practice based on scripture of the saint as well as self-reflection. On the other hand, Daesoon thought reveals certain difference in that it combines faith factor with one's self-effort by concentrating on cultivation under the presence of Sangjenim as the object of belief and the spirits of heaven and earth. In the aspect of object of cultivation, both thoughts share similarities in that the saint and the perfected gentleman with a moral virtue as an ideal image of men in both thoughts attempt to realize each of their 'myung-deok' in human nature as a heavenly mandate while respecting morality. Further, they also share similarity in the point that the desirable characters in both thoughts want to participate in harmonious creation and nurturance. Yet, the perfected gentleman with a moral virtue is also characterized by its aim for a new heaven and earth where there is no mutual conflict but mutual beneficence, by promoting the moral influence and virtue of Sangjenim over one's own virtue, while practising the mutual beneficence of all life through harmonious union of divine beings and human beings.

가맹본부의 리더십 행동유형과 가맹사업자의 관계결속에 관한 실증적 연구 - 가맹사업자의 자기효능감의 조절효과를 중심으로 - (An Empirical Study in Relationship between Franchisor's Leadership Behavior Style and Commitment by Focusing Moderating Effect of Franchisee's Self-efficacy)

  • 양회창;이영철
    • 한국유통학회지:유통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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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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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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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본 연구는 가맹사업자의 자기효능감에 주목하여 정부가 예비가맹사업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가맹본부에 다양한 규제와 정책을 사용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 아니라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경로-목표이론(path-goal theory)에서 제시한 가맹본부의 리더십 행동 유형과 가맹사업자의 관계결속의 영향관계에 있어서 가맹사업자의 특성으로 자기효능감의 조절효과를 규명하고, 실증 분석한 결과 다음과 같은 연구의 시사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첫째, 가맹본부의 리더십 행동유형이 관계결속에 긍정적 효과를 가져 온다는 사실이 확인됨으로써 가맹본부는 가맹사업자에게 맞는 리더십 행동유형을 적용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둘째, 가맹사업자의 자기효능감이 관계결속에 긍정적 효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리더십 행동유형과 관계결속 사이에 상당한 조절효과가 있기 때문에 가맹본부는 가맹사업자들의 개인차(individual difference) 관리가 필요하다. 셋째, 정부는 가맹본부를 규제할 것만이 아니라 가맹본부가 가맹사업자들의 특성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기업의 목표달성을 위한 정당한 통제가 가능하도록 제도적 지원을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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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주오소경과 명주(하서주) - 그 도시구조를 중심으로 - (9 Provinces and 5 Secondary Capitals, Myeong-ju(Haseo-ju) - Revolve Around Urban Structure -)

  • 야마다 타카후미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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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5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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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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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신라는 문무왕 18년(678) 당나라군이 철수함에 따라 명실공히 한반도를 통일한 뒤, 그 판도를 중국 지방행정구획 제도를 모방하여 아홉 개의 주로 구분하고, 거기에 소경 군 현을 배치한 지방행정 조직을 정비하였다. 이른바 9주5소경(九州五小京)이라 불리는 지방행정제도이다. 주는 현재의 대한민국(이하 한국)의 도(道)에 해당하며, 소경은 광역시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 수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덕왕 16년(757) 겨울 12월조에 의하면 5소경, 117군, 293현에 이른다 통일신라시대의 지방도시인 9주5소경(九州五小京)의 연구는 문헌사학 중심으로 이루어져, 주성(州城)과 소경성(小京城)의 위치와 그 도시구조에 대해서는 지금껏 크게 논의되었던 적이 없어 명확치 않은 점이 많다. 고고학적 도시구조의 복원연구는 박태우의 논고("통일신라시대의 지방도시에 대한 연구" 1987년)와 필자의 논고("新の九州五小京城郭の構造と實態について-統一新による計畵都市の復元硏究-"2009년) 정도이다. 강원도 강릉시는 원래 예(濊)의 고국(古國)으로 고구려의 하서량(河西良)이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선덕왕 8년(639)에 북소경 하서양주(北小京; 河西良州))으로 되었는데, 무열왕 5년(658)에 하서주(河西州)로 소경에서 주로 바뀌었다. 이후 경덕왕 16년(757)에는 명주로 개칭되었고 그 뒤, 고려시대 이후로도 명칭은 여러 가지로 변하였다. 박태우는 나성 흔적이 남은 도시로 분류하여 명주동에 있었던 성지로 비정하고 있는데, 현재는 시가지화로 인하여 확인할 수가 없다고 한다. 또한 관동대학교에서는 강릉시 중심부로부터 서남서 약 3km에 위치하는 명주산성을 주치(州治)로 보는 설을 제시하고 있다. 필자는 일제시대의 측량도에서 볼 수 있는 유존(遺存) 토지구획로 보아 경주시의 신라금경이나 다른 많은 도시와 같이 방격의 가구, 즉 방리(坊里)를 갖춘 도시로 복원하였다. 다음은 그 구조에 대해 서술하였다. 강릉의 시가지는 시내를 남서에서 북동으로 흐르는 남대천의 왼쪽 기슭 평탄지에 위치하고 있다. 부근에 그다지 높은 산은 없으나 시가지의 북측에는 산이 동서로 이어져 있으며, 남대천으로부터의 평지부분 너비는 최대가 1km 정도로 그다지 넓지는 않다. 현재는 강릉시의 중심부로 시가지화가 진행되어 강릉역을 중심으로 한 방사상의 구획정리 등도 이루어져 옛 토지구획이 거의 소멸된 상태이다. 그러나 일제시대의 지형도 등을 보면 시가지 중심부인 옥천동, 임당동, 금학동, 명주동 등의 일대에 한 변 약 190m를 기본으로 하는 방격의 토지구획이 북서-남동에 약 0. 8km, 북동-남서에 약 1. 7km의 범위로 잔존하고 있는 것이 확인 가능하다. 방격의 유존 토지구획은 다른 9주5소경(九州五小京)의 사례를 통해 보면 통일신라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생각된다. 단, 방격 한 변의 길이가 190m로 신라의 금경이나 다른 도시유적에서 볼 수 있는 한 변 160m나 140m의 규격과는 다르다는 점이 앞으로의 검토과제이다. 토지구획의 방위는 지형에 준하여 북서-남동 축에서 북쪽으로부터 약 $37.5^{\circ}$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이는 남대천의 방위와 북측의 산지에 제약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보여 진다. 방격의 유존 토지구획이 잔존하는 범위로부터, 최소로 보더라도 북서-남동 4방${\times}$북동-남서 7방 크기라는 장방형으로 복원하였다. 단, 방격의 유존 토지구획이 퍼지는 정도로 보아, 남서측과 북서측에 각각 1방 씩 늘어난 북서-남동 5방${\times}$북동-남서 8방(북서-남동 약 $950m{\times}$북동-남서 약 1520m)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전체의 형상은 장방형으로, 당의 장안성(長安城)이나 일본의 평성경(平城城)과 같은 중축대로(주작대로)가 상정 가능한 토지구획은 확인되지 않는다. 명주의 도시유적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는 이제껏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도시유적 추정지 내부에 위치하는 조선시대의 강릉읍성이나 관아지의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기와류, 토기류 중에는 통일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갈만한 것이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또한, 관아지에서 검출된 조선시대의 건물지는 모두 정방위가 아닌 크게 기울어진 방위를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강릉에서 볼 수 있는 방격 유존 토지구획이 예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사실을 보여주는 방증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명주성"의 명문 막새기와가 출토된 명주산성의 역할로, 이것이 주치였던 것을 필자는 부정하지 않는다. 한국의 고대도성은 평지성과 산성의 세트로 구성되어 있으며, 통일신라가 되어도 방리제 도성인 금경 주위로 명활산성, 남산산성, 서형산성의 산성군이 계속되어 유지되고 있었다. 구주오소경 이외의 다른 도시에서도 도시유적 부근에 산성이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명주도 평지의 도시와 산성이 세트가 되어 주치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